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헵번 브랜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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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1993

CONTENTS

Ⅰ. 브랜드 선정

나에게 최고의 브랜드는 “오드리헵번” 입니다

Ⅱ. 브랜드 분석

1. 오드리헵번의 시작

소녀, 발레를 놓고 배우가 되다

2. 오드리헵번의 영화인생

그녀를 있게 한 주옥 같은 영화들

3. 오드리룩의 탄생

지금까지도 사랑 받는 오드리룩

4. 여자로서의 그녀의 삶

연인, 아내, 어머니 오드리헵번

5. 유니세프와의 아름다운 여정

그녀가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6. 그녀가 전하고 싶었던 말

모든 이의 가슴속에 ‘울림’으로 남다

+Plus

그녀를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곳

‘오드리헵번 카페’를 다녀오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의 오드리헵번은?

스타들의 오드리헵번 오마주

Ⅲ. 브랜드인사이트

그녀 자체가 이미 강력한 브랜드다.

“ 내 마음을 송두리째 가져간 이 장면,

그때부터 그녀는

나의 공주님이 되었다. ”

Ⅰ. 브랜드 선정

“나에게 최고의 브랜드는 오드리헵번 입니다.”

나는아주어렸을때부터고등학생까지

철저한단발을고수했었다. 그것은여자

는모습에서부터항상단정하고예의가

있어야한다는어머니의엄격한규율때

문이었다. 그덕분에나는한번도머리를

길러본적이없는똑단발을고수했었다.

그래서늘친구들의놀림거리의연속이

었다. 아직도기억이난다. 또다시머리

가어깨에살짝닿을까말까하던즈음나

는또강제로머리카락을댕강잘리고야

말았었다.

익숙했었지만한창외모에신경쓰기

시작할나이에는더욱서러웠던적이있

었다. 그때그런나에게어머니가보여주

신영화한편이있었는데그게바로오드

리헵번의 ‘로마의휴일’이었다.

로마의휴일영화를보다보면공주인

오드리헵번이머리를짧게잘라달라고

하고는너무나짧아진자신의머리를보

고깜짝놀라지만이내바로행복한웃음

을지으며자신의머리를만져보는장면

이있다. 그때나는모든마음을빼앗기

고말았었다. 여자가여자한테반할수도

있다는것을새삼처음알았던것같다.

그이후로는나는내단발이막좋아지

지는않았지만커트를할때면괜히오드

리헵번을따라거울을보고웃었던것같

다.

그이후로세월이흘러그똑단발어린

아이는대학생이되었다. 여대에다니기

시작하면서나는내가여자라는사실이

마음에들지않았고힘쓰는건왜남자가

더잘하나, 이런건왜남자가해야하는

건가, 여자는왜보호받아야하는사람인

가하는물음에대해세상에대한분노가

약간있었던때였다. 나도남자처럼멋지

고크고대담한것을하고싶었고그게부

러웠었다. 한오빠를동경하며그게더커

져만갔었다.

그때도우연히어렸을적보았던로마의

휴일을보았었다. 어렸을때는똑단발오

드리헵번만눈에들어오더니크고나서

보니그때는보이지않았던 ‘여자오드리

헵번’이눈에들어왔다. 그때도지금도

로마의휴일은내게내가몰랐던사실을

알려주었다. ‘똑단발이얼마나사랑스러

운것인가’와 ‘여자로태어난것이얼마

나행복한것인가’가그것이었다.

Ⅰ. 브랜드 선정

그녀의영화를보면서내가여자로태어

나살아가는것이얼마나행복할수있는

지축복받은것임을알려주었다. 남자가

가지지못한여자가가질수있는아름다

운형용사가그녀를보면마구마구솟구

쳤다. ‘우아함, 고상함, 사랑스러움, 지혜,

아름다움.’ 그들은가지지못하지만여성

인나는가질수있고누릴수있는찬란

한의미들과표현이었다. 그리고그모든

것이그녀에게는있었다. 그래서나는다

시그녀와공감하기를원했고그녀를닮

기를원했다.

여자로태어났으면오드리헵번처럼살

고싶었다. 그래서나는그녀의모든것에

영향을받게되었고그녀의모습에서내

미래를꿈꾸었다. 나도늙어서도블랙미

니드레스를입고우아하게걸을수있는

아름다운여자가되고싶었다. 예쁘기보

다는아름다운여자가되고싶었다. 마음

까지아름다운사람이되고싶었다.

이렇게오드리헵번처럼스타일과휴머

니즘을동시에겸비한여배우가있었을

까. 그녀가세상을떠난지도오래지만여

전히그녀는마치살아있는것처럼우리

곁에존재하며여전히우리는그녀를자

신의워너비, 롤모델로두고있다.

동화라는것이정말있다면나의동화

속에서오래오래예쁘게있어줄나의공

주님, 오드리헵번은그래서

“나는 내가 여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일이 흘러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오드리헵번-

Ⅱ. 브랜드 분석 오드리헵번의 시작

소녀, 발레를 놓고 배우가 되다

그녀와함께일했던살바토레페라가모는오드리헵번을보고이렇게말했다.

