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 (con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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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사랑의 중 (The Center of Love) 우리는 좋은 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 또 먼데서 찾오는 님을 우리는 큰 관을 가지고 정중히 영접한다. 그렇게 하여 만나는 이나 위인이 우리게는 기쁨이고 보람이다. 그러다가 그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고 우리게 망을 주게 되면 그들이 우리게 준 기쁨과 보람은 사라지고 허탈감만 남게 된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좋은 이고 내 곁을 평생 떠나지 니하는 변치 는 기쁨과 보람의 존재가 있다. 그것은 내 몸 있는 각종 기관들이다. 이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데 있으면서 사는 날까지 내 곁을 떠나지 니한다. 그렇게도 강한 금석 같은 맹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님도 있다. 그러나 내 몸 의 장기들은 사는 날까지 내 곁을 떠나지 니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프로타고라는 말했다. 내 몸 의 장기들이말로 "생의 척도"이다. 이들 척도의 흔들림이말로 곧 나의 "삶의 질"의 흔들림이다. 내 몸 의 장기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장이다. 사랑은 볼 도 만질 도 다. 추상명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Ho theos agape estin! " 그런데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는가? 사랑 = 하나님, 이것이 사이라면 사랑을 보이는 것으로 찌 표현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 몸 의 장의 형태를 사랑으로 표한다. 보이지 니하는 사랑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려면 우리는 장의 모을 그린다. 장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일정간 잠을 자 한다. 잠자는 동 내 몸 의 각종 기관들은 가 있다. 그러나 장은 지 고 일한다. 사랑인 하나님의 화으로 오 예 그리도는 말하다. "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을 편히 게 하리니..." 나는 밤 잠자리 들 때마다 이러한 음성을 장으로부터 듣는다. 남을 편히 게 하기 위하여 장은 밤새 일한다. 내 나이 지금 칠이 넘다. 한번도 피곤해 하지 고 고장도 일으키고 책임을 다하고 헌을 다하고 그러면서 보상이나 칭찬받기를 원하지도 는 것이 내 몸 의 장이다. 자기가 고 편하고자 하면 남이 병들고 죽게 된다. 내 몸 의 장은 오래 참는다. 장은 온유하고 기하지 니하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니한다. 또 장은 교만하지 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생각지 니한다. 장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그래서 내 몸 의 장은 곧 사랑이다. 장처럼 살면 나는 사랑을 천할 있겠는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도 이 한한 나를 장은 떠나지 는다. 밤마다 삭이는 장의 리는 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교육킨다. 칠 평생 이해 못하는 우둔한 나게 짜증 한번 내지 니한다. 오! 이러한 가페가 내 몸 있음이여! 그대를 발견함이 너무 늦으니 마 남지 니한 나의 여생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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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상 10개를 모아서 생의 고백인 참회록이라 하였다. 인생의 신비로움과 고마움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을 글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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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참회록 (Con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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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의 중심 (The Center of Love)

우리는 좋은 스승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 또 먼데서 찾아오는 손님을 우리는 큰 관심을 가지고

정중히 영접한다. 그렇게 하여 만나는 스승이나 위인이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보람이다. 그러다가

그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고 우리에게 실망을 주게 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준 기쁨과 보람은 사라지고

허탈감만 남게 된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좋은 스승이고 내 곁을 평생 떠나지 아니하는 변치 않는

기쁨과 보람의 존재가 있다. 그것은 내 몸 안에 있는 각종 기관들이다. 이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데

있으면서 사는 날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한다. 그렇게도 강한 금석 같은 맹약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님도 있다. 그러나 내 몸 속의 장기들은 사는 날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프로타고라스는 말했다. 내 몸 속의 장기들이야말로 "생의 척도"이다. 이들

척도의 흔들림이야말로 곧 나의 "삶의 질"의 흔들림이다.

내 몸 속의 장기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심장이다. 사랑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추상명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Ho theos agape estin! " 그런데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는가? 사랑 =

하나님,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랑을 보이는 것으로 어찌 표현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 몸 속의

심장의 형태를 사랑으로 표시한다. 보이지 아니하는 사랑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려면 우리는 심장의

모습을 그린다. 심장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일정시간 잠을 자야 한다. 잠자는

동안에 내 몸 속의 각종 기관들은 쉴 수가 있다. 그러나 심장은 쉬지 않고 일한다. 사랑인 하나님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을 편히 쉬게 하리니..." 나는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이러한 음성을 심장으로부터 듣는다.

남을 편히 쉬게 하기 위하여 심장은 밤새 일한다. 내 나이 지금 칠십이 넘었다. 한번도 피곤해 하지

않고 고장도 안 일으키고 책임을 다하고 헌신을 다하고 그러면서 보상이나 칭찬받기를 원하지도

않는 것이 내 몸 안의 심장이다.

자기가 쉬고 편하고자 하면 남이 병들고 죽게 된다. 내 몸 안의 심장은 오래 참는다. 심장은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아니한다. 또 심장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생각지 아니한다. 심장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그래서 내 몸 속의

심장은 곧 사랑이다. 심장처럼 살면 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는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도

이 한심한 나를 심장은 떠나지 않는다. 밤마다 속삭이는 심장의 소리는 칠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교육시킨다. 칠십 평생 이해 못하는 우둔한 나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아니한다. 오! 이러한

아가페가 내 몸 안에 있음이여! 그대를 발견함이 너무 늦었으니 얼마 남지 아니한 나의 여생 동안

Page 2: 참회록 (Con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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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만이 충실한 나의 반려자임을 명심하리다. 나는 오늘밤 심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한밤중에

당신이 쉬겠다면 나는 기꺼이 숨을 거두려오. 오직 그 동안의 당신의 고마움을 고이 간직하고 내

영혼은 아르크투루스(Arcturus)로 떠날 것이오." 아르크투루스라는 별은 곧 우주의 심장이다. 사랑의

출처가 바로 그곳이다. 사성현인 (불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들이 거기에서 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에 옮긴 영혼은 모두 다 그리로 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가 얼마나 넓은가?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미터이다. 이러한 빛의 속도로

여행하면 아르크투루스까지는 36년반이 걸린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그 속도로는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영혼의 움직임은 빛보다 빠르고 영의 세계에서의 시간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의 직경은 대략 30만 광년이다. 아르크투루스는 이 은하계에 속해 있다. 우리와는 비교적

가까운데 있는 별이다. 우리 태양의 밝기의 200배나 되고 크기로는 22배 정도 된다. 은하계를 벗어나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 은하계인 안드로메다까지는 약 265만광년이나 된다. 육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마젤란 성운 I"과 "마젤란 성운 II"까지는 6,50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최근

허블우주천체망원경이 포착한 가장 먼 거리의 우주변두리까지는 260억광년이라고 한다. 그 밖의

세계에 무엇이 더 있는지는 모른다. 이렇게 굉대한 우주의 중앙지대에 우주심장인 아르크투루스라는

별이 있다. 그 별은 지금도 우주를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나이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한다. 돌이켜보면 수고하고 슬펐다고 모세는 생각했다.

그럼 누가 수고하고 슬퍼했겠는가? 그것은 심장이다. 심장이야말로 수고만 하였다. 칠십 년 아니 팔십

년 동안 한 순간도 쉬지 못했다. 이 수고로움을 누가 알아주는가? 알아 줄리 없는 그리고 잠시도

쉬지 못한 그 수고로움이야말로 슬픈 것이 아니겠나? 사랑의 중심에는 오직 수고와 슬픔만이 있을

따름이다. 내가 수고했는가? 그럼 너는 사랑의 중심에 왔다. 내가 슬픈가? 그건 사랑의 중심이 외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내 몸 속의 심장이 내게 말해준다. "축복의 현장이 어디인지 아는가? 사랑의

중심이다. 그곳에 서면 오직 수고와 슬픔만이 느껴지는 곳이다." 나의 아름다운 심장이여! 그대는

지금 축복의 현장에 있지 않는가? 그 사랑의 중심에... 오늘밤도 그대는 아르크투루스처럼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캄캄하고 드넓은 내 마음의 우주에서...

전장에서 군함이 침몰하게 되면 함장이 명령을 내린다. Abandon the ship. 배를 포기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병사들은 침몰하고 있는 배에서 탈출한다. 그 때에 함장은 가장 마지막에 배를 떠난다. 혹시

부상당한 병사들이 없는가를 확인하고 최후순간에 침몰하는 배를 떠난다. 내 몸 안의 심장도 이와

같은 운명이다. 내 호흡이 중단되고 뇌의 기능이 정지되고 각종 장기들의 활동이 정지되게 되면 내

몸은 죽음의 심연으로 침몰한다. 그래도 심장은 멎지 않는다. 심장이 계속해 뛰고 있는 한 생명의

Page 3: 참회록 (Con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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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은 사후처리의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평생 함께한 동료들이 다 떠났는데 혼자만의 책임을

이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수고스런 경지인가? 그것이 또 얼마나 외롭고 슬픈 것이겠는가? 사랑의

중심은 곧 책임의 중심이다. 약속이행의 중심이다. 내가 모태에서 잉태될 때에 심장의 고동이 제일

먼저 있었다. 나의 인식의 세계 이전에... 이 첫 번 심장의 고동은 내게 약속의 종소리였다. "너는

이제부터 산다"고 하는... 나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심장은 이 약속의 메아리를 잊지 않는다. 약속의

중심에 선 자신을 알기에 수고와 외로움과 슬픔의 늪에서도 쉬지 않고 일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 내

사랑 아가페여! 내가 지금 그대에게 미리 일러둔다. 그 순간엔 그만하라. 나의 자랑스런

아르크투루스여! 그대는 사랑의 중심에 섰다. 약속이행의 중심을 차지 하였다. 그리고 축복의 현장에

왔다. 이제는 쉬어도 된다. 그 수고로움과 그 슬픔을 내 영혼이 달래 주리라.

