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중동의 평화: 차이의 종교학에서 본 종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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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동학회논총 |제35권 제2호 [2014. 10]: 59∼85 교황 프란치스코와 중동의 평화: 차이의 종교학에서 본 종교와 정치의 관계 |안 신*||김 신**| Ahn, Shin Kim, Shin 1) Pope Francis and the Peace of the Middle East: The Relation between Religion and Politics in the Perspective of the Religious Studies of Difference Modern society is religious society. Religion is deeply rooted in human society, contributing to social integration and exerting huge influence on the thought and behavior of social members. However, religion represents itself as a typical ideology of a certain society. As religion is combined with ethnic groups, this forms the exclusiveness of religion, resulting in religious conflicts. Both Islamic and Christian fundamentalists try to achieve their goals in extreme ways. Those who have moderate opinions are interested in the simple maintenance of their coexistence rather than the active peace between them. Asked to answer the question of the principle of reconciliation, it should be reciprocality because peace cannot be achieved by one side. Even if possible, the reconciliation based on the sacrifice and understanding of not both sides but only one side has its limitation. Therefore, the first step for both sides is to admit and identify their differences. After all they have existed for centuries and will do in the future. It is the high time that the inner voices of both Christians and Muslims should * 1저자, 배재대학교 종교학 교수 및 종교문화연구소 소장, E-mail: [email protected] * 교신저자, 배재대학교 외래교수 및 종교문화연구소연구원, E-mail: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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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동학회논총|제35권 제2호 [2014. 10]: 59∼85

교황 프란치스코와 중동의 평화:

차이의 종교학에서 본 종교와 정치의 관계

|안 신*||김 신**|Ahn, Shin ․ Kim, Shin

1)

Pope Francis and the Peace of the Middle East: The Relation between Religion and Politics in the Perspective

of the Religious Studies of Difference

Modern society is religious society. Religion is deeply rooted in human society, contributing to social integration and exerting huge influence on the thought and behavior of social members. However, religion represents itself as a typical ideology of a certain society. As religion is combined with ethnic groups, this forms the exclusiveness of religion, resulting in religious conflicts.

Both Islamic and Christian fundamentalists try to achieve their goals in extreme ways. Those who have moderate opinions are interested in the simple maintenance of their coexistence rather than the active peace between them.

Asked to answer the question of the principle of reconciliation, it should be reciprocality because peace cannot be achieved by one side. Even if possible, the reconciliation based on the sacrifice and understanding of not both sides but only one side has its limitation. Therefore, the first step for both sides is to admit and identify their differences. After all they have existed for centuries and will do in the future.

It is the high time that the inner voices of both Christians and Muslims should

* 제1저자, 배재대학교 종교학 교수 및 종교문화연구소 소장, E-mail: [email protected]

* 교신저자, 배재대학교 외래교수 및 종교문화연구소연구원, E-mail: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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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raised, posing critical views on their own religions. They could be called as ' homo religiosus' who is willing to have a talk with the opposite side. Both of them believe in God and confess that God created the world. Therefore, they should denounce violence toward each other and the world, and admit the differences of their neighbors.

[Key Words : Middle East problem, religious conflict, difference, religious society, reconciliation]

I. 문제제기: 종교 간 갈등 해소의 새로운 방향

대화는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의 관

점과 의견, 그리고 생각에 대해서 내 마음에 수용할 공간이 생길 것입니다.

- 베르골료 추기경(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하늘과 땅>에서(번슨 2013, 334)

현대는 여전히 종교사회다. 우리사회에서 특정 종교인의 수가 감소하고 종

교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종교는 이미 구체적인

삶의 자리, 즉 개인으로부터 가족, 사회집단, 국가체계를 아우르며 우리의 안과

밖을 규정하는 문화의 일부가 된지 오래다. 다시 말해 아무리 종교에 대하여

냉담한 개별존재라 해도 종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

기 힘들다. 저마다 특정종교들과 다차원적으로 뒤얽혀 자기도 모르게 개별종교

와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나아가 종교의 영향력은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종교는 인간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의 통합에 기여하며 사회구성원의 사고와 행위, 즉

삶의 방식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종교는 특정

사회의 중심적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 되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종교의 잠재

력은 반드시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만은 않는다. 세계도처에서 민족이라는

관념과 결합한 종교의 태생적 배타성은 종교 간 갈등(religious conflicts)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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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반목으로 상존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우리사회는 특정종교

의 일방적 주도권이 인정되지 않는 종교다원성(plurality) 사회로 볼 수 있다. 따

라서 간혹 종교간 갈등상황이 초래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사회에서 특정종교

에 의한 독주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종교계 내부에, 그리고 다수의 국민정

서에 불문율(不文律)로 자리하고 있다. 이는 역(逆)으로 추론하면 한국의 종교

에는 한국적인 ‘색(色)’이 존재 하지 않는다는 함의(含意)가 내포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1)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주장했던 ‘상상의 공동체’라는 민족

정체성으로부터 소수의 권력관계에 의한 관(官)주도의 민족주의를 경계하며 대

중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바람직한 설정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눈길을 조금

만 외부로 돌리게 되면 유감스럽게도 경제, 군사적-힘을 바탕으로 하는 외부적

압력과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내용의 힘’에 의한 종교가 야기하고 있는 민

족 간 패권다툼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더 이상 종교로 인한 민족적 다툼은

멀리 중동의 문제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본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역사적 관점과 교리적 차원에서

검토하고 일차적으로 대립하는 두 세계종교의 갈등원인을 분석할 것이다. 그리

고 이러한 종교 간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중동

방문의 의미를 종교 간 대화의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소위

주류종교중 하나인 그리스도교와 한국 내 소수종파인 이슬람 사이에 아직은

주목할 만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른바 ‘다문화정책’이라

는 국가정책 하에서 빠른 속도로 다인종, 다문화 체제로 변화하고 있는 한국사

회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갈등문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

요소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이 양자의 관계성과 대립의 배후를

종교학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더불어 공존의 방법론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1) 한국의 종교상황과 관련, 강돈구 교수는 한국사회의 종교상황을 혼재상황으로 설명하며 이러한

혼재상황을 공존상황으로 바꾸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강돈구 200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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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방법론: 차이의 종교학

종교 간의 대화는 탁상공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전통을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신앙 성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2013년 6월 28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국제신학대화위원회위원장과의 만남에

서(김종봉 2014, 56)

종교를 인간현상으로 연구한다는 점에서 종교학은 신의 계시(啓示)를 진리

의 원천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해석하고 체계화하는 개별종교의 신학과 구별된

다(김승혜 1997, 18). 특정종교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주관적 관점을

최대한 배제한 채, 개별종교를 분석하고 해석하고자 애쓰는 것이 호교론(護敎論)적 개별종교의 신학과 구별되는 종교학의 보편적 연구자세일 것이다. 따라

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이러한 종교학의 연구대상임은 지극히 당연하다.