“오드리헵번의길고얇은발은키와완벽한비율을이룬다.”

이렇듯그녀의영화나사진을보면유달리그녀의가녀린발과우아한자세들이눈길

을끌때가많다. 이는오드리헵번의타고난외적인면모도있지만어렸을때부터꾸

준히해온발레의영향이크기때문일것이다. 당연히자신도발레리나가될줄알았

다던오드리헵번은어떻게해서배우의길로들어선것일까?

꿈의 발레에서 생계수단의 발레로

오드리헵번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내성적인

아이여서 어머니의 선택으로 영국 기숙사 학

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 때부터

학교생활을 하면서 오드리헵번은 발레 레슨

을 받게 되었고 어머니의 그러한 선택 덕분에

음악과 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발레 교습을 받으며 제 2의 안나 파블

로바가 되기를 꿈꾸는 소녀로 자라났다.

그러다가 전쟁이 나기 시작하면서 집안 사정

이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오드리헵번은 발레

에 대한 꿈의 길을 정진해나갔다.

그런 오드리헵번을 위해 귀족출신임에도 불

구하고 오드리헵번의 어머니는 갖은 허드렛

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딸의 오페라하우스

정기권을 끊어주었고 그녀는 매번 그 먼 곳을

걸어서 공연을 보러 갔다 오곤 했다고 한다.

남겨진 자료에서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발레

에 열성적이었는지 알 수가 있는데, 그녀는

물자적으로 부족한 와중에도 펠트천으로 토

슈즈를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하지만 꿈을 위한 발레만 할 수는 없었다. 그

래서 어린 오드리헵번은 마을에 있는 마을 극

장에서 솔로 공연을 했고 공연이 끝나면 오드

리헵번은 모자에 돈을 걷어 가족의 생활비로

쓰고는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에게 발레는

꿈의 수단이자 생계수단의 수단이었다.

우연히 배우의 길로 들어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발레리나가

되기를 원했지만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발레리

나와 어울리지 않는 신체조건임을 깨닫게 된

다. 바로 170센티미터인 장신이었던 점이 걸림

돌으로 작용한 것. 그렇게 좌절의 시기를 보내

고 있을 때에도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

던 오드리헵번은 뮤지컬일과 영화, 연극 단역

배우의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생계수단으로 한 일 중 일부였다.

오드리헵번도 스스로 “나는 돈이 필요했고 결

국 나는 뮤지컬 무대에 서게 되었다. 영화에 출

연하게 된 것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라고

밝혔었다.

그러던 중 연극 ‘지지’의 주연을 맡으면서 브

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둔 헵번은 영화 로마

의 휴일 여주인공을 물색하고 있었던 감독 윌리

엄 와일러에게 눈에 띄게 되었고 그녀가 청순

하면서도 우아한 앤 공주에 적격이라고 생각

한 그는 그녀를 앤 공주에 캐스팅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그녀는 영

화 로마의 휴일로 세계 영화 팬의 연인이자 워

너비로 이름을 올렸고 지금의 오드리헵번을

만드는 시작이 되었다.

그녀의 배우 데뷔에 얽힌 일화

“그녀는 이름은

‘오드리헵번’이 아닐 수도 있었다?”

오드리헵번이 배우 데뷔를 앞두고 있을 무렵,

당시 여배우 캐서린 헵번은 강렬한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휩쓰는 그야말로 할리우드

대표스타였다. 그래서 이름이 겹치는 이유로

그녀의 영화사 사장은 그녀에게 가명을

권유했지만 오드리헵번은 단호하게 “나는

오드리 헵번이예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세상 앞에 나갈 것이고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겁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라고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녀의 이런 당찬 자신감과

태도가 그녀를 정상에 올라놓은 것은 아닐까.

“오드리는 나타샤이다.

그녀는 책에서 튀어나온

주인공 같다”

-<전쟁과 평화> 영화감독 킹 비더-

Ⅱ. 브랜드 분석 오드리헵번의 영화 인생

그녀를 있게 한 주옥 같은 영화들

오드리헵번은로마의휴일로아카데미상을휩쓸며이른바 ‘자고나니스타’가된다.

하지만이런폭발적인인기에자만하지않고그녀답게꾸준히작품활동을이어나가

며반짝스타가아님을꾸준히증명해보였다. 그녀의필모그래피를보면한가지사

실을알수가있는데바로오드리헵번이고수하는일관된취향이다. 그녀의영화를보

면노출과폭력, 성적암시, 여성학대내용과같은자극적인내용이없는것으로보아

그런영화장르들은단호히거부했는것으로보여진다. 대신그녀는그녀가처음성공

을거둔로마의휴일처럼밝고순수하며긍정적인여주인공역할을주로했는데, 그

중에서도로맨틱코미디가압도적이다. 또캐릭터분석을해보면여배우로서에로틱

한이미지를내세우는대신언제나그녀는타고난기품으로내재된상류층여인이미

지가녹아들어있는영화주인공을많이선택한것을알수있다.

