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대한 믿음의 원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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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s on the Instit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성경에 대한 믿음의 원천 *송영과 신앙고백 /*십계명 / *찬송(064) / 기도 / *찬송(065) / 설교와 헌상 / *찬송(066) / *주기도문과 축도 마태복음 13:10-17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 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 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 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 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 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 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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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성경에 대한 믿음의 원천 - jooeon.netjooeon.net/wp-content/uploads/sites/3/2016/04/inst-book1-07.pdf · 어떤 신앙 공동체이든지 정경을 갖고 있으며, 정경에

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s on the Instit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성경에 대한

믿음의

원천

*송영과 신앙고백 /*십계명 / *찬송(064편) / 기도 / *찬송(065편) / 설교와 헌상 / *찬송(066편) / *주기도문과 축도

마태복음 13:10-17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

이까 11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 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

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

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

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

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

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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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禮拜說敎

성경에 대한 믿음의 원천 (마 13:10-17)

성경전서와 정경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책’ 또는 ‘거룩한 기록물’이라는 뜻으로 부

르는 ‘성서’(聖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독교는

성서라고 하는 정경(正經)에 근거하여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정경을 달

리 말하여 ‘성경’(聖經)이라고도 합니다. 성서, 정경, 성경 등의 용어들은 결과적

으로 한 가지를 가리키는 공통 용어이지만 본래적으로는 의미가 약간씩 다릅

니다. 이 차이점을 잘 알아두면 유익합니다.

기독교의 정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39권의 책으로

묶여 있는 옛적 언약으로서의 구약(Old Testament)과 27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 새로운 언약으로서의 신약(New Testament)입니다. 이 두 무더기의 성서를

합해서 이름하여 성경전서(聖經全書)라는 이름 하에 우리 기독교의 정경

(Canon)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앙 공동체이든지 정경을 갖고 있으며, 정경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신앙 체계를 형성해 냅니다. 따라서 하나의 신앙 공동체의 입장에서 정경은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최고의 규범이요,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가령, 불교와 같은 이단에는 ‘불경’이 있고, 몰몬교와 같은 이단은 ‘몰몬경’이라

는 것을 갖고 있으며, 모하메트교와 같은 이단은 코란(the Koran)을 정경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는 성경전서를 정경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

다.

‘정경’이라는 말은 ‘곧은 막대기’(stick), 또는 ‘곧은 갈대’(reed)라는 뜻을 지닌

카네(qaneh)라는 히브리어(Hebrew)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희랍)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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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10-17

건너오면서 캐논(kanon)으로 변화되었고, 의미도 조금 정 해져서 단순히 막대

기라고 했던 의미에서 발전하여 무엇을 재고 측량하는 ‘자’, ‘기준’, ‘표준’을 가

리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4세기경에 기독교 신학 속으로 들어오면서

‘정경’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경이라는 단어의 출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였지만, 영어의 ‘바이블’이라는 말은 연대적으로 조금 나중에 등장하게 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서 왔습니다. 옛날에는 파피루스가 오늘날의 종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

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발달

되기 시작한 알파벳이 이 파피루스에도 기록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기록물들

이 지중해 연안 베이루트 북쪽에 있는 고대 항구 도시 비블로스에 집결된 후, 다시 그리스어권 세계로 전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책의 항구

비블로스는 나중에 그리스어(Greek language)로 책 중의 책이라는 뜻을 가리키

는 동일한 단어 비블로스가 되었고, 이것은 다시 라틴어(Latin language)로 옮겨

지면서 ‘비블리아’(Biblia)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비블리아는 다시 영어(English, or the English language)로 옮겨지면서는 바이블(the Bible)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틴어에는 이미 ‘거룩한 기록물’이라는 뜻의 ‘싸크라 스크립투

라’(Sacra Scriptura)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 단어가 영어로는 ‘홀리 스크립

쳐’(the Holy Scripture)라고 번역되면서 ‘바이블’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에서는 똑 같은 것을 두고 두 가지 단어로써 표현했던 것입니

다. 이는 마치 우리말에서도 가르치는 사람을 놓고 선생이라고 하기도 하고

동시에 교사라고 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책 중의 책’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영어로 옮겨지면서 ‘바이

블’이 되었고, 이것은 ‘홀리 스크립쳐’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책

중의 책은 거룩한 기록물인 것이고, 거룩한 기록물이야말로 책 중의 책입니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정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글자 하나 하나가 발음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뜻을 나타내는 특징

의 언어인 중국어(Chinese or the Chinese language), 곧 ‘표의 문자’로서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는 한문에서는 ‘성경’(聖經)이라고 했습니다. 이 표의 문자의 뜻을

잘 보건대, ‘바이블’(성서)과 ‘캐논’(경전)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성경(聖經)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바이

블’과 ‘홀리 스크립쳐’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가져다가 우리말처럼 쓰고 있는 것입니

다. 하지만 아주 좋은 번역인 것 같습니다.