Page 4: 참회록 (Con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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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망의 극치 (The Climax of Hope)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어야 산다. 혹 어떤 이는 하루 한끼만 먹고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는다. 또 며칠간 안 먹어도 생명은 소멸되지 아니한다. 그래서 여러 날

금식하는 종교인들도 있다. 그런데 인간이 금수와 구별되는 점은 소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소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영양분이다. 소망의 결핍은 곧바로 우울증으로

연결된다. 우울증은 진화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이 또 삶에 지친

가엾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가?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소망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몸은 75%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 안으로 공기가 수없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원소는 물과 공기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구의 기본

원소로 네 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과 공기와 불과 흙이다. 우리는 흙에서 비롯되었다고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뜨겁게 데우는 요소가 있기에 몸 어느 곳에 불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의 몸은 물과 공기와 불과 흙으로 구성된

소우주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 한 모금을 안 마셨다고 하여 우리는 죽지 않는다. 또 며칠 동안 물을

안 마셔도 우리의 몸은 마르지 아니한다. 이는 우리 몸 안에 물을 저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 안에는 공기는 저장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 않다. 공기는 순간 순간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그것을 호흡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호흡을 해야 하는가? 우리 몸 안에서는 산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공기중의 산소가 몸 안에 공급되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은 즉시로 중지된다.

호흡을 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것처럼 절박한 것이 곧 소망이다. 우리에게 소망이

결핍되면 우리의 삶의 질은 즉시로 하강한다. 그리고는 사망의 지름길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몸에서 이러한 소망을 공급해주는 기관이 있다. 그것은 폐( : 허파)라고 하는 기관이다. 폐는

심장이상으로 중요한 우리 몸의 기관이다. 심장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폐는 “소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소망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폐의 기능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잠자는 동안에 쉬지 않고 일하는 우리 몸의 기관은 심장과 폐이다. 만일에 폐가 잠자는

동안에 쉬겠다고 한다면 그 즉시로 우리는 잠으로부터 깨어나지 못하는 신세로 변한다. 칠십 여 년

동안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면서 한시도 그치지 않고 일하고 있는 고마운 기관은 심장과 폐이다.

그들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한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폐에게 가장 못된 짓을 하는 경우이다. 폐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담배에서

생겨나는 타르라고 하는 물질이다. 니코틴과 타르는 폐의 세포조직의 활동을 둔화시킴은 물론 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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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조직을 굳어버리게 한다. 그러면 그 부위는 죽은 폐가 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폐를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흡연이다. 또 술은 심장의 박동을 자극하고 호흡의 빈도수를 높인다.

호흡이 빠른 동물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천천히 호흡하는 거북이는 수억 년을 살 수가 있다. 술은

심장의 고동을 부정확하게 하여서 부정맥이라는 병을 일으키고 폐에게도 자극을 하여서 호흡을

빠르게 한다. 담배와 술을 즐기는 것은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기관인 폐와 심장에게 대하여 가장

못된 짓을 하는 경우이다.

호흡을 하는 온혈동물들의 호흡기관에는 냉혈동물이 가지지 못한 특수한 기관이 있다. 그것은 호흡

갑개골이라는 것이다. 공기가 자주 드나들게 되면 체내의 수분이 이로 인해 증발하게 된다. 그러면

호흡으로 인하여서 몸 안에 저장된 수분의 양이 줄어들게 된다. 이를 막는 소용돌이 모양의 작은

뼈가 호흡 갑개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기관의 존재유무로 냉혈동물과 온혈동물이 구분되기도 한다.

운동을 하여서 호흡이 빨라지게 되면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게 된다. 우리는 마라톤 경기에서 물을

준비하여 뛰면서 마셔야 하는 경우를 본다. 이는 호흡 갑개골의 기능을 넘어서는 수분의 증발이 몸

안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이토록 섬세하게 디자인 되어있다. 그러면 호흡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기능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호흡을 담당하고 있는 폐야말로 우리의

소망의 극치인 것이다.

폐 역시 심장과 마찬가지로 나의 한 평생 동안 쉬지를 아니한다. 칠십 여 년 동안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 기관이 폐이기도 하다. 폐 역시 심장 못지않게 나의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서

수고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고마움을 모른다. 과연 폐는 그 수고스러운 업무를 누구를 위하여 하는

것인가? 공과도 감사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오직 외로움으로만 점철된 그 수고로움은 폐에게는 슬픈

사건이다. 이렇게 수고하고 슬픈 일만 거듭하고 있는 폐 역시 “사랑의 중심”, “책임의 중심”, “약속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과연 축복의 현장을 체험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경우가 과연 축복의 현장인가?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겪었다고 하는 체험이 축복의

현장에서 비롯된 것인가? 지구촌에 살고 있는 66억의 인간의 몸 속에 깊이 숨겨져 있어 그들의

존재마저 망각해 버리는 그런 심장과 폐가 곧 축복의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의 처지를

역지사지( )로 한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나의 생명의 기능이 멎는 날 심장과 폐는

자기의 수고를 계속한다. 다른 기관이 모두 다 정지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호흡은 지속된다. 들이쉬고

내쉬는 그 호흡의 교환시간이 늘어날 뿐이다. 마지막에는 30분만에 숨을 내쉬고 또 30분 후에 숨을

들이쉬다가 호흡이 멎는다. 호흡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생명의 존엄성은 호흡이 지속되고 있는 한

사후처리를 하지 못한다. 심장과 폐는 우리들 생명의 최후를 이렇게 장식한다. 폐의 호흡정지로서

우리들의 인생에서의 소망의 극치는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Page 6: 참회록 (Con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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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폐는 과연 무슨 연고로 그토록 중요한 사명인 호흡을 맡고 있는가? 그것은 온 몸에다 산소를

공급하기 위함이다. 우리 몸의 체온을 유지하려면 산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세관을

순환하는 혈액을 통하여서 온 몸에다 산소를 공급한다. 산소라고 하는 분자들이 적혈구라고 하는

접시에 담겨져서 온 몸으로 운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폐에는 모세혈관들이 조밀하게 감싸져 있다.

아마도 혈액이 총집결 되는 현상이 폐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혈액은 인간이

화학적으로 합성하여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저작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에는 “피는 먹지 말라”는 말이 보였다. 냉혈동물들인 물고기, 개구리, 뱀 등에는 혈액이

온혈동물들만큼 근육 속에 스며들어 있지 않다. 생선의 살점에는 거의 혈액이 없다. 또 뱀의 살점에도

피의 흐름이 거의 없다. 냉혈동물들에게는 기관의 활동만을 위하여서 소량의 피가 필요할 따름이다.

그들은 영양분이나 산소공급이 온혈동물만큼 철저하지 않다. 겨울잠을 자는 동안 그들은 호흡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먹지 않아도 된다. 즉 부식되지 아니하는 살덩어리의 형태로 최소한의 생명력만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온혈동물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냉혈동물에게서 결여되어 있는 부분은

“사랑”과 “소망”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에 그들에게는 심장이 없고 또 폐가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에게 폐에 해당되는 아가미라고 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기관은 소망의 의미는

없다. 폐가 산소를 공급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몸 전체의 체온을 유지시키는

것은 물론 근육활동과 삶의 에너지를 생성키 위함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큰 소망이 아니겠는가?

폐의 기능이 정지되면 체온이 유지가 안 되는 것은 물론 삶의 에너지의 공급이 중단된다.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심장이 박동되고 혈액이 순환된다고 하여도 소망이 없는 사체의 형태로 변하고 만다.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죽음에 이른다. 심장과 폐는 나에게 위대한 스승이다. 심장은 나에게 “사랑의

중심”을 가르쳐 준다. 폐는 나에게 “소망의 극치”를 알려준다. 지금까지 이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이 위대한 스승에게 불충실한 학생이었을 뿐이다. 심장을 섬기자! 그러면 우리는 사랑의 중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폐를 섬기자! 그러면 “소망의 극치”에 이른 내 자신을 알게 된다. 이

두 스승과 이 두 멋진 의사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병”은 퇴치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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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음의 바탕 (The Ground of Faith)

성 어거스틴은 그의 “독백론(Soliloquia)”에서 믿음이 먼저인지 아는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는 믿기 위하여서는 알아야 하겠고, 또 알기 위하여서는 믿어야 하는 묘한 경지를 터득한 사람이다.

믿음의 내용이 없으면 그것은 믿음의 모양만 있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하는 내용은 앎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알기 위하여서 탐구하는 모든 과정에서 필히 대두되는 것은 모든 것이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에게 가설로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설과

전제조건을 참된 줄로 믿어야 한다. 의심과 회의는 어떻게 보면 믿음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마음속에 회의가 일어나면 무슨 일에나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의심하는 과정은 확인하는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과 앎은 같은 나무의 두 가지의 다른 가지에 불과하다.

