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안산성지·상서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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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안산성지·상서고분군 최성락 정영희 고용규 김영훈 목포대학교박물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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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안 안산성지·상서고분군

    최 성 락

    정 영 희

    고 용 규

    김 영 훈

    목포대학교박물관

    신 안 군

    2008

  • 53

    원색사진 2. 상서고분군 근경

    원색사진 1. 상서고분군 원경

    원색사진 4. 상서고분군 13호 석실분

    원색사진 3. 상서고분군 9호 석실분

  • 97

    원색

    사진

    5. 안

    산보

    루전

    원색

    사진

    7. 안

    산보

    루북

    벽일

    원색

    사진

    6. 안

    산보

    루동

    벽일

    원색

    사진

    8. 안

    산보

    루내

    부봉

    수연

    대기

    단부

    축조

    상태

    원색사진 9. 남도진지도(1872년)에 나타난 안산보루(돈대)

    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상태(안산보루)

  • Ⅰ. 조사개요

    이 보고서는 신안군의 의뢰를 받아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신안군 신의면 상태서리 상서고분군과 안

    산성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일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이다. 지금까지 신의면 지역에는

    유물산포지 4개소, 고분 2개소, 성곽 1개소의 고고유적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들은

    바다가 잘 조망되는 산의 정상부나 사면부, 그리고 해안가 주변에 집중되어 있어 유적의 형성배경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도서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동안 알려진 유적들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

    지 않아 정확한 성격규명이 어려운 상태이다. 또한 관리소홀 등의 이유로 인하여 방치된 채 훼손되어

    가는 실정이다. 이에 신안군은 학술적으로 연구가치가 높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서고분군과 안산성

    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통하여 그 성격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정비와 복원 방향을 설정하고, 또

    학술조사 성과를 토대로 이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함과 더불어 정비·복원하여 후손들에게 역사교

    육의 장과 관광자원으로서 활용하고자 한다. 본 대학박물관은 2008년 1월 3일에 신안군과 계약을 체

    결하고 본격적인 정밀지표조사에 착수하였다.

    지표조사 기간 및 조사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조사기간 : 2008년 1월 3일~2008년 3월 3일

    준비 및 문헌조사 : 2008년 1월 3일~2008년 1월 9일

    1차 현지조사 및 정리 : 2008년 1월 10일~2008년 1월 27일

    2차 현지조사 및 정리 : 2008년 1월 28일~2008년 2월 14일

    보고서 작성 및 제출 : 2008년 2월 1일~2008년 3월 3일

    2. 조사단 구성

    조 사 단 장 : 최성락(목포대학교 박물관장)

    책임조사원 : 정영희(목포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조 사 원 : 고용규(문화재청 무안공항문화재감정관, 목포대학교 특별연구원)

    김영훈(목포대학교박물관 조교)

    목 차

    Ⅰ. 조사개요 13

    Ⅱ. 조사지역 개관 15

    1. 위치와 환경 15

    2. 고고·역사적 배경 18

    Ⅲ. 조사내용 25

    1. 상서고분군 25

    2. 안산보루 34

    3. 주변유적 42

    Ⅳ. 종합고찰 44

    Ⅴ. 보존과 활용방안 51

    Ⅵ. 맺음말 49

    1311

  • Ⅱ. 조사지역 개관

    1. 위치와 환경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는 신안군은 무안반도에 인접한 서남해상의 다도해로서 총 1004개(유인

    도 72개, 무인도 932개)의 도서로만 구성되어 있다. 현재 1읍(지도읍), 13개면(도초면, 비금면, 신의

    면, 안좌면, 암태면, 압해면, 임자면, 자은면, 장산면, 증도면, 팔금면, 하의면, 흑산면)과 사업소 7개소,

    출장소 9개소를 갖고 있으며, 면적은 654.34㎢ 이다. 군은 동쪽으로 목포시의 유달산을 바라보며 해

    남군과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무안군과 영광군이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진도군, 제주도 및 태

    평양을 바라보며 인접해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황해를 건너 멀리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위도상으로 동단(신안군 압해면 가란리)이 동경 126°23′00″북위 34°06′30″, 서단이(신안군 흑

    산면 가거도리 소국홀도) 동경 125°05′00″북위 34°06′45″, 남단(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 125°

    05′30″북위 34°04′15″, 북단(신안군 임자면 재원리 소비치도) 125°54′30″북위 35°12′30″이다.

    지형은 육지의 침강과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인하여 형성되었다. 특히 도서지역의 서쪽에 위치한 언

    덕은 파도의 강한 침식작용으로 암벽과 소규모의 모래사장들이 해안선을 따라 연달아 나타나고 있다.

    또한 도서 주변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하여 갯벌이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경지, 염전, 양식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산지는 대부분이 100m 이하의 구릉성산지를 이루고 있으나 임자면의 대둔산

    (319.5m), 장산면의 오음산(208.2m) 등의 비교적 높은 산들도 보인다. 바다 깊이는 지형도를 판독

    해 보면 대부분의 해역이 10~20m 정도이나 신안군과 진도군의 접경해역에서는 30~40m 정도에 이

    르는 곳도 있다.

    기후는 한반도 전체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중에서도 남서쪽은 바다로 분리되어 있다. 여름

    에는 해양성인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이 크며, 겨울에는 대륙성인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이 나타나

    서 여름의 고온다습한 날씨와 겨울의 추운날씨가 나타난다. 기압차는 육지부에 비해 조금 적게 나타

    난다. 1월 평균기온은 1.0°C, 8월 평균 기온은 26.1°C, 연평균 기온은 12.9°C, 연강수량은 1,085.1㎜

    이다. 선박 통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안개일수는 22일로 같은 기간 전남의 내륙지방보다 높게 나

    타났는데 해양성 기후의 영향과 도서지방이라는 지형적인 영향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입지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육지부와는 다른 독특한 지역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보 조 원 : 김세종(목포대학교박물관 연구원)

    보 조 학 생 : 김민정(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3년)

    김민근(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1년)

    김 설(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1년)

    정밀지표조사에 앞서 그 동안 알려진 관련자료를 수집·검토한 후 현장조사에 착수하였다. 신의면

    상태서리 상서고분군은 지역주민들에 의해 1990년대 중반부터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후 방송매

    체를 통하여 몇 차례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학술적인 지표조사나 발굴조사가 시행되지 않아 이 유

    적의 성격을 잘 알 수 없었던 지역주민들은 큰 돌이 노출되어 있어 고인돌로 알고 있었다. 안산성지

    는 198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으나 정확한 축조시기나 축조방법 등은 조사되지 못

    하였다.

    현장에서의 정밀지표조사는 상서고분군과 안산보루의 분포현황과 상태, 축조시기, 축조방법 등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현재 드러나 있는 유구에 대한 전반적인 측량(1/200)과 사진촬

    영을 병행하였고, 지표상에 노출된 유구에 대해서는 실측과 관찰을 통하여 상서고분군의 성격을 파악

    하고자 하였다. 이외에도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유물산포지 1개소, 고분군 1개소를 확인

    하였다.

    주변지역의 유적들은 이미 알려진 유적이지만 당시 조사에서 미비한 점들을 보완하고, 상서고분군

    과 안산성지(보루)의 관련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서리유물산포

    지와 자실리고분군은 상서고분군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밀지표조사에 재정·행정적으로 지원을 해주신 신안군청과 현지 조사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신의면 면장님 및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1514

  • 17

    그림 2. 유적 위치 및 주변유적 분포도(1:5000)

    유적번호

    1

    2

    3

    4

    유 적 명

    자실리 고분군

    서리유물산포지

    안산보루

    상서고분군

    16

    그림 1. 유적 위치 및 주변유적 분포도(1:25000)

    유적번호

    1

    2

    3

    4

    유 적 명

    자실리 고분군

    서리유물산포지

    안산보루

    상서고분군

  • 목적으로 설립된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에 의해 암태도5), 장산·하의도6), 안좌도7), 지도8), 흑산

    도9), 압해도10), 비금도11), 자은도12), 임자도13)가 연차적으로 조사되었다. 이 조사에서 고고·역사·민

    속·언어·건축 등 각 분야의 전문 연구진이 참여하여 도서지역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

    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86~1987년에는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신안군에 분포하고 있는 문

    화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졌으며14), 1988년에는 그 동안 신안지역에 대한 조사성과

    를 종합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심포지엄이 도서문화연구소 주최로 개최되기도 하였다.

    1995년에는 목포시의 문화유적조사와 더불어 압해도에 대한 지표조사가 함께 실시되었다15). 그리고

    1999년에는 흑산도 상라산성과 그 주변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졌다16). 2000년대에는 압

    해도 조사를 통해 24개소에 달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새롭게 확인되기도 하였다17). 이외에도 최근

    들어 도서지역 지방상수도시설이 확충되면서 목포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많은 유적들이 추가로 확인되었다18). 또한 압해도 신용리 건물지19)와 가거도 패총20) 등이 시굴조사 되

    었다. 이를 토대로 신안군의 문화적 성격을 시대별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말해 지리적 격리성 때문에 정치·경제·문화·교통·교육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상대적으로 열

    악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많은 인구가 육지의 타 지역으로 빠져나가 저개발의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의 경제개방으로 서해안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이 커지

    고 해양관광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도서지역에 대한 투자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도서

    지역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연륙·연도화 사업이 연차적으로 진행되어 지도~해제(1974), 안

    좌도~팔금도(1989), 비금도~도초도(1996), 자은도~암태도(1996), 암태도~팔금도, 지도~사옥도

    는 최근 완공되었다. 압해도~목포 사이에는 현재 공사가 진행되어 올해 완공될 예정이다.