성경과 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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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 기독교에서 구약을 구성하고 있는 39권의 책들은 언제부터 정

경이 되었습니까? 구약책들 중에서 ‘모세 5경’(Pentateuch,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

지)은 가장 먼저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에스라 시대, 주전 450년경), 다음은 예

언서가 정경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주전 2세기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5경과 예언서들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인 성문서(聖文書)는 주후 90년경에 팔레

스타인의 얌니야(Jamnia)에서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얌니야 회의에서 교회 대표들은 히브리어로 쓰여지지 아니한

책들, 즉 더 후기에 그리스어로 기록된 책들의 경우 정통성이 없다고 보아 정

경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 39권만이 얌니야

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일명 팔레

스타인 정경(Palestinian Can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외경(外經, Apocrypha)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

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은 외경도 정경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

다. 외경은 구약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LXX)과 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전 33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샤 제국을 물리치고 승

리를 거둠으로써 고대 근동 지역은 그리스 세계로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

다. 따라서 이후로는 그리스어가 고대 근동 세계의 통용어가 되었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점차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

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일방적인 애국심만으로 모국어 사랑을 앞세

워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공통어를 배척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특별히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이만저만한 불편을 초래하는 것이 아

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각에서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사랑하자

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공통어 노릇을 하고

있는 영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실제적인 생활상으로도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변환기를 겪으면서 고유 언어인 히브

리어만 붙잡고 있을 수 없게 됨에 따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

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화적 변천기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구약 외에, 다른 여러 가지 많은 신앙적 문서들이 히브리

어와 그리스어 등으로 기록되었고, 또한 애독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즈

음 출현한 많은 신앙 문서들 중에서 특별히 ‘15권의 책들’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본래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서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필

요성도 자연스럽게 대두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주전 3세기 중엽에 당시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히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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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서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번

역된 성서를 「70인역」(LXX: Septuagint)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때 당시의 문

화적 상황에 맞물려 구약 성서는 외경 15권의 책들도 섞여서 함께 번역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15권의 외경이 포함된 그리스어 구약 정경을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 Canon)이라고 부릅니다. 이 15권의 책 이름은 로마 카톨릭 성경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얌니야 회의에서는 이들 15권의 책들은 정경으

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면서 정경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따라서 얌

니아 회의의 입장에서는 이 15권의 책들은 정경 밖에 있는 책, 곧 외경(外經)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얌니아 회의 이후부터 구약 정경은 두 가지 흐름을 타

게 되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된 39권만을 하나님의 말씀, 곧 정경으로

인정하는 ‘팔레스타인 정경’(Palestinian Canon)의 흐름과, 반면 15권의 책을 더

포함시키는 ‘알렉산드리안 정경’(Alexandrian Canon)의 흐름입니다.

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성경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잘 아

시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입니다. 그래서 예

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연히 그리스어 성경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

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성경은 팔레스타인 정경이었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

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

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 여기 ‘아벨의 피로부터 … 사가랴의 피까지’라고 한 순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당시 구약 성경의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구

약 성경의 배열 순서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창세

기가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것은 같지만, 마지막은 말라기가 아니라 역대기인

것이 다릅니다. 물론 중간에도 순서가 다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창세기에 나

오는 ‘아벨’로부터 시작하셔서 성전 제단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라고 하신 것

은 역대기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 팔레스타인 정경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어떤 성경을 사용

하셨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외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들은 단 한 차례라도 외경을 인용하시기는커녕 그것의 존재 자체조차 인정하

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학자들의 주도면 한 연구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약 성

경은 263회나 직접 인용하였으며, 간접 인용하신 것만도 370회나 됩니다. 즉 외

경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단순히 몰랐던 책이었던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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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하게 배척하신 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경의 범위 또는 목록을 확정함

