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강좌 강연 자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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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꼬꼬강좌 강연 자료집 『치과의사 송필경의 ‘레미제라블, 베트남전쟁, 68혁명’』 1. 왜 호찌민인가? 나는 권위로 나라를 통치하려는 자를 지배자(Ruler)라 부르고, 인민과 소통 하고 존중하며 나라를 이끄는 자를 지도자(Leader)라 부른다. 내가 호찌민을 ‘인류 역사상 최상의 지도자’라고 부르는 수식어에는 추호도 과장이 없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은 조국 베트남과 동의어다. 북쪽 인민은 물론 남쪽 인민 들까지 모두는 호찌민이라는 이름 속에 가장 강력한 하나였다. 호찌민은 철 든 후 인간이 꿀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꿈을 꾸었고, 눈을 감을 때 그 꿈을 기어이 이루어냈다. 채플린을 닮은 가련한 외모에 170여 가지 별명 중에 호찌민으로 널리 알려진 20세기를 관통한 ‘불멸의 혁명가’이자 ‘혁명의 성자’다. 2. 혁명=평등 혁명은 권력자에게 강요받는 질서(命)를 민중이 뒤엎고 갈아치운다(革)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 어디서나 반항의 배후에는 평등하려는 욕구가 있 다.” 미국의 제국주의‘억압과 착취’에 대항해 30년 동안 싸운 베트남전쟁은 세계 사에 던진 혁명이다. 미국 독립선언에서 밝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베트남 인민은 베트 남 전쟁을 통해 미국에 되돌려 주어 미국의 양심을 일깨웠다. 3. 공자=경제 평등 적게 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공평하게 가지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라. 평등이 가난을 사라지게 하리라. 4. 붓다=신분 평등 인간을 비천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신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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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강좌 강연 자료집『치과의사 송필경의 ‘레미제라블, 베트남전쟁, 68혁명’』

1. 왜 호찌민인가?나는 권위로 나라를 통치하려는 자를 지배자(Ruler)라 부르고, 인민과 소통하고 존중하며 나라를 이끄는 자를 지도자(Leader)라 부른다. 내가 호찌민을 ‘인류 역사상 최상의 지도자’라고 부르는 수식어에는 추호도 과장이 없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은 조국 베트남과 동의어다. 북쪽 인민은 물론 남쪽 인민들까지 모두는 호찌민이라는 이름 속에 가장 강력한 하나였다.호찌민은 철 든 후 인간이 꿀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꿈을 꾸었고, 눈을 감을 때 그 꿈을 기어이 이루어냈다. 채플린을 닮은 가련한 외모에 170여 가지 별명 중에 호찌민으로 널리 알려진 20세기를 관통한 ‘불멸의 혁명가’이자 ‘혁명의 성자’다.

2. 혁명=평등혁명은 권력자에게 강요받는 질서(命)를 민중이 뒤엎고 갈아치운다(革)는 의미다.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 어디서나 반항의 배후에는 평등하려는 욕구가 있다.”미국의 제국주의‘억압과 착취’에 대항해 30년 동안 싸운 베트남전쟁은 세계사에 던진 혁명이다.미국 독립선언에서 밝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베트남 인민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미국에 되돌려 주어 미국의 양심을 일깨웠다.

3. 공자=경제 평등적게 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공평하게 가지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라.평등이 가난을 사라지게 하리라.

4. 붓다=신분 평등인간을 비천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신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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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인간평등관이며 계급타파다.붓다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혁명적 사상이었다. 5. 예수=사회적 평등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나누어 주며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에게 똑같이 베푼다고 굳게 믿었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자후는 인류 최대의 보편적 외침이었다.

6. 토마스 페인; 상식과 인권상식; 1776년 1월 10일 출판세습 군주제를 비판하고 미국은 공화제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독립과 민주주의 수립은 상식이라고 주장하고 독립전쟁을 혁명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인간의 권리; 1791년 3월 13일 발표인권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긍정해야 하며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변혁도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특권 계급을 이상하고 무시무시한 괴물로 규정하여 조롱하고 짓밟았고, 누진세를 도입하여 부의 재분배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인권이 상식이 되면서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했다.

7. 미국독립선언서; 1776년 7월 4일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1. 자연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가지는 천부(天賦)의 권리.2. 주권재민설3. 혁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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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계몽주의가 낳은 아들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은 군중심리에 따른 난동행위였으나 프랑스 혁명의 신화를 만들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 구호가 처음 등장했다.혁명이 압제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 방법이라는 점을 증명했다.구호 ‘자유, 평등, 우애’는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이 되었다.8월에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입헌정치 정신을 요약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배경이 된 정치적 자유주의를 표현했다.

9. 프랑스 인권 선언문국민의회로 모인 우리 프랑스 인민들은 인권에 대한 무지와 경시,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 부패의 원인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이 엄숙한 선언을 통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는 신성한 권리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기로 결의했다.…그러므로 국민의회는 절대자의 존재 앞에, 그리고 그 보호 아래 다음과 같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승인한다. 10. 프랑스 혁명 결과들“시민계급, 농민, 여자들까지도 똑똑하며 자부심이 가득하며 생기발랄해 보인다. 멍에를 지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인민들이 다시 곧바로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였다.”-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변화에 놀란 어느 귀족이 남긴 기록이다. 혁명은 억압받고 주눅 들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바꿔 놓았다.이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천년을 이어 온 특권 계급의 지배를 무너뜨린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1. 나폴레옹 등장“국민의 요청으로 지도자가 된 나는 출생 신분이나 재산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재능을 향해 길을 열어 놓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그렇기 때문에 동맹들이 끊임없이 위협을 했어도 프랑스 제정 체제는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평등을 보장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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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산업혁명1776년 아메리카 혁명에서 1848년 2월 혁명 사이의 가장 경이적인 변화는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었다.

_ 현대 유럽 문명의 원천은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다._ 프랑스 혁명 개인의 자유와 주권재민, 민족주의적 애국심의 원천이었고 산업 혁명 노동, 운수, 생활 전반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켰다._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_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13. 자유주의자와 내셔널리즘1프랑스 혁명은 다른 나라의 혁명운동과 독립운동을 자극하고 자유주의 이념을 확산했다.내셔널리즘 강조; 민족주의 배타성으로 다른 민족 집단과 마찰이나 갈등을 부채질하여 반동체제가 등장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정이 복고했다.루이 18세는 공공연히 "과인은 혁명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고, 혁명 전의 어떤 것도 잊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극심한 반동 정책을 폈다. 특히 시대착오적인 귀족 우대 정책을 계속했다.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르투아 백작 샤를 10세는 귀족 세력을 되살리기 위해 "대혁명 때 피해를 입은 귀족의 경제적 보상을 위해 국고에서 10억 프랑을 인출해 지급한다"고 하자 국민의 불만은 폭발했다. 결국 1830년 7월, 혁명이 발발해 샤를 10세의 퇴위 사태로 이어졌다.

14. 1830년 7월 혁명 7월 27, 28일, 29일 승리하여 새로운 국왕이 즉위했다.선거권 제한에 반발하고 샤를 10세는 망명했다. 그러나 공화정으로 간 게 아니라 다시 왕정으로 갔다.천만 인구 중 선거권은 가진 자는 24만 명에 불과하고 노동자에 대해서 매우 억압적이었다.

레미제라블은 1832년 6월 항쟁이란 비교적 작은 혁명에서 이야기가 시작했다.상류 부르주아의 독점 선거권 축소를 요구가 항쟁의 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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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폴레옹이 남긴 것프랑스군은 혁명군이 아니라 정복군, 학살자임이 드러났더라도 유럽의 각국은 새로운 국가 체제를 적극 도입-이런 움직임은 ‘자유’와 ‘민족’의 이름으로 널리 퍼졌다.자유-프랑스 혁명의 정신민족-프랑스군과 맞서면서 ‘민족의식’이 싹텄다.

