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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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은이:시오노 나나미 역자:김석희 출판사:한길사 봉사자:김희경 제1장 로마의 탄생 유민의 전설 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망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적인 해명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을 납득시킬 있을 정도의 논리성과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으면 된다. 로마인에 게 그것은 트로이 함락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 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 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변에 서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남긴 선물로 오해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켜온 트로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 다고 생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깊이 잠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 사람 씩 땅으로 내려왔다. 화염과 아비규환에 휩싸인 트로이는 그날 밤에 함락되고 말았다. 왕족 도 서민도 가차없이 살해되고, 목숨을 건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이같은 참극 속에서 트로이 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이아 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데, 아프로디테는 자 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스아스 일행은 몇 척 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탈출했다. 이들의 편력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끝나지 않고, 신들이 이끄는 대로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 근처의 해안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난다. 그 땅의 왕이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하여 딸을 아내로 주었 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나 떠돌던 유민들은 드디어 정착할 땅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아 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스카니오스는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고 이름지은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이때부터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많은 건설적인 왕들이 잇따라 등장하지만, 그 사연을 일일이 기술 하는 곳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낯선 이름을 나열하여 독자를 따분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가 아니라, 로마인이 억지로 꾸며낸 대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 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기 시 작한 뒤, 로마인은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400여 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에 쫓겼지만, 그래도 별로 난감해하지는 않았 던 것 같다. 전승과 전설의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것보다 오히려 황당무계한 것이 더 그럴듯 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전설은 그 공백기를 적당히 소화한 다음, 한 왕녀의 등장을 맞이 했다.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 채 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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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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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지은이:시오노 나나미역자:김석희출판사:한길사봉사자:김희경 제1장 로마의 탄생유민의 전설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망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적인 해명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논리성과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으면 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트로이 함락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변에 서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남긴 선물로 오해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켜온 트로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깊이 잠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 사람씩 땅으로 내려왔다. 화염과 아비규환에 휩싸인 트로이는 그날 밤에 함락되고 말았다. 왕족도 서민도 가차없이 살해되고, 목숨을 건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이같은 참극 속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이아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데,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스아스 일행은 몇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탈출했다. 이들의 편력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끝나지 않고, 신들이 이끄는 대로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 근처의 해안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난다. 그 땅의 왕이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하여 딸을 아내로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나 떠돌던 유민들은 드디어 정착할 땅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스카니오스는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고 이름지은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이때부터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많은 건설적인 왕들이 잇따라 등장하지만, 그 사연을 일일이 기술하는 곳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낯선 이름을 나열하여 독자를 따분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인이 억지로 꾸며낸 대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기 시작한 뒤, 로마인은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400여 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에 쫓겼지만, 그래도 별로 난감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승과 전설의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것보다 오히려 황당무계한 것이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전설은 그 공백기를 적당히 소화한 다음, 한 왕녀의 등장을 맞이했다.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 채 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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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무녀로 만들어 버렸다. 왕녀가 아들을 낳으면,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난처한 입장에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을 섬기는 틈에 잠깐 강가에서 잠이 든 왕녀한테 군신 마르스가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마르스는 하늘에서 내려와 왕녀와 사랑을 나눈다. 왕녀가 잠에서 깨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니까, 이런 것을 두고 신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왕녀는 그 쌍둥이에게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숙부는 격분했다. 왕녀는 감옥에 갇히고, 쌍둥이는 바구니에 담긴 채 테베레 강에 띄어졌다. 갓난아기가 든 바구니는 테베레 강 어귀까지 떠내려가, 강가의 갈대숲에 걸려 멈추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늑대가 안에서 나는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두 아기에게 젖을 물려 굶주림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이 어미 늑대였다. 물론 그 후에도 줄곧 젖을 먹고 자랐다면 곤란하게 되었겠지만, 늑대 다음에는 양치기가 쌍둥이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가서 길렀다. 지금도 로마 시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양떼를 자주 볼 수 있지만, 2천 800년 전에는 양떼가 그 지역의 주인공이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성장하여 그 일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과의 투쟁을 거듭하면서 차츰 세력권을 넓혀간 것이다. 세력권이 넓어지면 새로운 정보도 들어오게 마련, 이리하여 형제는 자신들의 출생에 얽힌 비밀도 알게 되었다. 형제는 부하들을 이끌고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싸움에 이겨서 왕을 죽였다. 어머니는 이미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형제는 알바롱가에 머물지 않았다. 산지에 있는 알바롱가는 비좁고,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발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두 사람이 자란 곳은 테베레 강 하류였다. 곧 로마라고 불리게 된 그 땅에 두 사람은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알바롱가의 왕을 처단한 뒤에는, 그때까지의 부하들 외에 부근의 양치기와 농민들까지 이들 형제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 형제 사이가 나빠졌다. 쌍둥이였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고, 이런 난점이 둘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었다.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각각 세력기반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싸움은 곧 재발한다. 세력권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로물루스가 판 도랑을 레무스가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의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였고, 로마인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다. 건설자 오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때는 기원전 753년 4월,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도 어느덧 6회를 지나,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벗어난 역사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는 북국과 남국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북국의 이점과 남국의 이점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이점은 상호작용으로 증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한복판에 자리잡은 로마의 지리적 이점은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신기와도 같은 인간의 지혜가 이렇게 유리한 지세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은 이 땅에 로마인의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지 800년 뒤인 제정로마 초기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도시계획 전문가의 눈으로 위와 같이 말했다. 듣고 보니, 과연 로마의 입지조건은 매우 훌륭하다. 국가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수도 건설지로서 이탈리아에서는 로마를 따라갈 곳이 없다. 로물루스는 장군의 재능만이 아니라 도시 설계자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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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솟아난다. 로마가 도시 건설지로서 이만큼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왜 로물루스 이전에는 이곳에 도시를 세운 사람이 없었을까.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잡한 무덤과 주거지가 발견되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시라고 부를 만한 흔적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땅에 주목한 최초의 사람은 역시 로물루스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물루스가 전설상의 인물이고 실존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면,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살았던 아무개라고 해도 좋다.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입지조건만 좋으면 당당한 도시도 쉽게 건설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을 갖춘 민족이 적어도 주 개는 존재했다. 중부 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이 그렇다. 그런데 이 두 민족은 로마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일곱 언덕을 제외한 저지대는 모두 습지대였지만, 에트루리아인은 간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상상하건대, 기원전 8세기 중엽뿐 아니라 그후에도 꽤 오랫동안 로마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에게는 별로 매력이 없는 땅이었던 것 같다. 그리스인은 통상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해양민족이었다. 바다에 면한 항구를 도시의 필수요건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들에게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닿을 수 있는 로마는 도시 건설지로는 부적격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스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대표적인 식민도시는 시라쿠사이(오늘날의 시라쿠사)와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 및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인데, 이 도시들은 모두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에트루리아인도 산업과 통상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지만, 도시 건설에 관해서는 그리스인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높직한 언덕에 도시를 건설한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도 배후에 언덕이 없는 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언덕 위에 성벽을 두른 경고한 도시를 세워 거기에 틀어박히고 평지에는 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성향은 피렌체만 보아도 분명하다. 피렌체는 에트루이아인에게 기원을 둔 도시지만, 그들이 거주한 곳은 피에솔레 언덕이다. 아르노 강 연변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피렌체 시가지는 로마인의 건설할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이 보기에, 로마의 일곱 언덕은 한결같이 너무 작고 너무 낮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나쁜 점은 일곱 언덕이 서로 너무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꼭대기가 널찍한 언덕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재해 있는 중부 이탈리아 지방에 뿌리를 내린다. 오늘날에도 중간 정도의 도시로 건재해 있는 시에나, 볼테라, 페루자, 키우시, 오르비에토는 모두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에 기원을 둔 도시들이다. 그래서 열차역에 내려도 금방 시내로, 적어도 구시가지로 나갈 수는 없다. 버스를 타고 능선을 따라 언덕마루까지 올라가야만 겨우 시가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이 도시들이다. 이런 도시를 여행하면서, 나는 어째서 일부러 이런 곳에다 도시를 세웠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도시를 건설하는 조건도 물이나 기후 같은 자연조건 외에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건설에 나타난 사고장식의 차이가 이 세 민족의 이후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방어에는 완벽하지만, 발전을 저해받기 쉬운 언덕을 좋아한 에트루리아인. 방어가 불완전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밖을 향해 발전하게 된 로마인. 통상에는 편리하지만, 자칫하면 적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공과대학의 도시공학과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우선 철학이나 역사 같은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 도시를 어디에 세우느냐에 따라 주민의 장래가 결정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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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인 에트루리아인의 문자는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에트루리아인을 수수께끼의 민족이라고 불렀다. 에트루리아라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을 에트루스크라고 부르지만, 이것도 고유한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대에도 오늘날의 토스카나 움브리아 및 라치오 북부를 합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통틀어 에트루스크, 즉 에트루리아인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미국에 사는 사람을 모두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에트루리아인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소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고, 내륙지방에서 남하해 왔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기원전 9세기에는 이미 철기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에는 광산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 지방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은 이 천연의 혜택을 활용한다. 그들은 당장 우수한 기술자가 되었다. 기술력의 향상은 경제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역시 경제력이 강한 그리스인과의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졌다. 에트루리아의 유물 중에는 그리스제 항아리가 놀랄 만큼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남부 이탈리아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 본토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다. 언덕 위에 살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항구를 가지고 있었던 에트루리아인은 산업 외에 해상무역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풍부한 광산이 있는 엘바 섬은 물론, 코르시카 섬과 사으데냐 섬에도 발길을 뻗쳤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일대의 바다를 테레니아 해라고 부르는데, 티레니아 해는 '에트루리아인의 바다'라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 그들의 세력권은 북쪽의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과 남쪽의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 강 사이의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 지역에 지금도 남아 있는 도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두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도시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고대의 에트루리아는 12개 도시국가의 연방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2개 도시 국가 가운데 알려져 있는 것은 아레초, 볼테라, 키우시,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타르퀴니아, 체르베테리, 베이, 페루자 등 9개다. 이들 가운데 7개 도시가 지금도 건재하다. 에트루리아는 연방제였지만, 각 도시국가는 독립적인 경향이 강해서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 정도였고, 정치나 경제나 군사에서는 일치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2개 도시국가 가운데 어느 도시도 다른 도시들을 제압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고, 그 때문에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도시도 없었다. 이것이 나중에는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에트루리아인은 사람이 죽으면 땅 속에 매장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도 복잡하다. 땅 위에 있는 주택을 축소하여 그대로 땅 속에 세운 듯한 느낌이다. 유력자의 무덤은 벽화의 색채도 화려하고 부장품도 호화롭기 짝이 없다. 이런 것을 보면, 에트루리아인은 싸움을 좋아하지 않고 평화를 사랑하며 기술과 통상만으로 번영을 이룩한 평화적인 민족이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그들의 조각품이 보여주는 온화한 모습은 그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 뒤의 삶이라는 꿈에 바쳐진 장식이다. 실제의 에트루리아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특별히 평화적이지도 않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에트루리아인은 티레니아 해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 및 그리스와 격전을 벌린 일도 있다.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도 있었다. 고대 로마인은 사람과 맹수가 싸우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지만, 이 구경거리도 원래는 에트루리아인이 즐긴 경기였다. 또한 무덤 벽화에 그려진 향락적인 생활상을 보고, 그들이 쾌락에 탐닉하고 노동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을 거라고 상상하면 잘못이다. 그들은 기술력을 자랑할 정도로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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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했고, 그런 면에서의 진취적인 기질은 단연 뛰어났다. 이런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인에게 미친 영향은 많은 점에서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로마 따위는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막강했다. 전성기에는 남부 이탈리아에까지 세력을 떨쳤다. 이 시대에 포 강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남쪽의 그리스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로마는 이 양대 세력권 사이의 골짜기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는 귀족이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던 왕정 시대에 비해 공업과 상업 및 해운업에까지 손을 뻗친 덕분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에 따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귀족정치의 숙명인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람과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도 계속 증가했다. 경작지가 별로 없는 그리스에서 이런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는 것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었다. 기원전 8세기는 그리스인의 식민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그들의 특징인 진취적 정신과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스인의 식민지 건설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골고루 미쳤다. 동쪽으로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렀다. 에스파냐의 말라가와 프랑스의 마르세유도 이 시기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도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가깝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식민도시 건설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왕성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기원은 몇몇 카르타고계 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그리스계가 차지하고 있다. 나폴리, 타란토,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페스툼과 쿠마이,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 시라쿠사, 아그리젠토 등등. 이런 도시들을 통틀어 '대 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렀다. '대 그리스'라고 부른 이유는 이런 도시들이 급속히 발전하여 단기간에 풍요로운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미 높은 문명을 가진 그리스인이 정착했으니까, 모든 면에서 시행착오가 없다. 또한 원주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원주민과의 관계로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조국을 버리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실패하면 돌아갈 곳도 없다. 급속한 번영의 요인은 지나칠 만큼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식민도시와 모국의 관계도 독립심이 왕성한 그리스인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타란토 사람들에게 스파르타는 타국이었고, 시라쿠사 사람들에게 코린트는 타국이었다. 그래도 교류는 활발했다. 그리스인은 육지를 가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배에 돛을 다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오 이주한 그리스인은 또 한 가지 점에서도 역시 그리스인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결심과는 인연이 멀었다. '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도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싸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갓 태어난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라는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로마의 독립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자기네 세력권 안에 넣고 싶어할 만한 매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은 물건을 사주지도 않고 팔 물건을 만들지도 못하는 사람한테는 처음부터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농업과 목축밖에 모르는 로마인은 아테네의 장인이 만든 아름다운 항아리를 살 돈도 없었고, 에트루리아에서 만든 정교한 금속기구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요컨대 로마인은 상인에게 무시당할 수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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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바다와 가깝지도 않고 방어에도 적합하지 않은 로마는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이 뿌리를 내리고 싶어할 매력도 없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에트루리아인은 해로를 택하지 않으면 육로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 근처에 와도 테베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을 지나 강을 건너서 그리스인이 있는 남쪽으로 갈 뿐이었다. 말하자면 로마는 강을 건너기 쉬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통과점에 불과했다. 통과점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보내주기만 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로마는 유년기에 강대한 적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바다를 겁내지 않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을 이어 주는 간선통상로는 그 당시에는 역시 바다였다. 건국의 왕 로물루스 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은 모두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다. 테베레 강은 로마를 지나 30킬로미터쯤 흘러서, 오스티아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비롯하여 3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흘러온 이 강은 대하라고 부를 수 있는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 근처에 이를 무렵에는 수량이 크게 늘어난다. 수량이 풍부한 테베레 강은 로마 근처에 이르면 크게 서쪽으로 우회한 다음 동쪽으로 우회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우회하면서 로마에서 멀어진다. 이렇게 우회하던 물줄기도 홍수가 일어나면 당장 굵은 직선의 흐름으로 바뀌어, 곧장 지중해로 흘러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곱 언덕은 강 근처에 있으면서도 홍수 피해를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강이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지점 언저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저지대에도 사람이 살 만큼 인구가 늘어났을 무렵에는 로마의 국가체제도 확고해져 대규모 치수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홍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졌다.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퀴리날리스(이탈리어로는 퀴리날레), 비미날리스(비미날레), 에스퀼리누스(에스퀼리노), 카피톨리누스(카피톨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일리우스(첼리오), 아벤티누스(아벤티노)로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아직 습지였다. 일곱 언덕은 모두 낮아서, 가장 높은 카피톨리노 언덕조차도 해발 50미터밖에 안된다.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세운 언덕은 모두 해발 300미터 내지 500미터 정도였다. 덧붙여 말하면, 현대 이탈리아의 대통령 관저는 퀴리날레 언덕에 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내무부는 비미날레 언덕 위에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도 대통령 관저에서 중계한다고 말하는 대신 퀴리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하고, 선거 속보를 알릴 때에도 내무부라고 말하지 않고 비미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한다. 다시 2천 8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 건설의 조건 가운데 방어를 가장 중시한다면, 일곱 언덕 중에서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어느 언덕보다도 테베레 강과 가까울 뿐 아니라, 삼면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대기의 평지가 너무 좁았다. 오늘날에도 로마 시청과 미술관 두 개와 교회가 들어서 있을 뿐인데도 더 이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별로 높지는 않지만 언덕 위의 면적이 10헥타르나 되고 테베레 강과도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을 선택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신들의 거처로 예정되었다. 역시 테베레 강과 가깝고 사람이 거주할 면적도 충분한 아벤티누스 언덕은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로물루스와 싸우다 죽은 레무스가 택한 것이 바로 이 아벤티누스 언덕이었다. 레무스가 죽고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우선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날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고 한다. 이 로마 건국기념일은 그후 2천 년이 넘은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해마다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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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되는 명절이 되었다, 그 해에 로물루스의 나이는 열여덟, 이 약관의 젊은이와 그를 따라온 3천 명의 라틴족에 의해 로마는 건국되었다.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왕이 되지는 않았다.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어준 것이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되었다.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양치기와 농민의 우두머리였던 로물루스 자신이 제멋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뽑혀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민회에서 왕을 선출한다는 왕정답지 않은 이 제도도 당시 로마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물루스는 100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각 가문의 어른을 모으면 그 정도 숫자가 되었던 게 아닐까.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민회의 선거를 거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원로원이라는 공적 기관에 속해 있었다. 유력자들의 조언을 수렴하는 것이 목적인 기관이지만, 정치체제 확립을 중시한다면 공적인 지위를 주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적 기관은 역할도 책임도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조언을 받는 쪽-이 경우에는 왕 개인-의 기분에 좌우되기 쉽게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라고 불렸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귀족을 뜻하는 '피트리키'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이다. 다만, 민회는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갖지 못했고,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의 승인이 필요했고, 외국과 강화를 맺을 때도 그들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휘되었다. 로마라는 국가의 기본 형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로마 실정에 적합하고 장래에도 적응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고 무리가 적은 정치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왕이 되기 전의 로물루스가 이끌었던 양치기와 농민들이 라틴이라는 이름의 민족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라틴족은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 가운데 한 부족이 가족과 함께 테베레 강가로 이주해 와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탄생한 직후, 로마 시민의 대부분은 독신 남자였던 것 같다. 정치체제를 확립한 뒤, 로물루스가 수행한 두 번째 사업은 바로 이민족 여인들을 강탈하는 일이었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폭력까지 동원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여자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들의 집단이었다면, 그들의 정체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각자의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아니었을까. 부족단위의 이주라면, 처자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위대한 로마의 건국담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허술하고, 무엇보다도 자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트로이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편력담이 고안되고, 그것과 로물루스가 결부된 게 아닐까. 신화와 전설의 가치는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믿어왔는가에 있다. 로마인은 줄곧 자기네가 트로이 영웅의 후예라고 믿었고, 그리스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행한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은 푸생이나 루벤스 같은 후세 화가들한테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게 되는데,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다. 신에게 바쳐진 축제일에는 전투가 금지된다. 사비니족도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여 온 가족이 로마까지 찾아왔다. 축제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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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되었을 무렵, 로물루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젊은이들은 사비니족 아가씨들에게 덤벼들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사비니족 남정네들은 아내와 자식과 노인들을 보호하면서 자기네 부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비니족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로마인에게 강탈당한 여인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로물루스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대답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솔선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로물루스 자신도 총각이었을 것이다. 사비니족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로마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통틀어 네 번 전투를 벌였다. 그 대부분은 로마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지만, 한 번은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서 전투를 치렀다니까 사비니족이 로마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네 번째 전투가 한창일 때, 강탈당한 사비니족 여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저마다 남편과 오라비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여인들은 비록 강탈당한 몸이긴 하지만 노예가 된 것은 아니고,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인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로물루스 왕도 사비니족의 타티우스 왕도 그녀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로물루스가 후세의 로마인에게 남긴 관례는 남편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것만은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서로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이 아니라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치는 형태의 화평을 제안했다.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을 사비니족의 주거지로 제공했다. 사비니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마인이 네 번의 전투를 모두 이겼기 때문에, 사비니족으로서도 강자인 로마와 합칠 경우의 이익을 계산했을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 합병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에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된 셈이다. 또한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사유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와 함께 민회에서의 투표권도 갖게 된 것이다. 사비니족 장로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로물루스로서는 인구 증가와 병력 증강을 위한 방책이었겠지만, 이 방식은 당시 로마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건국자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로물루스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곧 전사했기 때문에, 전투는 거의 대부분 로물루스가 지휘했다. 37년에 걸친 로물루스의 치세는 대부분 신생국가의 숙명이기도 한 인근 부족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 제도를 고안해낸 것도 바로 로물루스였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최소단위이자 핵으로써, 로마가 존재하는 한 백인대 제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거듭된 전투로 전사자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로마의 인구와 전력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증가했다. 사비니족과 합친 것은 단기적으로 보아도 성공이었던 셈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9년째를 맞이한 기원전 715년, 로물루스는 여느 때처럼 군대를 열병하고 있었다. 그때 온 하늘이 별안간 흐려지면서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우레 소리가 주위를 압도했다. 겨우 비가 그치고 우레 소리도 사라진 뒤,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텅 빈 옥좌였다.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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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루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왕이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로물루스의 업적을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갑작스러운 불행에 당황해하면서도 로물루스를 로마의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실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는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싫어한 원로원 의원들이 왕을 죽였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또한 라틴족은 자기네 가운데에서 왕이 선출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비니족은 그들대로 이번에는 자기네 쪽에서 왕을 배출하고 싶어했다. 원로원 일파가 로물루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어쩌면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로원은 로물루스 지지파와 그 반대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흔히 제삼자가 추대된다. 백성들의 이목은 인격자로 알려진 한 인물에게 쏠렸다. 제2대 왕 누마 알맞은 시기에 인재가 알맞은 자리에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하는 예는 융성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로마 역사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런 예를 보여주지만, 누마의 즉위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마는 로물루스의 초빙을 받고 로마로 이주한 동포들과는 달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남은 사비니족이었다. 농사를 짓는 한편, 지식 탐구에도 힘쓰는 주경야독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높은 덕망과 깊은 교양은 로마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라틴파와 사비니파의 대립으로 경직 상태에 빠진 로마 원로원은 누마를 만장일치로 왕으로 추대했다. 사비니족의 땅까지 누마를 찾아간 장로들은 이 사실을 그에게 전하고, 왕위에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누마는 처음 얼마 동안은 거절했다. 그는 이미 나이 마흔 살이 되어 있었다. 그 시기의 마흔 살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삼고초려의 요청을 받은 누마는 결국 장로들의 뜻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 들어간 누마는 헐렁하고 긴 겉옷(토가) 끝으로 도끼자루에 한 묶음의 막대기를 묶은 왕의 권표를 받쳐들고 그 뒤를 따르지도 않았다. 민회의 찬성을 얻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누마는 신권정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로마의 왕은 왕이 곧 신인 이집트의 파라오와는 다르다.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신관적 색채가 짙은 메소포타미아의 왕과도 다르다. 또한 부유하고 유력한 일족의 우두머리라는 느낌이 강한 그리스의 왕과도 달랐다. 로마의 왕은 신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의 뜻을 구현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다. 죽을 때까지 왕위에 앉기는 하지만, 왕위를 세습하지도 않는다. 또한 선거를 통해 뽑힌다. 로물루스한테도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로마의 왕은 군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종신 대통령에 가까웠다. 역사가 이비우스는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과 ?습을 개선하여, 그때까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에 건전함을 주고자 했다." 여기서 법이란 법률 제정이라기보다는 질서 확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우락부락한 성격이 강한 당시의 로마인에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자기 힘의 한계를 아는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는 전재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누마는 출입문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이기도 한 야누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야누스 신은 입구와 출구라는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반대방향을 향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누마는 완성된 야누스 신전의 앞문과 뒷문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이 문은 전시에는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힌다고 말했다. 누마가 로마를 다스린 43년 동안, 이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말하면, 이 문은 누마가 죽은 뒤에는 줄곧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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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로 세월이 흘렀다. 기원전 240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잠시 닫혔지만 곧 다시 열렸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시작된 내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무찌른 기원전 31년에야 세 번째로 닫혔다고 한다. 누마는 이 시기를 로마에는 방어를 위한 전투말고는 어떤 싸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으레 따라 다니는 것이었지만, 구태여 약탈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누마는 로마 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분류하고, 모든 시민이 독자적인 수호신을 갖는 단체에 소속되도록 했다. 목수조합, 철공조합, 염색공조합, 도공조합 등이 있었다. 직능별 단체를 결성한 것은 백성들에게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부족간 대립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로마에는 이 두 부족 외에도 여러 민족이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 공동체까지 결성되어 있었다. 건국 당시부터 로마는 다민족 국가였다. 이런 종류의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마찰을 미리 막지 않고는 국가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누마는 백성들의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달력도 개혁했다. 로물루스 시절의 로마에서는 1년의 날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누마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12달로 정하고, 일년의 날수를 355일로 결정했다. 남는 날수는 20년마다 결산한다. 누마가 정한 이 달력은 율리시스 카이사르가 1년을 365일로 개정할 때까지 650년 동안 로마인의 일상을 관장하게 된다. 또한 1년 동안 각 달의 배치도 3월이 첫달이었던 것을 세번째 달로 바꾸고, 11월과 12월이었던 달을 앞으로 가져와서 각각 1월과 2월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각 달의 명칭까지는 바꾸지 않았다. 사람들이 익숙해진 것까지 바꿈으로써 생기는 혼란을 피하게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9월 이후의 명칭이 본래의 의미와 어긋나게 되었다. 다음의 표는 각 달의 명칭인데, 우리말과 라틴어와 영어 순서로 되어 있다. 라틴어에서 직접 파생되지 않은 영어를 든 이유는 그 영어 역시 로마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누마는 1년 동안의 축제일과 휴일도 정비했다. 매달 아홉번째 날과 열다섯번째 날에는 장이 선다. 밭일에서 해방되어 저마다 수확물을 가지고 모이는 이 날이 로마인의 휴일이었다. 그밖에 저마다 수확물을 가지고 모이는 이 날이 로마인의 휴일이었다. 그밖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축제일이 있다. 축제일은 1년에 45일을 헤아렸다고 한다. 나라에서 공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 축제일에는 모든 공무를 쉬었다. 제2대 왕 누마의 업적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종교에 관한 개혁일 것이다. 누마가 통치하기 전에도 로마인은 이미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누마는 그런 신들을 정리했다. 나중에는 그리스 신들과 혼동하게 되었지만,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 신(그리스에서는 제우스, 영어로는 주피터), 그의 아내인 유노 여신(그리스에서는 헤라, 영어로는 주노), 미와 사랑을 관장하는 베누스 여신(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영어로는 비너스), 수렵의 여신 디아나(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영어로는 다이애나),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신 아폴로와 지혜의 여신 아테네, 전쟁의 신 마르스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중요한 신이었다. 그밖에 야누스 신을 비롯하여 예로부터 내려온 라틴족의 고유한 신들도 있다. 선왕 로물루스도 죽은 뒤에 신격화되어 신이 되었다. 누마는 이런 신들을 정리하여 계급을 부여했다. 하지만 어떤 신 하나를 정하여, 이것이야말로 로마의 신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신들을 공경하는 일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리스와 로마로 대표되는 다신교와 유대교 및 기독교를 전형으로 하는 일신교의 차이는 다음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신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는 반면, 일신교에서는 그것이 바로 신의 전매특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신교의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결점을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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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윤리 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맡지 않기 때문에, 결점을 지니고 있어도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일신교의 신은 완전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버려두면 감당할 수 없게 바로잡는 것이 신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무엇에나 어디에나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네 왕이었던 사람까지 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로마인에게는 우선 첫 번째 계율부터 적합하지 않다. 또한 신망만이 아니라 선조의 조상을 새기는 것도 좋아한 로마인에게는 두 번째 계율도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계율 역시 로마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아뿔사!" 하고 말하는 대신, 유피테르 신이나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부르는 버릇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계율은 안식일에 관한 것인데, 로마인의 휴일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말고는 아무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평소에 늘 하는 일만 하지 않는 날이었다. 다섯 번째부터 열번까지의 계율은 로마인도 지키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6개 항목은 윤리도덕에 속한다. 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짐승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인간답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시키지 않더라도 보통은 누구나 지키려고 애쓸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유대교에서 파생한 기독교에서는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율만은 유대교에 충실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신교지만, 그밖의 계율은 모두 다신교 방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상을 새기고, 신이나 주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른다. "아뿔사!"하고 말하는 대신, "오, 나의 하나님!"이나 "예수님!" 하고 외친다. 안식일에도 스포츠 같은 것을 하면서 즐긴다. 그렇게 때문에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섯 번째부터 열번째까지의 계율에 나타나 있는 입장, 즉 인간의 행위나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종교 분야에 속한다는 것은 기독교도 유대교와 전혀 다르지 않다. 타협의 명수였다는 것은 곧 인간 심리를 잘 통찰하는 명수였다는 뜻이지만, 그런 기독교도 어디까지나 일신교였다. 그런데 로마신은 신에게 자기네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요구하지 않은 대신 무엇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바로 수호신 역할이다. 수호를 요구한 것이다. 수도 로마를 지키는 것은 최고신 유피테르를 비롯한 신들이고, 싸움터에서는 군신 마르스나 야누스 신이 그들을 지켜주고, 농업은 케레스 여신이, 포도주 제조는 바쿠스 신이, 경제력 향상은 메르쿠리우스 신이, 병이 나면 아이스쿨라피우스 신이 지켜주고, 행복한 결혼과 여자를 지켜주는 것은 유노 여신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로마인은 이런 수많은 신들이 자기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로마에는 추상적 사고를 장기로 삼는 그리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살게 된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로마인의 성향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로마인은 타민족의 신들도 배척하지 않았다. 배척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신은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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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구석구석까지 관심을 가지고 잘 보살펴 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고대 로마의 수호신은 아무 일도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까지 지켜주는 너그러운 신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옆에서 돕는 것이야말로 수호신이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유쾌한 예가 바로 비리프라카 여신이다. 이 여신은 부부 싸움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었다. 부부싸움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시작된다. 둘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목청도 점점 높아진다. 잠자코 있으면 진다고 생각하니까, 상대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떠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상대도 발끈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하지만, 꾹 참고 둘이서 비리프라카 여신을 모시는 사당에 간다. 거기서는 여신상이 있을 뿐, 신관도 없고 아무도 없다. 신전에서 사당에 이르기까지 신을 모시는 모든 성소에 신관을 배치하려면 로마 인구를 전부 다 동원해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신의 사당에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신을 믿는 로마인은 감시자가 없어도 그 규칙을 지켰다. 비리프라카 여신 앞에서 지켜야 할 규칙은 한 번에 한 사람씩 차례로 여신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잠자코 듣고 있노라면 상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양쪽이 되풀이하는 동안 흥분했던 목청도 조금씩 가라앉고, 결국에는 둘이서 사이좋게 사당을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신에게 수호를 요구하는 그리스-로마적인 사고방식은 생각해보면 인간성에 적합한 자연스러운 욕구다. 유대교보다는 유연성이 풍부한 기독교, 특히 카톨릭 교회가 이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일신교다. 그래서 수호신의 역할은 성자들이 대신 맡게 되었다. 이것도 쓰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어쨌든 오쟁이진 남편을 수호하는 성자까지 있었을 정도니까. 기독교에서는 '수호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수호성신'이라고 불렀다. 덧붙여 말하면, 근대국가 이탈리아에도 수호성신이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바로 이탈리아의 수호성신이다. 하지만 절충에 뛰어난 기독교도 부부싸움을 담당하는 수호성신까지는 배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누마는 로마인을 지키는 신들에게 봉사하는 신관 조직을 정비했다. 신관계급의 우두머리는 최고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이 맡는다. 그 밑에 5명 내지 10명의 대신관이 있다. 그밖에 성화를 지키는 무녀(베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은 30년 동안 무녀로 근속하는데, 그 동안 처녀성을 지켜야 했다. 그밖에 새가 나는 모습이나 모이를 쪼아먹는 방법을 보고 공사의 길흉을 점치는 10명 정도의 사제가 있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흉하다는 점괘가 나오면 군단이 철수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적인 로마인에게 그런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우선, 흉하다는 점괘가 나온 경우에도 그것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효력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제가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또한 길흉을 판단하는 것은 사제들의 임무였기 때문에, 그들이 점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길흉이 결정되는 실정이었다. 새가 군단 지휘관이 바라는 점괘를 내놓게 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요컨대 병사들이 길조라고 믿으면 그만이다. 윗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깨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종교를 생각할 때 특히 주목해야 할 특징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로마에는 전임 신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로마인은 세속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 하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았다. 로마의 대신관과 사제들은 신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을 대신하여 신의 존재를 지상에서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신관이나 사제가 되는 데에는 특별한 능력도 필요없고, 그 능력을 기르는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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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녀를 제외하면 보통 사람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최고신관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직자는 민회에서 선거로 결정되었다. 집정관을 비롯한 정부 관리와 아무 차이가 없다. 말하자면 국가 공무원이다. 신관에 대한 고마움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이점도 적지 않았다. 고정된 계급이 아니니까, 다른 계급이나 관직에 대한 질투심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을 보전하기 위해 종교를 지나치게 존중하는 일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이런 로마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불화나 유착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교 분리를 참으로 자연스럽게 정착시킨 것이야말로 누마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력 기원이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뀔 무렵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니시오스는 '고대 로마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 로마인에게 종교는 지도원리가 아니라 버팀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종교를 믿음으로써 인간성까지 속박당하는 일도 없었다. 