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삼광사 53존불 팔면구층 대보탑pdf.ggbn.co.kr/278_mggbn/27801.pdf · 탑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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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78 www.ggbn.co.kr 2019 5 · 6 원묘요세 (圓妙了世) 국사는 고려 천태수행 [四種三昧] 의 대중화에 앞장 선 분인데, 매일 53존불을 열두 번 예참했다고 한다. 부산 삼광사는 원묘국사의 수행정신을 이어 1997년 ‘세계인류평화·남북평화통일’을 발원하며 33m 높이의 ‘53존불 팔면구층 대보탑’을 건립했다. 탑 안에는 1992년과 1994년 미얀마에서 보내온 부처님 진신사리 7과와 달라이라마가 1995년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3과, 1980년대 스리랑카 대통령이 보내 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봉안돼 있다. 천태종의 탑 부산 삼광사 53존불 팔면구층 대보탑 정가 6,000원 2019 /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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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부산 삼광사 53존불 팔면구층 대보탑pdf.ggbn.co.kr/278_mggbn/27801.pdf · 탑 안에는 1992년과 1994년 미얀마에서 보내온 부처님 진신사리 7과와 달라이라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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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묘요세(圓妙了世) 국사는 고려 천태수행[四種三昧]의 대중화에 앞장 선 분인데,

매일 53존불을 열두 번 예참했다고 한다. 부산 삼광사는 원묘국사의

수행정신을 이어 1997년 ‘세계인류평화 · 남북평화통일’을 발원하며 33m

높이의 ‘53존불 팔면구층 대보탑’을 건립했다. 탑 안에는 1992년과 1994년

미얀마에서 보내온 부처님 진신사리 7과와 달라이라마가 1995년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3과, 1980년대 스리랑카 대통령이 보내 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봉안돼 있다.

천태종의 탑

부산 삼광사 53존불 팔면구층 대보탑

정가 6,000원

2019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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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일구는 도량

5 ·  62019

Vol.278

목 차

003

022

029

035

041

046

특집―DMZ 둘레길을 가다

한승원의 그땐 그랬지

오래 묻어둔 황금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나

소리꾼 지향희 정현선

이계진의 책 읽어주는 남자

사벽의 대화 · 선방일기

부처님 나라를 향한 가벼운 발걸음

법문을 기다리며 정상교

나의 살던 고향은

순천 낙안읍성 송갑득

046봉 부 처님 오신 날 축

종정 김 도 용 대종사

총 무 원

총무원장 이문덕

총무부장 이월장

교무부장 방경혜

교육부장 정장호

재무부장 정월중

사회부장 정도웅

규정부장 김갈수

원 로 원

원로원장 전운덕

원로간사 주정산

종 의 회

종의회의장 김도원

종의회부의장 김세운

김우영

감 사 원

감사원장 조진덕

감사위원 곽수산

종 정 사 서 실

사서실장 박덕수

참의원장 김학송

금강대학교총장 송희연

주소충청북도단양군영춘면구인사길73총본산구인사

전화043)423-7100 | 팩스043)420-7399 | www.cheontae.org

대한불교천태종

총본산 구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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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목 차

059

068

079

088

098

100

106

특집―사랑, 그 마음이 부처님 마음

천태어린이 그림 4작품

삼광사 한글학교 어르신 손편지 4편

세계의 불교대학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안양규

포월을 향한 순례와 대화

불자가 수도원 순례에 나선 까닭 이도흠

세계 불교인의 삶과 신앙

대만 조명화

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유종호 선생님, 오월입니다 유승도

관세음보살님은 왜?

장난을 치실까? 이미령

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

불연이 깃든 다리 이강식

116

121

127

132

136

137

138

불교와 물리학

사물의 이중성 김성구

불제자가 된 왕

우전왕 조용주

육근으로 보는 건강

코는 인체의 면역력 가늠자 김경철

윤성식의 알면 도움되는 노후준비

자식과 행복의 관계

금강단상

진정 행복하게 사는 법 이강식

표지이야기

북가이드

106

088

인적이 끊어져 천연 그대로의 자연환경을 간직하고 있는 비무장지대(DMZ) 평화둘레길 조성

사업이 한창이다. 4월 말, 강원도 고성 DMZ 남방한계선까지 둘러볼 수 있는 ‘평화의 길’이

개방된데 이어 파주와 철원 코스도 조만간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평화둘레길의 원조는 경기도가 2010년 5월 DMZ 접경지역인 김포 · 고양 · 파주 · 연천 191km

구간에 조성한 평화누리길이다. 총 12개 코스로 나눠진 평화누리길은 그동안 도보 여행객

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2017년 강원도 철원 인근까지 연장되었지만, 이후 일반인 통행을 제

한하는 구간이 많아 강원도 고성까지 DMZ 전 구간을 완주하는 건 아직 불가능하다.

트레킹 나서기에 좋은 계절을 맞아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고,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도보길 네 곳을 선별해 탐방했다. 참고로 고성 ‘평화의 길’은 세 차례나 추첨에서 탈락

해, 고성군과 연합뉴스에서 제공한 사진으로 대신했다. 따스한 봄 햇살 마냥 평화통일에 대

한 열망이 가득한 그곳으로 함께 떠나보자.

분단 아픔 간직한 철조망에

화해와 평화의 꽃봉오리 맺혀

특집

DMZ 둘레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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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005

평화누리길1코스(염하강철책길)

경기도 김포 평화누리길은 DMZ접경 지역인 김포 · 고양 · 파주 · 연천을 잇는 최

북단 트래킹 코스다. 2010년 개통된 이후 역사 · 관광·생태 · 안보까지 동시에 즐

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김포공항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 걸리는데,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삼림욕 효과를 누리기에도 좋다.

비교적 완만한 4시간 코스

‘염하강철책길’로 불리는 1코스는 평화누리길 시작점이란 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좌측으로 염하강과 철책을 끼고 걷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

었다. 서해안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물론 김포 서부의 싱싱한 제철 생선들

이 넘쳐나는 대명항을 만나볼 수 있다. 염하강철책길은 대명항에서 출발해

덕포진-쇄암리쉼터-고양리쉼터-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14km의 누리

길이다. 코스 길이가 다소 길지만, 비교적 완만한 지형이다. 곳곳에 표시된 이

정표만 잘 따라가면 처음 걷는 사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1코스를 완주하면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자연생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옛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대명항에서 손돌묘-부래도-덕포진 주차장을 지나 다시 대명항으로 돌

아오는 1시간 30분짜리 순환코스도 있다. 이 코스는 7.7km 정도인데 걷기에

부담이 없어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다.

염하강철책길 초입에 들어서면 특별한 공원이 나온다. 바로 함상공원이

다. 거대한 군용기와 군선 등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옛 군부대를 방문해 둘러

보는 듯 같다. 군선은 실제 60여 년 간 우리나라 해상을 지키다가 2006년 내

구연한이 다한 상륙함이라고 한다. 입장료 3000원을 받는데, 한국전쟁 홍보

관 · 한주호 준위 추모관 등을 갖추고 있어 DMZ둘레길 첫 출발지로는 적합

할 것 같다.

서해 맞닿은 평화누리길 시작점

가시철조망 위로 철새 넘나들어글 · 사진 정현선

염하강철책길은 강화군과 김포 사이의 해협인 염하강을 따라 이어진다. 그 길을 한 탐방객이 걷고 있다.

무지개 빛 조형물을 지나면 평화누리길 1코스 입구가 나온다.평화누리길 초입에는 아치형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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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007

역사의 상흔 간직한 덕포진 · 문수산성

함상공원을 나와 평화누리길에 본격 진입하면 평화를 염원하는 20여 점의

공공미술 작품들이 도보 여행객들을 반긴다. 마을 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

로 설치된 미술작품인데, 높은 철책을 보면서 무거워졌던 마음을 조금은 편

안하게 풀어준다.

강화도를 바라보며 30분 정도 걷다보면 나지막한 구릉이 보인다. 이 구

릉은 조선시대 마지막 군사 방어시설인 덕포진(德浦鎭)이다. 덕포진은 국가지정

사적지 제292호로 지정돼 있는데, 조선시대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 서구 열

강과 격렬하게 싸웠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

는 장소이기도 하다. 덕포진 일대는 ‘손돌목’이

라 불렸다. 고려 때 왕이 강화로 피난을 가려고

이곳을 지나는데, 수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물

살이 세지고 소용돌이쳤다. 왕은 뱃사공을 의

심해 참수를 명했는데, 뱃사공은 죽으면서도

‘바가지를 바다에 띄워 그것을 따라 노를 저으

면 안전하게 지날 것이다.’라고 아뢰었다. 그 뱃

사공의 이름 ‘순돌’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평화를 염원하는 공공미술 작품들이 철책길 중간에 탐방객을 반긴다.

염하강철책길 초입에서 30분 정도 걸으면 조선시대 마지막 군사

방어시설인 덕포진이 보인다. 덕포진 앞 쉼터.

염하강철책길은 비교적 완만한 지형이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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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008

산능선 전망대 가는 길. 5월 중순 이후에는 초록으로 물든다.

덕포진 끝자락, 손돌목이 내려다보

이는 해안 언덕을 지나면 다시 철책이 이

어지는데 적절한 시기마다 쉼터와 전망

대가 나온다. 1코스의 중간 지점은 원머

루나루다. 다시 굽이진 철책길과 싱그러

운 논길, 초록을 머금은 숲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저 멀리 문수산성 남문이 보인다.

긴장된 땅 위와 달리 남북을 가른 철조망

위로는 저어새 · 기러기 · 재두루미 · 청둥오

리 등 철새들이 자유로이 넘나든다. 평화

로운 그 모습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높은 철책에 ‘Walk for Peace’ 문구가 선명하다.

좌측의 철책길을 따라간다면 처음 걷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다.

임진강은 남북 오가고

겸재의 ‘웅연계람’은 그대로글 · 사진 윤완수

평화누리길12코스(통일이음길)

일명 ‘통일이음길’로 불리는 평화누리길 12코스는 경기도 연천 군남홍수조절

댐부터 신탄리역을 지나 역고드름 터널에 이르는 28km 구간이다. 서쪽으로

개성직할시 장풍군을 두고 있으니, 경기도 최북단 트레킹 코스인 셈이다. 연

천군은 평화누리길 12코스 중에 두루미테마파크에서 돌무지무덤까지의 구

간을 3개 코스로 세분해, ‘연강나룻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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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011

여울길에서 개안마루로 가는 길목.

‘연강(漣江)’은 ‘연천 지역에 흐르는 임진강’

이란 뜻으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작

품집 중 하나인 〈연강임술첩〉에도 나오는 명

칭이다. 이 책은 1742년 임술년에 경기도관찰

사 홍경보가 연천현감 신유한과 함께 양천군

수(현 서울 양천구)로 있던 겸재 정선을 초대해 임

진강에서 뱃놀이를 한 후 그린 작품집으로,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을 수

록하고 있다.

이국적 여울길 · 임진강 절경 개안마루

연강나룻길은 평화누리길에 비해 임진강에

조금 더 가깝다. 그 중에서도 두루미테마파

크-산능선 전망대 - 옥녀봉 - 현무암지대 - 개안

마루 - 두루미테마파크로 이어지는 A코스는

임진강을 왼쪽에 끼고 걷는 구간이다. 낮은 구

릉과 들판이 반복되는 8.7km를 종주하면 3시

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출발지인 두루미테마파크는 2013년 홍

수조절용으로 건설한 군남댐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겨울철에 북녘에서 두루미가 임진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이 모습을 남과 북을 이어주

는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 공원을 조성했다. 공

원을 왼편에 두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금세

A코스 출발점이다.

산능선 전망대로 향하는 길가에는 금계국이

반긴다고 하는데, 시기가 이른 탓에 앙상한 나무들

만 늘어서 있다. 6월은 돼야 활짝 핀 노란 국화가 반

길 듯하다. 군남댐을 옆에 두고 얼마 걷지 않아 산능

선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는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는데, 북쪽 여울길 방향 구릉에는 아직 초록빛을

찾아보기 어렵다. 북위 37도선인 연천에는 봄이 늦

는 듯하다.

전망대에서 1km 남짓 떨어진 여울길을 향할

때는 왼편 임진강 방향으로도 갈 수 있고, 오른쪽

산능선을 따라 돌아갈 수도 있다. 왼편이 조금 더 가

까우니, 돌아올 때 다른 방향을 선택해도 좋다. ‘여

울’은 ‘강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

르는 곳’을 말한다. 이곳 여울길 역시 임진강이 굽어

지며 생긴 곳이다. 그런데 여울길 표지판에서 전방

을 내려다보면 농사를 짓는 밭이 펼쳐질 뿐이다. 너

른 밭 사이로 얕은 개울물이 임진강을 향해 흐른다.

겸재 정선의 ‘웅연계람’. 1742년 비단에 수묵 담채. 35.5×96.6cm 개안마루에서 본 임진강.

연강나룻길 출발지인 두루미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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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 그리팅맨 우측 아래로 군부대 사격장이 보인다.

해질 무렵 옥녀봉 정상 그리팅맨.

북녘 철책 향해 인사하는 그리팅맨

이국적인 여울길을 지나면 옥녀봉과 개안마루의 갈림길이 나온다. 그런데 하

필이면 인근 군부대에서 사격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결국 옥녀봉 그리팅맨

(Greetingman, 인사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유보한 채 개안마루로 향했다. 사격장에

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으며 도착한 개안마루는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 물

줄기가 일품이다. 이곳은 군부대 전망대를 제외하고는 연천에서 북녘 땅이

가장 잘 보이는 곳 중 하나다.

개안마루에서 보는 임진강은 예부터 절경으로 손꼽혔다. 겸재 정선이

벗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웅연계람(熊淵繫纜)’을 그린 장소이기도 하다. 300여

년이 흐른 만큼 그림과는 차이가 있지만, 전망 데크에 세워진 복제화와 비교

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개안마루를 지나면 곧바로 현무암지대다. 화산이 분

출한 흔적이라고는 하지만 검은 색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보이는 것 말고는

이곳이 현무암지대란 걸 느끼기 어렵다.

사격훈련은 오후 5시가 돼서야 종료됐다. 한참을 기다려 로하스파크에

서 출발해 옥녀봉에 올랐다. 항공기에게 북위 37도를 경고하는 입간판을 지

나 포장된 군사도로를 조금 더 오르면 살며시 머리와 허리를 숙인 그리팅맨

을 만날 수 있다. 2016년 유영호 작가가 설치한 10m 높이의 이 조형물은 북

녘과 약 4km 떨어진 옥녀봉 정상에 세워져 있다. 북서쪽을 바라보고 인사하

는 모습인데, 연천지역 철책이 북서방향으로 비스듬히 늘어서 있는 걸 감안

한 조치라 짐작된다.

사실 옥녀봉은 삼국시대 때부터 한국전쟁까지 치열한 전투가 끊이지 않

았던 전략적 요충지다. 지금도 군부대 시설물이 주위에 흩어져 있다. 긴장된

땅 위의 풍경과는 달리, 하늘 위 흰구름은 북서쪽 개성직할시 하늘과 남쪽 연

천 하늘 위를 산들바람을 타고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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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014

양구 두타연 전경.

한국전쟁 후 50년 만에 개방

민통선 내 천연의 아름다움 뽐내글 · 사진 조용주

양구두타연‘DMZ평화누리길’

양구 두타연은 휴전선 인근에서 발원한 수입천 지류의 민간인 출입통제선 북

방에 위치하고 있다. 금강산까지의 거리가 32km밖에 안 되는, 금강산을 갈 수

있는 최단의 길목이다. 천혜의 비경을 가진 국내 최대의 열목어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1000년 전 ‘두타사’ 절 이름서 유래

‘두타연’은 ‘두타사(頭陀寺)’라는 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000여 년 전 금강

산 장안사에 있던 한 스님이 꿈에 ‘남쪽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폭포 옆 동

굴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창건했다는 절이다. 두타사는 〈신증동국여

지승람〉에 등재돼 있는데, 고려시대에 창건됐으며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만부

(1664~1732)가 방문했던 1723년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한국전

쟁 휴전 이후 50여 년 간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다가 2003년 개방했다.

두타연 생태탐방로를 가려면 이목정안내소 또는 비득안내소에서 출입

신청서와 서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비득안내소 코스는 양구군 식수전

용 저수지 신설사업으로 2020년 2월 28일까지 운영하지 않고 있어 이목정안

내소에서만 출발할 수 있다. 신청서 제출 후 태그(위치추적목걸이)를 건네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양구문화관광과 홈페이지에서 사전예약을 하면 절차를 단

축할 수 있다.

이목정안내소에서 출입절차를 마치면 21사단 위병소를 통과해야 한다.

즉, 민간인통제선을 넘어가야 두타연을 만날 수 있다. 총을 멘 군인과 이중 삼

중으로 놓인 철책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는 새 긴장을 하게 되고, 우리나라가

양구지역 9개 전투를 소개하는 안내판과

과거 한국군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

한국전쟁 당시 양구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양구전투유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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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017

아직 휴전국임을 실감하게 된다. 차로 비포장

도로를 약 3.7km를 올라가면 두타연 주차장

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도보 또는 자전거로

이동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는 두타

연을 중심으로 양구전투위령비 - 양구 지역 9

개 전투 소개 표지판 · 조각공원 - 두타정 · 두타

연 - 징검다리 - 출렁다리 - 지뢰체험장을 거쳐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최근에는 주차장에서 약 4km 상류의 하

야교삼거리까지 걷는 관광객도 늘고 있다. 포

장이 되지 않은 평탄한 도로인데, 계곡의 물소

리와 시원한 바람소리가 가득한 매력적인 코

스다. 하야교삼거리에는 ‘금강산 32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훗날 길이 열린다면 이

곳에서 승용차로 30분이면 내금강에 도착할

수 있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비취색’ 맑은 물

두타연 생태탐방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두타연이다. 계곡을 흐르는 비취색 맑은 물이

여러 단으로 이어지면서 소(沼)를 이루고, 돌개

구멍을 만들어 바위 사이로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다.

두타연 전 지역은 지뢰지대이기 때문에 안전상 생태탐방로로 지정된 코

스를 절대로 벗어나선 안 된다. 생태탐방로 양쪽 철조망에는 붉은 색깔로 ‘지

뢰’라고 표기된 안내 팻말이 곳곳에 걸려있다. 탐방로를 따라 걷고 있지만 풀

과 낙엽이 쌓여 있다 보니 일순간 ‘내가 길을 제대로 가고 있나?’라는 생각과

함께 등골이 서늘해지곤 한다. 징검다리와 출렁다리를 건널 때는 바람의 시

원함을 느낄 수 있다.

두타연 입장시간은 하절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동절기는 오후 4

시이다. 입장 마감은 출입 허가 종료 한 시간 전까지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설날 · 추석은 오전 시간만 휴무). 13세 이상의 대인 입장료는 3,000원, 만 7세~12세 소

시원한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두타폭포. <사진제공=양구군청>

금강산에서 흘러 내려온 맑은 물. <사진제공=양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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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은 1,500원이다. 자전거 대여료는 4,000원.

주변 관광지로는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

한 ‘펀치볼마을(펀치볼)’이 잘 알려져 있다. 또 강

원도 최북단 대암산 자락 430m 고지에 위치

하고 있어 DMZ에 자생하는 여러 종의 희귀

식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양구자연생

태공원’, 파로호 인공습지에 만들어진 ‘한반

도섬’, 한국 철학의 거장 김형석 · 안병욱 박사

의 철학사상이 담긴 ‘양구인문학박물관’, 양구

의 백자생산역사 600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양구백자박물관’ 등이 있다.생태탐방로에 마련된 지뢰체험장.

시원한 바람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출렁다리(두타교).

강원도 고성 DMZ 평화의 길 탐방객들이 군인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고성군청>

금강산 · 해금강이

손 뻗으면 닿을 듯 글 · 이강식

강원도고성‘DMZ평화의길’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은 판문점선언에서 비무장지대를 실질적 평화지

대로 만들어 나갈 것을 합의했고, 후속조치로 이행된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GP 철거, 유해 발굴 등 남북간 긴장완화 노력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DMZ(비무장지대)와 연결된 강원도 고성(동부)과 철원(중부), 경기도 파주(서부) 등 3

개 지역을 ‘평화의 길’로 명명한 평화안보 체험길 조성에 나선데 이어 지난 4

월 27일 먼저 고성 평화의 길을 국민에게 개방했다. 철원과 파주 평화의 길은

추후 개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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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평화의 길은 통일전망대 - 금강산전망

대를 왕복하는 탐방길로, A코스(7.9km, 2시

간 30분 소요, 도보와 차량 이동)와 B코스

(7.2km, 1시간 30분 소요, 차량 이동)로 나눠

운영되고 있다. A코스는 출발지인 통일전망대

에서 통문까지 해안 철책길을 따라 2.7km, 통

문에서 금강산전망대까지 1.6km를 도보로 둘

러본 후 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로 돌아오는

코스다. B코스는 버스로 통일전망대-금강산

전망대를 왕복하는 코스.

통일전망대에서는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

로봉과 일출봉 · 채화봉 · 옥녀봉 · 신선대 등의

멋진 풍경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또 1982년 세

워진 금강산전망대에서는 금강산 끝자락인 구

선봉을 비롯해 감호 · 해금강 등 북한지역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고성 평화의 길은 매주 화요일~일요일(월요일 제외) 오전(1차, 10시 출발)과 오후(2차, 1시

30분 출발)에 탐방할 수 있다. A코스 정원은 회차별 20명, B코스는 회차별 80명

이다. 참가신청은 행정안전부 DMZ통합정보시스템 ‘디엠지기(www.dmz.go.kr)’

또는 한국관광공사 걷기여행 홈페이지 ‘두루누비(www.durunubi.kr)’에서 온라인

으로 접수해야 한다. 추첨을 통해 참가인원을 선발한다. 단 A코스는 만 10세

이상, 그리고 안보지역 특성상 대한민국 국민만 신청이 가능하다.

4월 27일 강원도 고성통일전망타워를 찾은 탐방객들이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다.

DMZ 평화의 길

탐방로에서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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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그땐 그랬지 3

사랑방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몰려든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곤

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지난 호에 소개한 ‘도깨비’ 이야기와 함

께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옛날 체구 장대하고 힘세면서도 착하고 지혜로운 남자가 무과(武科) 시험

에 응시하려고, 한양(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다. 괘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신 들

메(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동여매는 끈) 단단히 하고,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부지런히 걸

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들판을 휘질러갔다.

