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kpa.nanet.go.kr/resource/portal/doc/book2/book2_5.pdf · 2020. 12. 4. · 외교 · 선전...

13
Shanghai Hangzhou Zhenjiang Beijing Changsha Guangzhou Liuzhou Qi jiang Chongqing

Upload: others

Post on 11-Feb-2021

2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 358

    Shanghai

    Hangzhou

    Zhenjiang

    Beijing

    Pyongyang

    Seoul

    Changsha

    Guangzhou

    Liuzhou

    Qi jiang

    Chongqing

    Shanghai

  • 359

    Shanghai

    Hangzhou

    Zhenjiang

    Beijing

    Pyongyang

    Seoul

    Changsha

    Guangzhou

    Liuzhou

    Qi jiang

    Chongqing

    Shanghai

    해제문정병준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Ⅱ부

    1. 제2차 세계대전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과 노선

    2. 미 국무부의 한국 내정에 관한 문서철(RG 59)을 중심으로

    3. NARA의 연혁과 주요 개념

  • 360

    한국 독립운동에는 크게 두 개의 정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1919년 3·1운

    동 시기이며, 두 번째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 태평양전쟁 시기이다. 즉 제1

    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라는 세계사적 대전

    환기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국내

    외 독립운동 진영은 연합국과 일본의 전쟁으로 인해 한국 독립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한국인들이 존재하는 모든 지역에서 정치조직 · 무장조직

    을 결성하고 대일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

    군이 위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임시정부도 상해 시기와 이동 시기를

    거쳐서 중경 시기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²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경 정착과 특징

    1932년 이후 상해를 떠나 이동기를 보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

    정부’로 줄임.)는 1940년 중경에 안착했다. 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중경

    은 안정된 지역이자 반일투쟁의 정치 · 군사적 중심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중경

    시대(1940~1945)는 상해 시대(1919~1932) 초기와 함께 비교적 국민적 기반이

    두텁던 시기로 평가된다. 상해 시대 초기에는 다양한 정파 · 사상을 포용한 연립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국민적 기반을 확보했다. 중경 시대 임시정부는 1940년 광

    복군의 창설과 함께 민족적 주목을 모음으로써 국민의 기반을 회복했다. 미주 한

    인사회의 통일이 광복군 창설과 임시정부의 활성화로 이루어진 것이 이를 대변

    한다. 통일된 재미한족연합회는 임시정부의 충실한 재정적 · 교민적 후원자가 되

    었다. 이어 임시정부는 1942년 조선의용대를 통합하고 임시정부의 초기처럼 통

    1.  [편집자 주] 이하의 내용은 해제자가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실었으며, 1부에서 사용한 용어와 일부 차이가 있음을

    밝힌다.

    2.  이하의 설명은 정병준, 2010,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2장에 근거

    한 것이다. 또한 정병준, 2008, 『태평양전쟁기 이승만 중경임시정부의 관계와 연대강화』, 『한국사연구』 137집; 정

    병준, 2015,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건국구상」,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 61; 정병준, 2004, 「1940년대

    재미한인 독립운동의 노선과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집을 참조.

    1. 제2차 세계대전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과 노선1

  • 361

    합의회와 연립내각을 형성하면서 국내외 동포의 주목을 모았다.3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발생사적 가치를 가졌다고 한다면, 1940년대 중경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

    운동에서 진정한 임시정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한 시기였다.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으로 정부와 의정원을 재편한 후, 건국강령 등을 통해

    광복 후 건국을 준비하는 한편, 광복군의 확대 · 강화와 적후 공작, 중국 · 미국과

    의 군사적 연대 및 국내 침투작전 준비 등을 통해 직접적인 대일 무장투쟁에 나

    섰다.4 특히 임시정부는 역사성과 발생 가치, 해외교민들의 헌신적인 지지 등에

    기초해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 중심이자 핵심 조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랜 망명 임시정부이자, 해외 교민들의 실질적인 재정지원을 받아

    외교 · 선전 · 군사활동을 벌인 대표적인 조직이었다.5

    상해 임시정부와 중경 임시정부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다. 먼저 시공간

    적으로 1920년대에서 1940년대로, 상해에서 중경으로 이동했다. 이는 베르사이

    유 ‒ 워싱턴 체제로 대표되는 제1차 대전 이후 강화회의의 평화외교에서 만주사

    변 ·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체제로의 이동이었으며, 외교 노

    선에서 무장투쟁 노선으로의 이동이었고, 한국인들의 반일투쟁에서 한 · 중 양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반일 국제연대로의 전환이었다.