    신의면은 신안군의 남부에 있는 섬으로 목포에서 35마일 떨어진 동경126°5′북위34°35′에 위치하

    고 있다. 부속섬으로 유인도 3개와 무인도 23개가 있다. 인구는 2005년말 기준으로 1,832명(남 948,

    여 884)이 거주하고 있으며, 특산품으로는 천일염이 유명하다. 연혁으로는 삼국시대 백제의 거지산

    현에, 통일신라시대에는 압해군의 영속인 안파현에, 고려시대에는 장산현에,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하다가 1859년(고종 32)에 지도군 하의면에 편입되었다가 일제강점기때인 1914년에는 하의면에

    포함되었다. 이후 1969년 무안군에서 신안군으로 분군이 이루어지면서 신안군에 속하였다가 1974

    년 하의면 신의출장소가 설치되면서 1983년 신의면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신의면에는 행정리 14개,

    법정리 5개로 구성되어 있다.

    2. 고고·역사적 배경

    신안군의 문화유적 조사는 195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속해 있던 서해도서팀에 의해 시작되었다. 서

    해도서팀에는 역사·고고학·사회·언어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 팀은 대흑

    산도를 조사하여 패총과 지석묘군, 상라산성 등을 발견하였다1). 이 후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

    대 동아문화연구소는 남해도서지방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하여 패총 5개소, 지석묘군 5개군 35기

    와 장산면에서 백제석실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대흑산도 패총 일부를 시굴하기도 하였다2).

    1975년에는 최몽룡에 의해 임자도의 패총과 지석묘3)가, 1981년에는 이영문에 의해 압해도의 지석

    묘, 입석, 패총 등이 조사된 바 있다4). 1982년에 서남해안 도서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19

    5)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3, 『도서문화』1.

    6)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5, 『도서문화』3.

    7)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6, 『도서문화』4.

    8)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7, 『도서문화』5.

    9)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88, 『도서문화』6.

    10)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0, 『도서문화』18.

    11)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1, 『도서문화』19.

    12)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3, 『도서문화』21.

    13)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4, 『도서문화』24.

    14) 목포대학교박물관, 1987, 『신안군의 문화유적』.

    15) 이영문·조근우 1995, 「목포시의 선사유적·고분」, 『목포시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이영문·김경칠·조근우 1995, 「신안 복용리 출토 석기류」, 『석오윤용진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16) 최성락·고용규 외 2000, 『흑산도 상라산성 연구』,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신안군.

    17) 이헌종 2000, 「압해도 선사유적의 신발견」, 『도서문화』18,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8) 목포대학교박물관 2001, 『전남 남부권 광역상수도사업 신안계통 송수시설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박물관 2002, 『신안군 신의면 하태지구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박물관 2003, 『신안군 흑산면 소사지구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박물관 2003, 『신안군 장산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 『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박물관 2005, 『신안군 임자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박물관 2006, 『압해 하수처리시설 공사구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6, 『도서문화』28.

    19) 이영문·고용규·한미진 2005, 『신안군민체육관 진입도로개설공사 구간내 시굴조사보고 -신용리 건물지-』, 목포대학교박물관.

    20) 신상효·이종철·윤효남 2006, 『신안 가거도 패총』, 국립광주박물관.

    18

    1) 국립박물관 1957, 『서해도서조사보고』, 을유문화사.

    2) 김원용ㆍ임효재 1968, 『남해도서고고학』,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3) 최몽룡 1980, 「임자도의 선사유적」, 『고문화』20, 한국대학박물관협회.

    4) 이영문 1982, 「신안 압해도의 선사문화」, 『향토문화』7, 향토문화개발협의회.

  • 고 있다. 대성산성은 백제 거지산현의 古城地로 초축되어 잔존해 오다가 조선 肅宗代에 개축된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26).

    統一新羅時代에서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백제의 치소는 각기 다른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장산·하

    의도지역의 거지산현은 安波縣·長山縣으로, 압해·팔금·도초도 지역의 아차산현은 壓海郡) → 壓

    海縣으로, 암태·자은·비금도 지역은 고려시대에 陸昌縣으로, 지도·임자도 지역의 고록지현은 鹽

    海縣)·臨淄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高麗史地理志』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백제 때 古祿只縣, 阿老縣, 阿次山縣, 居知山縣 등 4

    개의 縣이 설치되었으며, 이들 縣은 고려시대까지 독립된 행정체계로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

    한 군현치소의 연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백제의 치소인 縣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완

    전한 복속지로 편입되었다고 가정할 때 근초고왕 24년(369년) 마한복속의 시기보다 후대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 문주왕~동성왕대인 475년~500년을 전

    후한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신안 도서지역에서 해로에 대한

    행정판도는 장산도의 居知山縣과 압해도에 설치되었던 阿次山縣을 장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알

    려져 있다27).

    統一新羅時代 이후의 유적으로는 관방유적이 다소 확인되었다. 압해도 송공리에 위치하는 宋孔山

    城址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산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성의 축성시기는『朝鮮寶物古蹟調査資

    料』에‘송공산성에 석루 및 우물 1개가 있으며, 入碑에는 삼한 이전부터 있었던 산성지로 구전되고

    있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를 확보하려고 쟁

    패할 때 반(反)왕건 세력으로 등장하였던 압해도민들의 거점지로서 역할을 담당하였거나 혹은 그 과

    정에서 초축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28). 이 외에도 羅末麗初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흑산

    도의 상라산성(上羅山城)과 봉수대, 추정치소 및 관사터·무심사지·제사유적 등이 있다29).

    高麗時代의 유적으로는 신용리 건물지와 王山城址가 있다. 신용리 건물지는 목포대학교박물관에

    의해 2004년도에 시굴조사되었다. 시굴조사결과 3동의 고려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청

    자잔과 접시를 비롯한 銘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왕산성지는 왕건이 고려를 건

    舊石器時代 유적은 압해도 지역의 동서리·학교리·복룡리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유물은 석

    영제의 석기로 여러면 석기, 찍개 등이다21).

    新石器時代 유적은 대흑산도 패총을 비롯하여 하태도 패총, 가거도 패총, 우이도 패총, 어의도 패

    총 등이 알려졌다. 이중 가거도 패총은 2005년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학술조사되어 신석기시대 전

    기부터 말기에 걸친 문화요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유물로는 토기류, 석기류, 골각기류 등이 출토

    되었다.

    靑銅器時代의 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지석묘가 있고, 유물로는 무문토기와 석기들이 있다. 신

    안지역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140여기로 그 형식은 남방식에 속하며 상석의 장축방향이나 군집 방향

    이 대체로 주위의 자연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유물은 압해면 복룡리유적에서 유구석부 19점, 마

    제석부 8점, 대팻날 2점 등을 비롯하여 60여 점의 석기와 많은 양의 미완성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것을 통해 석기 제작지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신의면에서도 적갈색의 무문토기편들이 수습되었다22).

    鐵器時代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패총만 3개소 알려졌는데, 토기편을 제외하면 별다른 유물이 알려

    지지 않고 있다. 유물은 대체로 타날문토기편과 함께 무문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해

    남 군곡리 패총에서 보이는 철기시대의 경질무문토기편도 있다. 또한 신안지역이 해로 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시대의 유적이 더 많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신안지역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유적은 많지 않은 편이지만, 자은면에서 옹관고분23)의 발견과 개

    배류와 유공광구소호 등의 유물로 옹관고분의 존재를 가늠해 볼 수 있으며24), 지도읍 어의리, 자은면

    구영리, 비금면 광대리, 하의면 대리, 신의면 상태서리, 장산면 도창리·다수리, 안좌면 대리·읍동리,

    압해면 동서리 등지에서 석실분이 확인된 바 있다. 특히 장산면 도창리 석실분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이후 사비(부여)지역에서 유행했던 괴임식 석실분이라는 점에서 6세기 중엽~7세기 초로 추론

    된다. 이유는 석실분의 주변에서 인골편, 철편(鐵片), 소호(小壺) 등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25).

    산성유적으로는 長山土城과 大城山城이 있다. 장산토성은 土築山城인데『新增東國輿地勝覽』을 바

    탕으로 백제 居知山縣의 古城地이자 당시 현치소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

    21

    26) 배종무 1987, 「신안지방의 역사유적」, 『신안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27) 이해준 1987, 「신안 도서지역문화의 역사적 배경」, 『신안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28) 배종무 1987, 「신안지방의 역사유적」, 『신안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29) 최성락·고용규 외 2000, 『흑산도 상라산성 연구』,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신안군.

    20

    21) 이헌종 2000, 「압해도 선사유적의 신발견」, 『도서문화』18,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2) 정영희·최미숙 2002, 「고고유적조사보고」, 『신안군 신의면 하태지구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목포대학교박물관.

    23) 이헌종 2003, 「자은도의 신발견 옹관고분」, 『도서문화』제21호,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4) 최성락 1990, 「서해안 도서지방의 선사문화」, 『도서문화』제7집,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5) 김원용·임효재 1968, 『남해도서고고학』.