16. 1848년 2월 혁명 왕정은 소수 대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억압했다.민중은 빵을 달라고 요구, 부르주아도 선거권 확대를 요구했다.혁명 성공으로 부르주아가 집권- 교양과 재산을 가진 부르주아만 참여하는 온건한 공화정을 주장하자 노동자들이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정부는 ‘질서와 안정’을 내세우며 봉기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특권 계급을 대신한 자유와 혁명을 부르짖던 부르주아들이 이제는 민중의 요구를 억누르는 압제자로 변신했다.민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부르주아들에게는 공포였고 부르주아들은 왕과 귀족과 손잡았다. 혁명은 시작할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그라졌고, 왕정이 복귀했다.

1948년 무렵, 유럽에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그것이 유령이 아니라 실체임을 선언하였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대가 잃은 것은 쇠사슬뿐, 그대가 얻을 것은 온 세계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 등장하여 공언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철과 피, 곧 무기와 병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

17. 1871년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년 3월에서 5월 프랑스 제4차 혁명은 파리에서 민중들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다. 세계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이 자치하는 민주주의 정부라 평가하는 파리 코뮌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겼으며, 짧았지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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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레닌은 파리 코뮌을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18. 러시아 혁명무료급식소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도시로 온 수많은 농민들로 채워졌다. 메밀 죽을 먹고 살고 형편없는 숙소에서 살았다. 이들은 사회적 불안 요소였다. 한편 상류층은 대규모 저택에서 화려한 가발 무도회를 열며 사치를 누렸다.극단적인 경제 양극화는 혁명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켰다.

19. 레닌 등장동지들이여, 볼셰비키가 끊임없이 그 필연성을 역설해온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실현되었습니다. 이 노동자 혁명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우리 모두의 권력, 소비에트 정부를 갖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부르주아지의 참여도 없을 것입니다. 억압받는 대중들 스스로가 정권을 창조할 것입니다. 과거의 국가 기구는 근본적으로 파괴될 것이며, 소비에트의 조직들 속에서 새로운 지도체제가 창조될 것입니다. 러시아의 역사에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세 번째 혁명은 종국적으로 사회주의의 승리로 이어질 것입니다.레닌.1917년 10월 25일, 제2차 소비에트 회의를 앞두고

20. 베트남의 지리지도로 중국 대륙을 언뜻 보면 살찐 닭처럼 보인다. 만주벌판은 닭 머리로, 한반도는 닭 부리에 해당한다. 베트남은 큰 몸통을 지탱하는 가늘고 긴 다리로 보인다. 베트남과 인접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쳐 흔히 인도차이나반도라 부른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태평양 쪽으로 긴 해안선을 만들며 쭉 뻗은 나라가 베트남이다. 지도에서 베트남만을 보면 베트남 모자를 쓰고 아오자이를 입은 날씬한 베트남 처녀 같다. 날씬한 S자형 몸매는 북에서 남까지 직선으로 1,650㎞에 이른다. 넓이는 한반도 1.5배인 약 33만㎢이고, 동서로 폭이 가장 넓은 곳은 머리 부분인데 600km 된다. 가장 잘록한 허리 부분은 50km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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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하다. 아오자이가 펄럭이는 듯한 무릎 아래 부분은 400㎞에 이른다.

국토의 3/4이 산악이며 대부분 낮은 산으로 85%가 해발 1천m 이하다. 비록 높은 산이 국토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적지만 산악의 길이와 높이는 동남아시아에서 견줄 곳이 없다.서쪽에는 쯔엉선산맥이 2천m 내외의 높은 봉우리들과 함께 거의 국토 끝까지 뻗어 인도차이나 반도를 동서로 양분하는 형세이다. 베트남쪽 쯔엉선산맥은 아주 경사가 가파르며, 서쪽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토는 경사가 덜 심하다.북쪽으로는 언제나 탐욕스러운 천하패자 중국이 버티고, 서쪽으로는 얌전한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이웃해 있다. 남쪽과 동쪽은 태평양과 접하고 있다.

22. 프랑스 침입베트남 역시 중국이나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교 질서만 유일한 질서라 여겼다. 유교 질서의 가장 의미 있는 제도는 과거제도다. 이는 정치, 경제능력이 있는 인물보다 학문적 기품 있는 인재를 배출한 장점도 있었지만, 사회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 세력을 양산한 폐단도 있었다. 서구 열강이 진출할 무렵, 베트남은 왕권을 둘러싼 암투와 지배 계층의 부패가 심했다. 서구에는 새로운 민주 제도가 탄생하였는데 동아시아에는 낡아 빠진 군주제를 고수하다가 서구 사회의 대포 앞에 무릎을 꿇었다.

23. 응에 안‘응에 안’성은 동해 해안에서부터 푸른 논이 길쭉한 평야를 이루고 서쪽 끝에는 라오스 국경을 따라 놓인 안남 산맥의 첫 줄기가 험준하게 뻗쳐 있다. 좁고 긴 프라이팬 손잡이 모양에는 나지막한 산과 논, 숲과 강이 어울려 있다.자연 조건은 가혹하다. 여름에는 서쪽 라오스 에서 불어오는 열풍에 땅이 갈라지고, 나무들은 메마른다. 평야는 땅거죽이 얇고 자양분이 부족한데다가, 우기가 되면 하천은 금방 범람하고, 태풍이 심하게 불어 올 때면 바닷물이 평야를 삼켜버린다.응에 안 지역 주민들은 땅을 파서 어렵사리 겨우 사는 농민이며, 이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 자체가 투쟁이었다. 식민 통치자들은 주민들이 가혹한 환경으로 굶어 죽어도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주민들이 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들을 착취하는 침략 세력에 극력하게 투쟁하는 일밖에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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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때문에 이 지역 인민들은 오래 전부터 ‘응에 안의 고집 센 물소’라는 별명을 들어 왔다. 물소들은 싸울 때마다 선두에 서서 베트남 인민을 이끌어 2천년 동안 반식민 투쟁사에 영원히 빛난 영웅을 무수히 배출했다.

24. 가족과 생가호찌민의 가계는 이렇다.1863년 아버지 응우엔 신 삭(Nguyen Sinh Sac;~1929) 출생.1883년 어머니 호앙 티 로앙(Hoang Thi Loan;1868~1901)과 결혼.1884년 딸 응우엔 티 타인(Nguyen Thi Thanh;~1954) 출생.1888년 아들 응우엔 신 키엠(Nguyen Sinh Khiem;~1950) 출생.1890년 5월 19일 아들 응우옌 신 쿵(Nguyen Sinh Cung;~1969) 출생.

응우옌 신 쿵(호찌민)은 사춘기가 되자 ‘매일 내 행동들을 역사에 남기겠다.’고 결심하고, 평생토록 곁눈질 한번하지 않았고 촌음도 허비치 않았다. 위인은 헛되이 살지 않음을 역사에 명확히 실증했다.

25. 민족 구원의 길호찌민은 16세에 고향을 떠난 뒤에 민족 해방 운동이란 웅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할 때까지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갔다.청년 호찌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해외로 나가려 해. 프랑스와 다른 나라를 보러. 그들이 해 놓은 일을 보고 우리나라를 도울 거야.”1911년 6월 4일 21세 호찌민은 사이공 나롱 부두에서 프랑스 여객선 ‘아미랄 라투세-트레비유’호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먼 훗날 호찌민의 회고다. “나는 열세 살쯤 되었을 때 ‘자유’ ‘평등’ ‘우애’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 말이 내포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프랑스 문명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벌에게서 꿀을 빼앗는 지혜로, 서구의 혁명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호찌민은 베트남이라는 작은 화분이 아니라 지구라는 광할한 대지에서 자랄 씨앗이었다. 웅장한 도약을 위하여 대망을 품고 조국을 떠났다. 서구 사회의 진수를 체험하고, 혁명적 삶을 시작했다.

