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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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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석사학위 청구논문

    몽골 근대 초기 계몽적 글쓰기 연구

    AStudyontheenlighteningwriting

    intheearlymodernperiodinMongolia

    2010년 2월

    인하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현대문학 전공)

    고 자 연

  • 문학석사학위 청구논문

    몽골 근대 초기 계몽적 글쓰기 연구

    AStudyontheenlighteningwriting

    intheearlymodernperiodinMongolia

    2010년 2월

    지도교수 김 명 인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인하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현대문학 전공)

    고 자 연

  • 이 논문을 고자연의 석사학위논문으로 인정함.

    2010년 2월

    主審 印

    副審 印

    委員 印

  • - i -

    국 문 초 록

    한국과 몽골은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근대로 들어서면

    서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고 몽골은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게 되면서

    양국 간에는 단절의 시간이 발생한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몽골이

    개방되어 한국과 몽골은 다시 수교를 맺게 된다. 이후 꾸준한 교류를 맺어오고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한 연구들 또한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연구

    들은 일부 분야 및 시기에 국한되어 있고, 특히 몽골근대문학에 대한 연구는 거

    의 전무한 상황이다. 이에 본고는 몽골근대초기문학의 양상을 몽골의 두 대표작

    가 ‘데. 나착도르지’와 ‘췌. 담딩수렝’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한편 한국근대

    초기문학과의 비교연구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몽골은 1921년 인민혁명으로 200여 년 만에 독립을 이루었으나 완전한 독립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근대국가수립이 시급했고, 이에 국가적으로 강조된 것이

    ‘계몽’이었다. 그리고 근대문학 또한 이러한 계몽의 일환으로 시도되었다. 당시

    몽골의 작가들 대부분은 근대문학을 전통양식으로부터 찾고자 했고, 이에 그들은

    ‘민담’을 선택하여 ‘민담형 단편서사’를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몽골의 ‘민담형

    단편서사’는 한국의 ‘서사적 논설’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이는 두 양

    식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상황상의 유사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근대이행기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민담형 단편서사’는 1920년대 중반부

    터 말까지 활발하게 나타나다가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민담형 단편서사가 감소하기 시작할 무렵, 소련 및 동독으로 유학을 떠났던 나

    착도르지가 귀국한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본격적인 소설 창작에 매진하는데, 당

    시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이전의 작가들과 달리 근대소설에 대해 서구의 근

    대적인 새로운 장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초기 습작들은 메모

    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분량의 것들이 많지만 근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거나 근

    대 산문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지닌다. 습작기의 작품들에서

    는 뚜렷한 서사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후 잡지 및 신문을 통한 발표를 목

    적으로 하여 계몽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계몽서

    사 작품들의 한편에서는 사적서사를 담은 미발표 작품들도 창작되는데, 이 작품

    들은 현재 나착도르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소설세계는 습작기작품

    들로부터 계몽서사작품 그리고 사적서사작품에 이르기까지 서사적으로 또는 창

    작방법상으로의 발전양상이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착도르지가 1930년대에 집중적으로 창작활동을 했던 반면, 담딩수렝은

    1929년 그의 대표작 「버림받은 딸」의 발표 이후 소설 창작에 주력하지 않다가

  • - ii -

    4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소설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1940-50년대 담딩수렝

    의 작품들은 크게 ‘군인 및 군대서사’와 ‘여성계몽서사’로 양분되는데, 이는 당시

    에 몽골이 국내외적으로 크고 작은 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성들이 전

    쟁터로 떠난 자리는 이제 여성들이 채워야 했고 그래서 국가는 여성계몽을 강조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계몽서사 작품들은 한편 한국의 신소설과 주제적 측면

    에서 유사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몽골의 근대초기 소설들은 인민 계몽을 목적으로 창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산문에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 몽골의 작가들에게도 근대문학을 배

    워가는 과정이었다.

    주제어: 몽골근대문학, 계몽서사, 데. 나착도르지, 췌. 담딩수렝, 민담형 단편서사

  • - iii -

    Abstract

    Korea and Mongolia have had lasting relations in the pre-modern era.

    However, between the late 19th and 20th centuries, when Korea was

    under Japanese rule and Mongolia adopted a socialist system, their con-

    nections broke up. In the early 1990s, two nations restarted a diplomatic

    relationship as the breakdown of communist regimes in the Eastern Europe

    led to a multi-party system, a new constitution, and the transition to a

    market economy in Mongolia, which offers you opportunities for social

    intercourse and a lot of researches.

    In Korea, although considerable studies of exist, there has been almost

    none on modern Mongolian literature. This thesis examines the whole

    appearance of early Mongolian literature in the modern era focusing on

    works of two representative writers D. Natsagdorj and Ts. Damdinsuren

    and suggests possibility of comparative studies with modern Korean

    literature.

    For Mongol, nation-building was the most pressing issue which became

    a independent country in 1921, and that is why it emphasized “en-

    lightenment” nationally. Under the circumstances that modern literature

    was regarded a kind of such enlightenment, most of Mongolian writers

    brought it of their tradition, and, as a result, they adopted some folktales

    and created folktales-styled short narratives.

    Interestingly, there are some similarities between folktales-styled short

    narratives in Mongolia and narrative editorials in Korea, which result from

    historical likeness which two countries shared. Folktales-styled short

    narratives, actively published in the late 1920s, were obviously rare in

    1930s.

    As folk-styled short narratives got less popular, D, Natsagdorj had

    studied in the Soviet Union and East Germany, came back to Mongolia

    and began writing novels. His practice pieces show you that he, unlike

    any other existing authors, recognized modern novels as a new genre

    came from the West. Although most of them were as short as memos,

    they are very significant in modern substances and a prosaic style of

    writing.

  • - iv -

    Right after some practice pieces without definite narratives, he started

    publishing several narratives of enlightenment aimed at submitting to

    magazines or newspapers. On the other hand, he also wrote personal

    narratives, which are considered as his major works now, though not

    published. His practice pieces, narratives of enlightenment, and personal

    narratives had grown in common in that aspect of narrative and creative

    way.

    Unlike Natsagdorj focused on writing in 1930s, Damdinsuren, had

    stopped writing after his major work The Deserted Daughter (1929),

    restarted publishing novels in 1940s. His pieces written between 1940s

    and 1950s are divided into two, narratives of military and those of women

    enlightenment. Since Mongolia had been in domestic and foreign wartime,

    women had to cover for men who went to battlefield and were considered

    as those who should be enlightened. In addition, his narratives of women

    enlightenment are similar to “new novel” by some Korean writers in their

    theme.

    Like this, in Mongolia, enlightening people was the main purpose of

    early modern novels. Mongolian authors, not accustomed in writing

    modern prose, were able to learn modern literature by writing them.

    Key words: modern Mongolian literature, narratives of enlightenment, D.

    Natsagdorj, Ts. Damdinsuren, folktales-styled short narratives

  • - v -

    목 차

    Ⅰ. 서론 ----------------------------------------------- 1

    1. 문제제기 ------------------------------------------- 1

    2. 연구사검토 및 연구방법 -------------------------------- 4

    Ⅱ. 몽골의 근대문학 -------------------------------------- 7

    1. 근대 이행기의 몽골 ----------------------------------- 7

    2. 몽골 근대문학 시기 개관 ------------------------------ 13

    3. 몽골의 민담형 단편서사 - 한국의 ‘서사적 논설’과의 비교 분석 ----- 21

    1) 민담형 단편서사 ------------------------------------ 22

    2) 근대 이행기 문학 ----------------------------------- 25

    Ⅲ. 근대소설에 대한 고뇌와 그 가능성 - 데. 나착더르찌 ----------- 37

    1. 전기적 고찰 ---------------------------------------- 37

    2. 데. 나착더르찌 소설의 서사 발달 과정 -------------------- 42

    1)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도약 --------------------------- 46

    2) 계몽적 글쓰기, 서사의 성장 --------------------------- 51

    Ⅳ. 사회주의 사상의 대변으로서의 소설 - 췌. 담딩수렝 ------------ 75

    1. 전기적 고찰 ---------------------------------------- 75

    2. 당의 사상을 대변하는 소설 ----------------------------- 78

    1) 근대 남성으로의 거듭남, 군인 ------------------------- 79

    2) 남성을 대체하는 여성노동자 -------------------------- 92

    Ⅴ. 결론 ---------------------------------------------- 106

    Ⅵ. 참고문헌 ------------------------------------------- 109

    * 부록 - 「버림받은 딸」 ---------------------------------- 111

  • - 1 -

    Ⅰ. 서론

    1. 문제제기

    한국과 몽골의 본격적인 교류는 13세기 원나라와의 관계를 시작으로1) 조선후

    기까지 지속된다. 이는 조선 말기까지 ‘사역원2)’에서 몽골어를 가르쳤다는 사실

    과 몽학서 몽어유해 3)의 발견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단절에 가까운 시간이 발생하는데, 이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로서 근대로 진입하는 동안 몽골은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함으로써 근대를 맞게

    된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 노선이 붕괴된 1980년대 말 몽골이 개방되자

    1990년 3월 26일 한국과 몽골은 수교를 맺음으로써 그 교류를 재개한다.

