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 방송 년•••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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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0 년•••증언 방송 60 년을 맞는 방송인들의 감회는 유달리 깊다. 빈약한 시설과 기재로 방송을 지켜 퇴역 방송인들은 아시안게임을 훌륭히 치러낸 우리방송의 성장이 자기것인양 자랑스러 것이다 . 그래서 이들 퇴역 방송인들# 현역때의 애환이 더욱 기억에 새롭고 곱게 간직 하고 싶은 < 방송사X여겨지는 것이다 . 아나운서, 프로듀서, 기술직 , 업무직 등에서 리의 전파를 지켜온 퇴역 방송인들의 한국 방송 60 년의 증언을 하나로 묶었다. 대통령 환영중계 실수…시말서로 모면 根/아나운서 우리 나라 방송 60 년사중 절반인 30여년간 방송을 위해 해왔던 나로서는 방송에 대한 향수를 영원 지워버릴수가 없다. 1951 임시수도 부산에 KBS아나운서로 첫발을 내디딘 나는 신참 아나운서로서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UN군사 령부 발표의 전황보도에 바빴고 대북심리전 송에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서울 수복후에도 전후복구를 위해 바쁘게 돌아가는 국내외정세 보도를 위해 쉴틈이 없었다. .특히 폐허가된 울에서 전쟁의 쓰라린 상처를 달래기 위해 리나라 방송사상 처음으로 대중속에 파고드는 공개방송「스무고개」「노래자랑」프로를 가지고 청취자의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했던 일은 수가없다. 특히 1956 호주 r멜번」에서 올림픽대회에 처음으로 해외출장가서 송순 천선수(원투) 은메달획득 실황을 중계방송했 일과 마라톤 이창훈선수가 4 위로 골인하는 것도 일본선수로 착각 방송하다가 한참후에야 정정방송 했던 일들은 더욱 기억에 생생하다. 30여년간의 방송생활을 회고하면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으나■그중 대표적인 실패담 한토막 소개한다. 이승만대통령 자유월남의 고딘 디엠대통령을 방문하고 돌아오는날 나는 김포 공황에서 대통'령의 도착실황중계방송을 담당하 있었다. 마침내 이대통령. 탑승기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활주로에 내려앉아 굴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엉겹결에 말한다는것이『지금 이승만 대통령이 활주로위를 굴러들어오고 있읍니 . 이대통령 지금 굴러들어오고 있읍 니다.……』실수도 이정도'면 최상급의 실수였 . 국가원수가 굴러들어오고 있다니, 다행히 국가원수 모독죄에 걸리지 않고 말서ᅵ한장으 끝이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나는 웃지못할 나의 실패담이다. 30년전 “똘돌이 모험”에 복남이 역으로 E 民/성우 방송국 라디오 성우로 30여년간 연기생활만 계속 해온 나에게 친구들은 가지 일만 그렇게 계속하 기도 쉬운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의 경우 성우 활이 취미고 으로 유별나게 각되는다. 아마도 매일.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성우 생활의 매력이 더더욱 생활에서 떠.나지 하게 묶어놓았는지 모른다. 8 • 15 2 년뒤1947 늦가을 느날 당시 서울중학에 다니던 나는 학교 동급생의 권유로 방송국 어린이극회 회원에 가입한것아 마이크와 인연을 맺게 시초였다. 당시만해 라디오 드라머는 일주일에 한두회 단편물이 방송됐을뿐이고 그나마 모두가 생방송이어서 방과후 과외 활동으로서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배역이 .있든 없든 송국 문을 노크했었다. 당시에는 배역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든일이 었으나 나는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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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 0년•••증언 □

방송 60년을 맞는 방송인들의 감회는 유달리 깊다 . 빈약한 시설과 기재로 방송을 지켜

온 퇴역 방송인들은 아시안게임을 훌륭히 치러낸 우리방송의 성장이 자기것인양 자랑스러

운 것이다 . 그래서 이들 퇴역 방송인들# 현역때의 애환이 더욱 기억에 새롭고 곱게 간직

하고 싶은 <방송사X로 여겨지는 것이다 . 아나운서 , 프로듀서 , 기술직 , 업무직 등에서 우

리의 전파를 지켜온 퇴역 방송인들의 한국 방송 60년의 증언을 하나로 묶었다 .

대통령 환영중계 실수…시말서로 모면

任 宅 根 /아 나 운 서

우리 나라 방송 60 년사중 절반인 30여년간 방송을 위해 일 해왔던 나로서는 방송에 대한 향수를 영원 히 지워버릴수가 없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 서 KBS아나운서로 첫발을 내디딘 나는 신참 아나운서로서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UN군사 령부 발표의 전황보도에 바빴고 대북심리전 방 송에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서울 수복후에도 전후복구를 위해 바쁘게 돌아가는 국내외정세 보도를 위해 쉴틈이 없었다. .특히 폐허가된 서 울에서 전쟁의 쓰라린 상처를 달래기 위해 우 리나라 방송사상 처음으로 대중속에 파고드는 공개방송「스무고개」「노래자랑」프로를 가지고 청취자의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했던 일은 잊 을 수가없다. 특히 1956년 호주 r멜번」에서 열 린 올림픽대회에 처음으로 해외출장가서 송순 천선수(원투) 의 은메달획득 실황을 중계방송했 던 일과 마라톤 이창훈선수가 4 위로 골인하는 것도 일본선수로 착각 방송하다가 한참후에야 정정방송 했던 일들은 더욱 기억에 생생하다.

30여년간의 방송생활을 회고하면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으나■그중 대표적인 실패담 한토막 만 소개한다. 이승만대통령 이 자유월남의 고딘 디엠대통령을 방문하고 돌아오는날 나는 김포 공황에서 대통'령의 도착실황중계방송을 담당하 고 있었다. 마침내 이대통령. 탑승기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활주로에 내려앉아 굴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엉겹결에 말한다는것이『지금 막 이승만 대통령이 활주로위를 굴러들어오고 있읍니 다. 이대통령 이 지금 굴러들어오고 있읍 니다.……』실수도 이정도'면 최상급의 실수였 다. 국가원수가 굴러들어오고 있다니,다행히 국가원수 모독죄에 걸리지 않고 시 말서ᅵ 한장으 로 끝이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나는 웃지못할 나의 실패담이다.

30년전 “똘돌이 모험”에 복남이 역으로

具 E民/성우

방송국 라디오 성우로 30여년간 연기생활만 계속 해온 나에게 친구들은 한 가지 일만 그렇게 계속하 기도 쉬운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의 경우 성우

생 활이 취미고 직 업 으로 유별나게 생 각되 지 않 는다.

아마도 매일.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성우 생활의 매력이 더더욱 이 생활에서 떠.나지 못 하게 묶어놓았는지 모른다.

8 • 15 해 방 2 년뒤 인 1947 년 늦가을 어 느날 당시 서울중학에 다니던 나는 학교 동급생의 권유로 방송국 어린이극회 회원에 가입한것아 마이크와 인연을 맺게 된 시초였다. 당시만해 도 라디오 드라머는 일주일에 한두회 단편물이 방송됐을뿐이고 그나마 모두가 생방송이어서 방과후 과외 활동으로서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배역이 .있든 없든 방 송국 문을 노크했었다. 당시에는 배역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든일이 었으나 나는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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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한국 방송 6 0년•••증언

이 좋았던지 주 2 회 화요일과 목요일에 (5 시 4 5 분〜 6 시)_ 1 5분간씩 생방송 됐던 김영수작 “ 똘똘이의 모험” ‘‘쌀”편에서 주인공의 친구인 복남이역을 맡게 되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쌀을 몰래 실어 나른" 후 배 편으로 일본에 빼돌 리는 밀수범을 용감한 어린이들이 소탕한다는 내용이었다.

쌀을 실은 트럭위에 몰래 숨어들어 같이 인 천으로 가는도중 차가 급정거 하는바람에 “악”

하고 소리치며 떨어지는 역을 맡았었는데 너무 긴장한 탓으로 “악”소리를 지르지 못하자 옆친 구가 대신 해주었고 이때문에 연출자로 부터 호된 꾸중을 듣고 출연 정지까지 당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환도 이후에는 대학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방송 연기 생활을 시작했는데 20대청년인 나에 게 당시의 연출자들이 모두 노인역할만 주는 것이었다. 나는 젊은 주연을 맡고싶었고 해낼 자신도 있었는데 노인역만 맡기는 것이 한편 서운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때부터 내 음색은 노인역이 맞았던 모양이다.