    조직적인 측면에서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초기 상해 임시정부 · 노

    령 국민의회 · 국내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해 조직되었지만 명확한 정당 지지 기

    반이 형성되지 않았던 반면, 중경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이라는 정당 지지 기반

    을 가지게 되었다. 1942년 이후에는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 · 무정부주의 정

    당 · 단체까지 망라한 다당적 지지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광복군이라는 정

    규 무장대오를 창설함으로써, 실질적인 독립전쟁의 기초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

    아가 광복군은 조선의용대를 통합함으로써 군사적 좌우합작을 실현하였다. 임

    시정부의 좌우합작 · 민족통일전선은 조직적인 측면에서 군대, 의회, 정부를 통

    해 실현되었다. 임시정부는 실질적으로 중국 관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총망라

    한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 연합정부가 되었다. 즉 당 · 정 · 군체제의 확립과 좌우합

    3.  조동걸, 1998, 「중국 관내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한국근현대사의 이해와 논리』, 지식산업사,

    106~107쪽.

    4.  정병준, 1999,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민족통일전선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5.  임시정부는 첫째, 세계 역사상 망명정부 · 임시정부로 가장 오래 존속한 조직이었고, 둘째, 과거 식민지국가로 있

    던 국가들 중 거의 유일하게 조직된 ‘임시정부’였으며, 셋째, 패망정부의 구성원이 아니면서 한국을 대표했고, 넷

    째, 이를 실질적으로 국내외 한국인들이 옹호함으로써 실질적인 ‘정부’로 기능했던 ‘공전절후’적 특성을 지녔다

    (방선주, 1999,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 『대한민국임시

    정부와 독립운동』, 37~38쪽.).

  • 362

    작 · 연합정부의 확립이 중경 임시정부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노선의 측면에서 상해 임시정부가 성립 당시 외교독립 노선을 내세운 반면

    중경 임시정부는 외교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을 병행해 추진했다. 임시정부의 승

    인을 위한 다양한 외교적 노력이 중국 · 미국 · 소련 · 프랑스 등 연합국을 대상으

    로 전개되었으며 중요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그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임시정부의 외교적 승인과 그에 따른 연합국 · 연합군 참가가 주요 외

    교적 목표로 추진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임시정부의 무장부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 활동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중국 · 미국과의 공

    동군사작전, 한반도침투작전을 계획 · 준비할 수 있었다.

    중경 임시정부의 또 다른 특징은 정부 구성에 있어 좌우합작 · 민족통일노

    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의정원, 국무위원 등 정부의 주요

    구성조직에서 좌우합작 · 민족통일전선을 실현했으며, 건국강령(1941)과 임시

    약헌(1944)으로 대표되는 삼균주의 · 삼균노선을 자신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또

    한 1944~45년간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중요 핵심과

    제 중 하나로 추진했다.

    2) 좌우합작·연합정부의 성립

    1940년 한국독립당 창당으로 우익 세력이 결집함으로써 임시정부가 강화

    되었고, 1941년 이후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중국 관내의 좌익 세력들이 대거 임시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 연합정부의 실체를 갖게 되었다. 이

    는 임시정부가 실질적으로 중국 관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총망라하는 민족통

    일전선의 실현체가 된 것을 의미했다.

    좌익 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기강7당 대표회의 5당회

    의를 거치면서 우익 진영이 3당 합당을 통해 한국독립당으로 결집한 반면, 좌익

    진영은 노선 갈등으로 상당수가 팔로군 지역으로 북상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와

    해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민족혁명당 등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거나 관여하지 않

    는다는 불관주의不關主義 노선을 고수해 왔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와 여건 등이 크

    게 달라졌다.6 먼저 중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좌우합작 · 임시정부로의 통일을 종

    용 · 권유했다. 장개석은 1938년 12월과 1939년 1월 각각 김구와 김원봉을 만나

    6.  한시준, 1995, 「1940년대 전반기의 민족통일전선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좌우합작운동』, 한울아카데미,

    145쪽. 

