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박연수 3 -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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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하곡학의 근대적 성향 박연수 1 - 37 - Ⅰ. 머리말 Ⅱ. 하곡학의 근대적 성향 1. 주재와 권형으로서 인간주체 2. 주체성의 확립과 정치 3. 발전의 토대로서 주체성 Ⅲ.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1. 자아의 주체성 회복 2. 민족주체성의 보존 3. 주체적 진보와 발전 Ⅳ. 맺음말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박연수* Ⅰ. 머리말 강화(江華)나 인(仁川)을 거하면 호국의 성지요, 근대화의 관문이라는 이오른다. 바로 이 지역에서 주체성의 립을 근본으로 고 근대화를 추구하였 던, 조선 양명학(陽明學)의 두(斗)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를 개 조(開祖)로 는 ‘강화 하곡학파’가 형성되었다. 1) 강화 하곡학파의 동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중으로부터 20세기 초 사이이며, 이는 조선조 기 주자학적(朱子) 성리학(性理學)과 대립하던 ‘실학(學)’이 동하던 17세기 중부터 19세기 말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 학파의 인들은 대체로 개의 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곡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아들 정(鄭)과 그의 사위 이명(李匡明), 그리고 그의 고(高孫) 정문승(鄭文升, 1788 * 사관학교 철학과 교수 1) 박연수, 화 하곡학의 ‘實·實學’(陽明學 제16호, 한국양명학회, 2006. 7.), 121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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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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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Ⅱ. 하곡학의 근대적 성향

    1. 주재와 권형으로서 인간주체

    2. 주체성의 확립과 정치

    3. 발전의 토대로서 주체성

    Ⅲ.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1. 자아의 주체성 회복

    2. 민족주체성의 보존

    3. 주체적 진보와 발전

    Ⅳ. 맺음말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박연수*

    Ⅰ. 머리말

    강화(江華)나 인천(仁川)을 거론하면 호국의 성지요, 근대화의 관문이라는 이미지

    가 떠오른다. 바로 이 지역에서 주체성의 확립을 근본으로 삼고 근대화를 추구하였

    던, 조선 양명학(陽明學)의 태두(泰斗)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를 개

    조(開祖)로 삼는 ‘강화 하곡학파’가 형성되었다.1)

    강화 하곡학파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중엽으로부터 20세기 초 사이이며,

    이는 조선조 후기 주자학적(朱子學的) 성리학(性理學)과 대립하던 ‘실학(實學)’이 활

    동하던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 학파의 인물들은

    대체로 네 개의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하곡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아들 정후일

    (鄭厚一)과 그의 사위 이광명(李匡明), 그리고 그의 고손(高孫) 정문승(鄭文升, 1788

    * 육군사관학교 철학과 교수1) 박연수, 「강화 하곡학파의 ‘實心·實學’」(�陽明學� 제16호, 한국양명학회, 2006. 7.), 121쪽 참고.

  • 2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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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5) 등 그 후손들, ② 전주(全州) 이씨(李氏) 덕천군파(德泉君派) 가문이며 하곡

    의 문인인 이광신(李匡臣, 1700〜1744),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이광려(李匡呂,

    1720〜1783) 형제들과 그 후손들, 즉 이충익(李忠翊, 1744〜1816), 이면백(李勉伯,

    1767〜1830), 이시원(李是遠, 1790〜1866) 등과 이건창(李建昌, 1853〜1898), 이건승

    (李建昇,) 이건방(李建芳, 1861〜1939), ③ 하곡의 손자사위인 완구(宛丘) 신대우(申

    大羽, 1735〜1809)와 그 아들 신작(申綽, 1760〜1828)과 신현(申絢) 등 혈연과 학연

    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④ 하곡의 직·간접적인 문인으로 김택수(金澤秀), 윤순(尹

    淳, 1680〜1740), 심육(沈錥), 이진병(李震炳), 양득중(梁得中, 1665〜1742), 이덕윤

    (李德胤, 1717〜1790), 이종휘(李鍾徽, 1731〜1786), 정동유(鄭東愈, 1744〜1808), 김

    택영(金澤榮, 1850〜1927) 등을 들 수 있다.2)

    강화 하곡학파는 한국 근대사상의 맹아(萌芽)로서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

    (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개신유학(改新儒學)이요, 근대

    지향의식과 민족자주의식을 특징으로 하는 실학(實學)3)과 추향(趨向)을 같이하는 학

    파이다.4) 강화 하곡학파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핵심주제에 따라 분류하면 ① 근대

    지향적 개혁사상으로서의 연구 ② 진실무위(眞實無僞)한 인간을 실현하기 위한 학문

    으로서의 연구 ③ 진정한 자아의 회복과 민족주체의식의 회복을 위한 학문으로서의

    연구 등으로 압축된다.5)

    2) 鄭寅普, 「陽明學演論」(�薝園國學散藁�, 文敎社, 檀紀 4288년 8월), 조선양명학파, 261-291쪽 참고. 劉

    明鍾, �한국의 양명학�, 同和出版社, 1983년 2월, 137-231쪽 참고.

    3) 千寬宇, 「한국실학사상사」(�한국문화사대계� 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70년), 964-967쪽 참고.

    4) 정인보 선생은 조선 근세 학문을 ①성호(星湖) 이익(李瀷)과 농포(農圃) 계열의 학파 ②이이명(李頤

    命), 김만중(金萬重), 홍대용(洪大容) 등이 속한 학파 ③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계열의 학파 등 3

    개 학파로 나누면서, 이들은 한 선생이 가르친 것처럼 추향(趨向)이 같다고 한다.(�薝園國學散藁�,

    문교사, 1955년 8월, 32-33쪽)

    5) 송석준은 노예제도와 불합리한 폐습에 대한 정동유의 비판, 정문승의 농본주의, 허위의식에 대한 이

    충익의 비판 등을 들어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지향적 성격을 말한다.(「한국 양명학의 실학적 전개양

    상」, �儒學硏究� 제3집, 충남대 유학연구소, 1995년 12월, 253-284쪽) 김길락은 주자학자들의 허가

    (虛假)의식과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비판, 실용적인 학문연구, 실용정신과 근로정신의 함양 등을 강

    화학파의 근대지향적 정신이라고 한다.(「한국양명학과 근대정신」, �양명학(陽明學)� 제2호, 한국양명

    학회, 1998년 12월.)

    심경호는 “강화학은 실심(實心), 곧 자기의 진실한 마음에서 인간에 대한 주체적 인식에 도달하고 올

    바른 삶을 살아나갈 것을 주장하였다.”고 하며, “강화학의 지적(知的) 고뇌는 바로 허가(虛假)를 배격

    하고 진실무위(眞實無僞)의 인간형을 수립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강화학의 허가비판론(虛假批判

    論)」, �대동한문학� 제14집, 대동한문학회, 2001년 6월, 38-40쪽 참고)

    박연수는 “강화 하곡학파들의 학문과 삶이란 사적(私的)으로는 허학(虛學)과 가행(假行)으로 인해 상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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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자는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를 통해, 강화 하곡학파의 핵심사상이란 ‘주체성의

    인식 및 실현’과 ‘근대화’이며, 진보와 발전을 의미하는 근대화와 주체성의 인식 및

    실현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논자는 주체성의 확립을 기반으로 진보

    와 발전을 추구했던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지향적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근대(近代modern)’라는 개념은 중세 봉건사회와 구별되는 시대나 사회를 지칭하

    였다.6) 그러다가 ‘근대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지향하고 실현해야 할 시대나 사회를

    지칭하게 되었다. 근대화에 대한 개념 정의는 매우 다양하다.7) 따라서 논자는 기존

    의 주장들을 종합하여 ‘근대화’의 내용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근대화란 자신의 주인으로서 자아의 주체성(主體性identity)을 인식하고 자신

    의 주체적 특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주체성이란 자유, 자주, 자율, 자기동일성, 개성

    의 신장, 자아실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8) 둘째, 근대화란 자기변혁 및 사회개혁

    을 통하여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에 있어서 진보와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근대화란

    물질적 생산력의 향상, 즉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며, 사

    실된 진실한 자아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공적(公的)으로는 쇠퇴한 국력을 회복하고 잊혀진 민족주체

    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었다.”(「강화 하곡학파의 ‘실심(實心)·실학(實學)’」, �陽明學� 제16호, 한국양명

    학회, 2006년 7월, 154쪽)고 한다.

    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대백과�(웅진출판주식회사, 1991년 12월), 卷4, 103쪽 참조.

    7) 근대적 가치와 이상에 관하여, 독일의 철학자 슈퇴릭히는 ① 개인의 존중과 해방을 지향하는 인본주

    의(人本主義) ② 경험과 관찰만을 중요시하는 과학적 학문과 철학 ③ 신앙과 지식의 분리를 주장한

    다.(임석진역, �세계철학사� 하, 분도출판사, 1978년, 15-16쪽) 혹자는 공업화에 의한 자본주의와 시

    민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말한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대백과�, 卷4, 111쪽)

    한편 서구의 근대화에 상응하는 개화(開化)에 대하여, 유길준(兪吉濬)은 “인간의 천사만물(千事萬物)

    이 지선극미(至善極美)한 경역(境域)에 이르는 것”(�西遊見聞�, 제14편 개화의 등급, 1895년)이라고

    하여, 윤리도덕을 포함하여 학술·정치·법률·기계·물품 등 유·무형의 문화 일체가 지고지선(至高

    至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지칭하였다. 황현(黃玹)은 �독립신문�에서 개화란 ‘개물성무(開物成務)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결합어라고 하여(�독립신문(獨立新聞)� 논설, 광무(光武) 2년(1898) 9월 23일

    자) 물질의 개발에 의한 산업의 발전과 국민의 교육계몽에 의한 아름다운 풍속의 성취를 지칭하기도

    했다.