그 남자는 힘이 넘칠 뿐 아니라 칼 쓰기, 창 쓰기, 말 타기, 수박치기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배포도 두둑했고, 용기와 의협심도 대단했으며, 병법서

를 읽었으므로 세상을 뚫어보고 경영하는 지혜도 남달랐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깊은 숲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다. 남자는 몸

이 지쳤고, 배가 고팠고, 다리가 팍팍했다. 여우가 울고, 부엉이가 으스스하

게 울었으므로, 그는 서둘러 인가를 찾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멀지 않

은 곳에 불빛이 반짝거렸으므로 그곳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거대한 기와

집의 솟을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남자는 대문을 두들기면서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하고 소리쳤다. 거

듭 두들기고 소리치고 한참을 기다렸을 때에야 문이 열렸다. 길게 머리를 땋

아 늘인, 과년해보이지만 어여쁜 처녀가 초롱불을 들고 나와 깊이 잠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묻어둔 황금

<삽화=전병준>

“우리 집에서는 묵어가실 수 없는 끽긴한(매우 중요한) 사정이 있습니다. 빨

리 재를 넘어 다른 인가를 찾아가십시오.”

남자는 대문간에서라도 묵어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며 억지를 썼지

만 처녀는 잘라 말했다.

“우리 집에서 묵게 되면 손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남자가 처녀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보다시피 저는 힘이 장사이고, 몸이 비호같이 날쌔고, 무술도 뛰어납니

다. 두려울 것이 없으니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 지고 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처녀는 마지못해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들어가 보니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었다. 안채인 사간 겹집은 으리으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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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중문 밖의 사랑채와 아랫것들이 거처하는 문간채가 여럿 있었고, 큼지막

한 장독대와 곡간과 귀중한 살림살이를 저장하는 광도 드넓어 보였다.

한데 집안에는 처녀가 혼자 있을 뿐, 귀신이 나올 것처럼 조용했고, 으

스스 음습했다. 처녀는 말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밥을 지었고, 안채 마루

에 상을 차려 내다주었다.

남자가 밥을 다 먹고 나자 처녀가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저의 집은 선조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가문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에 오라비가 둘, 올케도 둘이 있었습니다. 또 문간채에 네 쌍

의 젊은 종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두 달 전부터 한밤중에 정체

를 알 수 없는 괴물이 하나 나타나 종들부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죽어가게

했고, 그 시신을 어디론가 옮겨 갔습니다. 이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비와 올케들을 차례로 다 죽게 됐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제가

죽게 될 차례입니다. 어쩌면 손님이 오셨으므로 괴물은 저를 젖혀두고 낯선

손님을 먼저 죽게 할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고, 처녀가 대답했다.

“저는 방안에 숨어 오들오들 떨면서 창구멍으로 내다보았는데, 괴물은

까맸는데, 거대한 사람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금색깔 머리에 두 개의 황

금색 뿔이 났고, 온몸에 금빛 털이 돋아 있고, 눈에서 이글이글 금빛 화광이

솟고, 걸으면 쩔그렁쩔그렁 쇳소리가 나고, 오래되어 곰팡이가 슨 금붙이의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남자는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어, 처녀에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오늘밤에는 아무 걱정 마시고 아가씨 방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마음

놓고 주무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몇 가지 조처를 하기 시작했다. 나무로 된

절구통을 들어다가 마당 한가운데 놓고 끌과 망치로 밑구멍을 뚫었다. 뒤란

대밭에서 대 한 그루를 베어다가 한 길 남짓한 대롱 하나를 만들었다. 그 대

롱을 절구통 밑구멍에 끼웠다. 절구통 안에 숯을 담고 불을 피웠다. 불 위에

잎담배 한 가닥을 얹었다. 남자는 절구통 옆에 멍석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

워 대롱 끝을 뻐끔뻐끔 빨았다. 담배 연기가 마당 안에 퍼졌다.

자정이 되자 어둠에 잠긴 광 안쪽에서 으스스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고,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마당 안을 둘러 살

피고 어정거리던 괴물은 절구통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거구의 남자를 발견

하고 멈칫했다. 이때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빨아 뿜고 있던 남자가 근엄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요란스럽게 구는 네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괴물이 남자 머리맡으로 다가가 두 손을 짚고 엎드리면서, 울려나오는

듯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광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금괴의 정령이

옵니다.”

남자가 소리쳐 말했다.

“광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금괴의 정령이라니? 그 시말(始末)을 알아듣기

쉽게 자세히 말해보아라.”

괴물이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장사 어르신, 모든 것을 아뢰겠습니다. 이백오십 년 전에 이 집 선대

의 한 어른이 중국지방, 여송(필리핀)지방, 유구(오키나와)지방과 무역을 크게 했

는데, 돈을 아주 많이 번 그 어른은 금괴를 실어다가 은밀하게 이 집의 광 바

닥에 깊이 묻어놓았습니다. 장차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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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광에 금괴를 묻는 작업을 한 머슴이 그것을 발설하거나 훔쳐갈지도 모른

다고 생각해 그 머슴을 죽여 없앴습니다. 그랬는데, 그 어른은 자식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금괴 묻힌 사실을 유언해주지 않고 급사했으므로 저는 영영 햇빛

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는 바람을 쐬고 싶어 미칠 지

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저는 이렇게 괴상스러운 형상을 하고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을 붙잡고 제발 바람을 쐬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껏 너는 이 집안의 수많은 사람을 죽어가게 했단

말이냐?”

괴물이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나으리, 제발 저의 충심을 알아주십시오. 저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해치고저 하지 않았습니다. 깊이 묻혀 있는 저를 꺼내 바람을 쐬게 해달라고

통사정하려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곤 했는데, 제가 다가가기만 하면 그 사람

이 기절초풍하여 죽어버리곤 했습니다.”

남자가 다짐을 받았다.

“진정 너의 말이 사실이렷다?”

괴물이 말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옵니다. 제발 한시라도 빨리 광의 동쪽 구

석 바닥을 두 자쯤 파헤치고 저의 가엾은 살붙이들을 모두 꺼내 바람을 쐬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세상을 휘휘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괴물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처녀와 함께 촛불을 밝혀 들고 광으로 갔다. 괭이로 바닥을 파자

싯누런 금괴가 다섯 가마니나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황금의 주인인 처녀에게 황금 정령의 간절한 뜻을 말했고, 처녀

는 남자에게 그 황금을 처리하는 일을 일임하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그는 처녀와 더불어 그것을 한양으로 싣고 갔고, 그것을 임금에

게 바치며 그것을 얻게 된 내력을 말한 다음, 금괴의 정령의 뜻에 따라 세상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청했다.

임금은 금괴를 팔아 세상의 가난을 구제하고, 담력 대단한 그 남자를 야

전군 대장으로 삼고, 그와 처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도록 해주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내 나이 여든이 넘은 지금 생각

해보니,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손자인 나를 품에 끼고 자면

<삽화=전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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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시인 · 소설가로 키웠지만,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금괴를 광 속에 묻어둔 그 어떤 할아버지는 그 금괴로 인하여 멸문의

화를 당하게 하였다.

이야기를 마친 다음 할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돈은 칼하고 같은 것이다. 대장장이가 만든 칼을 아낙들이 손에 들면

좋은 요리를 하게 되지만, 강도가 손에 들면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하게 된

다. 돈이란 것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좋은 데 쓰이지만, 탐

욕 많고 음흉한 일을 꾸미려 하는 사람 손에 들어가면 세상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데 쓰인다. 무식하고 마음씨 곱지 않고 인정이 메마른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암세포처럼 세상을 병들게 하고 썩어가게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흘러야 한다. 물도 흘러야 하고 돈도 흘러야 한다. 그것

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부자들에게로 흘러가면 안 되고, 아래쪽 가난한 사

람들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돈이 가난한 자들에게로 흘러 잘 쓰이면 세상이

화평해지지만, 불량한 부자의 돈궤에 뭉쳐 쌓여 있으면 결국 썩어 독이 되는

것이고, 세상을 더럽고 흉악하게 하게 된다.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 기쁨을 나누면 온 세상이 더욱 기뻐

지고, 슬픔과 괴로움을 서로 나누면 그 슬픔과 괴로움이 소멸되고 대신 기쁨

이 샘솟게 되는 것이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

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

설 원효〉, 〈초의〉, 〈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

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 · 한국문학작가상 · 이상

문학상 · 대한민국문학상 · 한국소설문학상 · 한국해양문학상 ·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

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나 3 소리꾼지향희

소리꾼 지향희(30) 씨의 신명나는 가락에 관객들의 어깨가 들썩인다.

시원하게 뽑아내는 구성진 소리는 서도민요 · 경기민요 · 남도민요 · 판소

리 · 정가까지 넘나든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모든 청중이 그녀의 소리

에 빠져들었다. 지난 4월 20일 창경궁 고궁음악회 ‘꽃길을 거닐다’에서

‘사철가’를 부르고 있는 그녀를 만나 서른 인생을 들어봤다.

“‘어떤 선택하면 더 행복할까?’

고민 끝에 내린 게 이 길이죠!” 글 · 정현선 기자

국악창작그룹 ‘너나드리’는 2018년 제12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대회에서

창작곡 ‘받으시오’로 장려상을 수상했다. 사진 중앙이 지향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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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학원에서 만난 진도아리랑

열 살 무렵, 그녀는 참으로 극성맞은 아이였다. 문지방을 밟고 원숭이처럼 천

장까지 기어올라 가는가하면, 몸이 무척이나 유연해 온갖 위험한 행동은 다

하고 다녔다. 혈기 왕성한 어린 딸을 위해 엄마는 발레를 배우게 했다.

어느 날 발레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함께 다니던 친구가 노래 한 곡

을 불러줬는데, 태어나서 처음 듣는 노래였다. 친구의 노래는 무척이나 감미

로웠다. 친구를 따라 흥얼거리며 노랫가락에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데 왠지 ‘내가 더 잘 부를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창 대중가요를 듣고

따라 부를 나이였지만 친구가 부른 노래 한 대목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 노래가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그날부터 엄마한테 판소리 학원에 보

내달라고 졸랐다. 발레학원 외에도 속셈 · 피아노 학원 등을 다녔는데 ‘절대

후회 안 할 자신 있다.’고, ‘다른 학원 보내달란 말은 안 할 테니 판소리학원만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결국 부모님은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열 살 때

부터 판소리학원을 보내주었다. “처음 부모님께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하셨어요. 뜬금없이 판소리를 배우겠다고 하니 아

마 적잖이 당황하셨을 거예요. 집안에 국악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

요. 아마도 ‘노래를 부른 친구가 어른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게 샘이 났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도 보내주셨어요. 그렇게 소리를 배우기 위

해 소리학원을 세 군데나 돌아다니며 오디션을 봤어요. 그러다 말겠지 하셨을

텐데, 이렇게 오래 하리라고는 당시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부터 부모님은 집에 친구가 놀러 오거나 절에 가서 스님을 찾아뵐

때면 소리를 하게 했다. 아이에게 소리를 시켜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부

모님 나름대로 주변에 자문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리에 입문한지 일 년이 지나 천태종 성남 화성사에서 주최하는 ‘법향

의 밤’ 무대에 오를 기회가 생겼다. 무대와 대중이 있는 생애 첫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천태종의 한 스님이 ‘발레보다는 판소리를 시키는 게 낫겠

다.’고 부모님께 확신을 줬다고 한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잘하든 못

하든 당당하게 소리를 하는 모습이 기특해보였단다. 너나드리가 ‘21세기 한국음악프로젝트’ 본선을 앞두고 리허설을 하는 모습.

지향희(중앙) 씨는 너나드리 활동 당시 소리를 맡았다.

2017년 11월 10일 서울 한국문화의 집에서 ‘너나드리’의 첫 번째 콘서트가 열렸다.

(지향희 씨는 오른쪽에서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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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드리’ 나와 프리랜서로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은 국악이 전부였다. 판소리로 시작해 사물놀이 · 가야

금 · 가야금병창도 배웠지만 그 중에서도 소리가 가장 좋았고, 솜씨도 뛰어났

다. 추계예술대학 국악과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각종 소리공연에 빠짐없이 참

가했다.

2017년부터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와 ‘춘풍이 온다’에 출연해 각각 30

여 회 이상 공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국악창작단체

‘타루’에 객원소리꾼으로 참여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녀가 속했던 국악창

작그룹 ‘너나드리’는 국악방송이 주관한 대회 ‘제12회 21C 한국음악프로젝

트’에서 창작곡 ‘받으시오’로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향희 씨는 지난 2

월, 그룹 ‘너나드리’를 나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너나드리’는 가야금 · 거문고 · 대금 · 피리 · 아쟁 · 타악 · 신시사이저 · 판소

리 등으로 나눠진 9명의 연주자로 구성된 그룹이에요. 인원이 많다보니 합주

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해요. 그런데 마당극 · 무속음악 등 하고 싶은 것이 무척

이나 많아 이 모두를 병행하다가는 모두 놓칠 것만 같았어요. 아직까지 프리

랜서로 나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프리랜서의 길이 평탄했던 건 아니다. 먼저 그룹 ‘너나드리’ 탈

퇴 후 수입이 일정치 않게 되면서 어려움도 겪었다. 축제가 많은 봄 · 가을에

는 공연이 많지만, 아무래도 여름 · 겨울에는 공연요청이 줄어든다. 공연이 없

는 시기에는 재충전을 하면서 쉬는 게 가장 좋지만 시간이 많아진 만큼 생각

만 많아져 ‘작년만큼 일을 할 수 있을까? 좋은 공연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흔들리기도 했다. 프리랜서를 선언한 후 좋은 배역을 찾으려다보니

‘너나드리’에서 나온 이후로 마음 편하게 쉬어본 기억이 없다.

국립극장이나 예술단체에 속해 있는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중압감이

덜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느 곳에 소속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에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혼자이기 때문

에 가능한 장점이다. 그래서 가급적 여러 무대에 올라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지향희 씨는 한 해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공연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

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 연말, 서른을 앞둔 해여서 그랬을까?

여느 때와 같이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을 하는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우리의 소리’가 좋은 그녀(오른쪽)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마당놀이극까지 넘나들며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17년 ‘심청이 온다’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좌) ‘찾아가는 작은 공연’ 황송노인종합복지관에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국악공연을 펼치고 있다(2017년).

우) 어린이집 방과 후 수업으로 어린이들에게 ‘까투리 타령’을 알려주고 있다(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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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내렸다.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는 30회 이상의 공연을 했고, 앞으로도 30

여 회가 남아 있는데도 그날은 그렇게 눈물이 쏟아졌다. 돌이켜보면 서른이

되기까지 소리 외길을 걸어오는 과정에서 느껴온 무게감과 스스로에 대한

고마움에서 비롯됐던 것 같다.

“무대에 올라 대중을 만나는 과정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에요. 경험해보

지 않은 이들은 박수를 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를 거예요. 공연을 마친 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 공연 잘 봤다며 건네주는

인사 한 마디는 제가 소리 외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는 에너지원이에요.

즐겁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에요. 간혹 힘들 때면 ‘나중에 내가 어떤 사람

으로 기억될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떤 선택을 앞두고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어떤 선택을 해야 내가 더 행복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하죠.”

그녀는 가끔 자신이 소리꾼이 된 이유에 대해 떠올려본다. 그리고 ‘아마

도 어려서부터 부모님 손을 잡고 절에 다녔던 게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

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남 화성사를 다니는 신심 돈독한 불자다. 특히 합창단

장을 맡았을 만큼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런 어머니와 함께 절에 다녔으

니 자연스레 스님들의 염불소리, 목탁소리를 접하게 됐고, 그 양분이 ‘소리꾼

지향희’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었으리란 추측이다.

지금은 일이 바빠 사찰 법회에 매번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사찰에서 소

리를 해야 할 기회가 생기면 열일을 제쳐두고 참여한다. 공연 전에는 손발이

떨리도록 긴장을 하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잊게 된

다는 그녀. 조만간 판소리 ‘춘향가’를 외우고 갈고 닦아서 완창회를 열 계획

도 갖고 있다. 나아가 직접 쓴 시나리오로 연출한 소리극을 무대에 세우겠다

는 소망도 키워가고 있다.

그녀의 꿈을 묻는 질문에 생각보다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앞으로도

체력이 될 때까지 꾸준하게 소리를 하는 것’이란다. 안정적인 직장보다는 자

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개척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성공

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그녀의 꿈이 이뤄지길 응원한다.

이계진의 책 읽어주는 남자 3 사벽의대화·선방일기

1950년대 후반 출가한

수행자의 고뇌와

치열한 구도일기

<삽화=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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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을 젊은 날에 읽을 수 있었다면 나는 출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 정도로 신심을 유발하고, 출가의 충동마저 불러일으킨다. 아마 여

러분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의 이런 말에 공감할 것이다. 이 책은 일기 형식

을 빌린 수기이다. 간혹 심오한 이야기가 인내심을 요구할 때도 있지만, 50여

년 전 수도자의 길을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류 종교를 말하자면 불교 · 천주교 · 개신교일 것이다. 어

떤 불교인을 만났을 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3대 종교 성직자에 대한

비교가 주제다. 불교의 스님과 천주교의 신부님과 개신교의 목사님 중에 누

가 더 훌륭할까? 그는 각 종교의 금기사항을 비교해서 말했다. 술과 담배 · 고

기 · 결혼 가운데 신부님은 ‘술과 담배’와 ‘고기’가 허용되지만, ‘결혼’은 안 된

다. 목사님은 ‘고기’와 ‘결혼’은 허용돼 있지만, ‘술과 담배’는 안 된다. 그러나

스님은 ‘술과 담배’도 ‘고기’도 ‘결혼’도 안 된다.(종단별로 차이가 있다) 거기다 ‘머리

카락’까지 깎는다. 그러므로 스님이 성직자 중에서 가장 어렵고 훌륭하다.

이런 논리였다. 술자리에서 들었는데 수긍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런 비교가 아니더라도 각 종교의 엄격한 계율 때문에 성직자들

을 우리가 모르는 어려움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계율에 철

저한 성직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아름답고,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은 그 성직자들을 존경한다. 반대로 계율을 잘 지키지 않는 성직자들

을 볼 때면 실망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불교인이기 때문에, 세상사 인연을

뒤로하고 출가하여 삭발하고 승복입고 염주 걸고 부처님 전에 엎드린 간절

한 모습의 외형 그 하나만으로도 스님을 존경한다.

그런데 우리보다 한발 앞선 동시대를 사셨던, 그리고 전설이 돼 버린 한

스님이 계셨다. 지금은 ‘지허(知虛)’라는 법명만 전해오는 분이지만, 그 스님의

저작물은 엄연히 전해 오고 있다. 이 저작물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개되어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래서 아직 인연이 닿지 않은 분들께 꼭 읽어

드리고 싶어 이번 호에 골랐다. 바로 <사벽의 대화(四壁의 對話)>와 <선방일기(禪

房日記)>라는 책이다.

두 책의 저자는 이미 입적했으리라 추측되고, 출간 초기부터 지금까지

상업광고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소문과 함

께 많이 읽혀 더욱 유명한 듯하다. 또한 저자로 알려진 ‘지허 스님’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과 글에 나타난 수행자로서의 고뇌와 치열함, 솔직담백함 그리

고 글 전반에 흐르는 주지적(主知的)이고도 유려한 문장으로 인해 더욱 사랑

을 받았다고 본다.

<사벽의 대화>는 임인년(1962년) 음력 2월 16일 춘분절에 ‘지허’라는 법명

을 가진 스님이 강원도 정선 정암사에서 험준한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20여

<삽화=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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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떨어진 ‘심적(深寂)’이라는 토굴에 가서, 이미 자리를 잡고 수행 중이던 ‘석

우(石牛)’라는 법명의 도반과 해후(邂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해발 1,000미

터의 산중은 늦가을부터 봄까지 눈이 많고 추웠다. 토굴은 허술했고, 잠자리

는 거칠었다. 옷은 누더기 한 벌 뿐. 먹을거리는 꿀밤(도토리)과 가을에 저장한

무, 산나물과 소금으로 스스로 제한하고 있었다. 마실 물조차 부족했다. 두

도반은 그곳에서 치열한 일상으로 깨달음의 길을 찾아 정진한다.

지허 스님과 석우 스님은 이미 3년 전 초발심 시절에 공부를 하려고 해

인사 강원을 찾아 갔다가, 고령 반룡사에서 경전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러

나 그것조차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벽의 대화>에 나오는 두 도반의 대화 내용은 시종 아름답고, 심오하

고, 유려하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줄곧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의 대화를 곁

에서 듣고 있는 듯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방일기>의 저자이기도 한

지허 스님은 이토록 깊고 아름다운 글을 남겼음에도 그 실체와 행적에 대해

뚜렷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선방일기>가 발표된 2년 후인 1975년에 입적

하였다는 소문도 있고,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탄허 스님의 상좌로 열심히 수

행한 납자였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이런 이야기는 ‘불확실한 설’이라는

반박도 있다.

<선방일기>도 1973년 <신동아>에 ‘논픽션 공모로 당선됐다.’는 주장과

당선이 아니라 ‘단순히 게재됐던 논픽션’ 글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아무

튼 <사벽의 대화> 내용으로 미뤄 짐작하면, 지허 스님이 한국전쟁 후 어렵던

시절인 1957~1958년경 입산한 것만은 확실하다. 지허 스님이 항상 자세를 낮

추며, 깊은 공부를 부러워하는 대화 상대인 ‘석우’ 스님은 부산 범어사 출신

의 엘리트 수좌였다고 알려진다.

이제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여기저기 갈피에 표시해두었던 두 스님의

대화 내용을 편편이 인용해 보겠다.

“지허당, 범부가 고뇌 속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 자신에겐 언

제나 관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과오에는 눈을 감지만, 타인의 과오에는 눈

을 부릅뜨는 게 범부의 소행이요. 백안(白眼)을 안에 감추고 득안(得眼)을 밖에

표방하는 게 승직을 생업으로 삼는 승직자의 소행이오. 양의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위선자를 가장 많이 양성하여 배출시킨 곳이 승원(僧院, 수도원)이오.

가증스럽게도 위선자가 많은 승원일수록 참배자가 많소.”

- (3편 ‘간경생활’ 중에서)

“불꽃이 다하면 남는 것은 재뿐입니다. 재는 모닥불 자리에 스며들기도

하지만 바람에 불려 좀 더 먼 곳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재는 모든 식물의

뿌리로 스며들어 그 식물의 생장을 도우면서 다시 생성의 과정에 오르는 것

입니다. 여기 모닥불을 피운 자리는 틀림없이 한 물체의 멸망의 터이지만 내

년 봄에 어떤 식물의 씨앗이 떨어지면 다시 생성의 터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

은 틀림없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 자연의 법칙이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에

게 그대로 적용되어 장송곡의 애도 속에 영구차가 지나가는데 갓난아이의

고고성(呱呱聲)이 발칙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 (10편 ‘이해와 사랑’ 중에서)

“지허당, 지금부터 꼭 십년 전인 계사년 정월 …… 나는 육군병원에서

퇴원하자 오른발을 약간 절뚝거리면서 부산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선배들의

알선으로 곧 취직이 됐습니다. 보름동안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대학

원에 진학하려던 계획이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취소되면서 학교로 향하

던 발길이 엉뚱하게도 시가지를 벗어나 눈을 맞으면서 ‘범어사’로 향하고 있

었습니다.”