현재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갈등상황은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어온 현재완료

진행형이다. 그런데 요즘 종교계와 우리사회 일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담론 중

하나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공존(coexistence)’이란 구호이다. ‘공존’이

란 어휘가 주는 교훈적 인상(image)은 우리를 부정적 인식에 함몰시키기보다

긍정적 사고로 이끄는 묘한 상징의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우리

가 꿈꾸는 이상과 괴리(乖離)가 있는 법, 공존의 단어가 가진 함의(含意)는 ‘현

실’이라는 맥락(context)에서 실현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지,

현실에 자리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서 고민 없이 터져 나오는 공존의 남발은

정치적 수사로 치장된 무의미한 말의 향연(饗宴)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의 인식(recognition)과 차이(difference)에 대한 이해의 틀조차 정

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존을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담론으로 그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자의 공존을 언급하기에 앞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발생

되고 있는 갈등의 원인과 그 내용을 들여다보는 것이 양자의 건강한 관계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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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한 지난(至難)한 과정의 일차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광의(廣義)적

으로는 인문학의 의무이며, 동시에 종교학이 감당해야 할 의미 있는 주제이기

도하다. 우리는 사유하고, 설명하고, 규정하는 ‘대상’에 대하여 우선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이 난무하고, 결국 왜곡된 신화(神話)가 양산 되

는 것이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종교일반’의 분류(classification)는 서구 종교학계

에서는 막스 밀러(F. Max Müller)의 역사적 강연을 기치로 태동한 ‘근대 종교

학’의 등장과 더불어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화된 분류법이지만, 이슬람 세계에

서는 이러한 범주(category)형식이 간혹 불쾌감을 유발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

며, 때론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을 수 있는 신성모독(sacrilege)의 언표(言表)이기

도하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긴장 관계를 설명할 때, 요즘 그리스도교 세계내부에

서 흔히 언급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이슬람에 대한 몰이해

(lack of understanding)’가 이슬람 세계와 그리스도교 갈등의 ‘주원인(主原因)’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을 상당부분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

세계의 이 같은 자기반성의 태도에서 무슬림의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강조하

는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있음을 동시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2) 전통적 그리

스도교 국가인 미국을 위시한 서구열강의 패권주의로부터 기인한 이슬람 세계

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행위와 반(反)문명적, 비(非)그리스도교적 행태는 더 이

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재차 확인하자면 폭력을 반대하는 원칙에 관한

확고한 입장은 자명하다. 다만 이러한 서구일반(한국을 포함한)의 자기반성(自己反省) 과정에서 우리가 더불어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이슬람과 그리스도

교의 갈등관계는 어느 정도 ‘필연적(inevitable)’이라는 명백한 사실의 ‘인

정’이다. 다시 말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태생적으로 갈등구조를 가질 수밖

2)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은 지식인 세계의 금기이며 소수자에 대한 거대권력의 압제로 비춰지고

있으며, 특히 우리 사회에서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인식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슬람은

우리 사회에서 언제 부터인가 피해자로만 굳어지는 이미지(image)로 고착화가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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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는 관계구조(relational structure)를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다.3) 단적으로 말

하자면 “다른 것은 같지 않은 것이다.” 다른 것을 억지로 같게 하려 애쓰고,

오히려 차이 보다 유사성을 강조하고, 자꾸 뭔가를 끌어다 끼워 맞추려 하다보

면 결국 이상한 변종(變種)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이슬람과 그

리스도교 세계 모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다름(difference)에 대한 인정이 논

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다름’ 혹은 ‘같지 않음(not the same)’에 대한

인식론적 준거(criteria)가 우선적으로 양자모두에게 받아 들여져야만 한다는 것

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후속 단계로 우리가 고대하는 양자 간 공존담론의

전개가 가능해 질 것이다.

대개의 종교는 궁극적 실재와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제공

하며, 개인과 인류의 구원과 해방에 대한 전망을 열어준다. 이렇게 구원과 해방

에 대한 전망, 즉 구원론(soteriology)과 연관되기 때문에 종교는 단순한 지적 유

희가 아닌 자신의 전 존재를 내건 실존적 결단의 문제로 이해되어지게 된다(고

건호 2001, 38). 이 같은 실존적 선택이 요구되어지기 때문에 유일신 종교들 사

이에는 선택과 관련한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에 있어서 서로에 대한 인식론을 올바로 확립하지 않고, 양자의 관계성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Ⅲ. 유일신(唯一神) 종교들의 공존, 가능한가?

우리는 평화의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갈라놓지 말고 증오심을 끌

어내리고 새로운 벽을 만들지 말고 화합과 대화의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 2013년 10월 1일 세계종교인대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김종봉 2014, 61)

3) 이슬람과의 대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김영한 20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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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공통적으로 유일신종교(monotheistic religion)이다. 유

일신종교는 속성 상 필연적으로 다른 유일신 종교에 대해 ‘배타성(排他性)’

의 한계를 지닌다. 더욱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같은 신을 다르게 해석할 뿐,

‘아브라함의 하나님/하느님’을 신앙하는 뿌리가 동일한 종교이다. 동일한 하

나님/하느님을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의 그리스도론에 토대해 이해하고, 무

슬림들은 유일신 위대한 الله 알라로 신앙한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하나의

본질을 지닌 세 위격’(Trinity)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고, 이슬람

은 오직 하나님 ‘알라’ 하나의 존재만을 믿는 종교이다. 이슬람의 신앙고백

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를 선언하고 있다. 창조자를 신의 아들이나

신의 영(靈)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알라와 그의 모든 천사들의 적(敵)일 뿐이다.