    박종홍은 사상적인 의미에 있어서 봉건적인 구각(舊殼)을 탈피하려는 인간적인 자아각성을 ‘근대’라는

    말의 의미로 파악하고, 첫째, 개인의 존엄성과 평등, 개성과 개인의 의견 존중, 능력에 따른 인재의

    등용 등을 지향하는 민주해방사상, 둘째 무실역행(務實力行) 즉 참다운 인간이 되려고 하는 성실한

    노력, 즉 진실한 마음[實心]으로 진실한 이치[實理]를 궁구하며, 그 이치를 진실로 행하는[實行] 실학

    (實學), 셋째 실질적인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과학기술의 섭취(攝取)와 발전, 넷째 우리의 문물

    에 대한 연구와 민족주체성의 확립 등을 강조하는 사상을 근대사상이라고 한다.(�한국의 사상적 방

    향�, 박영사, 1968년 3월, 11-76쪽)

    8) �한국인의 주체성�, 고려대행동과학연구소편, 고려대학교출판부, 1978. 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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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제도와 규범 등을 합리적으로 개선하여 그 사회의 문화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양명학(陽明學)을 기반으로 하는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지향적(近代指向

    的) 성향, 즉 주체성의 확립과 사회발전을 위한 개선의 방안을 고찰하고자 한 것이

    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같은 변혁의 시대에 공존하던 다른 사상들, 즉 물질의 개발

    과 사회제도 및 의식의 개혁 등 광범한 근대화를 추진한 실학(實學), 외세에 의존하

    여 근대화를 추구했던 개화파(開化派), 그리고 자국의 문화와 윤리도덕을 고수하고

    자 한 보수적인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등과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개

    혁을 외치는 오늘의 시대에 올바른 개혁을 위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Ⅱ. 하곡학의 근대적 성향

    강화 하곡학파의 학문적 분야는 다양하지만 목표와 정신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학문과 교육을 그들의 학문과 삶의 기반

    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주체성의 인식과 실현’ 그리고 ‘진보와 발전을

    위한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하곡 정제두의 학문적 특성을 고찰할 것이다.

    1. 주재와 권형으로서 인간주체

    하곡은 인심이란 천지만물의 주재(主宰)이며 권형(權衡)이라고 하여, 인간을 세상

    의 어떤 것보다도 존귀한 존재로 여겼다.

    마음은 천지만물의 정령(精靈)이며 또한 마음은 천지만물의 신령(神靈)이다. 대체로

    천지만물의 정령이 발하여 마음에 구멍을 열고, 부여하여 성(性)에 덕(德)을 명(命)하였

    다. 한 점 영명(靈明) 감통(感通)이 구멍이 되고, 천칙(天則)의 참[眞]이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어서, 족히 천지만물의 주재가 되고 천지만물의 권형(權衡)이 되는 까닭이다.9)

    하곡은 인간주체의 존귀성은 그 마음에 있다고 하며, 인심에게 황지극(皇之極)·

    9) �霞谷集�, 卷8, 存言 上, 定性文 殘註.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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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지칙(帝之則)·생지원(生之源)·물지군(物之君)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10) 인심이

    천지만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천지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神靈)하고 신명(神明)하여

    감통(感通)할 뿐만 아니라, 만 가지 사물의 이치의 근원이 되는 참된 천칙(天則), 즉

    인간의 소명으로서의 덕(德)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심은 물을 체인하고

    [體物], 물을 명하니[命物], 온갖 이치를 갖추고(또는 생하고), 만사를 일으키는 기능

    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하곡은 인간의 존귀한 심성에 부여된 덕(德)을 양지(良知)와 인(仁)으로 설명한다.

    대개 그 전체(全體)의 덕(德)으로 말하면 인(仁)이라 하고, 그 본체(本體)의 밝음으로

    말할 때는 양지(良知)라고 하나니, 그 가리켜 부르는 이름은 비록 이러하나 그 전체가

    어찌 본체가 아니겠는가? 본체가 어찌 전체의 밖에 있겠는가? 오직 하나의 물(物)인 때

    문이다. 양지와 인은 명칭은 다르나 실상 일물(一物)인 것이다.11)

    따라서 하곡에 의하면 진정한 인간주체란 마음에 부여된 덕으로서의 인(仁)과 양

    지(良知)를 남김없이 온전하게 다 발휘하는 자라고 하겠다.

    하곡은 덕(德)의 밝음 또는 마음의 본체로서 양지(良知)란 경험이나 학습이 없이

    도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이 체(體, 良知)를 얻었다면 밖에서 구할 것이 없다. 이 체(體)는 사리(事理)에

    대해서는 마치 저절로 입이 달거나 쓴 것, 눈이 검거나 흰 것에 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 달다고 하는 것은 저절로 단 것이고, 쓰다고 하는 것은 저절로 쓴 것이니, 모름지기

    먼저 그 달고 쓰고 희고 검은 것을 강론하고 토론해서는 안 되며 잡아보고 정한 후에

    그 달고 쓰고 검고 흰 것을 밝힐 수 있으며, 이로써 피차(彼此)의 양끝과 선후의 두 부

    분으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마치 거울이 빈 것과 같아서 검고 흰 것이나 아름답고 추한

    것이 이 오직 밝은 거울에만 있으며, 저울이 수평인 것과 같아서 저울대가 오르내리는

    것을 맘대로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의(義)인 것이며, 그 체(體)가

    인(仁)이 되는 것이다.12)

    10) �霞谷集�, 卷8, 存言 上, 定性文.

    11) �霞谷集�, 卷1, 書2, 與閔彦暉論辨言正術書.

    12) �霞谷集�, 卷9, 存言 下.

  • 6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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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곡은 마음의 본체로서 양지(良知)란 마치 저울이나 거울처럼 각 물건에 무게에

    따라 눈금을 달리하며, 대상의 모습에 따라 제각기의 실상을 비쳐주듯이, 마음의 본

    체인 인(仁)을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구현하는 창의적 지성이라고 본

    것이다. 하곡은 양지(良知)를 개별적 사물들의 상대적 가치와 중요성 및 과부족을

    평가하는 능력이며, 구체적 상황에서 치우침이 없이 시의(時宜)에 합당하게 판단하

    는 이른바 시중(時中)의 지(知)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물과 만사의 주체

    로서 인간의 존귀성은 인간의 선험적(先驗的) 주체성, 즉 덕의 본체로서 인과 덕의

    작용으로서 양지를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구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하곡은 학문이란 도를 밝혀 자신에게 실질적인 유익함을 얻고자 하는 것

    이었다.13) 그는 진실하고 충실한 자아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에 평생 전념하였다고

    한다.14) 그는 고향 친구를 떠나보내는 글에서 성명(聲名)과 이록(利祿)을 구하는 학

    문을 먼저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다.15)

    하곡은 “진실로 지극한 덕(德)이 아니면 지극한 도(道)는 뭉치지 않는다.”16)고 하

    였다. 따라서 하곡에 의하면 인간의 당위(當爲)로서 도리란 객관적인 사물의 이치나

    대중의 의견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주체성이다.

    우리 학문은 이[道]를 안에서 구할 뿐이고, 밖에서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안에

    서 이를 구한다는 것은 돌이켜 보아 안으로 살피고[反觀內省] 밖의 사물을 끊는다는 것

    은 아니다. 오직 안에서 스스로 만족할 것을 찾는 것이고 다시 밖의 득실을 일삼지 않

    는 것이다. 오직 그 마음의 시비(是非)를 다하고, 남의 시비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사

    물의 근본에서 그 참됨[實]을 이루고[致] 다시는 일과 행위의 자취[迹]에 구애(拘碍)하지

    않는다. 나의 안에 있을 뿐이니 어찌 남에게 관여하겠는가?17)

    하곡은 진정한 주체란 반관내성(反觀內省)을 통해 속임 없는 자기 마음의 시비(是

    非)를 다하는 자라고 한다. 왕양명이 “배움이란 마음에서 얻음을 귀하게 여긴다. 마

    음에서 구하여 옳지 않으면 비록 그 말이 공자(孔子)에게서 나온 것이라 해도 감히

    13) �霞谷集�, 卷9, 存言 下.

    14) �霞谷集�, 卷11, 附錄, 門人語錄과 遺事 참조.

    15) �霞谷集�, 卷7, 序 送李聖益歸連山序.

    16) �霞谷集�, 卷8, 存言 上, 定性文.

    17) �霞谷集�, 卷9, 存言 下.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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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다고 할 수 없거늘…”18)이라 하였듯이, 내 마음의 시비(是非)에 철저한 자야말로

    진정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2. 주체성의 확립과 정치

    하곡은 진정한 주체의 완성을 위한 배움이란 자신의 내면적 덕성을 밝히고 이를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구현·확대하여,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친애하는 인도주의(人

    道主義humanitarianism) 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친(親)이란 친애함[親之]이다. 민(民)이란 자기[己]의 대칭이다. 가(家)·국(國)·천하(天

    下)가 모두 민(民)이다. 명명덕(明明德)은 친민(親民)에 달려 있고, 친민은 그 덕을 밝힘

    에 의거하니 체용(體·用)이 하나이다. 그 본체의 실현[其體之致]을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이르러 타자[物]와 내[我]가 다함으로써 천지만물은 일체(一體)가 된다.19)

    하곡이 말하는 민(民)이란 주자(朱子)처럼 피치자(被治者), 즉 군주와 사대부를 제

    외한 인민대중을 지칭하기보다는 나를 제외한 일체의 다른 존재자를 지칭하는 것이

    다. 하곡은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자식에 대한 자애, 임금을 섬기고, 어

    른을 모시며, 인민대중을 부리는 일, 모두가 친민(親民)의 일이며 이것이 곧 마음의

    본체인 덕(德)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일이라고 한다.20) 하곡은 인간주체의 선험적

    인 덕성을 깨닫고 구현하는 주체성의 실현이 곧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는 정치

    라는 것이다.