    몽골에서 한국은 매우 익숙한 나라이다. 이는 몽골을 직접 방문해보면 시내로

    들어가는 순간 느낄 수 있다. 또한 통계에 따르면 몽골 대학들 중 한국어학과나

    한국어수업이 개설되어 있는 곳은 26곳이나 된다.4)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몽골은

    1) 백옥경의 「조선전기 역관 연구」(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2000, pp.13~14)에 의하면 고려 후기

    에는 대원관계가 성립되면서 몽골어가 중요한 역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증거로 충렬왕 21년

    (1295)에 원의 李忙古大가 파견되어 통문관에서 몽골어를 가르친 사실을 들고 있다. 또한, 게.

    에르덴치멕 「몽골에서의 한국학연구」(한국학연구 제15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6)에 의

    하면 ‘체. 달라이’는 중세 몽한 교류를 몽골제국 시대(1206~1260), 원나라 시대(1260~1308)로

    구분하면서, 몽골제국 시대에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교류였던 데 반해 원나라 시대에는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고 본다.

    2) 충렬왕 2년(1276) 참문학사 김구(金坵)의 건의로 설치된 통문관은 공양왕 원년에서 3년 사이

    (1389~1391)에 사역원으로 바뀌게 된다. (백옥경, 위의 글, p.20)

    3) 몽어유해(蒙語類解) 는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 첩해몽어(捷解蒙語) 등과 함께 몽학삼서라

    는 이름으로 알려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몽학서이다. 몽어유해 가 저술된 18세기는 몽골이 만

    주(청나라)의 강한 영향력을 받고 있던 시기로 특징 지워진다. 즉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중국의

    청나라는 할하 몽골을 복속하게 되는 1691년부터 몽골에 그 영향력을 펼치기 시작한다. 더욱이

    1759년에는 몽골민족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중가르(Jungar) 몽골(오이라트(Oirat) 몽골이라고도

    부름)도 만주의 영향력에 들어오게 된다. 또한 18세기는 몽골 사회에서 라마불교가 융성하던 시

    기였다.

    몽어유해 는 일종의 몽한사전이다. 몽어유해 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저술되었는지는 정확하

    지 않지만 통문관지 에 의하면 1768년 이억성에 의하여 출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인용되는 것은 1790년에 방효언이 다시 수정한 것이다. 몽어유해 의 저술동기에 대해서는 18

    세기에 조선의 외교관리가 몽골어를 배우기 위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또한 몽어유해 는 당시 중국에서 간행되었던 청문감류의 몽골어 사전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

    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몽어유해 는 크게 상권, 하권, 그리고 보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에는 천문, 시령, 지리,

    인륜, 인품, 신체, 용모 등 27개의 내용이 들어있고, 하권에는 전농, 미곡, 채소, 과품, 질병, 상

    장, 사관 등 27개의 또 다른 내용을 볼 수 있다. 한편 보편에서는 상권과 하권에 나오는 항목

    중에서 48개의 항목에 대하여 보충적인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박환영, 몽골의 유목문화와 민

    속 읽기 , 민속원, pp.344-345)

  • - 2 -

    아직 미지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최근 매스컴에서 몽골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고 있어서 비교적 빠르게 알려지고는 있지만, 아직 일반 한국인들

    의 인식 속 몽골은 푸른 초원에 ‘게르(гэр)5)’가 있고, 칭기스칸(Чингис Хаан)의

    후예들이 전통 복장을 한 채 말을 타고 우유나 치즈만을 먹으며 사는 그런 빈곤

    한 나라인 것이다. 이렇듯 한국인들의 인식 속 몽골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또한

    몽골에서 한국어는 제2외국어로 지정된 적이 있을 만큼 보편적인 언어가 되어가

    고 있지만, 반면 한국에서 몽골어는 매우 희귀한 언어에 속한다. 몽골어학과가

    지금까지도 단 두 군데밖에 없으며6) 몽골어를 제2외국어로 지정하여 가르치는

    학교는커녕 제대로 된 사설학원조차 거의 전무한 실정인 것이다.

    한편 수교 후 한국과 몽골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오고 있으나 20여 년이 채

    되지 않은 현재까지 그 교류는 특정분야에 치우쳐 있다. 가장 활발한 교류가 진

    행되어 온 분야는 단연 ‘경제 분야’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몽골의 어려운 경제

    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시작된 몽

    골의 빈곤은 이후 전쟁과 혁명을 겪으면서 또 혁명 이후 선택한 사회주의조차

    실패하게 되면서 세계 빈곤국가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몽골이 한국

    으로부터 경제 분야의 교류를 우선적으로 기대해온 것은 당연하다.

    다음으로는 역사 및 민속 그리고 언어 분야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고

    려 시대에 물적ㆍ인적 자원의 교류로 인해 상호 종족적ㆍ문화적으로 교환되고

    정착하게 된 요소들이 있다. 또한 언어분야도 실제로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오고 있다.

    이렇게 한국과 몽골은 활발한 경제적 교류를 토대로 역사․언어․민속 분야의 학

    문적 교류가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양국의 더욱 긴밀한 교류를 위해서는

    우선, 분야적인 측면에서 그 교류의 다양성이 요구되는 동시에 학문적인 분야에

    서는 단절되었던 시간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단적으로 문학 분야의 교류 및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는데, 특히 한국에서 몽골의 현대문

    학 그 중에서도 근대문학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혁명시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

    무하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근대로 이행하면서 시작된 단절이 비록 불과 한 세

    기도 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 기간 동안 걸어온 길이 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

    에 그 시간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교류는 분명 한계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또한 이 기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몽골과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한국에는 ‘북한 문제’라는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4) 이용규, 「몽골학과 한국학의 접점」, 한국학연구 제16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7, p.36.

    5) 몽골 전통 가옥

    6) 그동안은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 한 곳뿐이었으나, 2009년 3월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

    스 동양어학부에 몽골학과가 개설되었다.

  • - 3 -

    과 몽골이 단절된 것 같은 그 시기에 사실 몽골은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몽골과 북한은 1948년 10월 15일 수교를 맺은 이후 한국전쟁시기와 한

    -몽 교류를 재개했던 시기에 잠시 주춤했던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도 꾸준히

    교류를 맺고 있다. 1952년 몽골에는 북한의 전쟁고아들 197명을 수용한 고아원

    이 있었다. 4-7세의 어린이들이었는데 이들은 1959년에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

    내졌다.7) 또한 한국전쟁 중에는 많은 구호품을 북한에 원조하기도 했다. 현재 몽

    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는 외화를 벌기 위해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이 있다. 그리

    고 북한은 이런 노동자들을 앞으로 더욱 파견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

    로서의 유대감과 동질성을 토대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두 나라이기 때문에 우

    리가 이 시기 몽골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나아가 북한문제 연구에 또 다른 시각

    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앞서 ‘단절’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근대 이후의 한국과 몽골의 직접적인 연관성

    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상황상의 유사성을 보인다. 즉, 두 나라 모두 강대국들의 틈새에서 국가

    또는 민족의 존재 및 정체성에 위협을 받아야 했고, 그 과정 속에서 각자의 존재

    적 위치를 확보해야 했던 것이다. 동시에 아시아로 서구 문명이 유입되기 시작하

    는 때이기도 했으므로 한국은 식민지국으로서 일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

    여야 했고 위성국가8)로서 몽골은 러시아를 통해 수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강대

    국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유사성은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한국은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상황에서 근대를 맞이해야 했고,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의 긴장관계 속에

    서 발생한 혁명으로 200여 년 만의 ‘독립’을 이룬 상황에서 근대를 맞이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변별점이다. 그렇지만 몽골이 독립된 국가가 되었다고는 해도 완

    전한 독립국가일 수는 없었다. 러시아로부터 경제적ㆍ군사적 및 문화적인 원조의

    규모가 엄청났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강한 통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즉, 식민

    지 아닌 식민지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에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

    아가고 있었던 반면 몽골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나아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

    또한 두 나라의 문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상황에서 두 나라의 근대문학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두 나라의 문학작품 가운데에는 형식 및 주제적 측면의

    7) 윤황, 「북한과 몽골의 관계발전: 현황과 특징, 평가와 미래」, 한국동북아논총 , 2008, p.297.