강력한 지도원리를 갖는 것에는 이점도 있지만, 자기와 종교가 다른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광신적이 아니기 때문에 배타적이지도 않고 폐쇄적이지도 않은 로마인의 종교는 이교도나 이단이라는 개념과도 거리가 멀었다. 로마인은 전쟁을 하긴 했지만, 종교전쟁은 하지 않았다.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는 단순히 믿는 신의 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의 신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도 차이가 있다. 남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남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누마의 시대부터 2천 7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일신교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윤리도덕이나 행위를 바로잡는 역할을 맡아주는 형태의 종교를 갖지 않을 경우, 짐승과 같은 상태에 바지고 싶지 않으면 개인이든 국가라는 공동체든 간에 자기정화 체제를 가져야 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가부장의 권한이 매우 강한 가정이었고, 로마인이 창조한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로마를 싫어하는 사람도 좋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법률이었다. 종교는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아니,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이기 때문에 법이 필요하다. 로마인이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법의 필요성에 눈을 뜬것도 그들의 종교가 가진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덧붙여 말하면,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은 그리스인은 그 역할을 철학에 요구했다. 철학은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특히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 철학의 흐름은 그리스인의 이런 사고 경향이 맺은 열매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성이 떠오를 정도다. 그거야 어쨌든, 누마는 다양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왕위에 올랐을 때의 누마는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또한 로물루스 시대에 로마로 이주하여 라틴족과 로마의 기둥이 된 사비니족한테서 전폭적인 지원를 받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누마는 지지세력도 없고 혈연관계도 없는 한 이방인으로서 왕이 된 것이다. 비록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왕위에 올랐고 민회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약했다. 원로원은 누마가 못마땅하면 로물루스처럼 암살할 수도 있었고, 민중의 지지도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사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별로 많지 않으니까,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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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로물루스는 민중이 쉬운 군사적 성공이라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누마에게는 이것마저도 없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 로물루스의 호위대였던 300명의 병사를 해임했다.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이 아니라 신관이 입는 하얀 토가를 걸치고, 혼자서 자주 숲속에 틀어박혔다. 누마가 숲속에서 님프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 사람들은 누마가 님프를 통해 신들로부터 계시를 받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누마는 숲에서 나올 때마다 새로운 개혁안을 민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민회는 그 개혁안을 모두 승인했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동의를 표했다. 권력이란 거칠고 우락부락한 형태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이 누마는 43년 동안 로마를 다스린 뒤, 님프들의 마중을 받으며 평온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제3대 왕 톨루스 호스틸리우스 누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톨루스 호스틸리우스다.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라틴계 로마인이었던 그는 로물루스처럼 공격형이었다. 그가 이끌게 된 로마도 내부를 충실히 다진 누마 시대를 거쳐 이제는 외부로 발전할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툴루스 왕은 라틴족의 발상지로서 로마인에게는 선조의 땅이기도 한 알바롱가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다. 전쟁의 명분을 찾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양국의 접경 지역에 사는 농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발생한 약탈행위의 변상을 알바롱가가 거부한 것이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80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로마에 비해, 알바롱가는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독립국이다. 간단히 일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툴루스 왕은 강대한 에트루리아가 바로 옆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출혈은 양국에 모두 이롭지 않다는 이유로, 대표자끼리 결투를 벌여서 승부를 결정짓자고 제안했다. 양군에는 각각 3명의 형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과 클리아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 이들이 각자의 조국을 대표하여 싸우게 되었다. 결투에 이긴 나라가 진 나라를 평화적으로 다스린다는 협정도 이루어졌다. 6명의 젊은이들은 전투대형을 해체하고 대기중인 양군 진영 앞으로 나섰다. 신호가 떨어지자, 양군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든 여섯 전사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한바탕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뒤, 마침내 로마 쪽 전사 가운데 하나가 쓰러졌다. 또 한 사람이 알바롱가 전사의 칼에 쓰러졌다. 혼자 남은 로마 전사의 가슴은 공포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본 그는 쫓아오는 알바롱가 전사들 사이의 거리가 서로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맨 먼저 쫓아온 알바롱가 전사를 우선 쓰러뜨렸다. 그리고 두 번째 적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사람뿐. 이긴 것은 결국 로마 전사인 호라티우스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바롱가의 왕은 나라의 운명이 단 한 번의 결투로 결정되어 버린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부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맞서게 했다. 로마는 알바롱가의 왕에게 약속 이행을 강요하기보다 먼저 이웃 부족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 알바롱가는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전황을 주시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저질렀다. 싸움은 로마 쪽이 우세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우던 툴루스 왕은 진짜 목표는 눈앞에 있는 부족들이 아니라 알바롱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여러 부족을 상대로 일단 승리를 거두어 그들을 꼼짝못하게 하는데 성공한 로마군은 물밀듯이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알바롱가는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함락되었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 톨루스는 로마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책임을 알바롱가 왕에게 모두 뒤집어 씌었다. 그는 두 필의 말에 알바롱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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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다리를 하나씩 묶은 다음,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여 제각기 반대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로마인이 집행한 최초의 능지처참이었다. 알바롱가 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하지만 노예로서가 아니라 로마 시민으로서였다.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의 주거지로 키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 할당되었다.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한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그 대표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만약 이때 알바롱가 백성이 몰살당했거나 노예가 되었다면, 나중에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바롱가 공략은 단순한 이웃 부족의 공략과는 의미가 달랐다. 이것은 앞으로는 로마가 라틴족의 조국이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제 자기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여 세운 분가가 아니라, 라틴족의 본가가 되었다. 로마인은 전쟁에 패한 민족을 로마에 동화시키는 로물루스 시대 이래의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노선도 확립했다. 사비니족의 동화로 이미 크게 늘어나 있던 로마 인구는 알바롱가인의 동화로 더욱 늘어났다. 동등한 권리를 준다는 것은 곧 동등한 의무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 시민의 첫 번째 의무는 병역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전력도 더 한층 증강되었다. 이 군사력을 이끌고 싸움을 거듭하여, 로물루스보다 더 찬란한 군사적 영광에 빛나던 툴루스의 치세도 32년으로 끝났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티우스 톨루스가 죽은 뒤에 선출된 제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 마르티우스라는 자였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외할아버지 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섯 살이었다니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 역시 누마와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왕이 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지 모르나, 시대는 안쿠스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왕의 32년 치세는 라틴족의 모국인 알바롱가 공략과 사비니족과의 전투로 시종했지만, 안쿠스 역시 다른 라틴 부족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로마가 서서히 힘을 축적하여 부족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병력이 없어도 주목받을 만한 힘을 갖지 않은 자에게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로마에 사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라틴족과 사비니족이었다. 로마가 동족에게 밀려난 자들이나 이주 희망자들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로마 근처에는 라틴족과 본가라고는 하지만, 라틴족이 세운 하나의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이런 이웃 부족들과 로마의 관계는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혀 있게 내버려둘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제3대 왕 툴루스가 라틴족이었기 때문에 사비니족과의 전투에 전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제4대 왕 안쿠스가 사비니족이었기 때문에 라틴족을 상대로 싸운 것도 아니다. 사실 툴루스는 자신과 핏줄이 이어져 있는 알바롱가를 공략했다. 그들은 이제 로마인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굳이 차이를 요구한다면, '라틴계 로마인'이나 '사비니계 로마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로마인'들은 싸움에 진 라틴족이나 사비니족만이 아니라 그밖의 민족도 피정복민으로 예속시키지 않고, 물론 노예로 삼지도 않고 '로마화'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패배자는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들에게는 선주민과 동등한 시민권이 주어지고, 유력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다만 이 무렵부터 싸움에 진 도시는 파괴되기 시작했다. 애국자 리비우스는 이것이 이주자를 로마에 정착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애국적으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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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그래도 촌락까지는 파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후에도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독립된 부족으로 존속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아니, 성급하게 굴고 싶어도 아직은 힘이 모자랐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로마의 일곱 언덕은 주민으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팔라티누스 언덕에는 로물루스 시대부터 라틴계 로마인이 모여 살았고, 사비니계 로마인은 오래 전에 퀴리날리스 언덕에 본거지를 두었다. 알바롱가인에게는 카일리우스 언덕이 주어졌고, 가장 새로운 이주민들한테는 아벤티누스 언덕이 제공되었다. 여기서 신들의 거처가 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더하면, 일곱 언덕 가운데 다섯 개가 주민을 가진 셈이 된다. 적당한 높이와 넓이를 가진 언덕부터 활용했을 것이다. 비미날리스 언덕과 에스퀼리누스 언덕은 꼭대기의 평지가 좁은데다 높이도 낮아서 배수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제4대 왕 안쿠스는 25년에 걸친 치세 동안 전투 외에도 몇 가지 사업을 완수했다. 첫째는 테베레 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자니콜로 언덕을 요새화했기 때문에, 그것과 테베레 강 동안에 모여 있는 일곱 언덕을 이을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다리는 방어상의 이유도 있어서 목조로 만들었다. 두 번째 사업은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한 것이다. 오스티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와 마주보게 되었다. 또한 오스티아 주변의 모래밭에서는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염전 사업도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인에게 화폐 아닌 화폐를 주었다. 소금은 누구한테나 필수불가결한 물품이다.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다. 게다가 경제활동이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로마에서는 이점이 훨씬 컸다. 소금을 갖는 것은 곧 화폐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출발하는 도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로의 하나는 '비아살라리아'라는 길이다. 이 이름을 직역하면 '소금길'이 된다. 이 길은 테베레 강 어귀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내륙지방의 여러 도시로 운반하기 위한 길이었다. 로마는 농경민족한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완만하면서도 착실하게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한 걸음씩 천천히 지반을 굳혀가는 방식은 나름대로 칭찬해도 좋은 생활방식이지만, 조직에 이질적인 분자가 섞여 들어온 것이 비약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이따금 일어난다. 마치 화학반응 같은 현상인데, 건국한 지 139년째 되던 해에 로마에도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안쿠스가 아직 왕위에 있던 시절, 우마차를 몇 대나 거느린 이방인 일가가 로마로 들어왔다. 화려한 차림새와 길게 기른 머리를 보면, 이들이 에트루리아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일가의 가장인 타르퀴니우스는 순수한 에트루스크가 아니라, 그리스 코린트에서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그리스인 아버지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에트루스크였다. 어머니는 에트루리아에서도 지위가 높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에트루리아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경제적인 관계라면 민족을 따지지 않지만, 자기들 사회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에트루리아에서는 평생 동안 이방인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위 향상은 절망적이라는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 밖에서 팔자를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코린트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므로, 코린트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식민지 시라쿠사로 가도 좋았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말에는 시라쿠사가 로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과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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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그리스인도 순수한 혈통을 좋아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혼혈아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곳으로 로마를 선택했다. 로마에서는 정착할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는 타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누마와 안쿠스가 보여주듯이, 건국 당사자인 라틴족이 아니더라도 왕이 될 수 있었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이런 점도 매력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전재산을 가지고 에트루리아를 떠난 그는 일족과 가신들을 거느리고 로마에 정착했다. 이 외국인은 그 무렵 로마에 있었던 여러 군데의 에트루리아인 공동체에는 의존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보다는 라틴계와 사비니계의 구별도 차츰 없어져가던 로마인 사회에 침투하려고 했다. 부모한테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이 재력과 재능으로 로마인 사회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도 지나기 전에 이 이방인은 안쿠스 왕의 유언 집행자로 지명될 만큼 출세했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공증인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왕이 죽은 뒤 스스로 왕에 입후보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선거운동을 한 최초의 로마인이기도 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를 하고, 자기한테 표를 던져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선거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타국에서 이주한 사람이지만, 타국인이 로마 왕이 된 선례가 있다. 처자와 함께 전재산을 가지고 로마에 왔으니까, 이 로마에 뼈를 묻을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이도 책임있는 공직에 앉기에 적당하고, 선왕의 신뢰도 두터웠고,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고 로마 법을 존중하는 점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민회는 이 타르퀴니우스를 압도적 다수로 왕에 선출했다. 원로원도 두말없이 승인했다. 라틴계, 사비니계로 이어져 내려온 로마 왕의 계보에 처음으로 에트루리아계 왕이 등장한 것이다. 제5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참으로 유능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37년에 이르는 그의 치세 동안, 로마의 세력권은 더욱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내부도 비로소 도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도시로 변모했다. 시민들의 생활 수준도 비약적인 향상을 이룩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로물루스 이래 줄곧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수를 200명으로 늘렸다. 인구가 늘어난 것이 이유였지만, 그의 참뜻은 자신의 권력 확립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로원 의원만은 왕이 지명할 수 있다. 타르퀴니우스가 자신의 입김이 닿는 사람을 원로원 의원으로 지명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참자인 타르퀴니우스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기성세력의 아성인 원로원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민중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민중의 지지에만 의존할 경우의 위험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왕은 주변 부족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났다. 왕들의 적절한 지휘와 병사들의 용맹으로 당시의 로마군은 서서히 명성을 높이고 있었지만, 상대가 비록 강적은 아니더라도 로마 역시 사람으로 치면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로마군은 아직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싸움에 진 사람들을 로마로 이주시키고 시민권을 주어 동화시키는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패배자한테서 빼앗은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 시민들은 그 수많은 전리품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후에도 로마가 이민족의 로마 이주를 여전히 환영한 것을 보면, 타르퀴니우스의 노선 변경은 개인적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변을 위협하고 있던 이웃 부족들은 당분간이나마 얌전해졌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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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로마인이 일곱 언덕에만 살고 있으면 로마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덕과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넓은 습지대로 눈을 돌렸다. 팔라티누스 언덕 북쪽에 있는 저지대는 그때까지 도랑이 그물처럼 뻗어 있는 습지대였다. 거기에 지하수로를 내면 저지대 전체의 물을 모을 수 있다. 지하수로를 테베레 강까지 연결하면 모인 물의 배수 문제는 해결된다. 이리하여 대규모 지하수로 공사가 착수되었다. 오늘날에도 테베레 강가에서는 거대한 배수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일대는 처음에는 시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각 부족끼리 모여 사는 일곱 언덕에 비하면, 이 일대는 중립지대가 된다. 그리고 지하수로의 위쪽을 덮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곳만 돌로 포장하였다. 그래서 공공 건축물이 서서히 이 일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의 심장부라고까지 부르게 된 '포룸 로마눔', 즉 '포로 로마노'가 탄생한 것이다.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던 습지대도 같은 방법으로 저지대로 탈바꿈했다. 여기도 공공 목적으로 사용되어 대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주변의 간척사업으로 왕래가 편해진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높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는 로마의 최고신 우피테르의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신들도 역시 그들에게 어울리는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이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이 도시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로마도 오스티아를 정복하여 테베레 강 어귀에 항구를 갖게 되고 지하수로를 이용한 간척사업을 벌인 결과, 그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높이가 너무 낮고 수도 너무 많다고 여겨진 일곱 언덕도 복수 민족의 집합체인 로마에서는 각 민족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전체를 통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점으로 바뀌었다. 타르퀴니우스의 간척사업은 활용할 수 있는 토지를 늘렸을 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짐으로써 로마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또한 일곱 언덕과 그 주변을 흐르는 테베레 강으로 이루어진 로마는 단조로운 평야보다 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경치를 갖는다. 그 아름다움이 이 시대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개발사업을 실제로 수행한 사람은 로마 군단의 병사들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왕이 병사들을 이용한 것은 "평시에도 병사들을 전시와 똑같이 활동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후에도 로마에서는 이런 종류의 건설작업을 군단 병사들에게 맡긴 예가 많은데, 이 전통도 간척사업에 그 발단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발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토지도 있고, 실제 작업에 종사할 사람이 있어도,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로마인은 아직 이만한 대역사를 추진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에트루리아에 간척 기술, 지하수로 공사에 필요한 기술, 도로포장 기술, 신전 같은 대규모 석조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 등 모든 기술이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왔다. 기술 지도자로 에트루리아인도 들어온다. 로마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에트루리아인이 갑자기 부쩍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에트루리아 기술의 도입은 단순한 도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고 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이것이 나중에 세계적인 토목 기술자들을 키워내는 기초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도입한 에트루리아 기술로 변모한 로마 시가지를 보고, 원래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기술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로마에 대한 에트루리아 문명의 영향은 기술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규모 토목사업에는 자재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분야를 담당하는 것도 당시의 로마인에게는 무리였던 만큼, 이것을 맡을 사람도 역시 에트루리아인밖에 없었다. 이전의 로마에는 가내공업 규모의 산업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상업과 수공업이 시내 전역에서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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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게 되었다. 당연히 경제가 활발해졌다. 상공업의 활성화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로마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국가로서 균형잡힌 구조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타르퀴니우스 왕은 우연히 한 에트루리아인 소년을 만났다. 이 소년의 출신은 확실하지 않았다. 노예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왕은 왠지 이 소년이 마음에 들어 친아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다. 소년이 젊은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총명함과 용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로마 귀족의 자제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았다. 타르퀴니우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은 타르퀴니우스가 이처럼 세르비우스를 후대하자 불안해졌다. 현재의 왕이 사위를 후계자로 결정하면, 그들의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타르퀴니우스는 치세가 37년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여전히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원로원의 평판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 타르퀴니우스의 추천은 곧 당선을 의미했다. 안쿠스의 두 아들은 선수를 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왕을 암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쪽도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르비우스를 소년 시절부터 키워온 타르퀴니우스의 아내가 남편에게 일어난 변고를 알자마자 세르비니우스를 불러서, 재빨리 왕위를 차지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왕비한테는 친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왕이 암살당한 직후에 왕비가 부른 것은 사위였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제6대 왕이 세르비우스는 민회에서의 선거를 거치지 않고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위에 올랐다. 로마는 세르비우스를 왕으로 가짐으로써 또 한 번의 도약을 기약하게 되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제6대 왕이 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높은 평가를 받은 전임자의 뒤를 이은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우선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착수한 사업을 마무리짓는 일부터 서둘렀다. 습지대의 간척사업과 유피테르 신전 건립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로마 전체를 지키는 성벽을 완성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2천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르비우스의 성벽'이라 불리고, 현대 로마에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이 성벽은 로마의 일곱 언덕 전부를 에워싸는 대규모 성벽이다.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지대에도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곱 언덕과 그 사이의 평지로 이루어진 로마 전체를 에워싸는 것은 방어 면에서도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세르비우스가 완성한 성벽의 보호를 받고 군사적인 성공도 거듭되어, 이 무렵에 로마는 주변 부족들 중에서도 우뚝 솟은 존재가 되었다. 세르비우스는 아벤티누스 언덕 위에 수렵의 여신 디아나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이 여신은 목축업을 주로 하는 주변 부족들의 수호신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디아나 신전을 로마 안에 세운 것은, 이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면 로마 시민이 아니더라도 로마에 들어올 수 있고, 신전에 참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전을 참배하는 것이니까 무기는 지니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세르비우스 왕은 남을 거부하는 성벽과 남도 받아들이는 신전을 동시에 건설하여 완성시켰다. 제법 꾀바른 짓이다. 그러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 개혁일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군제 개혁인 동시에 세제 개혁이자, 선거제도의 개혁이기도 했다. 국민의 의무는 세금을 내는 것이다. 또 다른 의무는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고대에는 로마만이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군역으로 직접세를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제구실을 하는 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어엿한 시민이라면 당연히 권리를 갖는다. 시민의 권리는 바로 투표권이다. 따라서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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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 성립된다. 세르비우스는 테베레 강을 향해 펼쳐져 있는 습지대를 간척하고, 이 넓은 평지를 '마르스의 광장'이라고 불렀다. 군신 마르스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군신의 이름을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잇듯이, 이 평지는 군단의 집결지로 이용되었다. 또한 민회의 투표장으로 이용되었다.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고 생각한 로마인이 보기에, 이것은 결코 이상한 배합이 아니었다. 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앞서, 세르비우스는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렇지만 그의 주목적은 로마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최초의 인구조사에서 당시 로마의 총인구까지는 알 수 없다. 조사 결과 알게 된 시민의 수와 경제력을 토대로 하여 세르비우스가 만들어낸 새로운 제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세르비우스의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귀족과 평민의 구별없이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여섯 계급으로 나뉘었다. 이를 도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이 도표를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솟아난다. 우선, 유복한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인데, 그들만으로 이만한 수의 병력이 모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돈을 주고 무산자를 고용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누구나 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 로마에는 말기가 될 때까지 용병제도가 없었다. 로마인은 돈을 주고 고용한 남한테 국가 수호를 맡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둘째, 로마의 유력자는 많은 사람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제로 결정된 수만큼 병사를 제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의문은 표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겠지만, 이것은 로마의 독특한 투표 방식 때문이었다. 로마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 않는다. 군단의 최소단위이기도 한 백인대가 각각 한 표를 갖는다. 백인대 내부에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뜻을 모으고, 그렇게 하여 나온 통일된 뜻이 한 표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소선거구제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만, 로마에서는 100명이 한 표를 갖는 방식을 고수했다. 앞의 도표를 본 사람은 당장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래서는 제1계급 만으로도 과반수를 차지해 버릴 거라고. 사실 그렇다. 다만 기원전 6세기의 로마에서는 많은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많은 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시민의 의무, 즉 직접세인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16세 미만인 미성년 남자와 이미 오랫동안 의무를 수행한 60세 이상의 고령자, 여자와 노예,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사람을 뜻하는 '프롤레타리', 즉 무산자뿐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여자라도 자녀가 없는 미망인은 그런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기병이 타는 말의 유지비로 매년 200아세를 낼 의무가 있었다. 또한 기원전 6세기에 이미 로마는 2만 명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고 놀라겠지만, 이것은 예비역까지 포함한 수다. 25세부터 45세까지의 시민으로 구성된 실제 병력을 세르비우스 왕은 1만 명으로 계산한다. 물론 지휘관은 연령 제한이 없었다. 왕 자신도 종신제였다. 같은 보병이라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장비가 무거워진다. 제1계급과 제2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중무장 보병이 된다. 계급이 내려갈수록 장비도 가벼워져, 5계급의 보병은 군복도 각자 자유였고, 무기도 몽둥이와 투석기, 그러니까 새총 정도가 의무화되어 있었을 뿐이다. 군역은 직접세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장에서 무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각자 부담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이 책에서 다루게 될 500년 동안 프롤레타리까지 소집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반대로 예비역 소집은 자주 있었다. 세르비우스는 병법을 확립했다. 로마군은 전위, 본대, 후위로 삼분된다. 전위는 맨 먼저 적과 부딪쳐 적의 전선을 흩뜨리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대기하고 있던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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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력부대인 중무장 보병이 승부를 결정짓고, 여차하면 세 번째인 후위가 지원하러 들어가는 전술이다. 기병은 기동대 역할을 맡았다. 그저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그때, 세르비우스의 병법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쳐들어가는 로마 군단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주변 부족과의 전투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리하여 출신도 확실하지 않은 세르비우스 왕의 치세도 평화롭게 끝날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불평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또한 성과가 많았던 그의 치세도 어언 44년이라는 긴 세월에 이르러 있었다. 마지막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암살당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뒤를 이은 것은 타르퀴니우스의 사위인 세르비우스였지만, 선왕한테는 친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었다. 세르비우스는 나라를 잘 다스렸고 실적도 올렸기 때문에, 불평분자가 있다 해도 백성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44년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런데 불평분자의 아들 세대가 되면, 부모의 그런 양식은 단순한 비겁함으로 보이게 된다. 또한 세르비우스 왕도 길고 다망한 치세 뒤의 피로와 노화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세르비우스한테는 두 딸이 있었다. 두 딸은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드세고 또 하나는 얌전한 성격이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쪽에도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담찬 야심가였고 또 하나는 온건한 성격이었다. 세르비우스 왕은 이 넷을 결혼시켰는데,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끼리는 결혼시키지 않았다. 성미가 드센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사촌 오빠에게, 얌전한 왕녀는 야심만만한 사촌 오빠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결혼 생활을 통해 각자의 성격이 중화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리라. 이것은 실패였다. 성미가 드센 툴리아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남편을 사사건건 멸시했다. 당신 같은 겁쟁이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한 행운의 여신은 나한테 미소도 짓지 않으리라는 게 그녀의 입버릇이었다.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제부를 유혹했다. 곧이어 온화한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왠지 모르게 급사한다. 과부와 홀아비가 된 툴리아와 타르퀴니우스는 결혼했다. 세르비우스 왕은 이 결혼에 찬성하지도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상냥했던 딸의 죽음이 준 타격으로 우울증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왕이었다. 로마의 왕은 종신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은 왕위에 앉아 있다. 또한 왕위는 세습이 아니기 때문에, 왕의 딸이라도 반드시 다음 번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툴리아는 남편의 마음에 불을 댕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에 당신이 내가 생각한 그런 대장부라면,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섬기고 남자로서도 존경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운명은 나빠질 뿐이예요. 왜 결단을 내리지 않는 거예요? 코린트나 타르퀴니아 같은 타국에 나가서 행동하라는 건 결코 아니예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코린트나 타르퀴니아로 가버리면 돼요. 그리고 당신도 옛날 신분으로 돌아가면 돼요." 원래 가지고 있었던 야망에 불이 붙은 타르퀴니우스는 우선 로마에 사는 에트루리아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그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 로마의 초빙을 받고 왔다가 그대로 로마에 눌러앉은 사람들이다. 원로원에서도 로마의 개발사업과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신흥계급의 의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타르퀴니우스는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원로원에서 연설을 했다. 출신도 확실하지 않은 자를 모시는 것은 로마의 수치라고 그는 말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타르퀴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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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때, 세르비우스 왕이 변고를 알고 달려왔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왕에게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왕의 몸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 원로원 출입구 계단 위에서 왕을 내던졌다. 세르비우스가 굴욕감을 씹으며 대궐로 돌아오자, 타르퀴니우스가 보낸 자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르비우스는 칼을 맞고 쓰러졌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딸 툴리아가 모는 마차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버지를 덮쳤다. 이리하여 타르퀴니우스는 왕이 되었고, 툴리아는 왕비가 되었다. 제7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선왕 세르비우스의 장례를 금지했다. 그리고 선왕파로 알려진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죽였다. 무장한 호위병에 둘러싸이지 않곤 밖에도 나가지 않은 그는 민회에서의 선거도 원로원의 승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그후에도 줄곧 원로원에 조언을 청하지도 않았고, 민회에 찬반을 묻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뒤에서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렀다. 국내에서는 독재적 전제군주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거만한 타르퀴니우스)도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다. 주면 부족들과의 전투에서도 이기는 것은 늘 로마쪽이었다. 화친과 전쟁의 양면 정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의 방식은 교묘했지만 음험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불안을 느끼는 지배자는 항상 대외관계를 확실하게 해두려고 애쓴다. 타르퀴니우스는 첫 번째로는 인근에 사는 라틴족한테서,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그 상대를 찾았다. 100년 전인 제4대 왕 안쿠스 시대부터 로마는 이웃 라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신을 섬기는 동포였기 때문에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기도 했다. 이 '라틴 동맹'은 축제일을 함께 기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전투도 힘을 합쳐 치르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완전히 대등한 동맹관계였다. 하지만 로마가 강성해지자 세력관계도 달라졌다. 함께 힘을 합쳐 전투를 치를 때에도, 병력은 평등하지만 지휘는 로마쪽에서 맡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전리품은 평등하게 분배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라틴 동맹을 경신했다. 라틴족보다 훨씬 강력했던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여 동맹을 경신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 중에는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가 에트루리아한테 끌려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기원전 6세기 후반인 그 무렵, 로마 안에서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로마에서는 제5대 왕부터 시작하여 제6대와 제7대 왕까지 잇따라 세 명이나 에트루리아계 왕이 나왔다. 그래서 후세의 연구자들 중에는 이 시기의 로마가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로마 안에서는 막강했지만, 로마 밖에서는 이 시기를 고비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불운은 이 변화를 보지 못한 데 있다. 그는 계속 후퇴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줄도 모르고 의지해 버린 것이다. 급속히 발전한 민족은 쇠퇴할 때도 급속히 쇠퇴한다. 한때는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 근처까지 세력을 넓혔던 에트루리아인은 100년도 지나기 전에 쇠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추문은 힘이 강할 때는 공격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약점이 드러나면 당장에 쳐들어온다. 그 추문이 당사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해도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왕의 아들 가운데 섹스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있었다. 이 섹스투스가 친척인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짝사랑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가슴 속이 불처럼 뜨거워진 젊은이는 콜라티누스가 집을 비운 밤에 사랑하는 여인의 저택으로 갔다. 시종은 한 명도 거느리지 않았고, 콜라티누스와는 친척 사이이기도 했다. 루크레티아를 비롯한 콜라티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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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집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뜻이 환대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손님용 침실까지 마련해 주었다. 밤이 깊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섹스투스는 단검을 가슴에 품고 루크레티아의 침실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단검을 들이대고 위협한 결과겠지만, 어쨌든 젊은이는 여자를 욕보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젊은이는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남겨둔 채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날 밤, 루크레티아는 로마에 있는 아버지와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하인을 보냈다. 하인은 변고가 일어났으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급히 와 달라는 루크레티아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인 루크레티우스는 발레리우스를 데리고 달려왔다. 남편인 콜라티누스는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달려왔다. 침대에 앉은 채 비탄에 잠겨 있던 루크레티아는 도착한 네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숨겨 가지고 있던 은장도를 가슴에 꽂았다. 그녀는 괴롭게 숨을 몰아 쉬면서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수를 맹세시킨 다음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루크레티아의 유해는 로마로 운반되어, '포로 로마노'의 연설대 위에 안치되었다. 시민들은 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왕과 그 일족의 야만성과 오만함을 저마다 비난했다. 브루투스는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정숙하고 행실이 올바른 여자들이 두 번 다시 이런 만행에 희생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타르퀴니우스 왕이 선왕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자임을 시민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왕과 그의 일가를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로마인의 마음 속에 맺혀 있던 타르퀴니우스에 대한 불만에 마침내 폭발했다. 브루투스의 제안에 커다란 함성으로 찬성의 뜻을 표한 민중은 민병대를 결성하자는 브루투스의 호소에도 열렬히 응했다. 이때쯤에는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타르퀴니우스도 변고를 알았다. 왕은 당장 휘하부대만 이끌고 로마로 돌아왔다.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추방하기로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만 데리고 에트루리아의 도시 카이레를 찾아갔다. 왕비 툴리아는 이미 로마에서 달아났기 때문에 무사했다.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망명한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했다. 이같은 사태의 원인이 된 셋째 아들 섹스투스는 다른 도시로 도망쳤지만, 전에 그에게 모욕당한 적이 있는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는 25년 만에 끝났다. 제7대 왕이었던 그와 함께 로마의 왕정도 끝났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다. 그후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들어간다.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은 같지만, 종신제인 왕의 시대가 끝나고, 임기가 1년 밖에 안되는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체제라는 이유만으로 왕정 시대의 로마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 공동체도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편이 효율적이다. 조직이 아직 여린 시기에 활력을 낭비하는 것은 치명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는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자가 결정하고 앞장서서 실행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로마의 일곱 왕의 역사를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등용한다는 원칙이 지나칠 만큼 완벽하게 적용된 역사였다. 로마는 이런 왕들 덕택에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릴 수 있었다. 왕들이 모두 장수한 것도 다행이었다. 왕들이 저마다 자신의 포부를 실행에 옮기고, 그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왕이 바뀌어도 새 왕은 선왕의 업적 위에 안심하고 새로운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사업의 중단이 초래하는 활력의 낭비도 피할 수 있었다. 아마 로마 왕정은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사명을 끝냈을 것이다. 루크레티아 사건은 이미 사명을 끝낸 왕정의 숨통을 끊어놓은 데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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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로마 공화정 공화국으로 이행한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공화정 시대에 접어든 로마를 다룬 (로마사) 제2권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앞으로는 자유를 얻은 로마인이 평화시와 전시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사적인 추문을 교묘히 이용하여 왕정 타도로까지 끌고간 공로자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그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왕을 추방한 직후에 브루투스 '포로 로마노'에 시민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로마는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으며,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해마다 민회에서 왕을 대신할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2명을 선출하는 제도를 창설했다. 초대 집정관으로는 브루투스와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역사에 이따금 등장하는, 선견지명과 실행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의 누이니까, 왕과 브루투스는 외숙부와 생질의 관계다. 브루투스라는 성도 원래 조상한테서 물려받은 성이 아니라, 바보를 뜻하는 말에서 생겨난 별명이다. 그는 '바보'로 멸시당하면서 제멋대로 전횡을 휘두른 타르퀴니우스 시대를 참고 견디어 은인자중해 왔다고 한다. 그 별명이 결국에는 성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보 취급을 받아도 왕의 조카인 이상 그는 권력 주변에 있게 마련이고, 모든 것을 냉정하게 관찰할 기회가 많았을 게 분명하다. 또한 정보도 풍부했을 것이다. 그런 브루투스였기에, 이제 로마는 비록 효율적이기는 하나 왕이라는 한 개인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제도는 버려도 될 만큼 성장했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개혁의 주도자는 흔히 신흥세력보다 구세력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한 사람의 왕이 해온 일을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된 것은 개인의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였지만, 재선이 허용된다 해도 집정관의 임기는 불과 1년밖에 안된다. 이런 제도가 유효하게 기능을 발휘하려면, 권위와 함께 권력도 갖는 안정된 기관이 필요하다. 브루투스는 왕정 시대부터 존재한 원로원을 강화했다. 로물루스 시대에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이 제5대 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는 두 배로 늘어났고, 부루투스는 이것을 다시 300명으로 늘렸다. 새로 임명된 원로원 의원에는 신흥세력에 속하는 유력한 가문의 가부장이 많았다. 원로원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다. 또한 1년 임기로 교체되는 집정관을 배출할 수 있는 기관은 사실상 유력 가문의 가부장 집단인 원로원 밖에 없다. 권위와 권력도 원로원이라면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찬가할 수 있는 민회가 있었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는 원래 로마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이었는데, 공화정 로마에서는 왕이 집정관으로 바뀌었을 뿐, 권력의 삼각 구조는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원로원 의원 여러분" 하고 부르는 대신,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것을 직역하면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가 되는데, 이 호칭이 관용구가 된 것은 공화정이 시작된 기원전 509년부터다. 부루투스의 개혁으로 많은 신참자가 원로원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원로원 의원과 신참 의원을 구분해서 부르는 방식은 얼핏 보기에 구제할 수 없는 폐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꽤 교묘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파트레스'라고 말하여 구세력을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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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한다. 그런 다음 신흥세력을 언급하는데, '신참자들이여' 라는 호칭을 계속하는 한, 신참자가 새로 들어올 가능성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로마 원로원은 사실 원로원이라는 우리말 번역에서 연상하기 쉬운 완고한 노인들의 집단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의원들이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그러는 동안 원로원의 문호를 신참자에게 개방하는 데 대한 저항감도 누그러진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없는, 단순한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말의 힘이라는 것도 그렇게 얕볼 것은 아니다. 그렇게는 하지만, 250년 동안 익숙해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것은 역시 대변혁이었다. 변혁기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변혁이 또 다른 변혁을 부르기 때문이다. 기원전 509년에 탄생한 로마 공화국도 이 역사의 관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로마의 유력 가문에 속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불만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좋다. 원로원의 의원이 아니었던 사람까지 의원으로 임명되고, 집정관이 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생겼으니까, 그런데 젊은이들은 어떤가. 집안의 가부장이 되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려면, 가부장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왕정 시대에는 달랐다. 왕의 기분에 따라 젊은이들이 발탁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명문 집안의 젊은이들은 공화정으로 바뀐 결과 자기들이 활약할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느꼈다. 그게 불만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한 젊은이의 집에 은밀히 모여, 추방된 왕 타르퀴니우스를 도로 불러들이기로 결의했다. 왕정복고를 결의한 것이다. 각자가 피로 서약한 서약서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이 집의 노예 하나가 자초지종을 엿듣고는 집정관에게 밀고해 버렸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 당장 체포되고, 증거물인 서약서도 압수되었다. 이들을 심문한 2명의 집정관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젊은이들 모두가 잘 아는 사람인데다, 그들이 모인 집은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친척집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정복고를 모의한 젊은이들 중에는 집정관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소집된 민회에서 젊은이들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약서가 낭독되었다. 이들 가운데 국가반역죄로 고발된 것에 반박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것을 제안했다. 또 한 명의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사람들은 사형이 아니라 추방형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집정관의 결정이라 해도, 두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이 반대하면 효력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루투스는 이때 집정관으로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생살여탈권까지 인정받고 있는 로마 가문의 가부장으로서 행동했다. 부루투스는 피고석에 서 있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티투스! 티베리우스! 네놈들은 왜 너희들에 대한 고발에 대해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느냐?" 두 젊은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버지의 질문이 세 번 되풀이되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브루투스는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일은 그대들 몫이다." 형집행은 그 자리에서 당장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선 주모자라는 이유로 브루투스의 두 아들이 옷을 벗기우고 두 손을 뒤로 결박당했다.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이 잔혹한 광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브루투스만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쓰러질 때까지 채찍질을 당한 두 젊은이는 한 사람씩 끌려가서 도끼로 목이 잘렸다. 거기까지 입회한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는 자리를 떴다. 브루투스의 태도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 것과는 반대로, 또 다른 집정관인 콜라티누스의 태도에는 의혹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그가 재판정에서 흘린 눈물까지 의심했다. 콜라티누스 자신도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정절을 지켜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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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선출된 콜라티누스는 이 변화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집정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가족과 함께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로마에는 자진해서 망명한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석이 된 집정관 자리에는 유력자이긴 하지만 선왕 타르퀴니우스와 혈연관계가 없는 발레리우스가 선출되었다. 