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18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 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 이 한마디 말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합니까. ? ?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쥘 르나르의 글 뱀 이 답입니다 . 세상에서 제일 짧은 시 형태가 일본의 하이쿠인데 류시화 시인이 번역출간한 책 의 제목이 한줄도 너무 길다 더군요. 시는 어떻게는 짧게 압축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받아 적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자니 자연 효과적인 표현 수단으로 은유나 상징 따위를 채용할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면 글씨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 , ) 그러나 효과적인 표현 수단이라고 해서 고안해낸 수사법이 소통에 장애를 가져온 다면 그건 문제지요 요즘 시가 무슨 수수께끼마냥 암호문서마냥 어렵다고들 합니 . 그러나 시가 그렇게 어렵기만 한 것일까요 . ? 시란 무엇인가요 이것은 초보자들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전문적인 시인들이 자 ? 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던져야할 질문입니다. 어찌 보면 간단할 것 같은 이 질문에 대해 짧은 시간에 속 시원한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시에 관해 효과적으로 설명해놓은 게 있나 싶어서 시를 잘 아 . 는 유종호 교수가 지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놓고 목차를 살펴보 니 정작 시란 무엇인가 라는 소제목은 없고 일탈의 시학 수수께끼의 시학 그늘의 시학 시와 은유 시의 정치적 전언 말의 힘 따위의 항목만 보입니다 . 갑갑하지요. 내가 좋은 작품이라고 마음에 두고 있는 묵화 라는 시를 한번 들어볼래요?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 - 어때요 쉽지요 좋은 시란 이런 겁니다 그런데 무슨 암호문자처럼 시를 쓰는 ? ? . 사람들이 있어요 글자는 우리 글자인데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시가 있어요 한두 . . 번 읽어봐도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 시는 덮으면 그만입니다.

Upload: lamnhu

Post on 05-Mar-2018

229 views

Category:

Documents


6 download

TRANSCRIPT

Page 1: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

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 lsquo rsquo이 한마디 말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합니까

끈 줄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쥘 르나르의 글 뱀 이 답입니다 lsquo rsquo

세상에서 제일 짧은 시 형태가 일본의 하이쿠인데 류시화 시인이 번역출간한 책

의 제목이 한줄도 너무 길다 더군요985172 985173시는 어떻게는 짧게 압축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받아 적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자니 자연 효과적인 표현 수단으로 은유나 상징 따위를 채용할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면 글씨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ldquo rdquo)그러나 효과적인 표현 수단이라고 해서 고안해낸 수사법이 소통에 장애를 가져온

다면 그건 문제지요 요즘 시가 무슨 수수께끼마냥 암호문서마냥 어렵다고들 합니

다 그러나 시가 그렇게 어렵기만 한 것일까요

시란 무엇인가요 이것은 초보자들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전문적인 시인들이 자

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던져야할 질문입니다

어찌 보면 간단할 것 같은 이 질문에 대해 짧은 시간에 속 시원한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시에 관해 효과적으로 설명해놓은 게 있나 싶어서 시를 잘 아

는 유종호 교수가 지은 시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놓고 목차를 살펴보985172 985173니 정작 시란 무엇인가 라는 소제목은 없고 일탈의 시학 수수께끼의 시학 그늘의 lsquo rsquo lsquo rsquo lsquo rsquo lsquo시학 시와 은유 시의 정치적 전언 말의 힘 따위의 항목만 보입니다rsquo lsquo rsquo lsquo rsquo lsquo rsquo

갑갑하지요

내가 좋은 작품이라고 마음에 두고 있는 묵화 라는 시를 한번 들어볼래요 「 」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 - 「 」

어때요 쉽지요 좋은 시란 이런 겁니다 그런데 무슨 암호문자처럼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글자는 우리 글자인데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시가 있어요 한두

번 읽어봐도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 시는 덮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쉬운 시를 쓰기가 더 어렵거든요 지금 읽은 이 시가 쉽게 읽히지

만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시가 아니잖아요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動天地感鬼神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비로소 시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시는 할머니

가 말 못하는 짐승과 교감을 하고 있어요 이런 걸 아무나 할 수 있는 건가요

틱 낫한이라는 생불 같은 스님이 있습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마리온 팁이라

는 제자가 이런 시를 썼어요

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민들레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마리온 팁의 민들레의 시 - 「 」