20대 초반부터 노인역만을 맡았기 때문인지 하루는 방송국으로 시골 할아버지가 찾아와 구 민을 찾는다기에 나가보니 당신은 아니라면서 노인 구민을 찾는다는것이었다. 벗을 삼고자 진주에서 상경했다면서..........

동아방송국에서 연속극 “잘돼갑니다” (한운 사작 안평선 연출)의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 승만 박사의 역할을 했을때의 일이다. 당시 방 송에 나간 이박사의『 연설문이 이박사의 본음성 이냐 아니면 구민이 연기한 음성이냐룰 놓고 점심내기와 술내기를 했다면서 그 진부를 알기 위해 방송국으로 전화문의를 해온것이 많았었 다.

이승만 박사 역할을 근 10여년 가까이 하면 서 나는 각계 여 러분들을 만나야 했는데 그 일 은 연기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15분짜리 낭독물 10분만에 다 읽어버려

俞 湖 /방 송 작가

. 육 , 1944 년, 지 금은 불타버린 정동중앙방송국에서 내

[ s r I ; 7} 쓴 낭독소설을 내가 직I 二 *1 접 방송한 일이 있었다. 앞

1 ^ 4 1 - 의 파란불이 들어오면 시 작하라길래, 불이 들어오

자마자 읽어내려갔는데 잔뜩 긴장 한탓인지 15

분짜리 낭독물을 10분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진행을 보던 사람이 그렇게 빨리 읽으면 어떡 하느냐고 화를 냈자만 방송은 이미 나가버렸으 니 어찌하겠는가.

1 9 4 5년 1 0 월 그 방송국의 직원이 되어 라디 오드라머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金永壽씨 (고인)가 모든 드라머의 연출을 혼자서 해내다 시피했다. 당시는 편집이라는것이 없어서 모든 방송이 한번 시작을 하면 틀리거나 어쨌거나 다시 할수가 없어서 그냥 계속을 해야만했다.

내가 쓴 라디오 드라머였는데 농촌장면에서 소 가 우는 장면이 있었다. 지금야 모든 .효과음이 완전하지만 그때는 파도소리는 고리짝에 팥알 을 담아서 흔들어댔고 천둥소리는 철판을 두들 겨서 비슷한 소리를 냈고 소가 우는 소리는 붓 통에다 입을 대고 불어야만 근사한 소리가 났 다. 드라머는 진행이되고 소가 멋지게 울어야 하는 대목에가서 연출자의 손가락 지시를 받은 효과담당자는 붓통에다 입을 대고 불어댔다.

그런데 그날따라 어 메 ! 하는 소의 울음소리는 나오지않고 피시시 하고 김빠지는 소리가 나와 버렸다. 급한 나머지 계속 불어대도 역시 피시 시 하는 소리만. 그래도 그 드라머는.진행할수 밖에 없었는데 아마도 청취자는 무슨 잡음이겠 거니 했으리라.

美군정하였다. ■하루는 조회시간에 미 고문관 이 왜들 출근시간을 지키지 않느냐고 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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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 0년•••증언 □

사람이 일어나서 대꾸를 했다.

당신들은 지프가 있으니까 되지만 우리는 걸 어서 다녀야한다. 그러니 얼마나 고단하겠는 가. 양해해주길 바란다. 통역은 그대로 통역을 했다. 고문간은 오케이라고했다. 오케이라고 했으니 양해했다는 것으로 알아듣고 모두들 기 분이 좋았는데 다음순간 고문관은 이렇게 말했 다.

「오케이 꾸웃 ! 그렇다면 우리는 보4더 프 레시한 사람들을 데려올테니 양해해주기 . 바라 며 당신들은 고단하다니까ᅵ 집에서 편히 쉬기를 바라오」

보다더 싱싱한 사람을 쓰겠으니 당신들은 요 새말로 집에서 애나 봐주라는 뜻이었을 것이 다.

모두들 봐 줄애도 별로 없는지,다음날부터 출근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던것으로 기억된다.

일제하 우리말과 일본말로 범벅방송

李 德 根/프로듀서

요증 스포츠 중계 방송 을 듣다보면 1930년 말기 에서 40년 초엽의 우리말 방송이 생각난다. 스포츠 중계 방송을 들으며 전날 을 회상하는 것은 그당시

에는 우리말과 일본말 두나라말로된 범벅방송 을 하였기 때문이다. 1933년 두나라말 방송이 실시되면서 우리말방송은 그런대로 제꼴을 찾 은듯 했는데 1937년12월 이른바 中 曰事變이 터 지면서 우리말 방송은 된서리를 맞는다. 이때 까지 연예 위주로 편성되었던 프로가 전시동원 체제로 바뀌어 전쟁수행수단으로 동원되기 시 작했다. 1938년으로 접어 들면서 총독부 정보 위원회에서 모든 뉴스를 관장하게되고 이른바 시국인식에 도움이되는 뉴스만을 방송하도록 통제하였다. 이해에 한국청년들에 대한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어 많은 청년들을 훈련소로 데려 갔는데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불편이 커지 자,이해부터 소위 우리말을 말살하고 일본말 만 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제 2 방송과(우리 말 방송)에는 체신부 감리과장 명의로된 해괴 한 공문한장이 내려왔다. 이때부터 한국인 아 나운서들의 한 • 일 두나라말 범벅방송이 시작 되는것이다. 범벅방송은 고유명사를 우리말로 읽은뒤 일본말로 다시한번 발음하는 것인데 예 를 들 면 『오늘 조선총독부,죠오생 소오도꾸후 에서는』하는 식이다.

30년 후반기 우리 국민은 두개의 이름으로 불리 었다. 우리 말'말고 일본말로 읽는 또하나 의 이름이있었다. 해방후 어느 중학교의 한학 생이 교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의 영어 이 롬은 뭐 라고 부릅니까 ? 일본말 발음의 이름을 가졌던 그 어린이는 영어 발음의 자기 이름이 또 있을것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40년대초 범 벅방송때 방송에 자주 이름이 오른 사람중에 韓相龍이란 분이 있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사 무국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말이 서틀러 자기이름을 일본말발음으로 제대로 못 했다. 자신의 일본말로는 ‘간소오류우’라고 발 음해야되는데 ‘간소루’라고해 ‘간소루’라는 별명 이 붙어 방송국안의 화제가 된일이 있었다.

명동국립극장개관식 최초의 T V 중계

金 聲 烈 /기술

우리나라에서 TV 방송 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56

년 5 월ᅵ12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HLKZ 의 콜사 인으로 TV 방송을 한 것이 었다. 그러나 1958년에 불

의의 화재로 그 귀중한 시설이 타버려 일단 TV방송이 중단됐었다. 그후 1961년 12월 24

일 KBS 가 TV시험전파를 발사하고 1961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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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한국 방송 6 0 년•••증언

월31일 KBS-TV가 정식으로 개국하여 우리나 라에서의 본격적인 TV 방송의 막이 올랐다■: 이 때의 TV방송시설을 보면 오늘날의 시설과 비 교할때 너무나 보잘것 없는 것이었으며 녹화기 가 없어서 모든 방송은 언제나 생방송으로 진 행되어야 했으므로 방송진행자나 출연자나 방 송기술자나 모두 잠시도 정신을 흐트러뜨리면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실수는 때로는 오히려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있 는 방송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렇게 몇년 동안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다가 1965 년 말에 녹화기 (AMPEXVR660) 1 대 롤 도입하여 방송에 활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편 집기능을 갖고 있지 않아 드라머나 쇼프로그램 을 녹화할 때에 출연자가 실수를 하거나 기기 조작미스로 해서 중단되었을 때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60분프로그램인 경우 심 지어는 50여분동안을 녹화하다가 중단되었을 때에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출연자 및 스탱들이 기진맥진할 때가 한 두번 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꾀가 생겨 서 출연자의 사소한 실수는 그저 넘어가는 식 으로■녹화를 해 버릴 때도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최초의 TV중계방송은 1962 년 3 월21 일 서 울 명 동에 자리 잡았던 국립 극장의 개관식 이 었는데 당시 에는 TV중계 차가 없어서 출근버스를 이용해서 스튜디오에서 사 용하고 있는 카메라와 조명기기등 모든 영상 •

음향기기등을 싣고 가서 중계방송을 하여 야 했 다. 따라서 버스속에 최소한의 TV 모니 터와 영 상스위처 및 가메라조정장치를 설치하고 버스 천정 에 마이 크로웨 이브송신기 를 설치 하여 남산 송신소에 있는 마이 크로웨 이브수신기 와 장시 간 방향을 맞춤으로써 중계방송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자니 한번 중계방송을 하려면 적어도 10시간전에 출동하여야 하였고 중계방송이 있 는 날에는 스튜디오 한개는 기재를 철수한 때 문에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유치한 모습이었다. 현재와 같이 모든 기기;들이 소형 화 • 자동화되고 디지틀화된 상황

에 서 일하는 방송종사자들에 게는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이라 생각된다.