브루투스가 단지 가부장의 권한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걱정하고 있었고, 그 걱정이 적중한 것이다. 선왕 타르퀴니우스는 왕위에 복귀하겠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망명지인 에트루리아 지방의 여러 도시를 정력적으로 돌아다니며, 병력을 빌려 달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에트루리아 세력이 소탕된 것에 가장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타르퀴니아와 베이였다. 그런만큼 추방된 왕에게 지원을 약속한 것도 이 두 도시였다. 병력을 가졌을 때 타르퀴니우스가 무장으로서 얼마나 뛰어난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왕위에 있을 때 이미 증명된 바 있었다. 명문 집안의 젊은이들이 왕정복고를 꾀하다가 실패한 것을 알게 된 타르퀴니우스는 이제 힘으로 왕위를 탈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를 맞아 싸울 로마군은 집정관 2명이 지휘를 맡는다. 기병대는 브루투스가 이끌고, 보병군단은 발레리우스가 지휘하게 되었다. 양군은 로마 성벽에서 하룻길 떨어진 곳에서 만났다. 산재하는 숲 사이에 좁은 평지가 있는 곳이어서 전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브루투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앞장서 나아가고, 발레리우스가 이끄는 보병군단은 좀 더디게 행군하고 있었다. 에트루리아군 기병대는 타르퀴니우스의 맏아들 아룬테스가 지휘하고 있었다. 로마 기병대를 알아본 아룬테스는 말을 타고 아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로마 기병대를 향해 지휘관끼리 일 대 일로 겨루자고 제안했다. 브루투스도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섰다. 사촌 형제끼리의 싸움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작전 따위가 없었다. 있는 것은 분노와 환멸뿐이었다. 아룬테스에게는 자기들을 추방한 장본인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브루투스에게는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 자에 대한 환멸이 있었다. 대장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싸움은 지켜보는 양군 병사들 앞에서 잠시 계속 되었다. 둘은 실력이 막상막하였다. 두 사람의 창이 거의 동시에 상대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둘은 창을 가슴에 꽂은 채 공중제비를 돌아 말에서 떨어졌다. 이것이 양군 병사들의 전의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대장의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을 행해 돌진해 갔다. 전투는 기병대만이 아니라 뒤따라온 보병군단 사이에서도 벌어졌다. 발레리우스가 지휘하는 로마 보병에 맞서 에트루리아 보병대를 지휘하는 것은 선왕 타르퀴니우스였다. 보병도 세력이 막상막하였다.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밤 자기 영토로 후퇴한 양군 진영에서 기묘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로마군 전사자보다 에트루리아군 전사자가 한 사람 많고, 싸움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다는 풍문이었다. 병사들은 그것이 신의 목소리라고 믿었다. 이튿날 아침 로마군은 전쟁터로 돌아갔지만, 에트루리아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우스는 브루투스의 유해와 함께 로마로 개선했다. 브루투스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로마 여인들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사람들의 질시와 의심과 중상모략을 받게 마련이다. 발레리우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화정의 창시자 브루투스의 장렬한 죽음에 눈물을 흘린 로마 시민들은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살아남은 집정관 발레리우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우선 발레리우스가 네 마리의 백마를 몰고 개선식을 거행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긴 뒤의 개선식은 로물루스 이래 로마의 전통이었지만, 개선장군의 전차를 끄는 말을 네 마리 모두 백마로 한 것은 발레리우스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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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었다. 그가 엄청난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시민들에게는 그의 왕족 취향이 드러난 것처럼 여겨졌다. 둘째는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그의 웅장한 저택이었다. 이것도 역시 시민들에게는 왕의 궁전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브루투스의 죽음으로 집정관 자리 하나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음에도 발레리우스는 그 자리를 빨리 메우려 하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발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만족하지 않고 왕위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차린 발레리우스는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자기 저택을 부숴 버렸다. 그는 땅값이 싼 로마 성벽 근처에 소박한 집을 짓게 하고, 출입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볼 수 있게 하려고 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발레리우스는 민중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성싶은 법률을 차례로 제정했다. 왕정 시대에 왕이 관리했던 국고를 앞으로는 재정관이 관리하도록 규정한 법률도 그런 법률 가운데 하나였다. 정치와 군사에서는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도 국가 재정에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이 법률은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다. 또 하나는 로마 시민의 항소권을 규정한 법률이다. 이 법률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사법관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도 민회에 항소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인권을 중시한 이 법률은 후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중요한 법개념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발레리우스가 제정한 법률 중에는 여론에 영합한 나머지 양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도 없지 않았다. 그 전형적인 예가 "누구를 막론하고 왕위를 노린 자의 생명과 재산은 신들의 것이 된다."는 법률이다. 왕위에 야심을 품은 자를 죽이더라도, 피해자가 왕위를 노렸다는 증거만 있으면 가해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법률을 제정한 것은 발레리우스로서는 너무 경솔한 짓이었다. '증거만 있으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이런 경우에 그 증거가 어느 정도나 객관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단순한 의혹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증거가 될 위험도 없지 않다. 이 법률도 오랫동안 로마인을 속박하게 된다. 이런 법률을 차례로 제정한 뒤에야 비로소 발레리우스는 동료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민회를 소집했다. 선출된 것은 정절을 지켜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아버지였지만, 고령 때문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자마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빈 자리는 곧 메워졌지만, 이번에 새 집정관으로 선출된 호라티우스에게는 일을 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집정관은 항상 2명을 한꺼번에 선출하고, 임기 도중에 선출된 경우에도 임기 만료일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해에 제정된 몇 가지 법률 덕택에 이 법률의 입안자인 발레리우스의 인기는 계속 높아졌다. 사람들은 발레리우스를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공(푸블리카)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508년의 집정관 선거에서도 '푸블리콜라'는 거뜬히 재선되었다. 동료 집정관으로는 호라티우스가 재선되지 못하고, 티투스 루크레티우스가 뽑혔다. 푸블리콜라의 민심 회유책도 당시에는 필요했을 것이다. 공화정으로 이행한 직후의 로마에는 왕정 시대에는 없었던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이 단결하지 않았으면, 공화정도 이제 막 싹이 튼 단계에서 뿌리째 뽑혀 버렸을 게 분명하다. 우선, 이때까지 줄곧 강해지기만 하던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3대에 걸친 에트루리아계 왕들은 모두 로마에서 대규모 개발사업을 벌였고, 그에 따라 상공업이 발전했다. 로마에 와서 이 왕들에게 기술과 경제력을 제공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들의 지위와 영향력은 당연히 눈부시게 향상되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뀐 것은 농업과 목축업에만 종사하는 선주 로마인이 상공업을 독점한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에게 반발한 결과라고 해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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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에트루리아에 의존했던 타르퀴니우스 왕이 추방되자, 에트루리아계 로마인들의 입장도 미묘해졌을 게 분명하다. 브루투스가 원로원에 100명의 신흥계급 출신을 맞아들인 것도 이들을 로마에 묶어두기 위한 방책이었다. 왕을 추방한 것은 어디까지나 왕과 그 일족의 전횡 때문이고, 로마의 에트루리아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방책은 반은 성공했지만 반은 실패로 끝났다. 원로원 의석을 제공받을 만큼 유력하지 않은 에트루리아인이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와 줄곧 싸움만 하게 된 로마에서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타국에서 계속 사람들이 유입되기만 했던 로마는 이때 비로소 타국으로의 유출을 경험하게 된다. 기술과 경제력을 가진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의 유출은 로마의 국력을 저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대의 로마는 대규모 건설사업을 거의 추진하지 못했다. 국력의 저하는 인근 부족들에 대한 권위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라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와 군사적 동맹관계에 있었던 인근 부족들, 로마와 같은 라틴어를 사용하고 같은 신을 모시는 부족들도 자기들과 다른 정치체제로 바뀐데다 국력까지 떨어진 로마를 더 이상 동맹국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병력을 제공하여 동맹군을 결성하고 로마 왕이 그 동맹군을 지휘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지만, 앞으로는 왕이 아니라 집정관이 지휘를 맡는다는 말을 듣고 석연치 않았던 것도 그 이유일지 모른다. 인근 도시국가의 왕들이 임기가 1년 밖에 안되는 로마 집정관의 지휘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국력이 떨어진 로마는 이제 더 이상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신생국 로마는 동맹국과도 적대시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애당초 '라틴 동맹'도 약육강식의 시대가 낳은 산물에 불과했다. 국력이 떨어짐에 따라 전투에서도 좀처럼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로마는 거의 해마다 인근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공화정으로 바뀜으로써 생겨난 세 번째 문제는 에트루리아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 버린 것이었다. 쇠퇴기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당시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국력은 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양군의 군사장비 차이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에트루리아 전사들이 화려한 장비를 다루는 반면, 로마 병사들의 장비는 구리와 가죽이 고작이었다. 에트루리아를 상대로 싸울 때는 국력 외에 또 하나의 불리한 점이 있었다. 에트루리아 쪽에는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왕위에 앉히겠다는 대의 명분이 있었다. 그를 폭군으로 여긴 것은 로마인뿐이고,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보기에 타르퀴니우스는 신뢰할 만한 동맹자였다. 추방된 타르퀴니우스도 왕위를 탈환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기원전 509년부터 기원전 503년까지 여섯 해 동안,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는 집정관에 네 번 선출되었다. 집정관은 두 번 지낸 티투스 루크레티우스를 제외하면, 다른 집정관은 모두 재선에 실패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시행된 정책은 모두 푸블리콜라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푸블리콜라는 에트루리아인의 유출로 저하된 로마의 경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오스티아의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 판매를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이관하려 했다. 유통화폐가 없던 당시의 로마에서, 소금은 타국에서 물산을 수입할 때 화폐 대용으로 쓰였다. 따라서 푸블리콜라는 가장 중요한 생필품인 소금을 국유화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통화의 국유화를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고 수입의 확보가 선결문제였다. 하지만 소금 판매를 국유화함으로써 값이 오른 소금을 수입 대금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자 무역상들은 의욕이 떨어졌고 경제력 회복은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푸블리콜라는 무역상들에게 부과되고 있던 간접세를 경감했다. 그러자 이때까지 상인이 아니었던 사람들까지 무역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줄어든 간접세가 소금 판매 수입으로 상쇄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는 이제 에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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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인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농업국가로 되돌아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독자적인 기술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우대받은 이들 신흥 중산계급이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푸블리콜라는 타국인의 로마 이주에도 적극적이었다. 로마의 인근 부족들 중에서도 라틴족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신을 경배하는 라틴인끼리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힘도 가지고 있었다. 푸블리콜라는 이들에게 호소했다. 이 호소에 응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예는 5천 명이나 되는 일족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일 것이다. 푸블리콜라는 이들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과 거주지를 주고, 가문의 가부장인 아피우스에게는 원로원 의석을 주었다. 어제의 이민도 오늘부터는 로마의 지도층에 들어갈 수 있다는 곳을 보여준 이 사례는 인근 부족들의 로마 이주에 박차를 가했다. 이 정책은 에트루리아인의 유출로 생긴 구멍을 메우는 효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라틴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가져왔다. 그러나 에트루리아는 강적이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릎을 끓고 간청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의 도시국가인 타르퀴니아와 베이의 원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가 패배한 타르퀴니우스는 역시 에트루리아 연방에 속해 있는 클루시움(오늘날의 키우시)의 왕한테로 도망쳤다. 클루시움의 왕 포르센나는 타르퀴니우스를 왕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로마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번에는 원군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로 했다. 포르센나의 이름은 로마에서도 명군인 동시에 명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겁에 질린 로마인들 중에는 왕정으로 되돌아가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포르센나의 군대는 단숨에 남하해 왔다. 벌써 테베레강 서안에 있는 자니콜로 요새가 점령되어, 거기가 포르센나 군의 본부가 되었다. 첫 번째 전투는 테베레 강에 걸려 있는 다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에트루리아 쪽은 다리를 확보하고 싶어했다. 로마 쪽은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 결국에는 로마가 이겼고, 다리는 불태워졌다. 포르센나는 공격전에서 포위전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모든 배가 징발되었다. 그 배를 타고 테베레 강을 건넌 에트루리아군은 일곱 언덕을 둘러싼 로마 성벽을 따라 진을 쳤다. 테베레 강의 통행권도 에트루리아의 손에 넘어갔다. 남쪽에서 강을 거슬러 운반되고 있던 밀이 로마에 한 톨도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집정관 푸블리콜라는 적의 전력을 분산시킬 방법을 궁리했다. 포위된 로마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위장한 양치기들이 소떼와 양떼를 몰고 테베레 강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에스퀼리누스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손쉬운 약탈감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에트루리아군 쪽에 퍼졌다. 강 서안에 진을 치고 있던 병사들까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이 약탈에 합류했다. 적병의 동태를 파악한 푸블리콜라는 미리 세워둔 작전대로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 부대는 동쪽으로 나 있는 에스퀼리누스 성문에서 공격해 나갔다. 또 한 부대는 북쪽으로 나 있는 콜리나 성문에서 출격했다. 집정관 루크레티우스는 남쪽으로 나 있는 네비아 성문으로 병력을 이끌고 나갔다. 푸블리콜라 자신은 남동쪽으로 나 있는 카페나 성문으로 출격했다. 가축을 쫓아 다니는 데 열중해 있던 에트루리아군은 갑자기 뒤에서 공격을 받고 당황했다. 쫓는 쪽에서 쫓기는 쪽으로 처지가 바뀌어 버렸다. 이날의 혼란으로 포르센나가 입은 손실은 엄청났다. 그러나 포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로마에 비축되어 있던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로마에 무티우스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로마를 구하려면 포르센나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단독으로 결행하면 탈주병으로 여겨질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그는 원로원으로 달려가 두 집정관과 원로원의 허락을 얻어냈다. 무티우스는 단검 하나만 몸에 지닌 채 강을 헤엄쳐서 테베레 강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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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도착했다. 적진으로 잠입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왕에게 접근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포르센나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주고 있는 중이었다. 왕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무티우스는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왕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일반 병사가 아닌 에트루리아인은 로마인의 눈에는 모두 왕으로 보일 만큼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로마의 젊은이 무티우스는 돈을 건네주고 있는 사람이 포르센나 왕일 거라고 믿고, 그를 향해 단검과 함께 돌진해 갔다. 그를 죽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는 왕이 아니라 왕의 비서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붙잡힌 무티우스는 왕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가슴을 펴고 왕에게 말했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 이름은 가이우스 무티우스라 한다. 적을 죽이려다 애석하게도 실패했지만, 죽을 각오는 되어 있다. 운명을 감수하는 것은 로마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로마의 젊은이들은 단신에 대한 끝없는 투쟁을 선언한다. 내가 죽으면 또 다른 젊은이가 올 테고, 그 젊은이가 성공하지 못하면 또 다른 젊은이가 올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계속 될 것이다. 당신도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격분한 포르센나 왕은 고문을 해서라도 배후를 캐려 했지만, 무티우스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오직 겁쟁이만이 일신의 안녕을 염려하는 법이다!" 이렇게 외친 무티우스는 불타고 있는 횃불을 왼손으로 움켜잡고 그것을 제 오른손에 눌러댔다. 살이 타는 냄새가 주위에 자욱했다. 포르센나는 무티우스에게 말했다. "이제 되었다. 너는 나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너 자신에게 주었다. 너의 담대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내 백성들 중에도 너 같은 젊은이가 있다면 좋으련만... 너를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겠다. 자, 어서 떠나거라." 가이우스 무티우스는 그후 '왼손잡이 무티우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불에 타서 문드러진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의 어린이들은 눈을 빛내면서 이런 일화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들은 배워야 할 역사가 아직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영웅담을 즐길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에 비해 2천년 뒤에 태어난 우리는 배워야 할 역사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무미건조하게 역사를 암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포르센나가 제시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타르퀴니우스를 왕위에 복귀시킬 것, 또 하나는 작년 싸움에서 빼앗은 베이 영토를 반환할 것. 푸블리콜라는 두 가지 조건 가운데 첫 번째는 거절하고 두 번째는 받아들였다. 포르센나도 그것으로 만족하여, 마침내 화평이 이루어졌다. 에트루리아군은 테베레 강 서안의 진영을 떠나 클루시움으로 돌아갔다. 타르퀴니우스는 왕위 복귀의 끔이 다시 멀어진 것을 깨달았다. 이것으로 로마와 에트루리아 사이가 완전히 평화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포르센나 왕과의 화평은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했다. 그래도 로마에는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기원전 503년, 로마가 공화정이 된 지 6년이 지났을 때, 푸블리콜라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많던 재산도 없어져 장례식 비용조차 낼 수 없게된 발레리우스 가문을 위해, 로마인들은 모두들 조금씩 추렴하여 푸블리콜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브루투스가 죽었을 때처럼 로마 여인들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로마 공화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브루투스였고, 뿌리를 내린 사람은 푸블리콜라였다.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은 로마인 가운데 왕정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스에 시찰단 파견 로마인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는 로마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대해서만 기술하면 되었다. 범위를 넓힌다 해도 기껏해야 에트루리아 지방, 그것도 로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남부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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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리아 지방만 언급하면 충분했다. 당시에 로마의 일반 시민들은,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벌써 번영을 누리고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에 대해서는 이따금 찾아오는 상인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로마와 남부 이탈리아 사이에는 아직도 넓은 땅과 수많은 민족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말부터 기원전 5세기 전반에 이르는 공화정 초기, 로마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는 테베레 강 주변에서 하구까지 좁은 지역에 불과했다. 면적으로 치면 도쿄의 10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셈이다. 국경선이 오늘날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인 타란토와 시라쿠사는 로마의 세 배 내지 다섯 배의 세력권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로마의 열 배, 카르타고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지 300년이 지난 기원전 5세기 중엽에도 로마의 세력은 이 정도에 불과했다. 크게 확대한 지도가 아니면 영역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이 시절, 로마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선진국이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된다.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한 것이 아니라, 본토인 그리스의 도시국가, 특히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직접 접촉한 것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생겨난 여러 가지 문제가 일단 해결된 뒤, 로마는 쉴틈도 없이 주변 부족들을 상대로 방위전을 치러야 했다. 그 전쟁이 일단락된 기원전 5세기 중엽, 로마인은 처음으로 성문법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로마법은 말하자면 불문율의 집성이었고,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지배계급뿐이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법의 성문화를 요구했다. 법을 글로 표기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권리 획득은 흔히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로마 지배계급의 구심체인 원로원은 처음에는 이에 대해 반대했다. 귀족정치라고 불러도 좋은 공화정이 수립된 뒤 아직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기개는 왕성했고, 그들이 제일선에 서서 지킨 공화정 로마의 국경은 평화로왔다. 그러나 로마 민중의 유효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일종의 파업이라 할 수 있는 병역 거부가 그것이다. 해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힐 틈도 없을 만큼 잇따라 전쟁을 치러야 했던 로마에 이런 파업은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원로원은 성문법을 만들 것을 승인했다. 로마는 법치국가로서는 선진국인 그리스에 시찰단을 파견했다. 시찰단은 3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정부 요직을 맡은 경험자들로서, 로마의 유력 가문에 속하는 남자들이기도 했다. 3명의 로마인은 1년동안 그리스를 시찰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거리는 당시의 배로도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출발 날짜와 귀국 날짜를 밝혀주는 사료는 없지만, 그리스에 꼬박 1년 동안 머물렀다고 생각해도 좋다. 역사가 리비우스가 기술한 시찰단의 행선지는 아테네뿐이지만, 그들은 그리 넓지도 않은 그리스에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아테네에서 스파르타에 가려면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지만, 그래도 며칠밖에는 걸리지 않았으니까, 로마 시찰단은 스파르타도 방문했을게 분명하다. 아테네는 솔론(기원전 6세기의 아테네 정치가이며 현명한 입법자 - 역주)의 개혁으로 유명하지만, 스파르타에는 리쿠르고스(기원전 7세기경에 활동한 스파르타의 입법자 - 역주)의 개혁이 있었다. 이 시찰단의 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12표법'에 관해서는 나중에 기술하기로 하겠다. 여기서 편년식 기술은 잠시 중단하고,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이르러 로마가 비로소 접촉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접촉을 가진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그리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를 언급하지 않고는 로마를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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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명 로마보다 선진 민족이었던 그리스인은 로마의 시찰단을 맞이한 기원전 5세기 중엽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2000년 전후에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크레타섬에서 시작되었다. 본토 그리스보다 크레타 섬이 선진 문명인 이집트와 가까웠기 때문이리라.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문명은 대개 주변부에서 태어난다. 크레타 문명에 관해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노스 왕이 창설한 함대 덕분에 크레타 주변 해역의 항해가 안전해졌다. 미노스 왕은 함대를 이용하여 크레타 부근의 섬들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해적의 약탈에서 벗어나게 된 크레타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져 석조 저택까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크레타 문명의 전성기는 기원전 1700년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기원전 1350년경을 전후하여 에게 해의 주인공이었던 크레타 문명도 급속히 쇠퇴했다. 대지진 때문인지 본토 그리스인의 공격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기원전 1350년경에 크레타의 수도 크레노스가 파괴되었다. 우아하고 화려했던 크레타 문명의 만종이 되었다. 그후 크레타의 역사는 그리스 본토의 역사에 딸린 것으로 바뀐다. 그 옛날에 누렸던 영화의 흔적은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의 발굴로 오늘날에도 크레타 땅에서 볼 수 있다. 주변이 중심으로 바뀌면 다른 주변이 생겨난다. 그리스 본토에서도 남쪽에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 일대가 그리스 문명의 새로운 담당자가 되었다. 역사상 미케네 문명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 미케네 문명은 무인들이 지배하는 체제였던 것 같다. 그 무인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통하여 후세의 우리들에게도 친숙하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테살리아의 왕 아킬레우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 통틀어 아카이아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기원전 1250년 전후에 일어나 10년동안의 포위전을 거쳐 끝나는 트로이 원정의 주인공들이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유혹되어 트로이로 끌려간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도로 빼앗아오기 시작한 것이 트로이전쟁이라고 시인 호메로스는 노래하고 있다. 절세 미녀 헬레네를 둘러싼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리스 신들도 트로이 쪽과 그리스 쪽으로 나뉘어 응원하는 등,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라는 평가에 어울리는 유쾌한 서사시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스인이 무력에 의지하여 트로이의 부를 빼앗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라는 게 진상과 가까운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어쨌든 트로이 함락으로 개가를 올린 미케네 문명도 불과 반세기 뒤인 기원전 1200경에는 벌써 멸망하고 말았다. 역사를 즐기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10년 동안이나 집을 비우고 먼 트로이에서 전쟁놀이에 열중했으니, 그 동안 국내질서는 흐트러지고 국력도 쇠퇴하여 외래 민족에게 쉽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긴 한 것 같다.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산더미 같은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한 그리스군 총대장 아가멤논은 욕실에서 왕비와 왕비의 애인에게 살해당한다. 시인 호메로스는 승자들을 덮친 이런 참사를 트로이 쪽을 응원했던 신들의 분노 탓으로 돌리고 있다. 어쨌든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킨 것은 북쪽에서 그리스로 남하해온 도리아 민족이었다.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은 소아시아 서쪽 끝에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하여,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했지만, 이 미케네 문명도 기원전 1200년을 경계로 하여 그 모습을 감추었다. 미케네 문명의 담당자였던 이들이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는 등, 그야말로 철저히 배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도리아인의 파괴는 워낙 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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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기 때문에, 그후 400년 동안 그리스 전역은 완전히 침묵해 버린다.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800년까지의 이 암흑기를 그리스 역사에서는 '그리스의 중세'라고 부른다. 활발한 활동이 특색인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는 중간기로, 모든 것이 침체한 시기라는 뜻이다. 이 '중세'는 항상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안정기라고 해도 좋고, 후기는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는 시기다. 회복기에 들어서면, 아직 싹은 나지 않아도 흙 밑에서는 뿌리가 뻗어가는 법이다. 그리고 그리스 역사상 화려했던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청동기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야만적인 도리아인은 철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그러나 기원전 800년경에 그들의 '중세'로부터 탈출한다. '폴리스'라고 부르는 도시국가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도리아인이 건설한 스파르타와 도리아인의 침략을 받아 도망친 아카니아인이 건설한 아테네가 대표적인 폴리스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 폴리스의 탄생과 함께 그리스의 재생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현상은 해외에 대한 식민 활동이었다. 식민 활동은 늘어난 인구를 자국 안에서 부양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스는 테살리아 지방을 제외하면 비옥한 경작지가 별로 없다. 농경이나 목축보다 생산성이 높은 상공업을 시작하지 않고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다.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인은 그러나 아직 상공업 민족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코린트, 테베 같은 도시국가도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폴리스라는 작은 국가들이 분립한 상태는 좁은 땅을 둘러싸고 폴리스끼리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한다. 기원전 776년에 제1회 올림피아 경기가 열렸다. 4년에 한번씩 전투를 그만두고 올림피아 땅에 모여 체육대회를 즐겼다는 것은 그밖의 시기에는 노상 전투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폴리스들의 세력은 서로 막상막하여서 전투에 이겨도 당장 영토가 확장되지는 않았다. 자기 나라 안에서 생활물자를 얻을 수 없거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에게 남은 길은 해외로 '진출'하는 것뿐이었다. 이 시기의 식민 활동이 그리스의 한 지방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인 규모로 이루어진 것도 그리스에서는 식민 활동이 폴리스의 형성과 표리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의 식민 활동은 두 시기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제1차 식민 활동은 기원전 9세기 말부터 기원전 8세기 초까지 이루어졌고, 이 시기의 식민지는 오로지 소아시아 서해안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에게 해는 작은 섬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는 다도해라는 의미인데, 이 섬들을 따라 맞은편의 소아시아 연안으로 건너가서 거기에 자기네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당시의 그리스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도스 섬도 이 무렵부터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섬이 되었다. 소아시아의 서해안 일대, 즉 이오니아 지방이 탄생한 것이다. 크레타에서 미케네로 이동해온 그리스 문명의 중심은 아테네보다 먼저 이 이오니아 지방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호메로스도 역시 이 지방 출신이라고 한다. 오리엔트와 가까운 덕택인지 본토 그리스보다 먼저 부를 쌓았다. 부를 빨리 쌓는 수단은 이 시기에는 통상밖에 없었다. 통상이란 다른 문명과의 접촉이다. 접촉은 정보라는 형태에 의한 자극을 초래한다. 부는 그 자극을 다른 형태로 바꾸는 데 매우 편리하다. 그리스인의 제2차 식민 활동은 제1차 식민 활동에서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식민 범위는 에게 해 지역이 아니라 지중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번에는 그리스 본토만이 아니라 제1차 식민 활동의 무대였던 이오니아 지방의 여러 도시까지 이 식민 활동에 가담했다. 따라서 자국 안에서 먹고 살 수가 없거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이 식민 활동의 주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본래의 진취적 기질이 분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제2차 식민 활동의 무대로는 선주 민족이 원래 없는 지역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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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허약한 지역이 선택되었다. 현대의 모험기업을 연상시키는 활동이다.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인이 가장 활발하게 이주한 지역은 남부 이탈리아지만, 그들은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하는 남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동해안 일대에도 도시를 건설했다.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인은 역시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에서인지, 키프로스 섬에서 흑해에 이르는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제1차 식민 활동을 통해 에게 해는 그리스인의 바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제2차 식민 활동이 끝난 뒤에는 그리스인의 세계가 지중해 전역으로 넓어졌다. 해상에서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페니키아인의 이주로 건설된 카르타고뿐이었다. 단기간에 파상공격을 하는 것처럼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그리스인의 식민 활동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특히 제2차 식민 활동이 보여주는 활동 무대의 넓이다. 페니키아인도 식민 활동을 했지만, 기껏해야 아프리카 북해안에 카르타고를 건설하고 그 여파가 에스파냐에 미친 정도였고, 그리스인처럼 지중해 전역으로 퍼지지는 않았다. 호메로스 서사시 (오디세이)는 목마의 계략으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자 오디세우스가 그후 10년 동안 지중해를 표류하면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오디세우스가 표류한 지역은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트로이에서부터 서쪽 끝의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는 지중해 전역이다. 게다가 그가 표착한 땅은 대부분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제2차 식민 활동으로 그리스인이 이주한 지역 부근이다.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또 다른 서사시 (일리아드)의 무대가 된 땅을 발굴하여, 이 서사시가 단순히 시인의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실증했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에서 이야기한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표류지가 어디쯤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연구도 이미 이루어져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오디세이)도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당시의 그리스인에게 미지의 땅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호메로스가 살았던 기원전 8세기 당시에는 지중해 전역이 이미 그리스인의 시야에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강했던 그리스 민족의 진취적인 성향은 그들의 특질이기도 했다. 그들이 해외로 진출한 것은 호기심과 모험심이 낳은 열매였다. 그들의 이런 성향이야말로 모국과 식민지의 관계를 로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스인의 식민 활동에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두 번째 사항도 바로 그 점이다. 예를 들어,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 식민지의 쿠마와 더불어 아테네인이 건설한 도시를 기원으로 삼고 있다. 나폴리라는 이름도 그리스어로 '새로운 폴리스'를 뜻하는 '네아폴리스'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 나폴리에서는 고대에도 아테네적인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오니아적인 면조차도 전혀 없다. 모국과는 거의 관계를 갖지 않고 발전한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 남쪽, 구두 뒤축에서 발바닥으로 구부러지는 곳에 타란토라는 도시가 있다. 오늘날에는 이탈리아 최대의 제철소와 지중해로 열린 군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도시도 역시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스파르타인이 세운 식민도시 타렌툼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 타란토에도 스파르타를 연상시키는 것은 고대에도 전혀 없었다. 시칠리아 섬 동부에 있는 시라쿠사는 오늘날에는 고대 유적과 거기서 해마다 상연되는 고전극을 유명한 도시이지만, 고대에는 지중해에서 손꼽히는 도시로서 중요한 도시였다. 플라톤이 자주 방문했고, 아르키메데스를 낳은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이 시라쿠사도 코린트에서 이주해온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 시라쿠사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코린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버금가는 그리스의 유력한 폴리스다. 하지만 시라쿠사도 역시 모국인 코린트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이 세 도시를 비롯하여 그리스 식민지에 기원을 둔 도시들은 모두 모국과의 관계가 희박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네아폴리스의 발전에 아테네적인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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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타렌툼도 스파르타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계와 전혀 다른 생활방식을 택했다. 모국인 코린트를 훨씬 뛰어넘는 번영을 누린 시라쿠사이는 코린트보다 오히려 아테네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관계가 너무 깊은 나머지 전쟁까지 치렀다. 식민이라는 형태로 해외에 진출한 그리스인들은 모국에서 언어와 종교, 진취적인 기질과 독립에 대한 집착만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모국과 식민지의 이런 관계는 그리스와 로마를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로마는 그리스와는 정반대로 식민지와 모국 사이에 긴밀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에게 기원전 8세기에는 해외진출의 시대인 동시에 국내에서도 내실을 다진 시대였다. 그리스인의 활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하게 한 폴리스가 형성된 것이 바로 기원전 8세기였다. 그리고 그리스인 특유의 국가체제인 폴리스를 대표하는 것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아테네 아테네를 수도로 하는 지방은 면적이 2천 600평방킬로미터에 이르고, 경작지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바위투성이인 그리스에서는 비교적 넓은 편에 속한다. 아테네 근처에는 천연의 항구인 피레우스도 있어서,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지방이었다. 또한 그리스에 침입해 온 도리아인의 지배도 면했기 때문에, 아카이아인의 순수한 혈통도 상당히 보존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전설은 그레타 섬의 폭군 미노그를 타도한 테세우스를 이 아테네의 건국자로 삼고 있다. 신생국들이 모두 그렇듯이, 아테네의 정치체제도 초기에는 왕정이었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왕정이 귀족정치로 바뀐다. 귀족출신인 9명의 통령이 1년 임기로 행정과 군사와 제사를 담당하고, 그밖의 귀족들로 구성된 장로회의가 이들을 보좌했다. 자유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가 있었지만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기원전 7세기에 접어들자 이 귀족정치는 아테네의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다. 토지 소유에 경제적 기반을 둔 귀족 계급에 대해, 상공업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신흥 계급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이 자유시민 계층은 경제력을 획득했지만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들과는 반대로 좁은 토지밖에 소유하지 못했다. 빚에 시달릴 때가 많은 자작농 계급도 귀족에 대한 반발에 동조했다. '데모스'라고 불리는 이 시민들은 기원전 620년 무렵에 이루어진 법률의 성문화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귀족 계급은 불문법 시대에는 제멋대로 휘두를 수도 있었던 사법권을 잃었다. '데모스'의 불만은 이 정도의 개혁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이때 솔론의 등장으로 이들의 불만이 해소되는 것이다. 기원전 594년, 기성 지배층인 귀족들로부터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권한을 인정받은 그는 역사상 '솔론의 개혁'이라고 불리는 정치개혁에 착수했다. 솔론 자신은 점차 대두하고 있는 상공업자 계층에 속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빚에 시달리는 자작농 계층 출신도 아니었다. 넓은 토지를 가지고 아테네를 좌우해온 명문 귀족 출신이다. 그 역시 역사에 이따금 등장하는 선견지명과 실행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솔론은 우선 자작농들을 빚더미에서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여 그것을 법제화했다. 농민들의 빚은 크게 줄어들었고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이 채권자의 노예가 되는 종래의 제도도 폐지되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빚을 갚지 못할 경우에는 채권자의 노예가 되어 몸으로 때우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지만, 솔론이 이 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최초인 인권 존중의 사례가 되었다. 솔론은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데모스'의 급진파는 모든 사유지를 몰수하여 일단 국유화했다가 그것을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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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하자고 제안했지만, 솔론은 이 제안을 물리쳤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시민들에게는 타당한 명예를 주었다. 그들의 권리를 빼앗지도 않고, 새로운 권리를 덧붙이지도 않고." 그러나 솔론이 가장 주안점을 둔 개혁은 정치개혁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선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권리는 부동산에 비례한다고 규정했다. 출신 계급에 따라 참정권이 좌우되는 일은 그리하여 사라졌다. 왕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모나르키아'라고 부르고, 귀족정치는 소수 앨리트가 국정을 담당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크라티아'라고 부른다. 한편, 권력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비례하는 솔론의 제도는 인구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티모크라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금권정치'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수입의 다소가 권력의 다소로 이어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하면 참정권을 갖지 못했던 귀족정치에 비하면, 이는 상당히 발전한 정치체제였다. 혈통은 어쩔 수 없지만, 재산을 모으는 것은 재능과 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에는, 아니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평등이라는 이념도 당연히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평등으로 여겨지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농업 수익의 많고 적음에 비례하여 권력을 갖는다는 생각도 그리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토지 같은 부동산에 투자하여 재산 증식을 꾀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일반적인 경향이다. 솔론 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아테네 시민을 네 계급으로 나누었다. 수입이 많은 사람부터 차례로 제1계급, 제2계급, 제3계급으로 내려오고, 무산자인 시민은 제4계급으로 이룬다. 의무를 살펴보자. 제1계급과 제2계급에 속하는 시민은 자기 부담으로 군비와 군장을 갖추는 기병으로서 병역에 종사할 의무가 있었다. 제3계급에 속하는 시민들도 역시 군비와 군장은 자기 부담으로 갖추어야 했지만, 말까지 준비해야 하는 제1계급이나 제2계급보다는 경제적 부담이 가벼웠다. 중무장 보병으로서 병역에 종사하는 것이 이들에게 부과된 의무였다. 숫자상으로도 이 제3계급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고대 군대의 주력은 중무장 보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4계급에 속하는 자들은 경무장 보병이나 함대 승무원으로서 병역에 종사할 의무가 있었다. 의무에 따른 권리를 살펴본다. 정부 요직은 제1계급과 제2계급이 차지하고, 제3계급은 행정 관료를 맡고, 제4계급은 선거권을 갖되 피선거권은 갖지 못하도록 규정되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솔론의 개혁'이 아테네를 귀족정치에서 탈피시켜, 폴리스라는 민주적인 도시국가로 탈바꿈시킨 것이 분명하다. 아테네는 이 솔론에 의해 발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것은 개혁으로 힘을 얻은 사람들의 요구로 다시 한번 개혁을 강요당하는 숙명을 갖는다. '솔론의 개혁'도 이 숙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테네는 피레우스에 좋은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제1차 식민 활동으로 아테네인이 대거 이주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은 아테네보다 먼저 통상을 통해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동쪽에서 오는 이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다 솔론의 개혁으로, 귀족이 아니더라도 재산만 있으면 국정의 요직을 맡을 수도 있게 되었다. 솔론의 개혁이 농업 수입에 한정되어 있다 해도 그것은 재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 재력에 대한 아테네인의 사고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통상이 활발해짐에 따라, 아테네 시민들은 저축한 재력을 종전처럼 토지에 투자하기보다는 해운이나 무역에 투자하게 되었다. 원래 그리스 토지는 척박하기 때문에, 투자 효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창 번성하고 있는 해운이나 무역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동산을 모으기 시작한 시민들이 부동산을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에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얼마 동안은 아무도 솔론의 권위에 맞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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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내자 못해 문제는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솔론이 공직 생활에서 은퇴하자마자 불만이 터져나왔다. 이 폭발하는 힘을 질서정연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권력의 공백 상태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정부 상태, 즉 '아나르키아'다. 아테네 정치체제의 변화는 그야말로 정치 교과서 그 자체여서, 우리에게 정치체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큰 시사가 되지만, 이 무렵에는 아테네도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와 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나르키아 끝의 '티라니아', 즉 독재정치다. 무정부 상태의 혼란과 계속되는 권력투쟁에 지친 아테네 시민들은 질서만 회복된다면 그밖의 일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스스로 실현할 능력이 없는 그들은 한 사람에게 질서 회복의 임무를 맡겼다.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솔론과 마찬가지로 명문 귀족 출신이다. 다만 이 명문 귀족은 자기가 속해 있는 귀족 계급이 아니라 민주파라고 불리는 신흥 계급에 권력 기반을 두고 있었다. 상공업자로 구성된 신흥 계급이 토지 소유자인 기성 계급보다 경제발전에 민감하고, 경제가 발전하려면 정치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맨 처음 독재정치를 실시한 것은 기원전 561년이었지만, 그대는 반대 세력이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당장 그를 추방해 버렸다. 하지만 이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그는 15년 뒤인 기원전 546년에 이번에는 무력을 사용하여 아테네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에서 독재정치를 계속했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변천은 교과서대로 배워도 좋지만, 각 정치체제의 좋고 나쁨은 교과서대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20년 독재는 아테네에 평화와 질서를 주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례없는 번영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고고학 조사에서도, 바로 이 세대에 그때까지 지중해 세계의 도자기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코린트나 사모스, 밀레토스, 로도스 제품 대신 훌륭한 아티카제 도자기가 등장한 사실이 입증되어 있다. 적색이나 흑색을 주로 한 그림이 그려진 항아리로 유명한 아티카 도자기가 지중해의 고급 도자기 시장을 독점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대외정책도 이 아테네의 '경제시대'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 군사력의 주축을 해군에 두었다. 이어 에게 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몇몇 섬과 지역을 획득하는 대 성공했다. 살라미스와 델로스는 다시 아테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페이스스트라토스는 에게 해의 섬들과 이오니아 지방에도 세력권을 넓히고, 아테네가 지배할 수 없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나 리디아 왕국이나 페르시아 제국과는 우호관계를 수립하려고 애썼다. 또한 제2차 식민 시대에 별로 적극적이 아니었던 탓으로 다른 나라보다 뒤떨어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오늘날의 다르나넬스 해협) 근처에 중계지지를 만들었다. 흑해 주변 국가와의 통상을 진흥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국내에서는 광산업 진흥에도 힘을 쏟았다. 독재정치는 그러나 독재자의 재능이나 성격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아테네 시민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의 독재에 따랐지만, 그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된 그의 아들들의 독재까지는 참지 않았다. 기원전 510년, 아테네 귀족들은 스파르타의 후원을 얻어 독재정치를 타도했다. 독재정치를 무너뜨린 귀족들도, 이를 후원한 스파르타도, 독재정치를 타도한 뒤의 아테네에는 귀족정치가 부활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독재정치를 타도하는 데 앞장선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에 귀족정치를 부활시키는 것은 아테네의 현재 상황으로 보아 타당한 방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 밑에서 20년 동안 계속된 평화와 질서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아테네 시민의 경제력을 높여, 아테네 경제의 중심은 이제 분명히 토지에서 상공업으로 옮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 소유에 권력 기반을 둔 귀족들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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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등장시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처사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의 개혁을 부활시키는 데 머물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정치체제를 개혁"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개혁은 우선 행정개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도시국가 아테네의 영토인 아티카 일대를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수도 아테네와 항구 피레우스를 포함하는 제1지역, 해안지대 전역을 망라하는 제2지역, 그리고 내륙의 제3지역이다. 이 세 지역은 각각 열 개의 소구역으로 다시 나뉘었고, 소구역은 인구밀도에 따른 '데모'로 다시 나뉘었다. 아티카 전체에는 이 '데모'가 150개 내지 170개가 있었다고 한다. '데모'는 '구' 정도로 번역하면 알기 쉬울까. 이 '데모'가 도시국가 아테네의 공적 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이 개혁 이후로는 자기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에다 소속된 데모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테네 시민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알로페케 데모의 소프로니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가 된다. 소속된 가문이나 씨족을 나타내는 명칭은 완전히 사라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민주적'이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민주적이라고 일컫는 또 다른 까닭은 아테네 전역을 행정구로 분할한 이 개혁으로 귀족들의 소유지가 쪼개져, 결과적으로 귀족 계급의 권력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이 개혁은 순전히 행정적인 목적으로 국토를 분할한 사상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정치체제도 개혁했다. 솔론의 개혁이 '티모크라키아'로 불리는 반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생겨난 정치체제는 데모스(민중)에 의한 정치체제라는 의미에서 '메모크라티아'라고 불린다. 도시국가 아테네는 기원전 6세기 말에 이르러 문자 그대로 민주정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우선 민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민회에는 20세 이상의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참석할 권리를 갖는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로마와는 달리 한 사람이 한 표를 가졌다. 국가의 최고기관이 된 민회는 해마다 몇 차례 소집되었다. 전쟁에 대한 찬반을 결정하는 것도, 강화를 맺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의하는 것도 민회에서 이루어졌다. 타국과의 동맹관계에서부터 정부관리의 선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민회에서 결정되었다. 클레이테네스는 솔론의 개혁의 기둥이었던 4계급 제도는 남겨두었다. 그는 솔론의 시대처럼 농업 수입을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업종과는 관계없이 수입의 다소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상공업에 종사하는 계층의 정치적 발언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클레이테네스는 후세의 정부 부처와 비슷한 조직까지 창설했다. 오백인 회의라고 불러도 좋은 기관인데, 각 구에서 추첨으로 뽑힌 30세 이상의 시민으로 구성된다. 제비뽑기니까 출신 가문이나 재산이나 재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모두 500면으로 이루어진 이 기관이 실제 정무를 담당했다. 의장조차도 한 달에 몇 번 열리는 회의 때마다 추첨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클레이테네스는 솔론의 시대에는 1년 임기의 9면으로 구성되었던 정부관리를 한 사람 늘려서 10명으로 하고 새로 '스트라테고'라는 이름을 주었다. 전략을 뜻하는 영어 '스트레티지'의 어원이 된 말이다. '국가전략 담당관'이라고 불러도 좋은 이 관직에 취임할 사람은 해마다 민회에서 선출한다. 이것이 도시국가 아테네의 내각이 되었다. 클레이테네스가 실시한 마지막 개혁은 일종의 자체 정화제도인 '도편추방제'다. 아테네에서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써서 투표했기 때문에 '도편추방'이라고 부른다. 독재정치를 피하기 위해 이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민회는 해마다 투표를 해서 과반수의 찬성만 얻으면, 그 권위와 권력이 아테네에 위험하다고 간주되는 시민을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한 사람을 추방하는 데에는 6천 개의 도자기 파편이 필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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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방에는 그 시민의 명예를 더럽히는 의미는 전혀 없고, 도편추방을 당해도 별로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추방당한 당사자는 시민의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몰수당하지도 않았다. 