26. 20세기 초호찌민 박물관 입구의 호찌민 길은 아크릴 벽면을 이용해 미로처럼 조성했다. 아크릴 벽 양면에 19세기와 20세기의 주요 인물과 문명 상징물의 사진, 그리고 베트남 역사적 상황의 사진을 전시했다. 왼편에는 마르크스·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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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사진과 오른편에는 아인슈타인과 퀴리 부인과 같은 과학자, 채플린 같은 예술인,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발명품 사진을 전시했다.호찌민은 혈기왕성한 또래 젊은이와 달리 서양의 야만에 맹목적으로 분노하기에 앞서, 동양의 한계와 서양의 저력을 간파하려 했다. 폭탄을 투척하는 울분에 찬 테러와 골방에서 관념적인 글쓰기에 매진하는 태도를 멀리했다. “정책의 뒷받침이 없는 군사 행동은 마치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다.” 이게 호찌민의 생각이었다.근대 사상과 신학문이야말로 진정한 힘이라 믿고, 서구로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섰다.

27. 응우옌 아이 쿠옥 탄생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9년 6월, 승전국들은 베르사유에서 강화 조약을 위한 회의를 했다. 베르사유 회의에는 아일랜드인, 인도인, 한국인 그리고 아랍인들 같은 억압받는 민족의 대표들도 독립과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파리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신뢰했다.청년 호찌민은 웅대한 뜻을 지닌 이름 ‘응우옌 아이 꾸옥’(玩愛國;애국자 응우옌)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때는 베르사유회의에 청원서를 내면서다. 이 청원서는 전 세계 노동자 단체와 민주적 조직들에게 프랑스 식민 통치 억압에 시달리는 베트남 인민의 참상을 중시하게 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 아이 꾸옥의 청원은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직접 도전한 첫 투쟁이었다. 이름 없는 청년이 윌슨을 만나려 했고, 프랑스 지식인의 관심을 끌어내 베트남인의 웅지를 드러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베트남 인민을 분발시키기에 충분했다.

28. 스승으로 레닌을 택하다.베르사유 회의에서 진보적이라 여겨졌던 윌슨의 14개의 조항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식민지 약소국의 요구에 대해 냉담한 침묵으로 답한 위선의 가면무도회였다. 식민지 사람들이 윌슨의 ‘자유의 노래’에 속았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청원이 무시당하자 ‘월슨주의는 매우 짓궂은 하나의 장난에 불과함’을 깨달았다.1920년 여름, 레닌은 코민테른 대회에 그 유명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제출했다. 아이 꾸옥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식민지 민족 해방 투쟁의 주체였다. 그 때 <뤼마니테>에 실린 레닌의 ‘테제’를 숙독했다. 이 논문에서 아이 꾸옥은 민족 혁명의 기본 노선과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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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해방 투쟁을 적극 후원하겠다고 말했다. “광범위한 식민지 인민들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촉수를 말살하라. 그러면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질 것이다.” 파리의 사회주의자들은 행동보다 말로 먹고 살았지만 레닌은 행동으로 헌신했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레닌에게서 낡은 사고와 도덕적 편견을 단숨에 걷어치우는 웅변을 듣고 감명했다.

29. 홍콩 감옥응우옌 아이 쿠옥은 1931년 6월 11일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호찌민이 잡혔다는 소식에 프랑스는 반겼다. 그 전에 베트남의 프랑스 정부가 호찌민에게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영국의 법률가 로즈비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홍콩에서 추방당했다.

30. 귀국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일본 파시스트들이 중국 본토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사태를 명쾌하게 분석했다. 미·일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베트남을 지배하는 일본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트남이 독립할 기회를 맞은 것은 바로 파시즘 세력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1941년 1월 28일, 사이공에서 배를 타고 떠난 지 30년 만에 일행 5명과 중국 국경을 넘어 조국 땅을 찾았다. 31. 곡보 동굴중국과 국경이 맞닿은 박 보 동네에 한 동굴에 귀국 첫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이때 생활을 보 응우옌 잡은 이렇게 회고 했다.“우리는 밤이 오면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딱딱하고 차가운 침대에서 자느라 무척 추웠다. 이따금 불을 지펴 놓고 밝기를 기다렸다. 그 때마다 호 아저씨는 수많은 전쟁과 혁명 과업을 진행해 온 위인들의 영웅담을 들려주었다. 4~5년 내에 우리나라의 전쟁이 결정적인 단계로 돌입하면서 혁명에 유리한 기회가 올 거라고 예견했다. 호 아저씨는, 우리가 밤에 동굴 안에서 밤에 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있으면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32. 마르크스 산, 레닌 천 곡보 동굴 있는 마을 입구 주차장의 개울 건너편 산 중턱 암벽에는 <N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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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MAC>, 건너편 바위에는 <SUI LE-NIN>이란 노란색 낱글자를 돌출 간판처럼 붙여 놓았다. CAC MAC은 칼 마르크스의 베트남식 표현이고, LE-NIN은 그대로 레닌이다. NUI는 봉우리고, SUI는 냇물이란 뜻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칼 마르크스 봉우리’와 ‘레닌 개울’인 셈이다.레닌 개울에 대한 잡의 회고다.“우리 동굴에서는 여기저기 고인 맑은 시냇물과 산기슭을 돌아 흐르는 개울이 보였다. 호 아저씨는 그 개울을 레닌 개울이라고 불렀다. 아침마다 일찍 우리를 모두 깨웠다. 체조를 마치고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목욕을 했다. 그리고 몹시 바쁘게 지냈다. 작업을 하거나 회의를 하거나 공부를 하고, 장작을 패거나, 이웃 마을을 방문했다. 때때로 노인들에게 정치를 강의하고, 아이들에게는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냇가의 바위에 앉아서 일하고, 식사한 뒤에 잠깐씩 쉬었다.”

33. 란 쿠이 남곡 보 동굴에서 두 달간 살다가 1km쯤 떨어진 산기슭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 걸음만으로 건널 수 있는 작은 냇물 옆 산등성이에 비스듬히 기대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한 허술한 집이다. 나무기둥을 대충 세워 놓고 야자 잎으로 지붕과 벽을 가린 두 평쯤 되는 냐 산(2층 오두막)이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는지, 일부러 방치 했는지, 바람이 쌩 불면 휙 날아갈 듯하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보잘 것 없고 엉성하였다. 그지없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사람이 이토록 꾸밈없이 쉽게 살 수 있을까? 상상 밖의 소박한 모습에서 어느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 없는 권위와 위엄을 느꼈다. 이 허술한 오두막에서, 1941년 5월 10일부터 19일까지 인도차이나공산당 제8차 확대중앙위원회를 열고 ‘베트남 독립동맹’을 창설했다. 가장 초라한 곳에서 20세기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이름 높은 조직이 탄생하였으니, 베트남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다.

34. 옥중일기1942년 8월 응우옌 아이 꾸옥은 내부 조직이 어느 정도 정착하자 동료 약간 명과 함께 중국에 갔다가 국민당에 체포되어 13개월간 감옥살이했다.호찌민은 체포당한 뒤 몸이 결박당한 채 13개월 동안, 13개 현, 18개 감옥을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토굴 감방에서 목에 바퀴를 매달거나 쇠사슬에 묶이기도 하고, 극악한 범죄자와 한 방을 쓰고, 심지어 곁에서 다른 죄수가 숨을 거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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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월 동안의 감옥 생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그 유명한 ‘옥중일기’와 서신 두어 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옥중일기’는 일기라기보다는 134편의 한시로 된 감상문이다.옥중일기는 호 아저씨의 겸손과 달리 문학적 수준이 대단하다. 간결한 표현에는 소박미가 넘치고 심오한 교의에는 감화력이 충만하다. 많은 평론가들이 마오쩌뚱의 한시보다 형식과 내용이 모두 더 알차다고 했다.옥중일기를 보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난을 극복하고 우뚝 선 호찌민의 초인간적 면모가 역력하다. 극한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백절불굴의 의지로 일관했다. 침략 세력 추방에 대한 확고한 소신으로 인민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위대한 지도자 정신, 처참한 옥중 생활에서도 압박받는 동포들의 참상을 잊지 않고 마음 아파하는 인간애와 불타는 애국열은 참으로 숭고하다.이 불굴의 영혼에게 유네스코는 ‘세계 문화 명인’이라는 존칭을 바쳤다.