그녀의 영화 필모그라피

1953 1954

1956

19571959

로마의휴일-앤 공주역몬테카를로 베이비-린다패럴 역

사브리나-사브리나 페어 챠일드 역

전쟁과 평화-나타샤 역

메이어 링- 마리 역화니페이스-조스톡턴 역하오의 연정-아리안 역

녹색의 장원-리마 역수녀 이야기-루크 수녀 역

196019611963

1976

1964

1966 1967

1979

198119871989

용서받지 못할 자-레이첼 제커리 역티파니에서 아침을-할리 고라이틀리 역아이들의 시간-카렌 역

샤레이드-레지나 렘퍼트 역

뜨거운 포옹-가브리엘 심슨 역마이 페어 레이디-일라이자 둘리툴 역

백만달러의 사랑-니콜 역 언제나 둘이서-조안나 월러스 역어두워질 때까지-수지 헨드릭스 역

로빈과 마이엔-메이드 마리엔 역

혈선-엘리자베스 역

뉴욕의 연인들-안젤라 역연인과 도둑-캐롤라인 남작 부인 역올웨이즈-헵 역

대표작 영화 TOP3

로마의 휴일

공주와 신문기자의 신분을 초월한 알콩달콩한 로맨스 영화로 오드리헵번을 단숨에 할리우드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작

품이며 흑백영화지만 지금까지도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되고 있는 영화이다. 이 작품으로 각종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을 꿰찼으며 그 해 1953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여우주연상 이외에도 각본상, 디자인상을 모두 휩쓸어버렸다. 그

야말로 오드리헵번 출연작 중 단연 흥행성과 작품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 영화덕분에 트레비분수와 진실의 입은

로마의 유명한 관광명소로 자리잡았고 관련 씬들은 아직까지도 영화 역사상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이 진실의 입에서 손을 넣는 장면은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사실 이 장면은 처음 정식으로 연기에 도전

하는 오드리헵번의 연기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인공 그레고리팩이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애드리브였다고 전해지고 있

다. 또한 그녀의 패션 뿐만아니라 짧은 뱅 헤어스타일도 크게 유행을 끌었다. 당시 보그의 세실비턴은 ‘나무그늘아래 쥐

가 갉아 먹은 머리스타일에 창백한 얼굴을 한 비쩍 마른 아가씨들이 넘쳐 났다.”라고 오드리햅번 따라하기 열풍을 보도

했을 정도였고 일본의 경우는 그녀의 머리가 유행해 짧아진 머리만큼 머리 감는 비용을 낮춰야 한다는 운동이 있었을 정

도였다고 하니 그녀의 워너비 열풍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라 신분상승을 하기 위해 정착한 맨하탄에서 그녀가 부유한 사람과

는 거리가 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보지 않았

어도 모두가 다 아는 저 오프닝 장면이 있는데, 바로 극 중 오드리헵번이 우울할 때마다 선망하는 티파니에서 구경하며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먹으며 마음을 달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이 장면에서 오드리헵번이 입었던 블랙미니드

레스는 또 다시 오드리헵번 열풍을 불러일으킨 아이템으로 아직까지도 그녀를 떠올리면 블랙미니드레스를 연상할 만

큼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룩으로 자리 잡았다. 이 드레스는 2006년 12월 한 런던 경매장에서 41만 파운드에 팔려 영화

의상 중 가장 비싸고 유명한 드레스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또한 오드리헵번이 청바지를 입고 창문

에 한 쪽 다리를 올리고 걸터앉아서 기타를 치며 ‘Moon River’를 노래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이 노래는 그녀의 대

표적인 주제곡이 되었고 34회 아카데미상에서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받기도 했다.

사브리나

이영화역시도마찬가지로로맨틱코미디장르이다. 사브리나는평

범한외모에서미녀로변신해파리에서멋지게변신해돌아와자신

에게관심없던데이비드와사랑을시작하나나중에는그의형라이

너스로사랑의대상이바뀌면서그녀의사랑이외적인면에서내적

인사랑으로변하는줄거리를담고있다. 이영화는특히오드리헵번

의패션이정점을찍은영화로평가받고있다. 그중심에는바로오

드리헵번과지방시의첫만남이있었는데둘의합작으로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드레스등유명한패션아이템을성공시켰고이후에

도계속오드리의의상은지방시가맡게되는계기가되었다.

“그녀의 패션은 비범하되

절대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오드리 스타일이다.”

-책 <워너비 오드리>中 -

Ⅱ. 브랜드 분석 오드리룩의 탄생

지금까지도 사랑 받는 오드리룩

그녀의모든영화에서그녀의패션은단연화제거리였고영화내용이외의또하나의즐거운볼

거리중하나였다. 그리고여전히그녀의패션은현재의패션계에도막강한영향력을선사하고

있으며다양한디자이너의영원한뮤즈로자리하고있다. 그녀의패션은분명무언가가다르다.