잃어버린 기쁨을 민들레에게서 찾을 수 있다면 사정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틱 낫한은 말합니다 이와는 좀 다른 번역이 있기는 합니다 마는 ( )

짧은 시 가운데 좋은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편 더 들어 보실래요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고은의 비로소 - 「 」

호수 가 나무들 사이에 조그만 집 한 채

그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이 연기가 없다면

집과 나무들과 호수가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기 - 「 」

이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

낼 수 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한 시간의 이야기 거리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

늘은 강연 제목에서 너무 멀리 가지 맙시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시를 쓴 시인한테도 누가 시란 무엇인가 하고 물어봤나 봅 lsquo rsquo 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시는 뜬구름 잡는 신선놀음이 아니라 저잣거리 시장골목에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어떤 젊은 시인은 또 시를 이렇게 말합니다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이정록의 시 - 「 」

시를 두고 업은 애기 삼년 찾기라고 한다면 시를 바로 곁에다 두고도 모른다는 lsquo rsquo얘기가 되겠지요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 lsquo사라는 엘리어트의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줍니다 이 말은 시대에 따라서 시인에 rsquo

따라서 시를 보는 안목이 모두 다름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

적인 선에서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있어요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 ldquo rdquo시란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유기적 구조를 지닌 운율적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문 ldquo

학의 한 갈래이다rdquo 어때요 이만 하면 시가 뭔지 이해가 가나요

시의 개념을 머리로 이해했을지는 몰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

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말고 정서적으로 친근하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시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고 가슴의 언어예요 그렇다면 시에 관한

정의는 부질없는 짓이고 더구나 시를 창작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시의 정의에 매달리느니 좋은 시 한 편 읽는 게 낫습니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습니다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ldquo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년이 넘게 시를 써왔으면서rdquo 40

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시

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lsquo rsquo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

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지요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에 이런 게 있어요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쓸쓸한 흰 바람벽에

희미한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十五燭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

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lsquo rsquo lsquo rsquo陶淵明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 」

시인은 흰 바람벽이 있는 방안에 혼자 앉아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 적고 있습니다 무언가 가슴에 전해져 오는 슬픔 같은 것이 여러분도 느껴지

나요 백석의 생각으로는 시인은 운명적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 ldquo가도록 태어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뜬구름이나 타고 다니는 신선은 아닙니rdquo

다 고고한 척하고 고답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이웃이고 생활

인입니다

나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의 시인 정희성으로 소개되고는 합니다 이 작품은 985172 985173말하자면 내 신분증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70

년대말의 작품이지요 삽 이라는 단어가 산업화시대의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의 정 lsquo rsquo서를 건드려주는 뭔가가 있었을 터입니다 어쩌면 삽 이라는 어휘가 문학작품에서 lsquo rsquo시의성에 맞게 가장 성공적으로 쓰인 예의 하나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 」

시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또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

지요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 ldquo rdquo합니다 년이나 시를 써왔으면서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 40

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lsquo rsquo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습니다

말이 곧 절이 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를찾아서 - 詩「 」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

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어트

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라고 말합니다ldquo rdquo

예술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시는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당시의 관

념으로는 도저히 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와서 얼마가 지나면 버젓이 시로

행세하게 됩니다 엘리어트의 시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지요

나는 년대부터 시를 써왔습니다 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산업화와 민주화는 70 70

내 시적 생애에서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 45

만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인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하고 있

지 않은가요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 과 김정례2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ldquo rdquo방 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김해자 승천 - 「 」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

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지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다보니 나의 시는 사회성이 강

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언어는 거칠어져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ldquo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2: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그런데 사실은 쉬운 시를 쓰기가 더 어렵거든요 지금 읽은 이 시가 쉽게 읽히지

만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시가 아니잖아요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動天地感鬼神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비로소 시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시는 할머니

가 말 못하는 짐승과 교감을 하고 있어요 이런 걸 아무나 할 수 있는 건가요

틱 낫한이라는 생불 같은 스님이 있습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마리온 팁이라

는 제자가 이런 시를 썼어요

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민들레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마리온 팁의 민들레의 시 - 「 」

잃어버린 기쁨을 민들레에게서 찾을 수 있다면 사정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틱 낫한은 말합니다 이와는 좀 다른 번역이 있기는 합니다 마는 ( )

짧은 시 가운데 좋은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편 더 들어 보실래요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고은의 비로소 - 「 」

호수 가 나무들 사이에 조그만 집 한 채

그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이 연기가 없다면

집과 나무들과 호수가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기 - 「 」

이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

낼 수 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한 시간의 이야기 거리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