35.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1944년 12월 22일에,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지시에 따라 국가 재건 사업에 헌신할 강력한 ‘베트남민족해방무장선전대’를 창건했다. 불과 34명으로 시작한 게릴라 부대가 30년 동안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강의 제국인 미국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기는 세계 막강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선전 부대의 활동 지침은 인민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정치 발전에 선행하는 군사 행동을 통해 민군이 일체가 된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의 기초를 굳건히 다졌다. 해방군 선전대는 가는 곳마다 절대적인 인민의 지지를 받았다. 불과 3개월 뒤인 45년 3월에는 각 성마다 대규모 베트민 부대를 창설했으며 주민 10만 명이 해방 운동에 참여했다.

36. 8월 혁명1945년8월 6일, 미군 폭격기에서 떨어진 폭탄 하나가 터져 오렌지색 섬광이 번쩍

이는 순간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자, 30만 명이 사는 히로시마는 순식간에 인류가 처음 겪은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9일, 그래도 일본이 곧바로 투항하지 않자 미국은 나가사끼에 똑같은 범죄를 범했다.

11일, 일본이 패배하는 순간을 기다려 만반의 준비를 해 온 호찌민은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호찌민은 인민에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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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연합군이 베트남에 진입할 것이다. 연합군을 상대하려면 막강한 힘을 갖춰야 한다. 그 힘은 일본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강대해질 것이다. 동포들이여! 궐기하라!”

15일, 일왕은 연합국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16일, 지압 장군의 베트민은 홍강 삼각주로 진격했다. 그 날 밤에 한 분대가

하노이 시내의 한 극장에 진입해 영화를 중단시키고 연설을 했다. 극장 안에 있던 일본인 장교 하나는 도주하다가 총살당했다.

17일, 하노이에는 베트민이 자랑하는 금성홍기가 휘날렸다.19일, 하노이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 괴뢰 정부의 사무실을 모

두 점거했다. 일본군은 감히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은 어제의 도둑인 프랑스인 주택을 습격했다.

20일, 베트민은 하노이를 완전히 지배했다. 21일, 일본이 세운 괴뢰 황제 바오 다이는 하노이 새 정부에서 퇴위하라는

전문을 받았다. 24일, 하노이의 베트민은 괴뢰 황제를 폐위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

포했다. 호찌민의 베트민은 8월 11일부터 8월 24일까지 13일 동안에 ‘8월 혁명’ 과업을 완료했다.

25일, 사이공 시민 8만여 명이 거리를 가득 메우자, 일본 괴뢰 정부는 완전히 물러났다. 베트남은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에 완전한 자주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시기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치밀성으로 일제히 총궐기해 불과 두 주 만에 완전 자주 독립을 쟁취한 ‘8월 혁명’이 혁명가 호찌민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그 날 호찌민은 비밀리에 하노이에 들어왔다.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고향 킴 리엔의 조그만 초가집을 떠난 지 무려 40년 만에 하노이 땅을 처음 밟았다.

26일, 보 응우옌 잡의 군대가 인민의 뜨거운 환호 속에 하노이에 당당하게 들어왔다.

30일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는 베트민 대표에게 베트남 지배를 상징하는 황금 칼을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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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독립선언 1945년 9월 2일 영광의 바로 그 날, 하노이 시는 붉은 깃발이 뒤덮었다.고향 응에 안의 시골 말투로 자신이 쓴 베트남독립 선언문을 읽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신은 인간에게 아무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생존,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그것이다.”놀랍게도 미국 독립 선언문 첫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였다.독립 선언문을 이렇게 끝냈다. “베트남 인민 모두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더라도,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선언이 끝나자 수십만명 군중의 환호가 우레 같이 울려 퍼졌다. 이때부터 호찌민과 인민은 한 몸이었다. 가냘픈 몸매에, 산양 모양의 수염이 상징하는 역사적 호찌민이 탄생하였다.신비의 투사 호찌민이 인민에게, 조국 베트남이 이제 모든 억압에서 풀려났음을 엄숙히 선언했다. 일본이 패망한 지 불과 18일 만이다. 전광석화 같은 역사 변천의 가속도! 베트남의 역사는 이 순간을 유사 이래 가장 감격적 순간으로 기록할 것이다.

호찌민의 독립 선언이 지니는 심장한 의미는 러시아 혁명 이후 최초로 자신의 힘으로 공산당 정권을 세운 것이고, 더욱이 한 세기에 걸쳐 혹독한 착취를 당해온 약소민족이 어떤 외세의 도움도 없이 완전히 자력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침략 세력을 추방하고, 세계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38. 프랑스 재침략 완벽한 독립선언을 하고 그토록 염원해온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편성했지만 북쪽에는 장제스가 오랑캐 꼴로, 남쪽에는 드골이 나치 같은 꼴로 베트남에 들어오자 독립과 해방이라는 에덴의 문이 잠겨 버렸다.드골은, 독일에 쫓겨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 가서 연합군에 빌붙어 간신히 입에 풀칠하면서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베트남을 다시 침략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혔다.드골은 위대하지 못한 프랑스는 진정한 프랑스가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프랑스의 수치가 드골의 수치이므로,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곧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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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프랑스의 명예’가 바로 이웃 독일의 침입에 저항하는 데 있다고 믿은 사람이 일만 수천 km 떨어진 아시아의 당당한 독립국인 베트남은 침범해 마구 유린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실제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드골은 미국에 빌붙어 베트남을 짓밟았다. ‘위대한 드골’도 베트남에서는 프랑스판 히틀러, 조선의 이토 히로부미에 불과했다.

39. 제1차 베트남 전쟁1946년 12월 19일 호찌민은 더 이상 타협은 불가능하고 전장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하자 제1차 베트남 전쟁이 터졌다. 12월 20일 민족 항전을 위한 호 아저씨의 호소가 라디오 방송 ‘베트남의 소리’를 통해 퍼져 나갔다.

우리들은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양보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양보할수록 프랑스 식민주의 세력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조국을 잃느니 차라리 우리 모두를 희생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동포들이여 일어나라! 남자건 여자건, 노인이건 젊은이건, 종교의 신념과 정당하고 상관없이 모든 베트남인들은 일어나서 조국을 구하자. 총 가진 사람은 총을. 칼 가진 사람은 칼을 들라, 칼 없는 사람은 삽과 호미, 몽둥이를 들라. 나뭇가지라도 들라

호 아저씨는 승리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인민에게 희생과 투쟁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다.“우리의 저항은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투쟁이 아무리 길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조국 베트남이 완전 독립하여 다시금 하나로 통일하는 그날까지!”호 아저씨의 결연한 항전 호소에 분기한 베트남 인민은 결사 항전하였다. 프랑스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전쟁의 덫에 걸려들었고, 가까스로 그 덫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는 상상을 초월한 대가를 치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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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인민의 전쟁베트남 전쟁은 삼국지에 보이는 유비와 조조 같은 사람들이 전개한 영토 쟁탈전이 아닌 민족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인민의 군대’가 인민 스스로를 위한 ‘인민의 전쟁’이었다. 전체 인민이 자진해 참여하고 승리를 위하여 모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잡의 말을 들어 보자.“사실상 우리의 저항 전쟁은 ‘인민의 전쟁’이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진격하였으며, 후방의 농민들은 들에서, 노동자는 무기 공장에서, 병사들에게 식량과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 생산 증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든 인민이 병사였으며 모든 마을이 요새였고 모든 당지부와 항전 위원회는 참모진이었다. 해방구에서 그러하였고 적의 점령 지구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41. 디엔 비엔 푸 승리확고한 의식과 뚜렷한 목표를 지닌 베트남 전사들이 보여준 항전은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러오는 식의 비현실적 전술이 좌지우지하는 소설 같은 전쟁이 아니다.1960년대 베트남 학생 운동을 소재로 한 ‘사이공의 흰 옷’이란 소설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가능성이 짓이겨지고 ‘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조차 극복하기 위해 예기치 못한 힘을 발휘하는 것-그것이 기적이다.”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베트남 인민이 혼을 쥐어 짜, 붉은 피로 강을 물들이고, 흰 뼈로 산을 쌓았다는 표현에는 추호도 과장이 없다. 이 전투는 서구에게는 충격을 주고 제3세계를 감동시킨 기적을 청사靑史에 길이 남겼다.