그래서 ‘오드리룩’이라불리는패션에대해서낱낱이파헤쳐보았다.

오드리헵번만의 패션 철학

“옷이라는 것 자체가 내게는 엄청나게 중요

하다. 언제나 그랬다. 연기를 시작했을 때 연

기 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 특별한 기술이 없었

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되고자 하는

것을 가장하는 법을 배웠다. 마치 어린아이들

처럼.”

“신이 내게 허락한 최고의 선물은 옷을 고를

수 있는 심미안이다. 내 배역에 맞는 옷을 입

으면 옷에 맞는 표정과 행동, 태도가 나온다.”

이것은 ‘워너비 오드리’라는 책에 기술되어

있는 오드리헵번의 생전 한 인터뷰 내용이다.

이 내용만 보아도 그녀가 여배우로서, 영화배

우로서 옷에 남다른 신경을 쓰고 애착을 가졌

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 말은 그녀는 자신의 배역과 잘 어울

리는 옷을 입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도를 해보

았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

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스타일의 옷을 가장 좋

아했을까? 이 궁금증 또한 이 책에 서술된 내

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양보다 질이 돋보이는 옷장을 가지

고 있었다. 옷들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다.

블랙드레스, 화이트 블라우스, 우아한 정장,

그녀는 최신유행이 늘 최고의 선택은 아니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함을 가장 좋아했

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패션을 따라하려는 이

들에게 이렇게 말했나보다.

“프릴을 떼어내고, 나비매듭을 치워버려라.

옷과 몸의 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시와의 인연

우리가 대개 알고 있고 유명하다고 생각하는

오드리룩은 거의 모두 지방시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영화 속 작품 의상 뿐

만 아니라 평소에도 지방시 옷을 즐겨 입었다

고 하니 오드리룩은 지방시가 완성했다고 봐

도 될 정도이다.

오드리헵번과 지방시의 첫 만남의 처음은 꽤

흥미롭다. 오드리헵번은 ‘사브리나’라는 작품

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배역에 맞는 의상들을

찾으러 다녔었다. 그리고 그 때 지방시를 찾

아가게 되었었다. 방문하기 전 약속을 잡아

놓은 상태였고 헵번(캐서린 헵번)이 온다는

사실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온 것

은 ‘오드리헵번’이라 당황했었다고 한다.

사실 그 때는 로마의 휴일 개봉 전이라 그녀

의 이름이 유명해지기 전이었었다. 약간 실망

한 그는 콜렉션 준비로 바빠서 그녀의 의상을

만들어 줄 수 없다고 그녀에게 얘기했지만 그

녀는 그 콜렉션 스케치한 것이라도 보여달라

고 당돌히 요구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스

케치를 보고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거예요!”

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가 당돌하다고 생각했지만 저녁식

사를 함께 하면서 그는 그녀의 얘기를 자세히

듣게 된다. 그녀는 그에게 그 동안의 자신의

인생과 영화에 캐스팅된 사연까지 차분히 얘

기하게 되고 그들은 첫 만남부터 서로 깊은 유

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고 오드리헵번은 그가 자신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자신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사실

에 감동받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녀는 영화 작품에 들어갈 때 마

다 지방시의 옷을 찾게 되었다. 그게 바로 오

드리룩의 시작이었다.

당시

지방시의 스케치와

영화 <사브리나>에서

입었던 드레스

그 둘의 만남은 연이은 패션계의 화제를 만들었으며 그녀가 타계하기 바로 전까지 지방시는 그녀의 모

든 코디를 도맡아서 진행하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그녀가 지방시의 옷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는 생전 인터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입었을 때 나에게 딱 맞는다고 느껴지는 유일한 옷이 바로 지방시의 옷이다”

“지방시의 옷은 헤질 때까지 입을 수 있을뿐더러 그런 뒤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특히 그녀가 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에도 지방시의 옷을 가슴에 품고 키스했다고 하니 지방시와의 인연

은 그녀에게 너무나 특별했다. 그렇게 오랜 파트너이자 친구였던 지방시 디자이너 역시 그녀에 대한 애

착을 감추지 않고 늘 오드리헵번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위해 만든 옷을 가지고 자신만의 무엇을 더해 한 발짝 더 나아간 스타일을 보여

주었다.”

오드리헵번이유행시킨 아이템

1. 셔츠와롱스커트의 앙상블

하얀 셔츠에 허리부분은 꽉 조이고 아

래로 가면서 넓게 퍼지는 풀 스커트는

허리부분의 날씬함과 여성스러움을 한

층 돋보이게 만든다. 특히 오드리헵번

과 같이 키가 큰 여성이 입으면 키가 큰

단점을 보완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 룩.

특히 로마의 휴일 중 슈프레 강에서의

장면을 위해, 오드리 햅번은 디자이너

에게 스케치를 다시 보내 더 심플해진

네크라인과 넓은 벨트, 플래퍼 슈즈를

제안해 본인만의 오드리룩으로 소화해

낸 일화로 유명하다.

