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송림사 5층전탑 사리장엄구와 고누무늬 벽돌 · 민속놀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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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송림사 5층전탑 통일신라 9세기 I 경북 칠곡 I 보물 제189호 아름다운 문호유산 칠곡 송림사 5층전탑 사리장엄구와 고누무늬 벽돌 4 _12 • 상장 20 Ί 4.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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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송림사 5층전탑

통일신라 9세기 I 경북 칠곡 I 보물 제189호

아름다운 문호유산

칠곡 송림사 5층전탑

사리장엄구와 고누무늬 벽돌

:4

_

12 • 상장 20Ί4. 3월호

〈그림 2> 집 모양 사리기와 유리 사리용기

통일신라 8세기 I 높이 15.3cml 보물 제325히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사리장엄구

기원전 6세기경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든 뒤

그의 제자와 신도들은 부처의 시신을 화장(火葬)하여 스투

파(탑塔)에 안치하였다. 부처의 시신을 화장하여 남는 뼈를

사리舍利라 하며,사리를 담는 용기(사리용기)와 이와 함께

넣은 불상,작은 탑,경전과 구슬,장신구 등의 공양물 등을

통칭하여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혹은 사리갖춤)라 한다.

일반적으로 유리 또는 수정(水晶) 용기에 사리를 담고,이

용기를 다시 금 · 은 · 동 · 철 · 돌 등 다양한 재질의 용기에

차례로 넣어 탑에 안치한다.

우리나라에 불사리(佛舍利)가 전래된 사실로서 가장 이

른 것은 549년(진흥왕 10년) 중국 양(梁)나라로부터 사리를

가져왔다는『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이다. 이후 선덕

여왕 대에 이르러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유골과 가

사{袈裟) 한 벌을 가져와 황룡사 9층 목탑과 통도사 계단

(戒壇),그리고 태화사 탑에 나누어 모신 것이 사리 신앙의

유행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과

귀족들이 공덕(功德)을 쌓기 위해 많은 탑을 세우면서 사리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난간 위에 드림장식

이 있는 집 모양(殿閣形) 사리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탑 속의 궁전, 송림사 5층전탑 人리기

신라의 고찰(古刹)로 알려진 송림사(松林寺)에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5층전탑이 남아

있다. 1959년 송림사 전탑을 해체 수리할 때에 2층 탑신의

거북 모양 돌함 안에서 통일신라 때 만든 사리기와 여러 공

양물이 발견되 었다.

감은사의 동 · 서 3층석탑 사리기(682년)와 함께 우리나

라 집 모양 사리기 7가운데 연대가 7가장 빠르며,공예기술 면

에서 가장 대표적 인 작품으로 손꼽는 송림사 사리기는 신라

고유의 금속 공예 기술과 서역에서 유입된 유리 제작 기술

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려한 집 모양 사리기는 금동판을 오려서 만들었다. 방

형의 기단 위에 난간을 세우고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워 보

개(寶蓋)(지붕)를 얹었다. 난간 안쪽 중앙에는 여섯 개의 금

제꽃잎을 못으로 고정하여 연꽃모양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

에 녹색 유리로 만든 잔과 사리병을 안치하였다. 유리잔은

표면에 유리로 만든 고리모양을 상 · 중 · 하단에 엇갈리게

붙여 장식하였다. 사리병은 잔과 같은 재질에 목이 좁고 길

며 몸체가 둥근 형태로 보주형(寶珠形)의 뚜껑이 있다.

사리기와 함께 석함 안에는 금제동심원륜(金製同心圓

輪)과 유리구슬,수정,곡옥,관옥,가락지 등이 들어있었으

며,백제 은제관장식(銀製冠飾)과 유사한 금동제나뭇가지

모양관장식(金銅樹枝形冠飾)이 석함 벽에 기대져 있었다.

이밖에 고려시대에 전탑을 수리하면서 봉안했을 것으로

보이는 상감청자사리합이 발견되어,다른 탑에 납입되었던

사리기가 통일신라 후기에 송림사전탑을 건립할 때에 옮겨

넣어졌을7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상장 회사 협의회 · 13

아름다운 문^ᅡ유산_ 칠곡 송림사 5층전탑 사리장엄구와 고누무늬 벽돌

〈그림 3〉 공양물

통일신라〜고려 I 보물 제325히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그림 4〉 고누무늬 벽돌

통일신라 9세기 I 송림사 5층전탑 I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휴식과 여흥, 고누무늬 벽돌

송림사 전탑에서 나온 유물 중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으

로 고누무늬 벽돌이 있다. 이 벽돌은 탑재로 이용하기 위하

여 만들었던 수많은 벽돌 중 하나로,누군가가 선을 그어 고

누놀이 말판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누놀이는 두 편으로 나누어 말판 위에 말을 놓아가며

상대방의 말을 따내는 놀이로,별다른 도구 없이 아무 곳에

서나 두 사람만 있으면 언제든지 즐길 수 있다. 김홍도의 풍

속화 속에도 고누놀이가 등장한다. 벗짐을 옆에 두고 나무

아래서 고누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정겹

고 여유롭다. 이처럼 고누놀이는 그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

나,오래 전부터 어느 곳에서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우리네

민속놀이 였다. 2006년에는 분황사에서 바둑무늬가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벽돌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이

렇듯 힘든 노동 중에도 놀이를 통해 잠시 여유를 즐겨왔던

것이다. 9

김혜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14 • 상장 2014.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