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37

Upload: arte

Post on 31-Mar-2016

233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DESCRIPTION

 

TRANSCRIPT

Page 1: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Page 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그 이후…

생 활 문 화 공 동 체 만 들 기 사 업졸 업 단 체 성 과 자 료 집

ⓒ 본 자료집은 저작자와 출처를 표시하면 자유이용을 허락합니다. 단, 영리적 이용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이후…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 졸업단체 성과자료집

발 행 인

발 행 일

발 행 처

홈 페 이 지

문 의

기 획

구성.제작

등 록 번 호

박재은

2013. 1. 30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www.arte.or.kr / www.artezine.kr

02-6209-594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사회교육팀

(주)에이트스프링스

KACES-1222-C002

Page 3: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마을

- 천안KYC

- 함께 만드는 양곡리 문화마을

2. 충남 공주시 우성면 봉현리

- 충남교육연구소

- 농촌 생활문화공동체의 희망찾기

3. 대전 중구 중촌동

- 극단아낌없이주는나무

- 중촌(中村) 연극동아리, 사랑해요 우리 동네

4. 대구 남구 대명2동 물베기 예술마을

- 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

- 주민악단을 통한 문화마을 공동체 만들기

5. 광주 서구 쌍촌 임대아파트 2개 단지

- (사)시민문화회의

- 쌍쌍유촌(雙雙柳村)-문화일촌(文化一村)

6. 경남 통영시 사량면 양지리 능양마을

- 극단벅수골

- 섬마을에 웃음꽃이 활짝피네

7. 제주 서귀포시 대천동 월평마을

- 문화도시공동체 쿠키

- 월평, 예술로 물들다

Page 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7

졸업단체 1.

함께 만드는양곡리 문화마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 마을천안 KYC

함께 만드는 양곡리 문화마을

양곡리 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사업담당자의 20대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학생이었던 90년대 초, 대학생 농촌활동의 목적으로 길놀이와

사물놀이를 하러 양곡리 마을을 방문한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때 마을의 화합력

과 활기찬 분위기가 좋았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마을 분들이 무척 고마웠던 기억이 있

었지요.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 시민단체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단

체의 행사나 지역모임에서 가끔 마을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특별한 인연을 만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천안 KYC는 천안지역에서 마을공동체 만들기와 관련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

는 풀뿌리주민운동단체입니다. 하지만 주로 도시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촌지역과의 작업은 선뜻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때 생활문화공동

체 만들기 시범사업을 알게 되었고, 양곡리 마을 청년회 몇 분을 만나 상의를 드리니

선뜻 같이 힘을 모아보자는 반응을 보여 주셔서 3년에 걸친 마을 만들기 사업을 시작

Page 5: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9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곡리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지만 마을 청년회를 중심으로 마을공동체 활동을

꾸준히 이어져 오는 마을입니다. 또 수려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주민 대다수

가 친환경 농업을 하고 계시며 도시민을 대상으로 펜션을 운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생활에 대한 의욕이 상당한 강한 마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을 활용하

여 주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마을공동체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마을 공동체단위의

사업들을 발굴할 수 있다면 마을에 좀 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벽화로 마을의 이야기를 그려내다

처음 진행된 것은 ‘이야기가 있는 벽화마을’ 프로젝트였습니다. 농번기와 겹치고 앞당

겨 찾아온 추위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마을 골목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벽들이 하나

둘씩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벽화들로 채워지면서 마을에는 새로운 활력이 돌

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 프로젝트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주민들의 자부

심 또한 높아졌습니다. 더불어 예술에 관한 관심도 함께 증가하기 시작하였지요. 함

께 추진한 주민공동체교육도 탄력을 받아 열정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주요 주제는 ‘마

을만들기’ 였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접하고 직접 우수마을 견학도 다니면서 마을 만

들기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을도 변화할 수

있겠다란 희망을 심어드리는 것에 주력하였습니다.