    최성락 1985, 「장산도·하의도의 유적·유물」, 『도서문화』제3집,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 많은 수의 내륙인들이 도서로 유입되어 실로 대대적인「주민교체」가 이루어진다. 17세기 초의 주민

    교체는 도서지역의 오늘날의 도서문화와 직결되고, 또 현재 도서주민의 직계 혈조의 입도로서 주목된

    다. 이들「入島祖」라 불리는 조선후기 도서지역 이주민들은 현재의 도서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온

    실질적인 주역들이며, 현재 섬 지역에 남아있는 문화요소들은 바로 이들 이주민들이 그들의 前居住地

    에서의 이식시켜왔던 것을 섬의 환경에 맞게 발전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현재의 도서문화는 이

    들 문화주체들의 이주경로나 이주배경을 떠나 생각할 수는 없으며, 그런 까닭으로 섬지역문화가 직·

    간접으로 관련되어 내륙 혹은 서남해안의 문화상과 비교 조명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대체로 이들 조

    선후기의 이주민들은 왜란기의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유리된 집단들로서 주로 17~18세기에 집중적

    으로 도서지역에 정착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이주경로는 내륙의 서남단 해안지역을 경유하여 신안지

    역 섬으로 계속 이동하는 형태였다.

    朝鮮時代의 유적으로는 鎭과 城이 있으며 대부분 肅宗代에 조성되었다. 숙종 4년(1678) 흑산도에

    수군진으로 설치된 黑山鎭址, 숙종 8년(1682) 萬戶鎭으로 설치된 智島鎭址, 숙종 37년(1711) 巡撫

    御使의 書啓에 따라 설치된 荏子鎭址, 숙종 37년(1711) 초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임자도 二黑岩

    里의 大屯山城址 등이 일부 남아있다38).

    신안도서는 조선시대의 전 기간 동안 羅州牧의 관할에 편재되어 있었으며, 1985년 행정제도 개편

    과 함께 새로 설치된 지도군으로 재편된다. 당시 신설된 곳은 智島郡·莞島郡·突山郡이다. 이러한 3

    군의 설치는 전주·나주·남원지역의 여러 섬 지역 사정조사를 토대로 하여 그 범위와 관할지역이 결

    정되었다39). 당시 智島郡에 소속되었던 島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新安郡) : 智島·松島·慈恩島·岩泰島·者羅島·長山島·押海島·佳蘭島·達里島·黑山島·半

    耳島 (以上 나주목 소속), 於義島·水島·荏子·在遠島·沙玉島·後甑島·前甑島·羽田島·蟬島·梅

    花島·屛風島·古耳島 (以上 영광군 소속), 荷衣島·上台島·下台島 (以上 光州 소속), 飛禽島·睡雉

    島 (以上 해남군 소속) 箕佐島 (以上 무안군 소속)

    (靈光郡) : 鞍馬島·松耳島·石蔓島·落月島

    (扶安郡) : 古群山島·夜味島·旺登島·蝟島·飛鷹島

    국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압해도 고이리(古耳里)에 위치한다. 또

    한 비금도 광대리에 소재하는 성치산성(城峙山城)도 고려시대의 성으로 알려져 있으나「물림쌓기」등

    의 축성기법을 근거하여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성 이외에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71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금도 읍리(邑里)의 3층석탑30), 흑산도 진리(鎭里) 2구 읍동(邑洞)의 3층석

    탑과 석등이 남아있으며31), 이밖에 자은면에서 새롭게 발견된 한운도기요지, 둔장도기요지 그리고 한

    운분묘 등이 있다.

    또한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송·원대 도자기 무역선32)을 비롯하여, 안좌면 방축리 해역에서

    발견된 14세기 후반경의 안좌선33), 무안 도리포 앞바다에서 인양된 14세기 후반경의 청자유물34), 목

    포 달리도 갯벌에서 발굴한 12세기 경의 고려배35), 진도 벽파리에서 발굴한 12~13세기 경의 중국 통

    나무배36), 완도 조약도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된 11세기 경의 고려배와 녹청자유물37) 등의 고고학적

    인 자료들은 당시 국제항로상에서 신안의 위상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高麗末~朝鮮初期에 해안지역에 출몰하던 왜구의 영향은 서남해 도서지역의 경우 더욱 심하여 주

    민들이 내륙으로 피난·정착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예컨대 진도와 같은 큰 섬은 물론이고 장산·흑

    산·압해 등의 도서 주민들이 나주부근으로 이주한 것은 그러한 예이다. 이처럼 행정치소의 내륙으로

    의 이동은 결국 서남해 도서지방에서의 행정공백을 초래하였고, 내륙과 해양을 사이에 둔 대부분의

    도서지역 문화가 해상루트의 개편 혹은 그 중요성의 중감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해양을 중심한

    혼란이 격화되었을 때 그 결정적 피해를 입기 마련이었다.

    朝鮮初期 연안지역이 왜구의 침탈에서 벗어나 행정력이 안정권에 들어간 15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도서지역으로 주민이주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의 도서이주는 중앙정부로부터 강한

    제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수는 결코 많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초기의 도서주민들은 入島後 1~2세기도 못되어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이에 따라 왜적의 침탈

    을 피해 내륙이나 더욱 깊은 도서지역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으며, 왜란이 거의 종식될 무렵에는 더욱

    23

    38) 배종무 1987, 「신안지방의 역사유적」, 『신안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39)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1990, 『지도군총쇄록』.

    22

    30) 이 석탑은『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5층석탑으로 보고되어 있다.

    31) 배종무 1987, 「신안지방의 역사유적」, 『신안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32)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8, 『신안해저유물(종합편)』.

    33) 국립해양유물전시관·신안군 2006, 『안좌선』.

    34)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995,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

    35)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999, 『목포 달리도 배』.

    36)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 1993, 『진도 벽파리 통나무배 발굴조사 보고서』.

    37) 김정기 1995, 「완도해저발굴조사 개요」, 『국립해양유물전시관(도록)』.

  • ⑩ 1991. 4 : 흑산면 홍도출장소를 신안군 홍도 관리사무소로 승격

    ⑪ 2007년 현재 1읍, 13면, 9출장소로 편제

    이와 같이 신안군 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되어왔던 곳이며, 선사시대 이후 역

    사시대 전 시기에 걸쳐 다양한 유적들이 확인되고, 다양한 삶의 기록이 남아 있다.

    Ⅲ. 조사내용

    신의면은 목포로부터 35마일 정도 거리를 두고 신안군의 남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간

    척공사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반달모양을 하고 있지만 본래는 상태도와 하태도로 나뉘어져 있었다40).

    북동쪽으로는 장산도, 서쪽으로는 하의도가 가까이 입지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

    가 위치하고 있다. 신안군은 서남해안에 바둑알처럼 점점이 떠있는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다. 섬이라

    고 하면 뭔가 육지와는 다른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곳이라는 편견이 우리들의 의식 속에 잠재되

    어 있다. 하지만 역사 이래 인간의 삶터는 굳이 육지와 섬이라는 자연조건에 구애받지 않았다. 오늘날

    다양한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육상교통이 매우 편리한 세상이 된지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古代로

    올라갈수록 바다 길목에 자리하고 있던 섬은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결코 소외된 지역이 아니었으며

    오늘날 고속도로처럼 바닷길을 통해 인간과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섬은 역사와

    문화가 교류하는 징검다리와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지리적인 입지조건은 신의면 상서

    고분군과 안산보루(성)의 조성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 상서고분군(그림 3, 사진 1~24)

    상서고분군은 신의면 상태서리 산 96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해발 50m 미만의 야산 사

    한편 1895년 8월 27일에 16개 面의 구역이 정해졌는데, 縣內面·荏子面·落月面·沙玉面·蟬島

    面·蝟島面·古群山面·押海面·者羅面·荷衣面·箕佐面·安昌面·岩泰面·長山面·黑山面·慈

    恩面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16面體制는 1897년 3월 7일로 반포된 勅令 제14호 에 의해 飛禽·都草가 智島郡에 편입, 새롭게 飛禽面이 편성

    되어 17面體制로 바뀌었다.

    그 후 다시 1914년 3월 1일부로 智島郡이 폐지되고 務安郡에 편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 智島郡의

    務安郡 編入時에 몇가지 현재의 務安郡 範圍가 일부 변화를 맞게 된다. 즉 ① 蝟島·落月島가 영광군

    으로 편입 되었고, ② 古群山面이 전북 옥구군에 편입되어 떨어져 나가고, ③ 莞島郡에 속했던 八禽

    面이 務安郡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사실상 현재의 신안군 전체가 무안군에 편입되게 된 것

    이다.

    1917년에는 安昌面(금산·여흔·향수·대리·존포·복호·자라·탄동·산두)과 새로 완도에서

    편입된 八禽面 전역을 병합하여 安佐面으로 개칭되고, 沙玉面과 蟬島面의 蟬島·屛風島를 智島面에

    병합되는 동시에 蟬島面의 3개 섬들을 押海面(古耳島·梅花島)과 岩泰面 (唐司島)에 각각 편입시켰

    다. 이로써 蟬島面은 폐지되었다. 그 후 1962년 11월 21일에는 법률 제1172호에 의거하여 흑산면 牛

    耳島를 인접한 都草面에, 장도를 荷衣面에, 진도군 조도면 마진리를 長山面에 각각 편입시켰다.