2. 카프리룩

영화 사브리나에서 유명해진

‘사브리나 팬츠’ .

사브리나 팬츠는 발목 위까지 오는 팬

츠로 그녀는 굽이 낮은 플랫슈즈를 함

께 매치해서 심플한 느낌을 한층 강화

했다.

3. 하이-넥 펜슬 드레스

평소 마른 몸매라 두드러졌던 쇄골

을 가리기 위해 입었던 하이 넥 펜슬

드레스가 영화 <샤레이드>룩으로 유

명해졌다.

4. 트렌치 코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샤레이드>에서 오드리 햅번은 가녀린

몸을 트렌치 코트로 감싸고 허리끈을

묶는 스타일로 특유의 매력을 발산했

다. 그에 더해 캣-아이 선글라스와 헤

드 스카프에 허리 주위를 타이트하게

매듭을 지었다. 햅번은 이처럼 누구보

다 스카프를 잘 활용한 여자 배우였다.

5. 칵테일 미니 드레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여성

들의 눈길을 한번에 사로잡은 미니칵

테일드레스 룩.

그 중에서도 오프닝장면에서의 오드

리룩은 가히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올린 머리에 진주 목걸이, 챙이 넓은

모자는 우아한 여성룩의 표본이 되었

고 하얀 토끼털로 장식한 양 가죽 장갑,

키튼 힐과 화이트미니드레스는 완벽한

야외 파티룩을 완성시켰다.

“언젠가는 나는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할겁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오드리헵번-

Ⅱ. 브랜드 분석 여자로서의 그녀의 삶

연인, 아내, 어머니 오드리헵번

그녀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연기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

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사생활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나는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내 살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여배우였지만 여배우이기 이전의 여자로서의 삶에 좀 더 충실하고 싶고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녀의 여자로서의 삶은 여배우로서의 삶보다 순탄치는 않았다.

그녀에게 가정이 중요한 이유

그녀가 이토록 가정을 만들기 원했던 이유와

유지하려고 애썼던 이유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

오드리헵번의 가족이 평범하지 못했기 때문이

다.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부모의 이혼, 전쟁으

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 등은 오

드리헵번이 사랑에 목마른 여자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단란한 가정에서 남편의 사랑

을 받고 아이들이 행복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모

습을 보고 싶어했다는 주변 얘기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를 위해 나중에는 여배우의 명성을 뒤

로 한 채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의 어머니로 헌

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찾아온 세 번의 사랑

그녀의 러브스토리도 영화만큼 다이나믹하

다. 그녀는 두 번의 결혼을 하고 두 번의 이혼을

했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한 남자와 사랑을 나

눴지만 이혼의 아픔 때문에 마지막 남자와는 결

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첫 번째 남편, 멜 펠러

1953년 여름, 오드리헵번과 멜 펠러는 로마

의 휴일 남주인공인 그레고리펙의 소개로 만나

게 되었다. 둘의 사랑은 곧 결혼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때 당시의 오드리헵번의 나이는 25

세, 남편 멜 펠러는 그녀보다 12살 연상이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결혼은 첫 번째 결혼이 아니

고 세 번째 결혼이었다고 한다. 그는 배우, 감

독, 프로듀서, 동화작가, 사진작가 등등을 할 정

도의 소문난 일 벌레였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기 바로 직전에 ‘온디네’라는 공연을 함께

하고 바로 스위스로 건너가 작은 교회에서 조촐

한 결혼식을 진행했다.

결혼을 한 이후 오드리헵번은 빨리 아이를 낳

기 원했지만 첫째 아들 ‘션 헵번 페러’를 낳기

전까지 꽤 오래 걸렸고 연이어 바로 파경을 맞

이한다. 그 이유는 바로 멜 펠러와 프랑스 여배

우와의 외도 때문이었다.

사실 결혼 이후에도 오드리헵번은 연이은 영

화 작품의 성공으로 승승장구를 하던 반면에 멜

펠러는 매번 실패를 거듭했다. 그래서 그 둘의

파경이 ‘결국 성공하는 와이프를 지켜볼 수 밖

에 없었던 남편의 괴로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

까’하는 추측을 당시 언론들은 조심스럽게 했

다고 한다.

두 번째 남편, 안드리아 도티

그녀는 첫 번째 이혼의 상실감 이후로 힘들어

하다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드리헵번보다 9살 연하인 정신과 의사

‘안드리아 도티’이다. 이 둘은 오드리헵번이 자

신의 아들과 요트여행을 하면서 처음 만나 결혼

을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둘의 만남이 이 때

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오드리헵번이 로마의 휴일을 촬영하던 시절

한 꼬마가 그녀에게 와서 “나는 커서 당신과 꼭

결혼을 하고 말거예요!”라고 소리쳐서 촬영장

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꼬마가 커서 다시 오드리헵번에게 대시를 했고

꿈이 이뤄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결혼은 정

말 영화 같은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둘 사이에서도 역시 아들 ‘루카’를 낳았지

만 지독한 바람둥이었던 안드리아 도티와의 결

혼도 역시 파경이라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세 번째 사랑, 로버트 월더스

오드리헵번의 사랑은 두 번 다 실패였지만 죽

기 전에 다시 한번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다. 바

로 그녀의 소울메이트라고 불리웠던 ‘로버트

월더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도 생전에 그와의 관계를 “결혼이 그 어떤

것도 충만하지 못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다”

라고 얘기한 바 있다. 결국 운명의 짝을 만났지

만 이전의 두 번의 이혼경험으로 선뜻 그와 결

혼을 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행하고자 했던 그녀의 구호

활동에도 도움을 주며 그녀의 마지막을 곁에서

끝까지 지키는 마지막 남자가 된다.