늘은 강연 제목에서 너무 멀리 가지 맙시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시를 쓴 시인한테도 누가 시란 무엇인가 하고 물어봤나 봅 lsquo rsquo 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시는 뜬구름 잡는 신선놀음이 아니라 저잣거리 시장골목에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어떤 젊은 시인은 또 시를 이렇게 말합니다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이정록의 시 - 「 」

시를 두고 업은 애기 삼년 찾기라고 한다면 시를 바로 곁에다 두고도 모른다는 lsquo rsquo얘기가 되겠지요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 lsquo사라는 엘리어트의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줍니다 이 말은 시대에 따라서 시인에 rsquo

따라서 시를 보는 안목이 모두 다름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

적인 선에서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있어요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 ldquo rdquo시란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유기적 구조를 지닌 운율적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문 ldquo

학의 한 갈래이다rdquo 어때요 이만 하면 시가 뭔지 이해가 가나요

시의 개념을 머리로 이해했을지는 몰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

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말고 정서적으로 친근하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시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고 가슴의 언어예요 그렇다면 시에 관한

정의는 부질없는 짓이고 더구나 시를 창작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시의 정의에 매달리느니 좋은 시 한 편 읽는 게 낫습니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습니다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ldquo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년이 넘게 시를 써왔으면서rdquo 40

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시

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lsquo rsquo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

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지요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에 이런 게 있어요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쓸쓸한 흰 바람벽에

희미한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十五燭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

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lsquo rsquo lsquo rsquo陶淵明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 」

시인은 흰 바람벽이 있는 방안에 혼자 앉아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 적고 있습니다 무언가 가슴에 전해져 오는 슬픔 같은 것이 여러분도 느껴지

나요 백석의 생각으로는 시인은 운명적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 ldquo가도록 태어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뜬구름이나 타고 다니는 신선은 아닙니rdquo

다 고고한 척하고 고답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이웃이고 생활

인입니다

나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의 시인 정희성으로 소개되고는 합니다 이 작품은 985172 985173말하자면 내 신분증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70

년대말의 작품이지요 삽 이라는 단어가 산업화시대의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의 정 lsquo rsquo서를 건드려주는 뭔가가 있었을 터입니다 어쩌면 삽 이라는 어휘가 문학작품에서 lsquo rsquo시의성에 맞게 가장 성공적으로 쓰인 예의 하나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 」

시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또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

지요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 ldquo rdquo합니다 년이나 시를 써왔으면서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 40

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lsquo rsquo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습니다

말이 곧 절이 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를찾아서 - 詩「 」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

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어트

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라고 말합니다ldquo rdquo

예술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시는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당시의 관

념으로는 도저히 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와서 얼마가 지나면 버젓이 시로

행세하게 됩니다 엘리어트의 시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지요

나는 년대부터 시를 써왔습니다 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산업화와 민주화는 70 70

내 시적 생애에서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 45

만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인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하고 있

지 않은가요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 과 김정례2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ldquo rdquo방 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김해자 승천 - 「 」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

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지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다보니 나의 시는 사회성이 강

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언어는 거칠어져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ldquo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3: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시는 뜬구름 잡는 신선놀음이 아니라 저잣거리 시장골목에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어떤 젊은 시인은 또 시를 이렇게 말합니다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이정록의 시 - 「 」

시를 두고 업은 애기 삼년 찾기라고 한다면 시를 바로 곁에다 두고도 모른다는 lsquo rsquo얘기가 되겠지요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 lsquo사라는 엘리어트의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줍니다 이 말은 시대에 따라서 시인에 rsquo

따라서 시를 보는 안목이 모두 다름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

적인 선에서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있어요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 ldquo rdquo시란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유기적 구조를 지닌 운율적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문 ldquo

학의 한 갈래이다rdquo 어때요 이만 하면 시가 뭔지 이해가 가나요

시의 개념을 머리로 이해했을지는 몰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

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말고 정서적으로 친근하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시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고 가슴의 언어예요 그렇다면 시에 관한

정의는 부질없는 짓이고 더구나 시를 창작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시의 정의에 매달리느니 좋은 시 한 편 읽는 게 낫습니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습니다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ldquo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년이 넘게 시를 써왔으면서rdquo 40

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시

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lsquo rsquo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

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지요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에 이런 게 있어요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쓸쓸한 흰 바람벽에