- (10편 ‘이해와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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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나라를 향한 가벼운 발걸음 3 법문을기다리며

작은 수레와 큰 수레의경계는 없었다

글 · 정상교

인도에 거주하는 노령의 티베트 불자에게 축원을 해주는 달라이라마. <사진출처=달라이라마 공식사이트>

한 편의 소설 같은 석우 스님의 출가 인연과 수행이야기의 단편이다. 어

둡고 가난했던 시절에 출가했던 두 지성은 삶과 구도의 길에서 갈등하고, 공

감하면서 매우 치열하게 수행했다. 그렇다고 책의 전반에 구도자의 따분한

고뇌와 갈등만 넘치는 것은 아니다.

반룡사에서 간경(看經)하던 시절, 어느 날 두 스님은 장도 볼 겸 외출을 했

다. 읍내 포교당을 들렀다가 거리를 지나는데 어느 시골학교 교실에서 들려

오는 피아노 연주에 이끌려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서 두 스님은 ‘은파(銀波)’와

베토벤의 ‘열정’을 황홀하게 연주한다. 전후의 피폐한 환경에서 일어난 그 상

황은 순간,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둔필을 탓하며, 반전의 반전이 있는 <사벽의 대화>는 <선방일

기>와 함께 독자님들이 직접 읽으며 느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며 마무

리를 한다.

개인적으로 조심스러운 추측과 생각을 첨언하자면, 이 글에 등장하는

지허 · 석우 두 스님은 혹시 동일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즉 자신의 마음속

에 일어나는 치열한 생각의 갈래를 모두 나타내기 위해 또 하나의 인물을 설

정한 소설적 기교의 결과가 아닐까? 왜냐하면, 녹음기가 없던 시절 평범한

대화도 아닌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방대한 대화를 기억해서 복

기(復碁)하듯이 옮겨 적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

서 이 글은 일기형식의 수기로 발표됐다고 하나, 소설적 복선과 긴장감과 스

토리가 잘 어우러진 기막힌 문학작품이기도하다.

이계진

방송인.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후 30년간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제17대,

18대 국회의원. 현재 국방FM 시사프로그램을 진행 중이고, 〈무소유〉 읽기 작은 모임을 주

관하고 있다. 저서로 〈아나운서 되기〉,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딸꾹!〉, 소설 〈솔베이지

의 노래〉, 〈바보화가 한인현 이야기〉, 〈이계진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똥꼬 할아버지와

장미꽃 손자〉, 〈3인 아나운서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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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눈은 떴지만 눈꺼풀이 천 근 같

이 무겁다. 경주를 떠나던 날 아침, 뉴델리에 도착해 다람살라행 비행기를 타

기 위한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다람살라에서 처음 맞이한 오늘 아침까지 3일

연속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잔뜩 묻어나는 몸짓으로 호텔 커튼을 열어젖히자 노오란 아

침 해가 발아래 펼쳐진 뭉게구름 위로 얼굴을 내민다. 다람살라의 9월은 비

가 잦은 시기여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늘고 약한 비가 내리는데, 그로 인

해 해님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침 일찍 해발 1,800미터 호텔 창가

에서 뭉게구름 위로 비치는 아침햇살을 맞이하고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아름다웠다.

오늘은 달라이라마 존자가 아시아인을 위해 법회를 여는 첫 날이다. 존

자께서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장이기 때문에 보안이 철저하다. 법회가 열

리는 남걀사원에 들어갈 때는 금지된 물품이 정해져 있고, 이외 간단한 소지

품만 들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이때도 보안 요원들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한

다. 그렇다보니 법회 시작 두어 시간 전부터 줄을 서야 법회시간에 제때 들어

갈 수 있다. 이른 새벽부터 아침 식사를 마친 아시아 각국의 참배객들은 우

산을 받쳐 든 채 좁은 사원 입구 앞에 길게 줄을 서야했다.

필자는 법회 준비위원이었던 덕분에 긴 줄을 서지는 않았다. 대신 먼저

입장해서 어제 만나 미팅을 가졌던 싱가포르에서 온 준비위원들과 함께 나

라별로 배정된 자리를 재차 확인했다. 날짜마다 나라별로 배정된 자리는 다

르게 조정했다. 그리 넓지 않은 사원에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참배객들이 모이다보니 모든 이들에게 존자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배려다. 싱가포르 준비위원뿐만 아니라 태국과 대만 등 여러

나라의 준비위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그저 성스

럽고 환희에 찬 법회가 되도록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법회 시간이 다가오자 사원 1, 2층의 법당과 마당 등 모든 공간은 비닐

봉투에 신발을 넣은 채 방석 하나로 자신의 공간을 허락받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각 나라의 언어로 존자님의 말씀을 전할 통역사들은 청중들 속에서

조그마한 좌식 책상 위에 간단한 필기구를 올려두고 앉아 통역을 시작하였

다. 참배객들은 각자 준비해온 소형라디오에 각 언어별로 배정된 주파수를

맞추어 통역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어디선가 한 차례 탄성이 들리더니 존자님께서 여러 수행원들의 부축

을 받으며 들어온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라마 존자는 고타마 붓다이고,

관세음보살이며, 이 세상 모든 성스러움의 결정체이다. 존자가 지나가는 길

마다 사람들이 일어나 합장하며 경의를 표한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

령의 수행자는 손을 흔들며 구석구석까지 시선을 보내고, 가끔 행렬 바로 옆

에서 손을 뻗은 청중들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존자께서 사원 가장 높은 곳의 법좌에 앉자 그 주위에 자줏빛 승복의

티베트 스님들이, 노란색 승복을 걸친 스리랑카 스님들이, 태국 스님들이, 그

리고 회색빛 승복을 걸친 대만과 한국의 스님들이 나눠 앉았다. 가사장삼의

색깔이 다르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경전의 언어도 다르지만, 이곳에 모인

모두는 불제자였다. 그저 한 평생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대로 공부와 수행을

이어온 법 높은 수행승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소승과

대승의 구분은 너무도 무의미했다.

흔히 인도 · 스리랑카 · 미얀마 · 태국 등 동남아시아권으로 퍼진 불교를

‘소승불교’라 부르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 티베트 · 일본 등으로 퍼져나

간 불교를 ‘대승불교’라 칭한다. 불교를 잘 모르던 시절에는 왜 ‘소승(小乘)’ 불

교권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낮춰 ‘작은 수레’라고 불렀을까? 왜 그들

은 스스로를 ‘큰, 위대한 수레’의 의미를 가진 ‘대승(大乘)’으로 부르지 않았을

까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소승’의 ‘소(小)’에 해당하는 단어를 인도에서 찾으면 ‘히나(hīna)’에 해당한다.

이 단어는 ‘버려져야 할’, ‘열등한’, ‘결핍된’ 등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한문

으로 번역된 ‘소승’의 의미는 단순히 ‘작은 수레’ 정도의 아니라, 그 이상의 매

우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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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동남아 불교권에서 스스로를 ‘소승’이라

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소승’과 ‘대승’은 기원전후에 성립

된 소수의 ‘대승’ 불교도가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면서 기존에 있던 기

성 불교를 폄하시키기 위해 지어낸 용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라는 하나의

새로운 흐름은 어디서, 어떻게, 어떠한 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No Body Knows!’(그건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교계는 대승

을 불교의 가장 발전된 체계, 혹은 불교를 대표하는 체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당연히 신도들에게도 이렇게 가르친다. 간혹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

우지 않은 주위의 ‘대승불교도들’에게 ‘원래 대승은 소수였고, 비주류였다.

오히려 소승이 다수였고, 주류였다.’거나 ‘대승불교의 시작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말하면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국이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에 대승과 소승

의 관계는 어땠을까?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대승불교의 찬란한 불교문

화를 꽃피운 중국의 승려들이 인도로 유학을 떠났을 때, 그들에게 어쩌면 인

도는 ‘대승불교’의 나라였을 것이다. 서기 399년, 법현(法顯, 339~420) 스님은 예

순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안을 출발해 인도로 구법(求法)을 떠났다. 그

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도를 순례한 후 귀국해 저술한 〈법현전〉에 따

르면 인도의 불교사원에는 대승과 소승을 따르는 두 부류의 수행자들이 함

께 생활하고 있었다. 200여 년이 흐른 629년, 인도로 유학을 떠났던 삼장

법사 현장(600?~664) 스님의 순례기 〈대당서역기〉와 조금 더 후대인 의정(義淨,

635~713) 스님의 순례기 〈남해기귀내법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즉, 중국 구

법승들이 전해주는 기록에 의하면 5~7세기 인도의 대승불교는 독자적인 계

율을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이 소속한 사원의 ‘소승’ 계율을 따르고 있었다.

달리 말해, 교리가 다른 두 집단이 동일한 공간에서 생활을 했다는 것은 서

로의 정체성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은 채 공존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대승불교는 인류문화사에서 세계 종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

며 그 철학적 심오함과 대중적 확장성을 증명했다. 단, 불교학이라는 정교한

학문의 세계에서 초기 대승불교의 기원은 여전히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불교학자들의 고민과 상관없이, 다람살라

에 모인 많은 이들은 ‘대승불교 수행자’를 뵙기 위해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

니라, 한 사람의 성스러운 ‘불교수행자’를 뵙기 위해 지구를 한 바퀴, 반 바퀴

를 돌아 산골마을에 온 것이다.

여러 감상에 잠겨있을 때 법좌에 앉으신 존자님의 굵고 선명한 목소리

가 법당 안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상교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천태종립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후 일본 동경

대학에서 석 ·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

(경주) 티벳대장경역경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있다.

군중들에게 인사하는 달라이라마. <사진출처=달라이라마 공식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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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민속마을 전경.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옛 초가집 지붕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3 순천낙안읍성

전남 순천시 낙안에 대한 기록은 1,500년 전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안읍

성은 조선 초에 세워졌다. 백제 때는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렸고, 고려 태조 23년

(940)부터 ‘낙안(樂安)’이라 불렸다. 읍성을 둘러싼 성곽은 조선 태조 6년(1397) 낙안 출

신 김빈길 장군이 부민들과 함께 토성으로 쌓았다가, 세종 6년(1424) 석성으로 개축

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정유재란 때 성곽 일부와 해자(垓子) · 적대(敵臺) 등이 훼손됐는데, 인조 4년(1626)낙안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보수 · 증축했다. 성곽 길이는 1,410m, 면적은 67,000

여 평으로 평지에 쌓은 성이다. 성문은 세 곳인데 낙풍루(樂豐樓, 동문) · 쌍청루(雙淸樓,

남문) · 낙추문(樂秋門, 서문) 등이다.

글 · 송갑득 사진 · 이강식 기자

200여 초가 옹기종기 풍류와 기개 600년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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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46년 낙안읍성에서 태어나 군대생활 3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

에서 살았다. 필자의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도 그렇게 살았다. 그렇다고

논밭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오히려 가진

게 없다보니 다른 곳에 가서 살 수도 없었고,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산지 5대째, 필자 나이도 이제 일흔 중반이다.

새마을운동 겪은 후 사적 지정

1970∼80년대, 마을 친구들은 ‘가난이 싫다.’며 서울과 부산 등지로 떠나갔

지만 필자는 떠나지 못했다. 오라는 사람도, 오라는 곳도 없는 상태에서 무

작정 떠나는 건 큰 모험이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집에 입하나 줄이는 것은

집안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도시로

나가서는 제대로 못살 것만 같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와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잠시 친구 따라 서

울에 올라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한 적이 있

다. 그때 일을 마치면 남산에 올라가 서울 야

경을 바라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다. 높은 빌딩

과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선망하는 서울이었

지만 작은 몸뚱이 하나 편히 누울 곳 없는 서

울이 싫었다. 고향 작은집이 마냥 그리웠다. 가

난했지만, 친척처럼 서로 일손을 도우며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며 정을 나누고 살던 고

향마을 사람들이 그리웠다. 결국 몇 달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의 권유로 마을 이장을 맡았

다. 1970년 시작된 새마을운동 사업이 활발

히 진행되던 때였다. 매일 아침 마을회관 스

피커에서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

고…….”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날마다 들려오는 노랫소리만큼이나

마을이장은 바빴다. 우리 마을은 대부분 조선

시대 지은 낡은 초가집이었는데, 초가를 걷어

내고 슬레이트나 기와를 올릴 수도 없었고, 그

렇다고 집을 헐고 새로 지을만한 경제적 여유

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83년, 정부에서 ‘옛 고을문

화를 복원 · 보존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

다.’며 낙안읍성을 사적 제302호로 지정하였

다. 당시 낙안읍성은 동내리 · 남내리 · 서내리 3

개 마을로 200여 호 8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적으로 지정된 후 일부 현대식 가옥

을 강제 철거 · 이주시켰고, 현재는 108가구 중

80여 호에 주민 25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주 과정에서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철

거예정 가옥 주민들은 ‘보상과 이주 대책이 부

실하다.’며 버스를 대절해 서울 국회의사당과

당시 문화공보부 청사를 찾아가 시위를 했다.

전통 초가집에 살고 있던 보존대상 가옥 주민

들 역시 ‘주민의 생활대책 없는 보존은 안 된

다.’며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

다. 군(郡)에서는 마을이장을 맡고 있으니 주민

들을 설득해달라고 요구하고, 주민들은 이장

이 주민들 편에 서서 시위에 적극 나서라고 닦

달해 중간에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옛 부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장독대가 가지런히 늘어서있는 풍경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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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마을보존회가 구성되고, 군 당국에

서 민속마을이 되면 마을생활체험장 운영과

난전식당 운영에 주민을 참여시키겠다는 약

속을 받고서야 민원은 잦아들었다. 복원사업

이 본격 추진되면서 관리사무소가 개소했는

데, 보존회와 마을 여러분들의 추천으로 관

리사무소 청원경찰로 활동하게 됐다. 그런데

낙안읍성이 일부 복원되자, 마을을 찾는 관

광객이 늘어나면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외지

노점상과 주민들의 불법 음식점이 생겨났다.

이런 행위와 불법 시설물로 인해 골머리를 앓

기도 했다.

마을이장에서 문화해설사로

민속마을이 자리를 잡으면서 청원경찰의 역할

보다 낙안읍성 성곽과 관아 등 이곳저곳을 관

리하면서 마을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안내하

고 홍보하는데 열중했다. 초기에는 역사적 자

료가 없어 관광객 안내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

국 여러 문헌을 통해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게

됐고, 마을 원로들을 찾아뵙고 전해 내려오는

전설 · 세시풍속 · 민요 · 놀이문화 등을 수집했

다. 이를 토대로 1995년에 사비를 들여 낙안

읍성 안내책자를 발간 ·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자를 제작 · 배포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한문으로 된 역사자료

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고맙게도 여러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펴낼 수 있었다.

책을 펴낸 후 신문과 방송, 월간지 등에 필자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됐다. 특

히 ‘6시 내고향’과 ‘맛 따라 길 따라’에서 낙안읍성 지킴이로 소개된 후 승주

군에서 별정직으로 특채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사했다. 또 도시에

나가있는 친구들이 방송을 보고 전화를 하거나, 관광객들이 아는 체를 할

때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낙안읍성 안내책자는 현재 지자체의 지원을 받

아 13쇄까지 발간했다.

이렇게 고향에서 고향의 문화를 지키며 살다보니 20여 년의 세월이 훌

쩍 흘렀다. 청원경찰을 퇴직하고, 순천시 문화관광해설사도 그만두려고 하

니, 낙안읍성 소장님이 낙안읍성 명예별감으로 추천해주셔서 지금까지 낙

안읍성에 관한 자료수집과 문화해설을 하고 있다. 부족한 사람을 도와준 모

든 분께 감사할 뿐이다. 나는 고향 낙안읍성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그 누구보다 강하다. 낙안읍성을 소개하는 글을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낙안읍성 성문을 들어서면 시간이

흐르다 멈추어 버린 듯,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듯 아련한 추억에 빠

지곤 한다. 낙안민속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낙안읍성 위 산책로.

고을 사또가 업무를 보던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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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따스한 인정이 넘쳐나는 낙안읍

성은 필자 뿐 만아니라 여러분에게도 고향집

어머님 품속 같은 마을로 여겨질 것이다.

문화 · 문화재, 그리고 불교

낙안읍성에는 문화재와 명소가 다양하다. 읍

성 옛터가 사적 302호이고, 오늘날의 영빈관

에 해당하는 객사는 지방유형문화재 170호

로 지정돼 있다. 또 국가지정 민속 보존 가옥

으로 민가 9동이 지정돼 있으며, 수령(守令)이

집무를 보던 동헌, 수령의 숙소로 사용하던

내아(內衙)도 잘 보존돼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자료 47호인 임경업 장군 선정비 외에 노거수

(老巨樹) 15그루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노거수 중 푸조나무는 둘레가 15m에 달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해전을 앞

두고 빙허루에 올라 ‘전쟁은 사람이 하지만 이

외부에서 바라본 낙안읍성.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방어시설인 해자(垓子)가 설치돼 있다.필자가 펴낸 낙안읍성 안내책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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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는 것은 하늘이 정해 준다.’고 말한 후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객사 옆에

심어 국운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이순신 장군에게 술도 받았고, 절도 받은 나무’라고 하여 ‘장군목’이라 부르

기도 한다. 2012년 태풍에 의해 부러져 2018년 가을에 대목(아들 목)을 심어 대

를 잇게 했다.

낙안읍성은 세시풍속의 전승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주민들과 낙안읍성보존회에서 장승과 솟대를 세우고 지신밟기, 농악

놀이를 하고, 임경업 장군 비각에서는 추모제와 마을 당산제를 지낸다. 이밖

에도 관광객들과 함께 줄다리기를 하고, 횃불을 들고 성곽을 돈 후 달집을

태우며 한해 액운을 쫓기도 한다. 또한 주말에는 수문장 교대의식과 전통혼

례 등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읍성에서

는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울 수도 있으며, 길

쌈 · 짚풀공예 · 대장간 체험도 해볼 수 있다.

낙안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낙안(樂安)’이란 명칭은 안락국토, 즉 부처님

의 세계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읍성에서 남서

방향으로 징광사지(證光寺址)가 있는데, 중국에

서 들여온 불교경전을 인쇄해 전국 각 사찰로

보낸 곳이다. 그 뒷산은 금화산(金華山)인데 부

처님을 의미하고, 우측 존재산(尊宰山)은 부처

님의 제자인 가섭존자를 의미한다. 읍성 동남

쪽에 있는 ‘제석산(帝釋山)’은 제석천, 그 아래

‘도리등(회정마을)’은 도리천, 동쪽 ‘오봉산(五峯

山)’은 오백나한, ‘금전산(金錢山)’은 금전비구를

뜻한다고 한다.

또 금전산에는 납월매로 유명한 금둔사

(金芚寺)와 금강암(金崗庵)이 있다. 서쪽 백이산(伯

夷山) 고개는 ‘분계재(分界峙)’라고 부르는데, 사

바세계와 극락세계의 경계를 의미한다. 즉 낙

안읍성은 안락국토인 부처님의 세계, 재 너머

는 중생의 세계라는 의미다. 이외에도 벌교 뒷

산인 ‘부용산(芙蓉山)’은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

을, 수정마을 ‘보리마당’은 부처님이 득도하신

보리수를 의미한다. 이순신 장군에게 술과 절을 받았다고 전하는 장군목(푸조나무).

낙안읍성 민속마을 돌담. 대충 쌓은듯 보이지만, 제법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전하는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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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을 보면 심청이가 임당수에 제물로 바쳐졌으나 부처님의 가피로

중국 황후로 태어난다. 그 후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조선 땅에 보내는데 그

불상이 낙안포에 닿아 ‘성덕’이란 처자(보살)가 불상을 곡성 관음사(觀音寺)에

모셨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낙안은 제주도처럼 삼다(三多)의 고장으로 불린다. 이곳의 ‘삼다’는 돌과

술과 소리다. 낙안읍성 동문 앞 고인돌 군(群)은 그 증거 중 하나이다. 택지조

성과 경지정리를 하면서 고인돌이 많이 훼손됐는데, 다행히 읍성 주변에는

아직도 195기의 고인돌이 남아있다. 인근 지역에서는 패총무덤과 선사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돌이 강인함을 나타내고 외세에 대한 저항의

식을 대변한다면, 술은 예(禮)와 흥을 아우

르고, 소리는 멋과 풍류로 표출된다. 낙안

은 동편제의 대가인 국창 송만갑 선생이

태어난 곳이고, 가야금병창을 집대성한 오

태석 명인의 고향이다. 두 분의 생가가 모

두 읍성 내에 있다.

항일투쟁으로 인해 폐군(廢郡)의 아픔

낙안은 구국충절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일제에 항거해 3.1만세운동을 활발하게 전

개해 ‘낙안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

고, 1920년대 소작쟁의(小作爭議)를 벌인 발

상지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항일의식이 고취된 배경

은 조선시대 왜구들의 노략질과 무관치

않다. 오랜 기간 왜구들에게 수탈을 당하

다보니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이

침탈당할 때 이 지역 출신 나철 선생과 오

기호 · 이병채 지사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에 격문을 전하고, 조약의 부당

함을 항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1908년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다 실패, 일

본 경찰에 붙잡혀 유배 또는 옥고를 치르

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사사건건 대항하다 보니 일제가 이 지역을

좋아할 리 없었다. 일제는 1908년 10월 전

국 행정구역을 개편한다는 명목 아래 항

낙안읍성 동문입구 좌측에 있는 고인돌 군.

낙안읍성 옥사. 죄수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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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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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투쟁무력화를 목적으로 낙안군을 폐군(廢郡)시키기에 이른다. ‘낙안군’이

란 명칭이 질곡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배경이다.

낙안읍성은 드라마와 영화 속에도 자주 등장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대

장금’, ‘상도’, ‘허준’, ‘불멸의 이순신’, ‘태극기 휘날리며’, ‘왕이 된 남자’, ‘디

워’, ‘용가리’ 등이다. 또 한국관광공사가 가족들과 함께 둘러볼 명소 16선으

로 추천한 바 있고, 미국 CNN 방송은 한국 방문 시 꼭 들러봐야 할 곳 50선

에 선정하기도 했다.