간절한 꿈, 어머니

그녀의 꿈은 ‘어머니’였다. 앞서 언급한 바 그

녀는 결혼 직후에도 빨리 아이를 낳고 싶어했는

데 출산이 늦어진 이유에는 남편의 이유도 있긴

했지만 영화사의 잘못된 계약으로 쉴 수가 없었

고 그래서 여러 번의 유산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여러 번의 유산 후 낳은 첫 아들 ‘션 헵

번 페러’는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그녀는 촬영장에 있으면서도 아들과 함께 있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했고 둘째 아들 루카를 낳은

이후로 그녀는 할리우드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

고 10여년이 지나도록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결정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생전 말에서도 “나는 영화계를 떠나 아

이들 곁으로 간 결정을 단 1초도 후회한 적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그녀의 친구였던 지

방시 디자이너도 “오드리는 아이를 쉽게 갖지

못했다. 그래서 첫 아들 션을 낳았을 때 그녀는

신이 그녀에게 은총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

다.”라고 그녀의 말을 대신 전했다.

둘째 루카를 낳고 나자 그녀는 더 이상 일을 하

고 싶지 않아했다. 그리고 오드리는 “인생이 너

무 짧다고 말하곤 했다.”라고 인터뷰 한 바 있

다. 그녀는 여배우로서 후회되는 삶보다 어머

니로서 후회되는 삶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얼굴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은바로 그녀의 내면에서 투영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오드리 헵번 -

Ⅱ. 브랜드 분석 유니세프와의 아름다운 여정

그녀,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되다.

그녀가 예쁜 여배우가 아닌 ‘아름다운 여배우’의 대명사로 아직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예쁜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죽는 그 순간까지 함께한 그녀의 봉사활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봉

사를 처음에는 안 좋게 보는 시선들도 많았다. ‘공주’다운 역할을 많이 해온 탓에 일부 사람들에게 영화 밖

에서까지도 자신이 공주인 줄 안다면서 그녀의 봉사는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투병사실을 숨기면서까지 하였던 그녀의 진심 어린 봉사는 결국엔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켰

다.

그녀가 진심일 수 밖에 없었던 동기

그녀가 구호활동 봉사에 진심일 수 밖에 없었

던 이유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를 세가지 정도로 추려보

았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그녀는 어린 시절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한 말 중 “나는 전

쟁을 겪었다. 그래서 굶주림과 가진 것을 박탈

당하는 아픔과 어려움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보

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문

턱에 서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볼 때면 그

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구절에도

그녀에 봉사에 대한 진심이 묻어난다.

어린 시절의 뼈아픈 전쟁의 경험은 훗날 ‘안네

의 일기’ 영화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 때 묻어두었던 아픈 경험이 그 영화로 인해

다시 되살아 날까봐 두려워서여서 거절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녀가 전쟁으로 죽어가던 때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릴 때 독일군에 붙잡힐 위기에 처했었

는데 그녀는 그 때 무너진 집의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빈혈과 부종 황달은 어린 그녀

를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르게 하고 있었다.

그 때 그녀를 살린 것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유

엔 구제 부흥 사업국에서 보내준 구호상자였

다.

그때를 떠올리며 그녀는 유니세프에 헌신적인

이유를 “저는 유니세프가 전 세계 어린이를 위

해 하는 일을 깊이 신뢰하며 감사하고 있어요.

유니세프는 전 세계 어린이에게 큰 희망이라는

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세계 2차대전이 끝

난 직후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한 바 있다.

세 번째 이유는 아버지의 잘못을 사죄하기 위

해서이다. 그녀의 부모는 초창기 나치 지지자

였다. 다행히 어머니는 곧 빠져 나왔지만 오드

리헵번의 아버지는 나치에 협력한 죄목으로 수

용소로 보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타가 된 후에도 가족사를 철

저히 비밀에 부쳤었다. 그것은 1950년대 스타

에게는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는 치명적인 약

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오드

리헵번은 자신의 아버지의 죄를 진심으로 사죄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구호활동 봉사에 더욱더 진심이었을 것이고 헌

신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니세프 활동

그녀는 1988년 특별 초대된 마카오의 한 음

악콘서트에 기금모음행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자신이 배우로 오래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의 영화경력과 명성이 아직도 세상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고 그것이 자선기금 모금에 커

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명성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장소에서 확인한 그녀는 유

니세프를 직접 찾아가 자발적으로 국제 기금에

자신의 의사를 내비쳤고 유니세프 역시 그녀가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녀를 국제기금

친선대사로 임명하게 된다.