희미한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十五燭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

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lsquo rsquo lsquo rsquo陶淵明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 」

시인은 흰 바람벽이 있는 방안에 혼자 앉아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 적고 있습니다 무언가 가슴에 전해져 오는 슬픔 같은 것이 여러분도 느껴지

나요 백석의 생각으로는 시인은 운명적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 ldquo가도록 태어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뜬구름이나 타고 다니는 신선은 아닙니rdquo

다 고고한 척하고 고답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이웃이고 생활

인입니다

나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의 시인 정희성으로 소개되고는 합니다 이 작품은 985172 985173말하자면 내 신분증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70

년대말의 작품이지요 삽 이라는 단어가 산업화시대의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의 정 lsquo rsquo서를 건드려주는 뭔가가 있었을 터입니다 어쩌면 삽 이라는 어휘가 문학작품에서 lsquo rsquo시의성에 맞게 가장 성공적으로 쓰인 예의 하나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 」

시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또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

지요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 ldquo rdquo합니다 년이나 시를 써왔으면서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 40

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lsquo rsquo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습니다

말이 곧 절이 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를찾아서 - 詩「 」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

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어트

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라고 말합니다ldquo rdquo

예술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시는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당시의 관

념으로는 도저히 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와서 얼마가 지나면 버젓이 시로

행세하게 됩니다 엘리어트의 시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지요

나는 년대부터 시를 써왔습니다 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산업화와 민주화는 70 70

내 시적 생애에서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 45

만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인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하고 있

지 않은가요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 과 김정례2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ldquo rdquo방 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김해자 승천 - 「 」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

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지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다보니 나의 시는 사회성이 강

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언어는 거칠어져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ldquo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4: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

적인 선에서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있어요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 ldquo rdquo시란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유기적 구조를 지닌 운율적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문 ldquo

학의 한 갈래이다rdquo 어때요 이만 하면 시가 뭔지 이해가 가나요

시의 개념을 머리로 이해했을지는 몰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

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말고 정서적으로 친근하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시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고 가슴의 언어예요 그렇다면 시에 관한

정의는 부질없는 짓이고 더구나 시를 창작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시의 정의에 매달리느니 좋은 시 한 편 읽는 게 낫습니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습니다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ldquo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년이 넘게 시를 써왔으면서rdquo 40

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시

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lsquo rsquo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

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지요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에 이런 게 있어요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쓸쓸한 흰 바람벽에

희미한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十五燭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

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lsquo rsquo lsquo rsquo陶淵明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 」

시인은 흰 바람벽이 있는 방안에 혼자 앉아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 적고 있습니다 무언가 가슴에 전해져 오는 슬픔 같은 것이 여러분도 느껴지

나요 백석의 생각으로는 시인은 운명적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 ldquo가도록 태어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뜬구름이나 타고 다니는 신선은 아닙니rdquo

다 고고한 척하고 고답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이웃이고 생활

인입니다

나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의 시인 정희성으로 소개되고는 합니다 이 작품은 985172 985173말하자면 내 신분증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70

년대말의 작품이지요 삽 이라는 단어가 산업화시대의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의 정 lsquo rsquo서를 건드려주는 뭔가가 있었을 터입니다 어쩌면 삽 이라는 어휘가 문학작품에서 lsquo rsquo시의성에 맞게 가장 성공적으로 쓰인 예의 하나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 」

시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또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

지요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 ldquo rdquo합니다 년이나 시를 써왔으면서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 40

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lsquo rsquo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습니다

말이 곧 절이 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를찾아서 - 詩「 」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

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어트

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라고 말합니다ldquo rdquo

예술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시는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당시의 관

념으로는 도저히 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와서 얼마가 지나면 버젓이 시로

행세하게 됩니다 엘리어트의 시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지요

나는 년대부터 시를 써왔습니다 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산업화와 민주화는 70 70

내 시적 생애에서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 45

만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인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하고 있

지 않은가요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 과 김정례2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ldquo rdquo방 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김해자 승천 - 「 」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

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지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다보니 나의 시는 사회성이 강

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언어는 거칠어져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ldquo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5: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

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lsquo rsquo lsquo rsquo陶淵明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 」

시인은 흰 바람벽이 있는 방안에 혼자 앉아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 적고 있습니다 무언가 가슴에 전해져 오는 슬픔 같은 것이 여러분도 느껴지