    8) Owen Lattimore 는 ‘몽골(외몽골)을 공식적으로 병합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본국인 소련의

    복사(複寫)’라고 보는 위성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자신이 사용하는 ‘위성국’의 의

    미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식민지와는 다르고 ‘종속적 동맹국’과 ‘보호국’의 중간이라고 설명하

    여 구별하고자 했다. (Owen Lattimore, 1955, Nationalism and Revolution in Mongolia,

    Oxford Univ. Press. (N.Y) pp.4, 40-41 ; 손현숙, 「몽고혁명의 역사적 배경 -개혁운동과 사상

    을 중심으로」, 연세대 박사논문, 1990, pp.2-3 재인용)

  • - 4 -

    유사성을 띠는 작품들이 있다. 본고는 1차적으로 이러한 몽골근대문학에 대한 통

    시적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국내에는 아직 몽골근대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2차적으로는 미약하나마 한국문학과의 유사성을

    밝힘으로써 향후 한-몽 비교문학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2. 연구사 검토 및 연구 방법

    몽골현대문학이 한국에 소개 된 것은 몇몇 특정 학자들의 번역한 작품들이 전

    부라고 할 수 있다. 연구의 측면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논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러나 아직은 시작단계로 보이지만 꾸준히 몽골과 한국의 현대문학 교류를 위해

    시도하고 있는 연구회가 있는데 바로 ‘한국몽골문학연구회’이다. 이 연구회는

    2004년 7월에 제1회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이후 지금까지 총 5회9)에 걸쳐 국

    제학술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성과 중 하나로 샤르허브의 아지랑이 10)라는

    몽골현대소설단편집을 펴냈다. 따라서 현재 한국 내에 몽골현대문학 관련 연구

    자료로는 한국몽골문학연구회의 국제학술회의 자료집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발표 자료집’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글이 요약본으로 그나마도 몽골

    측의 경우 한국어로 번역된 발표문의 분량이 더욱 짧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한국에서 최초 시도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5회에

    걸친 학술회의에서는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한국문학과 몽골문학 특히 현

    대문학에 있어 그 연관성 모색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 작업은 우선은 서로의

    문학과 문학사적 상황을 알아야 비교 고찰이 가능하리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전제를 토대로 발표된 글들은 대체로 비교연구로 가

    기 위한 중간 단계라는 설정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 측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홍태식의 「한국 몽골 소설의 비교문

    학적 연구 서설」12)이 주목된다. 홍태식은 이 글에서 그동안 소원한 존재였던 몽

    9) 제1회 한몽국제학술회의 - 2004년 7월

    제2회 - 2005년 1월

    제3회 - 2005년 7월

    제4회 - 2006년 1월

    제5회 - 2006년 7월

    10) 더르즈접드 앵흐벌트 외, 난딩쩨쩨그․ 정용환 외 역, 샤르 허브의 아지랑이 , 모시는 사람들,

    2006.

    11) 일본어로 된 소논문으로는 岡田和行(おかだ かずゆき)의 「일본에서의 몽골문학연구(日本におけ

    るモンゴル文學硏究 )」( 몽골학 , 2007)가 있다.

    12) 제2회 한국 몽골문학연구회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한몽문학연구회 및 몽골문인협회 주최.

    2005.

  • - 5 -

    골 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한국문학과의 비교문학 연구 측면의 가능성

    을 제시하고 있다. ‘몽골의 문학, 특히 몽골소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으로 우리 소설이 몽골에 알려진 것도 별로

    없으므로 그 교류를 추진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후

    4년이 지난 지금도 시간에 비해 큰 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한 ‘통일 문학 시대에 대비하여 북한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우리의 입장에

    서는 꼭 필요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바른 지적

    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근현대 문학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

    문에 북한문학과의 연관성이 있을 수밖에 없고 물론 변별되는 지점들이 크게 있

    겠지만, 북한문학을 연구함에 있어 또 하나의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고 하겠다. 홍태식은 비교문학적 측면에서 한국과 몽골은

    특히 근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역사적으로 직접적인 교류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

    던 사실을 연구의 난점으로 보았다. 그러나 몽골은 사회주의 국가로 정체성을 전

    환하게 되면서 러시아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고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었던 시기를 ‘약소국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수난의 역사’라는 유

    사한 상황으로 보면서 그 속에서 공통분모의 발견가능성을 제시했다.

    한국에서의 몽골이 이제 막 익숙해져가는 단계인 것에 비해 몽골에서 한국은

    매우 익숙한 나라이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망으로 이어졌

    고 이제는 한국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도 연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과 몽골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현대문학 더

    구체적으로는 근대소설을 비교 연구한 학위논문이 있어 괄목할 만하다. 데. 나르

    만다흐(Д. Нармандах)가 2003년에 받은 몽골국립대학교 몽골어문학과 석사학

    위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나르만다흐는 먼저 한국과 몽골의 20세기 초의 역사적

    상황의 유사성과 그 시기에 근대문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연

    구 가능성을 찾았다.

    이 논문에서 밝히고 있듯 한국과 몽골의 당시 국가적 상황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고, 몽골의 경우에는

    러시아의 강한 통제를 받아야만 했던 위성국가의 처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이것은 당시 아시아를 휩쓴 제국주의의 세력에 이어 혁명의 바람까지 불어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공통적인 상황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사적 유사성을 토대로 양국 모두 또한 이 시기를 현대문학

    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는 데에서 그 당시 대표 작가들을 각각 선정하여 비교 분

    석하였다. 몽골의 작가로는 데. 나착도르지(Д. Нацагдорж), 췌. 담딩수렝(Ц. Да

    мдинсʏрэн), 임. 야담수렝(М. Ядамсʏрэн), 데. 체웩미드(Д. Цэвэгмид)를, 한

    국의 작가로는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채만식을 선정했다.

  • - 6 -

    하지만 나흐만다흐가 비록 학부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고는 하나 ‘한국어학과’

    의 학과 특성상 문학 교육이 깊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몽골 안에서만 자

    료를 찾아야 했음을 감안했을 때, 접할 수 있는 한국역사 및 문학 연구서는 또한

    지극히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논문 참고문헌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작가 및 작품 분석의 장을 보아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리라 본다.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의 작품은 단편소설전집을 보았고, 채만식의 경우만 채만

    식 전집을 읽었기 때문에 채만식의 작품을 분석한 부분만 유난히 길고 비교적

    상세하다. 현진건과 김동인을 사실주의 작가로 보고 그들의 대표소설 「운수 좋은

    날」이나 「감자」에 나타난 당시 하층민의 고된 삶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과 나

    착도르지 및 담딩수렝의 작품 속에서 당시 몽골의 하층 인민들의 고된 삶에 대

    해 그려낸 작품들을 연결시킨다. 그러나 염상섭의 경우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 채 「표본실의 청개구리」만으로 ‘자연주의 작가’라고 분류하여 당

    시 몽골의 작가들 가운데 자연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야담수렝’과 연결시키고 있

    다. 염상섭의 전집이 있을 리 만무하고, 연구서 또한 한정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오류가 아닐까 싶다. 또한 구성에 있어 몽골의 사회상 다음에 한국의 사회상을,

    몽골의 1920-30년대 대표 작가들을 보여준 뒤 같은 시기 한국의 대표 작가들을

    나열했으며, 마지막에 짧게 공통점과 차이점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유

    기적인 느낌이 많이 떨어진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표

    면적인 고찰에 그치고 있어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한편, 1920-30년대에 현대

    문학이 시작되었다는 그의 분석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의 유사

    성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분석에 부족함이 발

    생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시 양국의 ‘사실주의적 경향의 소설’들이 ‘하층

    민들의 고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비슷한 점으로 보았으면서

    도 차이점으로는 몽골은 외면 묘사가 주를 이루는 반면 한국은 내면 묘사가 주

    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의 발견은 근대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에 해당

    하는 문제로 단순히 한 국가에 한정된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르만다흐는

    몽골에는 전근대 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로 ‘민담형-단편서

    사’가 있다는 것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문학에 또한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장르가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한계

    점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몽골의 근대초기 문학을 비교한 최초

    의 논문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에 본고는 몽골을 대표하는 두 작가 ‘데. 나착도르지’와 ‘췌. 담딩수렝’의 소

    설작품을 통해 몽골의 근대초기 계몽적 글쓰기13)가 형성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13)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들의 작품 가운데에는 비록 몽골에서는 ‘소설(novel)’로 분류하고 있

    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아직 ‘소설’에는 미치지 못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글쓰기’

  • - 7 -

    한다. 이 두 작가는 몽골의 국민작가 중에서도 대표작가이며, 무엇보다도 몽골

    근대초기 문학의 기초를 수립하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본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기에 앞서 몽골근대문학

    사를 개관한 후, ‘이행기 장르’로 규정되고 있는14) ‘민담형 단편서사’를 중심으로

    우리의 ‘서사적 논설’과 비교․고찰할 것이다. 본고에서 인용하게 될 대부분의 작

    품 및 자료들은 필자가 직접 번역한 것을 사용할 것이다. 소설의 경우 몽골 울란

    바타르 사립대학 학부 논문인 베. 자브상돌람의 「나착도르지 단편소설 번역」과

    이정미의 「담딩수렝 단편소설 번역」을 참고하여 원본과 대조하면서 지나치게 의

    역이 되어 있거나 생략되어 있는 경우는 다시 번역을 했다. 췌. 담딩수렝의 「버

    림받은 딸」이나 데. 나착도르지의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중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분량이 적지 않아 번역되지 않았던 작품들은 필자가 직접 번역했다.