    하곡은 영조(英祖)에게 “국가가 중흥할 기회로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을 하루

    세 번씩 접하시어 근심하고 근면하며 노력하여 종일토록 쉴 틈 없이 힘쓰실 때입니

    다. …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는 일이오니 이것이 긴요한 공부입니다.”21)

    라고 하여, 진정한 주체성의 확립으로서 실심(實心)이 실정(實政)에 선행하거나 근본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실심의 구체적인 실현이 실정이라는 것이

    다.

    18) �傳習錄� 中, 答羅整菴少宰書 참고.

    19) �霞谷集�, 卷13, 大學說, 大學說.

    20) �霞谷集�, 卷13, 大學說, 大學說.

    21) �霞谷集�, 卷5, 筵奏, 戊申 4월 17일.

  • 8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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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곡은 경연(經筵)에서 주자(朱子)의 경자봉사(庚子封事)를 강론하면서, 타고난 덕

    성을 함양하는 공부와 인의(仁義)의 정치를 펴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

    다.

    … 대체로 천하의 만 가지의 일이 기강(紀綱)이 없으면 성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正心] 데 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근본은 신독

    (愼獨)에 있다. 천리(天理)와 사의(私意)를 팔자로 타개하는 것은 신독에 있으며, 천덕

    (天德)과 왕도(王道)의 공부와 효과[功效]가 넓어지는 것은 신독 공부에서 말미암는 것이

    다. �대학�의 성의(誠意)·정심(正心)과 �중용�의 계신(戒愼)·공구(恐懼)의 공부가 신독

    의 뜻이 아님이 없다. 맨 처음에 손을 댈 곳이 여기에 있으며, 철두철미해야 할 곳도

    여기에 있다.22)

    그는 진정한 주체성의 보존을 위한 신독의 공부란 기강을 세우는 근본일 뿐만 아

    니라,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근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천지 질서와 만물 육성(育

    成)의 도(道)를 완성하는 것은 치중화(致中和)이며, 이것은 개개인이 신독(愼獨)함으

    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23) 하곡은 천하를 태평하게 하고[平天下], 천지의 질서

    와 만물의 육성을 가능케 하는[位天地·育萬物] 근본원리가 곧 신독(愼獨)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평화와 천지만물의 질서와 번영은 진정한 주체성의 확

    립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발전의 토대로서 주체성

    하곡은 인간주체의 명덕(明德) 또는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를 부단히 일관하는

    것으로 성(誠), 중(中), 인(仁), 양지(良知) 등을 강조하고 있다.24) 그것은 주체로 하

    여금 다른 존재와 감통(感通)하게 하고 일체(一體)이게 하는 부단한 생명의 원리이

    며 또한 시중(時中)하여 천지를 질서지우고 기르는 원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

    은 진보와 발전의 동력이며 인간주체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하곡은 요순(堯·舜)과 송(宋)의 인종(仁宗)이 태평의 정치를 이루었던 것은 이들

    22) �霞谷集�, 卷10, 年譜 英祖4년, 4월 辛巳朔 ; 卷5, 筵奏 4월 3일.

    23) �霞谷集�, 卷5, 筵奏, 戊申 5월 2일.

    24) 박연수, 「하곡 정제두의 도덕철학」(�陽明學� 제13호, 한국양명학회, 2005. 2.), 67-99쪽 참고.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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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실심(實心)과 지성(至誠)을 다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요순(堯·舜)이 몸을 공손히 하매 천하가 다스려졌다는 것은 대개 고(皐)·기

    (夔)·직(稷)·설(契)이 다 조정에 모인 때문이며,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태평을

    이룩한 것은 또한 천장각(天章閣)을 열어서 대신을 모아 날마다 아뢰고 의논하게 한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순(舜)이 신하에게 묻던 것과 송조(宋朝)에서 정치를

    의논했던 것으로써 더욱 힘쓰소서. 또 이른바 현신(賢臣)을 가까이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라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말을 법으로 삼아 대신과 더불어 주야로 치도(治

    道)를 강구하여야 바야흐로 탕평(蕩平)할 수 있고, 이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

    다.25)

    통치자가 소박하고 진실하며, 열린 마음과 주야로 치도(治道)를 강구하는 성실한

    태도를 지닐 때 현명한 신하들이 보좌하고 나라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곡은 사회의 화합과 발전의 중요한 요소를 의사소통(意思疏通)으로 보았다.

    혹은 소(疏)로, 혹은 서(書)로, 혹은 방(謗)으로, 혹은 말로, 지방에 있는 자는 봉서(封

    書)를 관(官)에 보내며, 서울에 있는 자는 친히 나오게 한다. 귀천(貴賤)의 구별 없이 모

    두 허용하고, 일의 크고 작음도 구별 없이 모든 말을 중외(中外)에 신구(申求)토록 한다.

    ○ 이미 진언했으면 모두 대정(大庭)에 불러 모아 계책을 내도록 하고 난점을 묻는다.

    재삼 가부(可否)의 적확함을 판단하여 채용하며, 혹은 왕의 앞에 나와 의논하게 하여,

    그 사람됨을 보아 등용한다.26)

    하곡은 정치에 있어서 군주와 신하, 즉 사대부 계층의 관료들과의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下民]과의 소통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나라에 중

    대한 문제가 있어서 중지(衆智)를 모을 때,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일의 크고 작음

    을 구별하지 않고 의견들을 널리 구해야 한다고 한다. 언로(言路)를 여는 것은 국정

    의 계책을 모으고, 백성의 실정을 살피는 것뿐만 아니라, 인재를 분별하여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언로개방의 중요한 의의는 진정으로 자신의 의견과 다른 누

    25) �霞谷集�, 卷5, 筵奏, 戊申 4월 24일, 5월 초2일.

    26) �霞谷集�, 卷22, 箚錄, 下詔集一國之羣策.

  • 10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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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의 의견이든 존중하고, 성실하게 듣고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다.

    하곡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하곡은 통치자란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

    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 즉 공정성(公正性impartiality)을 통치의 최고 원리

    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왕자(王者)의 도(道)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를 가지고 그

    마음의 극(極)으로 삼아서 백성들과 더불어 덕화(德化)에 함께 참여할 뿐이다.27)

    하곡은 탕평(蕩平)을 위해 극(極)을 세울 때, “시중(時中)의 의(義)는 쉽지 않으나

    정일(精一)의 중(中)이 천하의 대중(大中)이고 자막(子莫)의 중은 곧 집착의 중입니

    다. 반드시 대중의 중을 강구하여 근본으로 삼는 것인데 …”라고 하여, 시중(時中)·

    대중(大中)의 중을 강구하라고 하였다.28)

    또한 하곡은 영조(英祖)에게 공평성(公平性)의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군(人君)은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가지며, 상벌(賞罰)이 공평하

    여서 죄진 자에게 죄를 주고 착한 이는 등용하며, 적은 것을 많게 하고 박한 것을 후하

    게 하면 곡직(曲直) 시비(是非)가 둘 다 그 중(中)을 얻을 것이며, 그런 뒤에는 저절로

    탕탕평평(蕩蕩平平)한 정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자가 �주역� 상전(象傳)의 칭물

    평시(稱物平施; 물건을 달아서 고르게 나눈다)와 알악양선(遏惡揚善; 악한 것을 막고 착

    한 것을 찬양함)을 논한 것이 곧 준엄한 논의이었습니다. … 정일집중(精一執中)하여 건

    극(建極)하는 길은 그 종지(宗旨)를 얻은 뒤에야 건극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성현의

    말씀이 주역의 평(平)이란 한 글자가 정일집중과 같으니, 만약에 중(中)을 잡고도 정일

    하지 못하면 곧 자막(子莫)의 중을 잡는 것과 근사할 것이고, 공평하게 베풀되 물을 저

    울질하지 못하면 어찌 많은 것을 덜어다가 적은 데에 보태어 준다는 성인(聖人)의 뜻이

    되겠습니까?29)

    하곡은 공평[平]이란 공정한 평가에 따라 그에 상응하게 상벌을 부가하는 것이라

    27) �霞谷集�, 卷16, 三經箚錄, 書箚錄(拾遺), 皇極正解.

    28) �霞谷集�, 卷5, 筵奏, 戊申 4월 24일.