단지 10년 동안 아테네에서 추방되어 국외에서 살아야 했을 뿐이다. 10년이 지나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스트라테고'에 뽑힐 수도 있었다. 요컨데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을 '도편추방'하여, 그 인물과 그를 옹호한 사람들에게 당분간 머리를 식힐 여유를 준다는 의미로 만든 것이 이 제도였다. 10년이라는 기간도 머리를 식히기에는 충분한 기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어쨌든 이 시기에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이 국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후세는 이것을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시민 개개인이 권력 행사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살펴보아도, 타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규모가 크고 중요한 국가에서 이런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한 것은 이 시기의 아테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아테네의 유권자 수, 즉 성인이 된 남자 시민의 수는 3만 내지 4만이었다고 한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거나 무역이나 그밖의 일로 해외에 나가기도 하여, 수도 아테네에서 열리는 민회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평상시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1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1만명이라 해도 대단한 숫자다. 그리스인 특유의 왕성한 독립정신이 토론을 좋아하는 성향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의사 진행도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1만 명이 모두 국정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수준 높은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점은 2천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으니까, 깊이 파고드는 것은 쓸데없는 헛수고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시대의 그리스인이 고안한 것으로서 민주주의에 버금갈 만큼 유명한 도편추방과 관련하여 유쾌한 에피소드 한 가지는 소개해 두고 싶다. 도편추방제가 만들어진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다. 해마다 열리는 도편추방 투표장에서 아테네 정계의 거물이기도 했던 아리스티데스에게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 사내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왔는지, 상대가 아리스티데스인 줄도 모르고 말을 건 모양이다. 사내는 도자기 파편을 내밀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글씨를 쓸 줄 몰라서 말입니다." 아리스티스는 그 사내한테 아리스티데스라는 인물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뇨. 나는 그 사람 얼굴도 모릅니다. 다만, 아리스테데스는 위대한 인물이라느니 정의의 사도라느니 하는 말을 하도 여기저기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까 진저리가 나서요."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내가 내민 도자기 파편에 자기 이름을 써서 돌려주었다. 그 해에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그런데 3년도 지나기 전에 다시 그는 아테네로 불려왔다. 페르시아 대군이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귀국한 아리스티데스가 총사령관인 테미스토클레스와 협력하여, 아테네가 앞장서서 싸운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테미스토클레스도 그후 도편 추방의 희생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 제도는 기원전 417년에 폐지되었다. 도편추방이 국익에 어긋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테네인들도 깨달았는지 모른다. 아테네에서는 아무리 무식하더라도 당시의 국적인 시민권만 있으면 권리를 완벽하게 인정받았지만, 시민권을 각지 않은 사람은 참정권을 완전히 봉쇄당했다. 아테네에 거주하는 비시민은 외국인과 노예다. 당시 아테네에는 일이나 그밖의 이유로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었지만, 이들의 대다수는 같은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의 종교를 믿고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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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네 시민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이들은 아테네 이외의 도시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부모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아테네 시민이어야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면 더욱 배타적으로 바뀌어, 부모가 모두 아테네 태생이 아니면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아테네만이 이런 경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폴리스 사회는 실제로는 뜻밖에도 배타적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아테네에 살아도, 아니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죽어도, 외국인은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경제나 문화 분야에서 이루어진 '자유화'를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려면 자연히 시민의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악법이라도 조국의 법률에 따르겠다고 말하면서, 도망치라는 권유도 물리치고 사약을 마셨다. 같은 철학자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고 재빨리 도망쳤다.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는 조국이었지만, 아테네 태생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법률을 위해 목숨을 버릴 의리는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도 로마는 그리스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이런 로마에 대해 그리스인인 플루타르코스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방식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외국인에게 자국민과 똑같은 세금을 물리면서도 피선거권은커녕 선거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오늘날에도 드물지 않다.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는 노예에 대한 처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의 노예는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노예인 채 평생을 마칠 운명이었다. 반대로 로마의 노예에게는 해방노예라는 제도가 있었다. 저축한 돈으로 자유를 사거나 오랫동안 노예로 일한 뒤 퇴직금처럼 자유를 얻는 제도다.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노예는 해방노예라고 불렸지만, 그 자식대에 이르면 로마의 자유민과 똑같은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 도시국가 아테네가 인류 역사상 처음인 민주정치를 확립하고, 그 정치체제로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 무렵,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였던 스파르타에서는 어떤 정치체제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을까. 정치체제는 단순한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정치체제를 선택하느냐는 어떤 생활방식을 선택하느냐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아테네를 선두로 하여 그리스의 도시국가 대부분이 민주정치 체제를 채택한 반면, 스파르타만은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바다로 열린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산을 여러 개 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내륙지방이다. 그래서 주민 구성도 건국 초기부터 아테네와는 달랐다. 기원전 1200년경에 남하해온 도리아 민족이 선주민을 정복하여 생긴 것이 스파르타다. 정복자인 도리아인은 선주민과 동화되지 않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스파르타만큼 확실히 분리되고, 또한 분리된 채 지속된 폴리스는 하나도 없다. 스파트타에서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차이는 권력의 유무 이전에 민족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우선, 정복자의 자손으로 현재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스파르타인이 있다. 스파르타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1만 명 남짓한 자유시민과 그 가족뿐이다. 이들은 도시 한복판에 모여 살고 있었다.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 스파르타인의 유일한 직업은 군인이었다. 참정권도 이들만이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계급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페리오이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도리아인도 아니고 선주민도 아니었다. 아마 정복자인 도리아 민족을 따라와서 이곳에 정착한 타지방 출신의 그리스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자유민이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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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참정권은 없다.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그들에게는 선거권도 없었다. 그러나 병역 의무는 주어졌다. 고대 국가에서는 병역에 종사하면 참정권도 주어지는 것이 시민권의 개념이었지만, 스파르타의 페리오이코이들은 일개 병졸로 병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직업 군인인 스파르타인이 갖는 권리와 차이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마지막 신분은 '헬로트'라고 부르는 농노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도리아인이 침략하기 전에 스파르타에 살았던 선주민이다. 그리스 청동기 문명의 주역이었던 이들도 철기를 가진 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뒤로는 비록 노예는 아니었지만 농노나 예농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는 헬로트 신세를 감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혼할 수 있는 권리 외에는 참정권이나 사유재산권, 재판권 등 시민이 누리는 권리를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시민의 의무인 병역조차 부과되지 않았다. 스파르타 시민이 소유한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 이들에게 인정된 유일한 직업이었다. 스파르타인과 페리오이코이와 헬로트의 인구 비율은 1대 7대 16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인구 비율이 스파르타의 모든 것을 규정했다. 스파르타인이 농업과 상공업을 피지배계급에게 맡기고 오직 군무에만 종사하는 쪽을 선택한 것은 전체의 24분의 1밖에 안되는 인구로 나머지를 지배해야 하는 상황이 낳은 방책이었을 것이다. 피지배자들 중에서도 특히 농노의 신분에 묶여 있던 헬로트들은 항상 불온한 상태에 있었다. 군사 대국으로 이름난 스파르타도 우선은 제 나라 백성부터 억압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그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성인 남자로 군무에 종사할 수 있는 나이인 20세부터 60세까지의 스파르타인은 대개 수천 명에 불과했고, 1만 명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소수 정예주의 스파르타의 이런 현실에서 생겨난 결과였다.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인이라 해도, 성년에 도달하자마자 민회에 참석하여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려면 3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30세 이상의 스파르타인으로 구성된 민회 외에 장로회의도 있었다. 민회에서 선출된 60세 이상의 시민 28명이 장로회의를 구성한다. 임기는 종신이다. 2명의 왕도 의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장로회의 구성원은 모두 30명이 된다. 군사와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왕은 스파르타의 두 명문 출신이 맡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한 명씩 교대로 왕위에 앉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이 동시에 왕 노릇을 하는 세습제 쌍두정치다. 따라서 한 명의 왕이 다스리는 군주정치라는 뜻을 가진 '모나르키아'가 아니라 두 군주가 지배하는 정치체제라는 의미에서 '디아르키아'라고 불렀다.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들이 아테네에서 확립되고 있던 민주정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에도 스파르타만은 이 정치체제를 계속 유지했다. 아니, 단순히 유지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리쿠르고스의 개혁으로 이 정치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스파르타적 성격의 급진화가 점점 더 진척되었다. 솔론의 개혁이 아테네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방향은 전혀 다르지만 리쿠르고스의 개혁이 스파르타의 성격을 결정했다. 개혁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실패하면 그 민족에 치명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성공해도 그 민족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그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결정지어 버리기 때문이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으로, 스파르타인의 모든 일상생활은 전보다 더한층 군무를 지상 목적으로 삼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장로들의 시험을 받는다. 건강하게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이 단계에서 결정된다. 건강하게 자랄 것 같지 않은 아기는 버림을 받거나 노예가 되었다. 건장한 전사로 자랄 것 같다고 판단된 아이는 여섯 살까지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이 허용된다. 일곱 살이 되자마자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전사 양성을 목적으로 치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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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진 일정에 따라 교육을 받는다. 물론 신체 단련이 주요 과목이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에서는 스파르타 선수가 빛나는 금메달이 아닌 빛나는 월계관을 쓰는 일이 많았을 게 분명하다. 스무살이 되면 병역이 시작된다. 이들은 60세가 될 때까지 현역 전사로 군무에 종사해야 한다. 결혼해도 30세까지는 공동생활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밤이 되면 다시 막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소년들을 위한 기숙사와 전사들을 위한 막사 건물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텐트를 치고 거기서 야영생활을 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에서는 30세가 넘어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하는 어른으로 인정받았고, 지붕과 벽이 있는 집에서 처자식과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도 30세 이상의 어엿한 시민한테만 허용되었다. 이 스파르타에서는 국정 참여와 병역을 제외하면 남녀가 완전히 평등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건간하고 튼튼한 체격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식사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건강한 자식을 낳기 위해서인 것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여인들은 엄격한 식이요법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단것이나 술이나 미식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체육 교육도 남자와 똑같이 받고, 이따금 열리는 경기대회에서 그 성과를 시험했다. 여기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여자는 결혼할 때 유리했다. 올림피아 경기에 여자가 참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면, 여자 부문에서도 스파르타 선수들이 단연 우세를 보였을 것이다. 훈련을 할 때나 경기대회에 참가할 때는 여자도 남자처럼 나체가 되어야 했다. 리쿠르고스는, 감추면 오히려 묘한 마음이 생긴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성생활조차도 건강한 신체를 가진 전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신자는 백안시되고, 남편이 전사하면 건강한 자식을 낳은 실적을 가진 미망인일수록 재혼이 장려되었다. 스파르타 여인들의 의무는 건강한 자식을 되도록 많이 낳는 것과 베짜기를 비롯한 집안일에 힘쓰는 것이었다. 남자도 소년 시절에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를 배울 뿐, 고상한 내용의 책을 읽는 것도 수준 높은 토론에 열중하는 것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과묵한 사람을 '라코니코'라고 묘사한다. 도시국가 스파르타가 있었던 지방을 라코니아라고 불렀으니까, '라코니코'는 '스파르타적'이라는 뜻이 된다. 고대 스파르타에서는 수다스러운 사람을 경멸했다. 집회에서 발언할 때도 간결하게 요점만 간추려 말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스파르타 전사들은 독서에 탐닉하는 것은 물론, 의문을 품거나 깊이 생각하는 것도 칭찬받지 못했다.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토론을 시작하여, 그 상대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던 소크라테스가 스파르타에 갔다면, 제자를 얻기도 전에 쫓겨났을 게 분명하다. 스파르타인의 미덕은 용맹과 복종과 애국심이었다. 스파르타를 이렇게 만든 리쿠르고스는 개혁이란 말로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개혁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쫓겨야만 비로소 개혁은 성공하고, 또한 영속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는 그때까지 스파르타에서도 유통되고 있던 금화와 은화를 폐지하고, 통화는 쇠로 만든 철화만 쓰기로 결정했다. 철제 화폐로 물건값을 주면, 타국 상인들이 스파르타와 교역하기를 꺼린다. 검소하고 성실하며 강건한 생활을 좌우명으로 삼는 생활에 불필요한 물건들도 스파르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소박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스파르타 안에서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헬로트들은 수확의 절반만 주인인 스파르타에게 주면 되기 때문에, 원래 스파르타인은 유복하지 않았지만, 철화를 사용하면 애써 저축할 마음도 사라진다. 또한 생활 수준을 아무리 낮게 억눌러도, 모드 똑같이 생활 수준이 낮으니까 질투심도 생기지 않는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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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나는 계급투쟁도 일어날 염려가 없다. 스파르타에 도둑이 없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줄곧 권력투쟁이 일어났지만, 스파르타에는 그것도 없어서 오랫동안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사력 증강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비록 수는 적지만 그 명성은 페르시아에까지 알려졌고, 그리스에서 정예부대라면 스파르타의 보병군단을 의미했다. 이 스파르타는 전사 외에는 아무것도 낳지 못했다. 철학도, 과학도, 문학도, 역사도, 건축도, 조각도 전혀 남기지 못했다. 스파르타식이라는 낱말을 남겼을 뿐이다. 스파르타는 그러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상 적국으로 상정한 아테네의 국력이 강해질수록, 스파르타도 라코니아의 산속에 틀어박혀 있는 데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타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스파르타는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이미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폴리스들을 모아서 '펠로폰네스 동맹'을 결성했다.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이 군사동맹에 참가하는 조건은 스파르타가 전쟁을 수행할 때 병력을 제공하고 민주정치가 아니라 귀족정치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해마다 공물을 바치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금화보다 병사를 더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자기네 방식과 다른 민주정치 체제를 가진 폴리스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스에는 폴리스가 150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기원전 500년을 전후한 이 시기에는 150개의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이 다른 폴리스들을 멀찌감치 떼어놓고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테네는 경제력으로, 스파르타는 군사력으로, 생활방식까지 상반된 양웅의 격돌이 일어났을 법도 한데, 이 시기에는 서로 충돌을 회피했다. 그리스 외부에서 강적이 침략해 왔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시기에 그리스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양쪽 다 망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고 전후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추적해보면, 전쟁을 치른 민족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역사 기술에 전쟁 묘사가 많은 까닭은 인류가 여전히 전쟁이라는 악에서 발을 못 빼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쟁이 역사 서술, 다시 말하면 인간 서술의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야기할 페르시아 전쟁도 그리스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좋은 소재'가 된다. 여기에는 로마인이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리스인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는 로마인을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페르시아 전쟁은, 격렬한 내분이 특징인 그리스 역사에서는 드물게 그리스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적과 맞서 싸운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 무렵, 오리엔트 전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다. 이 시대에는 이오니아 지방이라고도 불리는 소아시아 서해안과 그리스 본토 사이에 가로놓인 에게 해 일대가 견제 중심지였다. 페르시아는 번영하는 이 일대를 수중에 넣고 싶었다. 둘째는 종교적인 이유다.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덕의 화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섬기는 조로아스터교가 인간과 비슷한 덕밖에 갖지 못한 그리스 신들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월한 종교를 가진 민족이 열등한 종교를 가진 민족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페르시아의 왕은 덕이 높은 아후라 마즈다 신한테서 완전한 지배권을 부여받은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의 왕에 머물지 않고 '왕중왕'이 통치하는 정치체제에서 보면, 내분만 일삼고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민주정치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따라서 그리스인을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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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은 신의 뜻에 부합한다고 페르시아인들은 생각했다. 페르시아 전쟁은 경제적 이유로 일어난 경제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이유로 일어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우선 페르시아 가까운 소아시아 해안에서 불을 뿜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가 이 일대의 폴리스들에게 민주정치가 아닌 군주정치를 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오니아 지방은 그리스 본국보다 경제가 발전했고, 그래서 정치체제 개혁도 더 빨리 진행되어 아테네보다 먼저 민주정치를 실현했을 정도였다. 밀레토스를 비롯한 이오니아 지방의 폴리스들은 다리우스 왕의 강요에 당연히 반발했다. 밀레토스는 우선 군사력에서 그리스의 폴리스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잇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밀레토스의 왕은 스파르타의 왕을 만나 이렇게 설득하고 있다. "이오니아의 동포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 상태에 있음은 우리들 이오니아인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치욕이며 슬픔일 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인, 특히 그리스에서 최고의 위세를 가지고 있는 당신네 스파르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인들이 경배하는 신들의 이름으로 바라건대, 당신네와 같은 피를 가진 우리 이오니아인들을 굴종의 질곡으로부터 구해 주십시오." 아르고스와 교전중에 있었던 스파르타는 그러나 민주정치 체제에 호감을 갖지 않는 탓도 있어서, 이오니아인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이 호소에 응한 것은 그리스인들 중에서도 같은 아카이아 민족이라는 이유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아테네와 에우보이아(오늘날의 에비아섬)였다. 이 두 나라는 모두 합해서 25척의 배와 전투원을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도저히 페르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4년도 지나기 전에 이오니아 그리스인의 저항은 분쇄되고 말았다. 기원전 494년의 일이다. 이오니아 지방에서의 이 경험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었다. 그리스인의 도시를 공략하여 그들을 지배하려면, 오리엔트 민족들의 경우와는 달리 대군을 파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폴리스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교묘한 외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결국 공동보조를 취하지 못할 거라고 페르시아 왕은 확신했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왕은 전에 이오니아 지방을 지원한 두 나라에 육해군을 합쳐서 2만 5천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군대를 파견했다. 페르시아의 적은 에우보이아는 당장 약탈과 파괴를 당하고, 주민들은 노예로 팔렸다. 이어 아테네 공략에 나선 페르시아군은 아티카 지방의 동해안에 있는 마라톤 평원에 상륙한다.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아테네 전체가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었다. 당장 스파르타에 밀사를 파견하여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스파르타는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테네는 자력으로 방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테네에는 10명의 스트라테고(국가전략 담당관) 가운데 결단력이 풍부한 밀티아데스가 끼여 있었다. 그는 당장 1만 명의 중무장 보병군단을 편성하여, 이 군단을 이끌고 마라톤 평원으로 달려갔다. 거의 무방비 도시가 된 아테네는 바다 쪽에서 해군이 지키도록 조처해 놓았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밀티아데스는 전선이 좀 엷어지더라도 전선이 길이가 적군과 비슷해지도록 병사들을 길게 늘어 세우고, 좌우 양날개에 정예부대를 배치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전투는 밀티아데스가 예상한 대로 시작되어 끝났다. 아테네군은 중앙을 돌파당했지만, 좌우에서 페르시아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아테네를 공격하려던 페르시아 해군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페르시아군은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군 병사 하나가 아테네까지 달려가 마라톤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 에피소드가 근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의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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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군 병사의 수는 192명에 불과했다. 페르시아군의 손실은 좀더 많았던 모양이다. 페르시아군은 패배를 맛보고 퇴각했지만, 병력은 거의 손실도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전투의 승패가 갖는 의미는 정신적인 것이었다. 오리엔트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둔 페르시아군도 결코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스인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가 이대로 물러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고 승리한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대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다. 마라톤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었지만, 아테네에서는 앞으로의 전략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해 있었다. 두 파의 대립은 사고 방식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두 파를 이끄는 우두머리 사이의 경쟁의식에도 원인이 있었다. 온건파의 영수는 아리스티데스였다. 무지렁이 사내의 부탁을 받고 도자기 파편에 자기 이름을 써준 바로 그 사람이다. 강경파의 영수는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강경파의 생각은 언제나 온건파보다 명쾌한 법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생각도 명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군비를 증강하여 자력으로 아테네를 지키지는 자력방위론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아테네는 해군을 주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데스는 여기에 찬성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정적을 배제하기 위해, 아테네 정계의 관례에 따라 도편추방제를 활용했다. 도자기 파편을 6천 개나 모으지 않으면 효과가 없으니까, 당연히 누군가가 배후에서 공작하는 것이 예사였다. 민주정치 체제인 아테네에서 정적을 배제하고 싶을 때, 도편추방제는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되어 있었다. 아리스티데스 자신이 무지렁이 사내를 위해 도자기 파편에 자기 이름을 써주든 말든, 대세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도편추방으로 정적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테미스토클레스는 더 이상 번거로운 방해에 시달리지 않고, 자기가 확신하는 방향으로 아테네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광산에서 올리는 수익을 시민에게 분배했지만, 이 수익을 모두 국고에 넣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군비 증강을 위한 재원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아테네 조선업은 1년 사이에 삼단 갤리선을 200척이나 건조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아테네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앞질러, 지중해 세계에서 제일가는 해군력을 가진 국가로 변모했다. 마라톤 전투가 있은 지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 선왕 다리우스의 뜻을 이어받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친히 30만 대군과 1천 척의 군함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넌 육군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지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해군도 육군과 나란히 그리스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항로를 택했다. 아테네는 당장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추방당한 사람들을 다시 불러오고, 3년 전에 도편추방으로 쫓겨나 외국에 있던 아리스티데스도 귀국하여 정적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를 보좌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가 이렇게 많은 대군을 투입한 것은 페르시아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그리스의 폴리스들 사이에 반목을 부추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파르타조차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 전쟁은 이제 서로 다른 문명의 대결이었다. 국내에서는 복종을 미덕으로 여긴 스파르타인도 페르시아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거절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일어나면, 다른 폴리스들도 그 뒤를 따른다. 독립심이 왕성한 만큼 협동심이 부족한 그리스에서, 그리스인의 독립과 자유 수호를 기치로 내건 대동단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의 작전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세웠다. 그는 테살리아 평원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싸우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남하해 오는 페르시아군을 저지할 최초의 방어선을 그리스 중부의 산악지방에 있는 테르모필레의 비좁고 험준한 산길에 치기로 결정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와 4천 명의 펠로폰네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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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출신 병사가 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해군에 대해서는 아테네 해군을 주축으로 하는 그리스 연합함대가 에우보이아 곶에 매복하여 적을 기다리는 작전을 세웠다. 작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스 함대도 페르시아 해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스파르타에서 오기로 되어 있는 지원부대의 도착이 지연되었다. 그 동안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스파르타 병사들의 격렬한 저항을 예상하고, 쓸데없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티르모필레 돌파를 강행하지 않고, 페르시아 병사들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하여 산지를 우회시키는 작전으로 나왔다. 이 정예부대에게 스파르타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게 했다. 레오니다스 왕은 펠로폰네소스 출신 병사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다.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만으로 테르모필레를 사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력을 다해 싸운 스파르타 전사들을 찬양하여, 훗날 이 땅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새긴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국인들이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하라. 조국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바친 우리는 이 땅에 잠들어 있노라고. 스파르타 전사들의 명성을 후세에까지 전하게 된 슬프고도 영웅적인 에피소드다. 그러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의 희생이 허사는 아니었다. 스파르타인조차도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을 그리스 전체가 알았기 때문이다. 위기 앞에서의 공동전전은 이것으로 확고부동해졌다. 그러나 그리스 국토의 3분의 2는 이미 페르시아에 정복되어 버렸다.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하고 죽이고 불태우면서 남하를 계속하는 페르시아군 앞을 가로막는 그리스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테네까지 단숨에 쳐들어온 페르시아군은, 그러나 텅 빈 아테네에 입성하게 된다. 방어하는 병사도 없고, 도망치려고 우왕좌왕하는 아녀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성난 페르시아 병사들에게 파괴된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만이 텅 빈 아테네 상공을 뒤덮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이었다. 그리스 국토의 3분의 2는 잃었지만,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과 함대는 고스란히 남겨두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육지에서 강한 페르시아군을 무찌르려면 바다에서 승부를 거는 편이 한결 효과적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아테네 병사들이 수도 방위에 연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아테네 주민을 모조리 살라미스 섬으로 대피시켰다. 전투원을 가득 실은 함대를 살라미스 앞바다에 대기시켰다. 배 위에서는 불타는 아테네 시가지가 바라다보였고, 제 세상인 양 날뛰는 페르시아 병사들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아테네 병사들의 가슴은 터질 것 같은 사기로 가득 찼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것도 계산에 넣고 있었다. 너무나 쉽사리 아테네를 손에 넣은 것에 기분이 좋아진 페르시아 병사들이 왕명에 따라 바다 위의 아테네군에게 도전해올 때까지의 시간은 긴 것 같았지만, 실상은 짧았다. 그들을 맞아 싸우는 아테네군 중무장 보병과 해군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곶 위에서 페르시아군의 패배를 구경하게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전투는 불과 하루 만에 끝났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페르시아의 수사라는 도시까지 달아났고, 페르시아 함대는 에게 해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이듬해에 다시 설욕전을 걸어왔다. 아테네는 다시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에 따라 시가지를 텅 비우고, 해상에서 결전을 벌이는 작전을 택했다.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도 행동이 빨랐다.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왕이 지휘하는 5만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지나 남하해오는 페르시아군을 테베 근처의 플라타이아이 평원에서 맞아 싸웠다. 격전이었지만, 승리는 그리스군의 것이었다.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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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시아 병사들은 역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도망쳤다. 같은 해, 이번에는 그리스 쪽이 공격에 나섰다. 아테네 해군을 주축으로 편성된 그리스 연합함대는 에게 해를 지나 동쪽의 소아시아로 쳐들어갔다. 그리스군은 육지에서도 계속 승리했다. 바다에서는 아테네인이, 육지에서는 스파르타인이 주역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78년에 끝났다. 밀레토스와 에페수스, 그리고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고향이기도 한 할리카르나소스 같은 이오니아 도시들도 그리스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에게 해도 다시금 그리스인의 바다가 되었다. 패전국가 아테네 강적 페르시아는 패퇴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걱정거리가 사라졌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언젠가는 다시 쳐들어올 페르시아에 대비하여 항구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의 주도권은 당연히 아테네가 잡았다. 페르시아 전쟁을 결정지은 것은 아테네의 해군력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델로스 동맹에는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만이 아니라 에게 해의 섬들과 이오니아 지방의 폴리스들도 가담했기 때문에, 이 동맹은 200개나 되는 도시국가의 연합체가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가 얼마나 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본부로는 델로스 섬이 선정되었다. 이 섬에는 아폴로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어서, 그리스 민족에게는 국경을 초월한 경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델로스 동맹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다. 동맹 참가국들은 내정은 물론 외교에서도 완전한 자치권을 보유하기로 결정되었다. 의무는 각 폴리스의 국력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동맹의 주요 참가국인 아테네와 레스보스, 키오스, 사모스, 낙소스 같은 섬들의 폴리스는 선박과 전투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지만, 다른 폴리스들은 군사비만 부담하면 되었다. 각 폴리스에서 공출한 자금은 델로스섬의 아폴로 신전에 보관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동맹의 주도권과 동맹 함대의 최고 지휘권 및 자금 운용권은 모두 아테네가 장악했다. 이리하여 대규모 상비 해군을 갖추게 된 그리스의 제해권은 에게 해역에만 머물지 않고, 소아시아의 남해안 해역에서 키프로스 섬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자국 연안에만 묶여 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지중해의 동쪽 절반은 원래 바다에 강한 그리스인의 독무대가 된 셈이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도 협동심이 부족한 그리스의 성향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그토록 일치 단결했던 그리스인들은 그 정신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아테네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스파르타가 동맹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의 결성으로 패권을 확립한 아테네를 흘기면서, 자기네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뒤, 바다에서는 이렇게 아테네가 점점 강해지고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점점 강해져 갔다. 이 두 강대국의 적대관계는 기원전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47년 동안 냉전 상태로 계속된다. 군사 국가인 스파르타와는 달리 상공업 국가인 아테네에는 지극히 평화로운 시기가 될 터였다. 강적에 맞서기 위해 일치단결했던 그리스가 적을 타도한 직후에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분되었듯이, 온 나라가 일치단결하여 승리를 얻은 아테네에서도 정치 싸움이 재개되고 있었다. 싸움의 주인공들도 전과 다름없이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리스티데스였다. 이번에도 테미스토클레스의 생각은 명쾌했다. 적은 페르시아이고, 그 적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은 해군이며, 따라서 앞으로도 해군력을 계속 증강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가지가 고립되는 사태가 두 번 다시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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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바다로 도망치면, 언젠가는 이 방책도 효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 시가지와 항구 피레우스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방책을 생각해냈다. 아테네에서 피레우스까지의 안전한 통행을 확보하기 위해 길 양쪽을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는 방법이었다. 아테네의 활로는 바다에 있다고 테미스토클레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피레우스 항에 정박해 있는 해군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아테네와 피레우스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여기까지는 아테네 시민의 찬성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눈은 그러나 좀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테네의 적은 페르시아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스파르타와의 대결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가 획득한 패권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까지 뻗치려는 것이었다. 민주정치 체제를 수립하면 아테네가 후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은밀히 알림으로써,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고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폴리스들이 스파르타에 등을 돌리도록 부추겼다. 스파르타가 맹주로 있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해체를 노린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또한 스파르타 국내의 피지배계급인 농노 헬로트들에게도 민주정치 체제에서의 자유를 언뜻 보여주어, 지배계급에 대해 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국내에서도 스파르타의 힘을 무너뜨리려한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런 방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권력이 필요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의 최고 공로자로서 인기가 높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테네의 제4계급에 속하는 시민을 우대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재력은 없지만 페르시아 전쟁에서 전투원으로 활약한 이 시민들은 전쟁에서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한데다, 지휘관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테미스토클레스의 권력은 그야말로 반석 위에 놓이게 될 터였다. 이것이 아리스티데스가 이끄는 온건한 보수파를 자극했다. 아테네 보수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생각과 방식이 자기네가 속해 있는 계층의 이익에 어긋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아리스티데스를 영수로 하는 온건 보수파는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라는 적을 잊어버리고 우방인 스파르타를 적대시한다면서 비난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실각을 노린 그들은 당연히 도편추방제를 활용했다. 이번만은 아리스티데스도 누가 부탁하든 도자기 파편에 자기 이름을 써주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페르시아군을 격퇴한 지 불과 7년 뒤인 기원전 471년,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어기찬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래도 굽히지 않고 스파르타의 위험을 계속 경고했지만, 그가 외친 반스파르타주의는 아테네만이 아니라 다른 폴리스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파르타보다 오히려 테미스토클레스가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위험인물을 받아들이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살 곳을 찾지 못한 테미스토클레스는 결국 페르시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왕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고배를 마신 크세르크세스 왕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였지만, 망명해온 과거의 적장을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땅에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대우를 받았지만, 망명생활이 10년째로 접어든 기원전 460년에는 그 평온한 일상도 끝나게 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그에게 아테네 해군과 싸우러 가는 페르시아 해군을 지휘해 주지 않겠느냐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기를 곤경에서 구해준 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조국에 칼을 들이댈 수도 없었다. 일흔 살이 된 그는 독배를 마시고 자결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양립할 수 없고 두 폴리스의 대립이 언젠가는 불을 뿜으리라는 것을 40년 전에 내다본 인물의 생애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된 뒤 페르시아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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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10년 동안, 아테네는 온건 보수파가 지배했다. 보수파의 영수는 명성을 안은 채 은퇴한 아리스티데스의 뒤를 이어받은 키몬이었다. 그는 마라톤 전쟁의 승자인 밀티아데스의 아들이고, 그 자신도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실각한 뒤, 아테네는 오로지 반페르시아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경제적 위기에 빠져 있던 스파르타를 원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죽기 1년 전, 이 키몬도 도편추방을 당한다. 아테네에서 민중파가 다시 대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모스'들은 세력을 회복한 뒤에도 테미스토클레스를 다시 불러들이려고는 하지 않았다. 역시 10년의 공백은 너무 컸다. 아테네 민중파는 나이가 테미스토클레스의 절반밖에 안되는 젊은 지도자를 찾아냈다. 저 유명한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이다. 페리클레스 시대 민주정치를 움직이는 사람이 반드시 민주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아테네의 명문 귀족으로 태어난 페리클레스는 성격도 진정한 의미에서 귀족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보수파인 키몬이 도편추방으로 뒤에 등장한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1년 당시 30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키몬의 추방도 그가 배후에서 공작한 결과였을 것이다. 페리클레스가 정계에 등장한 것은 키몬이 추방된 직후였기 때문이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과는 반대 입장에 있는 계급에 의해 옹립된 그는 권력을 획득한 뒤에도 그 계급에 권력 기반을 두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최고 집행기관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10명의 국가 전략 담당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0명은 1년마다 민회에서 선출된다. 아테네에서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곧 국가전략 담당관에, 그 중에서도 특히 이 기관의 제일인자인 의장에 몇 년 동안 계속 선출된다는 뜻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이것을 실현했다. 왜 그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페리클레스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다져진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더욱 철저하게 민주화했다. 그때까지는 정부관리와 행정 및 군사 담당자를 민회에서 선거로 뽑았지만, 페리클레스는 재능과 경험이 중요한 군사와 재정 책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추첨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 모든 공무원에게는 공무에 종사하는 기간 동안 일당을 지불하기로 했다. 추첨과 일당 지급을 결합한 이 제도는 역사상 최초이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로서는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직접 민주주의의 사례가 되었다. 그때까지의 아테네에서도 이론적으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매일의 양식을 자기 힘으로 벌어야 하는 사람들은 설령 선거에서 뽑혔다 해도 실제로는 공직에 종사하기가 어려웠다. 공직은 모두 무보수였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피레우스 항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좁은 땅을 경작하는 가난한 자작농도, 아테네 해군의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수병도 명실공히 참정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런 무산자 계급까지 국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이 시기에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고비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주요한 오락장이었던 극장에 누구나 공짜로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입장료는 국고가 부담했다.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던 아크로폴리스를 전보다 더 아름답고 호화로운 신전과 극장으로 메우는 웅대한 재개발 사업에도 착수했다. 이런 일에 국민의 돈을 사용하는 데 대한 비판이 높았지만, 페리클레스는 어설픈 변명으로 발뺌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았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공사는 내 개인 재산으로 충당하도록 하겠다. 다만, 파르테논 신전 정면에 페리클레스라는 이름을 새겨두겠는데, 그것도 양해해 달라." 반대파는 입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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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수밖에 없었다. 파르테논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크로폴리스는 외국에서 온 나그네가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의 찬탄이 높아질수록 아테네 시민들의 긍지도 높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정계에 등장한 해부터 무려 30년 동안 거의 해마다 국가전략 담당관에 선출되었고 그 대부분은 의장직을 맡았다. 남의 성공에는 유독 질투심을 불태운 것이 아테네 시민이다. 또한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도편추방제가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권력자에게 양날의 칼이기도 한 이 제도를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3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한번도 이 제도에 발목을 잡힌 적이 없었다. 하는 일도 없고 능력도 없는 무위무능한 지도자라면, 버림은 받을지언정 실각하지는 않는다. 페리클레스는 무위무능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리스 역사상 민주정치 체제하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권력을 계속 장악한 사례는 오직 페리클레스가 있을 뿐이다. 그 자신이 민주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정치를 교묘히 운영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이라고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고, 한 역사가의 주장에 따르면 돈으로 표를 사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는 페리클레스였다. 그것은 그가 권력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뛰어난 연주자일수록 좋은 악기를 탐내는 것과 똑같은 심정으로, 강력한 권력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하나밖에 없었던 명기를 손에 넣은 페리클레스는 도대체 어떤 '음악'을 연주하려 했을까.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가 민중파 영수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페리클레스는 아리스티데스와 키몬으로 이어지는 보수파 노선을 배척하기는커녕 그대로 답습했다. 해군력을 이용하여 제해권을 유지하고, 그것을 통해 아테네의 시장을 확보하고 더욱 넓힘으로써 아테네의 경제력을 증강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나 스파르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동시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주장하다가 이루지 못한 정책도 계승했다. 페르시아를 숙적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스파르타를 가상 적국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바탕을 둔 스파르타 대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대결이 표면화하는 것을 피하면서도, 그 틈을 이용하여 스파르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서 테미스토클레스와 마찬가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페리클레스가 지도하는 아테네는 모든 분야에서 재능있는 인물을 우대했다. 시민권을 주지는 않았지만, '내수'로 그들에게 보답했다. 철학자도 역사가도 예술가도 모두 아테네를 지향했고, 아테네에서 인정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등용문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리스 철학이 아테네로 중심을 옮겨온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비록 해군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군사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적으로 그리스를 대표하는 폴리스가 되었다. 후세의 우리가 동경과 존경심을 가지고 입에 올리는 '그리스 문화'는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에 가져다준 30년의 평화를 정점으로 한 200년 남짓한 기간의 산물이다. 동시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말에 따르면 페리클레스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다른 나라의 제도를 흉내낸 것이 아니다. 남의 이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범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참여를 수호하는 정치체제, 그 이름을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이 정치체제에 있어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공적 생활에 봉사함으로써 주어지는 명예도 세인이 인정하는 그 사람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고, 출신 가문이나 성장 과정에 따라 주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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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아니다. 설령 빈곤 속에서 입신했더라도, 나라에 유익한 능력을 가졌다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길이 막히는 일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이 공사에 이바지할 길을 가졌으며, 또 사적인 생활에서도 나날이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의심이나 질투가 소용돌이치는 것까지도 자유라고 말할 만큼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나날이 수고를 잊게 해주는 교양과 오락을 만끽하고, 경기와 제전을 해마다 정해진 날에 개최하고, 주거도 쾌적하게 정돈하는 것이 중요함을 잊지 않는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상호간의 간격은 크다. 그들(스파르타인을 말함-역주)은 어릴 적부터 엄격한 훈련을 실시하여 용기를 함양하기에 힘쓰지만, 우리는 자유의 기풍 속에서 자라면서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물러나는 일이 없다. 우리는 시련을 대할 때에도 그들처럼 비인간적인 엄격한 훈련을 받은 뒤의 예정된 결과로써 대하지는 않는다. 우리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결단력으로 시련을 대한다. 우리가 발휘하는 용기는 관습에 얽매이고 법률에 규정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 개개인이 일상생활을 할 때 갖고 있는 각자의 행동원칙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질박함 속에 미를 사랑하며, 탐닉함이 없이 지를 존중한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지만, 이것은 가능성을 우지하기 위함일 뿐, 어리석게도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일신의 가난을 인정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지만,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함은 깊이 부끄러워한다. 우리는 사적인 이익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공적 이익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서 발휘된 능력은 공적 사업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자로 여겨지지 않고,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종합해서 말하면, 우리 아테네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테네의 시민이라는 명예와 경험과 자질을 종합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인격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실이라는 증거로, 우리의 이런 사고방식으로 구축된 국력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격조높고, 이론이 여지가 없는 정론이다. 자유주의자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2천 500년이 지나 인류는 진보하고 있을 터인데도, 20세기 말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페리클레스처럼 간결하고 명쾌하며 품위있는 연설을 할 수 있는 지도자를 과연 가지고 있을까.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저 멀리 로마에서 찾아와, 1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세 명의 로마인이 본 것은 바로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였다. 흔히 말하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는 기원전 460년부터 기원전 430년까지 30년 동안이다. 후진국 로마의 원로원 의원 세 명이 선진국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한 것은 기원전 453년부터 기원전 452년까지 1년 동안이라고 한다. 페리클레스 시대 말년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이 불을 뿜어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돌입하지만, 이것은 기원전 431년의 일이다. 로마인이 방문했을 때부터 2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또한 그 무렵부터는 반석 같았던 페리클레스의 권력에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페리클레스는 장수를 쏘려면 우선 말을 쏘라는 격언을 실천한 반대파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감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애원까지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것도 로마의 시찰단은 보지 못했다. 