42. 잔악한 정치, 부패의 나락43. 옥중시44. 베트남민족해방전선45. 베트남민족해방전선 46. 미국전쟁47. 설날대공세48. 설날대공세 49. 설날대공세 50. 1968년 51. 68혁명-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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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68혁명-미국 53. 68혁명-프랑스54. 68혁명-서유럽 55. 68혁명-동유럽 56. 68혁명-아시아, 중남미

설날 대공세(Tết Offensive); 숭고한 승미(勝美)의 역사(흔히 구정 대공세라 하나 ‘구정’이라는 일본말 보다 ‘설날’이란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

베트남은 1954년에 프랑스에 승리하여 제네바 회담에서 그 다음해 총선을 통해 독립을 보장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턱도 없는 도미노 이론으로 베트남을 강제로 분단하고 남쪽에 괴뢰 정권을 세웠다.미국 제국주의의 괴뢰정권은 지극히 포악하고 부패했다. 1958년 말까지 4만 명의 정치범이 생겼으며 1955∼57년간 1만2천여 명이 살해되었다.빨갱이란 죄명만 씌워지면 군사법정은 바로 죽였다. 1958년에도 제네바 협정을 지킬 것과 통일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지엠 정권은 이런 요구를 하는 6천명을 체포하여 이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푸 로이(Phu Loi) 정치교육센터에 감금하였다. 지엠 정권은 이들이 먹는 음식에 독약을 뿌려 무려 1천여 명을 죽이고 4천여 명을 중태에 빠뜨렸다. 그리고 중태에 빠져 신음하는 사람을 총살하였다. 이것이 푸 로이 대학살이다. 자유수호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미국과 지엠의 레드 콤플렉스(반공주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잔인했다.61년 말 정치범의 숫자는 15만 명에 다다랐다. 60년 사이공정권 스스로 인정한 정치범 숫자만도 5만 명에 달했다.사이공에는 정치범을 가두는 8개의 감옥소와 150여개에 달하는 경찰서와 파출소 구치소가 있었다.(1973년 통계)

정치범들은 감옥의 벽에 호찌민의 옥중일기에 나오는 시를 적어 놓고 위안을 받았다.

이 몸은 비록옥중에 갇혀 있지만정신은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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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구속되지 않네큰일을 하려면정신을 더욱 크게 가져야지

身體在獄中, 精神在獄外. 欲成大事業, 精神更要大

그러자 남쪽에서 북베트남 도움 없이 자발적인 저항 조직인 민족해방전선( NLF; National Liberation Front-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 부르는 게릴라 조직)이 탄생하여 괴뢰 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자, 1964년 8월 초 통킹만에서 미국 함정이 북베트남에 공격 받았다는 CIA가 날조한 정보로 미국은 선전포고 없이 추악하고 잔인한 베트남전쟁을 일으켰다.헬기와 전폭기 그리고 전투기를 포함한 수 만대의 공군과 항공모함 수척을 동원한 미국은 전쟁을 쉽게 끝내고자 마음먹었다. 1965년 말 18만 명을 베트남에 파병한 미국은 1966년 말에는 48만 명을 파견했어야 했다. 1967년 말에는 미군이 52만 명에 달했다.베트남 주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는 존슨 대통령에 보낸 1968년 신년 보고서에 ‘터널 끝에 한줄기 빛이 보인다’며 추가 병력 20만 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은 그들의 적에게 비추었다.

설 연휴였던 1968년 1월 31일 새벽에 사이공 전역에서 포격 소리가 터졌다. 이는 설날 대공세였다.민족해방전선은 베트남 6개 직할시 가운데 5개, 44개 도 가운데 36개, 64개 군소재지 50여개 촌락에 북베남 정규군과 함께 공격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이라는 메뚜기가 미국이라는 공룡을 공격한 셈이었다. 이런 공격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민족해방전선은 대부분의 도시를 3∼4일 정도 밖에 점령하지 못했고 베트남의 경주라는 훼(Hue)에서만 25일 동안 버텼다. 이 공격으로 미군 1천5백여 명, 남베트남군 2천8백 명이 전사했다. 북베트남군과 민족해방전선 전사들은 적들의 전사자 약 열배에 가까운 4만5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족해방전선은 대부분의 간부와 많은 병력이 죽음으로써 이 후 베트남전쟁에서 자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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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기가 힘들었다. 17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죽었으며, 2백만 명의 피란민이 생겨났다. 애초에 기대했던 남베트남 주민의 봉기가 없었으니 단순 결론으로는 북베트남 측의 큰 패배였다.그러나 이 공격의 진정한 의미는 전투가 군사적인 것만큼이나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전한 ‘설날 대공세’의 진정한 충격은 그날 새벽 3시 무렵 15명의 게릴라가 미국 대사관을 공격하여 점령한 사실이다. 미 대사관이란 미국 영토의 일부다. 다시 말해 미국 영토의 일부가 점령당한 셈이다. 날이 밝자 헬기를 동원한 미 해병대가 반격을 가해 오전 9시 경 게릴라 전원을 사살함으로써 민족해방전선의 점령은 6시간 만에 싱겁게 끝났지만 말이다.그 날 아침,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는 TV를 통하여 미국 대사관에 잠시나마 민족해방전선의 삼색기가 펄럭이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그 보도를 한 CBS 뉴스 캐스터 월터 크롱카이트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나는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What the hell is going on? I thought we were winning this war)"라고 빈정거렸다.역사적으로 주목할 점은 바로 이거다. 설날대공세는 군사적으로 패배한 쪽이 오히려 정치와 심리전에서 승리를 거둔 특별한 전쟁 역사였다. 응우옌 보 잡 장군은 설날 대공세 의미를 이렇게 분석했다.“우리는 우리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만 달성했을 뿐 나머지는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룬 하나의 성과는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심리적으로 대단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그제야 미국 국민은 전쟁의 실상을 생생히 보았다. 지겹도록 덤벼드는 아시아의 가련한 농민에 불과한 민족해방전선 전사들의 불굴의 의지에 인류 역사상 최강의 산업국가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미국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밀림과 늪에서 ‘민족의 독립과 자유’란 대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비루한 농민의 자식들은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우리는 왜 투쟁하는가?미제와 그 괴뢰인 사이공의 압제자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기 때문이다.“이 질문과 답변에 담긴 메시지는 억압받는 전 세계 인민뿐 아니라 그들을 억압한 미국과 유럽의 국가의 대중들에게까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반전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고, 제3세계 인민은 베트남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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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영웅적인 저항에 영감을 받았다.