  • 363

    좌우 양 진영의 대동단결을 종용했고, 1941년 가을 중국 외교부장 곽태기郭泰祺

    가 김구 · 김원봉의 합작을 종용했다. 둘째, 중국 측은 중국 국민당(김구 지원)과

    중국 군사위원회 남의사(김원봉 지원)로 나뉘어 있던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대

    한 지원을 임시정부로 일원화시켰다. 셋째, 김성숙 등 민족전선 내부에서 임시정

    부로의 통일을 주장하는 단체(조선민족해방동맹)가 생겨났고, 마지막으로는 태

    평양전쟁의 발발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좌익 진영에서는 1941년 중반부터 임시정부 참여를 표명하

    기 시작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41년 5월 당중앙회의에서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한 후 한독당과 단일당으로 통합해 임시정부를 운영하자고 제의했지만, 화

    북으로 북상한 의용대를 포함한 제안이어서 거부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

    쟁이 발발하자 민족혁명당은 제6차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고 12월 10일 종래의

    임시정부 불관주의를 포기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좌익 진영의 임시정부 참여는 군대통합, 임시의정원 참여, 정부 참여의 순서로

    진행되었다.7

    3)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중경 시기 임시정부는 입법부인 임시의정원과 행정부인 국무위원회로 구

    성되었으며, 외교와 군사라는 두 가지 방면에서 한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

    했다. 임시정부가 중점을 둔 외교는 연합국으로부터 대일 교전국이자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을 받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미국과 중국, 나아가 연합국의 일원

    인 소련의 승인과 원조를 얻는 데 집중했다.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 독립이라는 의제를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 영국에 제시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상기 강대국은 한국인의 노

    예 상태에 유의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도록 하겠다.”라

    는 유명한 카이로 선언의 한국 조항을 이끌어냈다. 카이로 선언의 한국 조항이

    즉시 독립이 아니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한국은 태평양전쟁 시기 연합국이 아시

    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공약한 국가가 되었다. 한국 독립의 공약이 없었다면 한

    반도의 운명은 또 다른 격랑에 휩쓸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임시정부의 주된 외교 상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미국 정부였다. 중국 국

    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후대하고 정치 · 군사 · 경제적으로 원조하는 등 사실상

    7.  한시준, 1995, 앞의 논문, 151~161쪽.

  • 364

    승인의 입장을 취했지만, 공식 승인은 하지 않았다. 중국은 미국에 의해 연합 4개

    국의 일원으로 초대받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불승인을 이유로 한국 독립

    및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고 있었다. 때문에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한국 독립 및 임시정부 승인 외교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1) 대중국 외교

    중경에 정착한 직후인 1940년 10월 임시정부는 처음으로 중국 외교부장

    을 공식적으로 접촉해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 승인을 요청했다. 1941년 12월 일본

    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중경 청사에서 대일선

    전포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1941. 12. 10.)했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의 한국 독립 보증과 임시정부의 사실상 승인을 요구했다.

    1942년 1월 30일에도 김구는 「관어승인한국임시정부지절략關於承認韓國臨時政府之節略」이라는 임시정부 승인 관련 초안을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주가화朱家驊에게 보내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광동정부의 손

    문이 임시정부를 사실상 승인한 것처럼 임시정부를 솔선해 승인해달라는 요구

    였다. 임시정부는 1942년 3월 1일 3·1운동 23주년 기념일을 맞아 중경과 워싱턴

    에서 각각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집회를 개최했다. 중경에서 열린 기념대회는 임

    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27개 대일 교전국의 일원으로 참전을 요청했고, 워싱턴에

    서 개최된 대한인자유대회는 주미 외교위원부 · 재미한족연합회 · 한미협회의 명

    의로 임시정부 봉대와 임시정부 승인을 미국에 요청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중국 정부의 대한 정책 및 대임시정부 정책

    이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계기는 1942년 3월 22일 손문의 아들이자 입

    법원 원장인 손과孫科, Sun Fu가 중경 동방문화협회 · 국민외교협회 연설에서 임

    시정부 승인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부터였다. 손과는 4월 중국의 최고 국방

    위원회에서도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주장했고, 감찰원 원장 우우임于右任, Yu

    Yu - jen과 국민당 원로 장계張繼, Chang Chi가 이를 지지했다. 격론 끝에 결론을 못

    내리고 최종 결정은 장개석 총통에게 일임되었다.8 이미 1941년 11월 중국 참정

    회는 임시정부승인안을 통과시켰고, 입법원장 손과는 1943년 3월 중국 정부에

    대해 문서로써 임시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9 중국 외교부는 임시

    정부의 즉각 승인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미국 · 영국은 이에 반대했

    8.  Gauss to Secretary of State (1942. 3. 28.) RG 59, State Department Decimal File, 895.01/97; 구대열, 1995, 『한국국제관

    계사연구2』, 역사비평사, 41쪽.