    이 같은 일련의 행정편상의 복잡한 변화는 1968년 12월 31일 공포된 법률 제2059호 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새로 신설된 신안군은 무안군에 속했던 11개面(智島面·荏子

    面·慈恩面·飛禽面·都草面·黑山面·荷衣面·長山面·安佐面·岩泰面·押海面)으로 구성되어

    현재에 이르며, 그간의 소소한 변화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1971. 6 : 증도·우의도·가거도·팔금도·매화도에 출장소 설치

    ② 1974. 10 : 상하태도에 출장소 설치

    ③ 1980. 4 : 선도·태도·자라도에 출장소 설치

    ④ 1980. 12 : 지도면이 지도읍으로 승격

    ⑤ 1983. 2 : 증도면·신의면·팔금면이 독립

    ⑥ 1986. 1 : 흑산면 홍도출장소 설치

    ⑦ 1988. 3 : 증도면 병풍도출장소 설치

    ⑧ 1989. 1 : 흑산면 대둔도출장소(오리·도목리·수리), 압해면 고이도출장소 설치

    ⑨ 1990. 8 : 장산면 소저도·작도·송도·골도·희어도 진도군으로 편입

    25

    40) 안산성(보루)가 입지하고 있는 상태도는 하태도와 더불어 조선시대에는 나주목, 1859년(고종 32)에는 지도군 하의면, 1914

    년에는 무안군 하의면, 1969년에는 신안군 하의면에 각각 소속되었다. 1974년 하의면 신의출장소 설치된데 이어 1983년 신

    의면으로 개편(대통령령 제11027호)되면서 面으로 독립되었다.

    24

  • 면부로 바다가 잘 조망되며, 신원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고분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지역

    이다. 현재 고분군의 남쪽에는 염전이 펼쳐져 있으며, 북동쪽에는 소장동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지표조사는 고분이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곳을 중심으로 주변지역까지 확대하였다. 그 결과 해발

    50m 미만의 능선부를 따라 30여기 이상의 석실분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석실

    분 주변에는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있고 매장주체부가 지하에 매몰된 채 지표상에는 천정석과 벽석

    일부만이 노출된 상태여서 정확한 규모와 분포범위 등은 파악할 수 없었다.

    석실분은 야산의 경사면을 등고선방향과 직교하게 L자형으로 굴착하여 석실을 축조하고 경사면의

    아래쪽으로 입구와 연도부를 시설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석실분이 지하에 매몰된 채

    천정석과 일부 벽석들만이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어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노출된

    석실분은 천정부, 석실, 연도부 등을 갖추고 있다. 조사는 규모가 확인되는 14기의 석실분 중 실측이

    가능한 8호, 9호, 11호, 13호, 15호를 중심으로 하였다.

    1) 8호 석실분(그림 4, 사진 5·6)

    석실분은 고분군의 중앙에 위치한다. 조사전 지표상에는 석실분의 천정석과 벽석으로 보이는 석재

    들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지하에 매몰되어 있어 정확한 규모와 형태는 파악할 수 없었다.

    현재 석실분은 천정석과 일부 벽석만이 지표상에 드러나 있는 정도이다. 석실은 장방형의 묘실과

    연도부를 갖추고 있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석실의 축조는 야산의 사면부를 L자형으로 굴착

    하여 묘광을 조성한 후 석축을 쌓고 천성석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석실의 규모는 장축길이 270㎝, 단

    축길이 89㎝, 깊이 70㎝ 내외로 추정되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벽의 축조방법은 할석의 편평한 면

    을 석실 내부로 향하도록 하고 할석을 가로나 세로로 세우거나 눕혀서 벽을 쌓아 올렸다. 북단벽은 할

    석 2매를 세로로 세워서 마무리하고 장벽은 할석을 세로나 가로로 세우고 그 위의 단은 가로로 눕혀

    서 벽석을 쌓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수풀이 벽석사이를 덮고 있고, 석재들이 지하에 매몰된 상태

    여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천정석은 3매가 확인되었다. 상·하면이 비교적 편평한 대형석재로

    석실의 상면을 덮고 있으나 원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가로 126~165㎝, 세로

    36~150㎝, 두께 22~53㎝ 정도이다.

    2) 9호 석실분(그림 5, 사진 7~10)

    석실분은 8호 석실로부터 동쪽으로 5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조사전 지표상에는 석실분의

    2726

    그림 3. 상서고분군ㆍ안산보루 유구 배치도

  • 할석을 가로로 눕혀서 1단 벽석을 쌓고 그 위의 단은 소형할석을 끼워 넣어 키 높이를 맞추고 장대석

    과 할석을 사용하여 2·3단을 쌓았다. 서장벽은 동장벽과 유사한 방법으로 벽석을 축조하였다. 남단

    벽은 묘실의 입구와 연도부로 구성되어 있으나 지표상에 벽석으로 보이는 석재의 상면만이 노출되어

    있어 구조를 알 수 없다. 천정석은 2매가 확인되었다. 상·하면이 편평한 대형석재로 석실의 상면을

    덮고 있다. 크기는 가로 184~190㎝, 세로 125~132㎝, 두께 7~30㎝ 정도이다.

    3) 11호 석실분(그림 6, 사진 11~14)

    석실분은 9호 석실로부터 남쪽으로 9m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조사전 지표상에는 석실분의 천정석

    천정석과 벽석 대부분이 노출되어 있어 규모와 형태는 파악할 수 있었다.

    석실은 장방형의 묘실과 우편재의 연도부를 갖추고 있는 횡혈식석실분이다. 석실의 축조는 야산의

    사면부를 L자형으로 굴착하여 묘광을 조성한 후 석축을 쌓고, 천정석을 올린 후 석실이 훼손되는 것

    을 방지하기 위해 벽석 주변에 흙을 쌓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의 규모는 장축길이 420㎝, 단축

    길이 100㎝, 깊이 90㎝ 내외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벽의 축조방법은 할석의 편평한 면을 석실

    내부로 향하도록 하고 할석을 가로나 세로로 세우거나 눕혀서 벽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소형할석을

    벽석의 빈틈에 끼워 넣어 단의 높이와 균형을 맞추었다. 북단벽은 장대석 1매를 가로로 세운 후 키 높

    이를 맞추어 할석 1매를 세로로 세우고 2·3단은 가로로 눕혀서 마무리하였다. 동장벽은 여러 매의

    29

    그림 5. 상서고분군 9호 석실분 평면도

    28

    그림 4. 상서고분군 8호 석실분 평ㆍ단면도

  • 었다. 문미석의 크기는 가로 114㎝, 세로 110㎝, 두께 11~30㎝ 정도이다. 천정석은 2매가 확인되었

    다. 상·하면이 편평한 대형석재로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석실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크기는

    가로 108~200㎝, 세로 80~107㎝, 두께 42~54㎝ 정도이다.

    4) 13호 석실분(그림 7, 사진 15·16)

    석실분은 11호 석실로부터 남쪽으로 10m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조사전 지표상에는 석실분의 천

    정석과 벽석 일부만이 노출되어 있었다.

    석실은 장방형의 묘실과 연도부를 갖추고 있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석실의 축조는 야산의

    사면부를 L자형으로 굴착하여 묘광을 조성한 후 석축을 쌓고 천정석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석실의

    규모는 장축길이 240㎝, 단축길이 90㎝, 깊이 40?㎝ 내외로 추정되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축조

    방법은 벽석 대부분이 지하에 매몰되어 있어 구조를 판단하기 어렵다. 천정석은 2매가 확인되었다.

    과 벽석 대부분이 노출되어 있었다.

    석실은 장방형의 묘실과 우편재의 연도부를 갖추고 있는 횡혈식석실분이다. 석실의 축조는 야산의

    사면부를 L자형으로 굴착하여 묘광을 조성한 후 석축을 쌓고, 천정석을 올렸다. 석실의 규모는 장축

    길이 312㎝, 단축길이 82㎝, 깊이 50?㎝ 내외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벽의 축조방법은 할석의

    편평한 면을 석실 내부로 향하도록 하고 할석을 가로로 세우거나 눕혀서 벽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소

    형할석을 벽석의 빈틈에 끼워 넣어 단의 균형을 맞추었다. 북단벽은 2매의 할석을 가로로 세워 쌓은

    후 2단은 가로로 눕혀서 마무리 하였다. 동장벽은 총 3단으로 축조되어 있으나 유실상태가 심하여 현

    재는 일부벽석만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벽석으로 볼 때 할석을 가로로 눕혀서 쌓아 올린 것을 보인

    다. 반면 서장벽은 할석을 가로로 세워서 쌓았으나 2매만이 남아 있다. 연도부는 일자형의 형태를 띠

    고 있으나 벽석의 유실상태가 심하다. 특징으로는 벽석 상면에 문미석으로 보이는 대형석재가 확인되

    31

    그림 7. 상서고분군 13호 석실분 평면도

    30

    그림 6. 상서고분군 11호 석실분 평ㆍ단면도

  • 은 바닥면에 내려앉아 있다. 크기는 가로 87~127㎝, 세로 56~79㎝, 두께 22~40㎝ 정도이다.