    Ⅱ. 몽골의 근대문학

    1. 근대 이행기의 몽골

    몽골은 원이 명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북원’이라는

    단계를 지나 17세기에 이르면 러시아마저 몽골에 손을 뻗친다. 바이칼호 근처

    부리아트 몽골족은 러시아로 편입되고 북몽골(외몽골)과 남몽골(내몽골)은 차례

    로 청에 복속된다. 북몽골과 남몽골로의 분할은 청에 복속된 시기를 기준으로 한

    구분이다.15)

    청은 원이 강성했던 만큼 몽골의 부활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두려운 만큼 몽골에 대한 통제는 철저하고도 가혹했다. 청이 가장 먼저 실시한

    정책이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지배방식이었던 것은 ‘맹기제도(盟旗制度)’였다. 맹

    기제도는 철저한 통제 아래 유목민 사회를 행정단위별로 제한하는 방식의 것이

    었는데, 당시 몽골사회의 구성단위16)였던 ‘허쇼(хошуу)’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다

    로 표현한다.

    14) 몽골문학사에서는 근대소설이 형성되는 과정을 ‘민담 - 민담형 단편서사 - 근대소설’로 규정하

    고 있다.

    15) 이준희, 칭기스칸의 후예들-「몽골인민공화국」의 건국 , 제이앤씨, 2005, pp.5~6)

    16) 盟(Aimag)-보통 ‘부(部)’로 번역한다. 처음에는 일정한 유목지를 공유하는 혈연집단을 가리켰으

    나, 몽골제국 이후는 유목 귀족의 봉건령을 가리켰다. 청(淸)나라가 몽골을 정복하였을 때 내몽

    골에서는 24개의 아이막을 6개 맹(盟)으로 통합하였지만 외몽골에서는 거의 한 아이막을 l맹으

    로 하였다. 현재의 몽골인민공화국에서도 사회조직은 변하였으나 아이막은 최고의 지방행정구획

    의 명칭으로 사용된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 자세한 내용은, 손현숙, 「몽고혁명의 역사적 배경」,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990, p.20 참조

  • - 8 -

    시 그 안에서 유목범위를 지정해주는 식이었다. 이것은 몽골인들의 힘이 집결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지만, 동시에 몽골사회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로

    까지 이어졌다. 시기에 따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가축들이 감소하고 이는 다시 생산성의 저하로 이어졌다. 한편

    유목문화는 이동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저장에 익숙하지 않아서 필요한 물자

    들을 그때그때마다 교역을 통해 조달해야 했는데 이동의 자유를 제한 당하고 다

    른 이민족들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어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청은 동시에 종교를 이용하기도 했다. 현재 몽골의 국교인 라마불교(티베트불

    교)는 16세기 말 알탕 칸(Алтан хаан)의 주도로 이루어진 라마불교로의 개종

    이후 몽골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라

    마불교가 정착되었다면 별다른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의 건륭제는

    당시 이미 몽골 전역에 라마불교가 자리잡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이

    종교를 강력히 전파했는데 이것은 정치적인 목적에 기인한 것이었다. 몽골의 야

    성을 순화시키는 것 즉, 몽골의 부활을 원천봉쇄하려는 또 다른 방법이었던 것이

    다17). 청은 승려가 되는 몽골인들에게 병역을 면제해주고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의 혜택을 제시함으로써 매우 손쉽게 몽골인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당시 몽골인들의 생활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극심한 빈곤상태였기

    때문에 청의 이러한 제시에 몽골의 장정들은 앞을 다투어 승려가 되겠다고 몰려

    들어, 심지어는 몽골 남성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승려가 되어버리는 현상까지 나타

    나게 되었다고 한다18). 불교의 교리로 몽골의 용맹성은 온순함으로 변해갔고 결

    정적으로는 인구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인구의 감소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민족 세력의 저하를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청은 라마불교를 이

    용하여 몽골인들에게 시주를 강권했고 더불어 사원 건립 자금까지도 그들에게

    떠넘겼다.

    이렇게 청은 200여 년의 시간 동안 몽골을 서서히 파괴해갔다. 이 시기는 몽

    17) 김성수에 의하면 알탕 칸이 라마불교로 개종하면서 당시 귀족들 또한 앞을 다투어 라마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전국으로 퍼지는 데에 1년 남짓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라마

    불교의 영향으로 몽골인들의 용맹성이 퇴화되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

    는 단순히 불교는 살생을 금하고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라는 현재의 인식에서 기인한 오류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불교의 교리 안에도 ‘전륜성왕’과 같은 전투적이고 용맹스러운 존재가 있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주장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건륭제의 정치적 목적

    의 정책들이 병행된 가운데 일반 민중들에게 라마불교에서 가르쳤던 내용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이미지와 관련된 내용들이었을 것이라 추측해볼 때, 라마불교의 영향으로 몽골인들

    의 용맹성이 순화되었다는 주장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2009년 3월 26일, 인하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동아시아한국학’ 학술회의,「동북아시아와 ‘중화’ : 조선, 청, 몽골」, 종합

    토론 시간에 이루어진 질문 및 답변을 토대로 한 내용임을 밝힌다.)

    18) 배석규, 대몽골 시간여행 , 굿모닝미디어, 2004,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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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역사에 있어 가장 극심한 암흑기로 기록된다. 이 때 철저하게 파괴된 몽골의

    경제는 그 후 지금까지도 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몽골에 반청의식이 강했음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든 역사의 사건들

    이 사회적 분위기와 발화지점이 맞아야 하듯 이렇게 반청의식이 최고조에 달했

    을 무렵, 한편으로는 몽골 독립의 기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또한 청 말

    무렵 몽골에는 독립을 도모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주로 왕공들을 중심으로 여기

    저기에서 생겨나고 있었는데, 그러나 아직 그들의 힘은 약했고 청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큰 상대였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아시아에 서구 열강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몽골의

    운명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서구열강들이 청으로 밀

    려들면서 막강하던 청은 심하게 흔들리게 된 것이다. 청의 위기를 틈타 몽골 여

    기저기에서는 반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911년 청에는 신해혁

    명이 일어났고 이것은 몽골의 독립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당시 청나라의 몽

    골 지배 거점이 후레(Хүрээ)19)였는데 이곳은 할하(Халха)지역의 중심이기도 했

    다. 할하지역의 독립운동은 왕공들과 승려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결국 후레에

    서 청나라 관료들을 추방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12월 1일 독

    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외몽골의 불교수장이었던 ‘젭춘담바 쿠툭투 8세(Жавзан

    дамба Хутагт20))’를 황제로 추대하여 ‘보그드21) 칸(Богд хаан) 정권’을 세운

    다. 물론 오랜 세월 독립을 염원해온 몽골인들의 투쟁의 결과였지만 사실상 청조

    의 붕괴로 인해 갑작스럽게 주어진 독립이었던 만큼 이 정권의 기반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이 중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나라는 러시아뿐이었다. 따라서 보그드 칸 정권이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민감한 상황이었기 때

    문에 러시아는 눈치껏 외몽골의 독립만을 지지했는데, 이것도 사실 외몽골의 자

    치 허용으로 해결하려는 의도였다.

    1912년 11월 러시아와 몽골은 보그드 칸 정권의 자치를 허용하는 내용의 러

    몽 협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3년 11월 러시아와 북경 정부 사이에

    는 외몽골 자치에 관한 선언이 교환되었다. 보그드 칸 정권은 몽골 전체의 통일

    된 독립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몽골은 이렇게 1차 보그

    드 칸 정권에서 제외된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 시기에 이미 내몽골은 외몽골과

    19) 오늘날의 울란바타르(Улаанбаатар)

    20) ‘성자(聖者)’라는 뜻 ; ‘자브잔담바 호탁트(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 할하 몽골어형 발음)’, ‘젭춘

    담바 쿠툭투(Jebthundamba Khutuktu)’, ‘집준담바 쿠툭투(Jibzundamba Khutugtu)’는 모두 사용

    가능한 표기이다. 이렇게 다양한 표기가 나타나는 것은 티베트문 표기를 읽는 전통의 차이 때문

    이다.