    29) �霞谷集�, 卷5, 筵奏, 戊申 4월 28일.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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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공정(公正)한 차등(差等)의 원리라고 하겠다. 또한 사물의

    현실태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기초로 부족한 것은 더해 주고, 박한 것은 후하게 보

    완하는 것이 공평이라고 한다. 이것은 보완적 차등의 원리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사물의 조건과 현실을 고려함이 없이 무차별적으로 베푸는 것은 오히려 불공평한

    것이며, 악을 막고 선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하곡은 이국(利國)·편민(便民)의 정치를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하곡의 개혁사상은 사민평등(四民平等), 만민개로(萬民皆勞)의 정

    신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귀천의 구별은 대개 900년 동안 자식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양민(良民)이 모두

    천인(賤人)이 되었다. 온 나라를 들어 양민이 하나이면 천인이 둘이다. … 나라를 다스

    리고자 하면서 천하에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조그

    만 고통이나 조그만 즐거움도 천지(天地)가 물(物)을 생(生)하는 뜻이 아니라면 그 해

    (害)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한 것이다. 물(物)이 극(極)하면 변(變)하는 것인데 지금은 이

    미 극(極)이다. 마땅히 변해야 한다.30)

    하곡에 의하면 백성의 셋 중 둘이 천민(賤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하늘

    이 만물을 낳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며, 나라에 미치는 해는 그 무엇보다도 큰 것

    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곡은 인도주의 차원에서 또한 효율적 정치를 위한 차원에서

    차별적 신분제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하곡은 국민화합 또는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근대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 중에 재능이 있는 자, 업적이 있는 자는 그들로 하여금 그 하는 바를 더욱 하

    게 한다.”고 하였듯이, 외롭고 홀몸인 자[煢獨]나 고명(高明)한 자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진취시킨 것이 곧 이와 같습니다.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진취시키되 백성으로서 미

    치지 못하는 자도 역시 모두 받아들여서 포용하고 바로잡아 주며, 착하지 못한 자도 역

    시 모두 길러서 성취하게 하는 것이니, 이들에게 베풀어줌의 광대함이 이와 같았던 것

    입니다.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진취시키는 도(道)는 곧 아래 글에 “무편피무편당 회

    극귀극(無偏陂無偏黨 會極歸極)”이라고 한 것을 가지고 그 극(極)을 삼은 것이니, 그 극

    30) �霞谷集�, 卷22, 箚錄, 貴賤之分.

  • 12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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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세우는 대도(大道)가 또한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31)

    하곡은 치우침이나 편당을 지음이 없이, 신분이나 처지의 차별 없이, 부족하거나

    착하지 못한 자까지도 두루 육성하고 진출시키며 포용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하곡은 서얼(庶孼)이나 천민(賤民) 가운데에서 인재를 두루 관리로 등용하고,

    반면 양반이 관직을 세습화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점차 양반과 서인(庶人)의 구별을

    없애고자 하였다.32) 하곡은 관직을 축소하고 재능이 있는 자, 현자(賢者)를 등용하

    여 책임행정을 실현하도록 보장하되, 양반들이 벼슬을 세습화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

    다. 그리하여 공직을 얻지 못한 양반이나 선비들은 농사짓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다.33) 이는 무능하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선비 또는 양반들을 점차 없애고자 하

    는 제도라고 하겠다.

    하곡은 국가의 재정을 늘리고 백성의 부(富)를 성취하기 위한 토지제도와 세제(稅

    制)의 개혁을 주장하였다.34) 하곡은 누구나 똑같이 어떠한 신분이건 군역(軍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5) 또한 개가(改嫁) 금지의 법을 고칠 것을 주장하였

    다.36)

    Ⅲ.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강화(江華) 하곡학파(霞谷學派)가 활동하던 시기는 국내의 분열과 외세의 침략이

    함께 존재하던 때였다. 이들은 소론(少論)에 속하여 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고 집안

    이 몰락하기도 하였으나, 고난 속에서도 이단(異端)으로 간주되던 양명학(陽明學)의

    정신을 굳건하게 지켜갔다. 또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생

    존과 발전을 위한 개혁을 도모하였다.

    31) �霞谷集�, 卷22, 箚錄, 消兩班.

    32) �霞谷集�, 卷22, 箚錄 341쪽.

    33) �霞谷集�, 卷22, 箚錄, 消兩班.

    34) �霞谷集�, 卷22, 箚錄 限民田과 卷22, 箚錄 限田從歸自均 349쪽 참조.

    35) �霞谷集�, 卷22, 箚錄.

    36) �霞谷集�, 卷22, 箚錄, 消兩班.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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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아의 주체성 회복

    강화 하곡학파의 사람들은 부귀공명(富貴功名)의 노예가 되어버린 소인의 무리들,

    성현의 권위를 빌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들, 파당의 권세에 의존하여 자신의

    부귀공명을 도모하는 자들로 가득 찬 주체성 상실의 현실에 대하여 탄식하였다.

    하곡의 문인 이진병(李震炳)은 당시 학계를 가치전도의 현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슬프다! 세상에 참된 선비[眞儒]가 없음으로부터 학문이 끊어져서 도(道)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이른바 학(學)을 하는 자는 대개 모두가 글의 뜻에만 얽매이고

    장구(章句)에 빠져서 근본을 버리고 끝으로만 달리며, 참된 것을 덮고 거짓을 행하여 밖

    으로는 인의(仁義)의 이름을 핑계대고 안으로는 공리(功利)의 사욕만 차릴 뿐이었던 것

    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진실로 천하에 큰 지혜와 큰 용기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참

    으로 성인(聖人)의 일에 뜻을 두어서 큰 홍수를 벗어나고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이

    와 같이 하겠는가?37)

    당시의 선비사회는 근본[本]과 참된 근원[眞源]에 충실한 진유(眞儒)는 없고, 근본

    을 버리고 말단적인 것에 몰두하며,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행하며, 사욕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꾸미는 자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초원(椒園) 이충익(李忠翊, 1744〜1816)은 외부의 권위를 빌려 타인을 위협하는

    자들, 이른바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모두 옛글을 빌려오고 옛 철인(哲人)의 자취에 비기지 않음

    이 없으며 온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 사람들의 언론의 자유를 속박하여 항의도 하

    지 못하게 한다.38)

    옛 성현의 글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빌려와서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그것으로 세상 사람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고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무리들을 비

    판한다. 이들에게는 실상 진정한 주체성은 없고 빌려온 권위와 숨겨둔 이기심만이

    37) �霞谷集�, 卷11, 附錄, 祭文.

    38) 李忠翊, �椒園遺稿�, 假說 下.

  • 14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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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 또한 초원은 성현을 빌어[假聖賢] 군자의 허물을 꾸미는[文君子之過] 자는 소인

    의 간악함을 이루는 것이라고 비판한다.39) 초원은 공자와 맹자의 인의(仁義)를 가장

    (假裝)하는 것은 불인(不仁)과 불의(不義)를 실제로 행하는 것보다 더욱 비천하며 악

    한 것이라고 비판한다.40) 현동(玄同) 정동유(鄭東愈, 1744〜1808)는 말하기를, “그들

    이 소리 높여 남의 죄를 꾸짖는 것을 보면 의리(義理)의 이름을 내세워서 준엄한 죄

    안(罪案)으로 얽어버린다. 아아, 의리라는 두 글자가 후세의 사람 죽이는 칼이 되고

    도끼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41)고 하였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2〜?)는 과거 수백 년간 조선의 역사가 실로 허(虛)

    와 가(假)로서의 연출한 자취라고 한다. 그는 수백 년간 조선인의 실심(實心) 실행

    (實行)은 학문영역 이외에 구차스럽게 간간 잔존하였을 뿐이요, 온 세상에 가득 찬

    것은 오직 가행(假行)이요, 허학(虛學)이라고 한다.42)

    조선 수백 년간 학문으로는 오직 유학(儒學)이요, 유학으로는 오직 정주(程·朱)를 신

    봉하였으되, 신봉의 폐(弊) 대개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그 학설을 받아 자가(自

    家) 편의(便宜)를 도모하려는 사영파(私營派)요, 하나는 그 학설을 배워 중화적전(中華嫡

    傳)을 이 땅에 드리우자는 존화파(尊華派)이다. 그러므로 평생을 몰두하여 심성(心性)을

    강론하되 실심(實心)과 얼러볼 생각이 적었고, 일세(一世)를 휘동(揮動)하여 도의(道義)를

    표방하되 자신 밖에 보이는 무엇이 없었다.43)

    위당은 실심(實心)을 떠난 사영파의 학문은 자신의 이기적 생각을 보호하고 꾸미

    는 데 효과를 발휘하여 거짓된 행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실심을 따르지 않은 존화파

    는 중국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그 계승자로 자처하니 그 학설은 어느덧

    자신의 이기적 생각의 이용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조 말기에 더욱 고질화된 붕당(朋黨)의 원인에 대하여 현동과 난곡(蘭谷) 이

    건방(李建芳, 1861〜1939)은 자기의 권세와 명성과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44)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3〜1898)은 권문세가들의 공직이나

    39) 李忠翊, �椒園遺稿�, 君子之過說.

    40) 李忠翊, �椒園遺稿�, 假說 下.

    41) 鄭東愈, �晝永編� 下(南晩星 역, 乙酉文化社, 1974년 2월, ③판), 90-91쪽 참고.

    42) 鄭寅普, �陽明學演論�, 논술의 연기, 10-12쪽.

    43) 鄭寅普, �陽明學演論�, 논술의 연기, 10-12쪽.

    44) 鄭東愈, �晝永編� 下(南晩星 역, 乙酉文化社, 1974년 2월, ③판), 85-89쪽 참고. 李建芳, �蘭谷存稿�,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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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벌의 세습화가 붕당을 조장하고, 문직(文職)의 융성, 그리고 국방의 태만과 문치

    (文治)에만 치우쳐서 사대부들이 붕당(朋黨)의 의논에만 빠졌다고 한다.45) 영재는 당

    쟁의 저변에 깔려있는 파벌주의(派閥主義), 벌열정치(閥閱政治), 명분론(名分論) 등을

    비판하였으며, 또한 이것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개인의 편견과 이기적 심성에서 유래

    한다고 보았다.