침실이 된 방송실… "서로 안 본걸로 하지”

金 仁 淑 /아나운서

1950년 9.28 서울환도후 KBS 는 겨 우 방송실 3 개 로 녹음, 생방송, 공개방

, 송을 해야 했지만 당시의 방송인들 자부심은 대단했 다.

한국유일의 방송국이었기 때문이다.

아침방송이 약 세시간,낮방송이 두시간,저 녁 방송이 일 곱 시 간정 도였 다.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아나운서가 된 나에 게 처음으로 주어진 방송이 주부를 위한 가정 메모 시간이었다. 아침 일곱시 생방송이 다. 겨 울철이 라 방송국에 도착하면 겨우 어둠이 가신 다.

어 느날아침 방송국에 도착하니 방송5분전 이 다. 숙직선배의 뉴스방송이 한창 '진행중이었 다. 같은 스튜디오에서 방송이 이어지므로 조 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뉴스를 방송하고있 는 선배의 모습은 내의바람이 었기 때문이 다.

더우H 방송실바닥에는 여러명의 숙직원들이 이리저리 딩굴며 아직 자고 있기까지 했다. 곧 이어서 내가 담당한 프로가 시작된다는 신호등 이 켜졌지만 나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미스김 ! 서로 안 본걸로 하지』라 며 뉴스를 끝낸 선배는 담요를 쓰고 엎드려 버 린다.

모두가 담요를 뒤집어 쓰고 숨을 죽이고 있 는가운데 나는 방송을 끝내야만했다.

얼마후『어휴,한증했군』하고 내미는 아직도 잠이 깨지않은 모두의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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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 다. 아침 방송은 이렇게 침실 ( ? ) 에 서 이 뤄 진셈이 다.

당시만해도 방송인들은 추운 겨울밤 숙직실 에서 자지못하고 훈훈한 방송실에서 자는일이 있어 때로는 방송진행자들을 난처하게 하는일 이 있었다.

특집 : 한국 방송 6 0년•••증언 □

송을 시작할수 있었다. 그때 매스터스중령,돌 케이트대위와 함께 건배하고 방송을 시작하던 광경 이 아직도 눈에 선 하다.

방송인생활 30년•••한알의 밀알이 되어

파괴된 송신소시설복구…방송으로 보람李 烈/프로듀서

韓 基 善 /기 술

6.25동란때 피난하지 못 했던 나는 지하에서의 두 더지 생활로 목숨을 연명 하고 9.28수복을 맞이한후 동료들과 파괴된 정동연주 소를 찾아가 정리했었다.

5 ~ 6 명이 정동연주소 지하 방공호로 들어가 보니 “콘솔”(조정탁)과 녹음기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괴뢰군들은 지하 방송실을 꾸 '

미려 했었던 모양이다. 이 밖에 지하방공호에 서 우리의 눈길을 끈것은 쌓여있는 쌀가마 였 다.

우리는 옛 덕수국민학교 운동장쪽으로 쌀가 마를 끌아내 찾아온 옛친구들과 굶주린 배를 채웠다. 석달만에 입에 대어보는 쌀밥이었다.

저녁 노을이 짙어질 무렵 지프 한대가 우리 들 앞에 와 멎었다. 거기에 탑승한 사람은 UN

동경사령부소속의 매스터스중령과 돌케이트대'

위로서 사령부로부터 방송을 하기위해 왔다면 서 협조해 달라는것이 다. 가져온 장비는 610형 중단파송신기 한대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송신기 출력으로는 서울을 커버 할수 없다고 밝히고 연희송신소로가서 방송기기의 상태를 조사해 대책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다행히 연희송신소에는 스튜디오와 오디오장 비 그리고 송신시설과 기계 냉각장치둥이 뒹굴 고 있어 밤새 청비한후 미군들이 가져온 송신 기보다 160배 이상 강력한 50KW 송신기로 방

6.25동란당시 병아리 아 나운서로 출발해서 왕초프 로듀서, 관리직,경영직을

" * 두루 편력하는 등 전파에. 얽혀 정신없이 지센 나의

방송인 생활은 꼭 30년.

내마음에 깊은 각인을 새겨놓은 긴 과거를 되 펼쳐보면 은금을 주고도 바꾸지못할 의미있는 기간이었다.

1961년이던가 일본 민방계를 돌아볼때의 일 이다. 드라머용으로 음향효과가 수록된 레코드 를 꼭 사오라는 제작과장의 부탁으̂ 로 여기저기 찾아보았더니 그때 이미 일본에서■는 어느 효과 음이 던 1 희 만. 쓰고 버 린다는 사실을 알게되 었 다. 극이 진행되는 특정장면에서 묘사되어야할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효과음향은 연출상 두개 가 있을수 없다는 논리였다. 한국에서는 아직 도 하나의 이펙트로 여러 드라머에서 반복 사 용하느냐는 그들의 질문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 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의 발전된 우리 방송시설환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험이다.

국군따라 초산까지…방송 기자로 종군

韓 永 變 /기자

1949년에서 1960년 KBS보도실시절의 추억 의 낙수거 리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1950년 6.25동란에서부터의 보도방송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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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한국 방송 6 0 년…증언

든 국민의 초조와 긴장의 유일한 소식망이었다.

당시 우리 국군과 UN군 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갔다가 인천상륙작전을 계 기로 괴뢰군이 점령했던

수도 서音을 수복 뒤이어 李承晚대통령의 북진 명령에 따라 원한의 38선을 돌파 승승장구의 전공을 이룩했다.

종군기자一젊었을때의 꿈과 기대로 가득찼던 종군의 소식을 전달하는 그 생동감一 평상복에 서 군복으로 그리고 철모에 군화ᅳ 지금 생각 해도 피가 끓는다.

우리 국군과 UN군의 작전은 파죽지세로 서 부전선에서는 적도평양을 점령하고 이어 압록 강이 바라보이는 초산까지 돌진 또 돌진의 연 속이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원산 함흥 청진을 거쳐 두만강변의 부령까지 진격을 하여 완전통 알의 기치를 높이 들려는 흥분의 순간 뜻하지 않았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국군과 UN군 은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서는 후퇴의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모두는 가슴을 찢듯 몸부림 쳤고 무서운 책임 감속에 목놓아 울던 그 광경을 종군기자로서 밤이 새도록 기록에 기록을 남겼었다.

6.25동란을 겪지 않은 세대,현장을 보지 않 은 사람은 그 잔당들의 최후의 참사를 상상도 못 하리 라.

우리국군의 북진에서 밀려간 북괴들은 후퇴 를 하면서까지 인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그 방법은 정말 사람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광 경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 까지 된장독속에 다 거꾸로 박아 놓고 국군 x 들 인장아찌 처먹어라고 써놓지를 않았나,손 발 을 묶어 매달아 놓지를 않았나 눈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썼지만 실 제 본 나로서는 지금도 치가 떨리고 또다시 종 군의 피가 끓는다.