이 같은 교리에 기반 해 이슬람은 오직 단일(單一)하고, 유일(唯一)한 알라를 신

앙으로 고백할 뿐이다. 당연히 무함마드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부정한다. 그는 알라를 “셋이라고 말하지 말라.”주장했으며(꾸란 4:

171), 따라서 이슬람 교리는 알라는 언제나 한분이고 둘이나 셋이 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한다. 무슬림은 알라를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초월적 존재

로 표상(表象)하기 때문에 알라를 아버지로서 이해 할 수 없으며 더구나 아버

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알라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다. 이러한 이슬람의 유

일신론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확립된 이슬람 교

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삼위일체교리 역시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끝

(α ω 알파와 오메가 )’과 같은 양보가 불가능한 절대교리이다. 정통 그리스도

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지켜내기 위해 무수한 이단 세력과 죽

음으로 싸워왔다. 교리의 차이는 곧 신학의 차이이며 신학의 차이는 결국 서로

다른 신앙 공동체의 사고방식과 문화의 내용적 차이로 재현되어진다. 같은듯하

지만 전혀 다른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적 차이가 양자 갈등의 시작

지점이라 할 수 있으며, 양쪽 모두에게 절대간극의 필연성을 안겨주는 구조적

한계이기도 하다.

‘나’는 나라는 자기규정성(self definition)을 통해 성립한다. 나는 그러나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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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적으로 '우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즉 나의 ‘나 되기’는 곧 ‘우리 되기’

이다. 따라서 나의 술어(述語)에 들어가는 규정성들은 집합적이다. 이른바 주체

화의 과정에서 내가 아닌 타인은 객체화 되고 결국 타자(他者)화된다. 이 같은

인식론적 자기 존재의 이해과정은 서구합리성의 독특한 특징이기도하다. 나르

시즘(Narcism)에 함몰되어 스스로 방법적 회의와 순전히 자기비판을 통해 자기

충족성의 원리에 사로잡힌 데카르트(Rene Descartes)이후 근대 서양정신에게 있

어서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주체를 주체화 시키지 못한 채, 언제나 신에게 종속

된 자아의 모습만을 긍정하는 이슬람의 ‘사유구조’는 이미 촌스러운 옛것이

요, 청산해야 될 ‘잔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구사회는 일찍이 시민

혁명을 통해 구시대의 제도를 혁파한 후 ‘혁명(revolution)’이라는 급진적 방

식을 활용, 수정(correction)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정신구조’의 개혁을 시도

했고, 또 실제 나름 획기적 성과를 경험하게 된다. 천년이상을 군림해온 지배계

급에 대한 반동(反動)과 피의 숙청을 통해 왕정과 귀족정치, 즉 계급구조를 완

전히 뒤집어, 말 그대로 체제의 ‘판’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러한 격변의 시

기, 서구에서는 구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새로운 시대이념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주의(l’Humanisme)의 절대긍정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혁명의 움직임은 구제도

(l'ancien Regime)의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동시에 구시대의 정신적 배경이었던

종교,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공적역할을 제한하게 된다. 거의 모든 서구인의

정신적 지주인 그리스도교가 공적지위에서 격하되었고, 그때부터 실제 내용적

으로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교는 종교일반의 하나로

서 사적영역, 즉 개인 신앙의 차원으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프랑스혁명의 시대

정신은 나폴레옹의 유럽정복전쟁과 더불어 전 유럽에 파급된다. 비로소 유럽은

정교(政敎)혼합 체제에서 명실 공히 정교분리의 형식을 갖춘 근대국가의 체계

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현대 서구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에 대해 사적, 공적영

역의 구분이 다소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지배세력의 견제장치로서 법의 지배를 공고히 했으며,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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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서구의 지배계급은 삼권분립(三權分立)의 기틀을 다졌고, 프랑스를 필

두로 종교가 세속의 영역인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이러한 근대정치시스템의 구축은 계몽주의의 영향아래 점차 서구전반으로 확

대되어지고,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역할재고는 이슬람 세계에

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전제일 뿐이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무함마드 사후 종교와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로서 무슬림을

다스린 것은 칼리파(Khalīfah)들이었다.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잇는

칼리파들은 예언자로서 무함마드만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무슬림들의 신앙의

수장으로서 무함마드를 계승한 지배계급이었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 이후에는

이슬람에는 더 이상 예언자가 존재 하지 않으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정통 이슬

람의 입장에서는 분명 이단이다. أمة움마(Ummah)4) 통치를 위해 무함마드가 행

사하던 정교일치의 대권을 계승한 자들이 바로 칼리파 이므로 이슬람 내에서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의 분리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Eliade 2005, 129).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초대 칼리파 아부바크르(Abū Bakr, 632-634재위)를 비롯

하여 오마르(Umar, 634-644), 오스만(Uthmān, 644-656), 알리(Alī, 656-661)등 초기

칼리파들 모두가 움마를 통치하는 정신적, 세속적 지도권이 공히 그들에게 주

어져 있다고 믿었다. 또 무슬림 신민들 스스로도 이 둘 사이에 어떤 구별도 두

지 않았었다. 그들은 독실하고 종교적으로 올바른 인물만이 칼리파로서 하나님

의 백성들인 무슬림들을 이끌고 공동체를 위해 선한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생

각하였다. 정부(Ummah)의 주 기능이란 것도 꾸란에 명시된 대로 신의 법에 복

종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القرآن꾸란(Qur'an)을 정

확히 해석해 내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필요한 경우에는 무함마드가 말

하였거나 실행하였던 선례에 비추어서 만사를 해결하고 판결해 내려 하였다.