    6) 수습유물

    • 구연부편(그림 10-①, 사진 24)

    회청색경질토기의 구연부편으로 동체부에서 구연부로 올라오는 견부로 추정된다. 태토는 정선되

    었으며, 내면에 물손질흔적이 관찰된다.

    잔존길이 2.7㎝, 두께 1.1㎝

    • 저부편(그림 10-②, 사진 24)

    상·하면이 편평한 대형석재로 석실의 상면을 덮고 있다. 크기는 가로 77~158㎝, 세로 43~104㎝,

    두께 10~40㎝ 정도이다.

    5) 14호 석실분(그림 8, 사진 17~20)

    석실분은 13호 석실로부터 동쪽으로 7m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조사전 지표상에는 석실분의 천정

    석과 벽석 대부분이 노출되어 있었다.

    석실은 장방형의 묘실과 연도부를 갖추고 있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되나 후대의 훼손으로 인하

    여 연도부는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석실의 축조는 야산의 사면부를 L자형으로 굴착하여 묘광을 조성

    한 후 석축을 쌓고, 천정석을 올렸다. 석실의 규모는 장축길이 198㎝, 단축길이 78㎝, 깊이 56?㎝ 내외

    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벽의 축조방법은 할석의 편평한 면을 석실 내부로 향하도록 하고 할석을

    가로로 세우거나 눕혀서 벽을 쌓아 올렸다. 북단벽은 장대석 1매를 가로로 세워서 마무리하였다. 장벽

    은 2~3단이 확인되나 훼손상태가 심하며, 여러매의 할석을 가로로 눕혀서 축조하였다. 천정석은 3매

    가 확인되었다. 상·하면이 편평한 대형석재로 석실의 상면을 덮고 있으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천정석

    33

    상서고분군 석실분 현황

    호수

    1호

    2호

    3호

    5호

    6호

    7호

    4호

    10호

    12호

    13호

    14호

    8호

    11호

    9호

    지하에 매몰

    지하에 매몰

    지상에 석실이 드러남

    지상에 석실이 드러남

    지상에 석실이 드러남

    지표상에천정석과석실일부가노출

    지표상에천정석과석실이대부분

    노출

    현재 규모가 확인되는 14기 이외에도 고분군으로부터 북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2기의 석실분이 추가로 파악된다. 하지

    만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정확한 규모와 구조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상서고분군내에 포함하여 이를 15호와 16호로 명명하였다.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남-북

    횡혈식

    횡혈식

    횡혈식

    횡혈식

    횡혈식

    횡혈식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직교

    천정석 규모(㎝) 석실의 규모(㎝)

    가로 세로 두께

    105 113 36

    130 150 65

    1매이상(?)

    62

    56

    99

    146

    127

    190

    46

    32

    34

    108

    200

    114

    80

    107

    110

    42

    37-54

    11-30

    77

    122

    158

    110

    127

    87

    43

    104

    59

    56

    79

    70

    10-40

    15-40

    23-30

    22-30

    20-40

    20-27

    165

    164

    126

    184

    190

    150

    60

    36

    132

    125

    22-30

    26-44

    53

    7-35

    30

    150

    270

    200

    70

    100

    90

    200

    210

    270

    90

    140

    133

    250 90 48?

    270 89 70?

    420 100 90?

    256 99 60?

    260 107

    240 90 40?

    198 78 56?

    312 82 50?

    장축 단축 깊이

    장축

    방향구조

    등고선

    방향비 고

    32

    그림 8. 상서고분군 14호 석실분 평ㆍ단면도

  • 그리고 이웃하고 있는 안좌면 읍동리에 2기, 대리에 4기, 하의면 대리에 3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

    다47). 최근에는 상태도 안산보루성 남쪽 기슭과 북쪽의 자실리에서 다수의 고분과 유물산포지 등이

    확인되어 주목되었다48). 압해도에는 宋孔山城(압해면 송공리·대천리)과 흙성안토성 및 송공산성 동

    쪽의 대천리고분이 일제강점기까지 분포하고 있었다49). 또한 압해도 북쪽의 고이도에는 王山城(압해

    회청색경질토기의 저부편으로 대부분 유실되었다. 외면에는 평행선문 타날되어 있으며, 내면에는

    물손질흔과 빗질흔이 관찰된다. 태토는 정선되었다.

    잔존길이 4.6㎝, 두께 2.8㎝

    위의 5기 이외에도 다수의 석실분이 고분군내에서 관찰되나 지표상에 석재만이 노출된 경우가 대

    부분이어서 석실의 규모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정리하면 위의 과 같다.

    2. 안산보루(그림 3·9, 사진 25~59)

    1) 역사적 배경

    안산보루41)는 기존에 案山城으로 부르던 산성으로 전남 신안군 신의면 상태서리 산 104번지의 案

    山(일명 城山)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 신안지역에는 삼국시대 이래 4개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하고 있다. 장산도에 치소를 둔 居(屈)山縣은 신안군 남부의 안창(안좌)·하의· 상

    태·하태도42), 압해도에 치소를 둔 阿次山郡은 신안군 중서부의 팔금·기좌(안좌)·도초도 등을 관

    할 범위로 하였다43). 임자도에 치소를 둔 古祿只(開要)縣은 신안군 북부의 임자·지도·증도 등을 관

    할 범위로 하고 있었고44), 신안군 서부의 자은도, 암태도, 비금도 등은 영광군 남면 남창리에 치소를

    둔 阿老(葛草·加位)縣에 속한 섬이었다45). 따라서 지금의 신안군 남부와 중서부의 섬들은 고려~조

    선시대 나주목, 서부와 북부의 섬들은 영광군 소속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4개 군현지역에는 삼국시대 이래 고분과 산성 등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장산도에는 장

    산토성지(장산면 대리·도창리일대)와 大城山城(공수리 대성산) 및 도창리고분이 분포하고 있다46).

    35

    그림 9. 안산보루 평면도

    47) 崔盛洛, 1987, 「新安地方의 先史遺蹟·古墳」, 『新安郡의 文化遺蹟』, 木浦大學博物館.

    48) 이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의 상서고분군을 참고하기 바람.

    49)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跡調査資料』.

    34

    41) 기왕에는「안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선시대 領長 1명, 隊軍 53명 등 소규모의 군사들이 주둔하던 진도 南桃浦鎭의 墩

    臺로서 성벽의 둘레가 150m 정도에 불과한 점과 내부에 봉수시설을 갖추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안산보루」로 고쳐 부르고

    자 한다.

    42) 장산도에 치소를 둔 백제시대 居(屈)知山縣은 통일신라시대 安波(陵)縣으로 이름을 바꾸어 압해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시

    대에는 長山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주목에 속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로 내륙지역인 나주의 남쪽 10리(지금의 나주시 영

    산포)로 옮겼다가 조선시대 나주에 예속되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35, 羅州牧 古蹟條).

    43) 압해도에 치소를 둔 백제시대 阿次山郡,은 통일신라시대 壓(押)海郡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고려 초에 나주목, 후에 영광군, 다

    시 나주목에 속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로 내륙지역인 나주로 옮겼다가 조선시대 나주에 예속되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35, 羅州牧 古蹟條).

    44) 임자도에 치소를 둔 백제시대 古祿只(開要)縣은 통일신라시대 鹽海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압해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시대

    臨淄縣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광군에 속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36, 靈光郡 古蹟條).

    45) 신안군 서부지역은 영광군 남면 남창리에 치소를 둔 백제시대 阿老(葛草·加位)縣, 통일신라시대 碣島縣, 고려시대 陸(六)昌

    縣에 속한 부속 섬이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36, 靈光郡 古蹟條).

    46) 金元龍·任孝宰 1968, 『南海島嶼考古學』, 서울대학교 東亞文化硏究所

    崔盛洛 1987, 「新安地方의 先史遺蹟·古墳」, 『新安郡의 文化遺蹟』, 木浦大學博物館.

  • 이상으로 위의 기록과 조사내용, 그리고 이번 조사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옹기편이 소량이나

    마 수습된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안산보루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남도포진의

    설치연대가 1438년(세종 20) 정월에 처음 설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초축연대는 유동적이라 하

    겠다58).

    3) 조사현황

    (1) 입지(사진 25·26)

    상태도 중앙부에 입지하고 있는 안산보루는 해발 120m의 산 정상부에 들어서 있는데 비슷한 높이

    의 산줄기가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산 주변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안산보루에서는 북쪽을 제

    외하고는 주변 수로를 포함한 전망이 양호하다. 특히 서쪽방향은 해로와 인접되어 있고, 산이 없는 까

    닭에 하의도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좁은 수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남쪽 또한 하나로 연결되기 이

    전의 하태도를 비롯하여 주변 해역이 잘 조망되며, 동쪽으로도 장산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안산보

    루의 동쪽 산줄기와는 고갯길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안산보루는 그 서쪽에 독립된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산의 규모가 작고 비교적 낮은 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한 편이다. 따

    라서 감시와 방어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충분한 성내면적을 확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군다나 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관계로 자연스레 성의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산 정

    상부는 각각 남서쪽과 북동쪽에 능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북동쪽 능선상에는 문지가 들어서 있다. 성

    벽의 통과선은 남서쪽이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고, 점차 레벨이 낮아지다가 북서쪽에서 가장 낮

    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동벽의 경우 보루 내부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가장 높은 지점과 성벽 기

    저부와의 비고차가 약 7~8m나 된다. 또한 안산 정상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보루

    내부에는 봉수의 연대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그 북쪽에는 3단으로 정지한 건물지가 들어서 있다.