이제 우리의 국토는 현시점에서 볼 때 눈부 신 발전을 하고있다. 앞으로도 더 웅비발전을

확신한다. 그러는 한편 항상 우리는 모든근원 의뜻을 잊어서는 안됨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은 모든 방송매체가 행사전체를 위성중 계까지의 손색이 없는 시설이 완비 되어있지만 4.19이후 7.29 총선거당시에는 처음으로 전국 의 종선개표상황을 유선을 통해 생중계로 시도 KBS보도실에 상황판을 설치,하나 하나 수자 를 써가며 직접 라디오중계방송을 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 방송사의 하나의 효시라 자부한다.

임시 여자 아나운서 채용…지금도 활약

朴 鋪 鳴 /업무

5 .16혁명으로 공보실이 공 보부로 승격되었으나 그 산하기관인 지방방송국은 직제상 정원이나 예산면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대전방

송국 방송과장직무대 행으로 근무하였었는데 그 때 만해 도 방송국직 원은 국가공무원으로 인원 이 나 예산의 부족으로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L국장은 정원에는 없으나 경비를 염 출하여 서 라도 임 시 직 여 자아나운서 2 명 정 도 롤 채용하여 좀더 다양성 있는 방송을 해보자고 하여 대학2 학년 학력정도로 M C 약간명을 모 집한다고 방송을 보냈다.

지금이나 그때나 여성들의 구직은 어려워서 오히 려 대학졸업자만도 수십명 이 응모,음성테 스트 만으로 대학졸업생 K양과 L양 2 명을 채 용하였다. 본인들도 열심히하고 재능이있어2 • 3개월후부터 이들은 음악프로는 물론 지방 소식등을 갖고 마이크앞에 서게되었다.

그런데 몇달후 L국장이 전보되고 후임으로 K국장이 부임하였는데 K국장은 부임하자마자 임시직 여자아나운서를 내보내도록 조치했다.

이렇게되자 보조자인 나의 입장이 난처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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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 0년•••증언 □

다. 때 마침 서울에서 동양방송의 전신 라디오 서울 방송국이 태평로에서 개국을 서두를때라 두여 자 아나운서 에 게 응시 하도록 종용하였는데 K양만이 응시합격하였다. 또 L양은 한동안 쉬 다가 대전문화방송국에 채용되었는데 현재 활 발히 활등하는 이들의 소식에 접할때마다 과거 어려웠던때의 방송국 생활을 생각하게 된다.

6 « 25중 서해해상방송 자랑스러운 기억

金 爽 鑛 /업 무

내가 일 하고 있던 강릉 방송국은 강원도 동해안 즉 영동의 중간지대에 위 치 했었다. 때는 6 -25사 변 당시. 북괴군 소대병력 이 강릉남부에 있는 어항

에 침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찰당국 에서 는 방송국 경비를 자체적으로 하라는 통보를 해왔다. 병력을 전투에 투입 해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는수,없이 만일의 경우 방송시설의 중요기재를 해체하여 안전지대로 반줄키로 하 고 운반은 내 소유 화물자동차를 쓰기로 했다.

결국 전황은 불리해지고 우리는 방송출력 lkw

의 기재를 싣고 원주에 도착했었다. 당시 공보 처방송국이 지방방송국을 통할하고 있었고 국,

장으로 盧昌成씨가 재직 했었는데 그는 나에게 앞으로 각자 행동을 취할것을 전제로 두달분의 봉급을 가불해 줬다. 나는 피 난지를 찾다가 木■

浦지역이 방송국이 있는 남단의 안전지대로 판 단되어 목포로 가겠다고 '노국장에게 신고, 임.

시 목포방송국장서리에 명한다는 갱지에 적은 임명장을 받았다.

그•터나 목포의 생활도 한주일이 못되어 피난 을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당시 목포에는 우 리해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책임자는 鄭克模 제독이었다. 우리 방송국 직원볼은 목 포 방송국의 방송시설을 해군함정에 옮겨 시설

할수 있다면 해상방송을 할 수 있다고 생각,鄭 제독에게 부탁했다. 다행히 정제독은 즉각 이 에 찬동 목포항에서 해상방송을 실시하게 되 었 다.

이 해상방송은 서해안 일대 즉 목포에서 인 천에 이르는 구간해안에서 계속되어 큰 성과를 올렸다. 방송계에서 떠 난 오늘까지도 우리 나라 처음이자■마지 막인 이 해상방송은 흐뭇하고 자 랑스러운 기 억으로 남아있다. '

뒤집혀 방송된 화면…외국 기술자 때문

李 基 夏/프로듀서

어떤 상황이었던 지난 일들이란 즐거운 얘깃 거 리가 된다.

초기 우리나라에서 처음 텔리비전이 방송되던 때의 일 하나를 소개한다.

모든 것이 새로왔던 일들이라 하나 하나가 신 기 하기 만ᅵ 했다. 그러 니 이 일들을 처 리 하기 에 는 자연히 외국 사람의 도움없이는 일해나가기 가 힘들었다.

우리나라의 텔리비전 방송은 이상하게 시작 이 됐다.

미국 RCA 의 세일즈맨이 전 후 살벌한 이땅에 물건을 팔려고 찾아든 것이 동기가 되어 한 공 간을 이용하여 텔리비전 방송기재를 전시하게 됐는데 이것이 둔갑하여 졸지에 방송을 하게 됐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이에 대한 상식이 있 을리 없다. 그래서 그 세일즈맨들의 촌극도 엄 청났지만 한심한건 이쪽일이다.

하찮은 기술자가 테크니컬 디렉터는 물론 프 로그램 제작에도 많은 고통을 주었고 프로그램 제작까지도 그의 손에 의해서 제작이 되었다.

물론 항의도 있고 이쪽의 생각을 반영 안한것 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텔리비전은 그런 생각은 수용할 수가 없다느니,기계에 무리가 일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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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한국 방송 6 0 년•••증언

서 그런 제작에는 협력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 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야 동서간의 차이 가 있겠는가, 이는 너무도 심한 경멸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언많은 마음이 커질 수 밖에 없 었다. 소리가 높아 지고 주먹이 오가게 되자 마 음이 상한 ■그가 밖으로 뛰어 나가고 말았다.

어쩌면 좋겠는가, 갑자기 화면이 뒤집어져 방송되고 있지 않은가,큰 이변이 생긴 것이 다. 방송국 사람이 다 모여 들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우리 기술자들이 구석구석 찾아 만지고 건드러도 화면은 되돌아 오지 않았다.

할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 자그마 한 스위 치 하나가 온 나라를 뒤범벅을 만든 것이다. 화 면이 되돌아 왔을 때의 허탈한 웃음,이후 이런 일들은 가끔 일어나는 일종의 풍속도가 되었 다.

H L K Y개국 참여…최초 일분극 연출

李 保 羅 /연출가

W 게

1955년 이른 봄 종로 네 거리에는 불과 달포 전부 터 새로이 전파를 발사하

\ ' ' 二 ' 는 최초의 민간 방송국 A 二 HLKY가 생겨났다. 당시

/Pr 로 말할 것같으면 정동의 HLKA 국립 서울 중앙 방송국이 하나 있을 뿐 이었다. 이렇게해서 두 방송국은 라디오시대에 쌍벽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HLKY 정문 입구에는 날마다 새로운 방송프 로를 알리는 선전' 포스터가 나붙었다. 프로퍼 갠더에 열을 올릴 무렵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스파트 드라머 일분극 모닝 코피이다.

그 무렵 다방에서는 아침 열시까지 가는 손 님에게는 코피에다 계란 한개씩을 띄워 주는 모닝 코^!가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 나의 일분 극 모닝 코피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일단의 남.녀가 왁자지껄 들어선다. 단골 손 님들이 들어닥치니 마담마저 신이나서 맞장구 를 친다. 화제는 어제 저 녁 방송된 드라머에 있 었다. 이구동성 참 재미 있었다는 이야기들이 다. 그런데 불쑥 한사람이 제언을 하게된다.

『얘기는 다 좋은데 그• 방송이 어느 방송인지나 아는 거야? 자아 오늘 아침 차값은 그것도 모 르고 들은 사람이 내기다 ! 』해서 드라머 이야 기가 쑥 들어가고 갑자기 방송국 이 야기로 바 꾸인다. .