    9.  이연복, 1999, 『대한민국임시정부30년사』, 국학자료원, 168~169쪽.

  • 365

    고, 미 국무부는 중국 정부를 우회적으로 압박해 사실상 승인을 유보하는 방향으

    로 유도했다.10 중국의 임시정부 승인 의도 중 하나는 소련이 지원하는 다른 한인

    단체의 대두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42년 4월 미국을 방문한 국민정부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 T. V. Soong은

    한국 문제에 관해 유명한 송자문 비망록Soong Memorandum을 루즈벨트 대통령

    에게 제출했는데, 그 핵심은 한인을 무장시켜 적후공작을 하며, 전후 한국에 대

    한 독립 보장을 약속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송자문은 5만 명의 게릴라 부대를 조

    직하자고 제의했다.11 이에 대해 국무부는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하며 한국 독

    립을 지금 약속하는 것도 국제관계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12 미국

    의 지지하에 주요 연합국의 일원이 된 중국은 1942년 초에 명백해진 미국 대한

    정책의 핵심인 임시정부 불승인 및 전후 신탁통치 실시를 이해하고 있었다.

    1942년 7월 20일 중국 국민당은 군무부장 겸 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하응흠何應欽, 중앙조직부장 주가화, 중앙비서처 비서장 오철성吳鐵城, 진립부陳立夫 등 7

    인으로 한국문제 전문 소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8월 1일 제1차 회의를 개최

    하고 군사위원회가 작성한 「대한국재화혁명역량부조운용지도방안對韓國在華革命力量扶助運用指導方案」을 검토했다. 결론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만 적당한 시기를 택해서 결정하며,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중국과 교

    섭 · 연락하는 한 개 단체만 인정하기로 했다. 이에 근거해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

    하는 근거가 된 「부조조선복국운동지도방안扶助朝鮮復國運動指導方案」을 확정하여 실시(1942. 12. 27.)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장개석은 이 지도방안에 따라 하응

    흠 · 주가화 · 오철성 3인을 한국문제 주관인으로 임명했다.13

    그러나 중국 정부는 끝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 · 영국의 부

    정적 태도, 소련과의 분쟁 가능성 등 국제적 요인과 한국 임시정부의 대표성, 미

    국 ·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과 파벌성 등 내부적 요인이 작용했지

    만, 한편으로 전후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 영향력 속에 묶어두려는 중국의 의도

    때문이기도 했다.14 또한 중국 정부는 한국 정보가 필요한 미국 · 영국 양국에 자

    신들의 입장과 해석을 담은 정보들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분열 · 한

    국의 독립능력 결여 등을 강조하기도 했다.15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의 완벽한 통

    제 속에 묶어둔 한국광복군 행동준승行動準繩 9개 조항(1941. 11. 15.)이 가장 대표

    10.  구대열, 1995, 앞의 책, 42~44쪽.

    11.  “T. V. Soong to Roosevelt,”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FRUS), 1942, vol. 1, pp. 868~869.

    12.  “Roosevelt to Welles” (1942. 4. 8.); “Welles to Roosevelt”(1942. 4. 13.), FRUS, 1942, vol. 1, pp. 867, 870~872.

    13.  胡春惠, 辛勝夏 역, 1987, 『중국안의 한국독립운동』, 단국대학교 출판부, 94~103쪽.

    14.  1942년 2월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과 중경 주재 미국 대사 가우스의 대담(구대열, 1995, 위의 책, 101쪽.)

    15.  구대열, 1995, 위의 책, 113~114쪽.