    현동은 세상의 명성을 얻고자 학문을 하는 자들이 자신의 당파를 두호하는 것을

    도의(道義)로 삼고, 의리(義理)라는 거짓된 명분을 내세워 군자에게 허물을 뒤집어씌

    우고 죽이는 파당의 현실을 비판한다. 진정한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세력을 형

    성하여 다른 사람의 주체성을 파괴하고 나아가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을 우려하였

    다.46) 영재는 용렬한 사람들을 모아 당을 만들어 거짓된 명분(名分)과 의리(義理)의

    학설로 상대를 난적(亂賊)의 함정으로 몰아넣고, 잔인한 심문과 고문으로 고통을 견

    디지 못하여 거짓 자백하게 하여 무죄한 자들을 죽이고, 이러한 일이 보복으로 이어

    지니 이 땅에 살아남을 인재가 없다고 한다.47) 결국 붕당은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주체적 인간을 억압하고 죽이며, 권세와 이익을 좇아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줏대

    없는 인간들을 양산(量産)하였다고 하겠다.

    강화 하곡학파는 허위(虛僞)와 가식(假飾)으로 포장된 자아, 부귀공명의 노예가 된

    소유지향적 자아, 거짓된 의리와 명분의 가면을 쓴 비본래적 자아로부터 진실성, 존

    엄성, 자주성, 자율성, 독립성, 창의성을 지닌 진정한 주체의 회복을 학문의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고 하겠다.48) 하곡(霞谷) 자신은 물론 그 제자들이 목표로 삼고 실천

    했던 근본적이고도 우선적인 최고의 공부는 실심(實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대개 성(誠)이라고 말한 것은 곧 마음 가운데의 실리(實理)를 이름인 것입니다. 하늘

    이 이 실리를 사람에게 주면 사람은 이를 얻어서 마음으로 삼으며, 이것으로 지(知)를

    卷7, 跋, 黨議通略跋 참조.

    45) 李建昌, �黨議通略�, 原論.

    46) 鄭東愈, �晝永編� 下(南晩星 역, 乙酉文化社, 1974년 2월, ③판), 85-89쪽 참고.

    47) 李建昌, �黨議通略�, 原論.

    48) 閔泳珪는 “강화학 이백 오십년의 내력이란 모진 핍박과 갖은 곤궁 속에서 성취한 인간의 존엄과 그

    발견의 역사이었다.”고 하며(「李建昌의 南遷記」, �史學會誌� 제20집, 연세대학교, 1971.12), 沈慶昊

    는 “강화학의 지적(知的) 고뇌는 바로 허가(虛·假)를 배격하고 진실무위(眞實無僞)의 인간형을 수립

    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江華學의 虛假批判論」, �대동한문학� 제14집, 대동한문학회, 2001, 39-40

    쪽.)

  • 16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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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면 참된 지(知)가 되고, 이것으로 힘껏 행하면 실(實)한 행실이 되오니, 참된 지[眞

    知]로써 진실한 행동[實行]을 한다면 이것이 실학(實學)이 되옵니다.49)

    하곡이 말한 실심이란 성심(誠心)이다. 강화 하곡학파가 추구하였던 실학이란 내

    면에 전념하여 진실한 자아[實己]를 이루며, 외적인 유혹[外誘]을 버리고 실리를 간직

    하는 것이었다. 강화 하곡학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학문을 실심(實心)으로 실리(實

    理)를 실행(實行)하는 실학(實學)이라고 한다.

    회복해야 할 자아의 주체성이란 곧 마음의 진정성(眞正性)으로서의 성(誠)을 지칭

    하는 것이라 하겠다.

    대개 성(誠)이란 것은 둘이 아니고[不貳] 그치지도 않는 것이며[不已] 가릴 수도 없는

    것이다[不可掩]. 그 감통(感通)하는 도라는 것은 이광(李廣)이 화살로 돌을 쏘아 꿰뚫었

    던 것과 같은 것이다. … 감열(感悅)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곧 생물의 암컷과 수컷이

    서로 느끼고 사랑하며, 초목도 역시 암컷과 수컷이 있다는 것이요, 기상(氣相)에 느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는 것과 모난 것이 물을 받는 따위와 같은 것

    이며, 정성에 대해 감동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실심(實心)과 진정(眞情)으로 서로 감동

    하는 것이 이것이니, 무릇 실덕(實德)으로 화기(和氣)가 감응하는 것, 음덕으로 도움을

    받는 것, 지성(至誠)으로 신령[靈]에 통하는 것, 그리고 길흉(吉凶)을 신명(神明)에 점치

    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50)

    하곡이 말하는 성(誠)이란 ① 순수하고 한결같은 마음 ② 중단 없는 성실성 ③

    은폐할 수 없는 솔직성 ④ 진실한 마음[實心]과 감정[眞情]으로 서로를 감동하게 하

    고 소통하게 하는 도[感通之道]라는 것이다.

    항재(恒齋) 이광신(李匡臣, 1700〜1744)은 선대(先代)의 언행이란 외적 화려함을

    버리고 내적 진실성에 힘쓰는 것[捨華而務實]으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이때의 무실

    (務實)이란 겸손과 삼감으로 마음을 붙들고, 순수하고 성실함으로 처신하여, 이름[名]

    을 따라 바깥으로 내달리는 일이 없음을 의미한다.51) 항재 자신은 속마음[心髓]에

    힘써 대본(大本)을 확립하는 내수(內修)를 실천하였으며, 호명(好名)을 싫어하고, 노

    49) �霞谷集�, 卷11, 附錄, 請設書院儒疏 再疏.

    50) �霞谷集�, 卷9, 存言 中.

    51) 沈慶昊, 「恒齋 李匡臣論」(�震檀學報� 84호, 진단학회, 1997년), 243쪽 참조.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17

    - 53 -

    여움을 숨기려 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대로 집안을 다스리고, 한결같이 곧음으로 사

    람과 사귀고, 안과 밖이 일치하고, 시비선악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였으며, 남들이

    꺼려하는 간질병자와 함께 한 상에서 식사하였다고 한다.52)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홍재(弘齋) 민옥(閔鈺, ?〜1741)이 실

    (實)로 나아가고 사욕(私欲)을 제거하며, 내실(內實)을 취하고 외면(外面)을 후리 쳐

    간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홍재의 실사(實事), 실언(實言), 실정(實情) 등

    진실무망(眞實無妄)한 삶의 태도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53)

    완구(宛丘) 신대우(申大羽, 1735〜1809)는 이덕윤(李德胤, 1717〜1790)에 대하여,

    학은 충성과 신의를 주로 하고[學主忠信], 공부는 경계하고 삼감을 오로지 하여[工專

    戒愼], 내면을 오로지 하고 자신을 진실하게[專內實己] 하여, 세상의 부귀영화에 흔들

    림 없이 일상의 언행에서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오직 선생[이덕윤]만이 탁월하여 먼저 그 큰 것을 세우고[先立乎其大], 안을 오로지 하

    고 자기를 실(實)하게 하는 학문[專內實己之學]으로써, 말은 전훈(典訓;경전의 가르침)에

    서 떠나지 않고 행동은 오로지 인륜법도[倫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상에서의 그의

    말과 행동을 한마디로 말하면 진실하고 거짓이 없음[眞實無僞]일 따름이었다. 독행(獨行)

    의 고절(苦節)을 닦아 사문(斯文)을 실낱에 매달린 위험에서 구하였다. 삶에 수(數)가 있

    고, 죽음에 명(命)이 있은즉 세상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부귀도, 곤욕을 주는 곤궁도 선

    생을 좌우할 수 없었다.54)

    완구는 이덕윤이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으면

    서 진실을 추구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은 삶을 산 진유(眞儒)의 전형(典型)이었다고

    한다. 완구(宛丘) 또한 전내실기지학(專內實己之學)을 추구하였고, 도가(道家)의 박소

    임진(樸素任眞)의 생활에 공감하였으며, 참으로 인간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진성측달

    (眞誠惻怛)의 정의(情誼)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55)

    영재(寧齋)의 기록에 의하면, 하곡의 문인과 후손들은 이록(利祿)이나 명예를 멀리

    하고, 실심(實心) 또는 근본[本]과 진실[實]에 오로지 힘썼으며, 마땅히 해야 할 바를

    52) 沈慶昊, 「恒齋 李匡臣論」(�震檀學報� 84, 진단학회, 1997년), 242쪽 참조.

    53) 李匡師, �圓嶠集�, 閔兄士相祭文.

    54) 申大羽, �宛丘遺集�, 卷9, 行狀, 李先生行狀.

    55) 沈慶昊, 「申大羽論」(�조선후기한문학작가론�, 집문당, 1994년), 97-131쪽.

  • 18 �인천학연구� 7(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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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하는 데 힘썼다고 하며,56) 그의 조부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 1790〜1866)의

    학문은 그 지향하는 바가 외화(外華)를 버리고 내실(內實)로 나아가는 것이었다고

    한다.57) 영재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일깨우는 글에서, “부화(浮華)를 일삼고 실학

    (實學)을 소홀히 하는 따위는 내가 가장 배척하는 바라.”고 하였다.58)

    영재는 말하기를, “내 몸이 의리를 정(定)할 수 있으며, 의리는 일정함이 없다. 내

    마음이 의리를 궁격(窮格)할 수 있으나 의리는 다함이 없다. 이제 내 몸은 옛 성현

    과 같지 못하나 스스로 의리를 밖으로 버린다면 옳지 않다.”59)고 하였다. 따라서 그

    는 사사물물에서 정리(定理)를 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실심(實心)을 도덕주체

    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철학적 근저가 양명학적 입장에 있다.60) 또한

    그는 “천하의 변화는 지극히 무궁하고 인심의 은미함은 지극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 요점은 그 실에 힘쓸[務其實] 뿐이니, 수시변통(隨時變通)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겠는가? 진실로 한 때 한 가지 일에만 고집하여 억지로 명분을 삼고 의(義)를 곡

    해해서는 안 된다.”61)고 한다. 영재에게 있어서 지극히 알기 어려운 은미(隱微)한

    마음이란 곧 힘써 구해야 할 실심(實心)이며, 그것은 무궁한 사물의 변화에 따라 수

    시변통하여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의리를 구현하는 양지(良知)의 마음이다.