    (2) 體城의 규모와 현상

    안산보루는 해발 120m의 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으로 전체길이가 150m 정도에 불과하여 堡壘

    로 분류된다. 가장 잘 남아있는 부분의 높이는 520㎝, 가장 낮은 부분의 높이는 150㎝이나 대체로

    면 고이리 왕산)이 분포하고 있다. 고이도는 견훤이 관할하고 있던 섬이었으나 909년(효공왕 13) 왕

    건에 의해 古夷島城50)이 함락된 후 서남해안 공략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임자도에는 大屯山城

    (임자면 이흑암리 대성산)이 분포하고 있다51). 비금도에는 山城山城(비금면 도고리 산성산)과 城峙

    山城(광대리 성치산) 및 광대리고분이 분포하고 있다52). 그리고 멀리 대흑산도에도 上羅山城(흑산면

    진리 상라산)이 분포하고 있다53).

    2) 연혁

    안산보루에 대한 기록은 1872년에 간행된『南桃鎭誌』掌內條에 그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에

    의하면‘상태도는 官門(남도포진)으로부터 수로로 70리 서쪽에 있다. 墩臺는 하나로서 산 이름은 城

    山이며 領長 1명, 隊軍 53명이 있다. 松田의 산 이름은 牛尾山으로 監官 1명과 산지기 1명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안산보루는 54명의 인원이 주둔하던 진도 남도포진 소속의 領長級의 소규모 돈

    대로서 봉수대54)를 겸하던 방어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남도포진 소속의 돈대로는

    하태도 起東山돈대(영장 1명, 대군 50명) 및 하의도 付興山돈대(영장 1명, 대군 91명), 能山島돈대

    (영장 1명, 대군 11명), 薪島돈대(영장 1명, 대군 7명), 大也島돈대(영장 1명, 대군 7명)가 있었던 것

    으로 기록에 전하고 있다55). 따라서 이들 섬에 분포하고 있는 돈대는 행정적으로는 나주목에 속해 있

    었지만 방어는 진도군 남도포진에서 관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원색사진 9).

    안산보루에 대한 조사기록으로는 1942년에 편찬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하의면 서리에 있

    는 성터로 안산 정상에 있으며 案山城이라 부른다. 높이 8척, 둘레 약 90間의 石築으로서 거의 완전하

    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란 때 일본군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56). 이것으로 복원

    한 안산보루는 둘레 165m, 높이 2.4m 정도로 파악된다. 그 이후에는 1987년 배종무의 간단한 조사

    내용이 있다57).

    37

    58) 참고로 진도 남도포진성의 축조는 1500~1501년 무렵의 연산군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용규 2005, 「朝鮮時代

    全羅道 水軍鎭의 考察」, 『全南文化財』12집, 全羅南道. 226쪽).

    36

    50) 『高麗史』권1, 太祖世家.

    51) 『荏子鎭地圖』關防條 및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跡調査資料』.

    52)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跡調査資料』

    崔盛洛 1987, 「新安地方의 先史遺蹟·古墳」,『新安郡의 文化遺蹟』, 木浦大學博物館.

    53) 최성락·고용규 외 2000, 「흑산도 상라산성 지표조사」, 『흑산도 상라산성 연구』,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54) 1872년에 간행된『남도진지도』에 봉수대가 표기되어 있고, 현재도 보루 내부의 정상부에 봉수시설의 연대가 남아있다. 또한

    현지 주민들도 봉화불을 피우던 시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55) 『南桃鎭誌』掌內條.

    56)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跡調査資料』.

    57) 裵鍾茂 1987, 「新安郡의 歷史遺蹟」, 『新安郡의 文化遺蹟』, 木浦大學博物館.

  • 나온 곳도 발견된다. 이 같은 현상은 무너진 부분에서 관찰되고 있듯이 암반 외면에 면석을 붙여 쌓고

    그 위로 뒷채움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높이 430~520㎝로 안산보루의 성벽구간 중에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가장 높은 부분은 일부나마 眉石이 남아있는 부분도 관찰된다. 현재 폭 350㎝, 높

    이는 대체로 450㎝ 정도이나 가장 잘 남아있는 부분은 530㎝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동벽의 경우 보

    루 내부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가장 높은 지점과 성벽 기저부와의 비고차가 약 7~8m가 된다. 성

    돌은 1m정도의 대형 할석재도 사용되고 있지만 대체로 60×25㎝, 30×15㎝의 거칠게 다듬은 할석

    재를 사용하고 있다.

    ② 북벽구간(사진 34~42)

    성벽구간 중 가장 낮은 구간으로 북문지에서 북서벽 회절부까지의 구간에 해당한다. 동벽과 갈라지

    는 북동쪽 능선상에는 북문지가 들어서 있다. 성 바깥쪽의 경사가 매우 가파른 관계로 성벽은 기저부

    의 배부름 현상과 성돌이 빠져나온 곳이 여러 군데서 관찰되고 있다. 무너진 부분의 단면에서는 면석

    을 가로와 세로방향으로 엇갈리게 놓고 그 안에 잡석으로 뒷채움한 상태가 잘 드러나 있다. 성벽은 대

    체로 허튼층쌓기로 축조하였는데 성벽 통과선의 경사가 급하게 낮아지는 부분에서는 수평쌓기한 흔

    적도 관찰되고 있다. 높이 400㎝ 전후로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돌은 대체로 60×25㎝ 정도

    의 할석재가 대부분이지만 비교적 잘 다듬은 할석재도 사용되고 있다.

    ③서벽구간(사진 43~48)

    성벽구간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남서벽 회절부에서 북벽 쪽으로 점차 경사가 낮아지는

    구간에 해당한다. 다른 구간에 비하여 성 바깥쪽의 경사가 완만하지만 남아있는 상태는 가장 불량하

    다. 가장 잘 남아있는 부분은 300㎝ 정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무너진 상태로 150~180㎝ 정

    도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무너진 부분의 단면에서는 면석을 가로와 세로방향으로 엇갈리게 놓고 그

    안에 잡석으로 뒷채움한 상태가 잘 드러나 있다. 성돌의 크기와 다듬은 정도는 북벽과 동일하다.

    (3) 附屬施設

    山城은 유사시에 입성하여 籠城할 수 있는 방어 시설물이자 생활의 무대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성

    내에는 실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부대시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부대시설들은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동시에 성내에서의 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안산보루의 경

    300~400㎝ 정도의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너비는 약 350㎝이다.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삼테기형

    (그림 9)이며 단면형태는 기저부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들여쌓다가 중간 부위에서 수직으로 쌓아 올

    린 관계로 규형을 이룬다. 성벽은 우리나라에서 돌로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內托法으로 쌓았는데 안산보루와 같이 성 안팎의 높이 차이가 심한 지형에 적합한 축성법이다59).

    우리나라의 산성은 廓으로만 이루어진 單廓形式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벽에서의 방어력이

    더욱 요구된다60). 따라서 성곽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성벽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성벽의 일부가 함락되게 되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벽을 높고 튼

    튼하게 쌓는 것이 성벽 축조의 기본이자 목표이기도 하였다61). 물론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성벽을 높게

    쌓은 것은 아니었다.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산성의 특징이다.

    안산 정상부는 소장동마을로 통하는 남서쪽 능선부가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고, 점차 레벨이

    낮아져 북동쪽에서 가장 낮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안산보루의 성벽 또한 이러한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산 정상부를 따라 축조한 전형적인 테뫼식이다. 성돌은 기저부의 일부에만 장대석을 사용하

    고 있을 뿐 상·하단의 구별 없이 거의 같은 크기의 성돌로 쌓아 올렸다. 대부분은 거칠게 다듬은 돌

    을 사용하고 있는데 부분적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한 곳도 관찰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굄돌(쐐기돌)로

    고정하여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축조하고 있으며, 경사가 급한 일부 구간에서는 수평쌓기한 경우도 관

    찰된다. 외벽 面石은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충 다듬은 면을 바깥으로 하여 각 단을 가로

    와 세로방향으로 엇갈리게 놓아 결구하고 있으며, 안쪽에는 잡석으로 뒷채움하였다. 내벽의 안쪽에는

    도랑을 설치하여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62). 안산보루의 성벽은 남벽구간이 매우 짧은

    관계로 편의상 동·서·북벽 등 3개 구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① 동벽구간(사진 27~33)

    성벽구간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남서벽 회절부에서 북벽 쪽으로 점차 경사가 낮아지는

    구간에 해당한다. 북벽과 갈라지는 북동쪽 능선상에는 북문지가 들어서 있다. 성 바깥쪽의 경사가 매

    우 가파른 관계로 성벽은 기저부의 배부른 현상이 여러 군데에서 관찰되며, 일부에서는 성돌이 빠져

    3938

    59) 孫永植 1987, 『韓國城廓의 硏究』, 文化財管理局, 95쪽.

    60) 孫永植 1987,『韓國城廓의 硏究』, 文化財管理局, 163쪽.

    61) 李南奭·徐程錫 1996,『雲住山城』, 公州大學校博物館, 17쪽.