  • 366

    적인 사례였다. 광복군 주요 참모직의 중국군 임명, 임시정부의 지도노선으로 중

    국 삼민주의의 강요, 광복군 총사령 · 부사령의 활동 제약, 외국 대사관과의 접촉

    금지, 한국문제 주관인 3인의 대립 구도 등이 이어졌다.

    장개석은 1943년 7월 26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회견하고 한

    반도에 대한 국제신탁통치 계획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견을 접수했다. 그런데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 · 영 · 중 3국의 합의로 한국을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독립시킨다는 결정이 내려짐으로써 사실상 한국문제에 대한 3국의 논

    의는 종결되었다. 루즈벨트는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적절한 시기’를, 장개석은

    ‘자유 · 독립’을 강조해 타협을 이룬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루즈벨트가 제안한 한

    반도에 대한 다국적 국제신탁통치계획에 대해 중국 정부가 동의한 것이다. 카이

    로 선언으로 한반도에 대한 연합국의 전후 정책이 다자간 국제신탁통치로 정리

    된 후 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1944년 4월 13일 한국문제 처리

    원칙을 수립해 미국과 수시로 합의한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이 미국 · 영국 · 소련 등 강대국과의 관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후 계획과 대한 정책,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 미국 내 독립운

    동 진영의 내부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중국 정부를 통한 임시정부의 외교적

    승인 노력은 지속되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초 유엔 성립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 정부의 지지를 획득하고 조소앙 등을 대표로 파견하기로 했으나 미국의 거

    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는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가 조직

    (1942. 10. 11.)되었다. 중국 측에서는 손과 · 오철성 · 주가화 · 반공전潘公展과 한국

    측에서는 박찬익 · 김규식 · 신익희 · 김규광 · 김약산 · 엄항섭 · 유자명 등이 이사진

    으로 참가했다. 중한문화협회는 한국 측이 중국 정부와 각계의 지지를 획득하는

    통로가 되었고, 중국 측에서는 외교승인 대신 물질적 · 정신적 지원을 하는 기구였

    다.16

    (2) 대미국 외교

    1940년 중경 정착 이후 임시정부의 외교적 초점은 미국이었다. 이미 1941

    년 6월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헐Cordell Hull 국

    무장관에게 임시정부의 승인, 군사 · 경제적 원조, 국제회의에 한국대표 참가 허

    락 등을 요청했다. 임시정부는 조직적으로도 대미 외교를 중시했다. 외무부 산하

    16.  호춘혜, 2005, 「중한문화협회의 창립과 한국의 항일독립운동」,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옛청사관리처 보경문총

    편집위원회, 김승일 옮김,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시대의창; 황묘희, 2002,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사』, 경인문화사, 182~196쪽.

  • 367

    주미 외교위원부는 1941년 5월 재미한족연합회의 제안으로 구성되었고, 임시정

    부의 추인을 받아 1941년 6월 4일 자로 발족했다.17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

    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주미 외교위원부 위원장 이

    승만에게 대미교섭을 지령했다.

    이승만은 12월 9일 국무부에 임시정부의 신임장을 제출하며 본격적으로

    임시정부 승인 운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백악관 · 국무부 등에 직접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하는 한편, 한미협회 · 기독교친한회 등 주미 외교위원부의

    외곽 단체를 통해 국무부에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또한 미국 여론을 동원

    하기 위해 자유한인대회 등 대중집회를 연달아 개최하며 이들 외곽 단체들과 함

    께 미 의회에 임시정부 승인 결의안 · 청원을 제출케 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

    지 이승만은 30여 차례에 걸쳐서 국무부 · 전쟁부 · 백악관 등에 임시정부의 승인

    과 무기대여를 요청했다. 이승만의 외교에 대해 비판적 견해가 있지만, 태평양전

    쟁기 미국을 상대로 펼친 이승만의 다양한 외교 노력은 중국 · 러시아 등 다른 지

    역 · 국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활발한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1942년에 들어서

    면 미국 외교문서FRUS에 한국Korea이라는 항목이 일본Japan에서 분리되어 다뤄

    질 정도의 강도와 분량으로 한국의 외교 노력이 미 국무부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한편, 임시정부는 독자적인 방법으로도 대미 외교를 펼쳤다. 중국 국민당

    정부, 중국 국민당 관리 및 우호적 중국인, 중경 주재 미국 대사관 등을 주요 통로

    로 활용했다.