    2. 민족주체성의 보존

    강화 하곡학파에게 있어서 학문과 삶이란 사적(私的)으로는 허학(虛學)과 가행(假

    行)으로 인해 숨겨진 진실(眞實)한 자아(自我)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공적(公的)으로

    는 잊혀 진 민족주체의식을 고취하고 쇠퇴한 국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강화 하곡학파가 관심을 기울였던 학문분야는 매우 폭이 넓지만 특히 그들은 공

    통적으로 우리 한민족의 어문(語文)·지리(地理)·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

    였다. 강화 하곡학파는 특히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여

    러 가지 역사서를 남겼다.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동국악부(東國樂府)�, 이

    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충익(李忠翊, 1744〜1816)

    56) 李建昌, �明美堂集�, 先府君行狀과 判義禁美堂鄭公墓誌銘 참고.

    57) 李建昌, �明美堂集�, 先忠貞公行路.

    58) 李建昌, �明美堂集�, 南遷記.

    59) 李建昌, �明美堂集�, 卷9, 書, 答汶園論出處書.

    60) 宋錫準, 「寧齋 李建昌의 心學思想」(�유학연구� 제2집, 충남대 유학연구소, 1994.12.), 177쪽.

    61) 李建昌, �明美堂集�, 卷11, 原論 18쪽.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19

    - 55 -

    의 �군자지과(君子之過)�, 정동유(鄭東愈, 1744〜1808)의 �주영편(晝永編)�, 이면백

    (李勉伯, 1767〜1830)의 �감서(憨書)�와 �해동돈사(海東惇史)�, 이시원(李是遠, 1790

    〜1866)의 �국조문헌(國朝文獻)�, 이건창(李建昌, 1853〜1898) )의 �당의통략(黨議通

    略)� 등이 그것이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의례(義例; 범례)에서

    저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당(東黨)과 서당(西黨)이 분당된 이후로 피차의 문적(文籍)이 사람이나 사건을 헐뜯

    고 칭찬하는 태도가 달랐고, 기재하는 사람도 한편에 치우침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피

    차의 견해를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수록하여, 뒷날에 보는 사람이 각자 시비(是非)를

    정할 것을 기대한다.

    이긍익은 개인적 편견을 떠나 역사적 사실을 과장이나 꾸밈이 없이 밝히고자 하

    였으며, 그리하여 독자가 진실을 스스로 알게 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

    을 왜곡(歪曲)하는 평가적 역사서술의 방법을 배제함으로써 역사서술에서 허가(虛·

    假)가 개재될 틈을 없애고자 한 것이며, 불편부당(不偏不黨)한 필치(筆致)로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고, 일체의 사평(史評)을 배제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국학(國學) 연구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한민족(韓民族)의 정체성(正體性)을

    되돌아보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였으나,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를 존귀하게 여기고자 하였던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독실한 실천에도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중국을 배울 필요가 없다. 선인(先人)의 덕행

    (德行)이 가승(家乘)에 있으니, 밭 갈고 김매듯 받들어 행하라.62)

    위의 원교(圓嶠)의 글에서 밖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안으로 돌려서 구하라는 자존

    (自尊)의 주체의식을 엿볼 수 있다. 원교와 이영익(李令翊)이 대를 이어 지은 �동국

    악부(東國樂府)�는 고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 역사서에 나오는 전설과 고사에 의

    문을 제기하면서 국사를 재구성하였다. 정인보에 따르면 이것은 한자(漢字)를 빌어

    조선심(朝鮮心)을 그대로 실은 것이라고 한다.63)

    62) 李匡師, �斗南集�, 卷3, 訓家篇.

  • 20 �인천학연구� 7(2007.8)

    - 56 -

    또한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충익(李忠翊)의 �군자지과(君

    子之過)�, 이면백(李勉伯)의 �감서(憨書)� 등은 노예사상으로부터 주체적 사관을 수

    립하고자 한 저서라고 한다. 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중국에 부속하는 것으로 보지 않

    고, 우리 민족이 주체인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였다.

    이광사(李匡師), 이영익(李令翊), 이충익(李忠翊), 정동유(鄭東愈), 유희(柳僖, 1773

    〜1808) 등이 우리의 언어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연원을 연구하였는데,64) 중국과

    달리 우리 한민족(韓民族)에게 고유한 언어가 있었다는 점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찾

    고자 하였으며, 우수한 문자를 지니고 있다는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이만수(李晩秀)는 �이참봉집(李參奉集)�의 서문(序文)에서 이광려(李匡呂)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수가 후학(後學)이지만 나름대로는 선생의 가장 큰 점을 알고 있으니, 그 집안은

    독행(篤行)으로 유명하며, 선비들은 그의 함축성 있는 말에 경복(敬服)하고, 비록 오막살

    이에 들업드렸어도 못 잊는 걱정근심은 늘 조국에 관련되어 있었다. 그 정신이야 진세

    (塵世)를 초월하였건만 그 규범은 예법의 대강(大綱)을 떠난 적이 없었다. 웅성 깊고 높

    고 해맑은 정신세계는 천고(千古)를 표방했었다.65)

    조국에 대한 이광려의 걱정이나, 그의 아버지 이진수(李眞洙)가 역(易)과 성리(性

    理), 전장(典章), 법제(法制), 역산(曆算), 영토(領土), 의약(醫藥) 등 민생(民生)에 필

    요하고, 공부하는 선비가 알아야 할 바는 연구하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는 것66)

    이나, 이면백(李勉伯)이 “고구마 싹을 얻어다 심어 구황식품으로 삼아 민생의 배고픔

    을 제도코자 애썼으며, 하다못해 지붕에 얹는 기와까지도 질기와가 아닌 벽돌로 굽

    는 기술을 중국에서 습득해 오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던”67) 것 등에서 강화 하곡학파

    의 이국(利國)·편민(便民)의 정신을 살필 수 있다.

    이들 강화 하곡학파들 가운데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 1858〜1924)은 을사늑약

    (乙巳勒約, 1905년)이 체결되자 문원(汶園) 홍승헌(洪承憲, 1854〜1914), 기당(綺堂)

    63) 鄭寅普, 「朝鮮古書解題」(�薝園國學散藁�, 文敎社, 1955. 8.), 46쪽.

    64) 鄭寅普, 「朝鮮古書解題」(�薝園國學散藁�, 文敎社, 1955. 8.), , 1쪽.

    65) 鄭良婉·沈慶昊,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1)(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년 2월), 17쪽.

    66) 鄭良婉·沈慶昊,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1)(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년 2월), 20쪽. 이광사가 지

    은 (�圓嶠選集�, 卷7, 碑誌銘表) 참고할 것.

    67) 鄭良婉·沈慶昊,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1)(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년 2월), 28쪽.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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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주변의 감시 때문에 끝내 성공하지 못

    하였다.68) 이건승은 1906년 강화도 길상면(吉祥面) 사기리(砂器里) 로 내려

    가 사재(私財)를 털어 을 설립하여 개명(開明)을 위한 교육, 즉

    근대적인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취지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국민 모두 차별 없이 학습한다. ② 교육이 성취되면 정치가 성취된다. ③

    실심(實心) 실업(實業)의 교육에 힘쓴다. ④ 실심(實心)으로 실사(實事)를 구한다. ⑤

    지식을 열고 넓힌다. 그는 나라에 치욕이 닥친 것은 교육하지 않은 데 있다고 하였

    다. 나라의 독립이 없으면 인민은 자유를 잃을 것이라고 하며, 나라의 독립권을 지

    킬 수 있는 길은 학교교육일 따름이라고 하였다.69)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이시원(李是遠)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끝까지 싸워 이길 것을 호소하는 유소(遺疏)를 남기고 강화에

    서 자결하였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61〜1910)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

    제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의 하일리(霞日里)를 찾아가 하룻밤 사이에 절

    명시(絶命詩) 네 편을 남기고 음독자살하였다. 황현은 이 시에서 1905년 을사늑약

    (乙巳勒約)으로 국권상실이라는 수치를 당하여 여러 차례 죽음을 생각했었음을 고백

    하고 있고, 망국에 대한 애절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으며, “지식인 구실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자책하기도 하였다.70) 나라의 주권상실과 자신의 주체성 상실에 직면하여

    약자로서 강자에게 먹히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분하고 서러워서 통곡하였으며, 죽음

    으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지고자 한 것이다. 한편 국권의 상실이라는 민족적 수

    치를 당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던 이건승(李建昇), 홍승헌(洪承憲), 정원하(鄭元夏)와 고종 황제의 밀사로 파

    견되었다가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1870〜

    1917) 등은 모두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진리와 자존(自尊)·자주(自主)의 주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하곡의 정신을 이은 사람들이다. 또한 국내에 남아서 이건승 일행을

    만주로 떠나보내고 ‘숨이 끊어질 듯 문을 닫고’ 있었다던 난곡(蘭谷)이 군자금으로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고 한다.71)

    68) 閔泳珪, 「江華學 최후의 광경」(�강화학 최후의 광경� 우반, 1994년 10월) 40쪽 참고.

    69) (�韓國學報� 제3권 1호, 일지사, 1977년).

    70) 黃玹, �梅泉集� 卷5, 상해, 1911년.