    21) ‘성스러운’, ‘최고’라는 뜻

  • - 10 -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져있던 상태였다. 한인들이 너무 많이 이주해 와 있었고,

    그들에 의해 상당부분의 목초지는 벌써 농경지로 개간되어서 온전한 몽골의 모

    습을 적잖이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외몽골과의 통합은 더욱 멀어진다.

    독립운동 및 자치권 획득이 국제정세에 따른 결과였듯 이후 몽골은 더더욱 국

    제정세에 따라 부유하게 된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거대 강국에 반반씩 접경하고

    있던 몽골은 두 나라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켜나가야 했고 따라

    서 양국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럽열강은 동아시아로 향했던 시선을 거

    두어들인다. 러시아도 전쟁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에 몽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

    다. 이것은 곧 중국의 기회를 의미했다. 심지어 1917년의 러시아는 2월과 10월

    에 혁명까지 일어나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은 이 틈을 타

    서 바로 몽골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1919년 보그드 칸 정권은 스스로

    자치를 철회한다. 그러나 이미 무르익기 시작한 독립에의 열망이 쉽게 잦아들 수

    는 없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모여 무리들을 형성해가기 시작했고

    비록 비밀단체이긴 했지만 마침내 1920년 6월 몽골인민당을 결성한다. 주축이

    된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현재 몽골인들이 국부로 추앙하고 있는 ‘수흐바타르

    (Д. Сүхбаатар)’였다. 당시 그는 이십 대의 나이에 불과했다.

    한편 이 시기 몽골에는 중국의 군벌들 외에 또 다른 침입세력이 있었다. 러시

    아 내전의 한 쪽이었던 반볼셰비키당이 점차 볼셰비키당에 밀리다가 외몽골을

    재기를 위한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실각한 세묘노프 군대를 이어받은 사

    람은 ‘운게른(Ungern Sternberg22))’으로 ‘미치광이 남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

    도로 과격분자였다. 그는 일본의 원조를 받아 1920년 10월 외몽골을 침입하여

    1921년 2월에는 후레까지 점령한 뒤 보그드 칸 정권을 복구시킨다. 그러나 이것

    은 그들의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것뿐이었다. 또한 운게른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

    들이 자행했던 잔악한 행위들로 너무나 많은 몽골인들이 희생되었고, 그 일대는

    공포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에 보그드 칸은 수흐바타르를 통해 소련에 밀

    서를 보낸다. 같은 해 3월, 몽골인민당은 러시아 국경 도시인 ‘캬흐타’에서 제1차

    당 대회를 열어 임시인민정부를 수립한다. 임시인민정부는 운게른 세력 즉, 백군

    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모집했고 이 때 결성된 인민군 총사령관을 수흐바타르

    가 맡았다. 인민군은 러시아의 강력한 원조와 수흐바타르의 지휘 아래 백군을 몰

    22) 로만 니콜라이 막시밀리안 본 운게른-스테른베르크(Roman Nikolai Maximilian von

    Ungern-Sternberg)는 1885년 독일계러시아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의 어

    느 생물학자가 “히틀러와 운게른이야말로 게르만인들이 훈족의 계보로 물려받은 악마적 야만성

    을 입증해준다.”라고 한 말에서도 추측해볼 수 있듯이 그는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부족할 만큼

    의 인물이었다. 1914년 몽골로 가서 그 후 보그드 칸의 주치의까지 맡았던 한국 독립운동가 이

    태준 또한 운게른의 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 - 11 -

    아내고 후레를 탈환한다. 그리고 1921년 7월 11일 몽골인민당은 인민정부를 정

    식으로 수립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9월 12일 미국 정부에 문서를 보내 몽골의

    독립을 알림과 함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및 무역의 평등한 관계 수립을 제안했

    다. 몽골인민당 중앙위원회는 1921년 9-10월에 「인민 정부의 근래에 시행해야

    할 목표들」, 「몽골인민당의 목표를 깨우쳐 설명한 문서」라는 두 문서를 냈다. 이

    문서들에는 법령 개정, 임시국회수립, 정부쇄신에 대한 것과 보그드 왕권의 한계

    를 밝히는 것, 그리고 인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 노예제 폐지, 신분과 무관하게

    평등한 세금제도, 지역마다 학교 세우기, 원료 가공 및 수출, 역무를 용이하게 하

    는 것, 운송관계에 대한 것, 예술이 발달하게 하는 것 등에 대한 목표를 구체적

    으로 지시되어 있다. 1921년 11월 몽골인민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에는 우호조약

    이 체결되고 두 나라는 서로를 독립국가로 승인한다. 그러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서는 아직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은 소련을 의지

    한 발전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지원을 받아 혁명에 성공했다고는 하나 그것이 사회주의

    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몽골인민정부가 세워졌지만 여전히 국가원

    수는 보그드 칸이었고 그가 사망할 때까지 국가원수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혁

    명초기 몽골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고 하겠다. 또 한편으로

    는 당시 몽골을 둘러싼 강대국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 가운데에

    서도 특히 러시아가 중국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중이었기 때문에 아직 몽골에는

    이렇다 할 압력이 없었던 것이다.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

    생했지만 소련은 중국을 지켜보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1924년 몽골의 국가원수였던 ‘보그드 칸’이 사망한다. 이에 몽골은 동년 11

    월 국호를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인민당을 ‘몽골인민혁명당’으로 바꾼다. 후레를

    ‘울란바타르’로 바꾼 것도 이때였다. 무엇보다 이때 ‘몽골은 사회주의를 지향한

    다’는 국가운영방향을 분명하게 밝힌다.

    1927년 장개석의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그 여파로 내몽골 인민혁명당

    이 무너진다. 소련은 기대했던 중국 혁명의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판단했고 곧

    바로 외몽골에 대한 간섭을 시작한다. 그들의 선택은 ‘극좌노선’이었다. 제일 먼

    저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부를 숙청하고 대신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을 비롯한 젊

    은 사회주의자들로 그 자리를 대거 채웠다. 인민연대를 추구하는 소련에 ‘민족’은

    방해가 될 뿐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아예 반동사상으로 취급되었고 그에 따

    른 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왕공들과 승려들이 주로 숙청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는 곧 종교탄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에 걸쳐 시행

    한 이러한 종교탄압과 더불어 시행했던 유목민의 집단화는 몽골인들의 강한 반

    발에 의해 주춤하게 된다.

  • - 12 -

    하지만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좌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초이발상(Чоѝ

    балсан)’이 집권하게 되는데 그의 별명은 ‘몽골의 스탈린’이었다. 초이발상에 의

    해 30년대 말 몽골에는 다시 대대적인 종교탄압과 숙청이 일어났다23). 1937-39

    년이 그 정점이었다고 보인다.

    한편 이 시기는 태평양 전쟁 중이던 일본이 만주지역에 진출해 있던 때였고

    단 한 차례이긴 하나 몽골과의 전쟁도 있었다. 1939년에 5개월간 진행된 이 ‘할

    힌골(Халхын гол: 할하의 강) 24)전쟁’은 사실상 소련군과 일본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소련의 원조가 컸던 전쟁이었지만 몽골인들에게 승리의 자부심

    은 대단했다. 이 전투를 치른 후 다음 해인 1940년 몽골인민혁명당은 제10차 당

    대회를 열어 몽골인민공화국이 혁명 단계를 지나 사회주의 건설단계에 접어들었

    다고 선언했다25). 몽골은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정세에 휘말리지 않은 채

    사회주의 건설이란 이름으로 소련의 위성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1945년 2월 열린 얄타회담은 한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된 회담이기도 했지만 ‘몽

    골은 현체제를 유지한다’라는 사항이 결정된 회담이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외

    몽골에서는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는 만장일치였고 이에

    중국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몽골인민공화국을 승인하게 된다. 이것은 내

    몽골의 입장에서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영향을 비교적 더 직접적

    으로 받고 있던 내몽골은 외몽골과 통합하여 ‘대몽골국’을 수립을 계획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몽골에 통일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외몽

    골의 실권자였던 초이발상이 동의해줄 리가 없었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국공내

    전이 발발했고 중국공산당의 세력이 내몽골로 유입되었다. 결국 1947년 내몽골

    자치정부가 설립되면서 외몽골과 내몽골은 영영 분리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외몽골은 여러 사회주의 국가 및 동구권 국가들과의 교

    류와 원조로 비교적 사정이 나아져 간다. 1952년 초이발상이 죽자 ‘체덴발(Ю.Ц

    эдэнбал)’이 그 뒤를 잇게 되는데 그는 1956년에 인민혁명당 서기장에 취임했

    고 당내의 중국파를 숙청하고 친소련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1959년에는

    목축업의 집단화도 어느 정도 완료단계에 이르고 1960년에는 헌법 또한 개정해

    23) 1930년대 중반 인민혁명을 장악한 초이발상이 당의 권력을 장악한 후 중앙계획경제를 시도하

    여 라마교에 대한 박해를 가해 1년에 120투그릭이었던 세금을 1933년에는 1000투그릭으로 인

    상하는 세금인상조치와 사원의 파괴 등이 1939년까지 이루어졌다. (에. 바야르체첵,「몽골 사회

    주의 체제전환의 정치경제」,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2001, p.47)

    24) 일본에서는 ‘노몬한’ 지역 근처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노몬한 사건’이라고 한다.