    그런데 1942년 초반에 미 국무부는 대한 정책과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방

    침을 정했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하지 않으며 한국에 대

    해서는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둘째, 임시정부 승인은 현실성을 결여한 정책이지

    만, 비정규 한국군(게릴라 부대) 창설 계획은 전쟁 수행상 유익하다는 것이다.18

    이러한 방침은 임시정부 불승인과 전후 신탁통치 실시라는 전후 대한 정책의 핵

    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미국의 임시정부 불승인은 망명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

    는 미국 정부의 일반적 방침 위에 임시정부의 대표성 부족, 미국 · 중국 내 한인독

    립운동 단체의 분열과 통일 결여, 한국의 독립 자격에 대한 회의, 임시정부의 민

    족주의적 성향 및 중국의 영향력 우려 등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였다. 가장 대표

    적인 것이 미 국무부의 랭던William Russel Langdon이 작성한 비망록(1942. 2. 20.)

    이었는데, 랭던은 한국인의 정치적 낙후와 경제적 후진으로 최소한 25년 이상 강

    대국의 보호 · 지도 · 원조가 필요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성급한 승인을 피해야한

    17.  국회도서관, 1974,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267쪽.

    18.  James Irving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pp.12~17.

  • 368

    다고 주장한 바 있다.19

    이후 1943년 워싱턴 회담(1943. 3. 24.)에서 루즈벨트는 영국 외상 이든

    Anthony Eden에게 전후 신탁통치가 필요한 곳으로 한국과 인도차이나를 언급했

    고, 영국 · 프랑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부 정책 입안자들은 신탁통치 구

    상을 구체화했다. 그 결과 카이로 회담에서 미 · 영 · 중 3국이 한국을 ‘적절한 시기’

    에 독립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1942년 말부터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는 이러한 연합국의 구상을 국제공

    관론國際共管論 · 국제공영론國際共營論으로 지칭하며 격렬하게 반대했다.20 임시정

    부는 연합국의 전후 한반도 문제 처리방식이 ‘위임통치’ 혹은 국제적 공동관리國

    際共管임을 인식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이 임시정부의 승

    인임을 자각했다. 이미 1943년 2월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중경판 『대공보 大公報』(1943. 2. 1.)에 국제공관 반대성명을 발표해 강력하게 한국에 대한 국제적

    신탁통치계획을 반대하기 시작했다.21 임시정부도 국무위원회의 결의(1943. 4.

    29.)를 통해, 한국독립당 ·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무정부주의

    자총연맹 등 중경 내 한국 독립운동 정당 · 단체들도 ‘국제간선과 공동관리’에 반

    대한다는 성명을 채택(1943. 5. 10.)했다.

    1943년 이후 미국은 한국이 소련의 손에 들어갈까 염려했고, 1944년 초 이

    후로 한반도에 대한 부분점령 · 완전점령 계획을 수립했다. 1944년에 이르러 미

    국무부 · 군부는 한반도의 ‘선 점령 · 후 신탁방안’이라는 합의에 도달했다.22 1945

    년 포츠담 회의를 위해 준비된 계획서에 따르면 미국의 대한 정책은 ① 군사정부의 설치(점령 후), ② 신탁통치, ③ 미국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곧 탄생할 UN의 이용이라는 세 가지 방안으로 확정되었다.

    임시정부는 대미 외교의 통로를 이승만의 주미 외교위원부로 단일화했지

    만, 1943년 이래 대미 외교에서 재미한인사회 내부에서 갈등과 마찰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1944년 8월 3일 임시정부는 기존의 주미 외교위원부를 폐지하고 이승

    만을 위원장으로 하는 주미외교위원회를 신설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미 미

    국의 대한 정책은 임시정부 불승인으로 귀결되었고, 주미외교위원회는 재미한

    인사회 내부의 갈등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임시정부는 최후까지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 받기 위해 노력했다. 1945

    19.  Memorandum by William R. Langdon, “Some Aspects of the Question of Korean Independence”(February 20, 1942),

    895.01/79.

    20.  노경채, 1996, 『한국독립당 연구』, 신서원, 151~156쪽.

    21.  추헌수 편, 1971, 『자료한국독립운동』, 1권 연세대학교, 413~414쪽.