우리 몸의 장기에는 생각하고 인식하는 기능을 가진 기관이 두 개가 있다. 우선 뇌는 생각하고

인식하고 판단을 내리는 총체이다. 그리고 대용량의 기억장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하나의 생각하고

인식하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위(Stomach)이다. 위는 단순한 소화기능을 맡은 장기가 아니다. 우리의

정서의 변화에 대하여 민감하게 대응하는 기관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위에서 제일 먼저 이를

감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식욕이 떨어지고 또 소화불량증세가 생겨난다. 그래서 위는 “제2의

두뇌”라는 표현도 있다. 우리가 먹기를 탐하여서 아무것이나 마구 먹어대고 또 포식하고 술을 퍼

마시게 되면 이러한 태도와 그릇된 정서를 제일 먼저 위가 알아차린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신비스런

것은 위가 믿음을 가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요 얼마 전에 날씨가 무척 무더운 때에 삶은 계란을 먹은 일이 있었다. 계란이 상한 것 같은

인상이나 이상한 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맛있게 잘 먹었다. 그날 밤에 심한 복통과

구토증세가 일어나 먹은 것을 다 토해낸 일이 있었다. 위는 내가 무엇을 먹어 삼키든 다 좋은

영양분이 들어있는 음식인 줄로 믿고 받아 드려서 소화를 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일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화학적으로 몸에 해로운 물질임을 알게 되면 그대로 몸 밖으로 내보낸다. 소화를 시켜서

내려 보내지를 아니한다. 위가 이러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 나는 변질된 유황의 독성에

중독되어서 생명의 위험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나와 위 사이에는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그때에 해 보았다. 음식을 먹을 때에 많이 씹고 타액과 잘 융합시키고

부드러운 상태를 만들어서 정성껏 위에게 전달해 준다고 하면 이러한 나를 위가 절대로 신뢰할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그리고 내 생명유지에 있어서 가장 열심히 일해주고 있는 내장기관들을

등한시 하면서 믿음의 대상을 내 몸 밖에서 얻으려고 하는 신앙생활에는 논리적인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예찬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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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고 하였다. 내 몸 안의 장기들을 잘 조사해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는

믿음이다. 폐는 소망이다. 심장은 사랑이다. 위, 폐, 심장은 나의 살아있는 날까지 항상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떤 다른 장기보다도 중요하다. 나와 위와의 관계개선은 곧 나의 믿음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순결, 순종, 순교의 빼어난 정신은 곧 우리 몸 안의 내장기관들이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내 몸 안의 내장기관들이 순결로서 내 생명을 보호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나의 매 순간의 생각과 생활에 절대로 따르고 순종한다. 그들은 내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서 순교하는

차원에서 헌신적으로 일해준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렇게 충실히 나를 섬긴다. 여기에 대한

나의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그들의 외로움과 그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는

일이다. 죽음에 직면하여서 아니라 넉넉히 살아서 숨쉬고 움직일 때에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매일같이 눈을 뜨면 내 몸 안에서 벌어지는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인식과 여기에 대한 소상한

앎이야말로 나의 믿음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家 國 )”라는 말이 있다. 이는 먼저 “내 자신을 갈고 닦은 다음에

가정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나라를 치리 하고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내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몸 안의 각종의

내장기관들을 잘 이해하고 그들과 화목하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그들을 위로할 줄 아는 것이

가장 먼저이고 으뜸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하는 말을 믿지 말라. 천국은 너희들 마음속에 있느니라”고

가르치셨다. 천국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음은 무슨 의미인가? 내 몸 안의 모든 장기의 기능의 화목이

곧 천국이 아니겠는가? 내가 내 한 몸을 되는대로 취급하고 학대하면서 하나님만 찬양한다면

여기에는 큰 오류가 있는 것이다. 주께 하듯 그렇게 우리는 우리 몸 안의 장기들을 섬기고 돌보고

그들의 수고스러움과 외로움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성서에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여러 번

보였다. 이때의 범사가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매사에 감사하라는 막연한 뜻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종 장기들의 복잡한 기능에 대하여 잘 파악하고 그들의 수고와 노력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제일 첫 단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이다. 내 몸 안에 온갖 불평등과 불화와 더러움으로 채워져 있는 한 그런 누추한 곳에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모실 수가 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매일 아침 성수를 몸에 끼얹고 또

마시면서 몸을 외부와 내부에 있어서 깨끗이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몸 안에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데 자기에게 항상 선하게 살 것을 명령해주는 음성이 있다고 하였다. 자기는 그 음성을

경청한다고 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사실은 우리는 위와 폐와 심장을

통하여서 매 순간마다 체험하고 있지 아니한가?

나의 신앙생활의 근거 곧 “믿음의 바탕”은 곧 내 몸 안에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모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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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에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내게 가져다

줄까, 누가 구름 위에 올라가서 내게 내려다 줄까 생각지 말라. 내 말씀은 너에게 심히 가까워서 너의

입 속에 너의 몸 속에 있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용하면서 모세는 그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천부경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뇌 속으로 강림하신다고 하였다. 우리 몸 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시고 선과 악의 판단을 우리들의 내장기관을 통하여서 알려주시는데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바탕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와 먼데

계시지 아니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 그리고 내 몸과 영혼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신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이 없으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사상누각( 閣)이 될 수 밖에 없다. 요즘

기독교의 분위기가 원래의 본 모습에서 많이 이탈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한국의 교회는 “예수 없는

교회”라는 말까지 거론된다. 왜 그런 것인가? 믿음의 바탕이 내면적인데서 이룩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 한 몸이 신앙생활에 별로 의미가 없다고 하라! 그러나 그 하염없는 나 하나의

그릇됨이 사회의 그릇됨과 연결된다. 그 하염없는 나 하나의 참됨이 곧 사회의 참됨과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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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창세기에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복수명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유일신론에서는 창세기의 복수명사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 이 부분에서

다신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논란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의 창조된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무엇이 다른가? 겉보기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인가? 두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네발로 기어 다니는 동물보다 더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는 뜻인가? 겉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에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일 것이다.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모든 생각과 결단을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할 수가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까지 이르지 아니했는가?

탄자니아 세렝게티에 모여사는 얼룩말들의 떼는 자유의지로 의사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의 방식에 정해진 유형이 있다. 풀을 뜯어 먹는 방법이나 서로 모여서 살면서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이나 또는 어미가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데에 미리 정해진 규범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의지에 의하여서 살 수 있도록 창조된 경우는 오직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거할 때에는

근심걱정이 없었다.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해야 할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선악과는 쳐다보지도 말고 따먹지도 말아야 하는 계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만일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다른 들짐승들처럼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선악과를 인식할 수 없도록 창조 되었을 것이고 또 그것을 따먹으려는 충동조차 들지 않도록 지음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에덴동산의 범죄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선택의

자유가 있었기에 그로 인해 아름다운 에덴동산은 불미스런 거역의 동산이 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모든 일들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과 접하게 된 것이다.

에덴의 동쪽에서 첫날밤을 지낼 때에 아담과 이브는 가장 두려웠다. 어두움이 엄습하고 원수가 된

뱀이 바로 옆에서 언제 그들의 발꿈치를 물을지 모른다. 그들의 에덴동산의 동쪽은 에덴동산과는

너무나 다른 면모였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존재한 풍요로운 동산이

아니라 황무지에 엉겅퀴와 잡초가 우거진 곳이다. 어두움의 엄습은 그대로 적의 공격의 두려움으로

변하였다. 아담보다도 이브가 더 무섭고 괴로웠을 것이다. 화염검으로 생명나무들을 지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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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룹(Cherub)들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최초의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과연 무엇을 생각했겠는가?

쫓겨난 인간들이 다시 손을 들어 생명나무를 만질 것을 걱정했겠는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전락된 인간들을 측은히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의 천사들인 케룹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담과 이브는 들으라! 너희들이 무슨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 아름다운

그리고 평화로운 또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진정 떠났는가? 너희들은 마음속에 그 에덴동산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된 것이다. 마음속에 에덴동산의 그림을 아로 새기라. 그 아름다운

잊지 못할 동산을….” 적어도 이브만큼은 케룹들의 이러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인의

마음이 더 부드럽고 아름답지 아니하냐? 그 끔찍한 몸서리치는 에덴동산의 동쪽에서 첫날밤을 보낸

다음 이브는 아담을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담보다 자신의 잘못이 더 컸다는 뉘우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뉘우침은 케룹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뉘우침은 마음 문을 열 수가

있다. 뉘우침이 그래서 보배롭고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측은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들의 뉘우치는 마음바탕이다. 이브는 그날 밤 마음속에 에덴동산의 그림을 담았을 것이다. 어떤

황무지로 나선다고 해도 마음속에 각인된 에덴동산을 다시 건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황무지면

어떤가? 사막이면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아니했는가? 그 하나님의 형상은 곧

자유의지가 아니겠는가? 마음속에 에덴동산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마음의

세계는 에덴동산보다 더 넓은 것이다. 거기에 그려진 새 에덴동산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재

건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컬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대서양 횡단의 항해를 시작하였다. 이미 1480년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매우 자세한 항해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컬럼버스의 경우는 마음의 항해가 그의 인생행로의 용기가

된 것이다. 우리들 인간의 이러한 전통은 바로 에덴의 동쪽에서 첫날밤 케룹의 음성을 들었던

이브에게서 시작되었다. 마음속의 청사진이 모든 것을 새롭게 건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에덴을 그려놓은 것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축복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들이 실패하였는가? 성공의 그림이 우리들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지위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라도 어떤 역경에서라도 성공을 이룩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세계가 에덴동산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형상은 곧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사를 닮으려 하는 자가 때때로

악마를 닮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께서는 벌들의 사회를 위하여서 미리 질서와 규범을 넣어

놓으셨다. 벌들은 무의식 중에 그 소프트웨어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서 꿀을 만들어낸다.