그■래서 정말 그• 방송이 어느 방송국에서 나 왔는지 ? 또 방송국은 알되 그 방송이 몇 킬로 사이클에서 나오는 것인지 ? (전 HLKY 는 840KC였음) 이것 저것 모르고 그저 재미있게 듣기만 했다는 편에서 그 아침 모닝 코피값을 내게 된다는,그저 우스개 스파트 드라머이다.

그저 웃음의 쿠션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시간이 남았을 때 넣는 프로이다.

HLKY를 선전하는데는 그만이었다. 또 이것 은 밝고 쾌활한 쿠션으로서 이내 방송 데스크 의 총애를 받았었다. 나의 일분극,스파트 드 라머는 이렇게해서 최초의 일분극이 된 것이 다.

라디오극 방송중 정전으로 무언극소동

吳 史 良/프로듀서

해방후 정부수립을 전후 한 정동방송국시절의 방송 은 갖가지 어려움의 연속 이었다. 시설,인력, 예산 의 부족은 차치하고라도 당시 전력사정의 악화로

방송이 자주 중단되어 적지 않은 차질을 빚기 도했다. 더우기 그 때의 방송은 지금처럼 녹음 방송이 아닌 생방송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촌 각의 여유가 없었다. 설혹 사전 녹음된 프로그 램 이 라해도 정작 그것 이 방송될 시 간에 정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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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 0년…증언 □

되면 일껏 녹음된 것이 허사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어느 날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인 라디오극장 시간이 되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역시 생방송 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스튜디 오안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지금 까지 순조롭게 대사를 주고 받으며 극을 진행 하던 성우 Y군과 P군이 느닷없이 대사를 중단 하고 서로 상대방의 다음 대사를 기다리는 눈 치다.

1초 2 초 시 간은 자꾸 흐르는데 두사람은 하나같이 대본만 들여다 보고 있다. 조정실에 서 연출을 하던 필자는 다급해서 연상 손으로 신호를 보내 대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스튜디 오안의 모군과 모군은 묵묵부답이다. 그렇다고 연출자가 스튜디오안으로 뛰 어■ 들어 갈 수도 없 는 노릇이 다.

시 간은 1분을 지 나 2분에 육박하고 있다.

1 초의 공백도 허용되지 않는 방송연출자는 피 가 마를 지경이다.

그런데 이번엔 스튜디오안의 성우들도 당황 하는 기 색이 완연했고 급기 야 모군과 P군은 서 로 눈을 부라리고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방송대신 무언극을 열렬히 연출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이쯤되고보니 도저히 수습의 여지가 없어 일 단 방송을 중단하는 길 밖에 별 도리가ᅵ없었다.

이 런 때에 사용하는 비 장의 보검은 아나운서를 통하여 방송이 정전으로 인해서 잠시동안 중단 되었으니 청취자의 양해를 바란다는 사과방송 이다. 그 사이에 무언극소동의 진상이 밝혀지 고 진범 ( ? )을 찾아냈다. 그것은 P군이 방송도 중에 대본을 한장 넘겨야 할 것을 두장 넘긴데 서 빚어진 촌극이었다.

지금 그 모군은 우리 영화계의 중진으로서 크 게 활약하고 있으며 범인( ? )P군은 방송계를 떠나 현재 대학교수로 재직중에 있어 요즈음도 이따금 만나면 그 때의 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폭소를 금치 못한다.

“도대체 디스통 카스통이 무슨말이요 ? ”

盧 正 . 八 /업 무

해 방 다음해 인 1946 년 어느 봄날의 일이다. 청취 자로부터 방송국에 전화가 걸려왔다. 성미가 몹시 급 한지 첫마디가『도대체 그 디스통 카스통이란게 다

뭐요 ?』라며 시비하듯 말한다. 뚱딴지같은 질 문에 나는 어리둥절해서『그게 무슨 말씀인데 요 ?』라고 되물었다. 자세히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방송이 끝날때마다 하는 소리,서울중앙 방송국이란 호출부호, 콜사인을 말하는것이었 다. ᅳ

「서울 중앙방송국이면 그냥 서울 중앙방송국 이지 디스통 카스통은 뭐요 ? 영어를 그런데 까지 써야하오? 함부로 남용하지 말아요.」 제법 훈계조였다.

무릇 모든 방송은 네트사인과 호출부호인 콜 사인을 사용하는데 서울 중앙 방송국은 일제시 대에는 묘피묘라는 호출부호를 썼지만 JODK는 일본에서 할당받은것 이 어서 해 방후에는 쓸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부호를 사용해야 하는 데 새 부호는 ITU (국제전기통신연합) 주파수 위원회에서 배정받도록 되어있어 그 수속을 받 는 사이 편법으로 간단하게 우리말로 '「여기는 서울방송국입 니다」라고만 하였다. 그댔더니 방 송국에 와있는 미군 고문들이 호출부호란 세계 모든 무선수신자들이 알아듣도록 해야하는데 한국어로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영어로 해야 한다면서 영어로 된 긴 콜사인을 만들어 주었 다. 그것이 「This is SEOUL KOREA, Key

Station of the Korean Broadcasting System」 인데 일부 청취자들에겐「디스통 카스통」이라 고 들렸던 모양이 다.

이와같은 긴 콜사인은 청취자뿐 아니 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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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한국 방송 6 0 년•••증언

마다 긴 콜사인을 해야하는 아나운서들에게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대부분 일제시대에 배 운 영어라 발음도 서틀렀었지만, 긴 단어를 유 창하게 구사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후 1947 년 9 월 3 일 미국의 아틀란틱 시 티에서 ITU회의가 열려 HL이란 부호가 한국 에 배정되 었고, 다시 그해 10월 2 일에는 과도 정부 체신부가 HLKA등 무선국 부호를 각방송 국에 배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리하여 우리는 현재 HL이라는 호출부호를 받은 9 월 3 일을 방송의날로 제정하여 기념하 고 있다.

5*16 혁명공약•••방송않으면 총살이요

朴 鍾 班 /프 로 듀 서

5-16을 나는 KBS 남산연주소에서 겪었다. 그 날 의 방송운행숙직이었던 것 이다. 한강쪽에서 총성이 울리고 방송국에 헌병이 배치됐다고 수위가 알려온

그 때만해도 별일이 있으랴 자고 있던 관리숙직자에게

상황파악을 부탁하고 계속 자고 있는데 이번에 는 상황을 알려고 나갔던 관리숙직자가 뛰어들 어 빨리 일어나란다. 부랴부랴 현관으로 내려 가 보니 헌병들이 아무 말없이 철수해버렸단 다. 이건 국장(당시 趙欣坡씨)에게 보고할 사 항이어서 보도계에 달려가 전화를 돌려댔다.

그런데 웬일인지 계속 불통이다. 그 때 복도에 서 총소리가 귀창을 때렸다. 순간 곁에 있던 관 리숙직자 都相輔씨 가 뒤뜰로 난 유리 창을 밀치 고 재빨리 뛰어내렸고 동시에「손들엇」하는 소 리가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피할곳을 찾아 바로 곁에 있는 텔리타이프실로 뛰어들어가 텔 리타이프 밑 좁은 공간에 몸을 숨겼다. 곁에는 朴鐘世아나운서와 라디오카 운전기사 文昌男씨

것은 새벽 3시경.

싶어 ■같은 방에서

가 있었다. 세사람은. 담배를 나누어 피우면서 앞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보도계사무실에서 크 고 당당한 목소리가 울려 왔 다 .「우리는 빨갱 이가 아니요. 모두 나오시오」

한숨을 돌리면서 나가보니 육군중령차림의 사나이가 권총을 뽑아들고 서 있 다 가 ,『이중에 아나운서가 누구요. 이 리오시오. 그리고 여러 분은 5시 정 각에 방송을 시 작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총살이요j 라고 말하는것시었다.