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인가하신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이 둘 사이에는 ‘영원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한편, 구약이 B. C. 1400년경 모세 오경의 기록을 시작으로 B. C. 400년 경의

소선지서, 에스라, 느헤미야 등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의 간격이 있는

반면, 신약은 27권 모두가 A. D. 50-90년 사이, 즉 50년 동안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약 27권을 공식적인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 D. 397년의 칼타고 회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칼타고 회의가 그러한 결정을 하

였기 때문에 신약 성경이 비로소 경전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기 때문입

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말 놀랍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이미 그처럼 27권만이 교회 내에서 정경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 이 은 하지만 아주 뚜렷하게 역사를 주관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 명백한 상황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칼타고 회의가 결정한 것은 새삼스럽게 무

슨 연구회나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정경의 자격을 갖는 책들을 조사하

는 그런 일을 했던 것이 아니고, 이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

게 교회 안에서 정경으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러한 책들의 목록을 공식적으

로 확인하는 의미의 작업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가 출범한 후로 성경이 기록되는 일과 함께 또한 성경으로

채택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도전들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구약 성경

목록에 외경들이 슬금슬금 끼어들었던 것처럼, 신약 성경이 형성되는 과정에

서도 같은 조짐들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

하여 A. D. 4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신약 정경을 공적으로 확립해야 할 중요성

과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는 363년의 라오디게

아 교회 회의, 393년의 히포 교회 회의 등의 주요한 교회 회의들을 거치면서

마침내 397년에는 칼타고 교회 회의에서 현재와 같은 신약 27권의 정경을 확

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교회 개혁기를 통한 정경 확정

그런데 이후로 초대 교회가 탄생한 지 5백 여년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부

터, 교회는 순수성을 지속하지 못하고 서서히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모습으로 조금씩 변질되어가는 체제가 전면에 부

상하면서, 동시에 외경이 성경의 자리로 올라서는 일도 시작되었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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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자기네 교회가 가르치는 것들의 정당성을 지지하

기 위하여 외경을 내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식 있는 학자들은

외경이 정경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따라

서 자신들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급기야는 교회가

외경과 같은 책들을 성경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교회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

다는 식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는 데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급기야는 교황이 하는 말은 성경의 권위보다 더 위에 있다

고 하는 정신 나간 주장까지 하는 다음 단계의 오류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

니다.

하지만 이처럼 교회가 성경을 결정짓는 원리 또는 권세라는 것을 인정하

게 되면 이는 결국 교회가 믿는 믿음의 도리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

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황과 같은 사람이, 또는

교회 회의와 같은 사람들의 판단력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승인하고 결정

한다고 하는 이런 정신 없는 생각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이겠습니

까? 교회 회의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기반을 두는 일련의 상황들과

관련한 것들이지, 성경 자체를 정경으로 판단하거나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월권행위입니다.

성경 목록을 결정짓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정

해져 있습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그렇게 성경 목록을 확정

하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대 교회가 정경을 확정지은 결정들을 이런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앞에

서 구약 정경을 결정한 얌니아 회의와 신약 정경을 결정한 칼타고 회의에 대

해서 말씀드렸지만, 이들 교회 회의의 결정이란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미

정경의 범위로 결정하신 가운데 당시 온 사방의 교회들 사이에서 당연한 듯

이 사용하도록 은 하고도 자연스럽게 섭리하셨던 바를 공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차원의 행동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그렇게도 서

로 사방으로 떨어져 있던 교회들이 한결 같이 동일한 목록의 성경을 경전으

로 사용하고 있었던 이런 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절대적으

로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는 김용옥 같은 학

자가 나서서 ‘도마 복음서’ 같은 책을 또 하나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과

거서부터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지만, 실상은 아주 가당치 않은 주장인 것입니

다. 과거 교회가 도마의 복음서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정경 목록에

넣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책은 당시로서는 전혀 성경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오류투성이였기 때문에, 온 사방에 흩어져 있었던 교회들이었지만 하나

님의 섭리 가운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배척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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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TV를 통한 공개 영어 학

습 교재로 도마의 복음서 같은 것을 사용하면서 이런저런 가당치도 않은 말

을 떠들어댄다는 것은 실로 교만하고도 건방진 태도인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은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율배반도 이만

저만한 이율배반이 아닙니다.