양곡리의 두 학교

그다음 해에는 벽화마을 조성과 함께 마을공동체의 자생력과 실행능력을 높이기 위

해 ‘양곡리 문화학교’가 운영되었습니다. 특히 문화학교에서 진행된 솟대와 장승 만

들기 교육은 호응이 매우 높았고, 솟대는 마을발전의 주요 주제로 선정되기도 했습

니다. 그리고 마을 분들은 이 솟대를 테마로 지자체가 실시하는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 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솟대 체험장이 조성되었고, 마을 분

들은 솟대강사과정 수료증을 획득하고 지역축제에 참여하는 등 솟대를 통한 마을 알

리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다니셨지요. 이런 과정 속에서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도 함께

진행되면서 도시민과의 교류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등 더욱 더 활발한 활동을 펼친 한

해가 되었습니다.

또 문화학교와 더불어 ‘양곡리 공동체학교’가 운영되었습니다. 공동체학교는 주로 공

동체마을 만들기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공감대를 형성하고 주민역량을 강

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운영 되었는데요, 서천 월산리 달고개 마을과 청양 산

꽃마을, 아산 외암리 마을 등 마을 만들기 우수사례지역을 직접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사례 견학은 이후 마을사업 추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하

였습니다. 또, 도시민을 대상으로 주말농장을 시범운영하여 도시민과의 소통의 창구

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Page 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1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11

홀로서기를 위한 노력들

생활문화공동체마을만들기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것 중 하

나가 바로 3년이 되면 마을 스스로 홀로 서기를 하셔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경험적

으로 외부지원으로 유지되는 공동체는 지속성이 담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에, 3차년도에는 주민들의 자립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하여 추진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주민생일잔치였습니다. 매월 1회, 그 달에 생일인 주민들을 초대

해 생일잔치를 열어주는 행사였는데요, 마을부녀회에서 미역국과 밥을 준비하고 사

업예산으로 나머지 음식들을 마련하여 온 마을주민이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

누는 시간이었죠. 생일을 맞은 주민들은 떡이나 술을 준비해 오셔서 축하해주는 이웃

들과 함께 나누었는데 독거 어르신들의 호응이 특히나 높았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

게 만나는 장이 열리면서 서로 마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기회도 잦아졌습니다.

사실, 생일잔치는 핑계구요, 한달에 한번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공동체성을 느끼

도록 하는 것이 초점이었던 기획이었습니다. 8월에는 ‘양곡리의 날’이라는 마을축제

를 개최하였습니다. 출향인과 천안 지역의 인사들, 자매결연을 맺은 단체 등을 초청

하여 마을 주민 전체가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축제가 되었지요. 그리고 양곡리 문화

유랑단도 생겨났습니다. 이 유랑단은 각 지역의 축제 현장을 찾아다니며 솟대 체험부

스 등을 운영하며 ‘솟대마을 양곡리’를 적극 홍보하였지요. 우수 공동체 마을을 견학

하는 것 역시 유랑단의 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듯,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마을에 앉아 진행되었던

여떤 교육보다도 효과와 인기가 높았습니다. 양곡리 문화학교는 좀 더 심화과정의 프

로그램으로 주민들이 문화적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 운영되었지요.

이렇게 3년 동안 많은 일들이 진행되며 양곡리 주민들의 힘과 역량은 하나로 모아졌

습니다. 계속되는 교육이나 활동들을 통해 완벽하진 않았지만 적잖은 성과를 만들어

내며 사업들을 마무리 하였지요.

그리고 다행히 3차년도 사업이 마무리 될 무렵, 양곡리는 천안에서는 최초로 녹색체

험마을에 선정되어 마을공동체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

니다. 녹색체험마을 신청은 마을공동체 사업 이후에도 마을이 자생적으로 성장하기

Page 7: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1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13

위한 좋은 기회였고 필수적인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민들은 스스

로 영농조합을 결성하고 공동출자와 공동운영이라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마을일을 상의하는 논의기구를 상설화시키는 등 보

다 주체적인 활동들을 펼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천안 KYC와 함께한 3년의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이 끝나고, 2012년 양곡리는 참 바쁜

일 년을 보냈습니다. 녹색체험마을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운영위원회를 구성

하고, 마을 사무장을 선출하고, 농촌체험마을 다목적 체험관을 준공하고, 손두부 직거

래를 시도하는 등 지속적으로 마을의 발전을 이끌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들이었습

니다. 그리고 아마도 마을주민들에게는 천안 KYC가 주도했던 지난 3년과는 전혀 또

다른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기획하고 이끌어 나가면서 그 과정들이 세련

되거나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마을공동체를 함께 가꿔 나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는 소중한 경험이 되셨을꺼라고 생각됩니다.