    71) 閔泳珪, 「江華學 최후의 광경」(�강화학 최후의 광경� 우반, 1994년 10월) 48-55쪽 참고.

  • 22 �인천학연구� 7(2007.8)

    - 58 -

    3. 주체적 진보와 발전

    강화 하곡학파는 자신에게 진실한 자가 다른 존재에게 충실하며, 그리하여 자신과

    다른 존재와의 진실한 관계가 형성되고, 결국은 자신이 계획했던 일에 있어서 실질

    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중용(中庸)�의 “진실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성취되지 못한다[不誠無物].”라고 하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 1858〜1924)은 “실심(實心)이 없으면 어찌 실사(實事)가

    있겠으며, 실사(實事)가 없다면 어찌 실효(實效)를 바랄 것인가?”라고 하고, “오직 우

    리 동지는 실심으로 실사를 구하여, 각기 일심(一心)으로 만물의 이치[理]를 궁구(窮

    究)하려 하고, 각기 한쪽 어깨로 한 나라의 중책을 담당하려 하라.”고 하였다.72) 따

    라서 실사(實事)와 실효(實效)를 이루기 위해서는 행위 주체의 실심(實心)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 또한 계명(啓明)이 학교의 명칭[名]이라면 그 학교가 실제로 이루고자

    하는 내용[實]란 실심(實心)과 실업(實業)이라고 한다. 계명의숙(啓明義塾)의 창가(唱

    歌)에 학교설립의 취지와 목적 그리고 교육의 핵심이 표현되어 있다.

    … 오륜행실(五倫行實) 근본이요 경제사업(經濟事業) 직책이라. … 평치천하(平治天下)

    하려 하면 수신(修身)부터 급선무(急先務)라. … 성경현전(聖經賢傳) 본원(本原)이요 신

    학문을 겸수(兼修)하여, 일심단체(一心團體)한 후의 문명발달진보하면 … 타실권리(墮失

    權利) 회복하고 일등국(一等國)을 자기(自期)하면 …73)

    우리나라가 국권을 회복하고 일등국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월한 처지에 놓이도록 진보와 발전을 이루

    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오륜(五倫)의 실행, 수신(修身), 옛 경전의 학습, 국민의 화

    합 등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는 일, 새로운 학문을 닦는 일, 그리고 문명의 발달과 진보를 이루는 일 등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교의 교육이란 덕(德)을 이루는 일과 재능(才能)

    을 개발하는 두 가지 일 가운데, 인(仁)과 같은 덕을 실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72) (�韓國學報� 제3권 1호, 일지사, 1977년)

    73) (�韓國學報� 제3권 1호, 일지사, 1977년).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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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는 왕양명의 교육사상이나,74) 사민(四民; 士農工商)은 그 직업은 다르나 공통적으

    로 사람을 살리는 도[生人之道]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직업관과 같은 취지라고 하겠

    다.75) 다양한 재능의 개발과 직업의 세분화·전문화를 통하여 그 사회의 진보와 발

    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행위주체의 내면적 도덕성(道德性)과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직업적 의무감(義務感)이 그 사회발전의 토대요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1861〜1939)도 사물의 성패가 진실한 자아, 즉 주체성

    의 확립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한다.

    대저 천하의 사물은 진(眞)에서 이루어지고 위(僞)에서 패한다. 진이란 성(誠)을 말하

    는 데, 전(傳)에 말하기를, “성(誠)이란 사물의 끝이요, 시작이니 성하지 못하면 사물이

    없다.”고 하였다. 대개 사물의 품류(稟類)가 만 가지로 다르고, 그 순수함과 잡박함, 큼

    과 작음, 맑음과 흐림 등이 고르지 못하지만 또한 각기 독득(獨得)의 리(理)를 지녀 그

    로써 본질을 이루어 스스로 구별이 있는 까닭에 그 사이에 조그마한 가차(假借)도 용납

    하지 않는다. 진실로 가차한다면 곧 위요 진이 아니니 하루도 존립할 수 없다. 그 사물

    이 없다고 함도 옳지 않은가?76)

    난곡에 의하면 진(眞)이란 진실성, 즉 성(誠)으로 사물의 끝과 시작이며, 진실하지

    못하면[不誠] 사물이 성립할 수 없다[無物]고 하는 것이다. 사물이란 성품의 종류가

    다양하며 제 각기 독특하게 얻어[獨得] 지니고 있는 이치[實理]를 그 본질로 삼고 스

    스로 다른 것과 구별되기 때문에 잠시도 다른 것으로부터 그것을 빌릴 수 있는 것

    이 아니라고 한다. 빌린다면 그것이 곧 허위(虛僞)요, 참이 아니며,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난곡은 국가 존망(存亡)의 위기상황에서 주체적인 자강(自彊)의 노력을 다 할 것

    을 주장하였다.

    대개 사람은 나면서 무리가 있고, 무리가 있으면 다툼이 있으니, 이것이 이치의 필연

    (必然)이요, 형세[勢]의 필지(必至)라는 것이다. 무리를 모아 권력을 통괄하는 것을 나라

    74) �傳習錄 中�, 答顧東橋書 142조목 참고.

    75) �王文成公全書�, 卷25, 外集7, 節庵方公墓表(乙酉) 참고.

    76) 李建芳, �蘭谷存稿�, 卷3, 序, 梅泉集序.

  • 24 �인천학연구� 7(2007.8)

    - 60 -

    라고 한다. 여기 한 무리 저기 한 무리, 무리가 많으면 무리와 무리가 서로 다툰다. 이

    또한 이치의 필연이요, 형세의 필지라는 것이다. 서로 다투게 되면 강자는 반드시 이기

    고 약자는 반드시 패한다. 교묘(巧妙)한 자는 반드시 얻고, 치졸(稚拙)한 자는 반드시 잃

    는다. 이는 대개 하늘이 펼치는 공례(公例)요, 만물이 경쟁하는 원칙이니 어찌 할 수 없

    는 이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약하고 치졸한 자는 오직 남에게 먹히고 씹히어 멸망당하

    여 끝내 자존(自存)할 수 없는가? 어찌 그러하겠는가? 약하고 치졸한 자라도 어려움을

    알고 망함을 두려워하여,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지기를 꾀하며, 자신의 약함의 원인을

    제거하기에 힘쓰고 남의 강함의 원인을 구하고 본받는다면 강해질 것이다. 자신의 치졸

    함의 원인을 제거하기에 힘쓰고 남의 교묘함의 원인을 구하고 본받는다면 교묘해질 것

    이다. 본받는 것[效]을 학(學)이라 하니, 배워서 힘이 같아지고 형세가 균등해진다면 남

    이 아무리 우리를 씹어 삼키고 우리를 깔아뭉개려[夷滅] 한 들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우

    리의 약함을 알면서도 남의 강함을 본받지 않고, 우리의 치졸함을 알면서도 남의 솜씨

    있음을 본받으려 않으며, 타성에 젖어 편안하기만 탐내고 미혹에 붙들려서도 깨닫지 못

    하고, 마침내 남에게 먹히고 깔아뭉개진 뒤에야 그친다면, 이는 자멸(自滅)이요 자망(自

    亡)이지 남이 나를 멸(滅)하고 나를 뭉갠 것이 아니니, 누구를 탓하랴?77)

    난곡은 생존경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의 존망과 강약의 원인이 모

    두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지기를 꾀하며, 자신의 약

    하고 치졸한 원인을 살펴 그것을 제거하고, 남의 강점과 교묘한 점을 본받는 학습이

    있을 때 자존(自存)할 수 있으며, 자멸(自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난곡은 「원

    사(原士)」 3편을 지어 산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질책하고 신학문으로 분발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는 단발령에 죽음으로 저항하는 것은 소의(少義)라고 비판하되, 신학

    문을 한답시고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성혼(成渾), 이이(李珥) 등의 말씀을 업신

    여기는 것은 조국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일이라고 경계하였으며,78) “반드시 동아(東

    亞)를 참작하여 시의(時宜)에 합당하도록 힘써라.”고 하였다.79)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3〜1898)은 나라의 부유함과 강함은 실심(實心)에

    달려 있다고 한다.

    77) 李建芳, �蘭谷存稿�, 卷6, 論, 原論 上.

    78) 李建芳, �蘭谷存稿�, 卷6, 論, 原論 下.

    79) 李建芳, �蘭谷存稿�, 卷6, 論, 原論 下.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25

    - 61 -

    전(傳)에 이르기를, 불성(不誠)이면 무물(無物)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성(誠)이란 것

    은 실리(實理)입니다. 실리가 있는 곳이 곧 실사(實事)가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곳이니,

    실리가 안에 없다면 실사가 밖에서 성립될 수 없으니, 불성이면 무물이라 하였던 것입

    니다. 진실로 실심(實心)이 없으면서 한갓 그 명목(名目)만 취한다면 비록 한무제(漢武

    帝)와 같이 예악(禮樂)을 일으키고 한원제(漢元帝)와 같이 유술(儒術)을 숭상할지라도

    쇠란(衰亂)에서 구제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불가불(不可不) 나의 실리를 다하고 나의

    실사를 행함으로써 나의 참된 부강[實富實强]의 효과를 본 연후에 비로소 천하에 말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위로 당우(唐虞)의 왕도(王道)를 얻지 못하고 아래

    로 진초(晉楚)의 패자(覇者)도 될 수 없을 것이니, 명(名)과 실(實) 둘 다 잃어버려 무

    물(無物)에 가깝게 될 것입니다. 대저 이름[名]이란 실상의 객[賓]이며, 앞서는 것이 실

    상[實]이고 뒤따르는 것이 이름[名]입니다. 천하의 도(道)가 그러하니, 오로지 부강의 방

    법을 꾀하는 자는 더욱 이름을 금기로 삼아야 합니다. … 나의 실상[實]이 아직 성숙

    하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하고서, 이름이 먼저 밖으로 퍼지면[播] 계책 가운데 좋은 것이

    아닙니다.”80)

    영재는 실심(實心)으로서의 성(誠)을 실리(實理)로 삼고 실사(實事)를 행함으로써

    실효(實效)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실심이 없으면서 한갓 명목(名目)만 취한다면 실

    효를 거둘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주체성을 결여한 나라는 근대화

    를 통한 부강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이다.