이들 초기 교회 회의의 정경 목록 확정 행위는, 훗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신들의 교회에서의 전제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정경 목록을

확정 짓는 그런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 카톨릭

이 가르치는 온갖 비상식적인 교리들은 전부 외경과 교황의 어록에서 끌어온

것들입니다. 게다가 외경의 내용들은 정통 66권의 성경과는 상반되고 대치된다

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연옥설, 면죄부, 성인 중보 기도, 마리아

승천설 기타 등등은 전부 우리 개혁 교회나 저쪽 로마 카톨릭 교회나 모두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66권의 성경에서는 전혀 지지 근거가 없는 것들입

니다. 개혁 교회는 그러한 것들이 66권의 내용과 상치되고 반대되기 때문에 안

받아들이는데, 로마 카톨릭은 그렇게 자체 충돌이 일어나고 있음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무력으로 위협하면

서 어붙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경 개방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그 동안 속여왔던 것이 들통나게 됨에 따라 어떻게 해

야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16세기 교회 개혁은 다양한 언어로 정경을 번역하여 일반 성도들 누

구나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자, 그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가 외경을 앞세워 혹세무민(惑世誣民)했던 잘못들이

사방 팔방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구체적으로 정경 목록을 다시금 확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가령,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2절은 66권의 성경만이 정경이라고 못박아 놓았

고, 다음 3절에서는 외경은 영감된 성경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확정하였던 것입

니다.

그러자 실소를 금치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6세기 교회 개혁 운동이

한창 불을 지펴나가자, 이에 맞불을 놓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

가 오랜 시기에 걸쳐 트렌트 공의회(Trent Council, 1545~1563)라는 것을 소집했

는데, 여기서 정경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자기네들이 받들어 나오던 바를

일부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공의회를 통해서 기존의 알렉산드리안 정

경(Alexandrian Canon)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도, 하지만 자기들이 보기에 너무

도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는지 15권의 외경 목록에서 3권을 슬그머니 제외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자기네 인간이 아예 대놓고 하나님의 말씀의 자격

을 심사하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때 제외시킨 책들은 외경의 제일 뒷부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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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하고 있는 세 권, 곧 에스드라스 상권과 하권(I, II Esdras), 그리고 므낫세의

기도(the Prayer of Manasseh)였습니다. 그렇게 단번에 폐위시켜버리고야 말 그런

가짜 성경을 앞세워 지금까지 그토록 엉터리 교리와 신앙을 가르치고 주장해

왔던 바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회개나 용서를 비는 말도 없이,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슬그머니 처리해버렸습니다. 여하튼 그리하여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

회는 12권의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어느 때쯤엔가, 또 무슨 핑계를 대면서 어떤 책을 성경이라면서 갖다 붙일는지

혹은 빼내버릴는지 말입니다.

교회의 기반은 성경

이 문제는 사안이 중요하므로 정확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개혁기에도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교회의 성경이 된

다’고 하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

렇게 가르쳐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성경의 범위나 권위를 승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율법서, 선지서, 사도들의 책들을 정경으로 승인하는 과

정을 가졌기 때문에, 자칫잘못 교회가 성경 승인권을 소유한 듯이 잘못 생각

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사실 교회란 얼마

나 불완전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렇게 성경을 재고 자르고 짜집기

할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될 경우, 결국 이것은 사람이 성경을 확증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사람을 믿자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사람의 손에 의해 요리되고 정리될 수 있다는 말과 같게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의 단 한 마디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는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 2:20)고 했습니다. 여기서 ‘터 위에’라는 말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가르친

교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 것은, 확실히

성경은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벌써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경을 낳은 것은 절대로 아니고, 반대로 성경이 교

회를 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작 교회가 그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사도와

선지자가 쓴 책들 중에서 어떤 것이 성경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

히 의심으로 떠오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

심을 갖는 것은 내용상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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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禮拜說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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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교훈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는 사실은 ‘역사적 현실’인

것이고, 그래서 그처럼 말씀 선포가 없이는 교회 자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

다고 하는 사실은 ‘실제로 전개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카

톨릭 교회의 주장처럼,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

이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앞뒤 맞지 않는 모순이

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 수립의 근거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

자, 그러면 이제부터는 아주 실제적인 문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상 살

펴본 사실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시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

신하기 전에는, 우리의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것을 요구합니

다. 하지만 이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 대한 성도의 확신은 일반적

으로 하나님이 그의 속에서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데서 얻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마련되기를 원한다면, 곧 영원히

의심되는 문제로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또한 가장

어리석은 말장난에조차도 놀라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상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

령의 은 한 증거에 의거하여 성경에 대한 우리의 확신의 근거를 찾아야 합

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성령

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

한 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자신의 말씀에 대한 합당한 증인이 되셔서 성령의

내적 증거로서 성도의 심령에 인쳐주시는 원리를 스스로 설정하셨기 때문입

니다.