로마의 시찰단은 페리클레스의 정책이 구름 한 점 없는 상태로 순조롭게 시행되고 있던 시대의 아테네를 보았던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아테네인을 수족처럼 부려서 자기 생각을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던 페리클레스,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신상과도 비슷한 페리클레스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매료되어 아테네 민주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을테고, 자기 나라도 반드시 이런 체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타국인의 '학교'인 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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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활방식이 낳은 결과는 페르시아조차도 인정할 만큼 눈부신 번영과 강대한 힘이 되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는 이 아테네를 모방하지 않았다. 강대한 아테네도 항상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스파르타를 모방하지도 않았다. 쇠퇴기에 접어든 나라를 찾아가 거기에 나타난 결함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절정기에 있는 나라를 시찰하고도 그 나라를 흉내내지 않는 것은 보통 재주가 아니다. 학생들의 졸업여행이 아니라, 실무경험도 풍부하고 나이도 지긋한 원로원 의원 세 명이 시찰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이라는 이 시점에서, 그리스를 시찰한 이들 로마인은 그 접촉을 통해 모방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 세 명의 로마인이 그리스에서 1년 동안 머물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귀국한 뒤에는 무엇을 보고했는지를 전해주는 사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대의 로마를 누구보다도 자세히 기록한 리비우스조차도 "유명한 솔론 법을 필사하고 그리스 국가들의 현황과 법률 및 그 성립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시찰단이 파견되었다"고 썼을 뿐이다. 그들이 귀국한 뒤에 관해서는, 귀국한 세 사람을 포함한 열 명의 위원이 '12표법'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어쩌면 세 사람은 자료를 남겼지만 그게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이 침입했을 때, 로마는 불바다로 변화여 수많은 사료가 소실되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를 시찰한 로마인의 감상을 탐색할 방도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확실한 사료의 뒷받침이 없으면 다룰 수 없는 학자나 연구자와는 달리, 우리는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는 자유롭게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도 허용된다. 나는 로마가 그리스를 흉내내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방하지 않았다는 것도 결국 영향을 받은 게 되지 않을까. 관찰하고 통찰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시찰하였다면 별문제지만, 시찰단원으로 선발된 세 사람은 그 전후의 업적으로 보아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게 분명하다. 자유와 질서의 양립은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의 하나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발전이 없고, 질서가 없는 곳에서는 그 발전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어느 한쪽을 일으켜 세우면 다른 한쪽이 일어서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다. 이 두 가지 이념을 현실에서 양립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명제가 되어 왔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이라는 시점에서 이 두 나라를 시찰한 것은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유익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이 세 로마인의 입장에 섰을 때, 당시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어떻게 보였을까? 세제는 곧 군제라는 방식을 채택해온 로마인은 군사대국인 스파르타에 일종의 친근감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스파르타인이 중요시한 실질강건주의도 이보다 200년 뒤까지 실질강건을 모토로 삼은 로마인에게는 공감되는 바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 사회는 너무나 배타적이었다. 타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계급이 고착도어 있는 스파르타 사회는, 건국 초기부터 다른 부족과 융합하는 것이 예사였던 로마인에게는 이질적으로 보였을 게 분명하다. 또한 군사면에서도 스파르타는 군무에만 종사하는 병사 양성을 지상 목적으로 하는 반면, 로마는 병사가 보통 생활인이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종 로마에서도 미덕으로 여겨졌지만, 스파르타처럼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원칙은 아니었다. 스파르타인은 사유재산에 집착하는 것을 경멸했지만, 최초의 로마 법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다. 로마인은 스파르타만큼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스파르타만큼 양병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나라를 방위할 수 있다고 믿은 게 아닐까. 또한 스파르타인의 생활방식은 국방에는 적합하겠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발전에는 적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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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는 사실도 그들은 통찰한 것 같다. 스파르타에는 질서는 있어도 정신의 자유가 없었다. 반면에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의 교묘한 정치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자유와 질서가 균형있게 양립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일 뿐 아니라, 한때의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평민 계급이 현저하게 대두한 상태였다. 이들의 요구를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성문법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에 파견된 것이 그 세 명의 시찰단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의 로마는 클레이스테네스 시대의 아테네와 비슷한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아테네식 민주정치로 이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로마는 진보적인 로마사 전문가들이 유감스러워하는 바처럼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아테네에 1년 동안이나 체재한 세 명의 로마인은 페리클레스의 언동을 접하고 그것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탁월한 재능을 접할수록, 그만큼 비범한 인간은 드물다는 사실도 통감했던 게 아닐까. 이것을 통감할수록, 페리클레스만한 인물이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민주정치의 약점을 간파한 게 아닐까. 세 명의 로마인은 기원전 5세기 중엽의 이 시점에서는 20년 뒤에 찾아올 페리클레스의 죽음도 보지 못했고, 그가 죽은 뒤의 아테네를 파멸로 몰아넣게 된 중우정치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중엽의 아테네가 자유와 질서를 양립시킨 것은 페리클레스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었고,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페리클레스의 동시대인으로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쓰게 된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겉모습은 민주정치였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지배하는 나라." 투키디데스가 인식할 수 있었는데, 세 로마인이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항상 사물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법이다. 로마는 독재를 싫어하여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으로 이행한 지 아직 반세기밖에 지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온 사람이 독재에 민감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설령 그 독재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뛰어난 균형감각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독재정치의 결함은 그 독재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의 자질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인데,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인물은 무엇 때문인지 잇따라 등장하지 않는 법이다. 독재정치의 가장 큰 결함은 독재자가 잘못해도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데 있다. 세 명의 로마인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빛나는 아테네 민주정치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통찰할 게 아닐까. 전성기의 아테네를 시찰하고도, 그 아테네의 '법'인 정치체제를 모방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를 알고 난 뒤 이제 드디어 로마에도 질서를 중시하는 스파르타나 자유를 중시하는 아테네와 다르면서도 이 두 가지 이념을 양립시킬 수 있는 진보된 정치체제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고 쓰고 싶지만, 역사적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후에도 로마는 기원전 367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80년 동안이나 귀족과 평민의 결말을 내지 못한 채 동요를 계속했다. 그렇게 된 요인으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농경 민족인 로마인은 본디부터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인은 변혁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개혁이 불가피해져도 천천히 추진했다. 그 대신 일단 개혁하면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인에 비해 발전 속도는 느렸지만, 일단 발전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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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장기간에 걸쳐 발전을 지속할 수도 있었고, 쇠퇴시에 접어들어도 천천히 쇠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둘째, 로마에서는 귀족의 대결 태세가 강력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로마의 귀족계급은 아테네 귀족과는 달리 평민과 대결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요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평민들은 과두정치 아래서의 기회균등을 요구했지만, 과두정치 자체를 바꾸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자시네 대표한테 통치권을 주라고 요구했지만, 자기들 모두에게 통치권을 달라고는 요구하지 않았다. 기원전 509년, 왕정을 타도한 로마인은 두 번 다시 왕을 모시지 않는 자유인이 될 것을 드높이 선언하고, 공화정 국가로 재출발했다. 그후 얼마 동안은 왕정복고를 꾀하는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나 그를 지원하는 에트루리아인과 전투를 치르랴, 갓 태어난 공화정 로마를 이 기회에 먹이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인근 부족들과 싸우랴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이런 외적을 막아내기 위해, 그 동안 국내는 자연스럽게 거국일치 체제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마지막 왕과 왕자들은 망명지에서 객사했거나 전사하여, 왕의 계보는 단절되었다. 또한 인근 부족들도 로마군의 완강한 저항 앞에서 다시 얌전해졌다. 신생국 로마는 일단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외부의 위협이 사라진 대신, 공화정 로마는 큰 문제를 끌어안게 되었다. 그후 100년이 넘도록 로마를 양분하게 된 귀족과 평민의 대결이 그것이다. 보통은 왕정보다 발전한 정치체제로 여겨지는 공화정이 되었는데, 왜 왕정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런 계급투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이 두 가지 정치체제의 권력구조는 위와 같은 도표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왕은 민회에서 선출되고,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취임했으며, 임기는 종신이었다. 30년 내지 40년이나 왕위에 있으면, 원로원에 예속되어 있는 왕권의 독립성이 자연히 높아진다. 원로원은 왕에게 조언이나 권고를 하는 역할밖에는 갖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민회는 왕의 정책이나 군사 문제에 찬성표나 반대표를 던질 권리를 통해 왕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이 경우, 권력구조는 삼각 구조가 된다. 다리가 셋 달린 탁자가 뜻밖에 많은 것만 보아도, 삼각 구조가 안정성이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로마가 공화정이 된 뒤로는 한 명의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콘솔)이 등장했다. 재선이 허용되었다 해도, 집정관의 임기는 불과 1년이다. 독재를 막기 위해 인원도 두 명이고, 임기도 1년밖에 안되는 집정관이지만, 전에는 왕이 맡고 있던 일을 제사 외에는 모두 맡아야 하니까, 상당한 능력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만한 인재를 해마다 거르지 않고 두 명씩 제공할 수 있는 가문을 이끄는 가부장들의 모임인 원로원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집정관과 원로원의 간격은 해가 갈수록 점점 줄어들게 된다. 공화정을 떠받치고 있는 다리 셋 가운데 두 개가 서로 겹쳐서, 실제로는 둘이 합쳐진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민회는 전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삼각 구조에서 양립 구조로 바뀐 공화정 로마에서 그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다리가 두 개인 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는 왕정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불안정 요소를 국내에 끌어안는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공화정이 탄생한 직후, 온 나라가 일치단결하여 외적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10여 년은 로마의 평민계급에게 그들이 가진 힘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평민들이 참가하지 않으면, 공화정 로마는 쉴새없이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평민들은 그들의 직장인 농토와 공사현장이나 가게에서 오랫동안 떠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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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 반면에 귀족계급은 넓은 농토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일하지 않으면 당장 경제력이 떨어지는 형편은 아니다. 로마 귀족에 대한 평민들의 항쟁도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이런 경제적 불만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 어느날 병역 상한선인 예순 살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한 평민의 비참한 모습이 '포로 로마노' 광장에 모여 있는 군중의 눈길을 끌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다 찢어지고 몹시 초췌해 보였지만, 제멋대로 자란 머리와 수염에 반쯤 뒤덮인 얼굴은 거지 같지도 않고 노예 같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던지는 질문에 노인의 굳었던 입도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조국 로마를 지켰다. 한때는 백인대장까지 지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농토가 잇는 지역이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농토도 집도 불타 버리고, 불타지 않은 가축은 도둑맞았소. 그 재산을 다시 일구기 위해서는 빚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이자는 너무 비싸고, 수확은 예상 밖으로 적어서 빚을 갚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나는 법에 정해진 대로 채권자의 소유물이 되어, 로마 시민이면서도 노예보다 더 혹사당하는 농노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오." 이렇게 말한 노인은 누더기를 벗어 제 몸뚱이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그가 전사였음을 보여주는 칼자국 외에 채찍에 맞은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민중은 흥분했다. 무리를 이룬 그들은 '포로 로마노' 한켠에 있는 원로원 의사당으로 몰려갔다. 두 집정관은 설득으로 군중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들의 설득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원로원 회의가 소집되었지만, 원로원 의원들이 겁에 질려 집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회의를 열지도 못했다. 이같은 혁명 전야의 분위기에 뒤덮인 로마에 외적이 침입해 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천천이 대책을 세울 겨를도 없다.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인 세르비우스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평민과의 타협을 꾀한다. 어떤 사람도 로마 시민을 감금하거나 쇠사슬에 묶어서 로마 시민이 집정관의 소집에 응해 병역에 지원하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 군무를 수행하고 있는 로마 시민의 사유재산을 그 시민의 부재중에 팔거나 몰수해서는 아니된다. 평민들은 납득했다. 집정관의 소집에 응해 전투에 참가한 평민이 전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전투도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잇따라 일어난 다른 두 부족과의 전투에서도 로마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개선한 로마 병사들은 당연히 세르비우스의 포고문이 법제화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또다른 집정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그 포고문이 발표될 당시 의논을 받은 바도 없을뿐더러 내용에 찬성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법제화를 거부했다. 로마 집정관의 권한은 두 집정관이 합의하지 않으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원로원의 대다수도 군중이 몰려왔을 때의 두려움을 잊어버렸는지, 법적으로는 옳은 클라우디우스의 거부권에 동의했다. 민중은 분노했다. 다시 쳐들어온 외적과 싸우기 위해 집정관이 군대를 소집했지만, 평민은 한 사람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에스퀼리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에 틀어박혀 농성을 벌이면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었다. 원로원도 진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파업까지 결행하여 대결 자세를 분명히 한 평민계급에 대해, 귀족들도 대결파와 협상파로 나뉘어 토론을 거듭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가 이끄는 대결파가 우세한 가운데, 원로원은 태도를 결정했다. 독재관(딕타토르)을 옹립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독재관을 옹립한다는 것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는 뜻이다. 임기는 6개월밖에 안되지만, 그 기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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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도 독재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평소에는 집정관 두 명이 나누어 가졌던 권력을 독재관 한 사람에게 집중시켜, 우선 위기를 극복하는 일부터 처리하게 한 로마 공화정 특유의 제도다. 로마에서는 이미 기원전 501년에 사비니족을 상대로 싸울 때 독재관을 옹립한 선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비상사태는 기원전 501년 때와는 다르다. 독재관에게 부여된 과제는 외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이 임명하면 옹립할 수 있는 독재관은 협상파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대결파는 평민계급과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결파는 평민계급과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관에 임명된 것은 푸블리콜라(민중파)라는 별명까지 얻을 만큼 평민과 협조적이었던 초대 집성관 발레리우스의 친동생 발레리우스 마니우스였다. 평민의 파업을 풀기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평민들은 언덕에서 내려와, 독재관 발레리우스의 소집에 응했다. 당장 10개 군단이 편성되었다. 다른 민족에게 개방적이면서도 공동체 의식이 강한 로마인은 단결하여 싸우면 쉽게 승리를 거들 수 있었다. 이번의 전투도 승리로 끝났다. 임무를 마친 발레리우스는 독재관을 사임하고 두 집정관에게 임무를 반환한 뒤, 빚을 갚지 못한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법안이 민회에서 부결되었다. 세제와 군제와 선거제도를 일체회한 로마에서는 경제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많은 전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고, 그렇게 때문에 선거에서도 더 많은 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 제도에서는 귀족계급이 민회의 의결을 좌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당한 권리를 거부당했다고 생각한 평민의 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전보다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이번에는 일곱 언덕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몬테사크로 산에 틀어박혀 농성을 벌였다. 두 번째 파업이었다. 이런 상태를 계속 방치할 수는 없었다. 원로원을 아성으로 하는 귀족들도 근본적인 해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해결의 실마리를 끌어낸 것은 귀족들 가운데 협상파에 속하는 사람들과 평민계급의 온건파였다. 시간은 별로 없었다. 외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로마 내부를 분열시킨 이 계급투쟁의 소문은 인근 부족들은 물론 에트루리아인의 귀에까지 들어가 있었다. 기원전 494년, '성스러운 산'이라는 뜻의 몬테사크로 일대는 승리의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평민계급의 이익과 권리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전임 관직을 창설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트리부누스 플레비스'라고 불리는 이 관직은 '호민관'으로 번역되는데, 이 관직에 앉으려면 평민계급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호민관은 귀족계급이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민회가 아니라, 따로 구성된 평민 집회에서 선출된다. 처음에 호민관 정원은 두 명이었다. 호민관에게는 집정관이 내린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또한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마찬가지로 신분상의 면책특권도 인정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평민의 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평민계급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시킬 수도 있는 호민관 창설은 평민 쪽의 완전한 승리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이것은 참으로 교묘한 대처 방법이었다. 첫째, 집정관과 원로원은 앞으로는 두 명의 호민관하고만 교섭하면 된다. 단체교섭일 경우와 대표 두 명하고만 교섭할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차이는 분명해진다. 둘째, 호민관은 거부권을 갖지만, 전시에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로마는 평시에는 닫아두도록 규정된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힐 새가 없을 만큼, 거의 해마다 외적과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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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해온 나라다. 다시 말해서, 호민관이 자신의 최대 권리인 거부권을 행사 할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다는 뜻이다. 호민관 창설은 그래도 로마에 일시적이나마 국론 일치를 가져다주었다. 이 기회에 로마 원로원은 왕정 타도 이후 계속 악화된 인근 부족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애썼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인근 부족과 전투를 치른 것도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종교와 언어가 같은 인근 부족과 함께 군사동맹인 '라틴 동맹'을 재건했다. 그렇다고 애누스 신전의 문이 닫힌 것은 아니다. 라틴 국가들이 로마편으로 돌아오면, 그 바깥쪽에 있는 부족들이 새로운 적이 된다. 전투라면 연전연승은 아니더라도 로마군에게 우세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전쟁에 이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로마는 전투에 이긴 경우에도 상대 부족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대응하여 처리하기를 좋아한 로마니까 전부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패배자의 소유지 일부를 접수하여, 그 절반은 동맹국에 나누어주고 나머지 절반은 로마의 '공유지'로 보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공유지는 로마 시민에게 임대해 준다. 이 임대 공유지 배분 문제를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 사이에 투쟁이 다시 불붙은 것이다. 지난번 투쟁은 빚을 갚지 못한 평민의 신변 보호를 둘러싸고 일어나 호민관 창설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지만, 공유지 배분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악성 종양과도 같은 문제였다. 전쟁에 이기면 이길수록 새로 생겨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평민들은 공유지 임대가 귀족들한테 유리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항의했다. 귀족은 귀족대로 사유재산 존중법을 방패삼아, 평등으로 가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했다. 본래 농경 민족인 로마인, 그들에게 재산이라면 곧 토지를 의미했다. 이렇게 토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 땅이나 배분만 받으면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토지에는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있다. 평민들은 귀족한테는 비옥한 땅이 배분되고 자기네한테는 척박한 땅이 배분된다고 항의한 것이다. 이 '농지법'을 둘러싼 대림은 로마의 몸 속에서 자라나는 암이 되었다. 이 어려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무려 450년 뒤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을 정도다. 근본적인 해결이 지연된 것은 이 세대 로마인의 미덕에도 원인이 있었으니까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농지법을 둘러싸고 평민들은 집요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병역 소집에 응하지 않는 파업에 호소한 적도 있다. 소집에 응하긴 했지만 전쟁터에서 전투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적도 있다. 이것은 사형까지 당할수 있는 행위였다. 하지만 로마 평민의 약점은 단결력 부적이 아니라, 명예심이 너무 강한 데 있었다. 적이 국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만도 잊어버리고 병역에 지원했다. 아군이 고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전투 참가를 계속 거부하지 못하고 또 나가 싸워서 이겨 버린다. 귀족들이 자기네 권리에 안주하여 평민들한테만 희생을 강요하고 자기들은 희생을 치르기를 회피했다면, 평민의 불만도 대의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로마 귀족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의적인 의무-역주)의 표본 같았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밭을 갈면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킨킨나투스는 어느날 갑자기 독재관에 임명되었다는 통고를 받는다. 괭이를 버리고 지휘봉을 잡은 그는 국경을 침범한 외적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는 데 불과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킨킨나투스는 여섯 달 동안 앉아 있을 수 있는 독재관 자리를 열엿새 만에 반납하고, 다시 밭으로 돌아가 농부의 일상을 시작했다. 또한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일족이 모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파비우스 가문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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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강한 의무감을 실증하는 사례로 전해 내려온다. 역사에는 떠오르지 않는 사소한 사실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까, 전시에는 사라졌다가 외적이 쳐들어올 염려가 줄어들자마자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곤 했던 귀족과 평민의 투쟁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로마 평민의 힘은 계속 강해졌다. 이런 평민이 다음에 내놓은 요구가 바로 법률의 성문화였다. 법률이 말로 전해지는 불문율 영역에 머무르는 한, 법률을 말로 전하는 역할을 독점하고 있는 귀족계급에 유리하게 집행되기 쉽다. 법률을 누구나 읽을 수 있고 객관성을 가진 성문법 형태로 해야 한다는 평민의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요구가 타당한 만큼 귀족들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귀족들 가운데 협상파도 이 문제에서는 완전히 평민들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문법에서는 선진국인 그리스에 시찰단을 파견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아테네로 행차한 세 명의 로마인은 지금까지 기술한 로마의 상황을 짊어지고 출장을 떠난 셈이다. 이들 시찰단은 로마인, 특히 평민계급의 큰 기대를 받으며 로마를 떠났다. 평민들은 시찰단이 귀국할 때까지 1년 동안 귀족들과 휴전했을 정도였다. 1년 뒤, 귀국한 세 사람을 포함한 열 명의 위원이 성문법을 만들기 위한 '10인 위원회'(데켐비리)를 구성했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을 작성하는 작업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이 기관에는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었다. 마치 위원회 자체가 임기 제한이 없는 독재관이 된 것 같았다. 10인 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그리스를 시찰하고 온 세 사람이 아니라, 전부터 평민과의 대결 노선을 명확히 하고 있던 아피루스 클라우디아였다. 기원전 449년, '포로 로마노' 한켠에 한 항목씩 동판에 새겨진 '12표법'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잔뜩 기대하며 기다렸던 평민은 물론 협상파인 귀족들조차도 아연실색할 만한 것이었다. 새로 추가된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로마인의 대다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그리스 시찰이었느냐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부동산의 다소에 비례한 군역이라는 형태의 조세 부담과 참정권을 결부시킨 제도는 솔론의 개혁이었지만, 이것은 굳이 솔론한테 배우지 않아도 왕정 시대부터 이미 로마에 확립되어 있던 제도였다. 솔론 법을 발전시킨 클레이스테네스는 부동산을 동산으로 바꾸었지만, 농업 국가 로마는 상공업 국가인 아테네와는 상황이 다르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의 근거를 부동산이 아닌 동산에 두는 것은 로마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평민들도 동감이었을 것이다. 로마의 평민들이 요구한 것은 부동산을 동산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공정한 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2표법'은 이 점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부동산 배분과 더불어 평민의 가장 큰 관심사는 빚을 갚지 못했을 때 신변의 자유를 상실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자신의 몸을 빚의 담보로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지만, 이 문제도 약간 개정된 것에 그쳤다. 채무자가 빚을 기일 안에 갚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은 60일 동안 구류된다. 60일이 지나도 여전히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리거나 빚의 액수만큼 무보수로 일할 의무를 진다. 다만, 군무를 수행하는 동안은 예외로 한다는 것이 개정 내용이었다. 이래서는 거의 대부분이 이미 불문율로 되어 있었던 것을 성문화한 것에 불과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재판을 받은 뒤 민회에 항소할 수 있고, 민회가 부결하면 사형에는 처해지지 않는다는 법조문도 공화정이 탄생했을 당시에 생긴 법을 추인한 데 불과했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결혼을 금지한 법률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마 성문법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법은 모두 12조였기 때문에 '12표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에는 로마 법 전문가들도 3분의 1정도밖에 모른다고 한다. 그것은 평판이 너무 나빠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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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잇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인은 법률을 개정할 때 현행법을 고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부적당하거나 시대에 맞지 않게 된 법률도 그대로 놓아두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법조문을 새로 제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구법 가운데 신법에 어긋나는 부분은 자동적으로 효력을 상실한다. 이런 법률개정 방식은 꽤 매력적으로 보인다. 구법을 개정하는 방식이라면 과거로 시선이 가기 쉽지만, 신법을 만들면 현재와 미래만 보게 되기 때문이다. 12표법은 발표 당시부터 평판이 나빴다. 기대를 배신당한 평민계급은 다시 대결 태세를 분명히 했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12표법의 주도자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외적과 두 번 싸워서 두 번 다 패배를 맛본 것이다. 로마인은 패전 책임을 사령관 한 사람에게만 지우지 않는 게 전통이었다.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불만은 패배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어떤 행동 때문에 폭발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미모의 처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라는 로마의 명문 귀족에 속해 있지만 처녀는 평민이었다. 유능한 호민관의 딸이었지만, 그래도 평민은 평민이다. 12표법은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금하고 있었다. 결혼할 수 없는 상태에서 처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첩으로 삼거나 노예로 삼을 수밖에 없다. 첩으로 삼는 곳은 처녀의 거절로 실현되지 않았다. 아피우스는 부하를 시켜, 그녀는 자기 노예가 낳은 딸이라고 선언하게 했다. 노예의 자식은 노예가 된다. 노예의 자식은 부모의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아피우스는 이렇게 하여 사랑하는 처녀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일은 처녀의 아버지인 전직 호민관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틈에 결행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처녀의 아버지가 당장 로마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납치된 딸을 발견하자마자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자유의 몸으로 해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구나." 아버지가 움켜쥐고 있던 단검이 처녀의 가슴에 꽂혔다. 로마에 있던 평민만이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 있던 평민들까지 일제히 봉기했다. 귀족 아피우스의 전횡에 항의하여 모두 몬테사크로 산에 틀어박혔다. 귀족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이 이끌고 평민들과 힘겨루기를 하려던 아피루스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경한 보수주의자이긴 했지만 자존심도 강했던 아피우스는 재판에 회부되는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그 전날 밤 감옥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문법 제정이라는 명목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던 10인 위원회는 붕괴했다. 귀족계급은 평민들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도 평민의 승인을 얻지 않은 기관은 설치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사소한 반동이 단숨에 급진으로 치달은 한 가지 사례이기도 했다. 공화정 로마도 이 무렵에는 마침내 평민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계급투쟁에서 거둔 승리에 신이 난 평민들은 전쟁터에서도 역시 그랬다. 외적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도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의 평민계급은 군사적인 실적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은 셈이다. 페르시아 전쟁 후의 아테네 평민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데모스'가 국정을 맡겠다고 선언하고 실행했다 해도, 그게 오히려 역사의 흐름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때 만약 그렇게 했다면, 로마도 민주정치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로마에서는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의 귀족 로마의 귀족계급은 아테네의 귀족계급과는 달리, 신흥세력의 힘에 밀려 당장 과거의 유물이 될 만큼 허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확고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토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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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의존하는 힘이었다면, 언젠가는 그들도 아테네의 귀족계급과 같은 운명을 걸었을 게 분명하다. 로마의 귀족은 소유하는 토지 외에 또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에 '클리엔테스'라는 낱말이 있다. 이탈리아어로는 클리엔테, 영어로는 클라이언트의 어원이 되는 낱말이다. 영어 사전과 이탈리아어 사전에서는 이것을 각각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client-(1) (변호사 등의) 의뢰인 ; (2) (상점 등의) 고객, 단골 ; (3) (고대로마의 귀족에게 종속된) 예속 평민, 하인 ; (4) 부하, 졸개, 똘마니. cliente-(1) 단골, 고객, 손님, (변호사나 의사 등의 정해진) 의뢰인, 환자, 특별히 돌봐주는 사람 ' (2) (고대 로마에서) 특정한 귀족의 보호를 받는 평민 ; (3) 남의 심부름을 하는 자, 앞잡이. 이 '클리엔테스'와 '패트런'(후원자)의 어원인 '파트로네스'의 관계는 로마가 건국되었을 당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의 초대 왕에 즉위한 로물루스는 100명의 가부장을 소집하여 원로원을 창설했는데, 그 100명이 바로 파트로네스였고 최초의 귀족이었다는 것이다. 이 로마의 귀족은 왕 덕분에 귀족 축에 낀 것도 아니고, 하물며 푸른 피가 흐르고 있는 곳도 아니었다. 혈연이나 지연, 그밖의 연고로 이어져 있는 사람들을 이끄는 처지에 있었던 씨족장(우두머리)과 그의 가족이 로마의 귀족이었다. 다시 말해서 로물루스는 100명의 유력자를 소집하여 원로원을 창설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우두머리가 로마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을 때, 5천 명이나 되는 클리엔테스들도 함께 로마로 이주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앞서 말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평민계급에 대해 강경노선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로마에서 최대로 알려진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들이 배후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파비우스 가문의 일족은 전쟁터에서 모두 목숨을 바쳤지만, 이들 가운데 파비우스 가문의 직계에 속하는 귀족들은 306명밖에 안되고, 나머지 4천 명은 파비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다. 직접세에 해당하는 것은 부동산 소유의 많고 적음에 비례한 병력 제공이었기 때문에, 넓은 농지를 소유하는 대귀족에게는 많은 병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이것도 클리엔테스가 존재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에는 돈을 주고 용병을 사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 즉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귀족은 클리엔테스를 보호하고, 클리엔테스는 귀족의 보호를 받는다고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의 재정 상태가 나빠지면, 클리엔테스들이 공동으로 귀족을 도왔다. 반대로 클리엔테스 가운데 하나가 경제적 위기에 빠지면 귀족이 도왔다. 클리엔테스가 무슨 사업을 시작할 경우, 파트로네스는 동료 귀족들한테 부탁해서라도 그 사업이 성공하도록 힘써주었다. 귀족이 해적한테 붙잡혀 몸값이 필요해지면, 클리엔테스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몸값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다. 클리엔테스는 자식의 혼담이나 교육 문제, 취직 문제, 소송 문제까지도 파트로네스와 의논했고, 파트로네스는 그 문제 해결을 도와줄 의무가 있었다. 그 대신 파트로네스가 공직에 입후보하면, 그의 클리엔테스들은 모두 빠짐없이 선거 장소인 마르스 광장으로 달려간다. 로마 시민인 그들은 훌륭한 유권자였기 때문이다. 클리엔테스에 대한 파트로네스의 의무는 12표법에도 명시되었고, 여기에는 불평이 없었는지, 그것을 개정하는 신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파트로네스인 귀족 가문의 가부장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벼운 식사를 끝낸 뒤, 기다리고 있는 클리엔테스들과 면담하면서 아침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적인 행사가 되어 있었다. 이 면담을 끝낸 뒤, 다른 귀족을 만나기도 하고 원로원이나 관청으로 일하러 나가기도 한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강자와 약자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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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라기보다는 좀더 내밀한 관계였고, 양자 사이에 개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중시된 것은 무엇보다도 신의(피데스)였다. 배신은 최고의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이 재판에 회부된 경우에도, 다른 한쪽이 증언을 요구받는 일은 없었다. 위증은 로마에서도 죄가 되었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 위증했다가 벌을 받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아예 증언대에 서지 않았던 것이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이런 관계는 세습되었다. 훨씬 뒤의 일화지만,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이 막판에 이르렀을 무렵의 일이다.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보좌관인 라비엔누스가 폼페이우스 편에 붙기 위해 카이사르 곁을 떠났다. 폼페이우스 쪽은 이 소식에 기뻐 날뛰었지만, 라비엔누스는 정치적 신조 때문에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는 그 지방 일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이었다. 다시 말해서, 라비엔누스는 조상 대대로 폼페이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폼페이우스 쪽으로 간 것이다. 8년 동안이나 계속된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라미엔누스는 카이사르가 무장으로서 얼마나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가를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라는 두 영웅의 대결 결과도 남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클리엔테스의 신의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카이사르도 떠나간 라비엔누스의 짐을 꾸려서 보내준다. 그리고 그의 '배신'을 비난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비엔누스는 로마인으로서 행동했고, 카이사르도 역시 로마인으로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이 가지고 있던 힘의 기반은 토지보다는 인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적으로 열세인 귀족이 평민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귀족과 평민의 투쟁은 기성세력과 신흥세력의 대립이라는 도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로 맺어진 귀족-평민 세력과 그런 관계 밖에 있는 평민 사이의 투쟁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투쟁이 해결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은 여기에도 원인이 있다. 다만, 이런 종류의 관계는 강한 동아리 의식이 있어야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다. 동아리 의식은 배타적인 조직 안에서 키워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로마의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조금도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로마의 파트로네스들은 클리엔테스의 수를 늘리는데 열심이었다. 노예도 자유의 몸이 되면 해방노예라고 불린다. 물론 해방되자마자 당장에 옛주인의 클리엔테스가 된다. 해방노예도 자식대에 이르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으니까, 참정권을 가진 클리엔테스가 한 사람 탄생한 셈이 된다. 단지 이것뿐이라면 공직에 야심을 가진 자기 표를 늘리기 위해 열심히 클리엔테스를 늘렸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민권이 없는 사람한테까지 '클리엔테스 망'을 넓히는 결행은 이런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로마의 패권이 해외에까지 미치자, 귀족들은 로마인도 아니고 이탈리아인도 아닌, 즉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들까지도 자신의 클리엔테스로 만들고 싶어했다. 많은 점에서 개방적이었던 로마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얼핏 보기에 배타적인 클리엔테스 관계에 있었던 것은 매우 흥미롭다. 어쩌면 개개인이 확보한 귀속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적으로는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고대 로마의 공화정 시대를 특징짓는 이 클리엔테스를 해석할 때, 후원회원이나 후원자라는 의미도 덧붙이고 싶다. 귀족과 평민의 투쟁이 오래 계속된 세 번째 요인은 로마가 영토형 국가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로마는 해양국가인 아테네와는 달리, 육지생활을 주로 한 국가였다. 이것은 적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 국방을 위해서라도 적과 대결을 피하기가 어렵다. 로마인에게는 전투가 아테네인보다 훨씬 일상적인 일이었다.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프롤레타리'라고 부르고, 그 때문에 직접세인 군역을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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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받은 무산자 계급을 제외한 로마 시민은 모두 병사였다. 병사만큼 지휘관의 능력에 민감한 존재는 없다. 무능한 지휘관 밑에서는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게 된다. 또한 성년이 된 뒤 예순 살에 예비역을 면제받을 때까지 오랜 전쟁 경험을 통하여, 지휘관이 없는 군대는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공동체에는 유능한 지휘관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로마인은 평소부터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했다. 어느 집정관 선거에서, 평민들은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자리는 평민 출신자에게 할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귀족들은 국가의 최고 공직인 집정관 가운데 한 자리를 평민이 차지하면, 귀족과 평민의 힘이 대등해질 것을 우려했다. 귀족들은 집정관을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하다못해 2대 1이 되면 평민에 대해 우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투표 결과 귀족이 세 자리를 다 차지했다. 평민계급의 인재 부족을 평민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민계급의 인재 부족 문제도 서서히 해결되기 시작했다. 12표법이 제정된 지 불과 4년 뒤에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런 면에서의 개방도 평민계급의 인재 육성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가문과 성장기의 가정 환경은 교육제도가 충실하지 않은 시대의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49년부터 기원전 367년까지 80여 년 동안 로마는 줄곧 모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 제도를 폐지하고, 여섯 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타리스'(군사 담당관)로 바꾸기로 해보았다. 이것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의 최고 집행기관인 열 명의 '국가전략 담당관'을 연상시킨다. 두 명이 행사하고 있던 권력을 여섯 명으로 분산하면 과두 정치의 색깔이 엷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엉망이었다. 지휘계통을 통일할 필요에 쫓길 때마다 독재관을 임명하는 형편이었다. 나중에 이야기할 카밀루스처럼 다섯 번이나 독재관을 경험한 사람도 나왔다. 그런데 곧이어 로마는 위기를 맞이했고 이런 상태를 계속하는 사치는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변했지만, 기원전 404년에 결국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여 스파르타의 패권시대가 시작되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를 잃고 스파르타에도 패한 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기원전 399년에는 혼돈에 빠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했다. 후진국 로마에서는 '모색'이었지만, 선진국 그리스에서는 '혼돈'이었다. 켈트족의 침입 남유럽에서는 평원을 농사와 목축에 활용하고 바다에는 물건을 가득 실은 배들이 오가고 있던 시대, 북유럽은 아직도 울창한 삼림에 뒤덮여 있었다. 이 숲의 주민이 켈트족이다. 켈트족은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이고, 로마인은 그들을 갈리아인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아일랜드에만 남아 있지만, 고대에는 유럽의 가장 넓은 지역에 정착해 살았던 민족이다. 기원전 6세기가 다가올 무렵부터 켈트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꺼번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북쪽에서 일어난 파도가 남쪽과 동쪽과 서쪽으로 파급되듯, 가장 북쪽에 살고 있던 민족이 가까운 부족을 밀어내고, 밀려난 부족이 그 바깥쪽에 있는 부족을 밀어내는 형태로, 동쪽과 서쪽과 남쪽을 침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쪽으로 밀려난 켈트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밀라노에서 포 강 유역에 걸쳐 자리를 잡았다. 이탈리아에 처음 정착한 켈트족은 그러나 로마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로마와 그들 사이에는 아펜니노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인의 세력권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경제력과 기술력뿐 아니라 군사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로마는 에트루리아계 왕을 쫓아내고 공화정으로 이행한다. 이로써 로마는 에트루리아와 완전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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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계에 들어갔다. 로마가 이처럼 에트루리아를 적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에트루리아의 힘이 전보다 약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쇠퇴기에 접어든 에트루리아의 세력과 상승하는 로마의 세력이 이 시기에 교차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남부 이탈리아에 세력을 확립하고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들과 이탈리아 반도를 양분하는 세력이었던 에트루리아도 이 무렵에는 분명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언덕 위에 견고한 성채를 세우고 방어에 만전을 기했을 터인 에트루리아 도시들도 하나씩 격파되어, 로마의 세력권에 차례로 편입되었다. 에트루리아 도시들 사이의 동맹관계가 군사적으로는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적의 침입을 받은 도시에 병력을 지원하기는 했지만, 지휘계통이 하나도 통일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로마인은 다른 것을 희생하더라도 지휘계통을 통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마도 같은 라틴족끼리 병력을 지원하는 '라틴 동맹'을 활용했다는 점에서는 에트루리아의 병법과 비슷했다. 그러나 로마인은 병력의 주축이 되는 본대에는 로마 병사들을 포진시키고 좌우를 동맹국 병사에게 맡기는 진형을 취하는 한편, 전리품은 로마군과 동맹국 군대에 평등하게 분배하는 방침을 지키면서도, 최고사령관 자리만은 반드시 로마가 장악하는 방식으로 일관했다. 여러 측면에서 로마를 능가했던 에트루리아지만, 동맹국 사이의 협조와 지휘계통의 통일이라는 점에서는 로마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에트루리아의 세력권을 하나씩 무너뜨린 로마는 바로 그것 때문에 켈트족의 남하를 막고 있던 방파제를 스스로 파괴해 버린 꼴이 되었다. 기원전 396년, 로마는 마침내 에트루리아에서도 유력한 도시였던 베이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10년 동안이나 고생한 끝에 거둔 승리인 만큼 로마는 거국적으로 승리를 자축했지만, 그와 동시에 국내의 계급투쟁도 재개되었다. 로마는 타국과 전쟁이 시작되면 거국일치 체제가 되어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었다. 베이를 공략한 뒤에도 이 상례가 되풀이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이때는 평민측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베이를 로마와 함께 제2의 수도로 삼자는 제안이었다. 평민측이 내놓은 이 제안의 뒤에는 베이의 훌륭한 시가지에 대한 감탄도 있었지만, 로마에 머무르는 한 귀족파에게 눌릴 수밖에 없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귀족파는 여기에 반대했다. 귀족파 중에서도 특히 독재관으로서 10년 동안 계속된 베이 공략전에 마침표를 찍은 카밀루스가 제2수도를 로마와 병립시키자는 제안에 앞장서서 반대했다. 로마에는 신들이 살고 있고, 그 신들이 지켜주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로마가 있으며, 그 신들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제2수도 병립은 로마인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평민파도 강경했다. 베이야말로 자기네 본거지로 삼기에 안성마춤인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20킬로미터밖에 떨러져 있지 않고, 기술 민족인 에트루리아인의 도시답게 치열한 공방전이 끝난 뒤에도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시가지가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카밀루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베이 공략전의 가장 큰 공로자이기도 한 카밀루스의 반대는 똑같은 반대라도 무게가 달랐다. 평민측은 정면으로 공격하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베이 공략 후에 몰수한 전리품의 사용처가 투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카밀루스를 고발했다. 카밀루스는 공략 직전에 맹세한 것을 충실히 지켜서, 베이에서 몰수한 돈을 그리스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감사금으로 봉납했기 때문에 사용처가 '불분명'하지는 않았다. 카밀루스가 아무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 제멋대로 결정한 것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도편추방제가 없는 로마에서 정적을 배제하는데 가장 자주 쓰인 방법은 고발이다. 로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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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자들이 법전도 없는데 법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이런 고발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밀루스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독재관 임기는 끝났다. 이것은 면책특권도 소멸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카밀루스는 평범한 일개 시민에 불과했다. 평민측도 바로 이 시기를 노려서 그를 고발한 것이다. 카밀루스는 자신의 클리엔테스들 가운데 중요한 이들을 집으로 불러 고발 문제를 의논했다. 클리엔테스들은 벌금이라면 자기네한테 맡겨 달라고 했지만, 소송에 이길 만한 표는 모을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베이 공략전에 참전한 평민들은 사령관이었던 카밀루스를 존경하는 동시에 미워하기도 했다. 무장으로서 카밀루스의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추운 겨울철까지 야영생활을 시킨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까지 로마군은 여름에만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카밀루스는 베이를 단번에 공략하려고, 로마 병사들에게는 최초의 경험인 겨울철 전투를 강요했던 것이다. 승리의 기쁨이 가라앉으면 나쁜 인상만 남는 법. 평민들 사이에서 카밀루스의 평판은 나빠졌다.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망명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로마에서는 자진해서 국외로 나간 시민한테는 죄를 묻지 않기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밀루스는 클리엔테스들의 배웅을 받으며 한밤중에 몰래 로마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결석재판이 열려 1만 5천 아세나 되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이제 누구의 눈도 거리낄 필요가 없게 된 평민들은 모조리 베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 자리도 비어 있고, 병력 절반이 탈영한 상태의 로마에 불행이 닥쳐왔다. 기원전 390년 여름, 아펜니노 산맥을 넘은 켈트족은 진군하는 길목에 있는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켈트족 전사들의 용맹은 로마인한테도 전해져 있었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칼과 창이고, 가죽을 씌운 나무 방패에 구리 투구를 쓰고 있었다. 군대 안에서의 지위에 따라 투구에 깃털 장식을 다는 것이 관례였다. 군단은 기병과 보병 및 전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선 전차가 적진을 무너뜨린 뒤에 보병과 기병이 돌격하는 전술을 쓰고 있었다. 전사들 중에는 싸움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옷을 벗어던지고, 금목걸이와 팔찌만 찬 알몸으로 싸우는 무리도 있었다. 켈트족에게는 자기가 죽인 적병의 목을 잘라 말 목에 매다는 관습도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머리를 기름에 담가둔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손님에 대한 최고의 접대였다. 이런 민족이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겨냥하고 쳐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습격을 받은 에트루리아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클루시움은 로마에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로마도 제 발등에 불리 떨어진 꼴이라 지원군을 파병할 형편이 아니었다. 클루시움과 로마는 불과 12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적을 막아줄 산도 없고 강도 없다. 방파제가 될 수 있었던 베이는 로마인 자신이 멸망시켜 버렸다. 로마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방어전을 지휘하게 된 포필리오스 레나는 이런 말로 로마인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했다.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가 끝난 뒤에도 우리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번 적은 흉포한 짐승이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레나의 호소에 응하여 편성된 군단은 그러나 수도 적은데다 급조된 느낌을 면치 못했다. 기원전 390년 7월 18일, 로마군은 테베레 강 상류에서 맞이한 적에게 맥없이 패하고 말았다. 로마 패잔병은 개미새끼들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무방비 도시가 된 로마에 켈트족이 들어왔다.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군데군데에 입을 벌리고 있는 성문조차도 닫혀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일곱 달 동안 계속된 야만족의 로마 점령이 시작되었다. 거국적인 저항은 불가능하다고 로마인들은 판단했다. 청장년 남자들만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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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 농성하기로 결정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에 방어하기도 쉽지만, 가장 좁기 때문에 농성할 수 있는 인원도 제한되어 있었다. 캄피돌리오라고도 불리는 이 언덕 위에는 유피테르 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 몇 개와 거기에 딸린 건물밖에 없었다. 깎아지른 벼랑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있는 이 언덕은 방어에 적합할 뿐 아니라, 로마인에게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을 적에게 넘겨주면 로마도 끝장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농성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버림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원 의원도 나이가 많으면 여기에 낄 수 없었다. 