이렇게 해서 朴아나운서는 끌려가고 나는 시계 를 보면서 방송준비를 위해 2 층 주 조정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엔지니어가 한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 날 당직은■ 金始兹씨와 韓永信씨 등 두 사람이 었다. 엔지니어가 없으면 방송을 할 수 없다고 했더니 군인들은 방송국에 있는 사람들이 방송 을 못한다니 그걸 말이 라고 하느냔다. 나는 몸 이 달아 숙직실 • 화장실 • 공개홀 부조정실 등 숨을 만한 곳은 모조리 찾아봤지만 그림자도 없었다. —— 이젠 별도리없다. 가부간 내 힘으 로 방송을 시도해 보는 수밖에—— 이렇게 결 심하고 있는데 정문보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내려가 보니 그토록 찾고 있 던 엔지니어 두사람이 보초에게 붙들려 있는게 아닌가. 두 엔지니어는 동작빠르게 방송국을 탈출, 숭의여고 아래 숲속에 피해 있다가 방송 시간이 임박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근무처로 되 돌아 왔던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정시보 다는 3분쯤 늦어 서 야 방송이 시 작됐는데 혁 명 공약방송이 끝나기 까지 중령은 계속 권총을 빼어든채 주조정실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 다. 朴아나운서의 혁명공약방송이 끝나자 중령 이 말 했 다 .『지금 방송은 이 안에서만 들리고 일반 가정에는 방송 안된게 아니요 ?』나는 그 렇지않다고 안심시킨후 송신소쪽에도 일행이 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송신소가 무엇하는 곳 이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엔지니어가 방송국에 되돌아오지 않았던들,

그리고 송신소에서 송신을 중단해 버렸던들 5-

16거사는 어떻게 될뻔 했으며 당일 현업근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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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 0년•••증언 □

들은 무사했을까 생각해 본다. 각해도 잊을수가 없는 일의 하나이다.

고된 수습훈련…지금은 오히려 고마와 방송용품 잃고 찾아헤51으나 끝내 허사

姜 映 淑 /아 나운서 愈 炳 殷 /기 술

1953년 10월 수습 아나 운서로 입사했을 당시의 서 울중 앙 방송은 교양프로 에 많은 비중을 두어 아나 운서는 발음 하나 하나에 무척 신경을 써야했다. 한

번 틀리는 발음이 전국의 시청자에게 큰 영향 력을 미치고 한번의 기침소리가 많은 시청자에 게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기초훈련은 말할수 없이 엄했다. 항국(한국) 눔물(눈물) 심문(신 문) 항강(한강) 신발 (심 발) 은앵(은행) 등 잘 못하기 쉬운 발음을 열심히 교정했고 장단에따 라 뜻이 달라지 는 단어(點은길게) 화재(話題 k k ) f f (通帳 a s ) 교수(絞首 & 늦) 화장 (化粧 등과 음량조정 호흡조정 구독점기교등 훈련이 까다롭고 엄한 선배의 가르침으 로 계속되었다. 지금에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훈련이 얼마나 고마운것이었는지 새삼 감사하 게 생각된다. 민방이 생기면서 MBC방송에 스 카우트된것은 나의 방송 생활에 또하나의 전기 를 마련, 첫 공개방송의 테이프를 끊기도했다.

지금은 우리 방송이 세계 어느 방송의 시설 부럽지 않을 정도이지만 당시의 아나운서 생활 은 그렇게 윤택하지 못했다.

아침방송을 끝낸 아나운서가 무심코 “ 아유배고파---” 하고 말한것이 그대로 방송으로나간일 등…지금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방송생활중 여러가지 기억에 남는일이 있지만 특히 1974 년 8 월 15 일 광복절기 념식전에 총격 으로 세상을 떠난 고육영수여사의 추도방송때 스튜디오에 향불을 피어놓고 그 연기에 숨을 죽이 며 장장 4 시 간반동안 원고준비 없이 고인 의 생전의 일화를 엮어 방송했던일은 지금 생

1943년10월하순이 라고 기억되는 어느 토요일 오 루, 서울운동장에서 죽구 결승전 실황중계방송을 한 일이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서울중앙 방송국 중계녹음반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25세 의 홍안청년시절의 일이다.

화려한 방송국일중에서도 특히 홍미진진한 축구 결승 실황중계방송을 담당하게되어 현장 에 파견되는 것은 행운 이기도 한것이었다.

더우기 실황중계방송의 명수이며 당시 유명 했던 이계원(고인이됨)과 민재호(재미) 아나운 서와 동반하게되면 멋지고 실감나는 현장묘사 의 방송을 들으면서 재미있는 구경을 직접 할 수있는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출장전날 필요한 중계방송기재를 창고 에서 출고받아 덩치가 큰 중계엠프를 비롯한 모든 기재의 동작시험까지 하는 등 만반의 준 비를 했다.

그날 축구경기는 승패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 의 백중전이 었다. 방송이 끝난후 중계방송기 재 를 하나하나 쟁겨 지게꾼에 지워가지고 자동차 를 세워둔 운동장 정문앞까지 나와 대기하고있 던 자동차에 싣고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그리 고 창고에 입고시키는데 당시 한국인 책임자 한덕■봉씨가 하나하나 검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인일인가. 모니터용 리시버 1개가 없어진것 이 발견되었다. 방송현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첫째 성격이 꼼몸해야 된다고 늘 강조하는 한 덕봉 선배는 매우 분개해서 얼굴빛이 달라지더 니 노기 가등등하여 고함과 호통을 치 면서 당장 다시 서울운동장에가서 리시버를 찾아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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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한국 방송 6 0 년•••증언

것이었다. 당시만해도 방송기재는 돈주고도 사 기 어려운 희귀품이어서 분실사고를 일으키는 사람은 엄한 질책을.받는것이 당연했었다. 나 는 그길로 광화문까지 뛰어가 전차를 타고 서 울운동장까지 달렸다. 그러나 캄캄할때까지 찾 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방송국에 돌아가 다시한 번 호된 꾸중을 들었다. 나는 다음날 일요일에 도 쉬지않고 서울운동장주변을 헤매보았으나 무익했다. 월요일 출근하니 시말서를 제출하고 리시버를 찾을때까지 서J •운동장에서 근무하라 는 매서운 명령이었다. 이 사고가 있은후 나의 성격은 매우 꼼꼼해지기 시작했다. 이 교훈때 문에 방송현업에서 오래등안 사고없이 일하게 되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선배의 소피……창밖의 봄비로 착각 방송

徐 明 錫 /아나운서

1948 년 4 월 방송국에 들어 간지 8 개월이 된 어 느날 아416시 방송되 는 아침음악을 담당하고 있을 때 일이다. 아침음악을 내 보내는 정동 중앙방송국

제 5스튜디오는 5 평남짓한 조그마한 방인데 담당하나운서가 턴테 이 블위 에 디스크를 올려 놓 고 볼륨조정도하고 마이크 키를 넣는등 혼자서 여러가지 일을하고 있었다. 시때■ 잠시 밖을 내 다보니 창가에서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슬 부슬 봄비가 내리는 아침. 오랜 겨울 에서 깨어나고 삼라만상이 푸릇푸릇한 희망의 아침, 부슬 부슬 봄비가 나리는 아침 이 시간 첫번째 곡목은 멘델손작곡의 ‘봄의노래’입니다」

그런데 웬일인가. 이 방송이 나간후 수위실 로 지금 서울지방에 비가 내 리느냐는 청취자의 전화가 허다히 걸려온다는 얘기다. 얼마후 알 아보니 5 스튜디오 바로 위에 위 치한 숙직실에 서 선배 아나운서가 작취미상의 상태에서 창문

밖으로 소피를 본 것을 봄비로 착각 비가온다 고 방송하여 전화문의 소동이 일어났던것이었 다.

중앙방송국이 부산으로 피난, 부산방송국에 서 일할때의 일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이라는 방송시간이 있 었는데 당시 미국정부에서 받은 수백장의 디스 크판들이 이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만해도 영문제목을 서투른 솜씨로 직역하여 엉뚱한 제 목이 많았다.

「달빛아래 둘이서」「그대와 둘이서」「강아지 를 안고」「세상에 둘도없는 뜨거운 사랑」등.