“도전하지 못할 권위란 없다.”‘1848년 프랑스 혁명’ 이후 가장 의미 있는 혁명인 ‘1968년 혁명’의 모토(Motto)였다.설날 대공세는 모든 사람에게 무너뜨릴 수 없는 권력은 없다는 본보기를 확신하게 했다.이 여파는 가히 세계적이었다. 1968년에는 체코의 프라하의 봄, 멀리 아르헨티나의 아옌데가 이끄는 마르크스주의 세력의 민주혁명을 예고했으며, 유럽에서는 ‘5월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를 위한 전쟁을 지원하거나 거기에 동원된 세력들에게 다양한 반체제적 도전을 전개하였다.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의 모든 제3세계 국가들은 제국주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심지어 유럽과 제국주의 심장부 미국에까지 인간의 근본적인 해방의 욕구가 분출했다.프랑스에서는 1968년 이전에 판매 금지된 피임기구가 팔렸으며 혼전 동거가 자연스러워졌다. 부자 사이 또는 사제 사이 존댓말이 사라지는 따위의 문화, 가치관, 인간관계, 일상적인 관습과 인습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는 모든 권위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파리의 ‘5월 혁명’으로 새로운 사회운동인 여성운동, 환경운동 그리고 반핵 평화운동이 생겨났다.

기쁨과 활력의 물결이 전 세계에 다시 일어났다. 수백만 명의 들뜬 사람들은 갑자기 압제자의 힘을 믿지 않게 되었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을 흔들며 ‘우리, 그들과 함께 하리라’라고 외쳤다.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는 포르투갈 식민지 군대와 투쟁하고 있던 모잠비크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이 정글에 있는 기지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NATO의 후원을 받는 살라자르 독재 정권의 노쇠한 파시즘이 여전히 힘을 과시하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며 미 대사관으로 행진하던 시위대와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충돌했다. 파키스탄에서는 민중 시인 하비브 잘리브가 친미 군사 독재자 아유브 칸 육군 원수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베트남을 뒤덮고 있는 다이나마이트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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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이 지금 당신에게 가고 있다. 파리에서는 학생들이 센 강 좌안의 중심가를 영웅적인 베트남 지구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이 소르본 대학 도서관에서 휘날렸다.

서베를린에서는 베트남 문제를 의제로 국제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독재 정권과 싸우고 있는 몇몇 제3세계 국가에서까지 응답이 쇄도했다. 2월 셋째 주, 현수막이 내걸린 베를린 자유 대학 대강당에 급진파 청년들이 모였다. 결속과 발견의 직접적인 느낌, 즉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싹이 움트고 있다는 느낌이 강당에 감돌았다. 청년들은 유쾌하고 넉넉한 분위기에서 웃고 토론했으며, 설날대공세의 승리 소식이 하나씩 전해질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로 환호했다. 바로 이들이 이상과 희망과 낙관주의로 무장하여 다가올 투쟁의 선두에 나설 청년들이었다.회의가 끝난 뒤 참가자 2만 명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베를린의 추운 거리를 행진했다. 그들은 체 게바라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초상을 마치 자신들의 깃발처럼 들고 다녔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학생이었던 체 게바라, 그는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었고, 피억압자의 해방을 위해 쿠바의 구시대 독재 정권을 전복하였으며, 아프리카에서 투쟁하였고, 볼리비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리를 조금 절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국제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는 독일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다 1919년 베를린에서 살해되었다. 새로운 세대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잿빛 베를린 장벽에 부딪혀 울려 퍼졌다.

워싱턴 광장에서는 봅 딜런, 존 바에즈 같은 대중 가수들과 제인 폰다 같은 배우들이 리더하는 반전 운동의 메아리가 장엄하게 울렸다. 반전 운동은 미국만이 아니고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전개했으며 국제적 연대로 강화했다.

베트남 전쟁의 큰 역사적 의미는 전쟁을 치르는 베트남 인민의 고난이 전 세계 민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많은 지식인에게 반성을 촉구했다는 데 있다. 또한 언제나 가해자였던 서양인이 동향을 가해하고 왜곡하면서 스스로도 왜곡한 서양의 과거 삶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의 모토였던 ‘자유, 평등, 우애’가 서양인 자신들 끼리만의 구호가 아니라, ‘1968년 혁명’ 이후 자신들이 억압했던 제3세계 인민에게 진정으로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약 2백년 만에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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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똘레랑스(관용)을 실천하며 혁명의 완성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베트남 인민은 호찌민의 지도력 아래 ‘인간의 존엄’을 위해 치른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인류 전체를 질적으로 한 걸음 더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를 창조했다. 제국주의 야만에 저항한 베트남 전쟁 자체가 인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숭고한 혁명이었다.

“숭고한 정신의 깊이와 크기는고통의 깊이와 크기를 거치지 않고서는드러나지 않는다.”

베트남 인민이 물질적 폭력과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고 꽃 피운 민족 통일의 교훈은 우리에게 절실한 귀감인데도 그 교훈을 외면하거나 무지한 우리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반미(反美)의 언저리에서 아직 제자리 맴맴 하거나, 3.1절이나 광복절에 성조기를 흔들며 눈물을 흘리는 숭미(崇美)가 우리나라 동전의 양면이다.베트남 전쟁을 통하여 이룬 승미(勝美)의 역사가 부럽고 부러울 뿐이다.서로를 겨누는 총부리에 증오심이 가득한 한반도만이 지구촌에서 유일한 분단국임을 우리는 정직하게 부끄러워하자.

57. 알리:20세기 스포츠 영웅은 누가 뭐래도 무하마드 알리였다. 가장 의식 있는 스포츠맨이었으며, 그 의식까지 영웅적이었다.

“베트콩은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베트콩과 싸워야 하는가?베트콩은 나를 흑인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내가 왜 베트콩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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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제인 폰다제인 폰다는 1972년 8월에 폐허가 된 하노이를 방문하여, 라디오 방송을 통해 ‘베트남전 참전 미군에게’라는 역사적 연설을 하였다. 제일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외국 침략자를 상대로 줄기차게 싸웠습니다. 프랑스와 식민 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은 완전한 자주 독립을 쟁취할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의 역사와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찌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59. Blowing in the wind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봐야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요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 봐야백사장에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요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요그건 바람만이 대답할 수 있답니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Before you call him a man

How many seas must the white dove sail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And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balls flyBefore they are forever ban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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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60.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하라

집단 감수성; 정서 혁명; 인간잠재력 회복운동, 베트남과 워터게이트과 같은 부정적인 사건들에 싫증을 느낀 데에 따른 것이다.사회적 인간이라는 정신을 다시 정의하고 풍성하게 가꾸기 위해 ‘감수성 훈련’, ‘인가운터 테라피’(집단치료의 한 형태로 개인들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향상하도록 돕는다), “LSD 없는 황홀감 체험”이 유행했다.감각인식과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참여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스트레스와 화를 풀고 , 기분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몸동작을 하면서 서로를 태연히 끌어안고 서로의 몸을 만졌다.

61. 가해자가 반성한 역사베트남 전쟁을 기획하고 정당화하는데 전력을 다한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재임 1961∼1968년)조차 1995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베트남 전쟁의 비극과 교훈’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잘못했고, 끔찍하게 잘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왜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할 빚을 안고 있다“

Introspect-The tragedy and lesson of Vietnam-“Yet We were wrong, terribly wrong, We owe it to future generations to explain why”

62. 불멸의 인간, 눈을 감다.“나는 혁명가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조국은 이미 노예상태였다. 나는 철이 나서부터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여 왔다. 나의 장점이란 이 정도뿐이다.”