꾸란과 예언자의 سنة순나(sunna, 관행)가 종교적인 일, 정치적인 일에 구분 없이

4) 무함마드는 부족의 결합이 종교적으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종교적 통일성을 지닌 정치공동체 움마를 만들어냈다. 그는 무슬림공동체가 습속과 인종의 국

경을 넘어 확대되는 것을 허용했다(엘리아데 2005,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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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마 통치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곧 신의 법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연유로 만약 정부가 나쁘면, 그것은 통치자가 통치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통치자가 더 이상 독실하지 못하고, 종교적으로 바르지 못하여 신의

법에 복종하지 않거나 등한시한 것으로 단정하였다. 따라서 움마에서는 정치반

란들이 항시 종교적 이유를 내걸고 정당화 되어졌다. 그들에게는 정치적인 일

이 곧 종교적인 일이었으며, 칼리파를 원하는 자도 이를 탄핵하려는 자도 모두

가 꾸란과 예언자 순나를 내걸고 투쟁했던 것이다.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이러

한 정교일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이슬람 정치사상과 칼리파제도 연구에 필수적

이다. 왜냐하면 칼리파제가 이슬람 정치사상의 골격을 이루고 있고 그 이론적

틀이 바로 정교일치 개념으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칼리파제에 대

한 정의를 한마디로 종교 수호와 현세에서의 올바른 정치로 정의한다. 무함마

드가 정치, 종교 양면의 총 지도권을 행사했던 것처럼 칼리파들이 이를 그대로

계승하여 이슬람교국을 통치해온 체제를 칼리파제라 부른 것이다. 공동체가 종

교를 바탕으로 세워졌고 그 공동체가 교회이자 국가인 개념에서 출발하였기 때

문에 그들에게는 정교일치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

거의 모든 서방국가들은 정교분리를 헌법의 원칙으로 삼고 국가체제에서 종교

를 배제시키고 있다. 이들에게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확고

한 원칙인 것이다. 또한 서구가 가지고 있는 정교분리원칙은 형식논리상 그리

스도교 전통의 영향 탓으로 볼 수 도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처음부터 세속의

것과 내세의 것을 갈라놓은 예수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왔다. 정치권력에 대한

그리스도교인들의 기본정신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이를 통해 두 종교의 정교문제에 대한 상반성(opposites)을 비교해 볼 수 있고,

정치권력을 대하는 그리스도교인들과 무슬림들의 태도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

기 때문이다(손주영 1996, 75-89).

요컨대 현세의 삶의 공적(功績)을 긍정하는 이슬람의 세계관은 세상의 권력과

하늘의 권력을 결코 이분(二分)할 수 없다. 신이 죽었다고 떠들 만큼 신성모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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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시되고 과학문명의 발전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의 탐스런 과실에 심취해 있는

당시 서구인들의 눈에는 이슬람과 무슬림들은 소설과 회화에서 왜곡되게 등장하

는 한낱 덜 떨어진 구시대의 잔재로 인식될 뿐이었다. 결국 서구인들에게 이슬람

은 한때 두려운 타자에서 이제 정복하고 깨우쳐야 할 대상, 미개한 종족으로 전락

하게 된다.

Ⅳ. 십자군 전쟁과 냉담한 공존

인류의 역사, 우리의 역사, 개인의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

리가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것에는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를 이어 가는 요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 베르골료 추

기경(프란치스코 교황)이 2003년 4월 교육위원회에 보낸 연례메시지(콜라조, 로

각, 2014, 175)

인류는 만남을 통해 타자를 인식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증진 시켜왔다. 지

속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지리

적으로 매우 가까우면서도 이슬람세계와 그리스도교세계의 만남은 처음부터

평탄하지 못했다. 그 결정적 이유는 역시 그들이 신앙하는 종교 때문이었다. 양

쪽은 성전(聖戰)이라는 무력충돌을 통해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한 만남을 시작

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갈등관계는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담보 되지 않는

한 갈등상황이 해소되지 않은 채, 고착화 하는 양상을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유지는 달리말해 끝이 나지 않는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5)의 한 종류로서 성전(The Holy War)은 다른 전쟁과 그 발발 원인이

5) 전쟁이란, 조직적으로 계획된 폭력의 한 형태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전쟁이 일어난

장소와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법규를 생성된다. (루엘랑 200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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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되어, 종교적 동기(motivation)가 직접적 원인이 되는 전쟁을 일컫는다. 성

전의 관념은 유일신 신관을 가진 히브리민족이 처음 사용했다는 일부 서양사가

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역사적으로 히브리인의 전쟁이 최초의

성전으로 기록되어진다(루엘랑 2003, 17).6) 게르만의 후예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이끄는 프랑크 왕국의 군대가 AD732년 이슬람세력을 뿌와띠에

(Poitier) 전투에서 격퇴하고 그의 손자 샤를마뉴(Charlemagne, 768~814)는 오늘

날의 프랑스, 독일전역, 이탈리아북부, 스페인북부지역에 걸쳐 서방을 통일 한

후 AD800년 성탄절에 부활된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한 이후 서방의 그리

스도 세계와 동방의 이슬람은 애써 무관심의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당시 이슬람 치하 성지의 거주했던 그리스

도교인들은 인두세(人頭稅)를 제외하곤 별다른 외부적 핍박은 없었으나(루엘랑

2003, 86)7) 예루살렘성지에서 산발적인 그리스도교도 핍박사건 등이 발생한 이

후 교황 Urbanus 2세(Pope Urban II)는 1095년 삐아센자 공의회(Piacenza

Councils)를 소집하여 Deus lo Volt (God wills it/Will of God) 역사적인 십자군전

쟁을 주창(主唱)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은 초기 서구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황의 요청 또는 허락

내지 교황의 정치적 판단에 의한 연합과 기피의 복잡한 상호관계성 속에서

1095년부터 15세기 무렵까지 7차에 걸쳐 이슬람에 대응해 수행됐던 성전(聖戰)

을 가리킨다. 십자군 전쟁의 공식적이며 표면적 동기는 이슬람교도에 의해 상

실된 ‘성지(聖地)의 회복(回復)’이었다. 동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남부이탈리

아와 에스파냐에 이르기까지 이교도 이슬람을 격퇴하고, 유럽을 안전한 그리스

도교 제국으로 완성하는데 그 표면적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해석의 지평을 넓

6) 하지만 이는 매우 제한적이고 편협 된 추측이라 판단된다. 성전(聖戰)의 개념은 기원전 제정일치

체제에서도 빈번하게 실행되었던 것으로 당시 다수의 왕국과 부족국가 등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진 현상이며 단지 개념화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단지 히브리민족에게만 성전의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은 친유대적 내지 친 그리스도교적 사고의 결과라고 유추되어지며 그 근

거와 논리의 설득력이 부족하다.