낙안읍성은 2012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잠정 등록되었는데,

2022년경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거

듭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송갑득

낙안읍성 명예별감. 낙안읍성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이장과 문화관광해설사를 역임했

다. 저서로 〈낙안읍성〉·〈민속 문화이야기〉 등이 있고, 현재 〈인생살이〉를 집필 중이다.

낙안읍성 동문인 낙풍루 입구.

찬불가 ‘부처님 마음일세’처럼 우리는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을 부처님 마

음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 미안함과 고마움 역시 부처

님 마음의 한 줄기일 것이다.

지난 5월 단양 구인사에서는 제10회 천태어린이 ‘백일장 · 사생대회’가, 서울 관문사에

서는 ‘어린이 글 · 그림 축제’가 열렸다. 두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 불자들의 작품과 함

께 부산 삼광사 한글학교 할머니들의 손글씨 편지를 싣는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고,

멋들어진 글솜씨도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만은 부처

님 마음이 아닐까?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듬뿍 담긴 그림과 손편지가 독자 여러분의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길 기대한다.

사랑, 그 마음이 부처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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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도와가는 세상

-민가현 어린이(서울 양재초 3학년)

관문사 ‘어린이 글 · 그림축제’

서초구청장상 수상

부산 삼광사 한글학교 중학반

강일선 할머니(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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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삼광사 한글학교 학력인정 1단계반

차하자 할머니(81세)

도란도란 봄 동산 꽃

- 임겨레 어린이(포항 인덕초 1학년)

제 10회 ‘천태 어린이 백일장 · 사상대회’

참가작

도란도란 봄 동산 꽃

- 임겨레 어린이(포항 인덕초 1학년)

제 10회 천태 어린이 ‘백일장 · 사상대회’

참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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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애(愛) 평화

-원윤서 어린이(경기 청솔초 6학년)

관문사 ‘어린이 글 · 그림축제’

주지스님상 수상

부산 삼광사 한글학교 해탈반

정희남 할머니(7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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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삼광사 한글학교 해탈반

신춘원 할머니(84세)

-박수현 어린이(서울 신중초 5학년)

제 10회 천태어린이 ‘백일장 · 사상대회’

장려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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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방대한 불교문헌 기반팔리 경전 연구독보적 위치 올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옥스퍼드대학교 울프슨 컬리지.

세계의 불교대학 3 영국옥스퍼드대학교

현재 옥스퍼드대학교의 불교학연구중심은 ‘The

Oxford Centre for Buddhist Studies(OCBS, 옥

스퍼드 대학 불교학센터)’이다. 이 센터는 옥스퍼

드대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와 불교를 가르쳤던 리

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교수가 2004

년에 설립하였다. OCBS는 옥스퍼드대학이 인정

한 독립센터로 매년 다양한 세미나와 강연을 주최

하고 있다. 다수의 불교 전문 서적도 출간하고 있

다. OCBS는 불교학 전공이 소속돼 있는 동양학부

(The Faculty of Oriental Studies)와 가장 밀접하

게 연계되어 있다.

글 · 안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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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전공은 동양학부에 소속돼 있는데, 강

의는 주로 동양학연구소(The Oriental Institute)에

서 이루어진다. 동양학부 내에는 세부전공으

로 인도학 · 중국학 · 일본학 · 한국학 등이 개설

돼 있다. 필자가 유학한 시기(1993~1998)에는 중

국학이 그 세력을 증가시키고 있었다고 기억

한다. 이전까지는 인도학이 가장 번성했기 때

문에 별도의 ‘인도학도서관’이 존재하고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도서관은 오래된 문헌에서부

터 최신 연구 출판물 및 디지털 자료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양의 불교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이 과거 인도와 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지배할 때 행했던 불교에 관한 연구와

그 결과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 서적은 세 곳의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중앙도서관에 소속돼 있는 인도학도

서관에 주요한 모든 불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

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서적은 거의 모두

관외 대출이 되지 않는다. 동양학연구소 소

속의 도서관에는 기본적인 불교 자료가 비치

되어 있는데, 이곳의 서적은 관외 대출이 가

능하다. 필자가 속해 있었던 울프슨 칼리지

(Wolfson College)도 상당한 양의 불교 문헌을 소

장하고 있다. 이 대학의 도서관에서는 도서

대출이 가능하고, 옥스퍼드대학 외에 있는 도

서 및 논문의 주문도 가능하다.

불교학 연구의 출발지는 유럽

불교를 학문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곳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이다. 일본 불교

학의 시초도 일군(一群)의 학자들이 영국 등 유럽으로 유학하면서부터다. 보

다 늦은 한국의 불교학은 일본의 불교학을 수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나 일본과 달리 옥스퍼드대학에는 ‘불교학과’라는 독립된 학과는 없다.

동양학부 중에 ‘인도학’에서 불교공부를 할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에서의 불교학의 역사를 알려면, 인도학의 역사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기록상 인도에 대한 관심은 1579년 성공회의 선교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함에 따라 인도문화 전반에 관한 관심과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불교를 학문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즉 18세기 후반이다. 영국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아시아의 불교국가를 식

민지로 삼으면서 처음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인도 · 스리랑카 · 네팔 등지에서

불교 문헌을 입수해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영국의 불교학은 팔리어 원전과 산스크리트 원전에 대한 문

헌학적 접근과 연구에서 출발한다. 1881년 리즈 데이비스가 설립한 팔리어

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는 불교학 연구의 기준을 세웠으며, 이곳에서는 현재

옥스퍼드대학교는 대략 40여 개의 컬리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울프슨 컬리지는 다른 컬리지와 달리 대학원생만 수용한다.

옥스퍼드대학 울프슨 컬리지는 1965년 설립돼 2015년 50주년을 맞았다. 교내에 기념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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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도 팔리어 문헌의 영문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팔리 삼장(三藏)은 거의 영역(英譯)을 마쳤

고, 지금은 주석서를 한 권씩 번역 · 출간하고

있다. 상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팔리 불교

연구의 중심이라 말할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에서는 불교학 연구 초기

에 산스크리트어를 전공하는 교수를 초빙해

인도 문헌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도록 했

다. 이 시기에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에 의해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이 처음으로 간행된

다. 이어 종교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막스 뮐러

(Max Muller)에 의해 불교 문헌을 포함한 〈동방

성서(東方聖書, The Sacred Books of the East, 1879)〉가 번

역되기도 한다. 이후 영국의 인도 지배가 끝날

때까지 인도학은 수많은 서적을 갖춘 인도연

구소(The Indian Institute)가 독립적으로 운영됐을

정도로 융성했다. 하지만 이후 인도학은 동양

학부에 편입되어 이전만큼의 지위를 누리지

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보니 인도학 흐름에서 불교학은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불

교학 연구가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는 과정

에는 곰브리치(Gombrich) 교수의 역할이 컸다.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불교문헌, 특히 팔리

어 경전을 강의해 불교학이 명실상부하게 자

리 잡도록 기여했다. 필자가 유학한 1990년대

중반, 동양학부 내 인도학전공은 두 명의 교수

와 한 명의 전임강사로 구성돼 있었다. 전임강

사는 산스크리트어를 주로 가르쳤고, 두 교수

중 한 명은 힌두교의 탄트리즘과 그와 관련된

밀교를 가르쳤다. 나머지 한 명의 교수는 팔리

어와 초기불교를 가르치고 있었다.

유학 당시 10여 명의 학생이 불교학을 전

공했다. 필자를 포함해 세 명의 한국인, 세 명

의 영국인, 두 명의 대만 비구니 스님, 한 명

의 스리랑카인, 한 명의 일본인 등이었다. 영

국 본토 학생보다 훨씬 많은 외국인 학생이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국불교학의 단면

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이곳은 다수의 평범

한 학자보다 특출한 소수의 학자에 의한 연구

성과가 훨씬 돋보인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

다. 그래서일까? 옥스퍼드대학이 배출한 불교

학자는 영국 및 다른 나라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티브 콜린즈(Steve

Collins)가 저술한 〈무아적 인간(Selfless Person)〉은

불교학계에서 고전으로 불리고 있다.

문헌학 · 언어학은 불교연구 토대

옥스퍼드대학에서 발간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유명세에서 알 수 있듯

이 옥스퍼드대학의 인문학은 문헌학과 함께 언어학에 강한 전통을 보이고

있다. 불교학 연구도 이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다. 물론 순수철학적인 논문도

있지만, 옥스퍼드대학에서 불교학 연구는 언어와 문헌에 관한 충분한 이해

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대학의 거의 모든 교수들은 고전어를 포함해 대

여섯 개의 외국어를 알고 있다. 필자의 지도교수였던 곰브리치도 10개 남짓

의 외국어를 구사했다.

학생들은 경전에 근거해 치밀하게, 그리고 깊게 주제를 논의하도록 교

수들로부터 훈련받는다. 그러므로 경전을 정확하게 해독할 수 있는 원전 언

어 학습이 무엇보다 중요시된다. 또한 특정 문헌이나 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울프슨 컬리지의 도서관은 다수의 불교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

입학식과 졸업식은 셸도니언(Sheldonian) 극장에서 라틴어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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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을 갖고 세부적으로 깊게 논의하도록 배운다. 이런 과정에서 주제에 대

한 자기 나름의 통찰력이나 이해력을 보여주도록 한다.

서양의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불교의 어

떤 주제를 자기 나름대로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했기에 가능한 모습으로 여

겨진다. 자기 목소리가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다른 목소리를 가진 학자

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따라서 토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키고 수정

하는 과정이 쉽게 이뤄진다. 반면 동양의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고, 논쟁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학풍은 토론을 매우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토론을

할 때는 논리성과 개방성을 강조한다. 대학자가 어떠한 주장을 했을 때, 그의

주장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기는 일은 없다. 물론 그의 학설은 존중하

지만, 언제든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반박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때문에 특

정 주제를 두고 벌어지는 학자 간의 논쟁은 흔하게 볼 수 있다.

필자의 박사학위 취득 과정

1992년 SK그룹에서 지원하는 한국고등교육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된 후 본격적인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박사과정 5년간 소요되는

일체의 경비(등록금과 생활비)를 이곳에서 지원받

을 수 있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영

국문화원을 방문해 팔리어와 불교를 배울 수

있는 지도교수를 찾아보았다. 옥스퍼드대학

의 곰브리치 교수를 발견할 수 있었고, 편지를

보냈다. 조만간 한국을 방문할 일이 있으니, 그

때 면접을 보자는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면접에서 필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필자의 은사이신 호진 스님(당시

동국대 교수)께서 곰브리치 교수와 대담을 나누었

기에 그냥 옆에 앉아 있기만 했다. 두 분은 주

로 불어로 대화했고, 간혹 영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필자의 영어실력은 책 읽기만 가능

했고, 말하고 듣기가 안 되었는데도 한 가지만

은 굉장히 뚜렷하게 들렸다. 곰브리치 교수가

팔리성전협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팔리

어와 영어에 능통한 번역자가 없어 일을 제대

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내

가 팔리어를 배워서 그 일을 하겠다.’는 의지

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이

다짐은 2002년 〈the Buddha’s Last Days〉를

팔리성전협회에서 출간하는 걸로 결실을 맺

었다.

옥스퍼드대학은 1년이 3학기로 구성돼

있다. 필자는 입학한 후 두 학기 동안은 산스

크리트어를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산스크리

트 문법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산스크리트 고

전을 강독하도록 훈련받았다. 문법은 독해를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

다. 강의가 진행되면서 문법보다는 유명한 산

스크리트 전적(典籍)을 읽는 데 초점을 맞추었

다. 두 학기 동안 배운 분량은 상상을 초월하

는 양이었다. 두 번째 학기를 마치자마자 시험

을 보았다. 시험은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총

여섯 시간에 걸쳐 치렀다. 오전에는 산스크리

트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시험이었고, 오후에

는 반대로 영문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는

시험이었다. 원래 이 시험은 학부생들이 치러

야하는 시험 중 하나이다.

산스크리트어 시험을 통과한 후에도 팔

리어 학습에 집중했다. 수업은 산스크리트어

학습 때와 마찬가지로 팔리어 문법과 팔리어

경전강독으로 이뤄졌다. 팔리어 학습은 상대

영국의 상징 중 하나인 빨간색 이층버스가 옥스퍼드대학교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울프슨 컬리지 옆에 있는 강에서 보트를 즐기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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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경전이기에 몇 차례 번역되었지만, 붓다

고사(Buddhaghosa)가 쓴 〈열반경〉 주석서는 한

번도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기에 학술적 가치

가 충분했다.

박사과정을 밟을 때는 학생(student)이라

기보다 연구원(researcher)에 가깝기 때문에 의

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은 없다. 그러나

지도교수의 요구가 있으면 그 요구에 응해야

한다. 입학한 지 대략 1년이 지나면 정식 박사

과정에 진급하기 위해 학위논문 주제를 정하

고 심사를 받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 케임브

리지대학에서 진급 시험을 치렀다. 박사과정

진급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금까지

공부한 연구물을 심사 받아야 한다.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연구를 하고 있음을 확인받는 과

정이다.

최종적으로 논문이 완성되어 대학에 제

출하면, 두 명의 심사위원이 심사한다. 심사에

는 자신의 지도교수는 참여하지 못한다. 심사

는 매우 객관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친분

등 여타 외적 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

다. 필자의 경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온 팔리

어 문법 전문가와 초기불교의 여러 주제, 특히

부처님의 사후 문제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

한 교수가 심사를 맡았다. 그리고 필자가 소속

한 학과의 전임강사가 참관했다. 심사 앞부분

에 두 심사관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기에 끝날

때까지 비교적 편안하게 질의응답을 할 수 있

었다. 심사 말미에는 논문의 출판도 제안 받

아 기쁨이 더했다.

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쉽게 진행되었다. 학위

논문을 제출하는 날까지 각종 팔리어 경전과

주석서를 지도교수의 지도하에 읽었다. 수업

시간에는 필자를 포함한 서너 명의 학생이 둘

러앉아 차례대로 경전을 읽고 해석했다. 우리

가 읽고 해석하면 지도교수가 틀린 부분을 바

로 잡아 주곤 했다.

필자는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열반경(涅

槃經)〉’과 그 주석서의 ‘불타관(佛陀觀)’ 및 ‘열반

관(涅槃觀)’으로 정했다. 유학 이전 한국에서 불

교 공부를 할 때부터 왠지 모르게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을 담고 있는 경전에 관심이 많았

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한역(漢譯) 〈유

행경(遊行經)〉을 틈틈이 읽었다. 부처님의 입멸

이라는 사건을 통해 부처님의 본질을 규명해

보고 싶었다. 결국 지도교수와 상의해 〈열반

경〉 주석서를 번역하기로 했다. 〈열반경〉은 중

알바 금지, 장학제도 빈약해

20여 년 전의 유학생활을 회고해 보니 부처님의 은혜가 느껴진다. 지금 다시

박사학위 논문을 읽어보면 ‘어떻게 저런 논문을 쓸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

이 들 정도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무사히 학위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일본 동경대에 1년 간

머물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팔리어성전협회에서 책을 출간할 수 있

었던 것도 모두 부처님의 가피다.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장소와 물건은 도서관과 중고자전거다. 도서관

을 떠올린 건 5년간 옥스퍼드 생활의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사전을 뒤적이며

번역과 참고문헌을 찾느라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고, 자전거는 영국의 교

통비와 생활비가 워낙 비싸서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낡은 자전거로 중국

상점을 오갔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대학은 외국인 유학생의 아르바이트를 금

지하고 있다. 장학제도도 거의 없어서 반드시 유학비를 지원해주는 후원자

가 있어야 한다. 1998년 국내에 IMF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다행히도 ‘Max

Muller Memorial Foundation’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도 했었다.

지도교수인 곰브리치(Gombrich)와 필자 부부가 밸리올 컬리지

(Balliol college) 식당에서.

옥스퍼드대학교를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전거를 이용하여 강의실과 도서관 등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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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학이 있는 옥스퍼드시의 전경.

안양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로 불교문화대학장과 불교문화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학사,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

았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일본 동경대(東京大) 외국인연

구원,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불교상담학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 〈행복을 가져오는 붓다의 말씀〉·〈붓다의 입멸에 관한 연구〉·

〈The Buddha’s Last Days〉 등이 있다.

교수 신분으로 대학에서 불교를 강의하는 교수의 수는 영국의 전 대학

을 통틀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역할은 전

세계 불교학계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만, 안타깝게도 영국의 대학에서

불교전공 교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영국 불교학계는 소수의 뛰어난 학자

에 의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최근 옥스퍼드대학 의과

대학 정신의학과(Department of Psychiatry)에서 ‘옥스퍼드 알아차림 센터(Oxford

Mindfulness Center)’를 설립했고, 관련 석사학위 과정에서 우울증 환자들을 위

해 불교명상을 이용한 프로그램(Mindfulness- Based Cognitive Therapy, MBCT)을 가르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월을 향한 순례와 대화 1 불자가수도원순례에나선까닭

종교의 차이로 테러와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에 종교 간 대

화와 평화는 21세기 지구촌이 지향할 최고의 가치다. 최근 동 · 서양 여

러 종교의 수행(성직)자 · 학자와 신도 20여 명이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수도원을 순례하면서 깨달음과 영성에 대한 종교 간의 대화를 나누었

다. 긴 여정을 함께한 이도흠 한양대 교수가 기독교의 성지를 순례하면

서 홀로 묵상하며 깨달은 것들, 이들과 대화한 요지를 본지 독자들과 함

께 나누고자 보내왔다.

타인을 통해 좀더

‘나’를 잘 볼 수 있듯이

이웃종교를 통해 불교를

더 깊이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글 · 사진 이도흠

성인 보나벤트라가 태어나고 활동한 성지인 바뇨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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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는 반복에 차이를

우주 삼라만상은 나서 머물고 변하고 마침내 사라진다.[生住異滅] 138억 년 전

에 플랑크 스케일이라는 아주 작은 공간(10⁻³⁵m)에서 플랑크 시간이라는 짧

은 시간(10⁻⁴³초)에 ‘양자요동’에 의해 대폭발(빅뱅)을 한 후 물질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모여 태초의 별을 만든 이래 무수한 별들이 나고 변하고 사라짐을 되

풀이하고 있다. 태양도, 지구도, 그곳에 사는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38억 년

전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나고 변하고 사

라졌다. 한 나라의 역사도, 한 종족의 서사도, 지금 여기 대한민국 사회와 인

간의 삶, 시민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이 영원한 반복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바로 무한한 반복에 ‘차이’

를 아로새기는 것이다. 고학력의 똑똑한 젊은이도 군대만 가면 ‘군바리’가

된다. 1년 365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과와 훈련이 그들을 단순하게 만들기 때

문이다. 매일 되풀이 되는 반복에 저항하여 연병장 주위에 핀 꽃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피곤한 후임병을 대신해 보초를 서는 것과 같은 행위가 바로 ‘차

이’다.

왜 백인 아이는 때리지 못하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의 어린이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죽였는가? 왜 상대방이 팔다리를 자를지라도 화를 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마저 미얀마에서, 스리랑카에서 학

살에 가담하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종교 · 민족 · 이데올로기 · 이해관계 · 편

견’ 등으로 동일성을 구성한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이교도 · 이민족 · 좌

파 · 여성 · 노인 · 장애인’ 등을 ‘타자’로 상정하고, 이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가

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는 속성을 갖는다. 반면, 독일인이면서 많은 유태인

을 구출한 오스카 쉰들러의 사례처럼 차이는 공감과 사랑, 자비를 바탕으로

동일성의 이데올로기와 개념을 깨는 실천이다.

팔만대장경에 가득한 진리 가운데 붓다께서 하신 마지막 가르침은 무

엇인가? 흔히 ‘자등명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하는데, 이 말씀은 정확히 마지

막에서 세 번째 가르침이다. 붓다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에 “그러므로 비구

들이여, 게으르지 말라. 나는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올바른 깨달

음을 이루었다. …… 온갖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

셨다. 이 가르침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깨달음과 열반에 이를 때까지 열심히 수행하면서 진리를 구하고 보살행을

행하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無常]는 점이다.

그럼, 게으르지 말라는 것과 무상(無常)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필

자는 ‘우주에서 인간사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게 반복을 되풀이하니, 그 무상

한 반복에 맞서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차이를 만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필자는 권태로운 반복에 차이를 만들고자 순례를 떠났다.

| 거룩함과 무한을 향한 초월

2008년 연구년을 맞아 지리산의 한 암자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조계종 포

교원에서 의뢰받은 법요집의 한글 번역과 한 불교 언론으로부터 청탁받은

불교 미학에 관한 연재물의 집필 외에는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암자생활

이 너무 무료할까싶어 다른 분야의 책도 몇 권 가지고 갔는데, 그 중 하나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순전히 제목에 대한 반발 때문에 챙

겼다.

책에서 도킨스는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존기계이며, 이

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안에 자기 유전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을 먹이 삼아 에너지를 생산해 생존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자기복제하려고 한다. 봄이 되면 수컷들이 서로 싸

우고, 이긴 수컷이 모든 암컷을 독차지하는 것을 다양한 동물집단에서 관찰

할 수 있다. 유전자가 침팬지와 98.6% 일치하는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

또한 자신과 자식을 위해 사냥하고 농사짓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타인을 약

탈했다. 어미의 희생처럼, 이타적 행위도 실은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닌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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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수를 늘리려는 이기적 목적의 발현이자 진화를 위한 선택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 필자는 붓다 · 맹자 · 순자 등의 성선설이

나 성악설의 테두리에 있었다. 도킨스가 옳다면, 인간의 선함과 이타성에 바

탕을 둔 진보적 주장이나 불교의 인간관은 당위적일 뿐 타당성을 잃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이 본디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강

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이 책의 내용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보편적 특성

을 예리하게 통찰한 ‘과학’이었다. 자연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주장들은

성현들의 말씀일지라도 참으로 공허한 것이며, ‘은유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이후 필자는 공부 방법을 180도 전환했다. 어떤 착상이 떠오르면 관련

자연과학서적부터 뒤적였다. 그 후 도킨스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자연과학’

에 매진하였다. 사회생물학과 후성유전학 연구자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모

든 생명체는 다른 유기체와 상호 작용해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성을

돕는 존재로 진화해왔다. 생명체는 개체적으로는 이기적이지만, 전체 생태

계 속에서는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지 못하는 생명체가 멸종하였다.

인간 또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다. 인간은 700만 년 동

안 침팬지와 분명히 구분되는 길을 걸었고, 이 진화의 자취는 침팬지와 다른

1.4%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사회생물학과 인류학 · 인지과학 등을 종합

하면, 인간은 이런 이기적 본능을 유보하고 ‘사회적 협력’을 하며 이타성을

추구했다. 한 달에 세 마리의 사슴을 잡던 인간이 10명씩 짝을 지어 사냥해

40마리를 잡았다면 이는 이기적인 본능에도 부합한다.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연구를 빌리면,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면서 여러 이타성을 확대했다.