    62) 1987년 조사에서 내벽 안쪽에 설치한 도랑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낙엽이 쌓여 있어 확

    인할 수 없었다.

  • 우는 전체 길이가 150m에 불과한 소형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부대시설 또한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

    번 조사에서는 북문지와 봉수시설 및 건물지 3개소가 확인되었다.

    北門址(사진 49~53)는 보루 내부에서 서리마을로 통하는 북동쪽 능선 정상부에 설치되어 있다. 하

    지만 폭이 150㎝ 정도로 암문 규모에 불과하여 일반적인 성문의 규모에 비해 매우 좁다. 현재는 남쪽

    측벽 5~6단, 북쪽 측벽 2단만이 남아있다. 문을 통과하여 내부에 진입하면 곧바로 봉수대로 오르는

    계단과 만나게 되며, 북벽 안쪽을 따라 봉수대 하단부의 건물지로 연결된다.

    봉수시설(사진 54~58)은 안산 정상부 중에서도 가장 높은 보루 내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동-남

    서장축으로 말각장방형의 평면형태를 이루고 있다. 낙엽과 잡목으로 인해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

    지만 지대가 높은 남서쪽부분은 1~2단, 지대가 낮은 북동쪽부분은 높이 200㎝, 10단으로 더 높게 석

    축을 쌓아 평탄면을 마련하고 있다. 그 내부는 현재 중앙부의 연대시설로 추정되는 부분이 가장 높고,

    북쪽으로 가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낮아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본래는 2단의 계단형태였을 것으

    로 추정된다. 북쪽의 한 단 낮은 평탄면의 북쪽 부분에 북문 쪽을 향한 계단시설의 일부가 드러나 있

    는 점으로 보아 북쪽에 계단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안산보루는 그 내부에 봉수시설을 갖춘 방

    어시설로 소규모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평상시에는 주변 해로의 감시 역할을 수행하다가 적이 침입하

    는 비상시에는 봉화로 남도포진에 연락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建物址는 정상부에서 지형이 낮은 북벽 쪽으로 3단의 계단상으로 정지하여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

    다. 그러나 정확한 규모는 낙엽과 잡목 등으로 인해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4) 수습유물

    • 구연부편(그림 10-③, 사진 59)

    백자편으로 구연부만 남아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내·외면에 유약이 시유되어 있으며, 태

    토는 정선되었다.

    잔존길이 3.2㎝, 두께 0.4㎝

    • 구연부편(그림 10-④, 사진 59)

    백자편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구연부만 일부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내·외면에 유약

    이 시유되어 있으며, 태토는 정선되었다.

    잔존길이 2.3㎝, 두께 0.3㎝

    41

    상서고분군(1ㆍ2), 안산보루(3~7), 서리유물산포지(8~13) 수습유물

    ①②

    ⑧ ⑨

    ⑤ ⑦⑥

    40

  • 잔존길이 4.7㎝, 두께 0.8~0.95㎝

    • 동체부편(그림 10-⑨, 사진 62)

    회청색경질토기이다. 동체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은 알 수 없다. 외면에는 평행선문이 시문되

    어 있으며, 내면에는 회전물손질흔이 관찰된다. 태토는 정선되었으나 가는 사립이 소량 섞여 있다.

    잔존길이 3.5㎝, 두께 1.0~1.2㎝

    • 동체부편(그림 10-⑩, 사진 62)

    회백색경질토기이다. 동체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외면에는 평행선문이 시문되

    어 있다. 태토는 정선되었으나 가는 사립이 소량 섞여 있다.

    잔존길이 4.5㎝, 두께 1.0~1.2㎝

    • 동체부편(그림 10-⑪, 사진 62)

    회백색경질토기이다. 동체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외면에는 평행선문이 시문되

    어 있으나 물손질로 일부 문양이 지워졌다. 태토는 정선되었으나 가는 사립이 다량 섞여 있다.

    잔존길이 6.05㎝, 두께 1.0~1.3㎝

    • 동체부편(그림 10-⑫, 사진 62)

    적갈색연질토기이다. 동체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외면에는 문양이 시문되어 있

    지 않다. 태토는 정선되었으나 굵은 사립이 다량 섞여 있다.

    잔존길이 3.2㎝, 두께 0.5~0.7㎝

    • 저부편(그림 10-⑬, 사진 62)

    저부만 일부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굽안바닥에 모래를 깔고 번조한 것으로 추정되나

    불에 그을려 있어 정확한 상태는 파악할 수 없다. 유는 전체적으로 담녹색으로 얇게 시유하였다. 문양

    은 모두 백상감으로 처리하고, 내면에는 중앙에 이중원권과 여의두문대를 시문하였다. 또한 외면에는

    두줄의 선문대를 시유하였다.

    잔존길이 2.3㎝, 두께 0.6~1.2㎝

    • 구연부편(그림 10-⑤, 사진 59)

    백자편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구연부만 일부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내·외면 모두 유

    약이 시유되어 있고, 외면에 가는 빙렬이 관찰된다. 태토는 정선되었다.

    잔존길이 3.2㎝, 두께 0.5㎝

    • 동체부편(그림 10-⑥, 사진 59)

    옹기편으로 동체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내·외면 모두 유약이 시유되었으나 외

    면은 대부분 벗겨진 상태이다.

    잔존길이 6.1㎝, 두께 0.7㎝

    • 동체부편(그림 10-⑦, 사진 59)

    백자편으로 동체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내·외면 모두 유약이 시유되었고, 내면

    에는 빙렬이 관찰된다. 태토는 정선되었다.

    잔존길이 2.8㎝, 두께 0.7㎝

    3. 주변유적

    1) 서리유물산포지(그림 1·2, 사진 60~62)

    서리유물산포지는 신의면 상태 서리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나지막한 구릉이 병풍처럼 둘러

    쌓고 있는 지역으로 신원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바닷물이 마을의 앞까지 들어왔던 곳이다. 현재

    유물산포지의 상면은 밭으로 대부분 이용되고 있으며, 하단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유물은 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도기류 등이 지표상에 산재해 있다. 특히 삼국시대 유물이 집중되는

    것으로 보아 이와 관련된 유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물산포지의 북쪽과 남쪽에는 동시대

    의 유적인 자실리고분군과 상서고분군이 인접해 있다.

    (1) 수습유물

    • 동체부편(그림 10-⑧, 사진 62)

    회청색경질토기이다. 동체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기형을 알 수 없다. 외면에는 평행선문이 어긋나

    게 시문되어 있다. 내면에는 회전물손질흔이 관찰된다. 태토는 정선되었다.

    4342

  • 이 많지 않아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 이외에도 동일한

    장축방향을 띠고 있고, 석실간의 중복이나 파괴행위, 석실의 축조기법 등이 유사하여 혈연집단이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였던 사람들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또한 석실의 규모와 구조 등으로 볼 때 전남지방의 6세기 후반의 석실분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

    리고 다른 도서지역에 비해 많은 수의 석실분들이 밀집되어 있고 주변지역에서도 동시기의 유적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대부터 중요한 거점지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확한 석

    실의 구조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굴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 신안지역에 알려진 삼국시대 고분은 총 15개소(그림 11, 표 2)이다. 이 중에서 신의면 상

    서고분군은 많은 수의 석실분이 군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남지역에서 석실분은 3세기말부터 5세기 후반까지 유행한 옹관고분에 이어서 등장하였다. 또한 석

    실분(石室墳)은 크게 전기와 후기의 석실분으로 구분된다. 전기에 속하는 석실분은 5세기 말에서 6

    2) 자실리 고분군(그림 1·2, 사진 63~66)

    고분군은 자실리마을로부터 북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야산(83.6m)의 오리나무숲으로 불리

    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동서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고분군의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고분군은 마을주민들 사이에‘고려장’이라 불리고 있으며, 10여기 이상의 석실분과 석곽묘가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분은 지표상에 몇기가 노출되어 있는데 장축방향이 남-북을 띠

    고 있으며, 야산 사면부의 경사면을 L자형으로 굴착하여 하단부에 묘실의 입구와 연도부를 축조한 것

    으로 보인다. 하지만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정확한 구조와 규모 등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 석실분의 구조로 볼 때 인접지역에서 확인되는 상서고분군과 동시기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된다.