    25) “몽골 당은 공산당이 아니며, 인민혁명당이기에 코민테른에 속하지 않는다. 단지 코민테른에 찬

    성할 뿐이다. 몽골 국가 권력은 인민에게 있으며, 경제 기본은 개인 소유의 목축업이다. 우리는

    몽골의 사회 경제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새로운 형태의 자본 공화국을 만든다.”라고 했으나 결국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에. 바야르체첵,「몽골 사회주의 체제전환의 정치경제」, 연세대학

    교 석사논문, 2001, p.24)

  • - 13 -

    서 몽골인민공화국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규정한다. 1961년에는 국제연합에 가

    입하고 1962년에는 소련과 동유럽 경제상호원조회의인 코메콘(COMECON)에 가

    입한다. 그리고 1947년까지는 1년 단위로 시행하던 경제계획을 1948년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총 8차에 걸쳐 5개년계획을 시행한다.26)

    1947년 제11차 당 대회, 1954년 제12차 당 대회, 1958년 제13차 당 대회 등

    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이 더욱 깊어지고 1959년 개인 소유의 가축을 협동조합화

    하는 과정이 완료되어 1960년대 초에 새로운 당 프로그램으로 몽골에 사회주의

    사회를 설립할 목적이 제시되었다. 이렇듯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조건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2. 몽골 근대문학 시기 개관

    몽골의 현대문학을 살펴보기에 앞서 정치한 수준까지는 못 되더라도 시대구분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대문학의 시대구분을 보기에 앞서 전체적

    인 시대구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대표적인 양상을 살펴보면 학자들마다

    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대몽골제국 시대와 청나라에 복속되었던 시

    대 그리고 혁명의 분위기가 조성되어가는 시대 정도로 크게 삼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칭기스칸 이전 시대의 구비문학 시기를 설정하느냐 그 여부

    에 따라 네 등분이 되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근현대문학에 초점을 둘 것이므로

    근대 이전 시기를 포함한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간단히 소개하는 정도로 하겠다.

    베. 서드넘(Б. Содном)은 「몽골 산문학의 역사적 흐름(Монголын утга зо

    хиолын хɵгжлиѝн түүхчилсэн тɵлɵв)」에서 다음과 같이 시대를 구분한다.

    1) 1200년 또는 1206~1691년 : 대몽골 건국시대인 1206년부터 청나라의

    26) 이것은 구소련을 위시한 코메콘 국가들의 원조를 받아 시행된 것이었다. ‘5개년 계획’이 시작되

    기 전까지는 1년 단위로 이루어졌다.

    제1차 5개년계획 (1948-1952)

    제2차 5개년계획 (1953-1957)

    3개년계획 (1958-1960)

    제3차 5개년계획 (1961-1965)

    제4차 5개년계획 (1966-1970)

    제5차 5개년계획 (1971-1975)

    제6차 5개년계획 (1976-1980)

    제7차 5개년계획 (1981-1985)

    제8차 5개년계획 (1986-1990) - 시네칠렐 계획으로 도중에 그 계획을 수정한다.

    (바야르체첵의 논문 p.20를 중심으로 하고 이에 다른 자료들을 참조하여 작성함.)

  • - 14 -

    지배를 받 게 되는 1691년까지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기록문학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몽골비사 , 장가르 , 게세르 , 황금사 등이 있다.

    2) 1691~1921년 : 청나라의 식민지 시대부터 몽골 자치국가가 세워지는 때

    까지로 불교적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3) 1921~1946년 : 사회주의 태동기로 그 시작을 인민혁명의 개가(凱歌)로

    본다.

    베. 락바(Б. Лхагваа)는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1) 고대문학( ~13c) : 전래동화, 설화, 덕담, 주문 등 단편적인 구비문학 형

    태들이 서사시적인 장편 형태로 바뀌는 시기

    2) 중세문학(AD 13~19c) : 서사시적인 연대기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기록문

    학이 성장해가던 시기로 세부적으로는 다시 몽골제국 시대와 몽골 봉건 붕괴 시

    대로 나눈다.

    3) 현대문학(AD 19~현재) : 이 시기를 다시 근대문학(19~20c)과 현대문학

    (20c~현재)으로 나누기도 한다.

    체. 빌릭새항(Ч. Билигсаѝхан)은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1) 고대문학( ~12c 말) : 설화나 동화, 주문부터 시작하여 서사시적인 영

    웅담이 많이 등장한 구비문학 시대

    2) 중세문학(AD 13~16c) : 칭기스칸 제국과 관련된 건국 서사시나 그 이후

    봉건주의 붕괴 시대의 갈등을 묘사한 전설 및 전기소설, 시문, 연대기들이 대표

    적인 시대

    3) 근대문학(AD 17~20c 초) : 계몽기(17~18c)와 계몽 활성화 시대

    (19~20c)로 청나라의 지배로 인해 외적으로는 쇠약해졌으나 내적으로는 정신적

    인 강화를 일으켜 많은 연대기들을 펴냈던 시대

    4) 현대문학(AD 1910~현재) : 민족의식과 문화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기

    (1910~1937), 현대문학 성장기(1940~1960), 문학 개혁을 위한 투쟁기(1960~

    현재)로 나누기도 한다.

    근현대문학에 대한 시대구분에도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현대

    문학의 시작을 언제로 보는지에 따른 견해가 크게 양분되는데 한 가지는 1911년

    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1921년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는 것이다. 1921년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인민혁명이 일어나 승리를 거둔

    의미 깊은 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11년에 일어났던 독립운동의 결과 비록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자치권을 획득하여 구습을 타파하고 근대의 새로운

  • - 15 -

    지식들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므로 이 시기를 현대문학의 시작으로 보

    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몽골과학아카데미에서 출판한 연구서들 가운데, 현 몽골문학연구가들이 몽골현

    대문학 기본서라고 인정하는 두 저서인 몽골현대문학약사(Монголын орчин ү

    еиѝн уран зохиолын товч түүх, 1968) 와 몽골현대문학사 1~3권(Монгол

    орчин үеиѝн уран зохиолын түүх, 1~3)(1985, 1989, 1997) 은 모두 1921

    년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먼저, 몽골현대문학약사 는 시대구분을 다음과 같이 한다.

    1) 1921~1940 : 인민혁명에서 승리하고 비자본주의 진보의 길로 나아간 시대

    2) 1940~1965 :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투쟁의 시대

    1940~1947 :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문학

    1948~1965 : 평화 체제 시대의 문학

    약 20년 뒤에 같은 곳에서 출판한 몽골현대문학사 는 시대구분에 따라 세 권

    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시대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이 1921~1940년

    (1권), 1941~1960년(2권), 1961~1980년(3권)27)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은 몽

    골의 역사시기 구분에 따른 분류였다고 본다. 몽골은 1990년까지의 역사시기를

    3단계로 나누어보는 경향이 있다. 1921년부터 1940년까지를 인민혁명 민주주의

    시기(봉건사회 제거, 현대문화 교육 발전기), 1940년부터 1960년까지를 사회주

    의 혁명시기(사회주의 기초를 세우는 시기), 1960년부터 1980년 중반까지를 사

    회주의 설립기라고 분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28)

    데. 첸드(Д. Цэнд)가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제시한 시대구분을 보면 몽골 현

    대사를 근거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 1921~1940 : 인민혁명기를 포함한 혁신 문학

    2) 1940~1947 : 제2차 세계대전 문학

    3) 1948~1990 :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기 문학

    4) 1990~1994 현재 : 개혁과 인본․민주주의 문학

    보통 이렇게 사회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시대구분이 주를 이루어왔으나

    27) 岡田和行(おかだ かずゆき)의 논문을 보면 1921~40년(민주주의단계의 문학), 1940~60년(사회

    주의건설기의 문학), 1960~80년(사회주의 건설 완성기의 문학)라고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28) T. Namjim, 『Mongoliin ert ba edugee(몽골의 과거와 현재)』, Ulaanbaatar, 1996. p.210 ;

    「몽골 사회주의 체제전환기 정치 경제」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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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이후 개방이 시작되면서 작가들 중 그동안의 시간들에 대한 비판 및 반

    성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 문학박사 이

    스. 돌람(С. Дулам)을 들 수 있다. 작가동맹의 위원이기도 했던 그는 1990년 4

    월 작가동맹임시대회의 석상에서, 몽골과학아카데미에서 출판한『몽골현대문학

    사』야말로 극단적인 ‘소비에트 주의’에 기초한 문학사연구이며 종래의 ‘당파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문학의 찬가를 상징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이

    책이 따르고 있는 몽골현대문학 시대구분은 몽골인민혁명당에 의해 왜곡된 역사

    적 시대구분을 토대로 하여 분류된 결과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문학은 그

    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독립된 미적 현상의 측면으로부터 그 내적인 모순의 특

    징을 토대로 하여 분석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29)

    1) 민족의식 변화기 문학(1921-1937): 데. 나착도르지(Д. Нацагдорж),

    췌. 담딩수렝(Ц. Дамдинсүрэн), 이스. 보잉네메흐(С. Буяннэмэх), 베. 린칭

    (Б. Ринчин) 등 몽골의 대표적인 현대문학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기로

    몽골 전통 문학 요소가 서양의 문학 기법과 어우러져 새로운 문학 작품들을

    생산했다.