농성할 사람으로 선정된 여자들도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 여자들은 운명에 맡겨졌다. 저항 없는 로마에서 켈트족은 잔학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지위나 성별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폭행하고 약탈하고 노예로 삼았다. 신전도, 원로원 의사당도, 저택도, 시장도 모조리 파괴되고 불태웠다. 남자들은 그 광경을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에게는 건국 이후 한번도 맛본 적이 없는 굴욕이었다. 적이 테베레 강 서안까지 쳐들어온 적은 있었다. 그러나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는 일곱 언덕과 '포로 로마노'는 한번도 적에게 짓밟힌 적이 없었다. 기원전 390년 여름에 쳐들어온 켈트족이 사상 처음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로마가 두 번째로 적에게 짓밟히기까지는 로마 제정 말기인 서기 410년에 역시 야만족인 서고트족이 침입할 때까지 800년을 기다려야 한다. 로마인이 가장 중시한 미덕은 명예였다. 켈트족의 침입은 로마인의 명예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 상처는 카피톨리누스 언덕까지 점거하려고 여러 번 강행된 적의 공격을 번번히 격퇴한 것쯤으로는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단을 새롭게 편성하여 로마를 탈환할 만한 힘을 가진 카밀루스는 로마인 스스로 쫓아낸 거나 다를 게 없었다. 농성하는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일곱 달이 지나고 있었다. 켈트족은 우수한 전사였지만 도시인이 아니었다는 게 로마에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로마를 점령했지만 도시 로마의 사용법은 알지 못했다. 시체를 상수도관에 던져넣었기 때문에 수돗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창고 불태우기를 너무 즐긴 나머지 곡물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시체를 방치해 두었기 때문인지,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여 켈트족 병사들까지 날마다 죽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도시 생활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서 농성하는 로마인도 정황을 타개해야 할 필요성에 쫓기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로마인이 먼저 켈트족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몸값을 낼 테니 로마에서 나가 달라는 것이 협상 조건이었다. 로마인으로서는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손에 넣은 켈트족은 7개월 동안 계속된 점령을 풀고 로마를 떠났다. 야만족이 떠난 뒤에 로마인이 맨 먼저 한 일은 카밀루스를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카밀루스는 망명지에서 조국의 참상을 상상하면서도, 공식적인 귀국 명령 없이는 돌아올 수 없는 신세였다. 카밀루스는 귀국 명령과 함께 독재관에 임명되었다는 통고도 받았다. 그가 독재관에 취임한 것은 두 번째였다. 카밀루스는 독재관의 권한으로 베이에 있던 평민들도 소집하여, 군단을 편성했다. 북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켈트족을 카밀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쫓아갔다. 그래서 조금은 원수를 갚은 모양이다. 하지만 켈트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받은 타격은 그 정도로는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평민들도 베이를 제2수도로 삼자고 강력하게 요구하지는 않게 되었다. 로마가 참사를 당한 것은 로마를 지키는 신들이 켈트족을 이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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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신들의 거처인 로마를 버리려고 한 로마인을 응징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로마를 버리면 더 이상 로마인이 아니라는 카밀루스의 말이 켈트족의 침입을 겪은 로마인의 마음 속에 강하게 남았다. 따라서 파괴된 로마의 재건과 로마 시민의 단결만이 문제라면, 켈트족의 침입으로 입은 상처도 오래지 않아 치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가 다시 일어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야만족 앞에 어이없이 굴복한 로마에 인근 부족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틴 동맹'도 공중분해되었다. 해체된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동맹국이 이 틈을 타소 로마를 멸망시키려 하는 적으로 돌변했다. 로마는 건국 이후 360년 만에, 공화정으로 바뀐 지 100여 년 만에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 되었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수립될 당시에도 왕정 시대의 동맹관계를 재평가해야 했지만, 그때는 정치체제를 바꾸거나 에트루리아의 세력에서 독립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390년 때처럼 야만족에게 패배했기 때문은 아니다. 어쨌든 켈트족의 로마 점령은 엄청난 큰 사건이었다. 그리스를 비롯하여 이웃 나라들도 로마인의 비참한 패배를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기원전 390년의 재기가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바뀌었을 때보다 어려워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로마가 아테네나 스파르타나 카르타고보다 더 강대해질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그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 로마 역사를 쓴 그리스의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입을 로마가 강대해지기 시작한 첫걸음으로 중시하고 있다. 밑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기어올라올 수밖에 없었지만, 밑바닥에 떨어진 채 올라오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민족도 적지 않다. 로마인은 기원전 390년에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로마인답게 느리면서도 착실하게 다시 기어올라온 것이다. 그리스의 쇠퇴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입은 로마인에게 철퇴를 가했지만, 그 이후의 로마를 이야기하다 보면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난 사람의 행동을 추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스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세 사람을 맞이한 기원전 5세기 중엽, 로마인은 스파르타를 모방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아테네를 모방해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 두 나라의 이점을 살리면서 결점을 최소한으로 억누를 수 있는지, 그 방책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여전히 귀족과 평민의 투쟁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80여 년의 모색 시대는 너무 긴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긴 세월이 아니었다. 그 동안 로마는 해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켈트족 침입은 로마인에게 조국의 힘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자각하게 해주었다. 그와 동시에 국력을 확실하게 키우는 길도 제시해 주었다. 기원전 390년 이후, 로마인에게는 자기들이 나아갈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활력을 낭비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로마인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한 직접적인 요인은 켈트족이 준 물질적인 피해와 불명예라는 형태의 정신적 피해였다. 하지만 그리스의 정세 변화도 로마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정면으로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전황이 아테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기원전 430년에 실각한 페리클레스가 이듬해인 기원전 429년에 아테네를 습격한 전염병으로 쓰러진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아테네에서는 과두정치파와 민주정치파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재개되어, 흔히 말하는 '중우정치' 시대로 돌입한다. 한마디로 중우정치 시대라 해도, 페리클레스 이후의 아테네에 인재가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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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것은 아니다.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등, 그 무렵 아테네 정치를 주름잡은 인물만 손꼽아 보아도 모두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페리클레스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무려 30년 동안 아테네 민중에게 국정은 자기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하는 데 성공했고, 도편추방에 발목이 잡히지도 않은 채 정국 안정을 실현하는 동시에 자기 뜻대로 아테네를 이끌어갈 수 있었으니, 그는 대단한 정치력의 소유자다.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했다. 중우정치는 인재 부족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 결함이 표면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따금 내 마음 속에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오르곤 한다. 그만큼 매력적인 배신자는 역사에 없다는 생각까지 드는 알키비아데스. 과두정치파의 선두에 서서 아테네에 억압정치를 편 당사자이지만,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자기를 야유한 희극을 웃으면서 본 크리티아스. 아테네를 버리고 마케도니아로 달아난 비극작가 아가톤. 페르시아 땅에서만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당시의 으뜸가는 논픽션 작가인 크세노폰. 방향을 잃고 헤맬 줄밖에 모르는 아테네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학문세계에 틀어박히는 길을 택한 플라톤. 이들은 모두 소크라테스가 좋아한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청년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삶을 추적하는 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도시국가 아테네의 빛과 그림자를 부각시키는 데 알맞은 주제라고 생각된다. 이 아테네에서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를 피고로 하는 재판이 열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쪽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존중하지 않고, 아테네 청년들에게 해독을 끼쳤다." '해독을 끼쳤다'는 주장에만 한정해서 보면, 소크라테스를 사형하는데 찬성표를 던진 아테네 시민의 생각은 후세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행동인으로서도 훌륭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지는 아테네를 제 몸으로 떠받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그들이 한 짓은 낙하 속도를 더욱 빨리 하는 데 이바지했을 뿐이었다. 이 현상은 시대 탓일까. 아니면 시대를 초월하여, 위대한 인물은 그 위대함 때문에 스스로는 생각하지도 않은 해독을 주위에 퍼뜨려 버리는 존재일까. 물론 이것은 소크라테스 개인의 책임은 아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위대한 인물을 사모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한 가지 면만 강하게 느끼고, 그것을 강조하는 삶으로 치닫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은 모든 사물에는 겉과 안의 양면이 있고, 겉과 안의 균형을 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 버린다. 하지만 이것도 위대한 인물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소크라테스의 사형에는 반대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덧붙여 말하면, 페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보다 스물다섯 살쯤 연상이었기 때문인지, 이 그리스 철학의 천재를 인정하고 친구로 사귀었지만, 심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인식 능력에 환상을 품지 않았던 정치적 인간과 그와는 반대로 민중의 인식 능력을 높이는데 평생을 바친 철학적 인간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기원전 4040년, 페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해군이 강한 나라로 자타가 인정해 온 아테네가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와 벌인 해전에서 불명예스럽게도 패배한 것이 27년이나 계속된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테네는 바다에서도 스파르타를 이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테네에 진주한 스파르타군은 패배자인 아테네에 민주정치를 버리고 과두정치로 이행할 것, 피레우스 항까지 가는 길을 지키고 있는 성벽을 철거할 것을 명령했다. 크세노폰은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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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파괴는 즐거운 축하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풍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마치 이날이 그리스에는 자유가 시작되는 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날'은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이 사라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스파르타의 패권 시대가 시작된 이날은 아테네만이 아니라 스파르타도, 아니 그리스 전체가 자유와 독립을 잃어버리는 시대의 첫날이었다. 아테네를 대신한 스파르타의 패권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힘이라고는 군사력밖에 갖고 있지 못했던 스파르타는, 강국이 될 수는 있었지만 패권 국가의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스파르타인의 생활양식은 밖으로 수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타국인은 '스파르타식'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억누르기에는 1만 명의 스파르타 전사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배타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전사의 수를 늘릴 수도 없었다. 기원전 371년에 스파르타는 패권을 잃고, 테베가 스파르타를 대신하여 패권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테베의 패권 시대도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동안 아테네는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국가로도 일급이었지만, 정치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리스를 이끌어갈 만한 세력은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폴리스의 영광스러운 역사는 마침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에 넘어갔다. 마케도니아는 왕정이기 때문에 도시국가는 아니다. 기원전 356년, 그 마케도니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난다. 로마가 그리스의 이같은 정세 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정보기관을 그리스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정보는 교역로를 통해 전해졌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는 델포이 신탁이라는 것이 있었다. 로마도 전황이 순조롭지 않을 때는 사절을 보내어 델포이 신탁을 듣곤 했다. 델포이 신전에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영검하다는 신탁을 청하기 위해, 민족을 불문하고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을 찾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델포이 신전은 아주 좋은 정보 교환소이기도 했다. 켈트족이 로마에 침입한 것을 그리스인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스 땅에서 폴리스가 스스로 무너진 과정도 로마인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든 스파르타든 폴리스적인 국가는 단명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로마인에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닐까. 로마인은 표면에 나타난 현상만 보는 사람들이 모방의 민족이라고 경멸할 만큼 다른 민족한테서 많은 것을 배운 민족이었다. 일어서는 로마 로마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특히 영국의 학자들은 로마인의 문제 추출 능력과 적절히 우선 순위를 매겨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이 세계의 지배자였던 시대에 키워진 정치 감각은 학자한테도 영향을 준 모양이다. 그 영국의 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390년 이후의 로마인이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은 과재였다. 로마인이 매긴 우선 순위에 따라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방위를 중시하면서 파괴된 로마를 재건할 것. 둘째, 로마에 등돌린 동맹 부족과 싸워서 국경 안전을 확보할 것. 셋째,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소하여 사회안정과 국론통일을 이룩할 것. 이 세 번째 과제는 필연적으로 정치개혁을 의미하게 되었다. 굴욕을 참으며 몸값을 내고 7개월 만에 겨우 켈트족을 철수시킨 로마는 우선 파괴된 시가지를 복구하는 일에 착수했다. 일곱 언덕을 빙 둘러싸는 성벽이 전과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다시 세워졌다. 전체 길이가 8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에는 베이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덩어리가 사용되었다. 이 돌덩어리는 한 변의 길이가 1미터를 넘는 것이었다. 성벽의 요소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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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감시용 망루를 쌓고, 파수병이 상주했다. 야만족인 만큼 켈트족의 행동을 파악하기 어렵고, 따라서 언제 또 쳐들어올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벽을 건설하는 일을 제외하면, 신전 재건보다는 하수도를 정비하는 일이 우선되었다. 그에 따라 포장되지 않았던 도로까지 포장되었다. 하수도 위에 네모꼴로 자른 납작한 돌을 뚜껑처럼 덮는 방식이었다. 물론 신전 복구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제2수도 문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로마는 신들이 사는 땅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로마는 공공시설 재건에 필요한 비용은 국고로 충당되지만, 민간 시설까지는 손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시설의 재건은 시민의 의욕에 맡겼다. 그런데 로마인의 재건 의욕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로마의 도시 만들기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그 무렵 로마를 방문한 그리스인에게 공공시설 구역과 주거지역의 구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혹평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파괴된 도시를 서둘러 재건한 결과였다. 로마가 아피아 가도와 클라우디우스 수도 등, 행정적 관점을 넘어서는 정략적인 건설사업에 착수한 것은 '켈트족 충격'이 완전히 가라앉은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견고한 방벽은 완성되었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있다. 로마는 다시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자리에 알맞은 인재를 얻게 되었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기원전 396년에 이미 베이를 공략한 실적을 가진 장군이었다. 켈트족에게 짓밟힌 뒤의 로마를 방위하는 어려운 책임을 그가 짊어지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카밀루스를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 카밀루스만큼 군대 지휘관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계속 차지하고, 또한 그 지위를 빛나는 업적으로 장식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섯 번이나 독재관에 지명되었고, 네 번이나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로물루스에 이어 로마의 두 번째 건국자로 칭송을 받았지만, 집정관에는 한번도 선출된 적이 없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정세를 반영한다. 원로원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로마의 평민계급은 두 명의 집정관보다 여섯 명의 군사 담당관을 선출하는 족을 지지했다. 집정관과 군사 담당관이 행사하는 권한에는 차이가 없지만, 행사하는 인원이 늘어나면 과두정치라도 조금은 민주적인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밀루스는 한번도 집정관이 되지 못했다. 로마가 다시 집정관 제도로 돌아간 것은 카밀루스가 죽기 1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정관 제도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다 해도, 두 명이 합의하지 않으면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집정관보다는 임기가 집정관의 절반인 여섯 달에 불과하더라도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독재관(딕타토르) 쪽이 카밀루스의 성격에는 더 어울렸을 것 같기도 하다. 카밀루스는 명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로마의 귀족 출신이었다. 공정하고 신의가 두텁고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 능력이 뛰어난 동시에 선견지명도 갖추고 있었다. 조직력과 실행력도 탁월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로마의 무력에 굴복한 패배자한테도 관대했고, 광신적인 성향은 전혀 없었다. 로마에 등돌린 동맹 부족들은 다시 로마의 우산 밑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카밀루스의 이런 성격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로마에 패배를 맛본 과거의 동맹자를 마치 배반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화해는 대화의 결과는 아니었다. 우선 전투에 이겨서 로마의 실력을 보여준 뒤에야 비로소 그는 평화적으로 패배자를 대했다. 다만, 그는 반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베이를 제2수도로 삼자고 주장하는 평민들에게 반대하다가 고발당해, 결국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일례에 불과하다.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전개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의 민회에서 선출되기 쉬운 유형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카밀루스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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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는 다행한 일이지만, 그가 활약한 시기인 기원전 410년부터 기원전 360년까지는 여섯 명의 군사 담당관이 두 명의 집정관을 대신하여 로마를 다스린 시기였다. 그래서 여섯 명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의견이 일치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도 없으면 그때마다 독재관을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는 상태였다. 그리고 독재관은 오로지 카밀루스가 맡았다. 독재관을 다섯 번이나 역임한 카밀루스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우선 적과 싸워서 지는 법이 없다는 말까지 들은 그의 전적일 것이다. 야만족에게 실컷 당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렸던 로마인은 그의 연전연승으로 자신감을 되찾았고, 한때 로마를 깔보았던 인근 부족들도 로마의 국경을 침범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카밀루스는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켈트족의 전술까지 모방했다. 로마군의 전투대형도 켈트족처럼 기동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었다. 전에는 군단이 커다란 직사각형으로 뭉쳐서 돌격하는 전법을 썼지만, 중대별로 작은 정사각형을 이루어 돌격하는 전법으로 바꾼 것이다. 또한 장기간의 전투에도 견딜 수 있도록, 생활의 편이성도 고려하여 튼튼하고 편안한 숙영지를 건설했다. 공격 방법도 전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법을 버리고, 적에 따라 유연하게 전술을 바꾸었다. 무기와 군장도 개량되었다. 그 결과가 네 번의 개선식이었다. 작은 전투에서 이긴 정도로는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네 번이나 되는 개선식은 뛰어난 승리를 의미했다. 로마인은 한번이라도 개선식을 올리면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로물루스에 뒤이어 제2의 건국자라는 말까지 들은 카밀루스였기에, 네 필의 백마를 몰고 개선식을 거행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켈트족 충격' 이후의 로마는 군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서는 카밀루스의 공적 덕분에 '충격'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인식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카밀루스보다 젊은 세대가 맡았다. 근본적인 개혁은 개혁을 담당하는 사람을 바꾸어야만 비로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정치 개혁 로마인이 생각하고 실시한 정치체제야말로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첫 번째 요인이라고 말한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아는 정체체제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왕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이다. 로마인에게 당신 나라의 정치체제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집정관한테만 조명을 비추면 왕정처럼 보인다. 원로원의 기능에만 주목하는 사람은 귀족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민회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민주정이라고 단언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로마의 정치체제는 이 세 가지를 짜맞춘 것이다. 세 종류의 정치체제를 혼합한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에 가까운 정치체제라고 생각한 사람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있다. 로마는 켈트족 침입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20년쯤 지나자 일단 응급조치는 끝났다. 어수선하긴 하지만 로마는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가 되었고, 외적도 물리쳐 국경도 우선은 안전해졌다. 카밀루스만한 인물이 이끄는데도 20년이 걸렸으니까, '켈트족 충격'이 로마에 얼마나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는가를 알 수 있다. 켈트족 충격은 로마를 열걸음, 아니 스무 걸음이나 후퇴시켰지만, 이것도 일단은 원래 위치로 돌이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존망의 위기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귀족과 평민의 싸움도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일단 위기가 사라지자 내분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시에는 일치단결하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국내에서의 투쟁이 재개되는 것이 공화정으로 이행했을 당시부터 되풀이된 로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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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이었다. 야만족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같은 국론 분열이었다. 이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는 것은 기원전 390년의 불행을 경험한 로마인에게는 더 이상 허용될 수 없었다. 아니, 로마인 스스로가 그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80년 전에 '12표법'을 만들었을 무렵의 로마인과는 달리, 기원전 4세기 전반의 로마인은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제반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그리스 땅에서 폴리스가 쇠퇴했다. 이것을 보고, 평민과는 대결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완고한 보수파도 스파르타적인 배타성의 해독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자기네 권리만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평민층도 아테네적인 과도함의 해독을 배웠다. 둘째, 평민계급의 힘이 커졌다. 그것도 양적인 성장이 아니라 질적인 향상이었다. 기원전 445년에 이미 '해금'되었던 귀족과 평민의 결혼도 이 무렵에는 분명한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민계급에서도 인재가 배출되게 한 것은 카밀루스의 공적이기도 하다. 독재관은 기병장관이라는 칭호를 갖는 부관을 임명할 수 있다. 카밀루스가 발탁한 평민 출신 무장들은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고, 군단을 이끄는 것과 국정을 이끄는 것을 동일시한 그 당시에는 전쟁터에서의 능력 발휘는 자연스럽게 국정에서의 능력 발휘로 이어졌다. 평화주의자라는 인상이 강한 페리클레스도 전쟁이 일어나면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군대를 지휘했다. 군사전략은 곧 정략이기도 하다. 아니, 정략이 아니면 안된다. 기원전 367년, 로마 역사상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 법'이 성립 되었다. 이 법은 우선 여섯 명의 군사 담당관 제도를 폐지하고, 다시 두 명의 집정관 제도로 돌아갈 것을 규정했다. 로마는 앞으로도 과두정치, 즉 소수 지도체제로 해나갈 것임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그리고 공화국 정부의 모든 요직을 평민 출신한테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깊은 통찰력에 뒷받침된 현명한 결단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을 평민으로 하자고 요구한 예가 보여주듯, 지금까지 평민들이 원하고 있었던 것은 국가 요직을 귀족과 평민이 분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리키니우스 법'을 입안한 평민 출신의 리키니우스와 그 생각을 법제화하는 데 찬성표를 던진 귀족들은 계급별 분배가 아니라 전면 개방이라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관직을 귀족과 평민에게 분배한다면, 우선 기회균등에 어긋난다. 차별을 폐지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조치가 거꾸로 차별을 정착시키는 결과가 된다. 게다가 이런 것은 일단 양분되면 양분된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다. 두 파로 나뉜 이익대표가 항상 대립하면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국가 전체의 힘을 유효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정치개혁의 명분에도 걸맞지 않다. 또한 그것은 투쟁의 불씨를 영원히 몸 속에 끌어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기원전 367년 당시의 로마는 전면 개방을 택했다. 국가 요직을 전면 개방하면, 완전한 자유경쟁이 된다. 선거 결과, 집정관은 둘 다 귀족이 될 수도 있고, 두 자리를 모두 평민이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니까 어느 쪽도 불평할 수가 없다. 이 선택의 가장 큰 이점은 이익대표제도를 해소해 버린 데 있었다. 그것은 '리키니우스 법'을 채택한 지 몇 년 뒤에 성립된 법률로 완성되었다. 중요 공직을 경험한 사람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원로원 의석을 취득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한 법률이다. 평민계급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임무인 호민관조차도 퇴임한 뒤에는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다. 노동조합장이 퇴임한 뒤에 그 회사의 중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세례를 받은 오늘날의 역사학자들 중에도, 이 '원로원 개방' 결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호민관까지 평범한 인물로 만들어 체제 쪽에 흡수하려 한 작태이고, 아테네인이 민주정치를 실현한 반면에 그러지 못한 로마인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낮았는가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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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실례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가하지 않는다. 경험과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선거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기관은 공화정 체제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기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년마다 선거로 교체되는 집행기관을 떠받치려면, 선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관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을 기원전 4세기 중엽에 귀족계급의 아성에서 벗어났다. 원로원 의원에게는 출신 가문도 성장기의 교육도 문제삼지 않게 되었다. 경험과 능력만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원래 세습은 아니었으니까, 좀더 순수하게 경험과 능력이 뛰어난 자들의 집단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로마는 귀족정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과두정치 체제가 된다. 귀족정치란 귀족으로 태어난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지만, 과두정치는 소수의 사람이 다스리는 점은 마찬가지일지라도 그 소수의 혈통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로마는 이제 더 이상 헤매지 않고 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기원전 367년-'리키니우스 법' 성립 기원전 366년-최초의 평민 출신 집정관 선출 기원전 356년-최초의 평민 출신 독재관 탄생 기원전 351년-최초의 평민 출신 재무관 선출 기원전 332년-최초의 평민 출신 법무관 선출 기원전 322년-빚을 갚지 못했을 때 채무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 이 세기의 말에는 로마의 수호신들을 제사지내는 관직에도 평민 출신이 선출되었다. 아테네도 로마도 권력이 양립 구조인 점은 마찬가지였다. 아테네에서는 양쪽이 교대로 정권을 잡는 방식이었다. 과두정치파와 민주정치파는 양대 정당이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때는 도편추방이라는 형태로 인재를 배제하는 일이 으레 일어나곤 했다. 도편추방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정권 교체 방식을 택하는 한 이런 종류의 '출혈'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이 교대로 정권을 담당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기성세력이 신흥세력을 끌어안는 것이 로마에서는 상투수단이 되었다. 이 방식을 택하면 정권 교체 때의 '출혈'을 피할 수 있다. 게다가 항상 새로운 '피'가 수혈된다는 이점도 있다. 인재라는 자원을 유효하게 활용하기에는 이것이 더 적절한 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점도 있었다. 어떤 개혁이든 개혁의 효과가 눈에 보이게 될 때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동안 사람들의 동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호민관 제도를 폐지하지 않은 로마는 이 점에서도 현명했다. 호민관의 존속은 평민들 눈에는 자기네 의사가 반영될 가능성의 존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퇴임한 뒤에 원로원 의석이 기다리고 있는 호민관이 섣불리 급진적인 태도를 취할 리는 없었다. 두 번째 결점은 신흥세력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해도, 새로 대두하는 또 다른 신흥세력을 편입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끌어안기를 영원히 계속해야 할 숙명을 안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까지 300년 동안은 이 '끌어안기' 방식이 유효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가 최선책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양대정당주의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최선책일까. 오늘날 가장 오래된 조직인 가톨릭 교회는 전형적인 끌어안기 방식을 답습해온 조직이다.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카톨릭 교회의 '새로운 물결'은 항상 교황 쪽에 '포섭' 되었다. 지금도 로마 시내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중심이었다. 콜로세움 쪽에서 그 '포로 로마노'에 들어가 옛날의 성도인 비아 사크라를 걸어가면 콘도르디아 신전에 이른다. 지금은 기둥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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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아 있지 않지만, '포로 로마노'라는 로마의 요지 중에서도 요지에 세워진 신전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 법'의 성립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콘코르디아 신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치, 조화, 융화, 협조의 신전이라는 뜻이다. '리키니우스 법'으로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의 대립을 해소하고, 앞으로는 두 계급이 일치단결하고 조화를 이루고 융합하고 협조하여 로마 국가를 위해 온힘을 다할 것을 이 신전 건립으로 맹세한 것이다. 신전은 신에게 바칠 목적으로 세워진다. 계급투쟁의 해소를 염원하여 세워진 이 신전도 융화의 여신인 콘코르디아에게 바쳐졌다. 국내 융화조차도 신격화해 버리는 로마인의 다신교적 성향에는 웃을 수밖에 없지만, 기원전 367년 당시의 로마인이 '리키니우스 법'에 건 의지가 전해 오는 것 같지 않은가.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는 흔히 '국가'로 번역된다. 그리스어의 폴리테이아는 폴리스(도시국가, 시민국가)의 본연의 모습, 조직, 제도라는 뜻이라니까, '국가'는 올바른 해석이다. 이 (폴리테이아)를 고대 로마인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로 번역했다. 이탈리아어의 레푸블리카, 영어의 리퍼블릭의 어원이 되는 이 라틴어는 공동체나 공공을 의미하고, 나아가서는 군주정이 아닌 정치체제를 택한 국가를 의미하니까, '레스 푸블리카'도 올바른 해석이다. 그런데 이 '레스 푸블리카'는 공화나 공화국으로 번역되고, 그것이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나도 '공화'라고 쓰지만, 쓰면서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레스 푸블리카'는 '국가'로 번역하는 편이 더 적절했고, 국가라는 말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하다못해 '공익'이나 '국익'으로 번역했어야 하지 않을까. '공화'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의미가 불명료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 '레스 푸블리카'는 공공 이익, 즉 공익을 중시하는 것이다. 공익을 중시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는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되면, '공동'으로 '화합'한다는 '공화'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아니, 역사라는 것 자체가 목표는 같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에서 서로 일치하지 못한 인류의 여러 가지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같은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에서 대립하게 되는 것일까. 수단을 크게 나누면, 다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민의 우선파'라고 불러도 좋은 사람들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므로 국민의 뜻을 반영하면서 공익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도 주권재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민이 공동체의 주요 기둥을 이루는 것이 특징인 도시국가다. 민의의 반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들에게도 중요한 명제였다. 둘째, '공익 우선파'라고 불러도 좋은 사람들이다. 공익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민의의 반영이 반드시 공익 향상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첫번째 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선설을 믿고, 두번째 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악설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양대 정당이 오늘날에도 이 의미를 답습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명칭만 보면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 두 종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민주당을 '민의 우선당', 공화당을 '공익 우선당'이라고 번역하면 의미가 훨씬 분명해지겠지만. 고대에는 민의 우선파를 민중파, 공익 우선파를 귀족파라고 불렀다. 다만, 귀족이라 해도 태어날 때부터의 귀족을 의미한 것은 초기뿐이고, 그후에는 줄곧 귀족의 어원인 '아리스토크라티아'의 원래 의미인 엘리트, 즉 무리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중파가 좋게 생각하는 정치체제가 민주정치라면, 귀족파가 선택하는 정치체제는 귀족정치라기보다는 오히려 과두정치라고 하는 편이 적절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분류만으로 끝나면 간단하지만, 양상이 여러 가지여서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인류는 종종 선견지면이 뛰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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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배출한다. 그에게는 앞이 보이니까 현재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한 것뿐이라면 선견지명을 가진 지식인으로 끝나 버린다. 보고 이해한 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권력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도 '무기를 갖지 않은 예언자는 자멸한다"고 말했다.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는 트로이가 그리스군에게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트로이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설득만 하면 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을 '카산드라'라고 부른다. 따라서 권력 획득이 선결문제가 되는데, 권력을 얻으려면 시대의 큰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큰 물결이 민중이라면 그는 민중파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하고, 민주정치가 벽에 부딪친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과두정치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은 그들에게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하지만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기원전 4세기 중엽부터 시대의 흐름은 경험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다스리는 과두정치에 유리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민주정치 체제의 붕괴가 그것을 더욱 촉진했다. 과두정치가 아니면, 마케도니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왕정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왕정을 싫어했다. 왕정이나 민주정이 아니더라도 레스 푸블리카, 즉 공익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참으로 로마적인 방식으로, 모두 함께 공동으로 화합함으로써. 로마의 정치체제 고대 로마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역사책은 예외없이 왕정 시대에서 공화정 시대로 넘어가자마자 공화정 로마의 정치체제를 설명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친절한 책은 도표까지 넣어서 설명한다. 이렇게 하면 이해하기 쉬운 이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겠다. 이 방법은 당시 로마의 실정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공화정은 왕정 시대의 정치제도를 떠받치는 세 기둥이었던 왕과 원로원 및 민회 가운데 왕만 두 명의 집정관으로 바꾼 상태로 출범했다. 그밖의 관직은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창설하는 방식을 로마인은 좋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화정 초기에 이미 정비가 끝난 뒤의 정치체제를 설명하는 연구자들은 관직 하나하나를 설명할 때마다, 이것은 몇 년에 창설되었고 몇 년에 폐지되었다가 몇 년에 다시 부활되었다는 것까지 기원전 509년의 단계에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관직의 창설과 폐지 및 부활 연대를 정확히 기술한 자료도 없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은 로마인이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이행하자마자 질서정연하게 갖추어진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운영한 듯한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해도, 로마인은 기원전 367년에 이를때까지 오랫동안 수없는 모색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2세기의 역사가 폴리비오스처럼, 로마의 공화정 체제가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의 침략을 경험한 뒤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고, 그 이후에 정비된 로마 공화정의 모든 관직을 설명하는 편이 실정에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내가 그 설명을 지금까지 미룬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 중엽의 이 시점에서는 정비가 끝난 정치체제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후의 로마 역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출발선을 명확히 보여줄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그리스인에 비해, 로마인은 현실적 성향이 아주 강한 민족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이야기할 때에도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우선 정치제도를 떠받치는 선거제도는 공화정이 된 뒤에도 왕정 시대에 만들어진 제도를 그대로 계승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공화정 로마에서도 수입이 많은 사람이 세금도 많이 내는 방식을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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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 직접세가 없는 시대에 세금의 다소는 병역 의무의 다소로 나타났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수입과 소득의 차이는 없었다. 필요경비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인대(켄투리아)는 로마 군제의 핵이다. 투표할 때도 백인대별로 내부에서 의견을 통일하여, 그 통일된 의견이 한 표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인대를 국가에 제공할 의무를 짊어진 사람이 그 백인대에 주어진 한 표를 행사하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1인 1표 방식이었던 아테네에 비해, 로마의 선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독특한 특징이었다. 말하자면 로마는 소선구제를 택한 것이다. 게다가 민회의 총투표수는 193표였기 때문에, 과반수는 97표다. 제1계급이 일치단결하여 표를 던지면, 그것만으로도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민주정치가 아니라 과두정치였던 것은 분명하다. 집정관(콘술) 왕정 시대의 왕을 대신하는 공화정 로마의 최고위 관직으로, 민회에서 선출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하는 것까지는 왕과 마찬가지이나, 종신제였던 왕에 비해 임기가 1년밖에 안된다. 다만, 재선은 허용되었다. 연령 제한은 40세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정원이 두 명인 집정관에게는 동료 집정관의 생각이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집정관이 둘 다 동의하지 않는 한 정책은 실시되지 않는다. 이 집정관의 주된 임무는 민회를 소집하는 것, 즉 내정의 최고 책임자인 동시에 전쟁터에서 지휘를 맡는 것이었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겸 합창의장 같은 관직이다. 아니, 실전 지휘를 맡는 곳이 보통이었으니까 여기에 야전 사령관의 직무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무는 집정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는데, 로마의 군사력은 보통은 양분되어 있어서 두 명의 집정관이 하나씩 통솔하도록 되어 있었다. 적의 전력이 별로 강하지 않은 경우에는 집정관 한 명이 전쟁터에 나가고, 나머지 한 명은 로마에 남아서 수도 방위와 내정을 담당한다. 적이 강대하면, 집정관이 둘 다 각자의 군단을 이끌고 출전했다. 야전 지휘관이 되는 셈이다. 이 경우, 수도 방위는 법무관의 지휘를 받는 예비역 병사들이 맡았다. 지휘관이 두 명이어도, 이 시대의 로마에서는 아직 별다른 지장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문제가 생긴 경우에는 독재관이 지명되어 지휘권을 통일하면 되었다. 그러나 1년밖에 안되는 집정관 임기 안에 전쟁이 끝나 준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전쟁을 수행하는 도중에 지휘관을 바꾸는 것도 전술적으로 대단히 곤란한 일이다. 그래서 로마는 필요한 경우에는 전직 집정관이라는 의미로 '프로콘술'이라고 이름붙인 관직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집정관에서 전직 집정관으로 수평 이동한 자가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삼면의 적과 싸워야 할 경우에도 지휘관 자리가 비는 폐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시대가 되면, 이 '프로콘술'은 속주에 총독으로 파견되는 자를 가리키게 된다. 집정관을 경험한 사람을 파견할 정도니까, 로마는 속주 통치를 상당히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갈리아에 원정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프로콘술로 파견되었고, 비티니아 지방의 통치를 맡은 키케로도 프로콘술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 안에서 고생하고 있던 시대의 '전직 집정관'은 어디까지나 집정관의 임무가 과중해진 경우에만 설치된 관직이었다. 왕정 시대의 왕이 가지고 있던 권위와 권력을 계승한 사람이 집정관이니까, 왕정 시대에 도끼자루에 막대기 묶음을 매단 것을 받쳐들고 왕을 선도했던 12명의 호위병을 앞세울 권리도 계승했다. 근위병이라기보다는 상징이다. 하지만 이 12명은 집정관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기 때문에, 폴리비오스의 말마따나 이런 호위병을 앞세운 집정관을 길에서 만나면 로마는 왕정인가 보다고 지레 짐작하는 사람도 나왔을 것이다. 민주정 아테네의 '국가전략 담당관'한테는 이런 관습이 없었다.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은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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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대단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외무 공무원인 영사의 어원이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독재관(딕타도르) 딕타도르는 오늘날에는 나쁜 의미로만 쓰이게 된 딕테이터(독재자)라는 낱말의 어원이지만, 공화정 로마에서는 국가 비상사태에 임명되는 관직으로, 임시 독재 집정관을 의미했다. 다른 관직이 선거로 선출되는 반면, 독재관만은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이 지명하기만 하면 성립되었다. 독재관은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 외에는 모든 문제에 결정권을 가졌고, 독재관이 결정한 일에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임기는 불과 6개월이다. 정원은 물론 한 명이다. 공화정 체제에서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그런 여유가 없을 경우에 독재관을 지명하여 그에게 즉결권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독재관은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집정관급 인물이 지명되는 게 보통이었다. 독재관에 임명된 사람은 부관에 해당하는 '기병장관'을 독단적으로 임명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두 명의 집정관도 독재관이 지명되면 바로 그 독재관의 명령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부관의 명칭이 '기병장관'인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독재관은 전시와 같은 비상사태에 지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평시에 독재관이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도의 기능이 마비된 경우라든가, 질서를 빨리 회복해야 할 필요성에 쫓겼을 경우다. 과두정치는 민주정치보다는 덜하지만 선장이 많은 체제다. 이런 정치체제의 결함은 긴급사태가 일어나 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때 신속함을 결여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 결함을 보충하는 것이 바로 독재관 제도였다. 공화정 로마의 위기관리 체제였다 해도 좋다. 마키아벨리는 "어떤 정치체제를 지키고 싶으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정치체제의 이념에 어긋나는 일도 과감하게 해치울 만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게을리하면, 그 정치체제 자체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독재관은 로마가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고안된 관직이었다. 위기관리 체제인 이상, 로마는 독재관을 남발하지 않았다. 공화정으로 이행한 기원전 509년부터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의 침략을 받을 때까지 119년 동안, 독재관은 일곱 번밖에 지명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번이나 독재관을 지낸 카밀루스의 사례는 플루타르코스도 말했듯이 기원전 390년 직후에 로마를 덮친 위기와 혼미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보여준다. 집정관 두 명이 나누어 갖고 있는 최고 권력을 비록 6개월이나마 혼자 독점하는 것이다. 집정관이 '선도자'를 12명 앞세운 반면, 공화정 로마의 독재관은 그 두 배인 24명을 앞세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이 독재관의 의미가 달라진다. 술라도카이사르도 종신 독재관이 된다. 이렇게 되면, 딕타토르는 이미 독재관이 아닌 독재자였다. 법무관(프라이토르) 임기는 1년이다. 초기에는 정원이 한 명이었지만, 계속 두 배수로 늘어나 마지막에는 16명에 이르렀다. 이런 증원은 법무관만이 아니라 집정관 이외의 모든 관직에서 볼 수 있는 경향인데, 이것은 로마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관리도 증원되었기 때문이다. 법무관이라고 번역할 정도니까. 프라이토르는 물론 사법 관계를 담당했다. 처음에는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업무를 대행했지만, 조금씩 사법 책임자로 바뀌어갔다. 이것도 로마가 법치국가로 정비되어가는 과정과 비례한다. 또한 이 관직을 가진 채 전쟁터에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령 제한이 40세 이상이었던 것도, 필요하면 집정관을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고려한 결정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집정관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수도 로마에서는 법무관이 민회를 소집하고 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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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 정원은 처음에는 두 명이었지만, 공화정 말기에는 40명으로 증원되었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 제한은 30세 이상이다. 전쟁터에서의 재무를 담당하는 것도 이 회계감사관이 중요한 업무였다. 대 카토는 한니발의 공격을 눈앞에 둔 로마군 진영에 가서 군비를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다고 불평했는데, 그의 당시 관직이 바로 이 콰이스토르였다. 하지만 로마군 총사령관이었던 스키피오는 코방귀만 뀌었다. 나중에 '대'자를 붙여서 부르게 된 카토는 당시 30세였고, 한니발을 무찔러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된 스키피오는 31세였다. 스키피오는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밖에 모르는 이 회계감사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돛에 바람을 잔뜩 머금고 전쟁터로 나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귀찮게 잔소리나 늘어놓는 까다로운 회계감사관 따위는 필요없소. 국가에 대해서 우리는 금전상의 책임이 아니라, 열심히 싸워서 이겨야 할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오." 어쨌든, 까다롭지 않으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이런 관직에는 오랫동안 공적을 쌓고 명성을 얻어 아무도 얕볼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다시 말해서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도 갖춘 사람을 앉히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그런데 로마에서는 반대였다. 회계감사관은 연령 제한이 30세 이상이었던 이유도 있어서, 정치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정계에 들어가는 등용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젊을 때 까다롭게 트집을 잡아 '불평'하는 법을 배우게 한 것은 퍽 재미있다. 재무관(켄소르) 원래는 인구조사를 맡기기 위해 창설된 관직이다. 그래서 공화정 초기에는 매년 켄소르를 선출하지 않고, 인구조사가 실시되는 5년마다 한번씩 선출했다. 또한 임기도 1년이 보통인 로마 관직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1년 반 이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정원은 두 명이고, 연령 제한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관직이 가진 막강한 권력과 집정관에 버금가는 권위를 생각하면, 40세가 넘은 원숙한 인물이 선출되었을 게 분명하다. 로마의 인구조사는 총인구수의 조사가 아니라, 호주들의 재정상태에 관한 조사였다. 따라서 재무관은 재정상태를 정직하게 신고하지 않은 자를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이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재무관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국유지 운용과 국고 출납을 감독하고, 도로나 상하수도 건설을 위한 지출을 결정하는 것도 재무관의 임무였기 때문에, 국가 재정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였다고 해도 좋다. 오늘날의 재무장관쯤 될까. 돈의 출납을 장악한 자가 권력도 장악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찰관(아이딜리스) 안찰관이라는 직책의 담당 분야는 참으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이 직책만은 설립 당시부터 귀족 두 명과 평민 두 명으로 출신 계급을 명확히 정해 놓고 선출했다. 시민과 직접, 게다가 자주 접촉하는 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제한은 30세 이상이다. 안찰관도 회계감사관과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에게 열려 있는 관직이었다. 임무는 우선 축제행사의 연출이다. 경기대회 개최도 안찰관이 담당했다. 두 번째는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 업무다. 식량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농촌 지역은 자급자족이었으니까, 안찰관은 수도 로마의 식량 사정을 책임지는 직책이었다. 또한 도로의 보수와 교통정리, 상하수도 관리도 맡아야 했다. 게다가 각종 위법행위에 부과되는 벌금을 결정하는 일도 담당했고, 시장이 공정하게 운영되도록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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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공화정 말기가 가까워지면 무산자 계급에게 곡물을 무료로 배급하는 일도 담당하게 되니까, '빵과 서커스'(대중의 불만이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정부가 대중에게 제공하는 식량과 오락-역주) 양쪽을 모두 담당하는 관직이 된 셈이다. 이렇게 보면, 권위가 낮은 데 비해서는 너무 빠르고 보상도 적은 관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민중과 직접 관계되는 분야를 담당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기에는 가장 좋은 자리이기도 했다. 정치 경력에 야심을 가진 자들 중에는 빚을 내서라도 자기 돈으로 민중이 좋아할 만한 구경거리를 연출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호민관(트리부누스 플레비스) 호민관은 앞에서 이미 소개했으니까 간단히 설명하겠다. 호민관이라는 멋진 번역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평민계급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는 직책이다. 따라서 평민계급 출신이 아니면 호민관이 될 자격이 없다. 선출도 귀족과 평민이 모두 참석할 권리를 가진 민회가 아니라, 평민만이 참석권을 가진 평민집회에서 이루어졌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은 제한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고대에는 성년이 16세지만, 제구실을 하는 어엿한 남아로 인정받는 것은 30세부터였으니까, '평민 사령관'이라고 직역되는 호민관에는 그에 상응하는 나이의 인물이 선출되었을 것이다. 호민관이 가장 중요한 임무가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호민관은 정부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대권도 전시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평민계급과 이해를 달리하는 귀족계급 가운데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벽창호 같은 자가 어둠 속에서 호민관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호민관은 집정관조차도 갖지 못했던 신체 불가침이라는 특별한 권리까지 부여받고 있었다. 하지만 호민관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국가 관직인 만큼, 단순히 평민의 선두에 서서 귀족과 대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귀족과 평민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개 역할도 맡고 있었다. 권력투쟁에서 호민관이 활약하는 일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호민관을 지낸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법'이 성립된 뒤, 로마는 양대 정당이 교대로 집권하는 방식보다는 일당 독재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부에서는 사람이 계속 교체되지만, 형식상으로는 일당 독재였다. 이 호민관의 정원은 처음에는 두 명이었지만, 차츰 증원되어 최종적으로는 10명이 되었다. 원로원(세나투스) 로마를 찾는 사람은 오늘날에도 시내 곳곳에서 'SPQR'라는 네 글자를 발견할 것이다.