이런 원리는 구약 시대 때부터 적용되어 나왔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

님의 영께서 사람의 심령에서 인쳐주시는 역사가 없이는 구약 성도의 참된

신앙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

던 성령께서는, 청중들로 하여금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사를 동일하게 베푸셨

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성령)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성령의 역사를 덧입지 않은 채로,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경을 하나

님의 말씀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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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은혜

를 베풀어주신 데 대해 다시 한 번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동시

에 성경을 배척하고 있는 불신자들을 바라보면서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

다는 것을 일면 이해할(?) 필요성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앙이 특심

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어하는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어떤 불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하고서도 아무런 죄의 대가를 받지 않고

무사할(?) 경우, 이러한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다소 투덜거리기도 합니

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마음을 조명하시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빠져버리기를 자초한 수많은 회의 속에

서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증하는 성경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하나

되는 입장을 고수해야 합니다. 첫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

은 사람만이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요, 둘째, 성경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한다고 하는 사실이요, 셋째, 성경에 대

한 증명은 사람의 증거나 도리에 종속시킬 수 없다고 하는 사실 등입니다.

진정 성경이 마땅히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확실성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우리 속에서 역사를 베푸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인간

적인 어떠한 노력으로도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점에 있어서 충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이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성경 자체에다 무슨 인위적인 작업

을 통하여 절대적 권위를 수여하고자 하는 일체의 작업들 말입니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도전이 워낙 사방에서 파도처럼 려오다 보니,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려는 열심으로 성경에 절대적 가치를 이성적으로 부여하는 작업에 몰

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신

학적 용어로 ‘성경의 무오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제 하에 성경의 무오성

을 증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상과 논증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아

예 불필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이성적 논증으로서는 결코 성경의 권위를 확증할 수 없다

고 하는 사실은 항상 전제되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속

에서 성령이 조명하시는가의 여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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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우리 자신이 가진 이성적 판단이나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논리적 설

명에 설득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성경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무오성 증명 작업’은, 만일 이 결정적인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스콜라

신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성경이 인간의 사역을 통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럴지라도 분

명히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 마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응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확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입증하는 어떤 사상이나 논증과 같은 것들 자체만을 의

지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니로되, 궁극적으로 우리가 의

지해야 하는 것은 우리 속에서 확신을 갖도록 역사해주시는 성령님의 조명하

시는 사역입니다.

이 조명 사역에 의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고, 인간적인 설득이나 지식을 통해서는 결코 이

끌어낼 수 없는, 그러한 것들보다 더 생생하고 효과 있게 순종하도록 마음이

끌려 신앙의 불을 태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말할

때는 성경을 생각하게 되지만, 우리의 확신의 근거를 말할 때에는 바드시 성

령님의 사역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인쳐주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

앙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십시다. 우리가 겸손하고 순전하다면 다음

과 같이 선지자가 선포한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사야는 회복된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하기를,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다 …”(사 54:13)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내적 조명

역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존 칼빈은 이러한 원리 때문에 말하기를, “실로 참

된 교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민첩한 열망이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서 성경 말씀을 믿고자 하는 민첩한 열망

이 나온다면,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 때문에 자꾸만 성경 말씀을 대하

고 싶어지는 것은, 분명 우리 자신만의 의욕인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믿는 자들만의 것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그토록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고 성경을 설명해도

돌부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 반응 때문에 속상한 적이 있으셨습니까? 우리들

중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들려줄 때에,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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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부부 사이에서조차 관심을 가질 듯 말 듯하면서, 우리를 애태우는 사람

들로 인하여 속도 상하고 무척이나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결국

에는 하나님께서 도움을 베풀어주실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워는 할지언정 속이 상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

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은,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하게 소유하였던 유

대인들의 세계 속에서조차 자동적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소유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과는 아주 분명

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유대인들에게서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어서, 심지어 어떤 사람의 경우 그야말

로 성경을 서너권씩이나 가지고 있기까지 하지만, 그렇게 가지고만 있을 뿐이

지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들지는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마치

신앙 생활을 위해서 갖추고 있어야 할 일종의 장식품과도 같은 정도로 여기

는 것입니다.