벌들이 창의성이 있는 두뇌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어떤 꽃에 가서 무얼 어떻게 하여야 꿀의

요소들을 채취할 것이며 그것들을 가져다가 벌집을 짖고 어떻게 하여야 꿀을 뜨게 되는가를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겠는가? 수분을 증발시키기 위하여서 밤새 날개를 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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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안해낸 것이겠는가? 여왕벌에게 로열젤리를 먹여야 하는 것을 스스로 개발해낸 것이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자유의지를 내려주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하나에서 열에 이르기까지 꿀이 되는

과정의 프로그램을 소프르웨어로 넣어놓으신 것이다. 벌들은 이를 이행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 그것은 생각해내는 과정이다. 자유로운 정신으로부터 모든

창의성은 개발되는 법이다. 그리고 사전에 철저한 준비과정이 마음속에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우리는 스스로 개발할 수가 있다. 마음의 행로가 있어야 인생의 행로가 결정이

되도록 그렇게 우리는 장조된 존재들이다. 마음의 행로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스스로

설계할 수가 있다. 마음만 먹게 된다면 에덴동산 뿐이랴? 그 어떤 아름다운 우주의 지경도 다 우리는

재현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창조의 능력은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창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서 창조된 것이다.

발명이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오직 발견만이 있을 따름이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였는가? 그는

전기를 발견한 사람이다. 자연속에 전기가 이미 존재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점이 위대할 뿐이다.

마음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는가? 그리고 그 마음의 행로를 어떻게 인생의 행로에 옮겨 놓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할 일이다. 우주처럼 드넓은 마음의 세계 그리고 그곳에다 어떤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는 우리들의 자유의지… 이것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어떤 계획도 다 실현시킬 수 있는 그 재주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자연 속에 사는 들짐승이나 벌들과 같은 곤충들의 사회만도 못한 비참한

현실 속에 던져지게 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대신에 자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로만 살면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인 자유의지는 무엇하나 제대로 되어진 상태는 부여되지 아니한 황무지에 던져진

처지일 뿐이다.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 다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이라 할 수도 있으나 눈물겨운 자기극복이 전제되어야 하는 매우 고달픈

인생행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한 보람과 기쁨과 애착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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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상 ( : Mother’s Image)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것은 남녀의 성의 차이를 초월한 절대적인

개념이다. 어머니는 섬김과 보람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존재이다. "나는 섬김을 받고자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섬기고자 하여 왔노라."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곧 어머니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거북이는 자신의 몸의 생김새로는 도저히 알을 품어서 부하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뜨거운

모래사장에다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다 알을 낳는다. 그리고는 정확한 시간이 지난 후에 정확한

장소에 나타나 부하된 새끼들을 돌본다. 악어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보람과

헌신적인 보살핌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섬김의 높은 수준이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들은 신속히

물속으로 운반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 거북이는 새끼들에게 속히 물가로 가라고 지시한다.

어머니 악어는 여러 마리의 새끼들을 입에 담아 물가로 부지런히 나른다. 세상에 갓나온 어린

새끼들은 이러한 어머니를 믿고 따른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세습정치체제가 와해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어머니당"이라는

개념을 국민 앞에 내어 놓았다. "노동당"의 의미는 "어머니당"으로 승화 되었다. 어머니의 이미지를

정치이념에 끌어드린 것이다. 누구든지 숭고한 어머니 앞에서는 자기를 낮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서 어머니는 잊혀지지 아니하는 존재이다. 어머님의 된장찌개가 맛이 없다고 탓했던 나에게

그것은 지금은 가장 먹고 싶은 맛의 그리움이 되었다. 어머님의 그 인자하신 표정이 밤마다

되살아난다. 내가 스물세 살이 된 해로 기억된다. 그때에 나는 졸업시험을 준비하노라 밤을 지새워

공부하였다. 그런데 뭔가 먹고 싶어 라면을 끓이고자 물을 올렸다. 그 옛날 재래식 부엌은 방바닥

보다 낮은 아궁이에 연탄난로가 있었다. 그 위에 물을 담은 냄비를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공부하다가

그 사실을 깜빡 잊었다. 무슨 달구어진 금속의 특이한 냄새가 나기에 그때야 연탄난로 위의 냄비

생각이 났다. 냄비 안의 물은 다 졸아들었고 냄비 바닥이 불덩이로 변해 버렸다. 너무도 놀란 나는

냄비를 어머님의 조리대 위에 올려놓고 연탄난로를 아궁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어머님이 나를 깨우셨다. 조리대 위의 냄비를 들어 올리고 새카맣게 타버린 둥근 냄비자국을

내어 보이셨다. 그날 아침 어머님께 나는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신성한 어머님의 생활공간에다

흠집을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필적이 좋지 않아

편지를 못쓰신다 던 어머님으로부터 친필 편지가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어머님의 사과하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때에 너를 탓하고 욕했던 것을 용서해다오. 부엌의 조리대의 검은 냄비자국을

볼 때 마다 네 생각이 나는구나. 매일같이 그 자리에 두 손을 올려놓고 너를 위해 기도 한단다.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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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수 있는 좋은 흔적을 선물로 남겨놓은 것을 모르고 너에게 야단을 쳤구나." 나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어른거려 더 이상 어머님의 친필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어머님의 나에 대한 섬김의 마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아니한다.

그 어머님이 지금은 분명 아르크투루스에 계실 것이다. 그곳에는 섬기고자 한 사랑의 영혼들이 모여

산다고 한다. 그곳 높은 보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이 틀림없다. 아버님도

그곳에 계실 것이다. 그분 네들은 한평생 섬기는 자세로 사셨다. 아!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

나는 부모님께 불효하였다. 그 섬김의 고귀한 이브자리를 걷어차곤 하였다. 무엇이 그리도

불평스러웠던가? 은혜의 단비와 같은 어머님의 목소리를 얼마나 왜면 했던가? 돌이켜보건 데 나의

덜됨은 내 몸 안의 무언의 스승들이 있음을 인식치 못했음에서 비롯 되었다. 그때에 내 몸 속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음을 알았더면 그 고귀하신 분들께 못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밤이

깊었다. 대낮의 소음이 없어지고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이 적막으로 변했다. 그러한 적막은 진공인

우주공간을 채운다. 멀리 아르크투루스로부터 꿈에 그려본 어머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지구에는 내가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러 갔었다. 그렇게도 내 생각이 나거든 내가 못다한 섬김을 계속

하려므나. 섬김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지금 여기서는 우주를 섬긴다." 섬김은 보람의 내용이다.

내가 섬기려 하지 않는데 보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보람은 만드는 게 아니다. 보람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 보람은 누적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섬기는 자에게만 잠시 깃드는 것이 보람이다.

이 잠시 깃드는 보람이 윤리적 가치를 가늠하는 표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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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밤하늘의 어머니 (The Mother of Night-Sky)

봄철의 밤하늘은 육안으로 별을 관찰하기 좋은 경우이다. 머리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면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북두칠성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들을

“큰곰”과 “작은곰”이라고 하였다. 큰곰과 작은곰으로 불리는 그 중간에 밝게 빛나는 별이 보인다.

그것이 아르크투루스(Arcturus)이다. 아르크투루스는 그래서 “곰의 수호자”라고도 한다. 북극성이

“밤하늘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아르크투루스는 “밤하늘의 어머니”라고 할 수가 있다. 별자리들이

움직이는데 북극성은 움직이지 아니한다. 그래서 항해할 때에 북극성을 방향의 표준으로 삼기도 한다.

변함없는 항성이라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북극성이 곧 우리들 영혼의 고향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피라미트내에서는 미이라의 머리를 정확히 북극성을 향하도록 위치시킨다. 또 동양에서는 머리를

북쪽을 향하게 하여 누어 잠들지를 않는다. 잠자다가 영혼이 빠져나가서 고향인 북극성으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밤은 유난히도 어머님 생각이 난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참을 수가 없어 나는 살며시 일어나

한 밤중에 밖으로 나갔다. 길가에는 고요한 정도가 아니라 적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청계천 쪽으로 향했다. 물이 흐르는 그 소리마저 내게는 맑고 청아하게 들렸다. 밤하늘의

별들은 청계천의 물소리와 함께 초롱초롱 빛났다. 나는 밤하늘의 아버지인 북극성과 밤하늘의

어머니인 아르크투루스를 쉽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두 개의 별들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밝은 별은 처녀자리의 스피카(Spica)이다. 이들은 봄철 밤하늘의 삼각지대를

이루는 가장 빛나는 별들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북극성이 내 아버지이고,

아르크투루스가 내 어머니이고 그리고 스피카가 내 자신이 되었으면… 나의 영혼이 스피카가 되어서

밤하늘을 지킬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 영혼이 별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선한 인생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의 칠십 여 년간의

인생살이를 돌이켜보면 나는 밤하늘을 지키는 세 개의 별들 중에 하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력은 하지 않고 소원만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마냥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밤하늘의 어머니인 아르크투루스는 “사랑의 별”, “봉사의 별”, “헌신의 별” 그리고 “섬김의 별”이다.