인간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처럼 자기 핏줄에게 발휘하는

혈연 이타성,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에서 잘 나타나듯 상대방이 나를 환대하

고 베푸니, 나 또한 그와 그의 가족에게 그렇게 하는 호혜적 이타성, 독립투

사처럼 집단의 구성원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집단 이타성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한 일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몸을 던진 고

김수현 씨처럼 전혀 유전자가 섞이지 않는 이에게 베푸는 윤리적 이타성 또

한 추구했다.

협력을 잘하는 사람이 진화에도 유리하기에, 인간의 두뇌신경세포에

타인을 모방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거울신경체제가 형성되도록 진

화하였다. 우리가 길거리를 걷다가 어떤 사람이 차에 깔리는 사고를 목격하

게 되면, 그의 아픔에 공감해 마음이 같이 아플 것이고, 그 중 실천력이 강한

자는 달려가서 차를 들어 올릴 것이다. 세 종교의 최고 가르침, 곧 붓다의 자

비와 예수의 사랑, 공자의 인(仁)은 모두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

된다.

성 프란체스코는 서양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최고의 성인으로 꼽힌다. 라 베르나 수도원은 프란체스코

성인이 절벽에서 수행을 하다가 오상(五傷, 예수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입은 양쪽 팔과 다리,

가슴의 상처)을 받은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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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한계는 생명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분리시켜서 바라보

았다는 점과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만 한정하여 인식했다는 점이다. 인간

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고, 의미론적 존재이자 윤리적 존

재이다. 또 미적 존재이고, 초월적 존재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존기계로서 자신, 자신과 유전자가 닮은 이의 번식을

위해 욕망하고 타인을 약탈하는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 타인과 소통하고 협력하며 집단과 문

명의 발전을 도모한 사회적 존재다. 또 자기 앞에 무한히 열린 세계를 향해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고 대응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한다. 자신의 이익은 물

론 번식욕을 비롯한 욕망, 심지어 목숨마저 포기하고 신 · 진리 · 선 · 정의 등

더 나은 의미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의미론적 존재다.

인간은 죽음 · 미래 · 자연 · 타인에 대한 불안과 공포와 소외 속에서 자신

과 유한성을 성찰하고 실존하며 자신의 본성을 창조하는 존재다. 인간은 타

인을 발견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이타성과 더 나은 삶을 추

구하는, 타인 및 자연 · 우주와 연기적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생성자로서 윤리적 존재다. 또한 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려

는 미적 존재다. 불완전에서 완전, 비속함에서 거룩함, 유한에서 무한을 향해

자신이 맞은 현실을 감내하면서 넘어서려는 초월적 존재다. 나는 지금 이 세

속의 반복에서 일탈하여 거룩하고 무한한 세계로 초월하고 싶다.

| 대대(待對)의 ‘포월’로

신라 건국의 성소인 선도산에 가면 마애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협시보살

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다른 곳에 있던 화강암에 새겨 가져왔지만, 굳

이 가운데 아미타불은 그 산에 돌출해 있던 바위에 새겼다. 그런데 그 돌은

정을 갖다 대기만하면 부서지는 안산암이다. 그 때문에 현재 부처의 얼굴은

입 언저리만 남았고 몸도 성하지 않다. 신라인은 왜 이런 무모한 일을 행했을

까? 그들은 이상에 현실을 결합하는 사상과 미학을 추구했다. 정토왕생을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나쁜 일을 없애고 복을 받기를

염원하였다. 현실을 그대로 거울처럼 재현한 ‘반영상’과 프리즘을 통과한 빛

이 무지개로 반짝이듯 이상을 통해 현실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형상화한 ‘굴

절상’이 조화를 이룬 향가를 불렀다. 그러니, 극락왕생을 지향하는 아미타

불은 땅의 현실에 굳게 발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포복하는 초월인 ‘포월(匍越)’이다. 이는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제

안한 것으로 그 뜻은 “바로 초월하거나 해탈하려는 유혹을 떨치고 현실의

바닥에 배를 깔고 치열하게 포복하면서 그 과정에서 그 혼돈을 넘어서는 거

룩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 불교가 암자 불교에 머물고 만 것은 포월을

거부한 채 초월만 추구한 까닭이다. 불교의 두 축이 지혜와 자비인데, 한국 아침 햇빛에 물들기 시작하는 선도산 마애삼존불상. 본존불은 아미타여래이고, 왼편의 협시보살은 관음보

살, 오른편은 대세지보살이다. 본존불만 땅에 발을 디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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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자비를 등한시했다. 민주화 투쟁은 물론 그 후의 민중운동이나 노동

운동에서 숱한 신부님과 목사님들의 틈바구니에서 스님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세친 보살은 <불성론>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라고 말했다. 지혜

가 있기에 모든 집착과 삼독(三毒)의 원인인 나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에 대한 사랑은 늘 솟아나게 해야 한

다. <유마경>에서는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월은 포기를 전제로 하기에, 포기하며 초월하는 포월(抛越) 없이 초월

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이익과 향락, 욕망 · 분노 · 어리석음은 물론 자기와 관

련된 모든 생각을 버려야만 청정한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연기(緣起)’와 ‘연멸

(緣滅)’은 하나다. 조건과 원인을 달리 하면 결과 또한 변한다. 말 그대로 “이것

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사

라진다.” 어리석음이 집착을 낳고 집착이 고통을 낳으니, 어리석음에서 벗어

나면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고통 또한 사라진다. 그러니 고통과

이를 낳은 현실과 조건, 인과관계에 대하여 자각을 하고 깊은 통찰을 하여

이를 없애는 수행을 행하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깨달음에 이른다.

불자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며, 열반은 나와 타인이 동시에

이루어야 하기에, 아우르며 초월하는 포월(包越)이 진정한 초월에 이르는 길이

다. 이를 위해서는 대대(待對)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대’란 대립적

인 것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낮인가? 밤인가? 서양은 아리스토

텔레스 이래로 모든 것을 이데아와 그림자, 진리와 허위 등 이분법으로 나누

고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 진리인 동시에 허위”는 모순이라며 배제하였다.

이를 ‘A or-not-A의 이분법적 모순율’이라 하며, 이는 이후 거의 모든 서양 철

학과 논리의 바탕을 형성하였다. 동양인인 우리도 서양의 영향으로 ‘환하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한다.

하지만, 낮 12시 1분이라도 1분만큼 밤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0.00001

초도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극점만이 낮이며, 실제 우리가 겪는 하루의 시

간은 낮인 동시에 밤이다. 우리 민족은 뜨거운 것을 먹으면서 “시원하다”라

고 말하고 삶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죽인다”라고 말한다. ‘뜨거운 시원함’이

최고의 맛이고, ‘죽이는 삶’이 지극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대는 A or-

not-A의 이분법이 아니라 A-and-not-A의 ‘퍼지(fuzzy)’로 사고하는 것이다.

태극의 파란 부분 안에 빨간 원이 있고, 빨간 부분 안에 파란 원이 있는 것과

같다. 팔을 펴는 것이 양이고 구부리는 것이 음이라면, 펼 때 구부리려는 성

질이나 마음이 작용하고 구부릴 때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기에 팔을 펴고 구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포월은 대립되는 것이나 적을 귀한 손님처럼 모

시는 것이다. 서로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친해지고 차이를 통해 깊이를 더하

면서 각자 자신의 개별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런 포

월의 자세로 여러 종교의 학자와 성직자 · 수행자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나무’는 ‘풀’과 관계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여러해살이의 식물’의

의미를 갖는다. 내 등은 타자에게만 보인다. 동양은 서양이라는 타자를 경험

하고서야 근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 또한 기독교와의 관계 속

에서 참다운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에서 벗어

나 기독교라는 타자를 통해 불교를 다른 차원에서 더 깊이 인식하고 싶었다.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발견하여 서로 친해지고도 싶었고, 차이를 통하

여 더 심오한 단계로 도약하고도 싶었고, 서로 융합되는 것을 찾아 하나가 되

고도 싶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한국기호

학회 회장 ·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한국학연구소장 ·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원효

학술상 · 유심학술상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

화〉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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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불교인의 삶과 신앙 9 대만

토속종교와 불교 융합

독특한 색채

1960년대 비약 발전,

세계에 우뚝글 · 조명화

필자는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나라를 소개해 왔을 뿐, 불교 전문가

는 아니다. 그런 이유로 대만은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총 세 차례 취재했

지만, 대만불교에 대한 원고청탁은 선뜻 수락하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두

차례 참배한 인연이 있는 타이베이 용산사를 중심으로 대만불교에 대해 단

편적으로나마 소개해 보고자 한다.

타이베이 용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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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臺灣, 타이완)은 한반도의 서남쪽, 마카오와 홍콩이 있는 광동성 동쪽에 위

치한 섬으로, 중국 복건성(福建省, 푸젠성)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다.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왕조가 무

너진 후 성립된 공화국의 이름을 그대로 잇고 있다. 1949년 장개석이 이끌던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려 본토를 떠나게 되면서 대만에 자리를 잡았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인지, 독립국가인지에 대해서는 양국 간에 정치적

으로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대만 문화가 중국 복건

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대만은 인구의 93% 정도가 불교

와 도교 · 유교 등 전통종교를 믿는다. 우리나라 · 중국 본토 · 일본 등 대승불

교권과 비교할 때 불교신자 비율이 단연 높다. 티베트불교와 함께 세계 대승

불교계를 견인하는 대만불교의 원동력이다. 동아시아 문명권에 속하는 우

리나라도 불교와 함께 도교와 유교가 낯설지 않은데, 대만에서는 세 종교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혼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복건성의 토착종교를 비롯해 대표적

인 민간신앙까지 불교가 포용하고 있다는 건

큰 특징이다.

중국 대륙에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

는 동안 대만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

써 정치 ·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특히

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

리 용’으로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우리

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잠시나마 일본불교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독

립 후에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퍼져있는 화교

와 교류하며, 중국식이 아닌 대만식 불교를 전

파하는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중국 대륙에서는 문화혁명(1966~1976)이 전

개되는 동안 일체의 종교 행위가 철저하게 탄

압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불교는 오히려 대

만에서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고 할 수 있

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만 역사 속의 불교

대만의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대만의 역

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대만 역사는 크

게 16세기 이전, 네덜란드 강점기(1624~1662), 한

족 정씨왕조(1662~1683), 청조시대(1683~1895), 일제

강점기(1895~1945) 그리고 국공 내전(國共内戰) 이

후로 구분할 수 있다.

대만에 불교가 공식 전래된 시기는 17세

기 중엽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청나라가 세워타이베이 용산사의 일주문. 밤낮없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용산사의 직원이 한 신도에게 점궤풀이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용산사는 소원을 잘 이루어주기로 유명한 ‘소원성취명당’

이다. 점궤풀이를 위한 점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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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 반청(反淸)운동을 펼치던 정성공(鄭成功)이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군병 2500명을 이끌고

대만으로 건너간다. 당시 대만은 30여 년째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정성공은

이를 물리치고, 대만을 점령한다. 이를 계기로

대만에 중국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중국 본토의 불교가 그러하듯 대만불교

도 토속 종교와 습합된 기복적인 신앙형태로

이어져왔다. 이후 대만불교는 제2차 세계대전

등 격변기를 지나 1960년대 이후에 와서야 비

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즉, 1700년 전 불

교가 전래된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대만불

교의 역사는 무척 짧다고 말할 수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때 이미 금문도

(金門島)에 영제사(靈濟寺)란 절이 있었다고 하지

만, 대만 학계에서는 최초의 사찰을 1662년에

창건된 대남시 죽계사(竹溪寺)로 보고 있다. 이

어 정성공의 아들인 정순(鄭純)이 미타사를 세

웠다. 그리고 3대에 걸친 정 씨의 반청운동을

강희제가 굴복시킨 후 청나라 말기까지 대만

전역에 100개가 넘는 사찰이 건립됐다.

그런데 1895년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중

국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한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는 1945년까지 대만은 일본

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일본불교의 여러 종파가

대만에 진출한다. 이로 인해 대만불교는 육식

을 하고, 결혼을 허락하는 일본 불교에 물들어

간다. 다행히도 1949년 장개석 정부가 건너온

후 불교를 정화시키면서 계율을 엄정히 지키게

한 덕분에 옛 불교의 맥을 되살릴 수 있었다.용산사는 사찰 밖에서 바라봐도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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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만불교를 말하면, 가장 먼저 불

광산사를 떠올리곤 한다. 성운 대사가 불광산

사의 지회를 세계 곳곳에 세우며 그 위상을

높였기 때문인데, 사실 가오슝에 있는 불광산

사는 1967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반면 타이베

이 최초의 사찰인 용산사(龍山寺)는 대만불교

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찰 중 하나다.

용산사는 1738년 복건성 이주민들이 고

향을 그리워하며 세웠다고 전한다. 화재와 폭

격 등으로 수차례 훼손되었으나 1957년 현재

의 모습으로 재건했다.

용산사의 바다신 마조와 일곱 신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 위치한 용산사는 국

가2급 고적에 해당하는 고찰(古刹)이다. 이 사

찰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도교 · 유교는 물론

민간신앙까지 중국 종교문화를 품고 있는 ‘복

건성 이주민의 정신적 고향’이라 말할 수 있

다. 그렇다보니 오직 대만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만식 사찰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용산사 정문에 들어서면 두 마리의 거대

한 용이 새겨진 기둥이 삼천전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대만에서 유일하게 한 덩어리의

청동을 쪼아 만든 용 기둥’인데, 자세히 보면

가운데가 빈 이중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전면에는 신수(神獸), 후면에는 중국 신화 속 인

물들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조각 기간만

1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무게가 무려 50톤에

달하는 걸작이다. 용산사 청동기둥은 대만 전

체에서도 단 두 개뿐인 희귀한 건축물이자 예

술품으로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양식이다.

현재 대만에는 공식적으로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없다. 그러나 훗날 중국과의 정치

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용산사와 예류지질

공원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용산사 지붕은 헐산식(歇山式) 겹처마 양식

으로 기와 한 장 한 장이 화려하게 채색돼 있

고, 지붕마다 화려한 조각을 매달고 있다. 사

찰답지 않게 화려한 조각과 색채는 단정한 한

국 사찰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지붕의 용마

루나 치미 등에 새겨진 동물상은 용 · 봉황 · 기

린 등 중국문화 속 신수인데 색유리나 도자기

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타이베이 벽산사의 화

려함도 마찬가진데 대만불교의 특징으로 봐

야할 것 같다. 용산사 회랑과 전각 벽면에는

중국의 고대 설화, ‘꽃이 장식된 발 달린 도자

기’ 교지도(交趾陶), 호랑이와 용 등 지극히 중

국적인 소재를 다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용산사에 가면 복건성의 바다신인 마조

(媽祖)도 만날 수 있다. 한국 사찰에도 ‘산신각’

이나 ‘칠성각’이 있듯이 불교와 토착신앙의 융

합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사례다. ‘바다

의 여신’ 마조는 960년 복건성에서 태어난 실

존 인물로 신격화된 경우다. 마조는 어렸을 때

부터 신통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박식 · 현명했

는데, 결국 ‘항해의 수호신’이란 별칭을 갖게

되었다.

해안도시, 항구도시, 어부마을 등 중국

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일부 지역 등

‘해양문명권’에는 마조의 흔적이 상당히 남아

있다. 마조는 토착신 중 하나로, 여신의 탄신일삼천전 좌우를 받치고 있는 청동 기둥에는 거대한 용이 새겨져 있다. 용산사 전각 지붕과 용머리의 화려한 장식들.

대만에서 청동 기둥을 볼 수 있는 사찰은 용산사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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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대만 5대 축제 중 하나다. 용산사 외에도 마

조를 모신 사찰이라면 반드시 두 명의 호법을

함께 모신다. 우측의 천리안(千里眼)과 좌측의

순풍이(順風耳)다. 각각 멀리 보는 능력과 소리

를 잘 듣는 능력을 갖고 있어, 이들로 인해 마

조는 바다에서 중생이 겪는 고통과 역경을 누

구보다 빨리 알 수 있다. 마치 천수천안을 가

진 관세음보살을 연상케 한다.

용산사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배전과 정

전에는 ‘7개의 거대한 향로’가 나란히 자리하

고 있다. 향로마다 특별한 신의 이름과 이에

해당하는 각각의 의미도 깃들어 있다. 용산

사의 수많은 신들 중에 영험하기로 이름난 일

곱 신이 자신의 향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7가지 고민’을 뜻한다고 한

다. 7개의 향로 앞에는 소원을 비는 현지인들

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각각의 향로와 모

시는 신은 다음과 같다. △관음로 - 불교의 관

세음보살 △천공로 - 도교의 옥황상제 △마조

로 - 바다의 여신 마조 △수선로 - 바다의 수호

신 수선존왕 △주생로 - 순산, 다산, 출산의 신

주생랑랑 △문창로 - 합격, 승진을 관장하는

문창제군 △관성로 - 재신 관우.

폭격에서 시민 구한 관세음보살

타이베이 시민들이 용산사를 최고의 사찰로

손꼽으며, 사랑하는 이유는 그 영험함 때문

이다. 이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면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근 주민들은 공습경보가 발령될 때마다 용산사

로 대피했다. 불심이 깊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호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또다시 공습경보가 발령해 주민들이

용산사로 대피를 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은 모기떼가 날아와 용산사로 대

피한 사람들에게 몰려들었다.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용산사에서 나와 다른

장소로 옮겨 대피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용산사를 벗어나서 다른 장소에 안전하게 대피한 직후

용산사에 공습이 가해졌다. 폭격으로 인해 절은 초토화 되었다. 폭격이 끝난

후 주민들이 용산사로 달려갔다. 폭격을 맞은 절이 무사할리 만무했다. 전각

은 무너졌고, 포탄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등 용산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런데 대전에 모셔져 있던 ‘관세음보살상’만은 아무 피해 없이 멀쩡했다. 이에

주민들은 폭격을 피했던 것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라고 생각해 용산사를 다시

재건한 후 관세음보살을 크게 모셨다고 한다.

동남아 불교권의 불자들은 단기출가를 하는 등 불교와 삶이 한 테두리

안에서 공존한다. 반면 대만의 불자들은 보다 기복적이다. 하지만 그 계율을

지키는 마음은 그 누구 못지않게 단단하다. 대만은 청나라 지배를 받을 때

재가거사들에 의한 재교(齋敎)가 크게 번성했다. 재교는 선불교에서 기원했다

고 하는데, 이들은 정진요리(精進料理, 채식)를 먹고, 음주와 도박을 멀리하며, 계

율을 철저히 지켰다. 이런 전통은 대만불교가 재건되면서 다시 불자들 사이

에 확산되었다.

대만불교는 1960년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 선봉에 중국의 전

통불교를 계승하면서 승풍을 진작시켰고, 출가자가 계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사회적 위상도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두 고승

이 등장하는데, 바로 성운 대사와 증엄 대사다. 세계 30여 개국에 200여 분

원을 두고 있는 불광산사와 전 세계에 400만 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자제공

덕회는 대만불교를 세계 위에 우뚝 올려놓았다.

조명화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편집장. 아리랑TV ‘Artravel’(2016), KBS2 ‘세상은 넓다-벨기

에&오키나와’편(2015) 등 방송에 출연한 바 있다. 〈원코스 대만 용산사〉·〈지식의 방주 세

계유산〉 5부작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용산사 천상성모전(天上聖母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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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손 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유종호 선생님, 오월입니다

글 · 유승도

조팝나무 하얀 꽃이 줄기를 이뤄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침을

먹고 마당에 나가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꿀 내음이 바람에 실려와 향기 그윽

한 세상을 펼쳐주고 있습니다. 이젠 봄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남 다 심은 감자를 뒤늦게 심기 위해 서둘러 밭을

갈았던 것이 어제였습니다. 올해는 장인어른 상을 치르느라 며칠 더 늦어졌

습니다. 그런들 저런들 조바심은 일지 않으니 이것도 병이라면 병인 듯도 합

니다. 먹고 살기 위해선 긴장을 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푹 퍼져

있습니다. 다만 글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하곤 하

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찌 탈 없이 지내시는지요? 들려오는 소문엔 몸이 편치 않으시다는 얘

기도 있어 마음이 좋지 않던 날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엔 네이버에 들어가 뉴

스를 검색하던 중 선생님의 수필이 실려 있는 난을 발견하곤 여러 편을 한꺼

번에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노년의 여생을 의미 있게 보내시는

모습에 미소 지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새롭고 낯선 것만을 찾는 지금의 문단

이나 젊은이에게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혜안을 전해주시는 발걸음이 무

엇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직접 뵈었던 적이 단 한 번 밖에 없었다는 것이 새

삼 놀랍습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한 번이었습니다. <문예중앙> 신인문

학상 시상식 자리였습니다. 허연 머리가 빛나고 있었지요. 강건한 풍모에 흔들

림이 없는 눈빛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한두 시간 뒤로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저도 10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책을 보내드릴 때마다 선생님께선 몇 마디 격려의 말

을 적어 보내주셨지요. 어느 해인가는 연하우편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써서 더 좋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달

라던, 몇 줄의 짧은 편지가 내겐 얼마나 큼 힘

이 되어 주었는지는 선생님께서도 짐작하지

못하리라 생각됩니다.

산골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

는 생활은 뜻대로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사근사근 잘 풀어나가는 능력

을 갖지 못했던 나로서는 당연히 치렀어야 했

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땐 암울한 나

날이었습니다. 가난한 생활에 머리를 조아리

는 능력도 가지지 못했으니 험난할 수밖에는

없는 생이었지요. 농사는 돈이 되지 않았고 원

고청탁을 받아 발표한 글은 내 맘에도 들지 않

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었지요. 그나마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함

께 술을 마시는 낙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농사는 식구들 먹거리를 해결하는 선으

로 축소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멀리한 채 글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며 살기로 작정을 했습니

다. 산골에 박힌 지 10년 전후의 시기였습니

다. 그때는 이미 원고청탁이 끊어지고 있었지

요. 그나마 생활비가 되어주던 사보의 수필청

탁이나 이런저런 산문청탁이 거의 끊어지고,

시도 원고료를 주는 곳에선 대부분 청탁이 오

지 않았지요. 산골에 박혀 서울에서의 이런저

런 행사나 사람과의 만남에 응하지 않은 결과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글 쓰는

일에서도 이제 그만 손을 떼야 하는 것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마음자리를 차지하곤 했었습

니다.