김승진 양곡리 이장님은 요즘에도 가끔 저를 찾아와 이것저것 상의의 말을 건네십니

다. 주로 무엇 때문에 힘들고 무엇 때문에 화가 난다는 얘기이시죠. 그러나 그 말속에

는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보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집니다. 이런 불평과

불만도 모두 애정이 있기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죠.

2012년 여름, 양곡리는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녹색체험마을

로 지정되어 받은 사업비와 마을기금을 보태, 마을 다목적 체험관을 준공하게 된 것

입니다. 큰 솥을 걸어 육개장을 끓이고 음식을 마련하여 지역의 주요인사와 마을출향

Page 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1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15

인사, 마을 어르신들, 청년회, 부녀회가 모두 모여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였습니다. 저

도 초청을 받아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잔치를 준비하는 내내 자기 일처럼 참여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 외부 손님들을 양곡리의 변모된

모습에 많은 놀라움과 감탄을 내보였지요.

요즘 농촌에는 활기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70~80%가 고령자이기에 농촌마을 전

체가 사회복지사의 상주가 필요한 요양소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부 및 외부의 지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스스로 해결하

려는 움직임, 이웃이 이웃을 먼저 돌보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

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기본단위가 바로 마을이지요. 그래서 마을공동체는 중요합

니다.

그리고 양곡리에서의 작은 실험이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해내지 못할 일을 공동체 복원을 통해 해결의 실

마리를 잡아보려는 노력, 부족한 자원이지만 협동과 분업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향

해 가는 발걸음을 만들어 보려 했던 기록이 바로 ‘함께 만드는 양곡리 문화마을’ 사업

이었기 때문입니다.

Page 9: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1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17

졸업단체 2.

농촌 생활문화공동체의희망 찾기충남 공주시 우성면 봉현리충남교육연구소

농촌생활문화공동체의 희망찾기

봉현리 생활문화공동체 활동을 주관하는 충남교육연구소가 봉현리 주민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연구소가 지금은 폐교된 봉현분교에 자리를 잡게 된 2001년 3월부터입니

다. 충남교육연구소는 충남지역 교수와 교사가 중심이 되어, 2000년 9월에 만든 민간

교육단체로 ‘삶의 교육, 상생의 교육, 지역에 뿌리내리는 교육’을 활동의 지향점으로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봉현서당’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그 이후 10년 동안

마을학교, 은행나무축제, 사회문화예술교육 등을 운영해 왔지요. 늘 마을 주민들과 함

께하고자 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 항상 뭔가 아쉬운 대목이 있었습

니다. 그것은 바로 10년 동안 진행된 활동들이 주로 일회적인 지원사업에 진행되었던

터라, 단편적이었고 활동에 참여하는 인원도 제한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상

황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의 자발성이나 역량강화 측면에서는 미흡함이 참 많았지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사업’이었습니다. 사업은 2009년

9월부터 시작이 되었지요. 초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과 농촌 마을

Page 1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1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19

의 특성과 가치를 살리면서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동아리를 만들고 마을을

기록해 나가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이 작업들은 전혀 새로운 작업은 아니었

습니다. 그 동안 연구소가 지역주민들과 일관되게 찾아온 우리 활동의 목표이기도 했

기 때문이지요. 다만 지난 10년 간 활동들이 주로 일회적인 지원사업이라는 한계 앞

에서, 이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은 하나의 돌파구가 되어준다는 데 그 의미가 덧붙여진

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서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바탕으로 대다수의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고, 자생적인 힘에 의한 생활문화공동체 형성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첫 해 우리의 주요 활동은 ‘지역민들의 삶에서

건져낸 농촌 생활문화공동체의 희망 찾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것 중 하나가 바로 풍물동아리입니다. 봉현리는 원래 달궁소

리 무형문화재마을 입니다. 그런데 풍물을 치고 소리를 하시던 할아버지 몇 분이 돌

아가신 이후에는 마을 풍물패가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마

을축제를 할 때도 인근 신풍이나 공주시내에서 풍물단을 초청해야 하는 궁색한 처지

에 내몰리게 되었지요.