7) 이슬람 통치하에 그리스도교도가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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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신, 김신| 교황 프란치스코와 중동의 평화 | 71

혀 들여다본다면, 우선 교회의 입장에서는 당시 권력의 정점을 향해 착실히 발

전하고 있었던 교황권(敎皇權)의 대내외적 과시와 더불어, 이분(二分)되어있던

동로마교회에 대한 서방교회의 우월적 지위 확인이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였

고, 현실 정치적 맥락에서는 그때까지 세련된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갖추지

못한 통치계급의 불완전성과 이러한 지배계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봉건

지배체제 하에서 영지(領地)조차 소유하지 못한 하층기사들의 봉토소유에 대한

열망의 개입 등, 귀족과 기사들의 현실적 욕구가 뒤얽힌 전쟁이었다.8)

나아가 십자군 전쟁은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서방과 동방상인계층의 사적

이익과 관련한 헤게모니(hegemony)다툼, 거기다 무지한 피지배 계급의 군중심

리와 당시 신분을 초월해 공통적으로 직면해있던 종말론의 두려움을 단번에 극

복할 수 있게 해주었던 원정참가자에게 약속된 구원의 징표, 즉 전적 면제(全的免罪)의 보상이라는 맹목적 신앙관 등이 결합하여 거의 5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체제 유럽이 전쟁을 통해 외부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내부적으로는

자기일체감과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9)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

아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세계는 스스로의 종교적 일체감을 확인하고 내부적 결

속과 정치적 질서를 모색할 수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항구적(恒久的) 타자성의 확인, 그로인한 배타성이 고정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세계에 의해 정복당한 후 유럽은 지중해 무역축소로

인해 부득이 대서양을 통한 신항로 개척을 시도하게 된다. 이슬람 세계의 그리

스도교 세계의 상업적 포위는 아이러니하게도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지구상에

서 또 하나의 거대한 그리스도교 대륙의 등장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보다 월등한 기술력을 가진 이슬람 세력이 칼리파와 우마이야

8) ...but if many crusaders had been motivated by ideals, their ideals were certainly not the same as

those of high churchman, and what nobles and knights thought and what their aspirations were

have become live issues(Jonathan 1999, 10).

9) 십자군이 유럽의 공동체 의식함양에 일조했다. 이슬람과의 전쟁 과정에서 유대인의 대학살도

십자군에 의해 자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세계의 문화적 정의는 촉진되었다(슈말레

2002,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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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Umayyad Dynasty)와의 이슬람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다마스커스에서 다

시 바그다드로 중심을 이동하고 중동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말

레이지역 까지만 진출한 것은 이슬람 다와(선교)의 입장에서 매우 뼈아픈 역사

적 실기(失機)로 볼 수 있다.

지리적 발견을 기반으로 유럽은 착취와 서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통해 일방

적으로 서구에 봉사하는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이러한 식민지를 기반으로 상업

혁명을 통해 산업혁명의 토대를 다진 후 궁극적으로 ‘근대국가’의 틀을 갖추

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이슬람 사회는 서쪽으로는 프랑크

왕국을 시초로 신성로마제국 휘하 스페인에 이르는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를 경

계로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의 사이에 고립된 채 자신들만의 이슬람 왕국에

서 후일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이르기까지 나름 ‘자족의 삶’을 영위하게 된

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의 시기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슬람세계의 그리스

도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이다. 이슬람 지배 아래에서 이집트의 콥트교회,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인과의 ‘평화로운 공존’

은 두 종교 사이 공존의 주제와 관련, 현 시점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적지 않

다.10)

역사적으로 서구의 내부적 한계와 무지몽매함 그리고 신앙의 극단주의에 기

인한 십자군 전쟁으로 촉발되어진 서구와 이슬람의 전쟁은 서로를 이제 완전한

이교도이자 ‘적’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었으며, 이러한 인식론적 이원론(二元論)은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십자군전쟁 후 이슬람

과 그리스도교 세계는 분리된 채, ‘냉담한 공존관계’로 서로 역사와 마주하

게 되었다.

중세시대 이슬람문명은 서구 그리스도교세계를 압도하였다. 이슬람은 아라

비아를 벗어나 7세기로부터 중세 15세기까지 외부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

다. 이슬람의 영향력은 당시 유럽 일부,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중국접경지역,

10) 아람인의 하다드, 비와 땅을 다스리는 최고신 과 로마의 주피터 신전 그리고 비잔틴 시대 세례

요한 교회 이슬람 시대의 우마이야 사원 등은 증층적 다종교 성역의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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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신, 김신| 교황 프란치스코와 중동의 평화 | 73

인도 일부, 동남아시아로 거침없이 진격하여 거대 이슬람 세계를 건설한다. 16

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이슬람 세계는 군사적으로 서구를 능가했으며, 문화적

수준에 있어서도 서구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서구 인식론의 상징적 존재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철학(The Corpus Aristotelicum)의 가치를 견하고

이를 재구성 한 것은 다름 아닌 아랍철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였다. 그의 연

구를 기반으로 당시 서구교육의 중심지 빠리(paris) 대학에서 1255년을 기점으

로 철학부(Faculty of Philosophy)강의가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스텐

베르겐 2000, 157).

이슬람세계와 그리스도교세계는 십자군 전쟁 이후 서로 냉담한 공존 관계를

상당기간 가진 이후 서구가 근대화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었

다. 이슬람세계가 서구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서구세계에 뒤처지게 된 결정적 원인중 하나가 바로 근대화의 지

체(delay)이다. 그러나 이슬람세계에서 소위 서구기준의 ‘근대화’가 전혀 시

도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 내부에서도 근대화에 대한 나름의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에 대한 이슬람의 반응은 서구와 유사한 반응 형식을 보

여준다. 내부적으로 근대화에 대한 찬성과 반대 등 다양한 목소리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내부에서 근대화에 대한 조건반사로서 일부는 서구문물의 과

감한 수용을 주장했고 역으로 전통이슬람의 ‘정화(lustration)’를 근대화의 기

반으로 주장하는 입장이 병존했다. 후자의 주장 배경에는 이교도(pagan) ‘그리

스도교’ 세계로부터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신앙의 정체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전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도 오래 가지 못

했다. 당시 이슬람제국의 패권자인 오스만제국은 쇠퇴하고 있던 제국의 영향력

을 단번에 회복하고자 시도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침공(1683년), 크림전쟁

(1687년)에 연이어 패전하며 결정적 한계에 다다른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제국

(Osman Turk Empire)의 셀림3세(Selim Ⅲ)에 이르러 소위 ‘서구식 근대화’11)

11) 필자는 이슬람이 당시 당면한 “근대화”를 서구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전제로

하는 서구제국주의 방식의 근대화로 인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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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모방하며 기술개발, 상업발달, 군대현대화 등 생존의 고민에 봉착한다. 이러

한 이슬람 사회의 서구식 근대화의 지체현상은 제정일치사회인 이슬람 정치체

제의 경직성을 하나의 주원인으로 분석할 수 있다.