거기에서부터 훌륭한 성현들이 지구로 왔다. 그들은 모두 사랑과 봉사와 헌신과 섬김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은 다시 그리로 돌아갔다. 아르크투루스에는 내 아버님과 내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나는 믿는다. 그 분들은 한 평생 섬김만을 생각하였다. 자기의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신 분들이다. 그 덕분으로 내가 지금 이만큼 건강하고 그나마 보람을 찾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오늘 밤 따라 그분들이 보고 싶어진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에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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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대기권 안에 있을 때에 공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물고기들이 바다 속에 있을

때에 물의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처럼 나는 사랑의 바다에서 헤엄치면서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제 내게는 매 마른 세상이 되었기에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섬김이 생각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밤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저 “사랑의 별” 어디엔가에 나의 아버님과 나의 어머님이 계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 오늘밤에 나의 영혼이 아르크투루스로 여행가고 싶어졌다. 인간은

우주를 개발하고 있다. 전기의 힘을 이용하여서 아니면 핵에너지를 추진력으로 하여서 우주를 여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주여행은 오로지 영혼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잠을 자야하는 삼차원의 몸을 가지고서는 다차원의 우주를 어떻게 여행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무모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을 가진 우리들은 그 육신의 한계로

인하여서 지구 내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에 지구를 벗어나고 싶으면 우리들의 몸이 영적인

다차원의 형태로 변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르크투루스로 여행을 간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지구를 영원히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번 가면 못 돌아오는 그러한 여행의 장도에 올라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구를 떠난 영혼들이 다시는 자기의 모습대로 지구로 되돌아오지는

못한다. 영혼이 다른 육체를 입어서 이 지구에 환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나에게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니 여기에 대한 희망 역시 무모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르크투루스에 계신 어머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내 생각이 나면 섬김을 계속 하려므나.

우리는 섬김 속에서 만날 수가 있다. 여기서는 지금 우주를 섬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을 섬기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그분들을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섬길 수가 있을까? 그때에 내게

아버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네가 섬김의 속성을 모르는구나. 섬김이란 태양빛과 같은 것이다. 태양이

빛을 발하면서 되돌려 받기를 원하겠는가? 그럼 네가 고마운 태양에게 반사경을 손에 들고 그 빛을

다시 보내보라! 그런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태양빛은 되돌려 받을 생각을 아니한다. 또

되돌려 줄 방법도 없는 것이다. 섬김이 바로 그렇다. 내가 너를 섬긴 것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니라. 너는 나의 섬김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발하라! 그것이 섬김의 속성인 것이다.” 나는

한참 동안 상념에 붓 잡혀 있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번 별들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의 어머니인

아르크투루스에서는 오렌지 색갈의 찬연한 빛이 내게로 오고 있었다. 그 빛은 내가 반사경으로

되돌려 보낼 필요가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받은 섬김의 빛을 나는 내 주변에 비추어 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섬김의 방향은 빛의 방향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반드시 섬김을 받았기에 그를 섬긴다는 것은 섬김의 속성을 모르는 것이라고 방금

교육받았다. 극진히 섬겨야 할 대상은 내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다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내게 기쁨을 주고 있는 꽃 한송이가 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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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이를 쳐다본다. 볼수록 나에게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내 마음을 채워준다. 아! 저 꽃 한송이가

지금 나를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 섬김이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

이러한 원칙아래에서 섬김이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심코 발걸음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내발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차였다. 나는 그 돌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갑자기 내게는 그 작은

돌멩이가 아르크투루스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아르크투루스에서 비취는 오렌지 색갈의 빛을 그

돌멩이가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게는 이상스런 감정이 스쳤다. 내가 지금 아르크투루스를

내 손안에 쥐고 있다고 하는…. “밤하늘의 어머니”가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것이다. 아르크투루스가

정녕 “사랑의 별”, “섬김의 별”이라면 그것은 나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곧 내 손안에 내 마음속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사랑의 힘, 섬김의 보람을 나는 지금 되찾은

것이다. 오늘밤은 내게는 “행복한 밤” 그리고 “희열의 밤”으로 돌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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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별들의 영광 (The Glory of Stars)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0-41)”. 영광이란 하늘에 속한 형체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형체의 영광이 따로 있다고 하였다. 영광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한다.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하는 말

속에는 영광스러워야 할 내 이름이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름이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인격체”가 영광스럽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누구나 다 추구하는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은 하늘의 것이고 평화는 땅의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이 성서에 보였다. 영광은 원래 지극히 높은 곳에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땅에서는 영광이 아니라 평화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 중에서이다. 그런데 지극히 높은 곳의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다. 지상에서 인간이 평화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다. 원래는 하늘의 영광과 지상의

평화가 창조의 질서가 아니었겠는가? 사도바울은 하늘의 영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또 다르다”고 하였다.

하늘의 영광은 다양하고 찬란하다. 그러한 영광이 지상에서 어찌 가능하랴! 지상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이 대립하여서 영광스럽지 못하다. 또 평화스럽지도 못하다. 서로 다른 것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물고 찢는다. 창조의 질서는 다양한 개체들이 모여서 나름대로 빛을 발하는 가운데 영광이

들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해의 영광이요 그것이 달이 영광이요 그것이 별들의 영광이다. 그런데 별과

별 사이에도 그 영광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컴퓨터를 가지고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별의 수효와 지상의 모래알의

수효이다. 이 둘은 정확히 몇 개인지를 파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육안으로 별을 세어보면 3,000개

정도를 헤아릴 수가 있다. 망원경을 사용하게 되면 30,000개 정도의 별을 셀 수가 있다. 더 정교한

최첨단의 망원경을 가지고 노력하면 약 30만개의 별을 세어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은하수에 집결해

있는 별들은 도저히 몇 개인지를 셀 수가 없다. 추산하건 데 약 3억 개 정도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은하계 내에는 약 천억 개의 별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은하계가 또 천억 개나

된다고 한다. 한편 지상의 모래알을 헤아릴 길이 없다. 1088 개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그것도 고대

그리스의 알키메데스의 생각이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모래알의 개 수를 헤아릴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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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무량한 별들과 모래알들이 한 개도 똑 같은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스런 손길이다. 우리 인간은 도저히 그러한 다양성과 마주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겨울철에 눈이 오게 되면 온 천지를 하얗게 덮는다. 눈은 매우 작은 눈꽃송이들의 모임으로 되어

있다. 육각형을 이루고 있는 눈꽃송이들은 온 천지를 뒤덮을 정도로 그렇게 많다. 그 눈꽃송이도

우리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런데 한 개도 똑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는 “미리 선정된 조화(Praestabiliierte Harmonie)”라는 개념을 내어 세웠다. 다양한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에 어느 하나도 똑 같은 것이 없는 중에서도 같은 종류들이 있어서 서로

다르지만 종류가 같아서 함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는 많은 꽃들이 있다. 그래도 어느

것 하나도 동일한 것은 없다. 그러한 다양한 가운데에 장미꽃의 종류가 있고 백합꽃의 종류가 있다.

같은 종류인데도 장미꽃이 똑같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 같은 종류인데도 백합꽃이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서로 같지 아니한 가운데에 공통점이 있어서 같은 종끼리는 서로 화목하고 협조하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왜 안 되는 것인가?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한탄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양한 것들이 모여서 서로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데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서는 단일화가 좋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은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지상에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가능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지상에서는 평화가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양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영광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지상에서의 영광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때의 지상에서의 영광은 하늘에서의 영광과는 다른 것이다.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문헌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갈급한 영혼이 지상을 떠나서 천상의

어느 아름다운 분수에 도달 하였다. 목이 말라서 물을 먹고자 했는데 거기에는 쪽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먹여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무에게도 물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물을 얻어 마시려고

하면 이렇게 말하라. ‘나는 지금 내 머리 위에 찬란히 펼쳐진 별들의 영광을 보며 살다가 오는

길이다’ 그러면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천국에 이르는 길로

인도된다.” 매일 밤마다 별들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늘의 영광을 매일

체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별들의 영광은 하늘의 영광인 동시에 이를 창조하신

창조주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러한 영광을 인식하고 숭경한 영혼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임이 들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을 믿었는가 믿지 아니했는가 하는 토론이

벌어지는 장소는 아닐 것이다. 다만 말없는 의사소통뿐이 있을 것이다. 물을 주려고 하는 자와 물을

얻어 마시려고 하는 자 사이에 무언의 의사소통은 곧 별들의 영광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 하나로서

얼마나 깊은 하나님께 대한 숭경을 마음에 담고 살았는가 하는 것이 들어나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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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날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엄연히 구별되는 그 순간에 기독교의 교리문답 같은 것이

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아는가? 그리스도가 구세주인지를 아는가? 부활을

믿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살았는가 하는 것이 무언중에 명명백백히 들어나게 될 것이다.

별들의 영광 하나를 올바로 인식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가 인생 전체에서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양하고 그 찬연한 빛을 매일 밤마다 쳐다보면서 캄캄한 마음의 우주를 밝혀보려는

그 갸륵한 영혼이 하늘 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는

운명하는 순간에 마지막 말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을 발하고 캄캄한

내 마음속에서는 도덕의 법칙이 그렇게 빛난다.” 별들의 영광은 그러면 왜 있는 것인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별들의 영광을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셨고 또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

우리들의 마음의 세계는 너무나도 캄캄하다. 내 몸의 그렇게도 충실한 장기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어두운 내 마음이 아닌가? 그 마음의 어둠을 밝히는 일은 곧 지상의 평화를 이룩하는 길이다.