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됩니다"라는 시시한 내용의 로마시 공고문도 이 네 글자로 시작되고, 맨홀 뚜껑에도 이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SPQR'는 '세나투스 포풀루스 쿠에 로마누스', 즉 '원로원 및 로마시민'을 뜻하는 네 낱말의 머리글자를 모은 기호다. 현대 로마에는 원로원이 없지만, 로마시 의회는 자신을 옛날 로마 원로원의 후예로 생각하고 싶은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1천 5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 네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SPQR'라고 적혀 있으면 적혀 있으면 곧 로마를 의미했던 고대에, 도시국가 로마의 핵인 로마 시민과 동격으로 표시된 유일한 기관인 원로원의 중요성은 오늘날의 로마시 의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였다. 세나투스는 고대 로마가 사라진 뒤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나토'로 계승되었고,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오늘날에도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양원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의 상원은 라틴어 세나투스에서 파생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현대의 '세나투스'를 우리말로는 원로원이 아니라 상원이라고 번역한다. 적절한 번역이다. 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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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하에서의 '상원'과 공화정 로마나 베네치아 공화국 같은 과두정치 체제하에서의 '원로원'은 같은 라틴어를 어원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국의 귀족원과도 다르고, 일본의 참의원과도 전혀 다르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공화정 로마의 세나투스를 원로원으로 번역하기가 좀 망설여진다. 원로원이라면 오랫동안 공적을 쌓아 명성을 얻은 노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젊은이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트집이나 잡는 곳이라는 인상마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 로마의 원로원은 양원제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택한 나라의 상원이 아니라 단원제 국가의 하나뿐인 의회이며, 현역에서 은퇴한 장로들의 집회가 아니라 팔팔한 현역들이 모인 기관이었다. 어쨌든 30세부터 원로원에 의석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세나투스)을 명실공히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것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로원(세나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베네치아는 경제와 문화 활동을 제외하고는 뜻밖에 배타적이었다는 점에서 고대 아테네와 비슷했다. 첫 번째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났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베네치아의 귀족 출신이 아니면 원로원 의원에 선출될 수 없었다. 속주의 귀족도, 자국의 평민도, 원로원에 의석을 가질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배타주의는 이 나라 원로원의 구성에 가장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로마에서는 원로원조차도 개방적이었다. 후원회원(클리엔테스)을 이끌고 대거 로마로 이주해온 타부족의 유력자한테도 당장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패전국의 지배계급도 원로원 의원이 되어 달라는 적극적인 초빙을 받았다.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 법'이 제정된 뒤로는 평민 출신이라도 관직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원로원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에, 어제까지 귀족들과 격렬하게 싸우던 평민 대표인 호민관도 일단 퇴임한 뒤에는 원로원에 들어가 귀족들과 사이좋게 나란히 앉았다. 원로원에서 연설을 시작할 때는 우선 "원로원 의원 여러분!"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의역이고, 직역하면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라고 번역해야 한다. 베네치아 원로원과 로마 원로원의 두 번째 차이점은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들이 선거의 세례를 받은 반면,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민회가 폐지되고, 사실상의 국회는 성년에 도달한 귀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은 바로 이 국회에서 선출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한편, 공화정 로마에서는 민회가 국가의 최고 결정 기관으로 계속 전속했다. 호민관을 제외하고는 집정관을 비롯한 정부 요직도 모두 이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만은 이 선거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30세만 넘으면 자동적으로 의석을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세습도 아니었다. 상당히 엄격한 선별 작업이 이루어져, 식견과 책임감, 능력과 경험이 모두 합당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만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로마의 명문 귀족 출신인 경우에는 다소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별도의 호칭이 사용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로원은 신참자에게도 개방된 기관이었다. 선거의 세례를 받지 않으니까, 일단 원로원 의원이 되면 임기는 종신이다. 이래서는 노화와 동맥경화의 폐해를 피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길 수 있지만, 그럴 위험은 거의 없었다. 이 세대에는 병이 나면 체력이 상당히 강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힐 사이가 없을 만큼 전쟁이 일상 다반사였기 때문에, 원로원의 구성원도 적당히 교체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베네치아 원로원과 마찬가지로 과두정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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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택한 공화정 로마의 심장이었다. 집정관이나 독재관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의 요인들은 대부분 원로원에서 배출되었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면 다시 원로원으로 되돌아왔다. 집정관이 둘 다 군무를 수행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 있는 상태가 로마에서는 오히려 정상적이라 해도 좋았지만, 그 동안 내정과 외교 및 군사 등 모든 면에 걸쳐 로마가 나아가야 할 노선을 결정하고, 기관차가 되어 로마를 이끌어간 것은 바로 원로원이었다. 그런데도 원로원에는 정책을 결정할 법적인 권한은 없었고, 조언과 충고 및 권고의 권한밖에는 주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혈액을 내보내는 심장이 머리나 수족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의 결의라고 할 수 있다. 설령 반대가 있다 해도, 전직 호민관까지 끌어안고 있는 기관이다. 반대파에 대한 대책은 빈틈이 없었을 테고, 반대가 강력해서 정면 돌파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일단은 후퇴할 정도의 유연성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유연성은 상인이었던 베네치아인조차도 무색할 정도였다. 로마에서는 집정관을 지낸 사람도 재무관에 선출되면 재무관으로 일했다. 정계나 관계만이 아니라 군대에서도 상위직에 있었던 사람이 하위직을 맡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것을 불명예스럽다거나 부적절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이다. 공화정 로마는 곧 원로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런 기관은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는 과두정치 체제의 국가가 아니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기관이기도 하다. 아테네 같은 직접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나 오늘날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존재조차 허용되지 않는 성격의 기관이다. 이런 성격의 기관을 존재시키고 싶으면, 겉모습은 민주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뒤에 숨겨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두정치는 주권재민이 아니다. 주권재민이라면 민중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그 때문에 양대 정당 방식이 고안되었지만,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민중을 이끌어가는 과두정치 체제에서는 정권 교체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심장의 기능을 충분히 다하고 있던 시대에 로마 원로원이 이룩한 업적은 이제 서양사의 상식이 되어 있다. 그래서 미국도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캐나다도 하다못해 상원의 명칭으로나마 '세나투스'를 남겨 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 역사가 폴리비우스도 지적했듯이, 건강한 원로원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뒤부터 로마는 마치 미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과감하게 번영으로 가는 길을 나아갔다. 누구나 그것을 닮고 싶어할 게 분명하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이행하면서 중요성이 늘어났고,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 법'이 제정된 뒤로는 전보다 훨씬 신선한 피를 온몸에 보내기 시작한 로마 원로원은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살아남게 된다. 카이사르의 개혁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원로원이 더 이상 심장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시작되었다. 그런 카이사르가 원로원 의사당에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된 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훨씬 나중에 일어난 이 사건도 공화정 체제의 로마에서 원로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정치 건축의 걸작' 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지는 방식이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지는 데는 좋은 방식도 없고 나쁜 방식도 없다. 패배는 어디까지나 패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패배에서 어떻게 일어섰는가 하는 것이다. 패전 처리를 어떤 방식으로 했느냐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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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략에서 로마인은 몇 가지를 배웠다. 그 중 하나는 국론 분열의 어리석음이다. 귀족파와 평민파로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만족에 불과한 켈트족한테 실컷 당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분열도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법'으로 해소하는데 성공했다. 국정의 모든 요직을 평민 출신에게 전면적으로 개방한 이 정치 개혁은 얼핏 보기에는 평민에 대한 지나친 양보로 보인다. 기원전 300년에는 신에 대한 제사를 맡는 직책까지도 평민 출신에게 개방했다. 하지만 이런 개혁으로 로마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관계를 귀족이 평민을 끌어안는 관계로 바뀌었다. 그 결과는 금세 나타났다. 로마는 로마인이 가진 모든 역량을 투입할 수 있는 체제, 즉 국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가 강대해진 첫번째 요인은 로마의 독특한 통치체제 확립에 있었다고 생각한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켈트족 침략에 대해 "이때를 계기로 로마의 융성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정 개혁이다. 내정 이외에 외치가 아직 남아 있다. 로마인은 외치 면에서도 켈트족에게 대한 패배에서 배운 교훈을 현실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외치 면에서의 개혁은 타국과의 관계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2천 300년 뒤에 태어난 역사가 토인비는 이것을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불렀다. 로마는 왕정 시대부터 이미 이웃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족은 다르지만 라틴어라는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고, 종교도 같고 풍속도 비슷한 부족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총칭하여 라틴 민족이라 부르고 그 부족들 사이의 동맹도 '라틴 동맹'이라고 불렀다. 초기의 '라틴 동맹'은 동맹이라 해도 신들을 함께 제사지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어서, 1년에 한 번씩 알바노 산에 모여 유피테르 신전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고 그리스의 올림피아 경기를 본뜬 체육대회를 즐기는 것이 거의 유일한 공동 행사였다. 그러는 동안,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아벤티누스 언덕에 사냥의 여신 다아나에게 바쳐진 신전이 건립되었다. 디아나 여신도 유피테르 신에 버금가는 라틴족 공통의 신이고, 그 신을 모시는 신전이 로마 안에 세워졌다는 것은 '라틴 동맹'에서 로마의 주도권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에는 동맹에 속해 있는 모든 부적들이 여자와 아이까지 데리고 로마로 들어왔다. 이 무렵부터 군사 행동도 공동으로 하게 되었다. 로마의 주도권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라틴 동맹'에 속해 있는 여러 부족들 사이의 역학관계는 거의 대등했다 해도 좋다. 로마의 국력 자체가 아직 두드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동맹관계도 확고한 것은 아니어서 동맹국끼리도 자주 싸우는 형편이었다. 기원전 509년에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했을 때, 이런 동맹국들이 대거 로마를 떠난 것도 당시 '라틴 동맹'의 결속이 얼마나 약했는가를 보여준다. 동맹국들은 로마가 아니라 로마를 다스리는 왕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가 왕정을 폐지하자 이를 동맹관계의 폐지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에 놀란 로마는 공화정 체제가 일단 확립된 기원전 494년에 '라틴 동맹'을 재건하는 데 착수했다. 이번에는 동맹의 주요 목적이 종교 행사가 아니라 군사 행동으로 바뀌었다. 공통된 적에 대해서는 공동전선을 편다는 협약을 맺었고, 로마군과 다른 동맹국들의 군대가 반반씩 참여하여 동맹군을 구성하기로 결정되었다. 로마의 국력이 강해져서, 동맹에 참가한 나라들의 영토 가운데 약 3분의 1을 로마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동맹군 구성은 바로 라틴족 전체의 역학관계를 반영하고 있었다. 동맹군의 총지휘는 로마인이 맡기로 결정되었다. 역시 로마인의 군사력이 월등했기 때문이고, 다른 동맹국들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게 분명하다. 지휘를 로마인이 맡았다 뿐이지, 로마의 다른 부족들이 재건된 '라틴 동맹'에서 얻는 이익은 완전히 평등했다.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도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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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로마에, 나머지 절반은 다른 동맹국에 분배되었다. 또한 동맹에 가담한 부족들 사이에서는 시민권도 결혼할 권리도 교역권도 완전히 평등했다. 원하기만 하면 다른 부족이 다스리는 지방으로 이주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평등하게 인정되었다. 로마군은 대승을 거두는 일도 없었지만 참패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 서지 않더라도 그런 로마군과 공동전선을 펴는 것은 다른 라틴 부족한테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라틴 동맹'은 팔렌티나 숲에서 해마다 한 번씩 회의를 열었으며,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정확히 지켜졌다. 로마가 이 협정을 지킨 것은 로마에도 나름대로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라틴 동맹'에 6천 내지 7천 명의 정규 병력을 제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규모로는 두 배의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 시기의 '라틴 동맹'에도 결함은 있었다. 주도국 로마가 존망의 위기를 맞이하면, 다른 동맹국들은 로마와 공동보조를 취하는 이점을 잃어버리고, 그 결과 로마에 등을 돌리고 이반하기 쉽다는 결합이다.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략이 바로 이 결점을 표면화시켰다. 바다를 사이에 둔 그리스에서도 알고 있었을 만큼, 아니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기록할 만큼 큰 사건이었던 이 참사로 인하여, 특히 로마 근처에 있는 동맹국들은 로마의 명운에 희망을 걸 마음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배반은 한 나라에만 그치지 않고, 눈사태처럼 번졌다. 게다가 동맹국들은 로마와 관계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이 기회에 아예 로마를 정복하려는 마음까지 먹었다. 그래서 로마는 이들을 격퇴하는 데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카밀루스만큼 뛰어난 장수가 있었는데도 국경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로마도 어지간히 넌더리가 났는지, 기원전 338년에 대외관계의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껍데기만 남은 '라틴 동맹'을 해체하고 새로운 동맹 결성을 제창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새로운 동맹 결성을 제창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에야 겨우 로마가 원래의 힘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자가 이런 말을 꺼내면,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재평가된 동맹관계는 더 이상 '라틴 동맹'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다. 차라리 '로마 연합'이라고 부르는 편이 타당한 연합체였다. 로마인은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진정한 보수는 고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치지만, 고칠 필요가 없는 것은 고치지 않는 생활방식이 아닐까. 기원전 4세기 후반의 로마인은 대외관계의 형태는 고쳤지만, 패자까지 동화시키는 생활방식은 바꾸지 않았다. 기원전 8세기의 로물루스 이후 줄곧 로마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던 이것은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르코스가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첫번째 요인으로 꼽는 성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토인비가 말한 '정치 건축의 걸작'과 어떻게 연결되었을까. '로마 연합' 인간 세계에서 처음부터 먼 장래까지 내다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백년대계를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적기 때문에 천재다. 천재가 아닌 보통 사람은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만 생각하여 방책을 세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진로는 둘로 나뉜다. 첫째는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만 생각하여 방책을 세우고 실행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백년대계가 된 경우다. 둘째는 그런 방책으로 눈앞의 과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문제 해결에 그친 경우다. 후자의 우연은 우연에 머물지만, 전자의 우연은 필연이 된다. 역사상의 우연이 역사적 필연으로 바뀌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달려 있다. 후세 사람들의 눈에 역사적 필연으로 보이는 것도 그 당시에는 대부분 우연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우연을 필연으로 바꾼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역사의 주인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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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인간이다. 기원전 4세기 중엽의 로마인의 당면 과제는 동맹국들이 눈사태처럼 이반하는 현상이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동맹이란 공통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일한 행동을 하는 연합체를 말한다. 주도국 로마를 포함하여 동맹 가맹국들은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집처럼 통일성이 없는 잡다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단순한 집합체에서는 어떤 가맹국과 로마의 관계는 그 가맹국과 다른 가맹국의 관계와 별 차이가 없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로마가 강할 때는 로마와 손을 잡지만 로마가 약해지면 당장 배반해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4세기 중엽 이후의 로마인은 타국과의 동맹관계를 그 나라와 로마 사이에만 한정하는 형태로 바꾸었다. 도표로 나타내면 위와 같이 될 것이다. '로마 연합'에서는 로마와 강대국 사이에만 협정이 맺어졌고, 가맹국들 사이에 협정이 맺어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가맹국들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경우에도 당사국끼리 해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반드시 로마의 중재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결정되었다. 이런 형태의 동맹관계를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승자였고 다른 나라들은 패자였기 때문이다. '로마 연합'이 패자에게 강요된 불평등한 동맹관계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패자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가 되는 것이 상례였던 시대에 로마인이 생각한 이 방식은 이례적으로 너그러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로마인이 패자를 관용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로마인은 단지 자신들의 성향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라틴 동맹'에서는 동맹의 구성 요소가 로마와 기타 가맹국이라는 두 부류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로마 연합'에서는 구성 요소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연합의 기둥인 로마다. 이 나라의 주민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구별없이 자유민이면 모두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그에 따라 자유를 누리는 시민의 의무이며 직접세의 납세 형식이기도 한 병역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의 권리였던 투표권을 갖고, 로마의 공직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도 가지고 있었다.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라틴 동맹'의 가맹국이었던 나라들로서, 기원전 390년에는 로마를 배신했지만, 재기한 로마에게 패배한 나라들이다. 원래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같은 이런 나라의 주민들에게도 로마는 과감하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것은 참으로 과감한 처사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면 동맹이 아니라 합병이다. 하지만 승자인 로마인과 완전히 대등한 입장에 선 합병이었다. 실제로 이 사람들 가운데 로마의 집정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은 라틴어로 '무니키피아'라고 불린 나라들이다. 이 라틴어에서 파생한 이탈리아어인 무니치피오를 사전에서는 지방자치단체나 시, 읍, 면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런 나라에 로마는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을 주었다. '투표권 없는 시민권'이란 로마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을 뿐, 그밖의 모든 면에서는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또한 라틴어를 배우면 가까운 장래에 완전한 로마 시민권의 소유자가 되도록 예정된 사람들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로마 시민 예비군이다. 실제로 이들은 3년만 지나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권 없는 시민권밖에 갖지 못했던 시기에도 로마 시민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고, 로마 법에 정해진 사유재산권도 보장되었고, 게다가 국내의 자치는 완전히 인정되었다. 네 번째 부류는 우리가 식민지라고 번역하는 '콜로니아'다. 그러나 근대의 영국이나 프랑스나 네덜란드나 스페인의 식민지와는 다르다. 로마인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처럼 본국에서 밀려난 자들이 멋대로 다른 곳에 가서 도시를 세우고, 본국과는 교역이나 문화 교류 외에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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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로마는 답습하지 않았다. 전략적 요충으로 여겨진 지역에 로마 시민들이 정착한다. 이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로마군에 복무할 의무를 가진다. 다만, 식민지의 로마인은 자기들이 사는 지역을 지키기 위해 군무에 종사한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는 전략적 요지마다 상설 요새 겸 신도시를 건설해갔다. 식민지 중에는 로마 시민을 정착시킨 식민지만이 아니라, '로마 연합'에 속해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주시킨 식민지도 있었다. 전자를 '로마 식민지'라고 부른 반면, 후자는 '라틴 식민지'라고 불렀다. 이주한 사람만 다를 뿐, 식민지 건설의 목적은 같았다. 로마인에게 식민지는 곧 '요새' 건설이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식민지를 맡길 리 없었다. 다섯 번째 부류는 역사학에서 통틀어 '동맹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동맹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후세의 일이고, 로마인은 '소키'라고 불렀다. 이 낱말에서 파생한 이탈리아어 '소초'는 오늘날에는 협회 회원이나 회사의 주주, 또는 공동 경영자를 뜻한다. 이런 '동맹국'은 다른 동맹국과 마찬가지로 로마와 싸워서 진 패자였지만, '라틴 동맹'의 가맹국들처럼 기원전 390년 직후의 패자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의 패자라는 점이 다르다. 이들은 기원전 350년 이후에 로마와 싸워서 패한 나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와 관계를 맺은 지도 오래지 않았다. 이런 부류의 '소키'는 완전한 국내 자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종래의 것이 그대로 허용되었다. 특히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리스어인 경우에는 라틴어를 새로 배우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보다 언어로서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인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뒤에도 태연히 두 언어를 계속 병용한 민족이다. 로마인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뒤에도 태연히 두 언어를 계속 병용한 민족이다. 로마인은 이 '소키'(동맹국)에 대해 공물 같은 형태의 납세를 요구하지 않고, 그 대신 병력 제공을 요구했다. 물론 병사들이 자비로 무장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것은 곧 병력 유지비를 제공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로마에 패한 나라로서 이제 동맹국이 된 '소키'가 '로마 연합군'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요구받은 것은 아니다. 동맹국 주민으로서. 주체인 로마인 전사들과 함께 싸울 전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금전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참전하는 것보다 훨씬 인간의 명예를 존중한 요구로 여겨지고, 동맹국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키'이기 때문에,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한테만 주어지는 로마 시민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로마 연합군'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이었고, 동맹국에서 참전한 사람은 지원군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나 3세기의 시점에서는 그래도 별 지장이 없었다. 일부러 로마까지 먼 길을 투표하러 가서 로마 국정에 발언권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국내 자치가 완전히 인정되어 있어서 그들의 인권과 재산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이런 비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이른바 '만민법'이라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말하자면 '외국인법'이다. 이 다섯 번째 부류에 속하는 나라들 중에는 네아폴리스(나폴리)를 비롯하여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차례로 로마의 세력권에 편입된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가 많았다. 이것이 기원전 4세기 중엽에 확립된 '로마 연합'의 실체였다. 로마는 패자를 예속시키기보다는 패자를 자신의 '공동 경영자'로 삼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것은 타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후세에 유명해진 '분할하여 지배하라'는 사고방식의 탄생이기도 했다. 로마를 제외한 네 가지 부류의 나라들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마치 나이테를 그리듯 차례대로 '무니키피아', '콜로니아', '소키'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네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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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은 서로 뒤섞여 있었다. 로마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특히 전략적 요충에 군데군데 세워진 식민지는 동맹국끼리의 공동 행동을 분단시키는 역할도 맡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이점도 많은 대신 결점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결점은 로마에서의 지령이나 파병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무렵부터 계획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로마 가도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로마의 길 도로가 국토의 '동맥'인 것은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2천 300년 전에 이것을 안 것은 로마인뿐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만들어진다. 기원전 8세기 전반의 건국 초기부터 로마에도 길은 있었다.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은 소금길(비아 살라리아)이라고 불렀고, 로마인의 조상의 땅인 라티나 지방과 이어져 있는 길은 라티나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비아 라티나'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이것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아피아 가도'(비아 아피아)가 개통된 기원전 312년을 계기로 그 이후의 로마 가도는 단순한 행정 도로가 아니라, 정략적인 필요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정치와 군사 및 행정의 필요에 따라 길을 만든 것이다. 로마인은 이 사실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후에 만들어지는 로마 가도는 더 이상 어디어디로 가는 길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그 길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어디어디로 통하는 길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이면, 길을 더 길게 연장할 때 곤란해진다. 아피우스가 건설한 길이면 아피아 가도, 플라미니우스가 건설한 길이면 플라미니아 가도라고 이름지으면, 길을 늘이든 줄이든 자유자재가 되지 않겠는가. 기원전 312년, 재무관 아피우스의 명령으로 건설된 아피아 가도는 로마에서 카실리눔(오늘날의 카푸아)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의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차츰 연장되어, 결국 남부 이탈리아 남쪽 끝에 있는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에 이르는 로마의 간선도로가 되었다. 이 아피아 가도에 이러 플라미니아 가도, 카시아 가도, 아루렐리아 가도 등이 건설되었다. 로마의 세력권이 사방팔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로마와 지방의 요충지를 잇는 도로망도 확대된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말까지 생길 만큼 유럽과 아시아 및 아프리카까지 걸쳐 있는 후세의 로마 가도도 이 무렵에 의식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도로에 발단을 두고 있다. 이 시기를 경계로 하여 로마 가도는 강한 정략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로마 가도를 군용 도로라고 말하지만, 나는 차라리 정용 도로라고 부르고 싶다. 이런 가도를 건설하기 전에 그 땅에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인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로마인은 그 길을 최대한 직선으로 만들고, 도로 폭을 넓히고, 교량을 놓고, 배수를 좋게 하고, 평탄해지도록 포장을 했다. 요컨대 '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 '고속도로망'은 '로마 연합'이 유기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데 지극히 중요한 동맥이 되었다.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사람은 로마의 명문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아피우스인데, 그는 로마적 의미를 가진 가도를 처음으로 만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상하수도 공사를 시작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로마의 도로와 상하수도를 정비하여,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수도 로마를 많은 사람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도시로 바꾸려 했다. 동시대의 그리스 여행자는 이것을 보고, 그리스인은 신전 건축에 열심인 반면 로망니은 공공시설을 확충하는데 중점을 둔다는 글을 남겼다. 상하수도는 어찌 되었든 간에, 도로는 숙명적으로 양날의 칼이 될 수 밖에 없다. 아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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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이나 이동이 편리해졌다는 것은 적군의 정보 수집이나 이동도 편리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로부터 수십 년 뒤에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100년 뒤에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인이 건설한 가도를 따라 로마로 쳐들어와, 로마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를 최대 목표로 삼는 민족은 도로공사 기술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평탄하고 편리한 도로를 건설하는 일에는 열성을 쏟지 않는다. 고대의 에트루리아 민족과 중세 유럽이 그 좋은 예다. 반면에 지평선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가다 보면, 고대 로마인의 외향성의 표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적에게도 이렇게 편리한 길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로마인은 숙명적으로 전쟁을 영원히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로마인은 종교와 정치체제, 대외관계에서 도로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개방적인 민족이 아니었던가.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에트루리아도, 로마도 모두 자유시민을 국가의 기둥으로 삼는 도시국가로 탄생했다.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끝내 도시국가에 머물렀다. 오직 로마인이 도시국가로 태어나, 도시국가의 범위를 넘어섰다. 그들의 이런 성장 방식은 시민권에 대한 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에도 나타나 있다. 시민권 '키비타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영어 낱말 '시티즌십'(citizenship)을 영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시민, 국민의 신분, 공민권, 시민권, 국적' 이탈리아어 사전에서는 '치타디난차'(cittadinanza)를 찾아봐야 하는데, 그 풀이는 '시민권, 국적, 공민의 지위 또는 신분'으로 되어 있어서, 영어와 비슷하다. 그 의미를 더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펼치면, 시민권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 공권, 인권, 민권. 시민으로서의 행동과 사상, 재산, 직업, 신앙 등의 자유가 공적으로 보장되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그럼 시민은 어떻게 설명되어 있나 하고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시에 살고 있는 사람, 도시의 주민.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지위를 가진 국민. 시민 계급에 속하는 사람. 공민' 내가 가지고 있는 사전에서 인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시민과 시민권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흥미롭다. 우선 시민권 항목에 '국적'이라는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둘째, 시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열거되어 있지만 의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권을 여기서 확실히 정의해 두지 않으면, 그것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차별을 둔 고대 로마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적 설명에 덧붙여, 로마 시민권의 유무에서 생겨나는 구체적인 권리와 의무를 열거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 듯싶다. 권리 1. 동산과 부동산을 불문하고 모든 사유재산의 보장. 그리고 그런 사유재산을 매매할 수 있는 자유. 2.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짐으로써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3. 법에 따른 재판을 받을 권리와 함께,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아도 로마에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민회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 즉 항소권을 가졌다. 이 때문에 사실상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사형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4.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신분을 가진 어엿한 어른이라는 증거. 로마에서는 시민권을 갖고, 사회생활의 중요한 핵심으로 여겨지고 있던 가문의 일원이어야만 비로소 제구실을 하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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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한 인간으로 간주되었다. 의무 16세부터 40세까지는 현역으로, 그 이후에도 60세까지는 예비역으로 군무에 종사할 의무가 있었다. 병역은 시민의 또 다른 의무인 납세를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직접세가 없이 간접세뿐이었던 고대의 세제에서, 직접세는 병역으로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병역을 '혈세', 즉 '피의 세금'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는 것은 법률로 허용되지 않았다기보다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병역을 경제적으로 대체하는 행위는 시민권이 없어서 병역 의무가 없는 비시민이거나 로마인 중에서도 유복하고 자식이 없는 여자한테만 부과된 일종의 세금이었다. 동맹국이나 속주에서도 연공이라는 형태로 직접세를 내기보다는 병력 제공에 응하는 편이 명예로운 협력 방법으로 여겨졌다. 로마인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정복한 지방도 차츰 로마에 동화시키려고 자금 협력보다는 병력 제공을 요구했다. 로마가 탄생했을 때부터 되풀이해 말했듯이, 또한 '로마 연합' 항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로마인은 자국의 시민권을 타국인에게 주는 데 대단히 너그러운 민족이었다. 그것은 로마 군단이 로마 시민권 소유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택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병력은 만 명 단위에 머물렀지만, 로마는 10만 단위의 병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전성기의 아테네에서도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 아니면 아테네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이 점은 스파르타도 마찬가지였지만, 로마에서는 얼마 동안 로마에 거주하기만 하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제도가 훨씬 이후까지 실시되었다. 반대로 아테네에서는 오랫동안 아테네에서 살고 학교까지 열어 아테네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평생 동안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시민권에 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노예에 대한 처우에도 나타나 있다.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노예인 채 평생을 마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로마의 노예한테는 다른 길이 열려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와 가축을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용함에서는 노예와 가축이 별 차이가 없다. 노예든 가축이든 그들의 육첼 우리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200년 전에 로마의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자신이 노예 출신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태어난 뒤에 만난 운명의 차이에 불과하다." 로마에서는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한 노예에게 주인이 보답하는 의미로 자유를 주거나, 노예 자신이 저축한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자유를 회복한 노예를 해방노예라고 부르고, 그들의 자식대에는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시민권만 수중에 넣으면, 그후 사회에서의 출세는 그 사람 자신의 재능과 팔자에 달려있다. 반대로 아테네에서는 저 유명한 페리클레스조차도 아테네인이 아닌 여자와 재혼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테네 시민권을 얻지 못하다가, 특례를 인정받아 겨우 아테네 시민의 자격을 얻었을 정도다. 시민권에 대한 로마인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이중 시민권, 다시 말해서 이중 국적까지 인정한 점에도 나타나 있다. 이 시기에는 '로마 연합'의 동맹국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로마 시민권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속해 있는 지방의 시민권을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나폴리 시민이면서 동시에 로마 시민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중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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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제도 역시 동시대의 타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로마의 독특한 제도였다.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100명의 장로를 소집한 것이 로마 원로원의 시작이었다. 이 100명이 이끄는 가족이 로마 최초의 귀족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귀족이 500년 뒤에는 5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일가가 멸족되거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서 대가 끊겨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500년 동안 원로원 의원의 수는 300명으로 늘어났으니까, 공화정 로마의 심장부를 형성하고 있는 원로원의 엘리트 가운데 로마 건국 이래의 명문 귀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15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d처럼 귀족의 수가 크게 줄어든 것은 그 동안 로마가 치러야 했던 끊임없는 전투가 지도자 계급에 속하는 이들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로마의 지배계급에 속하는 남자의 수는 늘어나긴 할망정 줄어들지는 않았다. 정부 요직과 원로원 의석을 평민에게도 개방함으로써, 로마는 항상 새로운 피를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에 들어갈 수 있는 기본 자격은 아주 간단했다. 로마 시민권만 있으면 누구나 지배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40년 동안 삼니움족과 싸울 때에도, 10년 동안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과 싸울 때에도, 로마 시민은 계속 피를 흘렸다. 그후에도 이런 경향은 변하지 않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는 한니발에게 완벽한 패배를 맛보았다. 6천 명의 로마 기병 가운데 370명, 8만 명의 로마 보병 가운데 불과 3천 명밖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런데도 로마는 재기할 수 있었다. 항상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을 잊지 않은 로마인의 사고방식이 거둔 성과였다. 이것은 그리스에서도 이집트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에트루리아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로마인의 독특한 '철학'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인 외에 오직 한 사람,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일의 유효성을 깨닫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인물이 있었다. 다만, 이 인물의 시선은 로마가 있는 서쪽이 아니라 동방으로 행해 있었다. 이것은 당시 국내외에서 재기의 발판을 확립한 지 얼마 안되는 기원전 4세기 후반의 로마에게는 천우신조나 다름없는 행운이었다. 역사의 유쾌한 가정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방대한 양의 편년체 (로마사)를 쓴 티투스 리비우스는 그리스인이 남긴 사료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에피소드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매듭지은 자마 전투로 사실상 자웅이 판가름난 뒤의 일이니까, 기원전 2세기에 막 접어들었을 무렵임이 분명하다. 자마 전투에서 패하여 오리엔트로 달아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그에게 승리를 거둔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났다. 자마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회담을 가진 적도 있고 그후 강화회의에도 양쪽의 수석대표로 참가했던 만큼,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비록 전장에서는 적으로 맞서 싸웠지만, 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상대의 재능을 피차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키피오는 연장자인 한니발에게 경의를 표하고,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영어로는 알렉산더)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소."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굽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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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적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까지 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 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대가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 거오." 이 에피소드의 유쾌함은 제쳐놓고, 기원전 3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 줄곧 계속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오 카르타고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로마와 한니발 개인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다. 그리고 그리스 북부에 있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는 한니발보다 60년 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군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한니발이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꼽은 세 사람 가운데 로마군과 전쟁터에서 대결하지 않은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충격'에서 겨우 일어선 로마가 이탈리아 중남부에서 세력을 확립한 시기와 마케도니아의 풍운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에서 풍운을 일으킨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로마가 이탈리아 중남부를 제패하는 데 소비한 세월은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26년까지 14년간이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시작한 뒤 바빌로니아에서 객사할 때까지의 기간은 기원전 334년부터 기원전 323년까지 11년간이다. 만약 이 시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 천재와 정열을 동방이 아니라 서방에 쏟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도 시기적으로는 충분히 성립된다. 어쨌든 그후 지중해 세계로 진출하게 된 로마의 군사력과 한번도 자웅을 겨루어 보지 않은 당대의 고명한 무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금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경우의 '만약'은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만약에 알렉산드로스가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면, 한창 융성의 길로 나아가고 있던 로마와 격돌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테고, 만약 그랬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알렉산드로스가 이겼을까. 아니면 로마가 이겼을까. 물론 마케도니아의 풍운아는 동쪽으로 갈 것인가 서쪽으로 갈 것인가를 동전을 던져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동쪽으로 진격해야 할 필연성운 분명히 있었다. 그리스의 숙적은 언제나 페르시아였고, 그리스가 독립을 유지하고 통일을 이루려면 역사적으로 항상 그리스를 탐낸 페르시아를 쳐부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완벽하게 쳐부순 뒤에도 되돌아가지 않고 계속 동쪽으로 진격해 버렸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의 유쾌한 점이고, 로마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어쨌든 당시의 로마군은 피로스나 한니발 같은 천재적인 장수한테는 줄곧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고대에도 역사를 기술할 때 '만약'이라는 금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나 자기가 직접 들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 역사이고, '만약'이라는 가정을 쓰는 것은 '히스토리아'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고대 역사가들 가운데 이런 종류의 서술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오직 리비우스만은 '유쾌한 가정'이라고 전제해 놓고 여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로마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맞붙었다면, 로마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하고. 리비우스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대였다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기원전과 기원후에 걸쳐 살았던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가 융성의 정점에 도달한 시기에 살았던 탓도 있어서, 조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찬미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따라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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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야기는 상당히 깎아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로마의 승리를 점치면서 그가 든 이유가 무척 흥미롭다. 리비우스는 우선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곳은 아직 운명이 바뀌기 전인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는 지휘관이 대왕 한 사람뿐이었던 반면, 같은 시기의 로마군에는 적어도 11명의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다. 로마에는 지휘관 자리가 비어도 대신할 사람이 항상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로마군의 엄정한 규율은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규율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고, 400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로마군 병사들의 사기와 10여 년 만에 양성된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의 사기는 전통으로 보아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휘관이 사기를 북돋을 수도 있지만, 병사 개개인의 가슴 속에 축적된 자신감이야말로 사기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전략과 전술적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로마군은 다리우스 왕의 병사들이나 인도 병사들과는 다르다. 로마인은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처럼 사치에 익숙치 않았다. 실질강건을 당연하게 여겼던 당시의 로마 남자들과 싸웠다면, 아무리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 해도 유약한 민족과 싸울 때처럼 승전에 승전을 거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와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은 조직과 개인의 대결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남아 있었던 10여 년의 기간으로는 아무리 그의 재능이 뛰어났다 해도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에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이 리비우스가 든 네번째 이유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사 개개인은 각자의 운명에 따라 살거나 죽는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한 전사의 죽음이 당장 국가적인 손실과 결부되지는 않는다." 리비우스는 마케도니아군과 로마군의 보병군단이 각각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다섯번째 이유로 들었다. 마케도니아의 중무장 보병군단은 한 덩어리가 된 공격에 강하고 방어에도 유리하지만, 중대의 연합체인 로마의 중무장 보병군단은 기동성이 뛰어나고 전술 전환에 즉각 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비우스가 든 여섯번째 이유는 적지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비해 자국 영토 안에서 싸울 수 있는 로마군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는 '로마 연합'에 가입한 식민지와 동맹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로마와 긴밀한 관계로 맺어져 있어서, 아무리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 해도 이 촘촘한 그물을 간단히 돌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리비우스가 마지막으로 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전투에 패하는 것이 곧 전쟁에 패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로마군의 전통은 전투의 패배가 전쟁의 패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상이 로마인이 든 로마의 이점이다. 물론 로마와 알렉산드로스가 정말로 싸웠다며 어떤 결과로 끝났을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우선,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열병에 걸려 죽었으니까, 그리스보다 기후가 온난한 이탈리아에서는 열병에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면, 알렉산드로스도 장수를 누렸을지 모른다. 어쨌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서쪽으로 진격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의 적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로니아에서 객사하기 3년 전부터 로마는 이탈리아 중남부의 산악지대를 지배하고 있던 삼니움족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통틀어 4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끈질기고 강인한 산악 민족을 간신히 굴복시킨 뒤에는 쉴 틈도 없이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과 대결하기 시작했다. 피로스는 한니발이 병법에서 자신의 스승이라고까지 평가할 만큼 뛰어난 전술가였다. 삼니움족과의 전쟁과 피로스와의 대결에는 이탈리아 반도 남반부의 패권이 걸려 있었다.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충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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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 재기한 뒤부터 헤아리면, 로마인은 이 패권을 장악하는 데 무려 120년의 세월을 소비한 셈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에 보낸 세월은 10년에 불과하다. 로마인은 느리긴 해도 착실하게 나아간다는 것이 그리스인과 다른 점이다. 정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일단 정복한 지방을 유지하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산악 민족 삼니움족 삼니움이라고 불린 민족은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친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수도가 확실한 통일국가도 아니고 독자적인 문명을 가진 민족도 아니었다. 나폴리와 같은 위도에 자리를 잡았지만, 나폴리에는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들이 사는 산지는 눈에 덮여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기온이 가장 낮은 지역에 속한다. 산악지대인 만큼 상업이라고는 목축밖에 없고, 바다와는 거의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산악 민족은 확대지향적 성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로마는 이들과 관계를 갖지 않고 지낼 수 있었지만, 로마가 카푸아와 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냐 지방을 세력권에 편입한 무렵부터 그들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런 상대쯤은 간단히 쳐부술 수 있었을 터인데, 로마인은 뜻밖에 애를 먹었다. 그것은 삼니움족의 전투 방식이 로마인이 익숙한 전술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삼니움족은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여 대항한 반면, 로마군의 전투대형은 평원에서의 대결에 적합했다. 아군의 장점을 아는 로마군은 적을 평지로 끌어내려고 애썼지만, 유인 작전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삼니움족에게는 애당초 로마를 타도할 야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로마군이 산악지대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쳐들어오는 적을 맞아 싸우는 형태가 된 삼니움족은 산악지대에 가장 알맞은 전술을 채택했다. 대대를 편성하지 않고 항상 소대를 출몰시켜 로마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그들의 전술이었다. 산지이기 때문에, 족과 정면으로 격돌해야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로마의 기병대도 중무장 보병군단도 전력 저하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삼니움족은 병사 개개인의 사기도 높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사기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로마 전사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남부 이탈리아에 침투하기 시작한 로마인이 산지에 틀어박혀 사는 민족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방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삼니움족은 '자기네 마당'에서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전쟁터인 산악지대를 눈금 보듯 환히 알고 있었던 것은 로마인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우세하게 싸움을 전개했던 로마군이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된 것도 삼니움족이 이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게 때문이다. 로마와 삼니움족이 대결 상태에 들어간 지 5년째가 된 기원전 321년, 삼니움족과 싸우기 위해 남하하고 있던 로마군에게 한 가지 소식이 들어왔다. 삼니움군 전체가 풀리아 평원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로마군을 이끌고 있던 두명의 집정관은 이번에야말로 평원에서 대결하여 적을 섬멸시킬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서쪽으로 행군하라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정보였다. 삼니움족 군대는 풀리아 평원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 전의 산지에 매복하여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악지대로 들어간 로마군은 평지에만 나가면 식량도 쉽게 보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약간의 식량만 지참하고 출발했다.