나요 백석의 생각으로는 시인은 운명적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 ldquo가도록 태어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뜬구름이나 타고 다니는 신선은 아닙니rdquo

다 고고한 척하고 고답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이웃이고 생활

인입니다

나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의 시인 정희성으로 소개되고는 합니다 이 작품은 985172 985173말하자면 내 신분증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70

년대말의 작품이지요 삽 이라는 단어가 산업화시대의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의 정 lsquo rsquo서를 건드려주는 뭔가가 있었을 터입니다 어쩌면 삽 이라는 어휘가 문학작품에서 lsquo rsquo시의성에 맞게 가장 성공적으로 쓰인 예의 하나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 」

시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또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

지요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 ldquo rdquo합니다 년이나 시를 써왔으면서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 40

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lsquo rsquo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습니다

말이 곧 절이 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를찾아서 - 詩「 」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

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어트

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라고 말합니다ldquo rdquo

예술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시는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당시의 관

념으로는 도저히 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와서 얼마가 지나면 버젓이 시로

행세하게 됩니다 엘리어트의 시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지요

나는 년대부터 시를 써왔습니다 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산업화와 민주화는 70 70

내 시적 생애에서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 45

만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인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하고 있

지 않은가요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 과 김정례2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ldquo rdquo방 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김해자 승천 - 「 」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

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지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다보니 나의 시는 사회성이 강

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언어는 거칠어져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ldquo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6: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 」

시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또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

지요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 이라고 말 ldquo rdquo합니다 년이나 시를 써왔으면서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 40

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에 허기져있지요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lsquo rsquo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습니다

말이 곧 절이 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를찾아서 - 詩「 」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지

요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수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어트

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라고 말합니다ldquo rdquo

예술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시는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당시의 관

념으로는 도저히 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와서 얼마가 지나면 버젓이 시로

행세하게 됩니다 엘리어트의 시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지요

나는 년대부터 시를 써왔습니다 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산업화와 민주화는 70 70

내 시적 생애에서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 45

만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인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하고 있

지 않은가요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 과 김정례2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ldquo rdquo방 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김해자 승천 - 「 」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

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지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다보니 나의 시는 사회성이 강

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언어는 거칠어져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ldquo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7: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예술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시는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당시의 관

념으로는 도저히 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와서 얼마가 지나면 버젓이 시로

행세하게 됩니다 엘리어트의 시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지요

나는 년대부터 시를 써왔습니다 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산업화와 민주화는 70 70

내 시적 생애에서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 45

만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인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하고 있

지 않은가요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 과 김정례2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ldquo rdquo방 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김해자 승천 - 「 」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

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지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다보니 나의 시는 사회성이 강

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언어는 거칠어져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ldquo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8: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

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

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dquo나는 첫 고백 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습니다 「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첫 고백- 「 」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lsquo rsquo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어요 분노

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

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

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년이다 2001

여러해 전에 작가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초청해 이야 ldquo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세상이 자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rdquo지금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 lsquo rsquo lsquo rsquo이 어떤 걸까요 공자가 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lsquo rsquo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思無邪

가 어린애 같은 마음 아닐까요lsquo rsquo

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 버리고 심지어는 좋은 시를 써 lsquo rsquo 思無邪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천의무 hellip봉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제주 올레 코스를 걷다가 법정의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왔습니 5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9: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 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법정 존재의 집 - 「 」

어린애가 하는 말이 다 시 같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나도 그런 걸 느낀 적

이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hellip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민지의 꽃 - 「 」

어린애 마음이라 hellip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 」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0: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나는 보아 뱀 한 마리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ldquo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아니 모자가 뭐가 무서워 lsquo rsquo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뱀의 속을 그

렸어요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니 까요 rdquo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보아 뱀의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산수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어른 middot middot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설명을 해 주어야 하

니까 어린애인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어요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이다 어른

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해 lsquo rsquo보일 것입니다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시의 -

몫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조선조 년 동안 국화는 늘 지조 절개였습니다 500 lsquo rsquo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것이 년대 서정주를 만나면서 이미지가 갱신된다 19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 」

국화는 더 이상 관념적인 지조 절개가 아니고 혈연적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lsquo rsquo lsquo rsquo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1: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누님 의 이미지로 갱신된 것입니다lsquo rsquo

시인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허언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는 전 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무섭지 않은가

요 생명파 시인다운 발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며 국화옆에서 라는 시 lsquo rsquo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

른 풍부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음 시 한편을 읽어봅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 」