    전하께서 진실로 부강에 뜻이 있고 반드시 그 효과[效]를 기대하신다면 청컨대 이름

    [名]에서 구하지 마시고 실상[實]에서 구하십시오. 진실로 이름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실

    상에서 구하고자 하신다면 이웃나라에서 구하지 마시고 나[我]에게서 구하십시오. 무릇

    내가 부유하지 못한 까닭은 나에게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요, 내가 강

    하지 못한 이유는 반드시 나에게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지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가난과 약함은 이미 나로 말미암는

    것이며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원인을 돌이키면 곧 부유해지는 원

    인이 될 것이요, 약한 원인을 되돌리면 강하게 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까닭은 오직 전하(殿下)의 일심(一心)의 실(實)에 있으니 변경(變更)의 분분(紛紛)함에 매

    80) 李建昌, �明美堂全集�, 卷7, 疏, 擬論時政疏.

  • 26 �인천학연구� 7(2007.8)

    - 62 -

    이지 마십시오.81)

    영재는 나라의 부강(富强)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첫째 명분(名分)보다 먼저 실상

    (實狀)에서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개화를 허명개화

    (虛名開化)와 실상개화(實狀開化)로 나누고, 아직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한 나라는 대

    체로 허명개화의 시행착오를 거쳐 실상개화로 나아간다고 하였다.82) 따라서 유길준

    은 허명개화를 실상개화로 나아가는 과정의 하나로 인정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건창은 명(名)과 실(實)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였다. 둘째 부강(富强)의 원인을 밖에서

    구하기보다는 내 안의 실상에서 구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나로부터 문제를 발견

    하고 나의 실정에 맞는 처방이 나와야만 실질적인 부강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몰주체적(沒主體的) 개화파(開化派)의 입장과 다르며,

    수구적(守舊的)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와도 다르다. 마지막

    으로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한 나라의 빈부강약(貧富强弱)이 그 나라 임금, 즉 최

    고통치자의 실심(實心)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이제 전하께서는 신하와 백성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고,

    신하와 백성은 전하(殿下)의 일로써 자신의 일로 삼아,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그림

    자가 몸을 따르듯 한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습니까?”83)라고 하여, 통치자와

    백성이 마치 건강한 한 몸처럼 상호 감통(感通)하고, 공감(共感)을 이룰 때, 무엇이

    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Ⅳ. 맺음말

    강화 하곡학파가 지향하던 학문과 삶이란 개인과 국가의 주체성 회복과 실현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 또는 국가의 자유와 독립, 자주와 책임감, 자존(自尊)

    과 자기발전, 자율과 창조성, 도덕성과 지식 및 재능 등을 보호하고 실현한다는 의

    미이다.

    강화 하곡학파는 물질과 권세와 명예 등 외적 가치에 충직한 노예로 사는 것을

    81) 李建昌, �明美堂全集�, 卷7, 疏, 擬論時政疏.

    82) 兪吉濬, �兪吉濬全書� 1(一潮閣, 影印本, 1971년), 400-401쪽 참고.

    83) 李建昌, �明美堂全集�, 卷7, 疏, 擬論時政疏.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27

    - 63 -

    거부하였다. 또한 그들은 성현(聖賢)의 권위나 사물의 일정한 이치, 세상의 여론 등

    을 행위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특히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그럴듯

    한 명분이나 성현의 권위로 포장하는 거짓과 가식을 심히 배척하였다. 이러한 것들

    은 자기의 주체성을 스스로 손상하거나 포기하는 것이며, 타인의 주체성을 침해하여

    결국은 그 사회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고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강화 하곡학파는 진정한 주체란 자기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다른 존재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본질을 창의적으로 실현하는 역동적(力動的) 주체라는 것이다. 그

    들은 학문과 삶의 가치와 목표를 외부로부터 내부로 돌렸다. 외면(外面)으로부터 내

    심(內心)으로, 다른 사물로부터 자신에로 방향을 전환하여, 내심을 오로지 하고 자신

    에게 충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고[存心], 마음을 진실

    하고 충실하게 하며[實心], 참마음의 이치를 알고[眞知] 이를 신실하게 실천하는[實行]

    일련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강화 하곡학파의 학문과 삶은 부귀공명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 자유를 추구하며, 허가(虛·假)로 포장된 자아에 대한 반성을 통해 진실성을

    회복하고, 명분과 형식,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고

    선택하며 책임을 지는 주체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강화 하곡학파는 개인이나 사회의 진보와 발전은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토대 위에

    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한 개인으로서 또는 국민으로서, 지식인이나 통치자로서

    자아의 정체성(正體性)을 인식하고 자존(自尊), 자주(自主)의 주체성을 실현해 갈 때,

    개인 및 사회가 진보·발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성을 지키는 것과 진보를 위

    한 개혁은 상호 모순된 것이 아니다. 발전을 위한 개혁은 주체성의 실현과정이다.

    강화 하곡학파의 인물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진실과 진리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

    겼으며,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실심(實心)·양지(良知)에 따르며, 주체성을 잃지 않

    은 삶을 살았다. 삶의 실제적인 진보와 발전을 위해 현실과 연관된 분야의 다양한

    학문, 즉 수학, 천문, 지리, 의학, 농업학 등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학문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국(利國)·편민(便民)의 실심(實心)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근대적 성향 또는 근대지향의식이란 인류문화 전반에 걸쳐 후진성으로부터 진보

    와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주체적 특성 즉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개성, 자

    주와 자율, 자유와 독립 등을 지키면서 인간의 보편적 도덕성과 차별적 재능을 실현

    하며, 나아가 다양한 사물과의 만남에서 그 이치를 구현하여 물질의 개발을 도모하

    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화란 주체성의 확립, 정신문화의 진보, 물

  • 28 �인천학연구� 7(2007.8)

    - 64 -

    최종원고제출일 : 2007. 7. 10 원고심사일 : 2007. 7. 25

    주제어 : 鄭齊斗, 霞谷學派, 江華學派, 近代化, 主體性, 實心, 誠, 良知, 實學, 實政

    질문명의 발전 등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강화 하곡학파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주체성의 확립을 근대화의 핵심이요 근본적 요소로 삼았던 것이다.

    누구나 염원하는 근대화, 즉 진정한 진보와 발전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우

    리는 강화 하곡학파의 사상과 삶으로부터 근대화를 위한 다음과 같은 개혁의 지혜

    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대화를 주도해가는 사람들의 개혁의 동기(動機)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과 꾸밈으로 아름답게 포장된 명분(名分)을 내세우면

    서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은폐하는 일이 없이, 자신만이 아는 자기 내면의 진리 또

    는 양지에 충실한 마음[實心]에서 비롯하는 개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개혁의 진

    정성, 즉 꾸밈없는 본래적 자아 또는 자국(自國)에 대한 자존(自尊) 및 자애(自愛)의

    마음과 자주적(自主的), 자율적(自律的) 태도를 개혁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개혁이란 당면한 현실의 문제 상황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나 자신이나 우리 사회

    와 관련하여 지금 당장, 그리고 이곳에서 극복하거나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

    를 찾아내고, 그 문제의 원인을 먼저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진보와 발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비판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셋째,

    합리적이며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개혁의 주체들이 몸소 실행해야

    한다. 진보와 발전의 미래상이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할 때 동감(同感)을 얻게 되며,

    개혁의 주체들이 몸소 실행할 때 공감(共感)과 참여(參與)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이다.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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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 하곡학파의 근대적 성향 ▮ 박연수 31

    - 67 -

    The Modern Trend of the Kanghwa Hagok's

    School

    Park, Youn-soo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elucidate the modern trend of the Kanghwa

    Hagok's school, that aims at the realization of identity and social

    development.

    According to Hagok Jung Je-doo(1649〜1736), human mind is the master

    and criterion of myriad things. This means human mind is the spring of all

    principles of things, and the agency realizing individual principles. For Hagok

    the mind of sincerity or the illustrious virtue is the root of effective

    government. It is the innate knowledge of goodness that extends and

    illustrate the illustrious virtue. It makes world-peace, keeps order and brings

    up all things that preserves and realizes the practical mind of benevolence

    and wisdom. Therefore his sociopolitical reforms follow the realization of

    identity.

    Kanghwa Hagok's school tried to recover original human identity or true

    humanity from the hypocritical and selfish ego. They wholly reflected on

    themselves and endeavored to have practical mind, to know real principles,

    and to practice the truth faithfully. Futhermore their learning and living

    aimed to recover a decline in the national power and inspire the loss of

    national spirit. They intented to realize the Korean national identity by the

    research of Korean studies, the educational enlightenment,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realization of

  • 32 �인천학연구� 7(2007.8)

    - 68 -

    Key-words : Hagok's school(霞谷學派), identity(主體性), modern(近代的), Jung

    Je-doo(鄭齊斗), the mind of sincerity(實心), illustrious virtue(明德),

    the master and criterion(主宰와 權衡), effective government(實政),

    the innate knowledge of goodness(良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