    2) 사회주의 선전기 문학(1937-1957): 이때 문학은 독재 정권 선전에 필

    요한 무기에 불과했다.

    3) 사회적 이념이 배인 문학(1957-1987): 문학이 독재 정권의 노골적인

    선전 무기로의 역할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문학의 예술․미적 측면보다 ‘당

    파성’, ‘계급성’, ‘인민성’이 더 중시되었던 시기였다. 즉, 문학이 당과 이데올

    로기에 종속된 시기였던 것이다.

    4) 다원적 자유 문학(1987-현재): 사회의식이 다원화 자유 의식으로 바뀌

    면서 다양한 문학 작품과 비평이 생산되는 시기이다.

    데. 갈바타르(Galbaatar. D)는 현대문학사의 특징을 사회 발전 시기와 연계

    해서 더 세부적으로 나눈 바가 있다.30)

    1) 민족의 자유와 독립 운동의 승리를 위한 투쟁기 및 보그드 칸을 수반으

    로 하는 몽골 신정부 수립 시기(1911-1920) : 서사적이며 평민적인 문학, 봉건

    주의 문학, 불교 문학

    2) 제1차 전환기- 봉건주의에서 사회주의 체제로(1921-1947)

    A) 전통 문학을 토대로 한 현대문학 기반 형성기(1921-1937) : 구비문학

    29) 岡田和行(おかだ かずゆき), 「方便と般若」, 東京外國語大學論文集 第48号, 1994.

    30) 제3회 한몽문학연구회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2005.

  • - 17 -

    을 배경으로 한 기록문학이 새로이 형성된 시기(1920-1930)가 있었고, 전통 사

    실주의 문학과 자유 문학에 바탕을 둔 비사실주의(non-realist) 문학이 공존하고

    있었다.

    B) 비사실주의 기법과 자유 의식이 약해지며 정상적인 문학 흐름이 끊어졌

    던 시기(1937-1947) : 정치 제재 문학과 전쟁 문학이 있었다.

    3) 사회주의 건설기의 사실주의 문학(1948-1990): 혁명적 사실주의 선언

    및 도식화론의 성장기(1948-1957)와 사회주의의 사실주의 문학(1957-1990)으

    로 나눌 수 있다.

    4) 제2차 전환기-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시장 경제 체제로. 다원화와 자유

    의식에 바탕을 둔 신문학(1990-현재): 사실주의 문학과 비사실주의 문학이 공존

    한다.

    데. 생빌릭(Д. Саѝнбилигт)는 몽골 현대문학의 기점은 1921년으로 보되,

    예비 단계가 된 시기를 간과할 수는 없다는 입장으로 다음과 같은 시대구분을

    제시했다.

    1) 현대문학의 태동기 이전 시기 (1900~1920) : 독립 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는 민요와 서사시 및 대중적 문학 흐름이 강화되었다. 다양한 계층의 작가들

    이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남겼다.

    2) 현대문학의 태동기 (1921~1936)

    3) 현대문학의 혼란기 (1937~1939) : 대대적인 민족주의자 숙청 사건이 있

    었다.

    4) 전쟁 시대 문학 (1940~1948) : 할힝골 전투와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

    다. 이 시기 작품의 주된 내용은 독일 및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몽-러 군대가 어

    떻게 싸웠는지, 국민들은 어떻게 후원하고 응원했는지에 대한 묘사와 몽러 군대

    간의 우호적인 관계 묘사 등등이었다.

    전쟁시대 문학은 몽골 문학 장르를 확대시켰다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지만

    획일적인 줄거리와 극대화된 인물상, 도식적인 요소 등등의 한계를 지닌다.

    5) 현대문학의 성장기 (1949~1990) : 이때부터 문학 이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6) 현대문학의 전환기 (1990~2005 현재)

    몽골의 문학은 갈바타르가 지적한 바 있듯이 문학연구에 있어 사회주의 리얼

    리즘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 재조명하고 천착해야 할 부분들이 너무나 많은 상

    황이라고 그들 스스로 이야기한다. 모든 문학연구가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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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 그 중에서도 시대구분은 세밀한 연구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연구인

    것이다. 현 몽골문학연구자들이 다양한 시대구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들

    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지대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복적인 언급이 되고 있지만, 현재 한국에는 몽골문학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다. 시대구분에 대한 자료 가운데 현재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는 것은 샤르 허브의 아지랑이 라는 몽골현대단편소설선의

    해설에 제시되어 있는 것뿐이다. 이것은 사실 바로 위에서 살펴본 생빌릭의 시대

    구분으로 2005년에 개최된 제3회 한몽문학연구회31) 국제학술회의 자료집에 실

    렸던 내용이다. 이조차도 없었던 때에 비하면 비교적 간결하면서도 자세한 정리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이에 보충하면서 다시 정리하는 차원으로 나름

    의 시대구분과 그 구분에 따른 당시 몽골 문학에 대한 소개를 덧붙이고자 한다.

    몽골 현대문학의 시대구분에 있어 분기점이 되는 해들이 있는데 나열해보자면

    1911, 1921, 1937, 1940, 1948, 1957, 1960, 1990년이다. 이 해들 중 어느 해

    를 구분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차이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학사 시대구분이

    기 때문에 작품의 경향을 충분히 숙지한 뒤 그 분석을 토대로 구분을 해나가야

    하겠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한국의 몽골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몽골의 현대문학연

    구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수준의 구분은 훗날

    의 작업으로 미루어두어야 하겠다. 본고에서는 해당 연도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

    건들을 중심으로 구분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 현대문학이 시작되는 기점은 1911년과 1921년 중 어느 때로 볼 것인가

    에 대해서는 1921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몽골은 인민혁명의 승리로 독

    립을 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근대국가 건설을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중

    요한 일환으로 문예 및 문학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1911년 독립운동 이

    후 자생적으로 발생한 문학적인 흐름이 아주 강렬했다면 또 달라질 수 있겠지만,

    1919년 자치권을 다시 빼앗길 만큼 당시의 독립운동은 미약한 것이었고 그만큼

    사회는 아직 불안정했기 때문에 근대문학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근대문학의 발생에 있어 그 전단계로서의 의의는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10년대에 이미 《새 거울32)》《수도신문》과 같은 근대적인 신문

    이 발행되고 있었고 그 신문에는 근대담론들이 언급되고 있었다.33)

    31) 이 연구회에 관한 정보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정확히 언제 설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1회 국제학술회의는 2004년 7월에 열렸다. 명지전문대학의 홍태식 교수가 회

    장을 역임하고 있다.

    32) 1920년대에 나온 《새 거울》이라는 잡지와는 명칭은 같으나 다른 것이다. 발행되던 초기에는

    논설을 주로 실었다. (손현숙,「몽고혁명의 배경」,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1990.)

    33) 손현숙, 위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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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드디어 소련은 몽골에 대해 극좌노선으로의 방향

    을 정한 뒤 사회주의 건설에 이로울 것 없다고 판단한 민족주의자들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점이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1937-39년이었다.

    이 시기에 인적 청산과 함께 수많은 지식인과 일반인들, 라마교 스님들 또한 혁

    명반역자로 누명을 쓰고 숙청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27585명과 관련된 사건이

    처리된 과정에서 20099명이 처형되고 5739명이 투옥되었다34). 이스. 보잉네메

    흐(С. Буяннэмэх), 임. 야담수렝(М. Ядамсүрэн), 이쉬. 아요쉬(Ш. Аюуш)가

    1937년에 정치적 일에 관련되어 숙청되었고, 데. 나착도르지(Д. Нацагдорж),

    췌. 담딩수렝(Ц. Дамдинсүрэн), 베. 린칭(Б. Ринчин), 데. 남닥(Д. Намдаг)

    같은 작가들은 감옥에 갇혀 처벌35)되었다.36)

    이러한 암흑기가 채 끝나기도 전인 1939년에는 할힝골(Халхын Гол)에서 일

    본과의 유일무이한 전쟁이 발발한다. 비록 소련의 도움이 컸다고는 하나 이 전쟁

    에서 거둔 승리는 몽골인들에게 단순한 기쁨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40년 몽골인민혁명당은 제10차 당대회에서, 몽골인민공화국은 이제 혁

    명의 단계를 지나 사회주의 건설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선언을 한다. 당시 몽골의

    문학은 당에 깊이 속해 있었으므로 당의 노선이 분명하게 전환했다면 그에 따른

    문학의 색깔도 달라졌을 것이다.