    Ⅳ. 종합고찰

    이번 조사에서 상서고분군은 대부분 잡목과 수풀에 우거져 있어 정확한 분포범위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 지표상에 드러나 있는 상서고분군의 석실분은 14기 정도이다. 이들 고분 이외

    에도 해발 50m 미만의 능선부를 따라 30여기 이상의 석실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대

    부분 지표상에 천정석과 벽석일부만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구조나 규모 등은 확인이 불가능

    하였다. 하지만 몇 기의 석실이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어 구조나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토

    대로 석실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석실분은 야산의 사면부에 등고선방향과 직교하게 L자형으로 굴착하여 석실을 축조하고 경사면의

    아래쪽에 입구와 연도부를 시설하였다. 그리고 석실의 폐쇄석과 연도부의 유무에 따라 횡혈식, 횡구

    식, 수혈식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상서고분군에서는 현재 횡혈식 석실분만이 확인된다. 석실분의

    구조적 특징으로는 장방형의 묘실과 연도를 갖추고 있으며, 지상 또는 반지하에 묘실을 마련하고 분

    구를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벽석은 할석의 편평한 면을 묘실내부로 향하도록 쌓고, 각 벽석의 모서

    리 부분에 각을 죽여 내경시킨 석실분도 확인된다. 이는 천정석을 용이하게 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단

    이 올라갈수록 천정부가 좁아지는 효과를 주나 상서고분군의 석실 벽석은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45

    신안 도서지역의 삼국시대 고분 현황63)

    일련

    번호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신안 어의리 소포작고분

    신안 구영리 구영옹관고분

    신안 광대리 광대고분군①

    신안 광대리 광대고분군

    신안 대리 사두고분

    신안 대리 벼락바위고분

    신안 상태서리 자실리고분

    신안 상서고분군

    신안 도창리 도창고분군

    신안 도창리 석실고분

    신안 대리 대리 고분군

    신안 대리 대리 석실분

    신안 대리 배널리 고분군

    신안 읍동리 읍동고분

    신안 동서리 서촌고분

    대부분 파괴

    대부분 파괴

    유실

    현 정밀지표조사 지역

    전라남도 기념물 제107호

    지도읍 어의리 소포작마을

    자은면 구영리 구영마을

    비금면 광대리 광대마을

    비금면 광대리 광대마을

    하의면 대리 제1호 저수지 부근

    하의면 대리 벼락마을

    신의면 상태서리 자실리마을

    신의면 상태서리 산96(소장동마을)

    장산면 도창리 도창마을

    장산면 도창리 93-4(두동마을)

    안좌면 대리 대리마을

    안좌면 대리 대리마을

    안좌면 대리 대리마을

    안좌면 읍동리 읍동마을

    압해면 동서리 서촌마을

    유 적 명 소 재 지 비 고

    63) 총 15개소의 고분 중 성격 규명이 된 곳은 몇 개소에 불과하며, 앞으로 지속적인 조사가 필요한 실정이다.

    44

  • 루를 축조한 목적과 기능이 주변의 해로를 감시하기 위한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보루 내부

    에 봉수시설을 갖추고 있는 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안산보루는 50여명의 군인들이 상주하

    면서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한 소규모의 돈대였음이 앞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내부의 건물지

    라든가 해로상에 입지하고 있는 사실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

    다음으로 안산보루의 축성연대와 사용연대의 문제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산보루에 대한 기

    록과 이번 조사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옹기편이 몇 점 수습되기는 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정확한

    초축시기나 사용시기를 판단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게 사실이고,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

    는 결정적인 자료 또한 제한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수습된 유물은 고려 말 왜구의 침탈로 육지로

    옮겨가면서 서남해안의 섬들이 공도화 된 이후 다시 섬으로 재이주하게 되는 16~17세기대의 것이다.

    따라서 안산보루는 이들 유물과 함께 앞서 살펴 본 안산보루에 대한 기록과 조사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일단은 조선 후기에 처음 축조되어 한말까지 이용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정확한 초축 및

    사용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굴조사 등의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그런 면에서

    추후 학술조사를 기대해 본다.

    Ⅴ. 보존과 활용방안

    상서고분군과 안산보루는 도서지역이라는 특수한 여건으로 인하여 현재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유적에 대한 관리 등이 현재처럼 진행된다면 훼손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유적에 대한 보존과 활용방안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그림 12).

    먼저 학술조사를 토대로 정확한 유적의 성격과 범위를 파악하는 것이 시급하다. 1차적으로 정밀지

    표조사를 통한 유적의 범위와 유구의 상태 등을 파악한 후 지방문화재로 추진을 실시하고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군자체적으로 안내판설치와 접근로 확보 등의 기초적인 정비가 있어야 한다. 그리

    고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서고분군과 안산보루의 성격을 규명하고 정확한 유구의 분포범위를 파악

    하여 학술자료로 남겨야 한다.

    그러나 발굴조사와 유적의 정비는 많은 예산과 기간이 소요되는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각 분

    세기 전반에 축조되는 데 분구의 축조가 옹관고분의 전통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방후원형 고분(前方後圓形 古墳 혹은 長鼓墳)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백제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토착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후기 석실분은 백제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한 이후에 나타나는 백제계 석실분을 말하는 데 장산면

    도창리에서 확인된 것을 비롯하여 안좌면 읍동리나 비금면 광대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전남지방에

    서 조사된 백제계 석실분은 많지 않다. 즉 일제시에 조사된 나주 흥덕리석실분이 있고, 1973년에 우

    연히 발견된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 1978년에 발굴된 나주 대안리고분이 있으며, 1984년에 조사된

    장성 영천리고분이 있다. 이후 조사된 나주 복암리고분, 무안 인평고분군 등이 있다. 백제계 석실분은

    그 형식이 매우 다양한데 전남지방의 석실분은 횡혈식 석실분 중에서 평석천정식(平石天井式)에 속

    한다. 평석천정식에는 다시 맞조림식, 괴임식 및 사벽수직식이 있는데 해남 월송리고분과 장성 영천

    리고분은 맞조림식에 속하고, 장산 도창리고분은 괴임식에 속하며, 나주 흥덕리와 나주 대안리고분은

    사면수직식에 속한다64).

    각 형식간의 선후관계는 공주지방과 부여지방의 석실분 연구에 바탕을 두면 맞조림식에서 괴임식

    으로 발전되었고, 사면수직식은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연대적으로는 이 고분들이 모두

    백제가 공주나 부여로 천도한 이후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5세기 후반 이후의 것으로 보고 있다. 신

    안지역의 경우 기존에 알려진 장산 도창리고분의 경우, 대체로 6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것이다. 또 신

    의면 상서고분군과 자실리고분군은 도창리고분 보다도 약간 늦은 6세기 후반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수 십 기의 고분이 밀집된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백제계의 석실분이 신의면이나 장산면과 같이 도서지역에 어떻게 분포하게 되었을까 하

    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장산면 도창리 고분의 경우, 백제가 이 지역을 직접지배하기에 앞서

    백제로부터 일본에 이르는 해상루트를 먼저 장악하였을 것이며 추정되지만 신의면 상서고분군과 자

    실리고분의 경우를 보면 백제세력이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이후 중요한 거점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안산보루는 내부에 봉수시설을 갖추고 있는 점에서 기존에 알려진 산성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안산보루는 상태도와 하의도 사이의 좁은 수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을 뿐더러 북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변 해역이 잘 조망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안산보

    4746

    64) 최성락, 「장산도·하의도의 유적·유물」, 『도서문화』제3집,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1985, 27~29쪽.

  • 야의 전문가들과 논의를 거쳐 보존 및 정비계획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발굴조사는 연차적인 계획을 세워 충분하게 학술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해야 한다. 만약 발굴조

    사를 자칫 소홀히 할 경우 유적 정비·복원에 있어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을 거친 후 보존 및 정비계획에 따라 유적공원을 설계하여 건립하고 관리사무소를 두어

    지속적인 관리를 하여야만 유적이 훼손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유적공원 건립시에는 주변환경을 고려

    하여 자연친화적인 공원이 되도록 하고 지역주민, 각 분야의 전문가, 군관계자 등이 모여 공청회를 통

    한 지역 공감대를 형성하여야만 모든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유적공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적공원이 건립된 후 활용방안을 생각해 보면, 지역 문화와 연계할 수 있는 관광자원

    의 개발을 통한 지역인지도 향상과 더불어 교육자료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유적공원내

    에 고대사회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학습공간을 마련한다면 우리조상들의 삶을 엿볼 있는 기회가

    될 뿐만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Ⅵ. 맺음말

    신안 상서고분군과 안산성지(보루)는 신의면 상태도 중앙부에 입지하는 안산의 정상부와 서쪽 사

    면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상서고분군의 대략적인 규모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안산보루의 평면형태 및 잔존상태, 규모, 축조기법 등의 기초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 정밀지표조

    사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상서고분군에는 30여기 이상의 석실분이 해발 50m 미만의 야산 사면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

    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다른 도서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로 밀집된 고분군이다. 또한 노출된

    석실분의 대부분이 경사면을 등고선방향과 직교하게 L자형으로 굴착하여 석실을 축조하였고 천정부,

    석실, 연도부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규모와 구조로 볼 때 전남지방의 삼국시대 석실분들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특히 신의면에서 수 십 기의 백제계 석실분이 집단적으로 확인된 점은 바로 백제 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중요한 거점임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안산보루는 해발 120m의 산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으로 전체길이가 150m 정도에 불과하여

    4948

    그림 12. 안산보루·상서고분군 정비·복원계획

  • 51

    보류로 분류되는데 북문지, 봉수시설,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1872

    년에 간행된『南桃鎭誌』掌內條의 기록과 지역주민들이 봉화불을 피우던 시설이라는 증언도 하고 있

    어 봉수대를 겸하던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안산보루가 입지하는 지형조건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보루는 주변의 해역이 잘 조망되는 곳을 점하고 있어 해로를 감시하기

    에 용이하다.

    이러한 조사 성과와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상서고분군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분으로 판단되지만

    전체적인 유구의 범위와 성격은 파악할 수 없었다. 안산보루도 조선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축성연대와 사용연대 등 성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 유적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서는 다음과 같이 추가조사가 필요하다.

    먼저 고분군은 전체적인 범위와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