오드리햅번은 유니세프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제 자신이 2차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

과 의약품을 지원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

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

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

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오드리는 그 때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문제점을 확인하고 그 내

용을 세계에 알리는 친선대사의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 진정성을 의심받았던 처음 그녀의 봉

사활동은 자신의 식사량을 줄이면서까지 열정

적이었고 결장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그 사실을

숨기며 예정되어 있었던 봉사활동을 펼쳐 그녀

는 끝내 진정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 후 그녀의 노력덕분에 유니세프의 인지도

는 올라갔고 유니세프 미국지부의 자선기금 액

수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라갔다.

1992년 그녀는 헌신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의회의 최고시민상과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그리고 1993년에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녀를 위한 ‘인도주의

상’ 시상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오드리헵번은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한 채 자택에서 63세로 숨

을 거둔다.

1998년부터 시작된 그녀의 선행은 그녀가 타

계한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홈페이지 오드리헵

번닷(http://www.audreyhepburn.com)

을 통해 The Aurdrey Hepburn Children’s

Fund로 이어지고 있다.

Ⅱ. 브랜드 분석 그녀가 전하고 싶었던 말

모든 이의 가슴속에

‘울림’으로 남다

오드리햅번이 숨을 거두기 일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때에 유언으로 아들에게 들려주었던 시.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네 자신이 결코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져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며,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고,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라는 것을. "

+ Plus

그녀를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곳

‘오드리헵번 카페’를 다녀오다

오드리헵번 카페의 시작

오드리헵번 카페 ceo인 김석훈씨는 어렸을 때부터 오드리헵번의 영화를 보며 자

랐다. 그에게 그녀의 웃음은 어린 시절 그를 웃음짓게 만들었고 그는 세월이 흘러 작

은 외식브랜드 대표가 되었다. 그가 오드리헵번의 카페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문득

로마의 휴일을 지인들과 보다가 ‘오드리헵번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세기의 연인, 영원한 박애주의자, 천사인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와야겠다는 뭔지 모를 강한 의무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오드리헵번 재단을 대리하고 있는 ‘인피니스’라는 법률회사를 통

해 오드리재단에 그녀의 이름을 내건 카페를 한국에 런칭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그녀의 이름이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은 재단에서 번번히 거절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설득해 결국 2013년 8월 30일 서울에

서 오드리헵번 카페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는 서울 이외에도

한국 다양한 지역에서 오드리헵번 카페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재단 인사말 “나이가 들어가며, 삶의 작은 순간들은 그 중요성과 의미를 더해갑니다. 매일 아침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의 첫 커피를 함께하는, 작지만 보물 같은 순간이 그렇

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언제나 그 순간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모닝커피를

함께 마시며 우리는 새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난 일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또한 그

날 하루와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연하게 내린 커피에 쌕쌕 소리가 날 정도로 뜨거운 우유를 넣어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오드리헵번에게 진한 커피나 에스프레소는 없었습니

다. 여러분도 오드리헵번 카페에서 나누는 커피 한 잔과함께, 잠시 모든 것을 멈추

고..눈을 감고, 과거를 돌아보거나 또는 미래를 생각하며 그 작지만 소중한 순간들

을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션 헵번 페러

+ Plus

오드리헵번 카페 BI

오드리헵번의 트레이드마크인

아름다운 눈, 짙은 눈썹, 헤어

스타일을 담아 내었고 또한 그

녀의 친필 싸인을 그대로 메인

폰트로 사용하고 있다.

심볼 로고는 재단의 대표이며

그녀의 둘째 아들인 ‘루카 도

티’가 직접 선별한 것으로 오드

리헵번 카페를 대표하는 다양

한 아이템을 이미지화 하였다.

“오드리 헵번 카페를 직접 다녀오다”

+ Plus“커피잔, 진동벨, 영수증, 슬리브, 포장, 아이스크림 통, 심

지어 냅킷에도 온통 그녀의 사진과 로고들로 이루어져

이 곳이 ‘오드리헵번 카페'임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오드리 헵번 카페의 로고나 사진들이 카페 패키지들에 적절히 있어서 그것들이 오드리헵번카페라는 특유의 분위기를 잘 조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팬이라면 한 번쯤 와보면 괜찮을 것 같은 카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는 카페를 둘러보며 좀 더 오드리헵번 카페만의 무언가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는 카페라면 분명 이 공간은 그녀를 추억하고 그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여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첫째, 메뉴에 오드리헵번이 평소에 즐겨 마셨다던 커피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한 메뉴가 하나

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째, 진동 벨소리가 진동 벨 보다 그녀의 주제곡인 ‘문 리버’의 멜로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셋째, 계속 앉아있으면서 거슬렸던 부분이 그냥 다른카페에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대중가요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이보다는좀 더 특색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음성이나 영화 속에서 나온 대사들을 이은 음악파일들이 흐르고 있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좀 더 추가하자면 카페 내에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던데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오드리헵번의 판넬들이 적절한 곳에 배치가 되어 있으면 포토존으로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Plus

앙케이트 조사

한국의 ‘오드리 헵번’ 은 누구?