Ⅴ. 식민지 경험과 종교의 자유

종교 안에는 인간적 측면을 무시하는 매우 많은 규범들이 도사리고 있습니

다.

- 베르골료 추기경(교황 프란치스코), 『하늘과 땅』에서(콜라조, 로각, 2014,

33)

그리스도께서 ‘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라고 우리 모두를 파견하시기 때

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달하려 움직이라고 요구하고 초대

하시기 때문입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중에서 (비지니 2014, 111)

제국주의가 정치적, 사회적 그 외 어떤 의미로 정당화 되건 간에 항상 존재

하던 것이 유럽인의 일방적 사명감과 의무감이었다. 제국주의는 단지 부(富)를

생산하고 증가시키는 것보다 더 고상한 목표, 즉 가난하고 무지한 주변부의 야

만적 가치들을 교화시키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주의의 팽창시기

유럽은 세 가지 영향력 있는 사상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교, 자

유주의,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인데 이 모든 조류(潮流)들이 식민주의를 지지했

다(박지향 2000, 73).

이러한 유럽인들의 시대정신 앞에서 이슬람의 정체성 유지는 별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붕괴 이후 우후죽순처럼 중동지역에서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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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신, 김신| 교황 프란치스코와 중동의 평화 | 75

나기 시작한 부족연맹체 형태의 군소이슬람 세력들은 식민지배 치하의 지배세

력과 결탁을 통해 세력을 독자화 했고 후일 다양한 이슬람국가의 전신으로 발

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 이슬람 세계 내부에 종교적 정체성은 큰 의

미를 주지 못했다. 종교적 정체성에 집착하기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에

따라 전통적 그리스도교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의 연합군으로서 이슬람 형제인

오스만투르크와 전면전을 치르며 동시에 자기들 끼리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

게 된다. 이러한 중동의 이슬람 세력과 달리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는 종속

된 현실 속에서 부단히 자기정체성의 확인에 몰두하게 된다. 그 후 2차 세계대

전의 종식과 더불어 찾아온 식민지배의 종언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 했

지만, 역설적이게도 특히 북아프리카 출신 피지배 식민지 출신자들에게 실존적

고난을 안겨주게 된다. 특히 경제적 이유로 야기된 식민 지배국가로의 연이은

이주 행렬은 또 다른 불평등 구조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前兆)였다. 오랜 기간

피식민 억압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강제수단에 의해 수행되어진 교육을 통해 획

득된 ‘언어’를 매개로 이슬람 피식민지 출신자들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식

민지배 국가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정체성은 서서히 유럽그

리스도교 사회의 ‘주변인’으로 고착화되어진다.

개인의 종교는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기보다는 그가 속한 사회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제시한

‘아비투스(Habitus)’개념은 개인의 취향과 습관, 즉 아비투스는 사회가 미리

짜놓은 방식으로 형성되고 계발되어진다는 주장이다. 개별인간의 종교적 결정

이 개인의 주체적 결단에 의해서라기보다 그가 속한 집단의 선택방식에 의존한

다는 그의 주장은 일정부분 이슬람사회의 무슬림 공동체를 이해하는데 적절한

이해의 틀을 제공해준다. 과거 서구사회의 경우, 종교가 특정집단 지역의 한계

를 가졌고, 특정사회에 속한 개별인간이 이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던 시기가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서구사회는 내용적인 면에서는 다소 이론

(異論)의 여지가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종교개혁이후 신앙의 문제가 제도의 문

제에서 개인차원 신앙고백의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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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서구에서는 이제 종교는 개인적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속

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물론 이슬람을 비 롯 타종교 공동체의 종교인구가 증가

하고 있고, 동시에 종교 자체를 부인하는 무종교인구도 역시 늘어나는 상황 등

을 보며 종교학자들은 지금의 역동적 상황을 새로운 종교들의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이슬람세계에 대해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켜

부정적 평가를 생성하고 유포하는 흐름이 최근 들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

속화된 서구세계와 대조하면서 이슬람세계에는 종교선택과 관련한 개인의 선

택의 폭과 자유가 상대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대부분

의 이슬람세계에서 무슬림들은 현대 종교다원사회에서 이슬람 외에는 다른 종

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만약에 그들이 일정 나이

에 이르러 그들의 종교를 바꾸고자 시도한다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경우가 이

슬람세계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슬람 종교의 이러한 태생적 폐쇄성은 그들과

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폐쇄성은

특별히 원리주의 등 ‘보편이슬람’과 구별되는 다소 ‘병리적(病理的)인 이슬

람’의 보수적 입장으로 나타나는데, 이들 보수이슬람으로부터 파생된 일부 극

단적 이슬람의 모습이 대다수 평화로운 온건한 무슬림의 가치를 훼손하고 결국

이슬람전체를 왜곡하는 부정적 결과를 낳고 있다.

Ⅵ. 교황의 중동방문의 의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삼자대화?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실

천이 용서라는 측면에서 하느님을 닮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 베르골료의 대담집『교황 프란치스코』 중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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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두 종교의 역사적 만남과 교리적 차이에서 볼 때, 12억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새 교황 프란치스코의 이슬람을 향한, 특히 중동지역을 향한 외교적

횡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무엇보다는 종교의 메시지와 실천을 통하여

정치적 난제를 풀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13년 11월에 중동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무슬림, 유대인, 복음주의

교회신자, 그리고 정교회를 대표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초대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슬람에 대한 실언으로 곤욕을 경험했던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이슬람에 대한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12) 그는 “진정한 이슬람과 꾸란의 적절

한 구절들은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그

를 보좌하는 비서들 가운데 교황의 입장과 거리를 두는 이슬람에 대한 강경노

선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2014년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오랜 친구인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스코르카(Abraham Skorka)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슬람공동체

를 대표하는 오마르 아브드(Omar Abboud)와 함께 요르단과 웨스트뱅크 및 이

스라엘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스라엘을 방문한 가톨릭교황으로서는 바오로 6

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도 16세에 이어 네 번째이다.