혁명가 체 게바라가 존경한 베트남 노인은 언제나 말을 겸손하게 했다. 1969년 9월3일 아침 9시 47분 하노이 방송은 나라의 아버지로 받든 노인이 7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미국 CBS방송은 수십 억 원에 이르는 상업광고를 빼고 7분간 호찌민의 사망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그리고 슬픔에 잠긴 베트남 인민을 이렇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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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정치 지도자를 잃은 애도의 눈물이 아니다. 슬픔을 애써 누른 눈물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자고 외치던 자상한 '호 아저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는 전 세계의 찬사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조사를 썼다."호찌민과 가장 심하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조차 체구가 작고 허약한 ‘호 아저씨’에 대한 숭배와 존경의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타임'지는 호찌민의 얼굴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타임'지는 미국이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적으로 몰았던 베트남 촌로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바쳤다."호찌민은 외세에서 해방된 통일 베트남을 건설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고통 받는 그의 1천9백만 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인민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호 아저씨‘를 이해했다. 남베트남인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현재 살아있는 민족 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랫동안 미국이 겨눈 총구 앞에서 미국 역사상 미국을 가장 괴롭혔고, 미국에게 유일하고 완벽한 패배를 안겨준 인물에게 미국이 어떻게 이런 존경심이 가득한 애도를 보낼 수 있을까? 북베트남의 호찌민과 대결하던 남베트남 대통령 티에우도 호찌민에게 조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도기간 동안 전투마저 멈추었고 사이공의 시장은 문을 닫았다.

민족의 태양이나 위대한 수령이 아닌 ‘박호(Bac Ho: Bac=Uncle; 호 아저씨)'란 친근한 애칭으로 불리었지만 현재 베트남 화폐에는 오직 그의 초상만이 새겨져 있어 베트남 사람들이 언제나 기억하고 있는 호찌민!

63. 2000년대 프랑스 시위2006년 프랑스 학생 시위는 정부의 청년실업 해소 정책인 최초고용계약(CPE)에 대한 반발이다. 사주가 26세 미만 직원을 채용한 뒤 최초 2년간은 자유롭게 해고하게 허용함으로써 무한경쟁을 강요해서 고용보장을 근본적으로 훼손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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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취업을 코앞에 둔 대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지 않고 자신들만 차별받게 된다는 인식에서 바리게이트 쌓는 시위를 하였다.

2010년 프랑스 연금개혁법 반대 시위는 2010년 9-10월 프랑스 주요 도시에서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열었다. 시위로 인해 도로교통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도로를 봉쇄한 노동계의 시위에 따라 운전자가 피해를 보고 택배 등 정제업소 등의 이송에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프랑스 학생들도 노동계와 함께 시위 대열에 동참하면서 400여 곳의 고등학교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해 다른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도 적지 않았다.

64. 호찌민이란 인간; 반가사유상-일본 국보 1호

“철학자로 지낸 온 수십 년간, 인간 실존의 진정한 평화로움을 구현한 이 같은 예술품을 달리 본 적이 없다. 이 불상은 모든 인간이 다다르고자 하는 영원한 평화와 조화가 어울린 절대적 이상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칼 야스퍼스

호찌민-베트남의 국부

“세계 혁명을 공부한 지 수십 년간, 인류 역사에서 민족의 존엄을 위해 그토록 애쓴 사람을 호찌민 외 달리 본 적이 없다.이 가냘픈 노인은 태어나 철이 든 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꿈을 꾸었고, 눈을 감았을 때 기어이 꿈을 이루어냈다.“-송필경

65. 인간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 웅혼한 혁명가의 내면

호찌민이란 인간의 내면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호찌민에게 어울리지 않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가르침이지 그의 삶과 인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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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존엄한 존재라 하더라도 개인숭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깨우치려면 스스로 동기를 이끌어내고 자신의 노력에 의지해야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에게 의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흉내글로 호찌민의 인격을 감히 들여다보았다.

20세기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로 존경 받았던 호찌민은 반공을 표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공산주의자의 한 사람일 뿐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호찌민은 자기 과신이나 신화적인 개인숭배를 철저히 외면하고 자화자찬의 글을 남기지 않아 개인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고 중간에 새든 여러 빛과 모순들 그리고 악의적인 비방 속에서 희미하고 굴절되어 보이기 때문에 다른 혁명가들의 강하고 격렬한 형상에 가려 있는 편이다. 호찌민에 관한 많은 책이 나왔지만 그 행적과 모습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힘든다. 여기에는 호찌민 자신의 책임이 무척 크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거의 쓴 적이 없고, 명성을 얻고 난 후에도 자신의 과거를 조작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리고 인민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끝까지 막았다.

호찌민의 사적인 삶에는 글로 이야기할 만한 흥밋거리가 거의 없다. 고요하게 사색하고 끊임없이 움직였던 한 인간은 감각적인 이력을 전혀 만들지 않았다. 본질적인 업적을 자신이 세운 건물 아래 주춧돌에 숨겨 놓았다. 그럼에도 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공산주의자 호찌민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중하게 느끼게 하는 점은 과연 무엇인가?

이점에 대해 분명하고 간략히 말하자면, 호찌민은 20세기 초 동양의 혁명가 중에서 최초의 지성인이었으며, 투철한 평화애호가였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라는 약소국의 절박한 염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서양을 넘어 인류의 정신세계를 더욱 정의롭고 화합한 모습으로 만들려던 싸움에서 최종의 승리자가 되어 자신의 적들마저 진정한 존경심을 우러나오게 하였다.

호찌민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존중하고 인류의 숭고한 과제인 인간의 존엄을 위해 모든 민족을 차별 없이 사랑했다. 그러나 호찌민은 단 한 가지만을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며 증오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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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혁명가 중에서도 민족을 사랑한 사람, 레닌이나 마오 같은 뛰어난 이론가는 아니더라도 가장 폭넓은 지식, 결코 요란하지 않은 관용의 마음, 진정 성실한 선의의 마음 자체였던 호찌민은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라는 인류에게 유전되는 암적 질환을 직시했다. 그리고 호찌민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선천적이며 맹신적이며 암적 파괴자인 ‘억압과 착취’와 투쟁했다.

호찌민의 설득에 따랐더라면 프랑스와 미국이 저지른 모든 전쟁은 상호 양보를 통해 폭력 없이 조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선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호찌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베트남의 모든 분쟁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고,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대는 자들도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으리라.

호찌민은 약소민족에게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고 경멸적으로 바라본 편협한 서구열강을 미워했다. 프랑스가 독일의 침략에 저항했던 것처럼 베트남도 프랑스의 착취에 벗어나려고 단호하게 저항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는 호찌민 삶의 유일한 과제였다.

자신의 민족을 사랑한 이 사람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폭발적인 지성의 힘으로 일생동안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식민주의자와 싸웠다. 호찌민은 행복한 시간에는 식민주의자에게 미소 지었지만 행복한 시간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온화한 순간에도 그에겐 편협한 제국주의가 그저 ‘어리석음’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로만 보였으며, 어리석음의 모습들을 젊은 시절 자신의 출판물에서 이미 희화화했다.

진실로 편견이 없는 공정한 사람이었던 호찌민은 완고한 적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겼으나,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타인을 착취하는 식민주의가 자신의 온화한 세계와 삶을 파괴하리라는 점을 깊이 알고 있었다.