뭐라고 뚜렷하게 반대할 만한 이유가 있다거나, 또는 그렇게 문제를 제기

할 만한 실력도 없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곁눈질해 본 바에 따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라고는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감동을

받는 구절이 있으면, 줄을 쳐서 특별한 표식을 해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

고는 끝이라 말입니다. 그렇게 줄을 쳐놓아봤자, 훗날 그 부분을 맞닥뜨리게

될 때, “어, 언제 내가 이 부분에다 줄을 쳤었나!”, 또는 “옳거니, 내가 이미 이

런 귀한 내용을 알아보고 표시를 해두었구먼!” 하는 정도의 감동으로 그쳐버

리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 하는 말입니다.

요즈음은 워낙에 교회가 제도적으로 타락하다 보니까, 우리가 우스개 소리

로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니지!”, 또는 “신자라고 다

신자일까?” 물론 이런 말도 할 것입니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 뭐해! 읽지도

않으면서!” 이런 말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 뭐하나! 정작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신자들의 입장에서 목사를 바라보면서 하는 이런 말도

있다고 합니다. “저렇게 열불 내듯이 설교하는건 뭐야! 자기 자신부터가 믿지

도 않으면서 말이야!” 이런 풍자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는 공통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

다는 데 대한 것입니다.

소위 믿음의 권속이라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사정이 이러한데 하물며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경우일까 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전하는 복음

진리가 배척 당하더라도 결코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이해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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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결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는 영원

히 변치 않는 여러 가지 법칙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옛적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께서 자신의 가족으로 여겨 유대 민족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 품어주셨던 유대인에게

서까지도, 당신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현상이 다분히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그러면서 그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

뇨”(사 53:1). 여기서 ‘여호와의 팔이 나타났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는 신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능력(팔)’은, 여호와의 말

씀을 깨닫고 그러한 원리대로 자신을 적용시킬 때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의 수가 적은 것 때문에 마음에 괴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면, 반대로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비 은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이해할 수 없

다”(마 13:11)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우리로서는 이러한 은혜를 입

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정으로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감사가 진정한 것이 되

기 위하여, 깨달은 말씀대로 그렇게 실천하고 적용하도록 하십시다.

정리와 결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신자의 심령 속에 이러한 확신을 심어주십니

다. 성경의 신빙성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사람의 마음

속에서 확신으로 작용하는 데에는, 그러한 논리적 작업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어

서, 전혀 다른 무엇이 더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고 합니

다. 결국 성령의 내적 조명 역사는 중생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요, 중생한 사람이라

면 반드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큰 확신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데 대한 우리의 확신이 날로날

로 증대되시기를 바랍니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3개 1조 4쌍의 신앙고백

시작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정착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 21개조 (Geneva Church Confession, 1536)

제네바 교회 신앙교육서 33개조 (Geneva Church First Catechism, 1537)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문답 373문답 (Geneva Church Catechism, 1542, 1545)

벨기에 신앙고백 37개조 (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129문답 (Heidelberg Catechism, 1563) 도르트 신조 5개 교리 (Canons of Dort, 1618-19)

형성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확정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프랑스 (갈리아) 신앙고백 40개조 (France [Gallican] Confession, 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25개조

(Scots Confession, 1560) 스위스(헬베틱) 신앙고백 30개장

(Swiss [Helvetic] Confession, 1536, 156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개장 (Westminster Confession, 1643-49) 웨스트민스터 대신앙고백문답 196문답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3-49)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107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3-49)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主言敎會

교회의 ‘설교문’은 목사의 생활을 지지해주는 교회의 위임 아래 수행된 것이므로, 설교자 개인이 아닌 교회에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주언교회는 “거룩한 공회와 ...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바에 따라, 보편의 참된 교회를 섬기는 일환으로 본 설교문을 사업과 결부된 책으로 판매치 아니하고 공개리에 배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