다행히 책을 내자고 하는 데는 규모가 작

은 출판사일망정 끊어지지 않아서 시집과 산

문집을 계속 발간할 수는 있었고 선생님께 보

내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의

편지를 받아보는 즐거움을 맛보았지요. 그리

고 다시 힘을 내어 글을 쓰는 생활을 이어나가

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나이도 60에 다다랐습니다. 다

른 무엇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시기도 지났

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요

즘 들어 내 작업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늘어

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선생님의 격려 덕분

입니다.

곧 푸르름이 가득한 여름으로 접어들겠

지요. 선생님, 푸르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이곳

에 한 번 들르시면 어떨는지요. 건강이 허락하

고 내가 사는 오두막에서 하룻밤 보내셔도 개

의치 않으시다면, 시인이란 보잘 것 없는 이름

하나를 얹어주신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 여기

시고 찾아주시면 더한 기쁨이 없겠습니다.

부디 하루하루가 꽃들이 가득한 이 봄날

같으시기만을 빌면서 이만 아픈 인사를 드립

니다.

유승도

시인. 1995년 <문예중앙>으로 작품활동을 시

작했다.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 <차가운

웃음> 등 다수와 산문집 <촌사람으로 사는 즐

거움> · <수염 기르기> 등 다수를 출간했다. 현재

영월 망경대산 중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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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은 왜? 3

글 · 이미령

치기나 놀림 아닌,

중생 근기 맞춘 배려

장난을 치실까?

국가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佛畵匠) 기능보유자 석정 스님(1928~2012)의 불화.

관세음보살님의 고향은 남인도 땅 보타락가산입니다. ‘보타락가(Potalaka)’는

‘하얀 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소리 내고 보니, 티베트의 포탈라궁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지금은 인도 다람살라에 계시는 달라이라마께서 머물

던 곳이지요.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여겨지고 있고, 지

금도 티베트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먼 나라를 다닐 것도 없이 우리나라 강원도 땅에도 포탈라카, 즉 보타락가

산이 있습니다. 낙산사가 그곳입니다. 의상 대사가 목욕재계하고, 7일 만에

자신의 좌구(방석)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불교의 수호신들이 굴속으로 스

님을 안내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예를 올려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얻었고, 의상 스님이 이것을 받아 굴에서 나왔을 때 동해의 용이

또다시 여의주 한 알을 바쳤다고 하지요. 의상 스님이 이것까지 받아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머물렀는데 이때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진짜’

관세음보살님이셨습니다. 왜 ‘진짜’라고 굳이 강조하느냐고요? <삼국유사>

에 ‘진신(眞身)’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멀리 인도 땅에서 이곳 한반도로 자신의 아바타[화신]를 보내

준 것도 아니고, 꿈속에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닌 진짜 관세음보살님이 의상

스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상 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한

그곳에 절을 지었으니 그곳이 바로 낙산사입니다. 어쩌면 이런 인연담을 모

르는 분은 거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낙산사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릴 때면 저에게는 의상 스님보다 원

효 스님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의상 스님에게는 그토록 쉽게(라고 표현하면

죄송하지만) 나타나신 관세음보살님이 원효 스님에게는 왜 그리 야박하셨던

것일까요?

낙산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

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려고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다 이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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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은 왜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줄 알아

차리지 못했을까요? 설마 그런 위대한 분이 벼를 베고 있으랴 싶었을 테고,

농가의 아낙처럼 평범한 여인이 관세음보살일 리가 없으리라는 선입견과 편

견을 품고 있던 까닭에 대상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아직 지

혜로운 눈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관세음보살님은 그걸 콕 집어서 벼가 아직

익지 않아서 나눠줄 수 없다고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리 아래에서 빨래를 하던 여인은 또 어떤가요? 빨래란 더

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더러운 것이

바로 여인의 천 생리대입니다. 생리 그 자체는 더럽지 않습니다. 그건 여성에

오시게 된 원효 스님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이렇게 농담을 건넵니다.

“허, 거기서 일하고 계신 처자! 내게 벼를 좀 주시지 않으시려오?”

스님의 농담에 벼를 베고 있던 흰 옷의 처자는 덤덤히 대답합니다.

“아직 벼가 익지 않았습니다.”

익은 벼를 베면서도 원효 스님에게는 벼가 아직 익지 않았다는군요. 원

효 스님은 조금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던 길을 계속 갑

니다.

가다보니 어느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인이 생리대를 빨고 있었지

요. 스님이 이번에는 물 한 모금을 청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 두어 걸음만 올

라가면 맑고 깨끗한 물을 뜰 수도 있는데 굳이 자신의 생리대를 빨고 헹구

던, 그 물을 떠서 올립니다. 과연 누가 그 물을 마실 수 있을까요? 분명 원효

스님은 더럽고 비위가 상했을 것입니다. 스님은 받은 물을 쫙 뿌려서 버린 뒤

에 스스로 맑은 물을 찾아 한 사발 마셨지요.

그런데 이런 스님의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한 듯 가까운 곳 소나무 위에

서 파랑새 한 마리가 이렇게 지저귑니다.

“제호(醍醐)는 아직 스님과 인연이 없군요.”

‘제호’는 우유로 만든 훌륭한 음식 가운데 하나로, 여기에선 관세음보살

님과의 친견 인연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파랑새는 그렇게 말한 뒤 포로롱

날아가 버렸고, 그 자리엔 신발 한 짝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지요.

원효 스님은 아차! 싶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낙산사로 황급히 달

려가 봤더니 관세음보살상 아래에 나머지 신발 한 짝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렇다면 그가 만났던 흰 옷 입고 벼 베던 여인, 생리대를 빨던 여인, 그리고 파

랑새는 전부 관세음보살님이었다는 말인가요?

흰 옷은 관세음보살님의 상징입니다. 중국 당송시대 이후 민간에서는

관세음보살님을 언제나 흰 옷을 입고 하얀 연꽃 위에 자리하고 계신 모습으

〈삽화=필몽 최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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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 뒤늦게라도 알아차리라는 자비심에서 그런 것인가 봅니다.

‘아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서둘러 낙산사로 달려가 관세음보살님의 자리인 굴속으로 들어가지만

거센 풍랑이 그 길마저 막아서 끝내 원효 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지

못한 채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지요. 아니, 이미 친견했건만 친견한 줄 몰랐

으니, 그렇다면 원효 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한 걸까요? 하지 못한 걸까

요?

관세음보살님은 대체 왜 이런 장난을 쳤을까요? 그것도 남성수행자에

게 여성으로 나타나서 말이지요. 어쩌면 당시 원효 스님 수행 이력에 알게 모

르게 자리한 마장(魔障)이 바로 이런 이성에 대한 욕망과 깨끗하고 더럽다는

분별심이 아니었을까요? 그걸 제대로 딱 짚어 보여 그런 분별심을 버리게 하

려면 그 누구도 아닌 여성의 몸이 가장 효과적이었을 테지요.

이 세상 모든 이들을 부처님 경지로 인도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은 이

렇게 몸을 바꿔서 여인으로도 나타나고, 파랑새로도 나타납니다. 치기어린

장난이 아니라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근기에 맞춰 나타난 화신이요, 응신(應

身)인 것이지요. 놀림을 당했다고 발끈 화를 낸다면 그는 아직도 공부를 한참

더해야 할 것이요, 뒤늦게나마 알아차린다면 그 또한 공부가 한 뼘 깊어지는

계기가 되겠지요.

지금 당신을 찾아온 가장 불쾌한 사람이 있다면 혹시 아나요? 관세음보

살님의 33화신 가운데 한 분일지 말입니다.

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또 생리를 해야 임신을 하고 생명을 낳

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그렇게 받아들일 뿐,

실제로 그 생리혈이 묻은 천을 보면 여성들도 살짝 인상을 찌푸립니다.

원효 스님이 질색하며 그 물을 버린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집니

다. 저 역시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시험임

을 역시나 원효 스님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남자, 너는 여자.’

‘나는 수행자, 너는 아직 욕정이 한창인 세속 여인.’

원효 스님에게는 이렇게 아직까지 남녀의 구분, 그리고 성자와 범부의

차별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여인이 떠서 올린 그 물에서

생리혈이 보였을 테고, 그 물은 남성수행자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휙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원효 스님이 그토록 갈구하던 진리의 세계는 어디였을

까요? 저 높은 곳, 저 맑고 깨끗한 곳, 한 점 티끌도 없고 고결해서 세속의 농

촌 아낙이나 빨래하는 여인은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곳이 진리의 세

계, 부처님의 경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런 곳이 부처님의 경

지라면, 그래서 지금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이 먼지 나는 대지를

부정한다면 과연 어느 곳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서서 저 높은 곳을 향할 수

있을까요?

맑고 청정한 곳이나 꿈꾸고 있고, 진짜 현실인 이 세계를 그저 희롱이나

하고 더럽다고 치부해버리는 사람을 향해 ‘제호 스님’이라 놀린 파랑새의 지

저귐이 바로 이런 원효 스님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지적한 것이지요. 최고

만 찾아다니는 스님, 그냥 그렇게 사시라고요.

그제야 아차 싶었던 원효 스님에게 그래도 관세음보살님은 신발 한 짝

은 남겨두셨네요. 지금 그대가 눈앞에 관세음보살을 두고도 보지 못하고 있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

사, 북 칼럼니스트이다. 현재 BBS불교방송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 중이다. 저

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 등이 있다. 또 <직

지>·<대당서역기> 등 많은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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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 3

불연(佛緣)이 깃든 다리글 · 사진 이강식 기자

사찰에 건립된 다리 외에도 불교와 인연이 깊은 다리가 여럿 있다. 전남 보성군

벌교 홍교와 함평 고막천 석교는 스님이 백성들을 위해 놓은 다리다. 경주에는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다리가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궁성인 반월성 남쪽에 있는 ‘문천교(蚊川橋)’ 또는 ‘유교(楡橋)’로 기록하고 있다. 문

천교가 월정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불교국가인 신라의 도성인 반월성

아래 문천에 세워진 월정교를 통해 고승대덕들이 궁성을 오가며 왕과 신하들에

게 불법을 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정교를 포함해 세 곳의 다리를 소개한다.

신라의 궁성인 반월성 남쪽에는 신라 경덕왕 대에 조성된 월정교가 있다.

이 다리를 통해 신라의 고승대덕은 궁궐을 오가며 왕과 신하들에게 불법을 전했을 것이다. 현재 다리는 2018년 4월 준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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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때 선암사 스님들이 백성 위해 놓은 보성 벌교 홍교

조선 영조 4년(1728), 전라남도 지방에 많은 비가 내려 대홍수가 났다. 당시 순천 낙

안현에 있던 다리도 강물에 쓸려 내려갔다. 이 다리는 숙종 44년(1718)에 지역 주민

들이 강과 해류(海流)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만든 뗏목다리였다.

다리가 유실되자 백성들은 큰 불편을 겪었어야 했다. 결국 백성들의 불편을

보다 못한 스님들이 나섰다. 홍수가 난 이듬해 순천 선암사 주지 호암(護岩) 스님의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를 공사감독으로 천거해

튼튼한 돌다리 건립에 착공했다. 다리는 6년 후인 영조 10년(1734)에 완공됐다. 벌

교 홍교 건립과 관련된 내용은 선암사 승선교 조성 내용을 적어놓은 홍교비에 기

록돼 있다.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는 앞서 ‘차안과 피안을 잇는 다리 상 · 하’에서 소개한 선

암사 승선교, 건봉사 능파교, 경주 불국사 청운교 · 백운교, 연화교 · 칠보교, 여수

흥국사 홍교, 순천 송광사 삼청교와 같이 무지개형태의 다리[虹霓]라는 점은 같다.

차이점은 앞서의 다리들이 홍예가 하나인데 반해, 벌교 홍교는 홍예가 3개라는

점이다.

홍교는 마을에서 사찰로 들어가는 다리

가 아니다. 벌교천 위에 건립된 홍교는 마을

과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다. 예전 같으면 길

을 물어 찾았겠지만, 요즘엔 내비게이션 덕택

에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홍교 인근 도

로변에 주차를 하고 다리를 향해 걸어가면 비

석 여러 개가 줄지어 서 있다. 5기의 비석은 홍

교의 내력과 건립 참여자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重修碑)와 단교명비(斷橋銘碑)다.

홍교를 ‘단교’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홍

수가 나면 다리가 끊어져 사람의 통행이 끊

어진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비석은 마모가

심하거나 훼손돼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1737년 · 1844년 · 1899년에 건립된 3기의 중수

비는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석은 홍교

의 역사와 지역의 연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현재 홍교의 길이는 27m, 높이는 약 3m,

폭은 4m 내외인데, 문화재청 자료에는 원래

홍교의 길이가 80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

다. 영조 13년(1737년)과 헌종 10년(1844년)에 한

차례씩 중수(重修)했는데, 3칸의 홍예는 1737

년 중수 때 만들어졌다. 1981년부터 4년간 실

시한 보수공사 당시에는 홍예의 밑부분과 석

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

로 교체하는 등 원형을 복원했다.

다리를 만들 때 사용한 양쪽 석재의 색

깔이 확연히 차이가 나 의아할 수 있는데, 낡

벌교 홍교는 3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홍예의 안쪽 모습. 홍예 중앙에는 용머리가 있다.

전남 보성 벌교 홍교 앞에는 5개의 비석이 있는데, 홍교의 내력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와 단교명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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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석재는 조선시대 홍교를 건립할 당시의 석

재이고, 깨끗해 보이는 석재는 1980년대 초

보수공사 때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세

월이 흐르면서 벌교천의 폭이 넓어진 탓에 다

리를 연장한듯하다. 다리 위를 걸을 때의 느낌

도 기분 탓인지 다르게 느껴진다.

3개의 홍예 천장에는 각각 용머리가 있

다. 스님들이 관리 감독해 건립한 다리여서 그

런지 사찰 홍예교의 용머리와 모습이 거의 같

다. 용머리에 담긴 ‘벽사(闢邪)’의 의미도 그대로

담긴듯하다. 홍교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홍

교를 바라보면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색다

른 운치가 있다. 민초들의 고통을 온전히 자신

의 것으로 여기고, 다리를 놓았을 당시 스님들

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하다.

고려 때 고막대사가 신통력으로

만든 함평 고막천 석교

전남 함평에도 스님이 건립한 돌다리가 있다.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위치한 보물 제1372

호 고막천 석교다. 고려시대인 1274년(원종 15)

무안 승달산 법천사의 고막대사(古幕大師)가 신

통력을 부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막천

석교는 ‘똑다리’, ‘떡다리’, ‘독다리’로도 불리

는 널다리 형태의 다리다. 고막리에서 떡을 만

들어 이 다리를 건너 영산포 등지로 나가서 팔았다

고 해서 ‘떡다리’로 불리기도 했다.

지역민들은 ‘고막대사가 신통력으로 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큰 홍수에도 견딜 수 있고, 700년이

지나도록 다리의 원형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

되고 있다.’고 여긴다. 석교가 있는 고막천은 나주군

과 함평군의 경계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흘러 영산

강에 합류하는 하천인데, 고막대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듯 보인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쌀 100석

을 실을 수 있는 배가 영산강을 거슬러 고막천을 통

해 고막리까지 드나들어 장(場)이 번성했다고 한다.

석교의 길이는 약 20m, 너비는 3.5m, 높이는

2m에 달하는 남한에서 유일한 고려시대의 다리다.

사용된 석재 중 큰 것은 길이가 4m, 두께가 35㎝에

달한다. 예전에는 이 석교가 함평에서 나주나 영산

포로 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지금은 인근에

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을에서 들로 나가는 농로역

할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풍파를 견디느라 다

리의 석재는 군데군데 깎이고 패였지만, 지금도 여

전히 건재하다.

이 다리는 고식(古式) 석축방식을 그대로 보여주

고 있는데, 간결하고 투박하다. 다듬거나 모양을 내

지 않은 화강암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하

게 노면(路面)을 만들어 연결했다. 교각(橋脚)은 총 5개

로, 각 교각의 기둥과 노면 사이는 사각 형태의 굄

돌을 받쳤다. 굄돌은 1개 또는 2개를 얹었는데, 모

양이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노면의 양쪽으로 난간돌을 6개씩 놓고 그 사

이에 2줄로 판석을 깔았다. 노면의 중앙에는 중간석

을 끼워 교차통행을 하도록 해놓았다. 돌기둥 위에

홍교 오른쪽에는 1980년대 초 다리를 보수할 때 홍교에 이어 확장한 것으로 보이는 다리가 놓여 있다.

마을에서 내려다 본 함평 고막천 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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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노면을 잘 떠받칠 수 있도록 시렁돌을 올렸

는데, 이 돌은 양쪽으로 50㎝ 가량 돌출돼 있

어 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

다. 마치 나무를 잘라 만든 듯, 자유자재로 돌

을 자르고 짜 맞춘 솜씨가 돋보인다. 하지만 일

제강점기에 보수를 하면서 엉성하게 조립해

본래의 품격을 잃었다.

2001년 다리를 보수할 당시 바닥에 박혀

있던 나무 말뚝의 탄소 연대를 측정했는데, 최

소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판명됐다. 이를 근

거로 현재까지 민간지역에 건립된 다리 중에

서 축조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돌다리임

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석교는 마을길 아래편에 있다. 비탈을 조

금 내려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벌교 홍교와

마찬가지로 하천 폭이 넓어진 탓인지 옛 다리

에 석재를 연결해 하천을 건널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석교의 형태를 흉내 내서 연결했으

면 수백 년 후에 문화유산이 될 수도 있을 텐

데.’하는 아쉬움이 든다.

요즘 세상에서 ‘신통력으로 다리를 놓았

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불교의 ‘자

타불이(自他不二)’ 사상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

해 정성을 다해 다리를 놓았을 고막대사의 자

비로운 마음이 지역에 오래오래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라 고승들이 佛法 전하려

반월성 오갈 때 건넌 월정교

불교의 나라 신라. 신라인들은 불심(佛心)으로

돌을 다듬고, 금속을 다듬어 빛나는 불교문

화유산을 만들었다. 이 유산들은 지금까지 전

해져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한국문화의 우

수성을 알리는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원

효 · 의상 · 자장 스님,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

초 스님 등 내로라하는 고승들도 신라 사람이

다. 고승들은 신라의 도성인 경주 반월성과 연

결된 다리를 오가며 왕과 신하들에게 부처님

의 가르침을 전했을 것이다.

신라시대 당시 반월성 남쪽에는 문천(蚊

고막천 석교 오른쪽에도 벌교 홍교와 같이 근래에 건립한 다리가 이어져 있다.

川)이 흘렀는데, 그 위에는 현재 서울 한강 위 ‘00대교’ 같은 다리가 여럿 놓

여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월정교(月淨橋)   · 춘양교

(春陽橋) · 문천교(蚊川橋) 등의 다리가 그것이다. 이 다리 중에서 현재 복원된 다

리는 월정교 뿐이다. 이 다리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 권 제9 ‘경덕왕 19

년(779)’에 “이월에 궁중에 큰 연못을 파고, 또 궁성의 남쪽 문천(蚊川) 위에는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덕왕 대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다. 당시에 조성된 불국사와 석

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세

계적인 명소가 됐다. 불교문화의 전성기였던 만큼 왕과 신하,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했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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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월정교의 중요성을 감안해 문화

재청과 경주시는 1984년부터 2년간 복원설

계를 위한 자료수집과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주춧돌과 주변에 흩어져 있던 부재(部材)를 통

해 조사한 결과 다리의 길이는 63m, 너비는

12m, 높이는 5m, 교각 사이는 13m였다. 조

사과정에서 주춧돌 등 석재는 3,000여 점, 교

각 사이에서 목재· 기와 조각 등이 수습됐다.

교각은 센 물살에 견디도록 배 모양으로 쌓았

고,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후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복원공사

로 길이 66.15m, 폭 13m, 높이 6m의 교량을

복원했다. 또 다리 양 끝의 문루(門樓) 2개동을

건립하는 공사를 2016년 4월부터 진행, 2018

년 4월 준공했다.

세간에는 월정교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의 사랑이야기를 전하는 다리로 알려져 있는

데, 원효대사 입적 시기(686년)와 다리 조성 시기

(779년)는 93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듯하다. 옛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사랑 이

야기가 된 다리는 문천교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다음과 같

은 내용이 나온다.

…… 스님이 어느 날 거리에서 다음과 같

이 노래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

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오.”

사람은 아무도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

다. 이때 노래를 들은 태종(무열왕)이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구나. …… 이때 요석궁(瑤石宮)에 과부가 된 요

석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해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고 했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

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

문천교는 ‘유교(楡橋)’로도 불린다. 현재 복

원된 월정교에서 19m 아래쪽에 다리의 흔적

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안내판이 없어 유구(遺

構)를 확인할 수 없다. 월정교는 최부자집이 있

는 교동마을에서 보아야 전체를 볼 수 있다.

조명을 설치해 놓아 낮 풍경보다는 밤의 풍경

이 더 매력적이다. 건물 외형을 보았으면 다리

위를 걸어보자.

월정교는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를 이어

준 문천교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월정교를 지나다니며 불법(佛

法)을 전했을 고승대덕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

어 있다는 점이다. 신라의 고승들이 없었더라

면, 또 도성으로 이어진 월정교와 같은 다리

가 없었더라면, 과연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찬란한 불교문화유산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가 되살리고 계승해야할 것은 문화

유산을 조성한 선조들의 고결한 정신이 아닐

까싶다. 복원한 경주 월정교 다리 위. 궁궐 또는 사찰의 회랑을 연상케 한다.