요르단의 첫 공식일정에서 교황은 시리아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국제사회에

요청하였으며 특히 요르단에 피신한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호와 관심

에 대하여 요르단정부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요르단정부는 이미 60만 명의 피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상태에서 추가로 13만 명의 피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 새

로운 숙소를 만들었다. 교황은 이번 방문연설에서 “근본적인 인권”으로서 종

12) 가에타에 따르면, 신임 교황이 시급히 해결해야할 10가지 문제가 있다. ①신앙의 해와 공포되

지 않은 교황회칙, ②교황청의 개혁, ③바티리스크파문, ④ 주교단의 단체성과 공동책임, ⑤

아동성범죄와의 싸움, ⑥바티칸은행의 재정문제, ⑦이슬람과 유대교와의 대화, ⑧전통주의자

들을 향한 개방, ⑨메주고리예조사위원회, ⑩선임자와의 동거.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프란

치스코 교황이 이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가에타, 2013, 9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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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요르단의 모델

이 앞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도 꼭 필요하다

고 주장했다(BBC 2014.5.24).

요르단에서 교황은 축구경기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였고 예수가 세례를 받은

장소에서 피난민과 장애인 아동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요르단은 이집트, 시

리아, 이라크와는 달리 무슬림과 그리스도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적 분

위기가 오랫동안 안착되어 온 다원주의사회이다. 주변국의 정치적 혼란과 종교

적 갈등이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통하여 왜곡된 형태로 유포되고 있지만 요르단

에선 소수자 그리스도인에 대한 다수자 무슬림의 박해를 찾아볼 수 없다.

나아가 교황의 방문은 종교 간 관계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다른 가

톨릭공동체와의 만남과 화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요르단의 가톨릭교회는 서

구식 의례, 음악, 경전과는 거리가 멀다. 정교회를 중심으로 동방교회(시리아,

콥트, 아르메니아, 그리스 등)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선교사들

이 과거 요르단 지역에 선교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리스 정교회 교인들이었다. 포교과정에서 정교회교인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

시켰고 전체 정교회를 가톨릭의 이름 아래 범주화시켰다(Time 2014.5.23).

요르단의 가장 큰 그리스도교 교단은 그리스가톨릭교회, 즉 멜카이트파

(Melkite)이다. 이 교회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의 교리와

의례 및 조직을 가지고 있다. 사제들의 결혼을 허락하고 있으며 동서방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필리오케”(아들로부터)의 구절도 신앙고백에 넣지 않고 있다

(El Hassan bin Talal 1993, 70-76). 그러므로 교황의 요르단 방문은 단성론에 기

초한 그리스도교회뿐만 아니라 동방교회(비잔틴과 멜카이트 교회)와 로마 가톨

릭 교회의 상호 이해와 관계를 증진시켰다. 요르단 인구의 3%를 구성하는 그리

스도인들은 ‘종교적 소수자’라는 서구적 개념을 적용하기에 부적절하다. 요

르단 주류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차별 없이 정치, 경제, 문화 활동을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요르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와 자선

단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요르단 경제활동의 3분의 1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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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고 있다. 때때로 내각에 그리스도인이 지명되기도 하며 현재 150석의 국

회의원 가운데 9석은 그리스도인의 정치활동을 위해 할당되어 있다(Time

2014.5.23). 그러므로 신임교황은 이러한 요르단의 종교적 공존과 정치적 관용

의 분위기를 중동지역,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갈등에 해결모델

로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요르단 일정을 마친 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웨스트뱅크와 이스라엘을 방문하

였다. 그의 방문은 종교적 목적에 강조점을 두고 있지만 정치문제에도 큰 영향

을 미치고 있다. 이번 방문은 전임 교황 바오로 6세가 1964년에 정교회의 수장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이스라엘에서 가졌던 역사적인 만남을 기념하는 50

주년 행사의 연장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 만남으로 9백년 간 지속되어 오던 서

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오랜 반복과 질시가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새

교황은 50년 전의 그리스도교들 간 화해의 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점에서 이번

방문의 공식 목적을 정교회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보고 있다.

둘째 날 요르단에서 일정을 마친 후 교황은 일요일 오전에 헬리콥터로 베들

레헴을 방문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부드 압바스

(Mahmoud Abbas)를 만난 후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강론에서 이스라엘의 시

몬 페레스(Shimon Peres) 대통령과 팔레스타인의 대통령에게 조만간 바티칸에

서 열리는 중동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함께 초대하였다. 양측 모두 교황의 초대

를 수락함으로써 지금까지 미국 주도로 진행되어 온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개선의 노력이 한 동안 실패하여 해결점을 못 찾는 난황에서 신임 교황의

노력으로 새로운 화해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The Jerusalem Post 2014.5.25).

교황은 공공선을 위하여 정의에 기초한 평화가 절실한 가운데 있으니 양측

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미사를 마친 후 탄생교회와 팔레

스타인 피난민 캠프를 방문하였다. 이스라엘정부는 이 행사를 위하여 가자지구

에서 600여명의 그리스도인이 이번 교황의 베들레헴 방문에 함께 동참하도록

허락하였다. 교황은 강론에서 이스라엘이 정복하고 있는 웨스트뱅크 지역을

“팔레스타인 국가”(State of Palestine)로 간주했다. 그는 계획에는 없었지만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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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차에서 내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나누는 낙서가 되어 있는 높은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였다.13) 그 콘크리트 벽은 팔레스타인에게는 “괴물”

같고 이스라엘 정부에게는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교황은 “정의에 기초한 안정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아낌없이 힘써줄

것과 양국이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그러한 평화를 이루어내야 함을

천명하였다. 이제 두 국가의 대통령이 6월 6일에 바티칸을 방문하여 중동평화

의 기도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이스라엘 대통령의 임기가 7

월에 끝난다는 점과 실질적인 통치권이 수상에게 있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적 공존과 상호 화해의 과정은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다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얼마나 실질적인 결과를 도출할 것인지에 대해서

는 회의적인 입장도 상당하다(The New York Times, 2014.5.25).14)

교황은 헬기를 타고 텔아비브로 가 이스라엘 대통령과 만난 후 다시 예루살

렘으로 가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저녁식사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교황

의 이번 방문은 확장된 그리스도교의 결속과 화해를 다진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중동방문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가 심도 있

게 다루어졌다. 교황은 이스라엘 정부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동의 자유를 달

라고 호소했다. “대화와 화해 그리고 평화의 길은 지속적으로 새롭게, 용기를

가지고, 지칠 줄 모르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의 네탄야후

수상은 동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며 예루살렘

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이며 신앙의 심장”이라고 답했다(The New York

Times, 2014.5.25).