    22.  “Korea : Occupation and Military Government : Composition of Forces,” March 29, 1944. FRUS, 1944, Volume 5, pp.

    224~228.

  • 369

    년 2월 28일 국무회의는 대독일 선전포고를 결정했고, 3월 5일에는 유엔 설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담에 조소앙 외무부장 등 4명을 직접 파견할 것을 결정했

    다. 중국 정부 역시 이들에 대한 예산지원과 편의를 제공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조소앙의 도미는 실패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을 단장으

    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샌프란시스코 회담 참가는 주미외교위원회 시대의

    가장 큰 대외활동이었다. 참가를 둘러싼 재미한인 단체와의 갈등이 적지 않았으

    며, 이 회의 참가의 주요 목적은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연합국 외교가 초점이었

    지만, 이승만은 얄타 밀약설을 내세워 반소 · 반공 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나아가

    중국, 미 국무부 관리를 공산주의자로 비판했다.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국 내에서는 주중 미군

    및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첩보국 중국지부와의 군사적 협력이 제고되

    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예측처럼 만약 OSS 독수리작전이 실행에 옮겨져 광복군

    의 국내 진공이 실현되었다면, 그 결과는 임시정부 및 한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컸다. 군사적 성공은 외교적 승인 내지 사실상의 승인으로 이어

    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4) 임시정부의 군사활동

    임시정부는 군사적으로도 미국의 무기대여법Land - Lease 등 연합국의 원

    조와 협력을 얻어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가하려고 노력했다. 외교적

    승인과 군사적 후원이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인도차이나 · 버마지구의 영국군에 광복군을 파견하거나, 광복군 제2지대

    등이 중국 서안西安 등지에서 미국 전략첩보국과 함께 한반도 침투비밀 작전인

    이글프로젝트Eagle Project 등을 추진한 것이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임시정

    부 주석 김구는 1945년 8월 초 중국 서안에서 전략첩보국의 국장 도노반William

    J. Donovan을 만나 한미연합훈련을 참관하고 한국에 침투할 이글프로젝트 팀을

    격려한 바 있다.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연합국의 외교적 승인을 얻은 후,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가해 자력으로 해방에 동참하려 했다. 일본과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이러한 결심의 대외적 표현이었다. 연합국의 외교적 승인이 지체되

    었고, 행동준승 9개조로 대표되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광복군에 대한 통제도 광

    복군의 본격적인 대일 군사작전에 장애가 되었다.

  • 370

    그러던 중 1944년 8월 중국군 참모총장 하응흠의 9개 준승 취소 통보로 새

    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광복군이 임시정부의 정부군으로서 자주권과 통수권

    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대연합국 외교와

    함께 군사적 합작을 추진했다. 1944~45년간 광복군 제2지대를 중심으로 미국의

    특수공작 기관인 전략첩보국과의 한반도 침투를 위한 합동작전이 그 구체적인

    성과였다.23

    5) 임시정부의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락·연대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산재한 독립운동 세력을 연합 · 연대해서 독립운동

    전선을 단일화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이

    목전에 도래한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연안의 독립동맹, 만주의 빨치산, 국내의 건

    국동맹 등과 연락 · 연대하려 시도했다. 일제와 투쟁하고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독립운동 세력이 한 자리에 모여 독립운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

    으로 연대 · 연합함으로써 반일민족통일 전선을 결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세계사

    적으로 일본 · 독일 · 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추축국과 맞서 싸우는 미국 · 영국 · 중

    국 · 소련의 국제적 연대가 이뤄졌으며, 중국에서도 국공합작이 진행되는 상황이

    었으므로,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조직 내부의 좌우합작, 조직과 조직 간의

    좌우합작 · 민족통일 전선 결성 시도가 연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임시의정원 관련 문서는 국회기록보존소가 미 국립기록

    관리청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이하 NARA에서 발

    굴한 것으로, 태평양전쟁 시기(1940~1945)를 중심으로 전개된 임시의정원 · 임

    시정부의 활동을 기록한 것들이다.

    23.  한시준, 1993,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272~301쪽; 김광재, 1999, 「한국광복군의 활동 연구 : 미전략첩보국

    (OSS)과의 합작훈련을 중심으로」, 동국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정병준, 2006, 「해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

    집 12 : 한국광복군III』,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