경주 월정교는 낮보다 밤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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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이중성

선승(禪僧)들은 ‘이것이다.’라고 해도 틀렸다고 하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해

도 틀렸다고 한다. 어떻게 말해도 틀렸다고 하는, 모든 논리의 부정이 바로

선가의 ‘사구백비(四句百非)’다. ‘사구(四句)’는 하나의 개념 혹은 대립되는 개념

을 기준으로 현상을 판별하는 4가지 논리형식으로 ‘~이다’(긍정), ‘~이 아니

다’(부정), ‘~이기도 하고, ~이 아니기도 하다’(긍정종합), ‘~인 것도 아니지만, ~이

아닌 것도 아니다’(부정종합)라는 네 가지 형식이 있다. 있고 없음[有無]의 경우라

면, ‘있다’[有], ‘없다’[無],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는 네 가지가 될 것이다. 사구백비(四句百非)란 다시

사구의 조합으로 100가지 논리형식을 만든 뒤, 이 100가지 논리형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긍정 아니면 부정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선승들은

논리형식을 왜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롭게 취했을까? 그것은 선승들이 이

세상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자

현상을 통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양자 현상

옆의 그림과 같이 나무의 양쪽을 동시에 지나가는 스키어(skier)는 세상에 없

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미시세계에서는 그림과 같은 일이 오히려

일상적인 일이다. 그림의 스키어에게 물리학자들은 ‘양자 - 스키어(Quantum

Skier)’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양자 - 스키어는 실제 소립자의 행동을 상징적으

로 나타낸 것이다. 이 양자 - 스키어의 경로를 설명할 때, 왼쪽 아니면 오른쪽

이라는 이분법적 사유에 맞는 표현만으로는 그 경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

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왔지만 오른쪽으로도 왔다.”고

긍정종합으로 표현하여도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다. 스키어[소립자]가 둘로 나

누어져서 반쪽씩 왼쪽과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해보면 스키어는 반드시 온전한 하나로 존재하지, 결코 둘로 나누어지

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왼쪽[오른쪽]으로 온 것도 아니지만, 왼쪽[오른쪽]

으로 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라고 부정종합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위의 그

림이 말해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승들은 일체 사물의

참모습이 위의 양자 스키어처럼 미묘하다는 것을 가리켜 ‘사구백비’라고 한

것인데,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위의 양자 스키어처럼 어떤 말로도

글 · 김성구

불교와물리학 3

〈삽화=전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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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기 힘든 현상을 우리는 자연에서 실제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입

자 - 파동의 이중성(二重性, Duality)’이다.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함께 가질 때 쓰는 말이다.

| 입자-파동의 이중성

사람의 사물인식 방식은 사물을 두 가지로 나누어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

(主) - 객(客)’, ‘음(陰) - 양(陽)’, ‘유(有) - 무(無)’, ‘선(善) - 악(惡)’ 등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어본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인간이 사

물을 인식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인간의 사유법칙[논리의 법

칙]이 이분법적 사고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초까지 물리학자

들은 파동임이 확실한 빛(Photon)이 입자의 성질을 가질리 없고, 입자임이 확실

한 전자(電子, Electron)가 파동의 성질을 가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냐

하면 입자와 파동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옆의 그림과 같이 벽면에 두 개의 슬릿(Slit, 가늘고 길게 찢어진 구멍)을 뚫고 빛

을 통과시키면 이 이중 슬릿(double slit)을 통과한 빛은 반대편 벽면의 스크린

에 밝고 어두움이 교차하는 띠를 만든다. 이 띠를 간섭무늬라고 하는데 입

자는 결코 이런 띠를 만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1923

년 미국의 물리학자 컴프턴(A. H. Compton, 1892~1962)은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쳐서 튕겨내듯이 ‘빛’이 다른 입자를 쳐서 튕겨내고 ‘빛’ 자신도 튕겨나는 현

상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으로 인해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 - 파동의 이중

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의 이중성에 이어 곧바

로 입자인 전자도 빛처럼 간섭무늬를 만드는 것이 관찰되었다. 전자 역시 입

자-파동의 이중성을 보인 것이다. 더구나 사람의 사물 인식방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빛이나 전자와 같은 소립자를 두 개의 슬릿을 열어놓고

하나씩 통과시켜도 간섭무늬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소립자가

동시에 두 곳의 슬릿을 통과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모든 소립자는 양자-스

키어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입자 - 파동의 이중성이 자연의 본

질임을 발견한 것이다.

| 사물의 이중성과 윤리

이중성은 과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이중

성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다 논할 수는 없고,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不二)

의 원리와 관련하여 이중성이 담고 있는 윤리적 의미에 대해서만 생각해보

겠다. 불교는 일찍부터 이중성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범부 즉 부

처’, ‘생사 즉 열반’, ‘번뇌 즉 보리’와 같은 표현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이분법

적으로 볼 때 이들은 둘인 것 같지만, 입자 - 파동의 이중성에서 보는 것처럼

이들 각각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개

념들이 아니다. 선(善)과 악(惡)도 상대적인 개념이지, 둘을 나누는 절대적인 기

입사파

광원

a

b

d

c

이중슬릿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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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가 된 왕 3 우전왕

글 · 조용주 기자

우매한 왕, 왕비에 감화

최초로 불상 조성해

우전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여 전단향목으로 불상을 만들고, 뒤에 도솔천에서 돌아온 붓

다에게 이 불상을 보였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불상이라 전하는데 역사적 사실이 아니

라 전설로 봐야 한다. 이 작품은 관련 전설의 부조다. 중앙 대좌에 부처님이 앉아 있고, 왼

쪽에 선정인을 취한 작은 불상을 들고 있는 사람이 우전왕이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

관 소장. 2~3세기, 편암 440×70×320cm

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악행은 무지(無知)의 소치이기 때문에 ‘악’은 치유해야

할 대상이지, 벌하거나 증오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살인마

앙굴마라를 제자로 거둔 것이다.

불이의 진리를 체득하면 선악의 분별도 초월하게 된다. 일찍부터 선 수

행을 통해 자타불이의 진리를 터득한 하버드 대학교의 신경과학자 제임스

오스틴(James H. Austin, 1925~ )은 그의 체험을 뇌  ·  신경과학의 바탕에서 설명한 책

<선과 뇌의 향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체험의 역설이 넘쳐난다. 한없이 무한

한 가능성과 함께 공존하고 색과 공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어떤 언

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 이 경지에서는 이전에 선과 악이라고 이름붙인

그런 상태에서 자유롭다. 선과 악을 잘 판단하여 공명정대하고 스스로 윤리

적이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벗어나 있다. …… 이런 심오한 깊이

에서 일어나는 변화대상의 영역은 기질  ·  태도  ·  자기인식  ·  사고  ·  행동 등 총체적

인 범위이다. 뿐만 아니라 신경계에서도 일련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제임스 오스틴이 한 말은 <반야심경>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불교에

서 늘 하는 말이기도 하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1946년생으로 서울대 물리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소립자 물리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

대 퇴직 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 학 ·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경상남도 함양에 약천사를

창건했다. 이곳에 불교과학아카데미를 개설, 2014부터 매월 불교와 현대물리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현대물리학으로 풀어본 반야심경> · <천태사상으로 풀이한 현대과

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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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 두 명의 임금이 있었다. 왕들의 이름은 ‘아라카파’와

‘베타지바카’였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같은 스승 아래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

에 왕이 된 후에도 친하게 지냈다. 두 왕은 세간의 무상(無常)함을 싫어해 훗날

출가하기로 약속했고, 왕위를 물려준 후 히말라야에 들어가 각기 다른 산에

서 수행을 했다. 그리고 보름에 한 번씩 불로 신호를 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

했다.

어느 날 아라카파왕이 불로 신호를 보냈지만, 베타지바카왕이 머무는 산에

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다시 약속한 보름이 되었을 때도 연기는 오

르지 않았다. 아라카파왕은 베타지바카왕이 먼저 죽었음을 알게 됐다. 먼저

열반에 든 베타지바카왕은 제석천(帝釋天)으로 태어나게 됐다. 신통력을 갖춘

그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라카파왕을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혹시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나그네의 질문에 아라카파왕은 정중히 대답했다.

“제가 수행한 곳 가까이 많은 코끼리가 몰려와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석천은 아라카파왕에게 악기를 연주하며 주문을 외워

서 코끼리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 매에 물려가 히말라야서 탄생

한편 인도 반사국 푸라판타왕은 임신한 왕비와 함께 수도 코삼비에 세워진

궁전의 높은 누각 위에 올라갔다. 왕비는 귀한 붉은 털옷을 입었고, 순금으로

만든 왕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각 주위를 맴돌

던 큰 매가 갑자기 날아왔다. 매는 붉은 털옷을 입은 왕비를 고깃덩어리로 착

각한 채 날카로운 발로 채어 히말라야로 날아갔다. 그리고 인적이 끊긴 둥지

옆 나뭇가지에 왕비를 내려놓았다.

만삭이었던 왕비는 해가 저물 무렵 진통을 시작하더니,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아들을 순산했다. 왕비는 아들 이름을 ‘해가 솟는다.’는 뜻의 ‘우

데나’라고 지었다. 하지만 히말라야 깊은 산속에서 갓 출산한 산모와 아기가

살아남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왕비가 머물고 있는 둥지 가까이에는 토굴이 있었다. 바로 고행자 아라

카파왕이 머물고 있던 토굴이었다. 명상에 잠겨 있던 아라카파왕은 뜻밖의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가 모자를 구해주었다. 그는

모자를 토굴로 데려와 정성껏 간호했다. 왕비는 생명의 위험에서 자신과 아

들을 구해주고, 돌봐준 아라카파왕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부부의 연을 맺고 우데나를 함께 길렀다.

십여 년이 흘러 우데나는 청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행자 아라카

파왕은 하늘의 별을 보고 반사국의 푸라판타왕이 죽은 것을 알게 됐다. 그

리고 왕비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왕비는 자신과 아들에 얽힌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실 반사국의 왕은 저의 남편이고, 우데나는 다음 왕위에 오를 아이

입니다.”

왕비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는 자

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슬프게 울었다. 그런 왕비에게 고행자 아라카파왕은

약속했다.

“내가 반드시 우데나가 반사국의 왕이 되게 해주겠소.”

그런 후 과거 나그네로 변신한 베타지바카왕이 가르쳐준, 악기를 연주하고

주문을 외워 코끼리를 부리는 재주를 우데나에게 가르쳤다. 왕비도 우데나

에게 그가 반사국의 왕자임을 알려주며, 그 증거로 자신이 입었던 붉은 털옷

과 자신이 끼고 있던 왕의 반지를 건네주었다. 또한 반사국 대신들의 이름도

알려주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우데나 왕자는 자신을 길러준 아라카파왕과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주문을 외워 코끼리를 거느리고 반

사국으로 들어갔다. 결국 자신이 왕자라는 여러 증거를 대신들에게 보여 승

인을 받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우전왕(優塡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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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 수행력 감화, 부처님께 귀의

우전왕은 굉장한 호색한이었다. 그는 사마밧티라는 왕비가 있었지만 아름

다운 미인을 좋아했다. 출세에 눈이 먼 신하들은 왕에게 아첨하고자 미녀를

구해 바쳤다. 우전왕은 미녀에게 빠져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

어주었다. 새로운 궁전을 지어주고, 수많은 몸종을 딸려 주었다. 또 춤을 추

고, 음악을 연주하는 천여 명을 붙여줘 미녀들이 언제나 감미로운 음악과 춤

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우전왕은 이미 왕비가 있었지만 미녀에게 빠져 그녀를 새 왕비로 삼을 생각

을 했다. 그래서 독화살로 왕비를 죽일 계획을 꾸몄다. 왕비는 독실한 불교신

자로 부처님을 섬기고, 여러 해에 걸쳐 수행해 수다원(須陁洹)과에 오른 상태

였다.

어느 날 왕비가 산책을 나가자 우전왕은 독화살을 준비하고 산책로 근

처에 숨어 있었다. 이윽고 왕비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우전왕은 독화

살을 날렸다. 왕비는 독화살을 보고도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일심으로 염불을 하면서 인자한 마음으로 왕을 향해 꿇어앉아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왕비를 향해 날아가던 독화살은 마치 마술처럼 왕비의 몸을 세

바퀴 돌고나서 도리어 우전왕을 향해 날아와 그의 얼굴 앞에 떨어졌다. 우전

왕은 가지고 있던 독화살을 모두 쏘았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왕

비의 수행력에 깜짝 놀란 우전왕은 급히 화살을 내던지고, 왕비에게 다가가

자신의 방탕한 생활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며칠 후 우전왕은 왕비가 귀의한 부처님을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참회

하고자 했다. 우전왕은 흰 코끼리가 끄는 금수레를 타고 궁을 나섰다. 부처님

이 계신 곳에 도착한 우전왕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 후 엎드려 참회했다.

“제가 삼존(三尊)께 무거운 죄를 지었습니다. 미녀에게 현혹돼 방탕한 생

활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처님께 귀의한 왕비를 독화살로 죽이

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도리어 무량한 자비심으로 저의 죄를 뉘

우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부처님의 높고 높은 법력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부처님께 귀의하오니, 제가 과거를 뉘우치고 새 사람

이 되게 하옵소서.”

우전왕의 참회에 부처님께서는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장합니다, 왕이시여. 악을 깨닫고 허물을 뉘우치니, 이것은 현명한 사

람의 행입니다. 나는 왕의 좋은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전왕은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님께 세 번 귀명(歸命)하고, 부처님께서는 그

것을 세 번 받으셨다. 이날 우전왕은 부처님께 계를 받았다.

| 부처님 못 만나 근심병 … 불상 조성

어느 날, 기원정사에 머무시던 부처님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솔천으

로 올라가 어머니 마야부인께 3개월 간 설법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오랜 기

간 부처님을 뵙지 못하자 제자인 아난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솔천에 올라가 설법을 하신 후 지상에 내려오시는

모습의 부조. 계단 위 가운데 부처님께서 서 있고, 좌우는 제석천과 범천이다. 계단 양옆이

빔비사라왕과 우전왕의 일행으로 추측된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2~3세기, 편암

620×80×5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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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六根)으로 보는 건강 3 코(鼻)

코는 인체의면역력 가늠자

글 · 김경철(동의대 한의대 교수)

“부처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간절히 뵙고 싶습니다.”

그러자 아난이 대답했다.

“저도 부처님께서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

계를 받은 후 수시로 부처님을 친견했던 우전왕도 아난에게 같은 질문

을 했다. 아난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 우전왕은 늘 찾아뵙던 부처님을 두 달

동안이나 뵐 수 없게 되자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신하들이 우전왕에게 아

픈 이유를 물었다.

“어떤 근심으로 아프십니까?”

“부처님을 뵙지 못한 근심으로 병이 들었다. 만일 부처님을 뵙지 못한다

면 나는 곧 죽고 말 것이다.”

신하들은 왕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던 끝에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기

로 의견을 모았다. 부처님 형상을 만들면, 우전왕이 불상을 예배하고, 공경

하면서 근심병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상을 조성

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우전왕은 나라 안의 뛰어난 장인들에게

명령해 전단(栴檀, 인도 향나무)으로 5척 높이의 불상을 만들게 했다. 우전왕은 완

성된 불상에 부처님 대하듯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병이 치유됐다.

부처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우전왕은 부처님을 찾아뵙고 불

상을 조성한 공덕에 대해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답하셨다. 이후 우전왕은 더욱 깊은 신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

을 따랐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에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슬퍼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한 형상을 조성하지 못하

게 하셨다. 그러므로 불상 조성의 공덕을 묻는 우전왕과 부처님의 대화는 실

제와는 다르게 후대에 미화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학계에서는 불상이 최

초로 조성된 시기를 부처님 열반 후 500년[無佛像時代]이 지난 쿠샨왕조로 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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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의 자연치유력이 저하되어, 사계절에 걸쳐 남녀노소 구분 없이 비염이 유행하

고 있다. 또 공기오염과 미세먼지 등이 심해지면서, 코를 비롯한 호흡기 건강에 사회

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형편이다. 한의학에서 코는 허공의 천기(天氣)와 통하는

호흡 기능의 첨병으로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여 신통한 화로라는 뜻에서 ‘신로(神盧)’

라고 부른다. 안으로 폐장과 연결되어 호흡과 향취(香臭)를 담당하므로 코의 건강을

통하여 폐장을 포함한 호흡기의 전반적인 상태를 진단할 수 있으며, 코의 상태를 통

하여 여러 가지 건강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코의 상태로서 정기(正氣) 즉, 인체면역력을 가

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항생제 남용이 비염 · 아토피 피부염 · 천식 등 알레르기

질환에 걸릴 가능성을 높인다는 논문과 기사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깨끗

한 위생환경은 오히려 면역체계를 약화시켜 질병에 더 잘 걸리게 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생활 외부환경과 관련하여 ‘코 – 피부 – 기관지 – 폐장’ 라인의 건강을 유지하

는 것이 핵심이다. 이 계통이 공기를 통하여 인체 생명력을 유지하므로, 인체 면역

력 강화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계통의 기능이 저하되면, 면역

력이 저하되어 알레르기 비염이 생긴다. 맑은 콧물이 만성적으로 흐르는 증상이나

코막힘 등으로 고생하는 등의 증상은 몸이 온도 · 습도 · 바람 등 기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또 봄날의 코피 등은 신체 컨디션 조절의 실패이

며, 부비동(뇌와 턱관절 사이)의 축농증[鼻淵]은 코에 축적된 노폐물이 두뇌까지 손상되게

하는 형편이다. 따라서 코가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면역력 유지에 아주 중요하다.

| 건강 차 마시기와 코 세척

먼저 코의 건강을 위한 보편적인 차로는 천궁과 당귀를 함께 달인 차가 알맞다. 이 차

는 머리도 맑게 하고, 여성의 건강에도 좋다. 비염이나 축농증이 있는 경우는 목련꽃

봉오리차가 좋다. 한약으로는 ‘신이(辛荑)’라고 하는데, 확 피기 전 꽃봉오리의 향긋한

향이 코를 건강하게 한다. 녹차나 홍차, 보이차와 자스민차도 코 점막에 좋다.

최근에는 작두콩차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차들은 신체 컨디션 조절에도 도

움을 주므로, 연한 농도로 따뜻하게 마시면 더욱 좋다. 또 사상체질별로 소음인은

계지(桂枝) · 천궁 · 생강 · 귤피차가 좋고, 소양인

은 우엉이나 우엉뿌리 · 박하 · 각종 꽃차가 좋

으며, 태음인은 맥문동 · 더덕 · 행인(杏仁) · 백지

(白芷)차가 좋고, 태양인은 앵두 · 모과차가 좋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매일 저녁 코를 세

척하는 양생법도 코의 위생과 건강에 도움이

된다. 특히 공기오염, 미세먼지 등으로 인한 코

속 노폐물 제거에 알맞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적당한 온수에

좋은 소금을 풀어 코로 흡입하고 뱉어내는 방

법을 수회 반복함으로써 코 속을 세척하는 것

이다. 매일 꾸준히 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소

금 외에 한약의 칡(갈근)과 백지 달인 물이나,

창이자 · 강활 등을 달인 물로 세척해도 좋다.

냉기에 민감한 체질은 계피-생강차로 세척하

길 권한다. 이 경우, 농도는 연하게 해야 한다.

흔히 마시는 커피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보통

농도가 진한 것을 많이 선호하는데, 연한 농

도로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게 신체에 유익하

다. (다소 의아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커피점에

서 판매하는 것의 1/10 정도로 농도를 맞추길

권한다.)

| 코 훈증과 각탕

또 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자연 약재의 향

기를 이용하는 훈증요법도 코의 건강에 유

익하다. 박하 · 방풍 · 강활 · 맥문동 등의 약재

를 유리 주전자에 넣고 아주 약한 가스불에

연하게 달여, 조금 식힌 후 따뜻한 김을 쏘이

는 것이다. 저녁 식사 후 여유로운 시간에 하

면 된다. 몸이 냉한 사람은 계피 · 생강이나 건

강차를 훈증하면 좋고, 신체가 비만이면 도라

지 · 더덕 · 백지차의 따뜻한 김을 훈증하면 된

다. 훈증하고 남은 약재물은 그냥 버리지 말

고, 면봉에 적셔 좌우 비강 안을 세척하도록

한다. 훈증 10분과 면봉 세척 10분을 합쳐 20

분 정도 하면 된다.

만약 항상 피로하거나, 손발이 차거나,

늘 어깨가 아프고 축 처지는 경우, 비만 등으

로 노폐물이 많은 경우라면, 훈증과 함께 족

욕 · 각탕(脚湯) 등을 병행하면 더욱 뛰어난 효

과를 얻을 수 있다. 족욕은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족욕기로 하면 된다. 20∼30분

정도 하면 효과가 좋다. 각탕은 족탕보다 조금

더 구색을 갖추어야 하는 대신 효과가 강력하

다고 할 수 있다. 무릎 바로 밑까지 물이 오도

록 하는 각탕은 비싼 도구를 구입할 것이 아

니라, 자신의 무릎 길이에 맞는 세로 높이의

(좁고 깊은) 통을 마련해 집에서 뜨거운 온수

를 받아, 바닥에 수건을 깔고 하면 된다. 온기

가 20분 정도는 충분히 지탱하니까, 각탕 효

과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령 저녁 뉴스 시

간에 할 경우에는 코의 건강도 잡고, 피로도

잡고, 뉴스도 보는 등 일거삼득이다. 훈증과

각탕은 1주일 단위로 매주 3회 정도를 하면 된

다. 월 · 수 · 금 또는 화 · 목 · 토 등으로 정해서

실천하면, 꾸준히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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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 습도의 조절과 음식의 온도

미세먼지가 심각할 때는 약재를 이용한 훈증

요법을 꾸준히 실행해 코와 호흡기 건강을 챙

기면 좋다. 훈증요법과 아울러 거주하는 공간

의 온도 · 습도 · 바람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

다. 피부 · 코 · 기관지 · 폐장은 호흡과 관련하

여 하나의 네트워크 계통을 이룬다. 특히 온

도 · 습도 · 바람에 민감하므로 관련 전자제품

을 활용하거나 젖은 수건이나 솔방울 등을 활

용한 관리가 필요하다.

코는 특히 온도에 민감하다. 그런데 이 온

도는 공기의 온도만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가 먹는 음식의 온도도 포함된다는 걸 명심해

야 한다. 평소 따뜻한 음식을 먹고, 따뜻한 차

나 물을 수시로 마시는 게 좋다. 음식의 온도

는 맛에도 큰 영향을 미치므로, 바로 만든 음

식을 바로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또 음료수로

마시는 차 종류도 항상 따뜻하게 마시는 습관

을 들이면, 코와 호흡기 전반의 건강을 유지하

는데 도움이 된다. 요즘 주위를 살펴보면, 시

원한 음식이나 차가운 물과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을 자랑거리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런데 사람이 온혈동물이란 점과 함께 나이 든

사람들의 체온이 떨어지는 점만 고려하더라

도 건강과 체온, 건강과 음식 온도와의 깊은

관련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매운 맛집 등

자극적인 열성 음식을 섭취해 위장과 호흡기

계통을 괴롭히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 역시

코와 같은 호흡기 기관의 기능을 피로하게 하

는 행위이므로 자제할 필요가 있다.

| 코 마사지와 후두부(後頭部) 박타공

코의 건강을 위한 마사지 운동으로, 먼저 오

른손 둘째손가락으로 코 밑의 인중 부위를 좌

우로 오고가면서 36회 마찰한다. 다음으로

(안경은 벗어두고) 양손의 둘째 손가락으로

콧등의 좌우 아래부위를 상하로 오고가면서

강하게 36회 마찰한다. 오전 · 오후 · 저녁 등

1일 3회 정도 실시하면 좋다. 코 마사지 운동

은 마찰열로 인하여 순환이 촉진되고 노폐물

도 배출하므로 코 막힘 증상이 없어지고 기분

또한 좋게 된다.