하루는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을 내보내는데 첫번째 나가는 곡목을 적은 쪽지가 보이질 않 았다. 유리창 밖에서는 담당프로듀서가 손짓으 로 ‘큐’를 하는데 곡목을 소개할 도리가 없었 다. 손짓은 두번 세번 네번 빨리 소개하라고 야 단이 다. 3초, 5 초, 7초, 시 간은 자꾸 흐른 다. 더 이상 블랭크를 낼수가 없었다. 할수없 이 「핑장히 빠르게 창문 너머서 손짓하는 사나 이」라고 말해버렸다. 엉터리로 곡목소개는 한 셈이지만 창문밖에서 손짓하던 담당PD는 요절 복통하고 있었다.

M B C 개국드라머“웃기지마라"의 일화

衰 俊 鎮 /프로듀서

“ 웃 기 지 마 라” 이 것 은 MBC가 인사동에서 개국 할때 처음 시도한 주말연

' 속극의 첫 작품인 김희■창 작 코믹드라머의 제'목이 다.

5-16 후 필자가 16년간 KBS 생활을 작별하 고 MBC로 자리를 옮겨 서울에서 처음 시작되 는 상업방송의 편성과제작 책임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상업방송을 맡은바에야 무엇인가 재미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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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 0 년•••증언 □

참신한것을 개발,청취자에게 선보이고자 고심 끝에 마련한것이다. 이 드라머 부문에선 회전 무대와 주말연속극이 었다.

회전무대는 읍니버스 형식의것으로 하나의 테마를 갖고서 세가지 이 야기를 30분에 담아서 방송하는 형식이고 주말연속극은 토요일과 일 요일에만 방송하는 형식의 연속극이었다.

단막극과 매일 연속극만이 방송되고 있을때 였으므로 방송드라머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있을것이라고 기대하며 첫 작품을 집필해줄 작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있을때였다. 때마침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김희창씨를 만나 주말연 속극이라는 새로운 드라머를 마련했으니 그 첫 작품을 써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랬더니 개국 일자가 한달도 안남았는데 작품이란것이 그렇 게 쉽게 나올수 있겠느냐면서 거절한다. 그러 나 처음 시도하는것이므로 특별히 요청하는 것 이 라고 강요하여 겨우 승낙을 받고 3 개월 방 송 할것으로 26회의 길이로 집필하기로 결정했 다.

그래서 61년 12월 첫 주말부터 김희창작으로 “웃기지 마라“ 라는 제목의 주말연속극이 방송 되기 시작했다.

제목이 말해주듯 풍자적이고 새로운 형식의 연속극이라는데서 인기를 얻어 상당한 청취율 을 올렸다.

그래서 10여회가 방송될즈음엔 회수를 당초 예정보다 더 늘리려고 생각 하고있었는데 하루 는 작가가 뜻하지 않게 18회로 끝맺음을 해가지 고 오셨다. 26회로 예정되어있는것을 18회로 끝맺음을 한것이다.

그러면서「원고료도 제때 제때 안나오고 듣 자하니 당신 월급도 제때 못받고 있다하니 나 도 그만 쓰겠으니 당신도 그 자리에 있을 필요 가 없지 않소 ? 」하고는 아무말도 듣지 않고 나 가버렸다.

개국초기의 어려움이 방송에까지 해를 준 셈 이다. 인기가 있으면 회수를 늘려가는것이 상 례인데 예정된 회수를 한달분이나 줄여서 끝맺 음 한다는것은 생각할수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런 일은 방송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닌가 한다.

덕분에 후속 주말극을 준비하느라 곤욕을 치 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효과로, 연출로 40 년 5개월을 방송에

李 相 萬/프로듀서

수 ᅮ . 방송이라는 한 분야에서40년이상 일해온 나는 오

|' ;\ 직 한길을 달리며 한 가지 / 일에 내 집념과 노력을 비

; / 쳐왔다는 점에는 일말의 후희도 없다,

1945 년 10월에 방송국에 입사한 나는 예술계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고 해서 방송섭외를 맡게 되 었다. 당시만해도 방송업무는 전문적으로 세 분화되지 못한 실정이어서 곧이어 섭외경 효 과, 연출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지금의 방송기기 나 방송시스팀 에 견주어보면 치졸하기 짝이 없는 당시의 방송 상황에서는 녹음이 없던 생방송 시절이어서 연출하랴 효과 담당으로 왔다갔다하랴 속출되는 연기자들의 실수 모면하랴 평크낸 연기자-덕분에 간흑 연기까지 하랴 땀나게 일해야만 했다.

그래도 문득 그 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 도̂ 더 많은 일들이 주어졌었고 모두가'나름대 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의욕적으로 일했던 때문 이라 생각된다.

JODK세 CBS까지•••기술로 42년

李 寅 觀 /기술

내 가 처음 구조선방송협 회 (JODK) 기 술부에 입 사한것은 1937 년 4 월로 1979 년 2 월 한국방 송공사(KBS) 기술이사직을 끝으로 방송현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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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한국 방송 6 0년 •••증언

국무원 사무차장의 명령조의 말이다. 기자 아닌 공무원 주사인 부하에게 하는 말투다. 그 러나 필자는 앉기는 커녕 질문을 계속 던졌다.

「경찰의 중립화를 위한 공안위원회도 중요하 지만 방송의 중립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데 총리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며 공정한 방송이 되도록 하기 위한 어떤 구상을 갖고 계 십 니까?」답변이 없이 침묵이 흐른다.

「이상으로 오늘의 기자회견을 마첩니다」 국무원 사무차장의 일방적인 선언으로 방송

중립화를 위한 질문은 허공에 뜨고 장면총리의 취임 첫 기자회견은 끝났다.

<n>곳은 계동 장면총리 사저 안방.

「어린이 여러분 국무총리 장면입니다」 어린이시간에 신임 장면국무총리의 어린이를

위한 총리로서의 취임 인사말이 녹음되고 있었 다.

녹음이 끝나자 마자 질문의 포문을 열었다.

녹음기는 돌고 있었다.

「반도호텔에서 있었던 기자회견 석상에서 질 문한 방송의 중립화에 대한 총리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장면총리는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고 일어 서

면서 조재천씨(당시 민주당대변인)에게 손짓하 면 서 「답변해 주시오」하면서 방문을 나선다.

「매우 중요한 문제니 연구 검토하겠소」조재천씨의 짤막한 답변이었다. 이상의 두가

지 토막실화는 해방후 24살의 나이로 방송에 몸담았던 본인이 언론의 자유가 논의되고 합의 개헌이 거론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뚜렷이 기억 나는 현장 취재 일화이다.

30여년전 시그널곡 지금도 써 감회 깊어

韓 育블 熙 /프로듀서

KBS가 정동(貞洞) 에 위치했던 30여년전 나

는 음악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냉방시 설이 없어 스튜디오에 큰 얼음덩어리 몇개를 갖다 놓아야. 尊으므로 당시의 방송국 시설 장비가 어떠

했는지 대중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류디오 3개중 제일 큰 제1스튜디오는 약10

평 정도.

나는 프로듀서로 입사하자마자 곧 어린이공ᅵ 개방송 “누가누가 잘하나”를 제작했다. 의자도 없는 스튜디 오에 어 린이 방청 객 1백여 명 을 빽 빽 이 수용하여 모두 바닥에 주저 앉히고 생방송 으로 진행했다.

여건이 좋지않은 상황에서 의욕만을 내세워 무리하게 끌고 나간것이었으나 이렇게 시작된 누가누가 잘하나는 청 취 자의 인기 프로그램 이 되 어 라디오에서 10여년 방송하다가 텔리비전으 로 옮겨 또 10여년 계속했고 오늘날에는 다시 라디오로 계속되고 있으니 KBS의 가장 오래된 릉런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KBS라디오의 어린이시간 시그널곡(어린이 왈츠)은 프로듀서로 일하기 시작한 날, 그러니 까 1954년 5월 1일부터 사용된 시그널곡인데 지금도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되풀이 되고있 다. 우리나라 프로그램 시그널곡중 최장수 시 그널곡으로 기록될만하다. 1950 년대 후반에 제 정된 방송동요가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되고 있 는것은 방송등요가 예술적으;로 교육적으로 평 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잊혀지지 않은 마 음의 노래로서 대를 물려 애창되는 겨레의 노 래로써 높이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

다.프로듀서라는 직분은 여러 전문인들희 예술

적 창조적 기능을 종합하여 작품으로 완성시키 는 작업을 담당하는 것으로 의도하는 기획성을 창조적으로 제작한다•면 그것은 성공한 프로그 램으로 두고 두고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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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방송 6 0 년…증언 □

최초의 공개프로 노래자랑 심사 맡아

金 昌 九/프로듀서

나는 1947년10월1일 서 울중앙방송국 연출과음악 계 직원으로 입사하여 약 10년 만에 공보처 선전국 으로 전출 됐었는데 우리 나라의 최초의 공개프로인

노래 자랑을 소개하려한다.