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열흘치 식량은 짊어지고 행군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이상의 군량을 운반하려면 마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산지를 행군할 때는 최대한 짐을 줄여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로마군은 산과 산 사이로 뻗어 있는 샛길을 따라 곧장 서쪽으로 행군했다. 카우디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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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불리는 협곡에 이르러, 더 한층 좁아진 입구를 통과하여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 로마군 전위대가 다시 좁은 통로를 지나 골짜기를 막 빠져나가려 했을 때였다. 나무를 쓰러뜨려 만든 바리케이드가 그들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깜짝 놀란 로마군 병사들은 골짜기를 되돌아와 입구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길도 어느새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협곡은 좁은데다 양쪽은 깎아지른 암벽이 노출된 험준한 산이어서 기어오를 수도 없었다. 골짜기의 출구와 입구는 바이케이드 뒤에 진을 친 삼니움족 병사들이 쏘아대는 화살 때문에 접근할 수도 없었다. 1만 명을 헤아리는 로마군 병사들은 카우디움 협곡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꼴이었다.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은 집정관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숙영지를 짓기 시작했다. 주위를 참호나 울타리로 방어한 로마식 숙영지다. 그러나 이것은 한때의 위안에 불과했다. 삼니움족은 도무지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도 삼니움족 병사들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로마군 병사들이 얼마나 용맹한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려는 로마군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적은 공격해 오지 않았지만, 굶주림이 공격해 왔다. 식량은 벌써 오래 전에 바닥났고, 기병이 타야 할 말까지 잡아먹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다 떨어졌다. 물은 있었지만, 자갈 바닥이 드러나 시냇가에는 풀조차 자라지 않는다. 마침내 로마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항복하고 말았다. 집정관의 부관이 삼니움족에 파견되어 화평을 제의했다. 삼니움족도 화평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내세운 조건은 로마군이 나폴리 일대에서 철수하고, 식민지도 포기하고, 삼니움족의 세력권을 앞으로도 줄곧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약이 민회의 승인을 얻어 정식으로 체결될 때까지 로마군 병사 600명을 인질로 삼는다는 합의도 이루어졌다. 로마 전사들은 패퇴에는 익숙했지만, 항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로마인이 적에게 항복한 것은 70년 전에 켈트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점령했을 때뿐이었다. 로마인은 그 굴욕을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이제 로마인에게는 기원전 321년에 삼니움족에게 이 '카우디움의 굴욕'도 절대로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치욕이 되었다. 숙영지에 있던 로마군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온 삼니움족 앞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창도 칼도 방패도 휴대할 수 없었다. 전사로서는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무장해제된 모습으로 항복하는 것이다. 집정관도 사령관임을 보여주는 진홍빛 망토를 벗어야 했다. 로마군은 자유시민이면서도 노예와 같은 모습을 남 앞에 드러내는 굴욕까지 맛보았다. 삼니움족 병사들은 로마군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속옷인 하얀 셔츠만 입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로마의 자유민에게 이것은 반나체를 의미한다. 로마에서 이런 꼴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노예뿐이었다. 삼니움족 병사들이 로마군 병사들에게 안겨준 치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군은 속옷만 걸친 채, 창을 빼들고 빈틈없이 늘어서 있는 삼니움족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라는 강요를 받았다. 양쪽에 늘어서 있는 삼니움족 병사들은 한 사람씩 지나가는 로마군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개중에는 창으로 쿡쿡 찌르는 자들도 있었다. 상처를 입고 쓰러지거나 죽는 로마군 병사도 적지 않았다. 이런 굴욕을 당한 뒤에도 로마군 병사들은 속옷 바람으로 로마까지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마에서 민회가 승인하여 평화조약이 발효할 때까지 발이 묶인 600명의 인질은 그대로 삼니움족의 감옥에 쳐넣어졌다.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동맹국에 도착한 로마군 병사들은 그곳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그거야 어쨌든, 삼니움족이 로마인과 공존할 생각이었다면 그들의 처사는 참으로 졸렬했다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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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로마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은 명예였다. 삼니움족은 그 명예심에 깊은 상처를 준 것이다. 로마인은 승전보다 패전을 더 오래 기억하는 민족이었다. '카우디움의 평화'라고 불린 로마와 삼니움족의 강화는 5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때의 패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패배를 맛본 뒤의 로마인의 태도는 시대를 초월하여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싸움에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우리는 장수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로마인은 그렇게 생각하여 장군의 책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승리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레스 푸블리카)가 이겨야만 비로소 성취된다고 로마인은 생각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자기한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사람은 심한 수치심에 괴로워한다. 구태여 해임하거나 죄를 물을 필요가 없다.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는 것 자체로 벌을 충분히 받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명예심을 제일의 덕목으로 생각한 로마인에게는 명예를 잃는 것이 가장 무거운 벌이었다. 둘째,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 군단(레기온)을 구성하는 중대의 지휘관은 총사령관인 집정관의 명령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독자적인 행동도 임기응변으로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이러한 조치는 기동성을 높여 주었다. 무기도 삼니움족이 사용하고 있는 투창의 효력에 주목하여 당장 그것을 도입했다. 셋째, 그때까지 추진하고 있던 기본 정략의 유효성을 깨닫고, 그것을 계속 추진했다. 로마의 기본 정략은 바로 '로마 연합'의 확립과 확장이다. 로마와 새로 동맹관계를 맺은 지방의 확대는 로마군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동시에 로마군의 보급선을 늘렸고, 그 결과 삼니움족의 근거지를 포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두 명의 집정관이 군단을 하나씩 맡아 이끄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무렵부터는 각자 두 군단을 지휘하게 된다. 로마의 전력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5년을 그냥 산지에 틀어박혀 지낸 삼니움족은 카우디움 협곡에 로마군을 몰아놓고 포위한 그들 자신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포위망에 둘러싸여 버린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다. 기원전 316년, 로마는 삼니움족과 다시 싸울 준비가 갖추어졌다. 싸움을 시작할 구실은 삼니움족이 제공해 주었다. 동맹관계에 있던 나라가 배반하는 경우, 그 나라가 독립하여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기 때문에 떠나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는 다른 강대국 쪽에 붙는 편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종주극은 항상 자기가 더 강하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다. '로마 연합'에 가입해 있던 카푸아가 삼니움족 쪽으로 돌아선 것도 카우디움 협곡에서 패배한 로마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카푸아는 나폴리에서 조금 위치한 도시로, 고대에는 나폴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 도시였다. 남부 이탈리아를 제압하느냐의 여부는 바로 카푸아를 제압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카푸아가 '로마 연합'을 떠나 삼니움족의 보호를 받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로마가 이를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삼니움족의 지원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로마군은 곧이어 카푸아로 쳐들어갔다. 카푸아는 자력으로 방위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런 카푸아를 함락시키는 것은 간단했다. 카푸아의 유력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그후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 쪽으로 돌아설 때까지 100년 동안, 카푸아는 로마에 충성을 바쳤다. 로마는 패자에게 너그럽기로 유명했지만, 모든 패자에게 다 너그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패자는 처음은 로마의 관용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두번째나 세번째 관용은 기대할 수 없었다. 명예와 함께 신의를 중시한 로마인은 협약을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부 이탈리아로 가는 요충지 카푸아를 되찾은 로마는 4년 뒤인 기원전 312년에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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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활용하여 유기적으로 전략망을 만들어가는 로마의 독특한 방식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로마는 카푸아를 되찾은 뒤, 단번에 삼니움족까지 격파하지는 않았다. 계속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세력을 확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4대 군단을 상비군으로 갖춘 로마는 삼니움족의 지배를 받고 있던 지방도 조금씩 자기 세력권을 끌어들이게 된다. 여기서도 로마는 패자를 동맹국으로 삼고, 요충지에는 식민지를 건설하여 로마 연합군을 강화하기를 잊지 않았다. 점점 산지로 쫓겨들어가게 된 삼니움족과 로마는 기원전 304년에 강화조약을 맺었다. 카우디움 협곡에서 맺은 강화와는 달리, 이번 강화는 무력을 앞세운 화평이었다. 이 시기의 로마를 해설하는 학자들이 싫증도 내지 않고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이때도 로마인은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나아가는 방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 평화도 6년 만에 끝났다. 로마의 시선이 남쪽으로 돌려져 있는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로마의 북쪽에 사는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아펜니노 산맥 북쪽의 포 강 유역에 정착한 켈트족은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점령한 바로 그 민족이었는데. 그들이 다시 로마를 탐내기 시작한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이 이 켈트족과 공동전선을 펴고 로마를 야금야금 침식해 들어왔다. 아펜니노 산맥의 아드리아 해 쪽에 사는 움브리아인도 로마에 대한 투쟁에 가담하게 되었다. 로마에 밀려 계속 산지로 쫓겨들어가기만 하던 삼니움족도 여기에 가담하여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는 북쪽과 동쪽과 남쪽의 세 방향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 개량된 로마군의 실력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기원전 297년,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16세부터 40세까지의 시민만이 아니라 평소에는 병역을 면제받는 60세까지의 예비군도 소집되었다. 이런 사태라면 집정관이 독재관을 임명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이번에는 독재관이 임명되지 않았다. 독재관으로 임명할 만한 사람은 파비우스밖에 없었는데, 그는 명문 귀족 파비우스 가문의 일원이어서 평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국론 일치가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는 시국에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재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평민계급도 파비우스가 절대권력을 갖는 독재관이 되는 것은 반대했을지 모르지만,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 해의 집정관으로는 퀸투스 파비우스와 젊은 보르미니우스가 선출되었다. 파비우스가 집정관에 취임한 것은 이번이 다섯번째였다. 그런데 자신이 독재관으로 임명되지 않은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파비우스가 동료 집정관의 선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민회에 나가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이제 노인입니다. 노인의 기질로 보아, 젊은이와 의견이 일치하기는 어렵습니다. 집정관으로서 나라를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할 마음은 충분히 있지만, 함께 지휘를 맡을 동료 집정관으로는 데키우스를 선출해 주십시오. 데키우스는 세 번이나 나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고, 같은 전쟁터에서 싸운 경험도 공유하고 있어서, 서로 속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독재관과 집정관의 가장 큰 차이점은 6개월과 1년이라는 임기 차이가 아니다. 독재관은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반면, 집정관은 동료 집정관과 협의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동료 집정관과 마음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집정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대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파비우스의 연설을 들은 면회는 투표를 다시 하여, 파비우스와 데키우스 두 사람을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지난 번 투표에서 파비우스에 버금가는 표를 얻어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던 보르미니우스는 집정관과 거의 같은 지위인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이 되어, 삼니움족 땅에서 적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는 작전을 맡았다. 파비우스는 다섯번째로 집정관이 되었고, 데키우스도 이번이 벌써 네번째였다. 명문 귀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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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우스와는 달리 데키우스는 평민 출신이었다. 집정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삼니움족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파비우스와 데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후세까지 로마군의 가장 큰 특징이 된 기동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전술을 택했다.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여, 로마에 맞서 단결한 네 민족의 본거지로 순식간에 달려가서 철저히 파괴하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로마군이 게릴라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이 작전의 진두지휘를 맡은 것은 카우디움 협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강요당했을 때 집정관이었던 센티움스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켈트족과 에트루리아인, 움브리아인, 삼니움족 등 네 민족의 군대는 아펜니노 산맥 동쪽에 있는 센티노 땅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을 뒤쫓는 로마군 본대도 적진으로부터 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적군은 작전회의를 열고, 네 군대가 동시에 로마군과 대결할 것이 아니라 우선 켈트족과 삼니움족의 연합군이 대결한 다음, 이어서 움브리아와 에트루리아의 군대가 마무리를 짓는 전술을 채택했다. 연합군의 이런 작전은 당장 파비우스에게 알려졌다. 적진에 있던 세명의 에트루리아인이 몰래 빠져나와 파비우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파비우스는 세 명의 에트루리아인에게 깊이 감사한 다음,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부대에 전령을 보내어, 파괴활동을 에트루리아 영토에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에트루리아 내부가 분열되어 있는 낌새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자국의 참상에 마음이 어지러워진 에트루리아 군대가 싸우기도 전에 전선을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싸움은 시작되었다. 적은 양쪽으로 나뉘어 쳐들어왔다. 오른쪽은 켈트족, 왼쪽은 삼니움족, 1만명의 로마군도 둘로 나뉘었다. 제1군단과 제3군단을 이끄는 파비우스가 삼니움족과 맞서고, 제5군단과 제6군단을 지휘하는 데키우스는 켈트족과 대결했다. 보르미니우스가 이끄는 제2군단과 제4군단은 삼니움족의 대동단결을 저지하기 위해 남쪽에 파견되어 있었다. 서전의 승패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로마군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삼니움족 병사들도 켈트족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서전에서는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전쟁을 오래 끌수록 그 파괴력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파비우스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로마군은 처음에는 정면 대결을 피하다가, 적의 전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려 총력을 투입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따라서 로마군의 우익에서는 적에게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 임무인 기병대가 전혀 손실을 입지 않은 채 고스란히 전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데키우스 부대는 반대로 서전부터 총력을 다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이것은 지휘관인 데키우스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로마군의 제5군단과 제6군단이 켈트족과 부딪친 전쟁터에서는 처음부터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데키우스는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결말이 나지 않는 것을 보자마자 기병대까지 투입했다. 그러나 켈트족(갈리아인) 기병대의 용맹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출신으로만 로마 군단의 기병대를 편성했을 정도다. 게다가 기원전 297년의 이 전투가 벌어진 전쟁터는 오래 전에 이탈리아에 정착한 켈트족이 사는 지역과 가까웠다. 데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기병대는 조국을 방어하겠다는 기개로 충만한 켈트족 기병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했다. 차례로 쓰러지는 아군의 말에 짓눌려 중무장 보병까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를 지켜보던 데키우스는 로마에 승리를 가져다주면 목숨을 바치겠다고 신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패주하던 병사들도 이 맹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병사들은 앞장서서 적진으로 뛰어드는 사령관을 뒤따랐다. 파비우스의 군단에서도 지원군을 보내왔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파비우스의 전선에서도 대기중이던 기병대가 투입되고 있었다. 적의 보병대를 양쪽에서 협공하는 것이다. 전열이 흩뜨러지자, 삼니움족 병사들은 우군인 켈트족 병사들 속으로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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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들어갔다. 파비우스는 로마군 기병대를 불러들여, 켈트족의 배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삼니움족의 총사령관은 전사했고, 포위된 켈트군도 좁은 입구를 통해 앞다투어 숙영지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려다가 울타리 앞에서 로마군 병사들에게 차례로 죽어갔다. 이날의 전투에서 적은 2만 8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 포로는 8천 명에 이르렀다. 데키우스 군단의 전사자는 7천 명을 헤아렸고, 파비우스 군단도 1천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런데 집정관 데키우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적병들 밑에 깔리기라도 했는지, 해가 져서 전투가 끝난 뒤에도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시신이 발견된 것은 이튿날 동이 튼 뒤였다. 파비우스는 동료 집정관을 정중히 장사지내고, 데키우스의 씩씩한 인품과 생전의 공적을 찬미하는 조사를 낭독하여 오랜 친구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가들이 모두 인정하는 로마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패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재능과 승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재능이다. 기원전 297년의 승리도 이런 특징을 뚜렷이 보여준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쉴 틈도 없이 진격하는 로마군에게 쫓겨 켈트족은 북쪽으로 밀려났고, 움브리아인과 에트루리아인도 '로마 연합'에 가맹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늙은 파비우스가 은퇴하면 집정관으로 선출될 젊은 장수들이 차례로 그의 뒤를 이어받았다. 기원전 290년, 유일하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삼니움족도 마침내 로마군의 군문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삼니움족이 먼저 강화를 제의해 온 것이다. 삼니움족이 사는 지방은 '로마 연합'의 한 동맹국(소키)이 되었다. 그들이 사는 산악지대 한가운데에 로마 시민들이 이주할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건설된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285년에 베누시아(오늘날의 베노사)라고 이름지은 이 식민지까지 연장되었다. 로마의 패권 확대를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로마 가도도 아피아 가도를 비롯하여 여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그 모두가 수도 로마와 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식민지(콜로니아)를 잇는 도로였다. 로마는 기원전 290년의 전투를 끝으로 이탈리아 중남부의 제패를 완성한 셈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남해안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던 그리스인의 도시와 처음으로 직접 접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와 로마의 대결 역사를 서술할 때의 어려움은 시대를 명쾌하게 구분지어 이 시대에는 무슨 일이 이루어졌고 다음 시대에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쓰기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전쟁 기록조차도 그런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일들이 서로 겹쳐서 진행되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나중에 큰 의미를 갖게 되는 일도 처음에는 작고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필연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이 진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우연의 중첩이라는 생각도 진리가 된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쁜 우연과 좋은 우연을 구별하여 대처하는 능력, 나쁜 우연은 되도록 빨리 처리하여 거기에서 벗어나고 좋은 우연은 필연으로 가져가는 능력이 아닐까. 대기만성형의 로마인이 다른 민족에 비해 뛰어난 것은 바로 이런면에서의 재능이 아닐까 여겨진다. 기원전 283년,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뒤꿈치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 앞바다에 10척의 로마 선박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 동안 줄곧 육상 민족이었던 로마도 나폴리 일대를 '로마 연합'에 끌어들였을 무렵부터 소규모나마 함대를 갖게 되었다. 그 함대 가운데 10척이 태풍에라도 쫓겼는지, 타렌툼 항구로 피해 들어온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타렌툼과 로마 사이에는 로마가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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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움족과의 전쟁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부터 이미 서로의 세력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약이 맺어져 있었다. 타렌툼 사람들은 이 사고를 협약 위반으로 받아들이고, 항구에 들어온 이유조차 묻지 않고 당장 실력행사에 나섰다. 통산 민족인 그리스인이 세운 타렌툼은 해운국이기도 했기 때문에 해상에서는 로마도 타렌툼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섯 척은 당장 침몰하고, 승무원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나머지 다섯 척은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로마는 자국 선박들이 항구에 들어간 것이 침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타렌툼 시민들은 손해배상 교섭에 응하기는커녕, 손해배상을 요구하러 방문한 로마 사절단의 그리스어 발음이 엉터리라고 비웃으며 쫓아냈을 뿐이다. 로마는 전쟁을 결의한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군항으로 쓰이고 있을 만큼 타렌툼은 천연의 좋은 항구다. 이 타렌툼은 로물루스가 동족한테 밀려난 라틴족 3천 명을 이끌고 테베레 강가에 로마를 건국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스파르타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건설한 도시국가였다. 도시국가로서는 로마와 거의 같은 '나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타렌툼과 시라쿠사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식민도시는 이미 도시국가 건설의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이 세운 도시였다. 이런 나라들이 맨 먼저 성장하고, 그 일대가 '대 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릴 만큼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의 이 시대, 본토인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및 테베 같은 유력한 폴리스들이 차례로 대왕이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이전의 혼란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을 통틀어 '대 그리스'라고 부른 것도 본국의 쇠퇴와는 반대로 계속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일보 전진과 반보 후퇴를 거듭하며 서서히 성장하고 있던 기원전 5, 6세기에 이탈리아 반도를 사실상 지배한 것은 북쪽의 에트루리아인과 남쪽의 그리스인이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와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에트루리아인과는 일찍부터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남쪽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인과는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직접 접촉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로마인은 통상 민족이 아니었고,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와 남부 이탈리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그리스계 도시국가 사이에는 많은 민족과 넓은 땅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그 민족을 하나씩 제패하여 동맹국으로 만들면서 세력권을 넓혔고, 오랫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삼니움족을 굴복시켰다. 이제 로마인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과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대 그리스'의 그리스인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본국의 그리스인과 정치적 유대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스파르타인의 식민지로 출발한 타렌툼도 군사 국가인 스파르타와는 반대로 아테네적인 통상 국가로 번영해 왔다. 하지만 스파르타인이 건설한 타렌툼도, 코린트인이 건설한 시라쿠사도, 그리스적인 성향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도시 국가로 태어난 뒤에도 계속 도시국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중심인 도시와 그 주변을 제외하고, 그 이상의 범위까지 세력을 넓히는 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제외하고는 폐쇄사회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는 뜻이다. 통틀어 '대 그리스'라고 불리긴 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단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본국의 폴리스들이 페르시아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공동보조를 취한 적이 없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그리스인의 뛰어난 지혜를 투입한 만큼, 이들 도시들의 경제력은 막강했다. 로마인도 당초에는 그리스계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타렌툼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게 분명하다. 침몰당한 선박과 살해된 승무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한 단계에서는, 원로원에서도 손해배상을 받는 곳으로 일을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의원이 다수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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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고 있었다. 당시의 로마는 삼니움 전쟁을 겨우 끝내고, 넓어진 세력권에서 기반을 다지는 시기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타렌툼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긴 했지만, 군대를 당장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타렌툼 쪽에서 로마의 결의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스파르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치고는 불가사의하게도 타렌툼 사람들은 싸움을 싫어하여, 자국의 방어를 외국 용병에게 맡기는 관습이 있었다. 타국에서 병사들을 불러들여야 하니까, 빨리 손을 써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자위 능력이 없는 민족의 숙명이지만, 타렌툼은 지금까지 그런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그럴 수 있는 경제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타렌툼이 용병으로 점찍은 것이 북부 그리스의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였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이름높은 장수를 스카우트 했으니까, 타렌툼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왕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타렌툼은 치로스 왕에게 이탈리아에 와서 로마를 공격해 준다면 35만 명의 보병과 2만 명의 기병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무렵, 지중해 세계에서도 특히 동쪽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증후군'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 알레산드로스 대왕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아직 4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대왕의 위업은 그의 원정에 참가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야심만만한 그리스 남자치고, 자기도 알렉산드로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많은 그리스인들 가운데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주목받고 있었던 자가 바로 피로스였다. 피로스한테도 그럴 마음은 충분히 있었다. 그가 다스리는 에페이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낳은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했다. 혈연관계를 의식하는 피로스는 알렉산드로스를 본받았는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우스를 사랑했고 이집트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대왕의 뒤를 이을 자격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과시했다. 타렌툼의 사자가 찾아온 해 , 피로스는 마흔 살 안팎이었다고 한다. 무장으로도 사나이로서도 가장 충실한 나이였던 셈이다. 피로스는 로마라는 미지의 국가와 싸우는 데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모양이지만, 타렌툼이 준비하겠다고 약속한 37만 명의 병력에는 관심을 가졌다.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이 유쾌한 사나이의 유쾌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날 왕의 측근인 키네아스가 피로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로마인은 뛰어난 전사라는 평판이 자자합니다. 게다가 많은 부족을 거느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 로마인에게 우리가 이기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피로스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야 뻔하지 않은가. 일단 로마인을 굴복시키면, 그 땅에 사는 다른 민족 가운데 내 적수가 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대하고 풍요로운 이탈리아 전체가 내 것이 되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야." 키네아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탈리아를 정복한 뒤에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와 가깝다. 농경지가 풍부하고 인구도 많은 그 섬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시칠리아는 간단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가토클레스가 떠난 뒤, 시칠리아 도시들은 안팎으로 싸움이 끊이지 않아서 지금도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동시대인인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도 '대왕 증후군'에 걸려 있었다. 그는 시칠리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강대국 카르타고에 싸움을 걸어, 한때는 지중해 서부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피로스에게는 그의 몇 번째 아내의 아버지이기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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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아가토클레스는 이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9년 전에 병사했다. 키네아스는 다시 왕에게 물었다. "시칠리아 정복은 말씀하신 대로 간단히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럼 시칠리아를 제패하고 나면 우리의 원정도 끝나는 것입니까?" 피로스는 이 질문에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신들이 인간에게 승리를 베풀어 준다면, 그 승리를 더 큰 사업의 기반으로 삼는 곳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은이다. 시칠리아를 손에 넣으면, 리비아와 카르타고도 완전히 가시 거리에 들어오게 된다. 아가토클레스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우리라고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업도 끝나면, 지금 우리의 적들도 겁을 집어먹겠지." 그러자 키네아스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얻으면, 마케도니아도, 아니 그리스 전체가 우리 앞에 무릎을 끓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이 질문에 피로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쉬는 것도 신물이 날 만큼 푹 휴식이나 취해 볼까. 날마다 술을 마시면서 보내는 거야.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지나간 싸움들을 즐겁게 회상하며 지내는 건 어떠냐?" 키네아스는 왕에게 조심조심 물어 보았다. "지금 술에 취하면 안될까요? 그걸 금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지금도 즐겁게 회상할 전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많은 피를 흘리고 많은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그리고 남에게 해를 입히면, 우리도 해를 입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이 질문만은 피로스의 비위에 거슬린 모양이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피로스는 우선 선발대로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타렌툼으로 건너가라고 키네아스에게 명령했다. 본대에 해당하는 2만 명의 보병과 3천 명의 기병, 2천 명의 궁병, 500명의 투석기병, 그리고 코끼리 20마리는, 타렌툼에서 보내기로 약속한 수송선단이 도착한 뒤에 피로스가 몸소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다. 기원전 280년의 봄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 그리스 북서부에 자리잡고 잇는 에페이로스에서 이탈리아까지는 아드리아 해의 출구만 가로지르면 된다. 오늘날의 연락선이라면 한밤중에 브린디시를 출발해도 동트기 전에는 그리스 땅에 도착할 수 있다. 얼마 전에도 알바니아 난민들이 낡아빠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이탈리아인들을 놀라게 했다. 타렌툼까지 가려면 장화의 뒤꿈치를 돌아서 가야 하니까, 여정이 좀더 길어진다. 그래도 하루 이상은 걸리지 않는다. 2천 300년 전에는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배의 속도가 느렸지만, 그래도 며칠만 배를 타면 충분했을 것이다. 따라서 피로스의 원정을 방해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봄에도 이따금 닥쳐오는 태풍이었다. 태풍 때문에 피로스는 2천 명의 병사와 코끼리 두 마리를 잃었다. 피로스를 맞은 타렌툼 거리는 임전태세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야외극장이나 체육관은 시민들로 가득 찼고, 약속한 37만 명의 병력은 그림자도 없었다. 피로스는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는 당장 극장과 체육관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타렌툼 시민들은 용병을 고용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로스의 이런 태도는 타렌툼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전투에 적합한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군이 남하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피로스는 그리스에서 데려온 휘하 병력만 이끌고 싸우기로 결심했다. 통틀어 2만 6천 500명의 병사와 코끼리 18마리가 전부였다. 이 무렵에는 로마군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는 것은 도저히 바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애당초 타렌툼과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로마는 에트루리아 제압을 마무리하는 일에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로스가 타렌툼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남쪽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집정관 레비누스가 이끄는 절반의 병력뿐이었다. 그래도 북쪽에 집중해 있던 병력의 절반을 떼내어 남쪽으로 보낸 것은 로마도 피로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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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37만 명의 병력을 준비하겠다는 타렌툼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타렌툼만한 재력을 갖고 있으면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용병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허풍을 믿은 쪽을 탓할 수도 없다. 하지만 피를 흘리면서 조국을 지켜본 경험이 없는 타렌툼 사람들은 존망의 위기가 닥쳐왔는데도 그것을 감지할 능력마저 잃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오히려 타렌툼 쪽이고, 타렌툼이 두 손 놓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정상이다. 로마가 두려워한 것은 피로스라는 이름난 장수와 37만 명의 병력이 결합하는 사태였다.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피로스가 37만 명의 병력과 결합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다. 전체 병력을 다 합해도 기껏해야 4, 5만밖에 안되는 로마로서는 전체 병력이 남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로마와 피로스의 첫 전투가 타렌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헤라클레아에서 벌어진 것은 로마의 초조감을 보여준다. 헤라클레아는 해안에 면한 평지다. 이런 지형이 불리하다는 것을 로마인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코끼리라는 거대한 동물을 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양군의 전력은 거의 대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휘하 병력만 이끌고 전투에 임한 피로스의 병력은 2만 6천 500명의 병사와 코끼리 18마리다 한편 집정관 레비누스가 이끄는 로마 연합군은 로마군 병사 8천 명에 동맹국 병사 1만 천 명을 합해서 모두 2만 4천 명이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양군 모두 9대 1 정도. 고대 전투의 주역은 어느 민족이든 중무장 보병이었다. 네모꼴로 진을 치고 빽빽이 늘어서서 사우는 전투대형을 '밀집 방진'이라고 한다. 똑같이 밀집 방진을 취하고 사우는 중무장 보병군단이라도, 그리스의 보병군단은 '팔랑크스'라고 부르고, 로마의 보병군단은 '레기온'이라고 불렀다. 레기온이 '백인대'(켄투리아)라는 명확한 핵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체로는 한결 견고해 보인다. 이것도 마케도니아의 중무장 보병단을 활용하여 동방 원정을 완수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우산 가운데 하나였다. 피로스와 로마군의 싸움은 군사 면에서도 기존세력인 팔랑크스와 신흥세력인 레기온이 처음으로 격돌한 전투였다. 포진을 끝낸 로마군을 언덕 위에서 시찰하고 있던 피로스는 옆에 대기하고 있는 키네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야만인들, 진형만 보면 그렇게 야만스럽지는 않은 것 같군. 그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내일 시험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인은 타민족을 모두 '바르바로이', 즉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헤라클레아 평야에 포진을 끝낸 양군의 진용은 양 극단이었다. 로마군은 삼니움족을 상대로 싸운 경험을 잊지 못했는지, 세로로 긴 진용을 취하고 있었다. 이것은 평지보다 산지에 적합한 진용이다. 한편 피로스의 군대는 가로로 긴 진용을 취하고 있었다. 로마인의 예상과는 달리, 18마리의 코끼리는 앞쪽에 배치되지 않고 좌우 양쪽 날개에 배치되어 있었다. 피로스는 중앙부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로마의 중무장 보병군단을 코끼리떼로 공격하여 격파하는 전술이 아니라, 로마의 레기온은 아군의 팔랑크스에 맡겨 놓고, 근대전에서의 전차에 해당하는 코끼리를 적의 양쪽 날개에 배치되어 있는 기병과 대결시키는 전술을 택했던 것이다. 전황은 피로스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그리스군 보병이 로마군 보병과 맞서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사우는 동안, 코끼리떼는 로마군 기병대를 여지없이 격파했고, 그 틈에 피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기병대가 로마군의 배후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피로스는 훗날 한니발이 병법의 스승으로 삼은 장수답게, 용맹하고 과감하게 공격하는 무장과 침착하고 냉정한 전술가의 양면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면서도, 시시각각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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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전투의 전모를 머리에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포위된 로마군은 7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전쟁터에 남겨둔 채 패퇴했다. 피로스 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전사자만 해도 4천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에페이로스에서 온 피로스가 입은 손실은 보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로마군이 패했다는 소식은 당장 이탈리아 남부 일대에 퍼져, 로마 세력권에 편입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이 피로스 쪽에 지원했기 때문에, 병력 면에서는 피로스도 당장 손실을 만회할 수있게 되었다. 서전의 승리와 이 전력 보충에 고무된 피로스는 지체없이 북상하여 수도 로마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로마로 진군하는 동안, '로마 연합'에 가담하고 있는 부족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리라는 것도 계산에 넣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피로스는 예상과는 달리, '로마 연합'의 가맹국들은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나폴리도, 카푸아도, 그리고 그토록 끈질기게 로마와 싸우다가 마침내 굴복한 삼니움족까지도 피로스의 유혹을 거절했다. 바로 이것이 로마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쳐들어간 피로스의 기세를 꺾어 버렸다. 건설된지 얼마 되지 않은 평탄하고 곧은 아피아 가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 뿐이니까, 코끼리를 데리고 행군하다 해도 어려울 리는 없었다. 로마도 이것을 알고, 수도 방위를 위해 무산자 계급 시민까지 소집해 놓고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프롤레타리'라고 불리는 이 시민들은 납세 의무를 면제 받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직접세 대신이었던 병역도 면제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까지 소집되었다는 것은 이번 사태의 중대성을 로마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가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었던 것도 아닌 모양이다. 독재관도 임명하지 않았다. 전력의 절반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도 역시 로마인의 평소 방식대로 피로스와의 서전에서 패한 집정관 레비누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고, 집정관 자리에서 해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이 두려워하고 있던 사태는 오지 않았다. 피로스는 모든 것을 감추고 있었지만, 인내심만은 갖지 않은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쳐들어왔지만, '로마 연합'이 해체되지 않았다는 것과 수도 로마에서 무산자 계급까지 소집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회군해 버린 것이다. 타렌툼으로 돌아간 피로스는 로마에 강화를 제안했다, 아니, 로마와 타렌툼 사이의 강화를 자기가 중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측근인 키네아스를 로마에 파견하여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로마는 앞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를 존중하고 불가침을 선언할 것. 둘째, 그리스계 도시들과 로마 사이에 쌍방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를 두기 위해 그 지역에 사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로마 연합'에서 해방하여 다시 독립시킬 것. 만약에 로마가 두 번째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이 지역에 전략적 이유로 건설한 루체리아(오늘날의 루체라)와 베누시아라는 두 식민지는 철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베누시아까지 건설이 끝난 아피아 가도도 그 정략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강화를 교섭하도록 키네아스를 로마에 보낸 피로스는 로마의 부인들에게 줄 값비싼 선물까지 딸려 보냈다. 뇌물이 아니라 단순한 선물이었겠지만, 로마 여인들은 그처럼 세련된 배려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의 선물 따위는 받을 수 없다고 냉담하게 퇴짜를 놓았을 뿐이다. 로마인들은 피로스가 제의한 강화를 진지하게 토의한 모양이다. 이번 전쟁은 원래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정복하려고 시작한 전쟁도 아니었다.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피로스의 교묘한 전술과 코끼리 부대의 파괴력을 직접 체험한 지금은 로마인도 주눅이 줄어 있었다.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는 강화를 맺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알고 격분한 것이 노령 때문에 은퇴해 있던 아피우스 클아우디우스다. 그는 아피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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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건설하여 정략적 의미를 가진 로마 가도 건설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로마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에는 아피우스라는 이름이 대물림되어, 이 이름을 가진 남자가 많다. 이들 가운데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를 다른 아피우스와 구별하기 위해, 그만은 '재무관 아피우스'나 '장님 아피우스'라고 부른다. 노령으로 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거동조차 불편해진 아피우스는 남의 팔에 의지하여 오랜만에 원로원에 나타났다. 그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것은 연설이라기보다는 호된 꾸지람이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떠나는 것이 강화의 전제 조건이고, 우리집 마당에 밀고 들어와 눌러앉아 있는 적은 강화든 뭐든 교섭 상대가 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이 원로원의 분위기를 바꾸어 버렸다. 그래도 로마는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할 결심까지는 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선은 포로의 몸값을 가진 특사를 타렌툼의 피로스에게 파견했다. 이 특사에게 피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탈리아에 장사를 하러 온 게 아니오. 나와 당신들의 싸움은 전쟁터에서 결말을 냅시다. 다만, 포로가 된 병사들은 강화 체결을 미리 축하하는 뜻으로 석방할 테니까, 데리고 돌아가도 좋소." 로마의 특사는 이듬해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브리키우스였다. 피로스가 강화를 미리 축하하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덥석 받아들일 인물이 아니었다. 600면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강화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포로들을 다시 피로스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귀환한 파브리키우스를 맞아, 로마 원로원은 다시 토의를 시작했다. 결국 피로스의 제안은 거절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600명의 로마 병사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다시 헤어져 타렌툼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거의 같은 무렵, 로마 원로원을 몰래 찾아온 외국인이 있었다. 피로스의 시의가 보낸 밀사였다. 그는 피로스를 독살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대가로 무엇을 해줄 것이냐고 물으러 온 것이다. 원로원은 이 일의 자초지종을 피로스에게 알렸다. 피로스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그 보답으로 로마군 포로 600명을 다시 돌려보냈다. 로마 쪽도 그냥은 받을 수 없다면서 로마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그리스 병사들을 송환했다. 로마와 피로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해가 바뀌어 전투하기에 적합한 봄이 찾아왔다. 강화가 성립되지 않은 이상, 피로스 말대로 전쟁터에서 결말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로마도 전쟁터를 신중하게 골랐다. 피로스와 맞붙을 땅으로 아우디우스라는 곳이 선정되었다. 루체리아와 베누시아라는 양대 식민지 중간에 있고, 로마 세력권의 최전선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지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어서, 피로스의 시병대와 코끼리 부대에 종횡무진의 활약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로마군으로서는 절묘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양군의 전력은 이번에도 막상막하였다. 두 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의 병력은 통틀어 4만, 피로스의 군대도 지원병이 가담했기 때문에 역시 통틀어 4만 명 정도였다. 지난번 전투 때와는 달리, 숲이 양쪽에서 바싹 다가와 있어서 전쟁터가 좁았다. 피로스는 이 지형에 맞추어 전술을 바꾸었다. 중무장 보병 군단의 움직임에 보다 유연성을 준 것이다. 그래도 역시 기록이 많은 전쟁터는 말과 코끼리의 움직임을 둔화시켜, 첫날 전투는 어느 쪽이 우세인지 모른 채 끝났다. 이튿날 피로스는 또다시 전술을 바꾸었다. 좀더 평탄한 지역으로 로마군을 유인해낸 것이다. 이 유인작전이 너무나 교묘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군은 유인당하고 있다는 곳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단 유리한 지형으로 전쟁터가 옮겨지면, 피로스의 평소 전술이 효력을 발휘한다. 전황은 서전 때와 똑같이 전개되었다. 로마군은 집정관 한 명이 전사했을 만큼 큰 손실을 입었고, 전사자는 6천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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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 쪽도 손실이 컸다. 전사자는 3천 여 명. 그 대부분은 그가 에페이로스에서 데려온 그리스 병사였다. 로마가 패퇴하는 것을 보면서도 피로스의 가슴은 후련하지 않았다. 그는 옆에 있는 키네아스에게 말했다. "로마군에게 이길 때마다 아군의 전력도 줄어드는구나." 그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피로스의 인내력을 시험하기에는 충분했다. 패주하는 적도 뒤쫓지 않고 타렌툼으로 돌아온 피로스에게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서 사절이 찾아왔다. 카르타고의 공격으로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로마인과의 싸움에 염증이 나있던 피로스는 자세히 물어 보지도 않고 이 요청을 수락했다. 시칠리아만 수중에 넣으면 그 다음은 카르타고 차례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피로스는 타렌툼 시민들에게 시칠리아 공략은 쉽게 끝날 테니까 곧 돌아오겠다고 말한 다음, 휘하 병력만 이끌고 메시나 해협을 건넜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수중에 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 동안 피로스를 괴롭힌 것은 카르타고인이 아니라 동포인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이었다. 로마와 거의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건국 초기부터 이들의 힘은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은 사람들의 정신을 복잡하게 만든다. 로마인한테는 훌륭히 통했던 피로스의 기사도 정신도 난숙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한테는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시칠리아에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그리스인 특유의 강한 독립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동포인 그리스인끼리도 협조하는 정신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피로스는 이들의 내분이나 배신에 우롱당하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신변의 위험까지 겪어야 했다. 피로스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타렌툼으로 돌아왔다. 3년을 허송세월한 뒤에 타렌툼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d제 절반으로 줄어버린 휘하 병력뿐이었다. 타렌툼 시민들도 시칠리아의 동포와 다를 게 없었다. 돌아온 피로스를 전보다 더 백안시할 뿐, 그가 군대를 재건할 수 있도록 원조하는 것조차 아까워했다. 한편, 로마는 이 3년을 허송세월하지 않고 '로마 연합'을 단단히 굳히는 데 활용했다. 가맹국은 이제 모두 확고한 로마 편이었다. 기원전 275년 여름,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피로스는 로마와의 전투에 운을 걸어 보기로 결심했다. 풀어 둔 척후병이 가지고 돌아온 정보에 따르면, 로마군은 둘로 나뉘어, 2개 군단은 말벤툼(오늘날의 베네벤토)에 있고, 나머지 2개 군단은 그보다 남쪽에 있는 산지를 행군중이라는 것이었다. 피로스는 우선 말벤툼에 있는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로마군의 절반을 격파한 뒤, 곧바로 나머지 절반을 공격하자는 곳이다. 처음 이탈리아 땅을 밟았을 당시에 비해 절반의 전력밖에 갖지 못한 피로스가 쓸 수 있는 방책은 그것뿐이었다. 말벤툼은 아피아 가도의 중간쯤에 있다. 가도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금방 도착할 수 있다. 로마군 전체가 집결하기 전에 전투를 끝내고 싶은 피로스로서는 행군 시간을 되도록 줄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전력의 열세를 조금이라도 벌충하기 위해, 피로스는 말벤툼에 있는 로마군을 동트기 전에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아피아 가도로 나가기 위해 산지를 행군하는 데 예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아피아 가도를 급히 북상하여 말벤툼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피로스의 공격은 그러나 로마군에게는 기습이 아니었다. 코끼리 울음소리에 놀란 길가의 주민들이 벌써 말벤툼의 로마군에 알려오고 난 후였다. 집정관 마니우스는 피로스에게 미처 진형을 갖출 틈도 주지 않고 공세를 폈다. 격전이 벌어졌지만, 전황은 줄곧 로마군이 우세한 가운데 전개되었다. 로마군 병사들은 코끼리 몇 마리 잡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피로스의 접근을 알아챈 단계에서 이미 집정관 마니우스는 조금 떨어진 산지를 행군하고 있는 아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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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전령을 보내 위급을 알렸다. 아군이 도착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로마의 전체 병력이 집결하는 것을 피하려던 피로스의 전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분명해졌다. 피로스는 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다. 타렌툼까지는 북상했을 때처럼 순식간에 도착했다. 그 해 초가을, 피로스는 타렌툼을 떠나 자신의 왕국인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피로스이 원정에 따라갔던 2만 8천 500명의 병사 가운데 왕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보병 8천 명과 기병 500명뿐이었다. 그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던 코끼리는 몇 마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피로스는 그로부터 3년 뒤에 스파르타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이름높은 장수였던 피로스를 귀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으로 로마는 일약 국제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라틴 민족의 일개 부적에 불과했던 로마는 이 전쟁을 계기로 지중해 동부 국가들까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이집트에서 특사가 도착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와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있던 이집트가 로마에 사절을 보낸 것이다. 이 특사의 임무는 로마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인은 이렇게 국제 사회에 데뷔한 뒤에도 본래의 과업을 잊지 않았다. 피로스에게 기념할 만한 승리를 거둔 전쟁터 말벤툼은 '나쁜 바람'이라는 의미인데, 로마인은 이 이름을 '좋은 바람'이라는 뜻의 '베네벤툼'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기원전 273년, 타렌툼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남에게 의지할 가망도 사라진 타렌툼은 간단히 함락되었다. 함락된 타렌툼을 로마는 6동맹국으로 만들었다. '로마 연합'의 다른 동맹국과는 달리, 타렌툼에는 자치권을 주지 않았다.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제일 좋은 이 항구를 직할 해군기지로 삼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오늘날에도 군항인 이 타란토에서는 1991년의 걸프 전쟁 때도 중동으로 가는 함대가 출항했다. 아피아 가도는 곧 타렌툼까지 연장되었다. 몇 년 뒤에는 타렌툼에서 브린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어, 가도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아피아 가도가 완성되었다. 기원전 267년에 로마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화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필요에 쫓길 때마다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사용하는 화폐로 해결했다. 자국 화폐를 갖는다는 것은 로마가 대외관계를 갖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은 이리하여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기원전 270년 무렵인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아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뒤부터 헤아리면, 무려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걸린 사업이었다. 메시나 해협의 본토 쪽에 서면, 시칠리아는 바로 코앞에 있다. 피로스가 시칠리아 저편에서 카르타고를 보았듯이, 로마인도 시칠리아 저편에 있는 카르타고를 바라보게 되는 데에는 그후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