그런 다음에 코 건강을 위해 후두부 박

타공을 하면 더욱 좋다. 좌우 뒷목의 머리카

락이 시작하는 부위에 있는 오목한 부위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그리고 양쪽 귀쪽으로 가면

서, 가볍게 주먹을 쥐고 귀가 살짝 울리도록,

양손을 이용하여 좌우를 동시에 각각 8회에

서 24회까지 두드리는 것이다. 신체 전후 상대

성 이론에 입각하여 신체 뒤쪽을 자극하여 신

체 전면의 코와 눈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운동법이다. 후두부 박타공은 머리의 혈액순

환에도 도움이 크므로, 후두부 두통 · 스트레

스 · 혈압에도 알맞고, 작업 도중의 기분 전환

용도에도 알맞다.

| 코 건강에 유익한 호흡

신체를 두드리는 운동과 함께 편안한 자세에서 가지런하게 하는 호흡은 코

의 건강에 아주 중요하다. 코는 공기를 호흡하는 기관으로서 호흡을 편안하

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호흡을 고요하고 가늘고 바르게 하면서, 평정심을 유

지하고 감정을 조절하면, 코의 위생과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특정 시간을

정하지 말고, 생각할 때 수시로 하는 게 좋다. 먼저 코밑 인중에 가벼운 깃털

이 있다고 가정하고, 깃털이 날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고요하게 들숨과 날

숨을 쉬어보자. 코 안의 온도 · 습도 · 바람 상태가 조절되고, 코와 연결된 두

뇌 · 호흡기 등의 기능이 함께 올라감을 느낄 수 있다.

또 코와 입의 청결을 위해 코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입으로 탁한 기

운을 내뿜는 토납법도 좋다. 가만히 앉거나 서서, 상체를 굽히며 천천히 ‘하

∼’ 소리를 내면서 길게 숨을 내뱉는다[吐]. 이어서 상체를 일으키면서 코로

상대적으로 짧고 강하게 숨을 들이마신다[納]. 1회 3∼5분 정도로 수시로 하

도록 한다. 토납법은 코로 하는 정상 호흡에서 벗어나는 임시방편이지만, 코

와 입 그리고 전신의 노폐물 배출에 아주 좋다.

그리고 평소 원활한 호흡을 위하여, 아침에 세수하면서 반드시 코를 세

차게 몇 번씩 풀어 코딱지와 불순물을 제거하도록 한다. 특히 고령자는 코털

제거와 함께 필수적으로 코풀기를 실천하면 코 건강에 도움이 된다.

만약 코 안이 건조하거나 불편하면, 둘째손가락으로 좌우 어느 한쪽의

코 날개(鼻翼)를 눌러 코를 막고 힘차게 몇 번씩 숨을 쉬도록 한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로 한다. 누구나 실행해보면 느끼겠지만, 대개의 사람은 좌우 어느

한쪽의 콧구멍 호흡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 약한 쪽의 콧구멍 호흡을 2, 3

배 더 하도록 한다.

또 요즘 등산 인구가 증가했는데, 공기 좋은 산에 올라가서 힘찬 심호흡

을 여러 차례 반복해 코 · 기관지 · 폐장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으로도 몸속 노

폐물 제거와 호흡기 건강을 보다 잘 챙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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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식의 알면 도움되는 노후준비 3

부모 봉양 전제 없는

자식 경제 지원은 위험

<삽화=박구원>

자식과 행복의 관계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야할까? 아니면 행복은 생각하지 말고 그저 깨달음만을

열심히 추구해야 할까? 혹시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부처님한테 혼나는

것은 아닐까? 과연 불교적 시각에서 인간이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게 맞는

지, 얼핏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경전을 보면 행

복에 관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숫타니파타〉에는 ‘살아 있는 존재는 다 행

복하라.’고 적혀 있다. 〈법구경〉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행복을 원한다.’는

경구가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 있게 행복해야 하고, 행복을 원해도 문제가

없으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처님조차 행복하라고 하셨으니 당

당하게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자.

자식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심리학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병든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의 심리에 대해 많

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순간 행복에 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긍정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늘어났고, 지난 수십 년 동안 행복에 관한 긍정심리

학 연구결과가 많이 축적되었다. 행복도와 여러 가지 요인에 대한 긍정심리학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예를 들어 날

씨가 좋으면 더 행복하기에 햇빛이 부족한 지역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우울하

다는 게 이해가 된다. 건강해도 행복도가 올라가고,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배우자와 좋은 친구 역시 행복의 요인이다.

언젠가 ‘자식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하는 주제에 대해 ‘아직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아주 흥미로운 긍정심리학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에

는 약간 의아했지만 나중에는 ‘아~’하며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은 어렸을 때 온갖 귀여운 짓으로 부모와 조부모를 즐겁게 해준다. 할아버

지와 할머니의 삶의 만족도가 손주 때문에 쑥쑥 올라간다. 남에게 손주 사진을

보여주고 자랑하려면, 돈을 주고 자랑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주일 내

내 손주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변에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도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 부모의 속을 썩인다. 그래서

우리말에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도 있다. 과거에는 사춘기 때 부모와 자식의 갈

등이 극심했는데, 요즘은 학원을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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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의 갈등이 시작된다. 부모자식 간의 갈등은 어느 정도 부모의 책임

이 크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찌되었건 문제는 아이가 크면서 부모에게 불행의 요

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주었던 즐거움을 크면서 모두 빼앗아가는

셈이다. 자식 때문에 속 썩여본 사람이 한둘인가? 그러니 자식은 행복의 원인이

기도 하지만 또 불행의 원인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젊은이가 쉽게 독립하기 어려운 사회다.

예를 들어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수도권은 아파트 가격이 너무 높다. 젊은이

가 돈을 벌어 아파트를 구입한다는 계획은 비현실적이다. 요즘은 ‘명문대학 출

신에 좋은 직장을 다니는 신랑감보다 부모가 재산이 많은 신랑감이 최고’라고

한다.

어느 날, 친구가 혼기를 놓친 자기 딸의 혼사를 걱정하며 좋은 신랑감을 소

개해달란다. 친구는 자기 딸을 부탁하면서 솔직하게 딸의 문제점에 대해 한탄

했다. 집이 없는 신랑감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자신은 월

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집도 마련하고 문제없이 살았다는 거다.

필자는 친구에게 ‘우리 세대와 우리 자식 세대는 처한 환경이 매우 다르다.’는 점

을 지적했다. 과거에는 부동산이 쑥쑥 올라가는 시대였고, 아파트 하나 분양 받

는 것은 아주 쉬웠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집 마련이 정말 힘든 세상이 되었고, 집

이 없는 삶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도 알고 나도 아는

말이지만 새삼스럽게 변해버린 세상을 한탄하는 넋두리였다.

부모자식 경제관계는 쌍방향적

미국에 살면서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 자식은 빠르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늦어도 대학을 졸업할 때부터 부모로부터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한다는 사실

이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심지어 결혼한 아들이 저축

을 못하고 전세금이 오를 때마다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 답답했던 한 부모는 아

들과 며느리를 불러놓고 한 달 지출을 하나하나 따졌다고 한다. 아들과 며느리

의 설명을 들은 부모는 ‘도저히 저축하며 서울에서 살기 어렵구나.’하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식이 재정적으로 독

립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다보니 대학 졸업 후에도, 결혼 후에도 부모가 자식을

끊임없이 돌보아야 한다. ‘평생 에이에스(A/S)’라는 우스갯소리마저 있다.

요즘 경제적 여유가 충분치 않았던 부모가 자식을 돕다가 노후빈곤에 빠지

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퇴직금을 모두 자식에게 쓰고 자식에게 부양도 받지 못

하는 비극적 사례도 심심찮다. 부모가 가진 유일한 재산인 집을 팔지 않으면 자

식이 운영하는 가게가 넘어가게 생겼다는 말에 부부가 이혼을 했다는 집도 있다.

남편은 집을 팔지 않겠다고 하고, 아내는 팔자고 하다가 부부 사이가 악화된 것

이다. 결국 아내가 자식을 돕겠다며 이혼하고 집의 절반을 자식의 사업자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결혼자금이 부족해서 부모가 사는 집을 팔거나 집을 줄여가는

상황도 흔한 사례이다.

〈중아함경〉에는 “부모가 자식을 잘 보살필 때 자식에게 빚을 지지 않게 하

며, 가진 재물을 즐거이 모두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

절을 보면 부모는 자식에게 평생 A/S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경전에는 “혹

은 부모나 나이 많은 이에게, 제때에 받들어 섬기지 않고, 재물이 있으면서 주지

않는 것, 그것은 곧 잘못된 문[負門]에 들어섬이다.”라고 설하며 처자식보다 부모에

게 먼저 지출해야 한다고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간

의 경제관계는 부모가 자식에게만 주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향적인 관

계가 되어야 한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놀란 점 중의 하나는 불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경제관

계는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인 경제관계라는 점이다. 경전에서는 재물과 이익

을 받으면 반드시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

도 마찬가지다. 자식은 부모를 공양해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경제적으로 최대한

도와주어야 한다. 다만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풍토인데 부모가 자비의 정

신으로 일방적인 희생만 할 수는 없다. 쌍방향적인 부모자식 간의 경제관계가 불

교가 보는 바람직한 경제관계다.

윤성식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고려대와 미국 오하이오대 졸업 후 일리노이대에서 석사, UC버

클리대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또 동국대에서 불교학 석 · 박사를 받았다. 2004년 정부

혁신지방분권위원장과 국회공직자윤리위원장, 미국 텍사스대학(오스틴) 경영대학원 교수를

맡은 바 있다. 저서로 〈부처님의 부자 수업〉·〈예측불가능한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법〉 등 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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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최문정

불화작가. 이화여자대학

교를 졸업했다. 중요무형

문화재 48호 단청장 전수

교육조교로, 2003년 동국

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경북 · 충남도 문

화재위원, 한국전통문화

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

했으며, 전승공예대전 심

사위원을 맡은 바 있다.

내 마음에 쌓는 탑

인생은 탑을 쌓듯 살아야 한다. 돌을 주워다가 탑을 쌓듯 하찮은 것일지

라도 쓰임을 찾으면 귀하게 되듯. 인생은 탑을 쌓듯 살아야 한다. 한 층

한 층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고 무상한 시간을 견디며 하늘을 향해가

듯. 인생은 탑을 쌓듯 살아야 한다. 정성이 들어간 딱 그만치의 가치로 일

어서는 이치를 알기까지 무릎이 깨지고 가슴이 무너지더라도. 부처님을

모시는 탑처럼, 내 안에 나를 모시는 탑을 쌓으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루의 높이를 그려가면서 나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탑이 되고 싶다.

오늘도 내 마음의 절에 탑 불사 하나를 마무리 한다.

금강 단상

진정 행복하게 사는 법

누군가가 ‘당신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라

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수천 수만 가지의 답변을 내놓아도

궁극의 목적은 ‘행복’이 아닐까. 전국 맛집 투

어도, 운동도, 다이어트도, 돈벌이도, 여행도,

수행도 결국엔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함이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

해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끝없이 고민한다. 불

교에서 말하는 삶의 궁극적 목적도 ‘행복’이

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깨달음을 얻어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붓다의 삶을 사는

것이지만, 일반적 측면에서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불자들은 불법(佛法)을 전하는 스님의 법

문과 수행자다운 모습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삶의 방향 또는 인생살이의 마음가짐을 바꾸

기도 한다. 올 봄, 평소 존경하는 스님 두 분은

잔잔한 가르침으로 ‘진정 행복한 삶이 무엇인

지’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인생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타인을 대하는 자

세도 달라지게 했다.

한 스님은 “욕심이 없어야 행복해진다.”

는 덕담으로, 또 한 스님은 다실(茶室) 벽 메모

지에 손글씨로 써 놓은 “화가 날 때 - 화가 나

서 한 번 치받으려다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할까?’”라는 글귀로 말이다.

화가 나거나, 욕심이 생길 때마다 두 스

님의 말과 글을 떠올린다. “이러면 진정 내가

행복해질까?”라고 자문하며 스스로를 채찍

질한다. 가족, 특히 자녀에 대한 기대치와 행

동은 아이의 ‘행복’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

직 나의 욕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런

면에서 두 스님의 가르침은 기자 인생에 지남

이 되고 있다.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한 그 어떤 행위

로 인해 타인이 불편을 겪거나 불행해진다면,

그것은 진정 나의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남

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진다.’고 굳게 믿고

실천하면,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

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스님 두 분의 덕담

과 글귀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어, 모두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

란다.

글 · 이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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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성립과 기원에 대한 연구서

대승불교 - 교리적 토대와 성립

폴 윌리엄스 지음ㆍ조환기 옮김 / 민족사 / 48,000원

인도에서 기원한 대승불교는 동북아시아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일반적인

형태로 널리 퍼져 있다. 지난 25년 동안 대승불교에 대한 서양의 관심은 학

문적으로 많은 연구 성과를 생산했고, 티베트 불교와 선불교에 이끌린 서양

인들의 관심을 반영했다.

〈대승불교-교리적 토대와 성립〉은 대승불교의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반야ㆍ중

관 · 유식 · 여래장사상 · 화엄사상 · 법화사상 · 불신관 그리고 대승불교의 성립과

기원에 대한 연구서다. 특히 대승불교 각 사상적 토대, 바탕, 성립에 초점을

두고 중국과 티베트, 네팔에 대한 연구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저자인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는 가장 권위 있는 대승불교 연구

자로서 불교를 공부하고 가르쳤던 역자의 입장에서 ‘대승불교는 무엇을 말

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또 대승불교의 사상과 이 분야

에 대한 최근의 학문적 성과들도 소개했다.

책은 서론을 시작으로 △지혜의 완성(반야부 경전) △중관 △유식 △여래

장사상 △화엄사상 △<법화경>과 그 영향 △불신관(佛身觀) △보살도 △믿음

과 헌신: 붓다와 보살 숭배 등으로 구성됐다.

〈대승불교-교리적 토대와 성립〉의 초판은 1989년에 출판됐다. 이번

개정판은 새로운 연구를 풍부하게 다루면서 종교의 다양성과 풍부함에 초

점을 맞췄다. 자세한 내용은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돕고 본문의 논쟁은 더욱

상세하게 다뤘다.

저자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는 1950년에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불교철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브리스톨대학의 인도 티베트철학의 교수이자

불교연구소의 공동책임자를 역임했다.

139138

편집부

고대 인도에서 불교의 탄생 탐색

불교의 기원

고빈드 찬드라 판데 지음ㆍ정준영 옮김 / 민족사 / 48,000원

불교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인도의 역사학자인 고빈드 찬드라 판데(Govind

Chandra Pande, 1923~2011)가 종교 전통의 불교가 아닌 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어

떻게 시작되었는지 탐색했다.

저자는 불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연구와 관련해 유기적으로 연결된

그룹을 이루도록 제작했다. 다루는 주제는 상당 부문 문학적이고 종교 · 철학

적인 성격이지만 논의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본서의 2장에서 7장까지는 니까야에 주목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니

까야 안에서 법수의 형태로 정의되는 교리들에 대해 붓다의 말씀이라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라는 초기불

교의 대표적 교리들이 해당한다. 또 니까야를 통해 불교의 본래 메시지는 무

엇이었는지 분석했다.

제8~9장에서는 베다의 종교 및 문화의 발전, 붓다와 마하비라 시대의

사회적 · 지적 경향의 발전을 검토했다. 붓다의 삶과 탐구, 경험 및 전교의 연

관성에 대한 연구는 10장에서 시도했다.

고대 불교의 개념을 역사적 관계 또는 발생적 관계와 관련해 분명하게

분석하지 않는 한 근본 토대를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한

연구는 제11~13장에서 시도했다.

마지막 두 장에서는 초기 불교가 발달하면서 발생한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해 간단히 분석했다.

저자 고빈드 찬드라 판데는 베다와 불교의 시대 연구에 전념한 인도의

역사학자다. 자이푸르(Jaipur) 대학과 알라하바드(Allahabad) 대학에서 고대사를

연구했다. 1947년 알라하바드 대학교 강의를 시작으로 1978년부터 20년간

부총장을 지냈으며, 인도 역사와 고고학 관련의 다양한 연구소와 학회의 회

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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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사랑 실천하는 불교적 방법

붓다, 자기사랑을 말하다

안양규 / 올리브그린 / 18,000원

불교적 관점에서 자기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책이 출간됐

다. 초기불교 전공자인 저자는 책을 크게 ‘자기사랑에 대한 이론적 논의’(Ⅰ

자기사랑의 작업가설적 정의, Ⅱ 동서양의 자기사랑 논의, Ⅲ 불교의 자기사랑)와 ‘자기사랑 실천

법’(Ⅳ 자기사랑 명상 프로그램, Ⅴ 불교식 자기사랑의 실천) 등 두 부분으로 나눴다.

Ⅰ장에서는 ‘올바른 자기사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며, 자신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자기사랑

의 작업 가설적 정의를 시도했다. Ⅱ장에서는 공자 · 묵자 · 노자 · 양주 · 소크라

테스 · 아리스토텔레스 · 프롬 · 매슬로 등 동 · 서양의 사상가와 종교지도자 중

자기사랑을 역설한 인물을 소개했다.

Ⅲ장에서는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의 자기사랑 즉 자비에 대

해 정리하고,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기사랑법을 살폈다. Ⅳ장에서는 최

근 미국에서 개발된 자기사랑 프로그램(Mindful Self-Compassion, MSC)을 분석하

고 정리했으며, Ⅴ장에서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

는 자기사랑 방법을 제안했다.

저자는 자기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음식조절과 절 운동을 통

해 건강한 육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몸을 건강하게 만든

뒤에는 감각 · 감정 · 생각 등을 조절하는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의업(意業)

을 정화시키는 것과 유사하다. 또 자신을 돌보는 것에서 나아가 주위 사람

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과 함께 행복한 사회를 유지하

기 위한 방안으로 발원 · 보시 · 회향을 제시했다.

초기불교 전공자인 저자는 “붓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곧 중생

에 대한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역설했다.”며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고 사

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굳게 자리 잡으면 자기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관대해지고, 나아가 주위 사람과 세상, 미래의 삶에도 비관적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복한 뇌’ 만드는 마음수련법

명상이 뇌를 바꾼다

장현갑 / 불광출판사 / 16,000원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괴로움’을 만들어 내 지속적으로 불안 · 우울 · 걱정 상태

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뇌가 가진 결점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

결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과학자와 명상가들의 노력으로 뇌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장비가 개발

됐으며, 이 장비로 명상수행을 한 티베트 승려의 뇌를 관찰하는 연구를 진행했

다. 이를 통해 명상이 뇌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됐

고, 명상 수련을 통해 뇌를 변화시키려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다.

뇌과학을 전공한 심리학자이자 명상 수련자인 장현갑 영남대 명예교수

가 10여 년간 학술 모임, 특강, 세미나, 컨퍼런스, 방송 등에서 발표한 ‘뇌’ · ‘명

상’ 관련 자료와 강의안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저자는 책에서 인간의 뇌가 어

떻게 작용해 우울 · 걱정 · 불안 · 적대감 등의 감정을 만들어내는지, 명상이 뇌의

결점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심리학 · 신경과학 · 의학 분야 등에서 연구한 결과

를 바탕으로 살폈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왜 명상을 해야 하는지’를 확실하

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1부 괴로움의 정체 : 뇌과학의 이해 △2부 괴로움의 실제적 대

처 : 명상 수련 △3부 명상의 치유와 과학 등으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우리의 마

음은 괴롭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괴로움의 정체를 밝히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

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한 마음이 가득한 뇌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살폈다.

2부에서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한 마음을 담는 행복한 뇌를 만

들기 위한 실제적인 명상 실천법을 다뤘다. 그리고 필자가 개발하고 보급해 온

한국형 마음챙김 명상(K-MBSR)에 대한 내용도 담았다. 아울러 자애 명상 · 호흡

명상 · 만트라 명상 · 마음챙김 명상 등 여러 가지 명상법을 실천해 볼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과 명상 유도문을 함께 실었다.

3부에서는 명상을 둘러싼 신비주의적 태도를 의학적 · 뇌과학적 · 심리학

적 견해로 바꾸기 위해 명상의 임상적 치료 효과와 명상으로 달라진 뇌의 기능

과 구조를 최신 과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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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 교리와 사상 총정리

대승기신론(상 · 하 세트)

마명 스님 저 · 성본 스님 역주 해설 / 민족사 / 세트 59,000원

〈대승기신론〉은 대승 경전의 사상을 체계적 · 종합적으로 요약한 책이다. 대

승불교의 반야(般若) · 공(空) 사상과 유심(唯心)의 실천수행 등 제불(諸佛)의 다양

한 방편법문과 인연법문, 비유법문 등 법문을 종합해 논리적으로 체계 있게

정리한 대승불교의 실천수행서다.

중국 당대의 선승들은 이 〈대승기신론〉의 법문에 의거해 자유자재

로 설법과 선문답을 실행했다. 대승불법을 실천철학으로 체계 있게 정리한

〈대승기신론〉은 참선 수행자가 철저하게 공부해야 할 필수적인 지침서다.

진여법의 대의를 깨달아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여법하게 참선수행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본 스님이 역주 해설을 한 책 〈대승기신론〉의 특징은 한문 위주의

번역이나 직역 등 한자 중심, 한자 독해에 억매인 번역을 하지 않고 뜻 · 내

용 · 의미를 중심으로 번역했다는 점이다. 즉 의역(意譯)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적당한 의역이 아니고 의미가 통하는 ‘새로운 개념의 의역’이다. 또 〈대승기

신론〉에서 어떻게 각 대승경전의 사상적 · 교리적 차이를 종합적으로 정리

해 수행방법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이와 함께 텍

스트 풀이나 해설에 한정하지 않고 대승불교, 대승경전, 논서, 그리고 중국

선, 선어록 등 불교사상 전체와 관련해 폭넓게 해설했다. 마지막으로 성본

스님은 〈대승기신론〉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용어의 출전과 개념 등을 밝

혔다.

2019년 3월부터 오대산 월정사 부설 탄허강숙에서 대승기신론을 강

의하고 있는 성본 스님은 법주사에서 출가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졸업

했다. 이후 일본 애지학원대학 대학원에서 석사를 받고, 구택대학 대학원에

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교수를 퇴임한

후 한국선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중국禪宗의 성립사

연구〉 등 다수가 있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392-106 ☎ 02-918-0034

지연 스님 作

지혜의 등불 자비의 등불로 오신 부처님

우주법계에 희망의 꽃 행복의 꽃 피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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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985년 1월

휴간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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