    1947년에는 내몽골에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외몽골과 내몽골의 통합은 훨씬

    멀어져버린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도 끝나고, 통합의 가능성이 늘 주시되고 있

    던 내몽골 또한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되자 외몽골도 국가 정책을 새롭게 하기

    시작한다. 그 중 한 가지는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1947년까

    지는 1년 단위의 경제개발정책을 시행해왔던 반면 1948년부터는 5년 단위의 개

    발계획을 시작한다. 또한 1948년 10월 15일에는 북한과 수교를 맺기도 했다.37)

    이렇게 국가를 새롭게 다시 정비해나가는 시점이었던 1948년에 제1회 몽골작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연구했던 혁명문학적 사회주의 리얼리즘

    방법의 필수 요건을 세 가지 기본 항목으로 구체화하였다. 그 첫 번째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새로운 사람들을 실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의 온갖 우

    수한 최상의 특징들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보여주고 있는 현실

    을 전면적으로 깊이 포함하고 있는 현상들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34) (Galbayar. G, 2004: 119) ; 생빌릭 발표자료집 재인용

    35) 데. 갈바타르,「몽골현대문학 연구의 문제점」, 제3회 한몽문학연구회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2005.

    36) 데. 나착도르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숙청당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소련

    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그동안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던

    나착도르지도 최근 숙청된 작가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岡田和行,「方便と般若」)

    37) 윤황, 「북한과 몽골의 관계발전 : 현황과 특징, 평가와 미래」, 『한국동북아논총』,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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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적인 일들을 그들의 혁명적 진보 운동, 신구 관계를 분명히 반영하여 보여주

    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문학은 당 원칙을 일관되게 증명하는 일이 되

    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초 몽골작가회의는 이렇게 문학이 가야할 길을 명확하

    게 제시해주었다. 몽골현대문학약사(1968) 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단지

    사실주의 전통을 발전시켜서 세운 것이 아니고, 현대 생활의 나아갈 운동에 걸림

    돌이 되고 있는 결점들을 비판하여 뿌리 뽑는 생산적인 성질로 가장 호전적인

    새 방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957년 4월 25-27일에는 제2회 몽골작가회의가 울란바타르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약 일주일 전 즈음에는 소련과학원 고리키 기념 세계문학연구소

    에서 리얼리즘 창작방법에 대한 국제적인 학술회의가 열렸다.38) 이 국제적인 학

    술회의는 북한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근대문학을 형성하기 위해 고

    리키에게 두 번이나 편지를 직접 보냈을 만큼 소련에 의지했던 몽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자명하리라 본다. 또한 이 국제적인 학술회의에서 제기된 내용들은

    약 1~2년 간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어오던 것들이었으므로 이 학술회의가 몽골

    작가회의와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가깝게 개최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잖은 영향

    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할 것이다.

    1960년에는 헌법이 개정되어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사회주의공화국으로 바

    뀌게 된다.39) 몽골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는 또한 같은 해에 낸 법령을 통해 사

    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한 기본적인 개

    성은 노동과 노동자를 보여주는 일이다. 사회주의를 모든 전방 전선으로 세우는

    큰 일이 진행되고 있는 현 시대에 조국을 번영․발전시키기 위하여 인민들을 진보

    시키고 있는 용감한 노력을 진실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일이 특히 요구되고 있

    다.”라고 했다.

    1988년 12월에는 시네칠렐 정책이 시행된다. 이어서 몽골 근대문학의 주된 사

    상이었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1989년 1월의 작가동맹 제8회 대회에서 정식으

    로 방기된다.40)

    38) 이 학술회의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일반원칙이 각 민족문학사의 구체적 경험과 어떻게 맞

    물리는지 그에 관한 방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리얼리즘 개념에 대해서는 엥겔스의

    명제인, “디테일의 진실성 외에 전형적 환경 속에 전형적 성격을 진실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합

    의되었다. 토론 결과 리얼리즘문학의 전 역사를 ‘리얼리즘과 반(反)리얼리즘의 투쟁’으로 파악하

    던 종래의 비변증법적인 입장이 폐기되고 리얼리즘을 합법칙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산물로 이

    해하자는 리얼리즘의 ‘역사화’가 합의되었다. 또한 이 원칙에 의해 세계문학사에서 리얼리즘이

    실제로 발생한 시점이 논란되었다. 즉, 구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 문학과 1830~50년대 러시아

    문학 두 시기가 리얼리즘 발생시기로 논란되었는데, 대다수 토론자는 르네상스기 발생설에 동의

    하였다. (김동훈(본명:김성수)수정완, 「북한학계 리얼리즘 논쟁의 검토」, 실천문학 , 1990 여름

    호.)

    39) 배석규, 대몽골 시간여행 , 굿모닝미디어, 2004,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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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내적인 성격에 의한 구분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건 중심의 구분이므로

    향후 수정은 불가피하겠지만, 거칠게나마 앞의 내용을 토대로 몽골근대문학 시대

    구분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1921-1939

    2) 1940-1947

    3) 1948-1956

    4) 1957-1989

    5) 1990-현재

    3. 몽골의 민담형 단편서사 - 한국의 ‘서사적 논설’과의 비교 분석

    본격적인 고찰로 들어가기에 앞서 근대 이전의 몽골 문학에 대해 간단하게나

    마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몽골은 구비전승문화가 강한 나라이

    다. 그렇다고 기록문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착문화를 기반으로 해온

    나라들에 비하면 구비문학에 훨씬 치우쳐 있던 게 사실이다. 문학의 측면만 살펴

    보자면 우선 기본이 되었던 것은 ‘토올(тууль :서사시)’이었다. ‘토올’은 구비전

    승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그 중 장가르(Жангар) 나 게세르(Гэсэр) 같은 일부

    작품들이 기록되어 전해오기도 한다. 서사시 가운데 기록화 되어 문자로 기록되

    어 전해지는 ‘토오즈(тууж)’라는 형태도 있다. 이것은 현재 몽골에서 ‘중편소설’

    이라는 의미의 용어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혼란을 막기 위해 전자의 것을 ‘야로

    토오즈(яруу тууж)’라고도 한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국의 영향으로 새롭게

    변이된 형태도 나타나는데 이를 ‘벤승울게르(бэнсэн үлгэр)’라고 한다. 내몽골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벤승울게르’는 ‘울게르(үлгэр :이야기, 민담, 설화)’라

    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전통적인 운문 형식에서 벗어나 산문성이 강화

    된 즉, 운문과 산문의 교차형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근대적인 산문 개념으로 이

    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형태면으로 보면 계속해서 행갈이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

    문에, 어디까지나 이것은 운문성이 강한 산문 또는 산문형 운문이라고 해야 더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학 장르 가운데에서는 ‘판본설화’ 또는 ‘판소

    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41)

    근대 이전까지의 몽골에는 이렇다 할 ‘줄글’ 형태의 산문이 없었다고 할 수 있

    다. 따라서 정착문화 위에 오랜 기록문화전통을 지녀온 한국과의 차이는 지극히

    40) 岡田和行,「方便と般若」

    41) 이선아, 「몽골 영웅서사시 연구」, 고려대 석사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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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다. 이는 우열을 가릴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ㆍ문화 위에 특정 기

    준에 의한 비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당부하고 넘어가고자 하는 까닭은 우선 그 차이를 살펴봤을 때 한국이 시기적으

    로 앞서 있고, 작품의 분량 및 성과 정도도 더 많아 자칫 본고의 의도를 한국과

    몽골의 문학을 우열관계를 연구한 것으로 오해함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국내에는 ‘민담형 단편서사’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가 없었고, 또한 본

    논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서사적 논설’과의 비교분석에 앞서 간단하게나

    마 ‘민담형 단편서사’에 대해 살펴보는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1) 민담형 단편서사

    ‘민담형 단편서사42)’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담’을 기본으로 하여 창

    작했던 새로운 장르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21년에 인민혁명을 통해 독립

    을 이룬 몽골인민정부는 새로운 근대국가수립 및 근대국민 만들기에 가장 주력

    한다. 몽골 인민혁명이 지니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몽골의 독립에 대해 중국

    과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밀고 당기기’ 사이에서 덤으로 얻어진 것처럼 말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몽골은 이미 1911

    년에도 독립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임시적으로나마 독립을 이룬 것처럼 보였으

    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