우주 만물이 상징과 암호이며 그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임을 알게 합니

다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시인 김명수의 시에 앵무새의 혀 라는 작품이 있습니 「 」다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두보가 라고 한 말 ldquo rdquo語不驚人 雖死不休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2: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하 lsquo기를 통해 시인들은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rsquo을 다 하지요

여기 전통적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박상순의 은 나무 은 6 7「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년(1993 )라는 시다 현대시 주년을 맞아 애송시 편을 100 100

가려 소개한 시 가운데 다음 하나를 봅시다

첫 번째는 나

는 자동차 2

은 늑대 는 잠수함 3 4

는 악어 은 나무 은 돌고래 5 6 7

은 비행기 8

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9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는 자동차 은 늑대 2 3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은 비행기 는 코뿔소 8 9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 ldquo

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 rdquo 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ldquo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 rdquo (46)

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는 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와 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 lsquoA Brsquo A B

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lsquo rsquo lsquo rsquo

이 나무이고 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에 혹은 에 마6 7 A B

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3: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 6

무라고 씌어 있고 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 7

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부터 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1 10

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lsquo rsquo ( )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

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 혹은 제도 의 감옥 ( )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

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

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 표지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 ( )

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 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lsquo rsquo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

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 시인 해설 ( )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가

그러나 이 낯설게하기 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 lsquo rsquo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활약하고 있어 lsquo rsquo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전통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 잔뜩 주

눅이 들어 있는 형국입니다 이들의 시는 외계의 언어처럼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평론가 그룹이 있으니 먼저 그중 한 사람 이장욱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

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 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

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

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

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

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

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4: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오감도들 - p46 「 」

낡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갱신해야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시인이

라고 할 때 이장욱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서정의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lsquo rsquo도취한 나머지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기ldquo 19

적 고정관념 이라고 단언하며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rdquo ldquo세계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rdquo

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기법이 소통불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거짓이 개입할 여지마저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有法而無法

일찍이 완당阮堂이 화법ldquo 法畵 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神品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有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dquo

나는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훌륭하게 좋은 시를 써내는 젊은 시인들

몇 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습니다

미래파 운운 하는 그룹들은 이들의 시가 낡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는 이들에게서 한국 시의 미래를 봅니다 그중 몇 편을 읽어 봅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

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5: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풍경의 깊이 - 「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가운데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6: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작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

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

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대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송찬호 가을- 「 」

시인들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 형상 이미지 이 세 가지입니 ( )

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질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

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는 이 세 가지를 년대 중반에서 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1920 1930

따로따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지요 프로문학은 내용성 이념성1920 ( )

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 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입니다 문학사적 1930

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해체에서 출발합니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ldquo민지 권력의 탄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 으로 이rdquo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 에 활기를 불어넣 lsquo rsquo어 시의 음악성을 살려냅니다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 이 ldquo rdquo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의 음악성을 잘 살려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시가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 까닭은 lsquo rsquo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7: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외견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지요 김광균으로 대표

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랑과 김광균은 피 ldquo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 이라는 rdquo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lsquo rsquo lsquo rsquo세 가지 속성 중 의미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lsquo rsquo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혼

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은 이러한 문학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씌어졌다고 할 30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

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 일 lsquo rsquo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에는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애송되는 몇 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고 자료 향수 모닥(

불 나그네 저녁눈 묵화 )

우리는 프로문학파 시문학파 모더니즘계열의 시인 등 세 유파가 비슷한 시기에

따로따로 경험한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을 이제 하나의 작품 속에 아니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총체적으로 구현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나짐 히크멧이

라는 터키의 시인은 진정한 여행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ldquo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rdquo

언어의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구현한 시인은 없는가 아직 없다면 비로 여러분 가운데 좋은 시인이 나

와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나의 말

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은 말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

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엄원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부 - 「 」

---------------------------------------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

Page 18: 시란 무엇인가 - bilf.krbilf.kr/resources/15_4th_jungheesung.pdf · 시란 무엇인가 정희성?수수께끼 하나 내볼까요 ‘’너무 길다.이 한마디 말에서

년 출생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 당선 숭문고등학교 국 1945 1970 ( ) 變身「 」어교사로 년 봉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고문 제 회 김수영문학상 불35 1

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님 시인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 lsquo rsquo

상 구상문학상 등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 ) (1974) (1978) 踏靑『 』 『 』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1991) (2001) 』 『 』 『 』

그리운 나무(2008) 外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