6.25 동란을 치르고 부산피난지에서 다시 서 울로 수복한 1954년 이제는 스튜디오 안에서만 의 방송을 지양하고 밖으로 나가보자는 방송프 로 활동화 방안의 하나로 공개방송론이 나왔었 다. 그런데 그때나 요즘이나 마찬가지로 일본 방송을 본뜨는 것이 고작이어서 당시 편성계장 이 일본 NHK방송에서 한창 인기 있는 프로인 “미쯔노우다” (세개의 노래)를 우리도 해보자는 제안이 채택 됐는데 제목을 무엇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로 갑론을박이 있었다. 미쯔노 우다 는 세가지 노래까지 잘 부르면 입선되는 것이 었다. 제목에 관한 의견중 노래고개, 세고개 등이 나왔지만 너무 똑같이 본뜰수는 없다고 하여 “노래자랑”으로 결정되어 처음에는 자유 곡을 하나 부르고 합격되면 지 정곡을 주어 또 다시 합격되면 땡땡땡 종소리로 합격을 알리기 로 했다. 상금은 1천원이었다.

당시 방송국은 KBS뿐으로 정둥의 덕수국민 학교 맞은편 언덕에 있었는데 스튜디오가 셋뿐 이었고 제일큰 스튜디오는 고작 삼십평정도여 서 새로이 공개홀을 찾아나섰었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이 당시 동화백화점이 었는데 이곳3층에 소극장규모의 영화관이 있어 서 그곳을 빌어서 시작했다.

음악계장인 내가 음악대학 출신이라고하여 심사를 맡았고 사회는 당시 베테랑 아나운서인 張基範씨가 맡았었다.

합격 여부를 알리는 신호를 무엇으로 하느냐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색서폰 명주자였던 李炳 估 (작고)씨가 긴쇠파이프로 차임을 만들어왔 다.

이것을 심사석 옆에 매달아 놓고 나무 방망 이로 합격일때는 땡땡땡 세번을 치고 도중에라 도 시원치않으면 땡 한번으로 불합격을 알렸 다.

요즘도 노래부르며 놀다가 잘못하면 맹 이야 라고말하는데 이말은 이때부터 유래된것이다.

사전준비라고는 광화문에 있는 책방에서 가 요곡책자 두세권 산것분이었는데 사상 처음으 로 공개방송을 한다니까 방청객이 구름떼 같이 몰려와 깨진 유리값만도 대단했었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는 신라의 달밤, 백마야 울지마라,. 방랑시인 김삿갓,물레방아 도는 내 력, 인도의 향불,페루시아 왕자, 아내의 노 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봄날은 간다등으로 사전에 줄연자를 심사했어야 하는데 그런 절차 없이 즉석 에서 나서는 사람대로 노래부르게 하 고 심사하자니 진행이 엉망이었다.

한편 사회를 맡은 張基範 아나운서는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만 방송하다가 처음으로 초 만원을 이룬 무대에 서게되니 앞이 안보이고 떨리기까지해서 메모지에- 적힌 지정곡명도 잘 안보였다고 한다.

한편 당시의 노래자랑은 너무나 인기여서 대 구에 있는 비행단에서는 비행기로 노래자랑팀 을 데려다가 대구비행장 격납고에서 공개방송 할 정도였다.

노래자랑 반주는 세사람이 했는데 기타에 孫 夕友씨(노란싸쓰의 사나이의 작곡자) 아코디언 에 盧明爽씨 트롬본에 宋受榮씨(美國LA에서 활동중) 등이었다.

"성우”는 孤帆李瑞求선생이 처음 만든 말

李 炫/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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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한국 방송 6 0 년•••증언

. 1938년4월5일. 거의 반/시 ᄁ \ 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驗 : J \ 이날은 또렷하게 기억한 W#-\ * ; 다. 필기시험 음성테스트

. / 그리고 면접시험을 거쳐 ^ w 15대 1의 강쟁을 뚫고 얻

어진 나의 생애 최초의 직업 아나운서의 첫 출 근일 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일급1원 30전의 수습생이기는 하나 만21세의 청년으로서는 자 기가 선택한 직장이어서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여 러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한국인이 면서도' 한국말을 다시 배우고 익혀야하며 보도 부문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취재기자의 역할 도 해야했다.

■ 또한 뉴스의 원고는 당시 동맹통신등 일본통 신이 방송시간임박애서 보내온 것을 즉석에서 우리말로 번역해가며 읽어내려가야 했으므로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기자라는 직분이 해방후에야 생겼으므로 뉴스의 편집도 아나운서의 책임이었다.

일제로서는 한국인의「얼」과 「말」을 지워버 리고 소위 황국신민으로 둥화시키려는것이 목 표였지만 높은 문맹률 때문에 방편상 한국말방 송을 허용했던것인데 그러한 환경속에서도 i

준어와 억양등 국민들의 모범이 되려고 무척 노력들을 했었다.

스포츠중계방송때 요즘같이 전문가의 해설을 곁들이면 청시자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데 내가 농구중계를 했을때에는 그런 엄두조차 내지못 했었다.

요즘은 성우와 탤런트의 활약이 놀라운데 우 리나라에서 성우의 효시는 1940년 연예시간편 성 담당차였던 '고 孤帆(李端求)선생의 창안이 었음을 밝혀두고싶다.

-86년도 세계언론인 19명 피살 13피납- -40명이 추방당해ᅳ프리덤하우스보고

올 86년은 전세계에서 최소한 19명의 언론인

들이 살해되는 등 언론 자유가 모든 대특에서 침

해를 받은 한해였다고 뉴욕에 본부를 둔 사설정

치및 민권감시기구인 프리덤 하우스가 12월 22 일 발표 .

프리덤 하우스는 연례조사 보고에서 13명의

기자들이 남치당하고 40명이 취재하려던 나라에

서 추방당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85년에 전세계적으로 피

살된 언론인 31 명 가운데 16명의 희생자를 냈던

마르코스 이후의 필리핀에서는 언론자유가 크게

향상 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실제로 마르코스 전필리핀 대통령에 의해 72

년 폐간됐던 필리핀 유력지 마닐라 타임즈지가

14 년만인 86 년 I 월 5 일 복간되어 발행을 시작

하기도 했다 .또한 듀발리에 독재가 무너진 아이티에서도 언

론자유가 증진됐으며 이집트에서는 제한된 증진

이 있었고 중공은 아직 언론자유와는 거리가 멀

지만 86년에는 언론의 다양성과 비판이 있었다

고 주목했다 .

중공의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86년 8 월 14일

관 영 전 문 잡 지 인 「중국언론보도」에 발표한 성명

에서 중공언론은 관영매체와 일반매체로 2 원화

되어야 하며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마련키 위해

서는 I 〜 2 개의 독자적 언론매체의 출현이 바람

직하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중공 언론의 다양성

과 비판이 있었다는 한 실례이다 .이 보고서는 86년 한해동안 새로운 언론규제

법에 따라 남아공화국과 니카라과에서는 기자들

에게 노골적인 규제조치가 내려졌으며 싱가포르

와 말 레 이 시 아 에 서 는 「교묘하게 위협을 받았다」

고 지적했다 .또 이 보고서는 미국과 소련에서 언론자유의

제한이 시도됐다고 밝혔다 .미국은 리비아와 이란에 대한 비밀행동을 부지

불식간에 폭로하고 몇몇 기자들의 입국을 거부함

으로써 신뢰성을 잃었으며 소련은 체르노빌 원자

력발전소 폭발사건때 전통적인 은폐관례률 답습 , 미국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 (A F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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