이 지상에서 한시도 전쟁이 그치지 않고 평화가 이룩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 마음의 세계가

어둡고 완악하기 때문이다. 내 몸 속의 장기들에게 고마워할 수가 있다면 그가 살인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고 하면 이 지상에서는 그만큼 평화가 유지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별들의 영광을 우리들의 어두운 마음의 세계로 가져올 방법은 없을까?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다음에 정언명령으로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 별들의 영광을

마음속에 불러 들이라!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매일 밤마다 그 찬란한 별들의 영광을 우러러

쳐다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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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우주로의 여행 (A Voyage to Microcosmos)

20세기 후반인 1950년경부터 인류사에서는 일대 변혁이 생겨났다. 그것은 처음으로 인간을 지구의

대기권 밖으로 내어 보내 본 사건이다. 1961년 당시 소련의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 푸르고 둥근

지구를 처음 본 사람이다. 그 이후부터 미국과 소련은 우주개발의 각축전을 벌려왔다. 여기에

유럽연합과 중국과 일본과 인도가 합세하여서 지금은 다국적으로 우주탐색에 많은 경비와 노력을

들이고 있다. 그래서 얻은 것은 결국에는 인간의 삼차원의 육체로서는 광활한 우주를 여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우주공간에서 무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면서 저 찬란한 세계로 마음껏 돌아다녀보고

싶은 충동은 억제치 못한다.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아르크투루스(Arcturus)와 시리우스(Sirius)와 오리온

(Orion) 별자리 등이 우리의 머리 위에 아주 가깝게 보인다. 쉽사리 그곳으로 가 볼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하기야 수 백만 광년이 걸리는 안드로메다나 수 천만 광년이 걸리는 “마젤란 성운” 등에

비교하면 실제로 가까운 별들이 우리가 육안으로 식별하는 경우이다. 대우주에 대한 관심과 숭경과

그리움과 그곳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천문학적인 돈을 사용해가면서 우주탐색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소우주인 우리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무관심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내 몸 안에 있는 장기들은 내가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한낮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내가 되는대로 취급하고 훈련시키고 연단을 시키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서 헬스케어를 하는 사업이 돈을 벌 수가 있는 것이다. 또 몸에 좋다고 하는 보약을 마음껏 찾아

먹는다. 몸에 정말로 좋은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남들이 그러니 따라서 하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하여 민주적이지 못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독재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몸 안에서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다 투영되어

있다. 대우주를 여행할 수는 없어도 우리는 우리 몸인 소우주는 여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몸

안에 북극성도 있고 북두칠성도 있고 아르크투루스도 있다. 그러면 소우주로의 여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소우주인 우리의 몸을 덮고 있는 피부는 너무도 그 조직이 완벽하여서 어떠한 미생물도 직접적으로

침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완벽히 차단된 철의 장막과 같은 그런 조직이 아니라 곳곳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땀구멍들이 있다. 땀구멍은 외피(Epidermis)의 하부구조인

내피(Corium)에 위치하는 직경 0.4mm 의 작은 구멍들을 말한다. 보통 때에는 그것이

외피(Epidermis)에 의하여 완전히 막혀있다. 그런데 몸의 체온이 상승하게 되면 외피(Epidermis)는

마치도 창문의 커튼처럼 말려지면서 하부의 내피(Corium)에 위치한 땀구멍들을 외부로 노출시킨다.

그 순간에 몸 안의 수분이 방출되는 것이다. 피부의 수분은 증발하면서 피부의 온도를 하강시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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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그러나 그 열린 구멍으로 어떠한 미생물도 침투하지 못한다. 땀에는 소량의 염분과 질소로

형성된 박테리아에 대한 항체인 “데름시딘(Dermcidin)”이라는 효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미리

정제된 소독성분의 수분이 땀구멍으로 분사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자동으로 외피는 다시

닫힌다. 그러면 피부에는 땀방울들이 맺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벗은 알몸이라고 하여도 피부를

통하여서는 어떠한 미생물도 침투할 수가 없게끔 디자인 되어 있다. 그래서 소우주에로의 여행은

피부를 통과하는 방식으로서는 그 진입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소우주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면 그곳으로는 많은 미생물들이 한꺼번에 침투할 수 있는 열려진 곳이라야 한다. 그곳이 다름아닌

호흡기관이다. 코나 입으로 호흡을 할 때에 공기가 체내로 들어간다. 주입되는 공기와 함께 우리는

소우주의 내부로 진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으로는 엄청난 수효의 미생물들이 함께

들어간다. 개중에는 우리 몸에 유익한 미생물도 있다. 미생물들이 호흡기관인 코로 함께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코의 뼈에는 매우 섬세한 갑개골(Concha Nasalis)이라는 소라형태의 기관이 뒷 편에

위치해 있다. 세 개가 있는데 가장 위에 위치한 갑개골은 상위갑개골(Concha Nasalis Superior)이고,

가운데에 위치한 갑개골은 중간갑개골(Concha Nasalis Media)이고, 아래에 위치한 갑개골은

하위갑개골(Concha Nasalis inferior)이다. 상하의 갑개골은 공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수분들을

채취한다. 즉 외부공기가 체내로 유입될 때에도 수분을 채취한다. 그리고 체내의 공기가 외부로 나갈

때에도 수분을 채취한다. 그래서는 몸 안의 수분에 더한다. 호흡을 하면서 수분이 증발하는 그만큼의

수분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의 중간갑개골(Concha Nasalis Media)는 냄새를 맡는

후각기관과 연결이 되어 있다. 냄새라고 하는 것은 미립자들이다. 그 미립자들이 중간갑개골을

통과하면서 후각감지기관으로 연결이 되어서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다. 호흡기인 코 하나에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덩어리가 큰 먼지들은 코 안의 털들에 의하여서 걸리게 되어 있다. 걸려든

먼지들은 코에서 분비되는 점액에 의하여서 부착된 상태로 있다가 코를 풀게 되면 몸 밖으로 다시

나가게 되어 있다. 호흡기를 통하여서 몸 안으로 공기가 유입될 때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데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나 기타 세균들은 호흡할 때에 유입되는 공기와 함께 체내로 들어가게

된다.

공기와 함께 체내로 들어온 박테리아, 바이러스, 세균 등의 미생물들은 제일 먼저 편도선(Tonsille)에

도달한다. 그곳은 미생물들이 착상하기에 좋은 환경이 부여된 곳이다. 즉 수분과 온도와 영양분 등이

있는 곳이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미생물들은 일차로 편도선에 안착하여 장시간 그곳에 머물게 된다.

이로 인해 미생물들이 걸러진 깨끗한 공기만이 기관지를 통과하여서 폐로 들어간다. 만일에 편도선을

수술해내서 제거하게 되면 외부로부터 미생물들이 곧바로 기관지를 타고 폐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관지염이나 폐염을 일으키게 된다. 편도선에 집결된 미생물들은 체내의 이물질을 퇴치하는

백혈구들의 공격과 함께 편도선내에서 죽게 된다. 이때에 편도선이 부어 오르면서 통증을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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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선염 (Angina tonsillaris)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편도선염은 다시 가라앉는다.

별도로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심하고 오래 계속되는 경우에는 투약하든가 치료를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번거롭다고 하여서 편도선을 제거해내는 것은 몸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먼지도 없고 미생물도 없는 순수한 공기만이 기관지를 통과하여서 폐로 주입된다. 그러면 폐에서는

그 공기내의 산소들을 분해하여서 모세혈관을 통하여 온몸으로 전달하게 된다. 들이쉬는

호흡(Inspiration)과 내 쉬는 호흡(Exspiration) 사이에는 산소의 공급이 체내로 퍼지고 또 체내에서

발생된 이산화탄소가스가 내 쉬는 호흡을 통하여 몸 밖으로 나간다. 이러한 호흡의 과정에서

미생물들이 전혀 관여할 수 없도록 우리의 몸은 디자인 되어 있다. 우리 몸의 심장은 잉태의

처음부터 박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폐는 모태에서 맹아가 자라나는 과정에서는 호흡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 일단 탄생하고 난 직후의 몇 초 만에 폐는 처음으로 호흡을 위한 동작을 시작한다. 그래서는

폐는 평생 동안 한번도 멈추거나 쉬거나 하지를 아니한다. 호흡을 통한 공기의 유입과정에서 편도선,

기관지, 폐로 통과하는 데에서는 위에서 고찰된 바 미생물들이 호흡과 함께 체내로 침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몸 안에는 세균들이 침투한다. 그것은 호흡기관을 통하지 않고 음식물이

위(Stomach)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난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에 입에서 씹는다. 맷돌에서 잘게 부수는 것과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혀는

바로 음식물을 이빨들 사이에로 골고루 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혀에서는 타액을 분출한다.

일종의 소화액과도 같은 것이다. 음식을 잘 씹고 입 속에서 여러 번 타액과 잘 섞는 일은 절반

이상의 소화를 이룬 셈이 된다. 그러한 상태로 삼키게 되면 위로 전달이 될 때에 위에 큰 무리를

주지 아니한다. 타액이 많이 섞인 음식물을 소화하기 위하여서 위산을 많이 배출할 필요가 없음은 위

스스로 잘 안다. 우리는 느낌이 있고 정서가 있는 위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는

몸 안에서 여러가지의 불편스런 행동을 하게 된다. 위가 경련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반항

또는 사보타쥬로 보아야 한다. 왜 우리가 위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위는 철저한 믿음과 앎의

균형을 지키는 존재이다. 무슨 음식이든 믿고 받아 들인다. 그러나 위에서 소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몸에 해로운 화학반응이 일어날 때에는 이것을 가장 먼저 인식하는 존재가 위이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내려 보내지를 않고 토하는 과정을 통하여 몸 밖으로 내 보낸다. 우리는 믿음은 있는데

소상한 앎이 없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는 믿음 자체를 탓한다. “공연히 믿고 한

일에 화가 생겨났다”고 원망하는 것이다. 위(Stomach)에서의 믿음과 앎의 균형이야말로 우리가

사회생활에서 배워야 할 일이다. 이러한 폐와 위의 기능은 오로지 심장이 박동하면서 혈액을 공급해

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만일에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고 하면 혈액이 폐로 공급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면 폐에서 산소를 몸 전체에 공급하는 역할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몸의 긴급한

사태에서는 위는 소화기관으로 자신의 업무를 진행할 길이 없을 것이다. 심장과 폐와 위는 서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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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조하고 또 몸의 건강을 위하여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소우주인 우리의 몸은 철저한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세포조직과 기관과 몸 안의 분자물질 등이

총동원 되어서 외부로부터 침투된 박테리아, 바이러스, 세균 등에 대항하여서 사전에 분쇄하는

생물학적인 기능이다. 여기에는 매우 복잡한 화학적인 반응들이 일어나 이른바 의학분야에서

예방의학(Immunologie)이란 분야가 생겨날 정도이다. 쉽게 말하면 외부의 적과 싸우는 체내의

예방전술에는 도장과 같이 생긴 예방체가 있다. 거기에는 복합적인 생물학적인 기능이 담겨져 있어서

“생물학적인 도장(Biological stamp)”이라고 한다. 이 생물학적인 도장은 모든 전략을 저장하는

기억장치가 있다. 그래서 한번 실패한 사건은 절대로 반복이 되지 아니한다. 이러한 기능을

이용하여서 우리는 사전에 예방주사를 주입하게 되면 “생물학적인 도장”에는 소상한 전략적인 정보가

기억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러한 경우가 올 때에는 완벽하게 성공을 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한번 잘못한 것을 여러 번 반복하여 실수를 한다.