교황은 26일 월요일에 시오니즘의 창시자의 무덤에 들려 헌화하였다. 이어

바위의 돔을 방문하였고 서편 벽에서 기도한 후에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기념

관에서 6명의 생존자들을 만나 손에 키스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예정에는 없

13) 그 장벽에는 “교황님, 우리는 정의에 대하여 말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14) 이스라엘에서는 실제적인 통치권이 대통령에게 있지 않고 수상에게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페레스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전에 신임 교황이 이스라엘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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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만 테러공격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1994년

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대인센터에서 일어난 폭탄테러사건으로 희생된 85명

의 추모비도 참관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테러리즘은 절대 악입니다. 악에

서 기원하여 악을 낳습니다. 결코 다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다시는.”이

라고 말했다.

이러한 교황의 방문과 기도요청이 답보상태에 빠져있는 중동의 화약고에 대

한 사회적 이미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새롭게 변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문

제는 교황의 대화와 만남에 대한 제안이 너무나 ‘일방적’이라는 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한 제안을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이스라엘 정부의 손

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태의 추이를 좀 더 기다려보아야 할 것이다.15)

나아가 정치적 협상을 종교적 기도와 화해로 대신할 수 있는 지도 또 다른 의

문으로 남는다. 그리고 종교 간 대화는 현실 속에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이 대다수인 중동지역

에서 소수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이슬람과 유대교의 갈등을 봉합하는 평화의 중

재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교황의 이번 중동방문에

서 두 종교 간의 대화가 아니라 삼자 간 대화, 나아가 다자 간 종교 간 대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따라서 강연과 연구에서 추상적인 종교 간 대화가 되지 않도

록 중동지역을 연구하는 종교학자들은 보다 현실적 차원의 종교에 대한 이해와

종교 간 대화의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15) 이 논문이 발표된 이후에 7월 8일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에 대한 전격적인 공습과 공격을

감행하여 거의 한 달 동안 1800여 명의 희생자와 1만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교황은 휴전과

평화를 수차례 촉구했고 이스라엘정부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는 8월 7일 임시휴전에 들어갔다.

교황은 9월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를 요구하는 올스타 축구경기를 마

련하였다. 21세기의 종교가 정치적 강들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를 교황 프란치스코

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 “교황, 이-팔 평화 올스타 축구경기마련, 연합

뉴스, 2014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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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결론: 상호 만남을 통한 세계 평화의 가능성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대화는 전쟁을 종식

시킬 수 있습니다. 대화는 서로 무시하며 살아가는 다른 세대의 사람들을 함께

어울려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대화는 민족이 다르고 신념이 다른 사람들도 한

시민이 되어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대화는 평화의 길입니다.

- 2013년 9월 30일 평화를 위한 국제모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비지니 2014,

299-230)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양자의 근본주의자들은 극단적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

적을 쟁취하고자 한다. 일부 이슬람 지역에서 여전히 자살특공대가 순교로 인

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슬람의 극단적 행위에 서구사회는 경악하고 있다. 동

시에 그리스도교의 패권주의적 선교행태와 무지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구체적

예가 바로 지난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했던 한국단기선교단체 피랍사

건이다. 일부 보수적 입장의 한국교회에서는 이들의 죽음을 ‘순교’로 주장하

고 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양측 입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위해 헌신하다 죽

임을 당한 것은 ‘순교’로 인정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둘 사이 사생결단의 마

주보고 달리기는 끝내 파국만 불러올 뿐이다. 과거 미국의 부시행정부 등장 이

후 9.11 사태를 기준으로 무자비한 이슬람 적대시정책이 시행되었지만, 이를 비

판하는 건전한 그리스도교 내부의 목소리가 보다 커져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상당한 정도의 이니셔티브가 이슬람을 향하여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이러한 이니셔티브는 ‘상호적(reciprocal)’이어야 한

다. ‘나’가 아닌 ‘우리’가 되기 위한 행동은 절대 어느 일방의 노력에 의해

서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의 희생이나 이해를

전제로 하는 상황변화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슬람과 그리스

도교의 ‘다름’의 자리를 확인하고 이를 명확히 한 후, 이제 공존(共存)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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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모

두, 서로의 정체성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싫든 좋든 무

슬림과 그리스도교인은 함께 살아가야 하고, 또 수세기를 함께 살아왔으며, 그

리고 앞으로도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특히 다양한 인종이 녹아져 있는 유럽의

상황은 언제든 인종 및 종교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도 점차 외부로부터 이주민이 증가함에 따라 무슬림 등 이전의 종교지형과

다른 새로운 종교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러한 종교구도의 변화는 서서히

우리 사회내부에 종교 갈등이라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문제로 다

가올 개연성이 있다.

나아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세계에서 이제 그리스

도교와 이슬람 내부에서 각자 자신들이 속한 종파의 문제를 비판할 수 있는 선

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등장을 기대해본다. 더 이상 불안한 현상유지(現狀維持)는 용인되기 어렵다. 스스로 내부적 불합리성을 고발하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혹은 무슬림일 수 있다. 나아가 타자와 대화를 하자고 주장

하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종교인(homo religiosus)’이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 이슬람세계 안에서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대한 회복이 폭넓

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이슬람 내부에서 마치 인문주의는 이슬람과 대립되는

개념인양 타부(taboo)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세상지식의 가치를 긍정하는

이슬람의 본래정신에 반하는 태도이다.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모두 그들이 믿는

하나님/하느님이 인류의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 들 모두의 신이 ‘보시

기에 좋았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그 어떤 종교적 폭력도 이제 배격(排擊)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인정이 절실하

다. 나의 나됨을 강조하는 것도 더할 수 없이 중요하지만, 타자의 존재근거를

인정해 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종교인의 의무임을 그리스도교, 이슬

람 나아가 유대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인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제어 : 중동문제, 종교갈등, 차이, 종교사회,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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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일: 2014년 08월 30일

심사완료일: 2014년 09월 15일

게재확정일: 2014년 10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