모든 극단을 거부하는 중용적인 성향은 공자를 닮았다. 모든 폭력과 혼란 그리고 불화는 그가 민족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느끼고 있던 ‘민족의 독립과 자유’라는 절대 과제와 충돌했다. 특히 전쟁은 대립을 가장 거칠고 폭력적으로 종식시키는 형식이었기에 도덕적인 인류와 결합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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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운 이해와 비범한 술책으로 갈등을 약화시키고, 희미한 것을 밝혀주고, 혼란스러운 것을 수습하고, 찢어진 것은 새로 엮어주며, 고립한 것에 더 지고한 공통의 관련성을 부여한 점이 호찌민의 천부적 재능인 인내가 갖고 있는 힘이었다. 이런 의지를 그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는 마음으로 ‘호찌민스러움’을 보았다. 호찌민 자신은 바로 그 ‘호찌민스러움’으로 세상을 구하려 했다. 호찌민은 자신의 내면에 창조적인 모든 형태, 말하자면 시인, 사상가, 혁명가, 그리고 교육자의 모습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 세상에서 겉으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들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호찌민의 중재 기술 앞에서는 어떤 영역도 도달할 수 없거나 낯선 것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호찌민에게는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유교의 지혜들, 공산주의와 서구 계몽사상 사이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민족을 구원하는 순수한 방편이었다. 그는 서구 사람들이 서구의 자유사상가 밀이나 토마스 제퍼슨을 우러러본 것처럼 마르크스도 두터운 믿음으로 우러러보았다. 감각적으로 즐거운 충만함이 함께 했던 서구의 문명을 스탈린주의자 같은 광신적 공산주의자들처럼 개혁의 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개혁의 자유로운 누이로 보았다. 호찌민처럼 인간애를 먼저 느끼는 사람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 본질에 따른 헤게모니를 잡으려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과정에서 어느 나라에도 정주하지 않았고 머무는 곳은 모두 고향으로 알고 지낸, 동양 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인 호찌민은 결코 다른 나라에 대한 어느 한 나라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러 민족의 가치를 평가할 때도 그 민족이 가진 가장 고귀한 정신을 보고 그 민족의 가치를 평가했기에 여러 소수민족을 다 사랑했다. 모든 국가와 인종, 계층에서 선별한 고결한 사람들을 커다란 교양인 동맹체로 불러 모은 숭고한 시도를 하였다.

호찌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자의 유교와 결합하면서 인민들에게-이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업적이다-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통일된 사고와 표현의 형식을 창조하였다. 그 폭넓은 지식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았으며, 정신은 두터운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았다.

어리석고 악한 제국주의적 행동을 끊임없이 증오하며 항상 물질적 폭력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서구의 야만스러움에 호찌민은 고집스럽게 저항했다.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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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지성, 사회주의적 창조의 영역은 친근하게 받아 들였다. 사회주의적 이상을 넓히는 태도가 올바른 사람의 과제라 여겼다. 배움과 독서를 끊임없이 장려해 인간의 품성을 고상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은 항상 감동적이다. 광기의 전쟁 와중에도 도덕이 완전하게 가르칠 수 있고, 또 배울 수 있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꿈은 지고해서, 마치 강력한 자석처럼 인민 가운데서 훌륭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데 아주 적합했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언제나 겸손해서 자신의 존재는 하찮게 여겼다. 자신의 희망과 열정으로 민족을 구원하는 데에만 전력을 다했다.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대한 희망의 힘을 새로운 이상을 통해 확인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지도자라 불러 마땅하고, 호찌민이 바로 그러했다. 인류애 정신으로 서구와 동양을 융합한다는 호찌민의 생각은 대단히 바람직했다. 20세기 전환기의 위대한 혁명은 서구의 억압을 제거하고 피압박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길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숱한 억압의 세월 뒤에, 처음으로 베트남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호찌민을 통해서 최상의 이상주의가 베트남으로 흘러들었다. 호찌민은 모든 인민이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주와 소작인, 지식인, 예술가, 청소년과 여성들이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경쟁했으며, 호찌민은 그들의 공통적인 모범이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멸망 이후 처음으로 호찌민의 정신을 통해 베트남이 부활했다. 군주제의 허영이 아닌 민족 전체가 형제처럼 이상적인 집단으로 변했다. 억압 속에서 단결하여 식민지에서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지라는 인민이 갈망한 민족의 승리가 바로 호찌민의 신성한 바람이었으나, 서구 열강들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아 덧없는 이상이 되었다.

고통스러운 질문을 해보자. 어째서 그토록 당연한 세계가 오지 않았는가? 어째서 동서양의 정신적 화합이라는 지고하고 인도적인 이상이 승리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호찌민스러움’이 모든 증오와 불합리에 대해 그토록 계몽적인 서구 사회에 실제적인 힘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는가?

유감스럽게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실현하려는 식민지 민중의 이상을 이기심이 가득한 서구 민중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저들의 사욕과 이기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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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 이익과 착취를 원했다.극단적이고 천박한 이기심은 다른 계층과 인종과 종교에 증오를 부추긴다. 광기의 무모한 불꽃이 가장 쉽게 옮겨 붙을 수 있는 것은 증오다.

‘호찌민스러움’은 조화이며 범인류적인 이상이었기에 적에게도 독불장군과 같은 자극을 결코 주지 않았다. 언제나 불만을 내뿜는 파당 성향의 호찌민 반대자들은 더 쉽게 고립되었다. 증오가 파고들 틈을 허락하지 않는 혁명가 호찌민은 멀고도 거의 보이지 않는 목표를 향해 인내하며 노력했다. 베트남 민족이 꿈꾼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실현되지 않는 한, 혁명적인 이상을 위한 호찌민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진정한 이 혁명가는 자신이 이룬 업적이 지지자들이 비합리적인 열광에 휩싸이지 않게 자신의 우상숭배를 금지했다. 광신의 격류는 모든 둑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한 지도자였다.

호찌민의 개인적 비극은 모든 인간 중에 가장 반식민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자신이,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승리를 확신하며 처음으로 피식민 국가가 스스로 힘으로 완벽하게 독립선언을 한 그러한 역사에, 역사가 알고 있는 한 가장 난폭했던 미국의 전쟁광란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는 데에 있다.

청교도 국가 미국의 광란은 베트남의 모든 도시, 마을, 집 그리고 가정을 뚫고 지나갔다. 전쟁이란 악마는 증오의 힘을 발산했고 이성의 사슬을 끊고 마음껏 베트남을 덮쳤다. 이러한 시련에도 대중은 집단적 망상이나 편협한 사고에 쉽게 굴복하나, 인민들에게 용기와 도덕적 결의를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격려한 점이 호치면의 지도력이었다.

호찌민의 연약한 손은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는 신념으로 무장해서 미국이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가공할 첨단 무기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베트남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바로 이 정신력에 있으며 전 세계 핍박받는 식민지 민중에게 심원한 감동과 자신감을 주었다. 이제까지 피식민 민중은 노예처럼 복종하는 지 아니면 반항하는 지, 다른 선택은 없었다.

소련파냐 중국파냐, 호찌민은 그 시대의 지도자 중에서 유일하게 어느 편에도 가담하길 거부했다. 이편에도 과장이나 광신이 있고 저편에도 과장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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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이 있다. 광신을 반대하는 불멸의 인간 호찌민은 이편도 저편도 아닌 자신의 확실한 판단 기준인 공정함에 따랐다.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아 자기에게 의지 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아 진리에 의지 하여라.”는 붓다의 말씀대로 행동했다. 이로써 그는 가장 위험한 장소인 중앙에 섰다. 그래서 이편에서도 저편에서도 증오와 조소가 쏟아졌다.

호찌민은 세상을 향해 열린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고 마르지 않는 늪처럼 결코 딱딱하게 굳는 법이 없었다. 쓸데없이 영웅처럼 우쭐대는 태도는 ‘호찌민스러움’이 아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비켜서기도 했고, 마치 갈대처럼 부드럽게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흔들리기도 했다. 단지 자기 자신이 부러지지 않으려 함이었고 항상 다시 똑바로 일어서기 위함이었다. 그는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독립에 대한 인식을 거만하게 내보이지 않고 외투 속에 숨기고 있었다. 그는 대중의 망상이 너무도 거칠게 부딪히면 일시적으로 은신처와 뒷길에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숨겼다.

호찌민의 경탄할만한 업적은, 자신의 정신적 보물인 인간의 존엄에 대한 믿음을 자기 시대의 끔찍한 증오의 폭풍 속에서도 안전하게 보존한 끈기이다. 그래서 희미하게 타고 있는 작은 심지에 약소민족들이 등불을 밝힐 수 있었고 모든 인류가 자신의 등불을 밝힐 수 있었다.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라는 호찌민의 소중한 유산은 베트남 민족을 넘어서서 전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