특별히 사업하는 경우에서 그렇다. 요행을 바란다든가 또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으로 인하여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 속에서는 그러한 방심은 일어나지 아니한다. 소우주인

우리 몸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인격이 높이 고양된

사람이다. 우리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몸 전체를 유지하는 지휘체계이다.

두뇌는 모든 믿음과 앎과 판단과 실행의 총 집결체이다. 말하자면 전장에서의 사령탑이다. 두뇌에서의

상항판단은 신경조직을 타고서 뉴론(Neuron)들의 눈부신 활동으로 인해 모든 계획과 작전과

책략들이 수행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긴박한 상항에서는 두뇌는 국부의 신경조직에다 자율의 판단과

행동을 일임하는 것이다. 즉 자율신경의 “조건반사”라고 말하는 일이 몸 안에서 벌어진다. 만일에

무의식 중에 매우 뜨거운 물체에 손이 닿은 경우에 두뇌의 판단과 명령과정이 없이 즉각 손을 그

뜨거운 물체로부터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조건반사라고 부른다. 긴급한

상항에서는 두뇌의 사전의 책략이나 명령계통을 통하지 않고 국부신경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여서

의사가 결정되고 집행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인 소우주에 대한 상세한 인식이야말로 우리들의

인생 전체를 건강하고 평화롭게 영위케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어질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덕스러워야 한다. 인간은 삼라만상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많은 종교적인 또 도덕적인 가르침이 있다. 살인하지 말라, 부모님을 공경하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 등의 윤리강령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어진 마음은 부모에게 효도하는데서 나온다. 이렇게 공자님은 가르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예수는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겼다. 생노병사가 다 고통인데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서 보살들의 자비가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세상소리를 듣다못해

그 고통의 소리를 본다고 하는 관세음보살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수 천 년간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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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 있었는데도 우리의 사회에서는 끔찍한 살인행위가 횡행하고 거짓을 참된 것으로 위장하고

무슨 일에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서만 생각하는 풍조들이 늘어만 간다. 이 모든 부도덕하고

불합리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자기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무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 과연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소우주로의 여행은 내가 내 자신을 이해하고 교훈시키는 기본적인 교과과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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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뇌파의 신비 (The Mystery of Brainwave)

17세기 프랑스의 대사상가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와 거의 동시대 사람인 파스칼(Blaise Pascal)은

“생각(Pensee)”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 책에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쓰러진 나무나

파괴된 집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비참함을

안다.” 1775년 11월 1일 포르투갈의 리스본 앞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강력한 쓰나미는 리스본을

거의 초토화 시켜 버렸다. 팔순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방문했던 프랑스의 대문호

볼테에르(Voltaire)는 그 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당신의 권능은 위대하오며 자연의 힘은 굉대 합니다. 이 엄청난 파멸 앞에 서 있는 인간은 한낮 작은

원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는 원자입니다. 그래서 슬퍼하고 비참함을 느낍니다.”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자유로운 정신….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것이다.

그러면 오직 인간에게서만 가능한 생각하는 기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소우주인 우리의 몸

안의 각종 내장기관들의 신비함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길이 없다. 내 몸 속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존재한다. 매일같이 그들은 나에게 삶의 용기와 믿음의 확신과 사랑의 부드러움을 가르쳐준다.

그렇게 하기를 칠십 여 년 동안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우주인 우리의 몸에서 가장 신비스런 기관이

두뇌인 것이다. 그런데 뇌의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서는 미세한 전류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몸 어디에선가 전기를 생산해내서는 약 100마이크로 볼트의 전기를 뇌에다 공급한다. 이러한 전류는

곧바로 뇌파를 생성해낸다.

뇌는 뇌파의 상태에 따라서 일하는 과정이 다르다. 뇌파의 주파수 범위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베타파(Beta Wave)는 12 – 38Hz 의 범위를 말한다. 이 상태는 우리가 깨어있는 의식이 분명한 때를

의미한다. 모든 정신작용이 가장 활발한 주파수의 범위이다. 알파파(Alpha Wave)는 8 – 12Hz 의

범위를 말한다. 이 상태는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상태로서 흔히 말하는 비몽사몽( )간의 상태를

말한다. 테타파(Theta Wave)는 3 – 8Hz 의 범위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된다.

즉 무의식 세계에서도 무엇인가 의식하는 그러한 상태를 말한다. 델타파(Delta Wave)는 0.2 – 3Hz 의

범위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는 깊이 잠들게 된다. 거의 꿈을 꾸지 아니한다. 이와같은 서로 다른

뇌파의 주파수의 범위를 알게 되면 뇌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고양이는

깨어있는 상태에서 쉽게 잠자는 상태로 변하고 또 잠들었다가도 작은 소음으로 인해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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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뇌파의 주파수 범위는 12 – 15Hz 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깨어있는 상태와 잠자는

상태의 주파수의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 이러한 뇌파의 주파수의 범위는 한 평생 동안에 우리의

두뇌의 활동의 범위를 지정하게 된다. 그런데 뇌파의 주파수의 범위를 우리가 임의로 변경시킬 수가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지는 아니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자유의지” 또는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할지라도 네 가지의 뇌파의 주파수의 범위는 이미 고정되어 있다. 다만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한가지의 주파수의 범위를 시간적으로 연장할 수는 있다. 의지의 결단으로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어떤 일에 골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알파파의

현상이나 테타파의 현상을 베타파의 경우로 바꿀 수는 없다. 열심히 일을 하고 난 다음에 피곤이

몰려오면 우리는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 대부분 자유의지에 의하여서 베타파의 상태를 오래

연장시키고 나면 알파파나 테타파의 현상을 뛰어 넘어서 델타파의 현상에 들어가 깊은 수면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잠자는 동안에는 몸 안의 각종 내장기관들이

쉴 수가 있다. 뇌가 의식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을 때에 아무런 명령하달이 없으므로 기관들은 이때에

쉰다. 그러나 심장과 폐는 그대로 활동을 계속한다. 뇌파가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베타파의 주파수에

이르면 몸 안에서는 20,000 개의 작고 큰 기능들이 한꺼번에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 중에 어느

작은 한 기능이 쉼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에는 몸의 어느 부분에 마비가 오든가 통증이 생겨나게

된다. 아침에 단 잠에서 깨어나서 기지개를 펴는 그 순간이 바로 기적 중에 기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뇌파의 주파수의 변동으로 인하여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깨어나면서

칠십 평생 동안 뇌파의 정상적인 주파수 전환의 기능에 크게 감사한다. 범사에 감사한다고 하는 뜻은

이러한 내 몸 곧 소우주에 대한 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가 나에게 새롭게 허락된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일어나자마자 몸을 씻는다. 깨끗이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베타파의 주파수에서 나의 뇌의 인식이 더 청명하고 활발하게 되기를 원하는 심정에서 찬 물을 몸에

끼얹는다. 내 몸 속의 모든 기관들이 뇌의 명령하달을 기다리면서 오늘 하루의 업무에 준비태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에 뇌파의 주파수의 변동이 일어나지 않고 델타파의 주파수에 머문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식불명의 상태(coma)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한 상태로 몇 년 동안 누어서 잠자고

있는 나의 친구가 있다. 그는 눈이 많이 온 어느 겨울날 교회 앞에서 어린아이들과 눈쌈을 하였다.

그러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머리를 땅에 부딪쳤다. 그 즉시로 그는 의식을 잃고 쓸어졌다. 병원에

실려가서도 깨어나지 못하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7년 동안 그러한 상태로 집에 누워만 있는 것이다.

집안식구들이 식물인간이 된 그를 7년간 돌보고 있다. 무의식 중에서도 음식은 먹는다. 그리고 누운

채로 배설한다. 물리적인 생물학적인 몸의 기능은 유지가 되나 두뇌의 기능은 정지된 상태이다. 즉

뇌파의 주파수 범위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델타파 – 테타파 – 알파파 – 베타파 등으로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델타파에 머물고 있는 상태로 7년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겨울잠을

자고 있는 냉혈동물과 같은 자연스런 잠자는 상태도 아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그러한 상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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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심장도 작동하고 폐도 활동하여 호흡도 한다. 그리고

내장기관도 제대로 일을 한다. 다만 뇌파의 주파수 변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상태인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가 언젠가는 의식을 회복하고 깨어나기를 희망한다.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살아있는 그를

죽은 자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7년간 하루도 그가 깨어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간호하고 있다.