한국의 오드리헵번이 될 만한 여배우 후보들을 미리 추천 받고 총 60명의사람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의 오드리헵번을 골라보도록 해보았다.

40%

20%

15%

15%

10%정혜영

유진

김혜자

한지민

김태희

정혜영>유진>김혜자=한지민>김태희

정혜영과 김혜자, 한지민은 오드리헵번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닮은 여배우라

는 이유가 많았고, 유진은 오드리헵번과 가장 닮은 외모라는 이유로 많이 뽑혔으며 김

태희는 한국 대표 미녀라는 점에서 표를 얻었다.

대체로 오드리헵번을 닮았다고 하면 외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먼저인 듯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굳이 뽑자면…’

을 서두로 먼저 말할 만큼 한국에는 오드리헵번처럼 내적,외적으로 완벽히 닮은 사람

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번외이지만 외국여배우 중에서 오드리헵번을 연상시키게 하는 여배우로는 안젤리나

졸리가 압도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 Plus

“스타들의 오드리헵번 오마주”

+ Plus

Ⅲ. 브랜드 인사이트

그녀 자체가 이미 강력한 브랜드다

브랜드북을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브

랜드 선택에 굉장히 애를 많이 먹었다.

내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용거리가 많은 것

을 선택하고 나는 정말 이 브랜드를 좋아한다

고 포장을 할까 해서 여러 브랜드 사이에서 헤

매다가 그냥 정말 내가 좋아하는, 맹목적으로

이게 박혀있는 로고나 심볼이 있으면 당장 살

것 같은 ‘오드리헵번’을 마지막으로 결정해서

브랜드북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참 그

결정이 잘했다고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적어

도 이 과제 하는 순간만큼은 과제의 목적성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약간의 ‘덕

후 짓’ 같은 시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의 로마의 휴일에 대한 강한 인상

때문에, 그녀의 예쁜 웃음 때문에 그녀를 좋

아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이 브랜드 북을 만

들며 그녀의 모든 삶을 다 들여다보고 나니 나

는 이제 어디 가서 정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오드리헵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서야 비로소 온전히 내가 가

장 사랑하는 브랜드를 가지고 어디서든 이것

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며 이것에 대해 남들에

게 떠들어댈 수 있을 만큼이 된 것 같아 사실

뿌듯하다.

그녀를 알아가며, 조사하면서 그녀는 비록

우리 곁에 없지만 그녀는 하나의 ‘브랜드’,

‘아이콘’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실로 다양

했다. 패션, 봉사, 여배우 등등 그녀가 활동했

던 모든 영역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는 롤

모델이자 강력한 브랜드였다.

작은 인테리어 제품 하나라도 그녀의 얼굴이

들어가있으면 많은 여성들이 선택을 하고 그

녀의 얼굴이 들어가있는 커피잔에 커피를 마

시며 그녀의 모습을 연상한다. 오드리헵번 말

고도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살아 숨쉬는 하

나의 브랜드로 자리하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

까 싶었다.

그녀의 브랜드 힘은 마치 그런 것 같다. 그녀

를 보고 있으면 흑백영화의 고전미를 보면서

도 세련된 현대미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요소의

힘을 분명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녀는 마치 흑백영화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

으키면서도 보고 있으면 생동감있게 살아있

는 컬러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그

녀의 힘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

로도 그녀 자체가 바로 하나의 강력한 브랜드

로 우리 곁에 여전히 머물러 있을 것이다.

I Love You…

I Remember You…

<참고자료>

1) 멜리사 헬스턴, 『워너비 오드리』, 웅진윙스,2009

2) 스테파니아 리치, 『오드리헵번 스타일과 인생』, 푸른솔, 2004

3)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95189&memberNo=23264782&searchKeyword=%EC%98%A4%EB%93%9C%EB%A6%AC%ED%97%B5%EB%B2%88%20&searchRank=20

4) http://blog.naver.com/unicefgarden/220623791499

5) http://audreyhepburncafe.co.kr/brandstory/index.html

6) http://zine.istyle24.com/Star/StarView.aspx?Idx=6937&Menu=3

7)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821772&memberNo=9781&searchKeyword=%EC%98%A4%EB%93%9C%EB%A6%AC%ED%96%85%EB%B2%88&searchRank=7

8)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494146&memberNo=933864&searchKeyword=%EC%98%A4%EB%93%9C%EB%A6%AC%ED%97%B5%EB%B2%88%20%EC%9D%BC%EC%83%81&searchRank=3

9) http://cy.cyworld.com/home/22973724/post/5029F48468558E02EEBA8401

10) http://blog.naver.com/kingkanzi/220262017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