우리가 깨어있는 베타파의 주파수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하였다. 그 동안에 베타파의 주파수대에서만 우리는 의식을 가지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가 있다. 그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베타파의 주파수대에서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과 연결이 된다. 나태한 인생,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고양이의

주파수대에 불과한 그러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자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고 또

의식 중에 집중력도 없이 잠시 깨어있다는 또 졸고 잠드는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이러한 나태한 게으른 습관을 바로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나의 뇌파가 지금

어느 주파수대에 있는가를 항상 되새겨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베타파의 주파수대에 있음을 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시간에 집중하고 무엇인가 창의성이 있는 생각을 하는 습관을 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인생은 무의식상태에 누어있는 경우와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네크로포로스(Necrophorus)와 바이오포러스(Biophorus)를 철저히 구별하였다. 살아서

움직이기는 하나 죽은 상태로 있는 경우가 네크로포로스이다. 그리고 생동하는 활동하는 상태로 있는

경우를 바이오포로스라고 이해하였다. 뇌파의 주파수대에 관한 철저한 인식이 절실히 필요함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터득하였다. 우리의 두뇌에는 엄청난 용량의 기억장치가 있다. 그리고 용량이 차게 되면

자동으로 용량이 늘어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의 두뇌는 계속하여 계발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늙어서 치매현상을 겪게 되는 사람은 대부분 뇌파의 주파수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뇌가 언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살아는

있으나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인 네크로포로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뇌파의 신비는 우리들의 삶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신비스런 보람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뇌파의 주파수대의

현상에 민감하고 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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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추억의 본향 (The Home of Reminiscence)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인간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정서는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데 기억의 세계

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정서는 추억( : Reminiscence)이다. 우리가 삶의 피곤함 속에서도

선을 베풀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게 되면 그에 대한 기억은 추억으로 남는다. 평생 우리가 가까이 하

고 읽어야 할 책은 두 권이다. 이 두 책은 너무나 방대한 진리의 집대성이다. 하나는 “자연(Natura

naturans)”이라는 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역사(Historia mundi)”라는 책이다. 자연은 우리가 발걸음을

통하여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여행을 해야만 한다. 역사라는 책은 고고학을 통하여서 읽을 수가 있다.

지나간 삶에 대하여 그 흔적을 더듬는 일이 간단한 책 한 권으로 끝나는 일이겠는가? 우리가 이 세

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지구촌의 곳곳을 두루 여행 다니면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읽어볼 수가 있

는 것이다. 또 역사라는 책은 우리가 지난날의 일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회상하기 위하여서 아주 오래

된 과거사를 고고학을 통하여서 접하게 되는 것이다. 참다운 의미의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

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여 얻은 방대한 지식을 그 자체로서만 기억하고 저장해 두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구조와 의미가 우리들의 두뇌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회상과 추억이라는 정

서가 있다. 그것은 자료들을 수집해 놓은 도서관과 박물관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자료수집에서는 잊혀

지지 아니하는 감동적인 회상이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분위기는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연구를 통

하여서 나름대로 지난날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판단하고 느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추억과 같은 것은

아니다. 추억이란 내가 체험하고 겪은 내용들로 엮어진 기억의 총체를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추억의

본향은 어디인가? 분명 추억의 본향은 우리들의 몸 속에 있을 것이다. 그것도 기억장치가 집결된 두

뇌에 있을 것이다. 기억장치가 집결된 두뇌의 부분은 “대뇌피질(Cortex)”이라고 한다. 2 – 4 밀리미터의

두께의 판형이 불균형하게 접혀져서 마치도 호두처럼 되어 있는 세포조직을 말한다. 여기에는 기억의

용량을 담은 세포들이 응집되어 있다. 여성의 경우 1900억개의 세포들이 모여있고, 남성의 경우에는

2200억개의 세포들이 모여있다. 대뇌피질의 기억의 용량은 사용하면 할수록 계속하여 늘어난다. 여성

의 경우와 남성의 경우의 세포의 양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정서적으로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여

성의 대뇌피질의 세포수가 남성의 경우보다 적은 반면에 그 세포조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정서에 민

감하다. 그것이 여성과 남성의 정서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는 하루에도 깨어서 활동하는 동안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정보들을 대뇌피질에 저장하게 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도 모두 다 기억

이 된다. 컴퓨터 칩에 비교한다면 아무런 기능이 담겨져 있지 아니한 비어있는 메모리 칩에다 어떤

정보도 다 담을 수 있는 그러한 반도체 칩이 있는가 하면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같은 기능이 미리 담

겨져 있고 지우거나 변경이 불가능하도록 미리 지정된 메모리 칩도 있다. 그래픽 칩이나 사운드 칩과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의 두뇌도 그와 유사하다. 아니 컴퓨터 칩이 우리의 두뇌로부터 모방

하였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상 깊은 사건 자주 회상되는 일 등은 별도로 입체적으로 저장해

두는 장소가 대뇌피질의 중앙지대에 두 개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아래의 그림에서 왼쪽에 붉은 부분

으로 표시된 장소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다에 생존하는 해마(Hippocampus)처럼 생겼다. 오른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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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왼쪽은 대뇌피질 속에 있는 “해마세포기관”이고 그 오른쪽에는 바다에 서식하는 해마의 모습니다.

너무도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두뇌에 있는 것도 “해마(Hippocampus)”라고 부른다. 우리가 일상생활

에서 겪는 좋은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나 줄곧 회상이 되는 일들은 대뇌피질의 기억장치로부터 복제

되어서 “해마”에 별도로 수록된다. 그런데 이때에 놀라운 것은 우리의 5대 감각기관이 감지한 모든

것을 하나도 누락됨이 없이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적인 그리고 청각적인 정보는 물론 냄새,

맛, 촉감 등을 통한 정보도 다 수록된다. 회상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해마의 크기가 커지면서 더 많

은 정보를 담을 수 있도록 그 용량이 늘어난다. 우리들의 “추억의 본향”은 다름아닌 “해마”인 것이다.

통상적인 또는 일반적인 기억들은 거의 모두가 다 우리 몸 안의 유전인자(DNA)에 상속정보로 기록된

다. 그래서 후세에게로 전수된다. 흔히 혈통이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한다. 학자의 혈통에서 학자가

나온다. 예술가의 혈통에서 예술가가 나온다. 사업가의 혈통에서 사업가가 나온다. 이렇게들 표현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가 인생에서 기억한 많은 사건과 정보들이 후손에게로 전수가 되는 것

이다. 이는 유전인자(DNA)에 수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억의 본향인 “해마”에 기록된 정보들은 몸

안의 유전인자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영혼에 기록되는 것이다. 추억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

분 인생을 아름답게 영위한 사람들이다. 회상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대뇌피질에 수록된 정보들이

“해마”에게로 복제된 것이다. 유전인자(DNA)가 대뇌피질(Cortex)에 수록된 정보들의 백업폴더(Backup

Folder)라고 한다면 영혼은 “해마”에 수록된 아름다운 추억의 정보들의 백업폴더(Backup Folder)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들의 몸의 수명이 끝나서 죽음으로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게 되면 “해마”에

수록된 아름다운 정보들이 영혼이라는 폴더에 수록된 채 영혼들의 모이는 장소로 가게 될 것이다. 추

억의 빈곤은 곧 영혼의 빈곤과 연결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언명령처럼 생각해야 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쌓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물건들과의 만남에서 그리고 일들과의 만남에서 우리

는 인상 깊고 아름다운 정서를 마음껏 추구해야 할 것이다. 베타파의 주파수대의 범위에서 우리는 이

러한 일들을 이룩하는데에 부지런해야 하고 또 열심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얻은 모든

재산을 다 놓고 떠난다. 어느것 하나 가지고 갈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해마”에 담긴 추억의 정보들이다. 이는 영혼이란 추억을 담긴

“해마”의 백업폴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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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종교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 내세에 관한 우리

들의 소원이 가장 많이 반영되는 경우가 종교생활에서이다. 그런데 과연 영혼의 구원이 우리들의 알

고 있는 그런 것이겠는가? 기독교에서 여러 분파의 가르침에서 서로 옳다고 토론하는 구원관과 영혼

의 구원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또 그런 방법으로 구원된 영혼이 지상에서의 모든 탐욕과 권모술

수를 담아 가지고 천국에 이른다면 그 천국은 삽시간에 다시 지옥으로 변할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 영국영에다 거액의 비자금을 예치해 놓았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네들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라고 한 것일 것이다.

또 그네들이 독실한 종교인일 수도 있다. 영혼의 구원을 스스로 외치고 또 그렇게 투철하게 믿는 사

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게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영혼은 구원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영혼에게 무슨 구원되는 상태가 따로 있겠는가? 영혼은 추억의 본향인 “해마”의 백업파일폴더

일 뿐이다. 죽음의 순간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에 영혼은 “해마”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추억들

을 가지고 떠나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추억의 정보를 담은 영혼….. 그러

한 영혼들의 모임을 한번 생각해보라. 얼마나 감격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만이 전개되는 모임이겠

는가? 시편에는 “의인들의 회중”이라는 말이 보였다. 엄밀히로는 에녹서에 제일 처음에 거론된 개념이

다. 정말로 의인들이 모이는 회중이 있다. 그것이 곧 “해마”의 추억정보를 담은 영혼들의 모임인 것이

다. 그 이상의 의인들이 이 세상에 어디에 더 있겠는가? 아름다운 추억만을 지닌 사람들이 의인이 아

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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