“봉현리처럼 흥 많은 동네에 풍물패가 없어서 되겠어요?”

‘글씨 말이여. 근디 지금은 누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제. 이제사 배우기도 힘

들고.”

“그러면 연구소에서 풍물강사를 모셔 올테니 배워 보실래요?.”

“글씨 그러면 좋긴 헌디 잘 될랑가 모르겄네.”

이렇게 해서 봉현 풍물동아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매 주 2회씩 꾸준히

소리를 맞춰 오고 있습니다. 더는 이웃마을의 풍물패를 부를 일도 사라졌지요. 그런

데 풍물동아리 활동을 하며 풍물을 익히는 것 이상의 성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풍물 활동을 하면서 소리 뿐 아니라 주민들의 마음도 서로 맞춰져간다는 것

이었습니다. 성질이 급한 이와 느긋한 이, 기분 좋은 이와 열 받은 이가 서로서로 소

리를 맞추려면 서로 배려하고 신경을 써야만 하니 자연히 소리와 함께 마음도 맞춰

가게 된 것이지요. 또, 풍물동아리 외에도 노인회가 중심이 된 전통문화동아리, 동네

청소년들이 어르신들의 삶과 마을의 모습을 기록해가는 사진영상교실 등도 같이 운

영되었습니다.

생활문화공동체를 이해하다

사업 초기 가장 중점을 두었지만 어려웠던 것은 바로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 사업의

의미를 주민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공동체를 바탕으로 마을이 운영되어왔

고, 지금도 도시에 비해 공동체가 상대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는 농촌임에도 주민들은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생활문화’ 역시 마찬가지

Page 11: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2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21

였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마을의 전통을 유지해왔음에도, 말과

개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해 온 것은 아니기에 이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

래서 말과 글 같은 형식적인 접근 보다는 주민들이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면 어떤 점이

마을에 도움이 되고 주민들의 생활에 어떤 즐거움이 더해지는지, 또 아이들 교육에는

어떤 이로움이 있을지 등 그 동안의 활동들을 예로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나갔습니다.

이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대동계장, 5도2촌 추진위원장, 새마을지도자 등 마을협의

체의 중심이 되는 분들을 모시고, 지속적으로 사업설명을 겸한 회의를 가지며 협조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을의 화합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이라는 인식

을 이끌어냈지요. 그 결과 풍물동아리는 부녀회원들이, 짚공예동아리는 노인회원들

이 중심에 서서 동아리를 형성하게 되었고, 동아리 운영은 탄력을 받으면서 자연스럽

게 참여인원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문화사랑방과 문화발전소, 그리고 달밤영화관

봉현리의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은 크게 문화사랑방과 문화발전소라는 두 가지 축으로

나눠 운영되었습니다. 문화사랑방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된 생활문화공동체 활

동을 주민 동아리 활동을 중심으로 상설화하고 조직화 하는 작업이 중심이 되었습니

다. 문화발전소는 다양한 문화체험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문화적 감수성과 잠재된 문

화 역량과 마인드를 키우는 것이 주요 활동이 되었지요.

문화사랑방은 부녀회 중심의 풍물동아리와 노인회 중심의 전통문화동아리(짚공예동

아리에서 발전), 마을 공부방 아이들의 연극동아리 등이 운영되었습니다. 동아리 활

동을 통해 얻은 성과라면 ‘함께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점과 이 즐거움이 원

동력이 되어 또 다른 욕구와 기대가 생겨난다는 점이었습니다. 또, 매번 모여 잡담으

로만 이어졌던 무기력한 만남에서 벗어나 마을 풍물단의 구성, 짚공예 전수, 마을아

동연극단의 구성, 마을문화의 활성화 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둔 새로운 배움의 공동

체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적극적인 활동과 참여로 마을 주민들의 생활에도 조금씩 활

기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1월에는 마을 축제를 겸한 생활문화공동체 발표회장이 펼쳐졌습니다. 거의 풍

물동아리들의 잔치마당이었지요. 풍물패가 없어 이웃마을 풍물패를 모셔 와야 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길놀이에서 작은 공연까지 마을 풍물패가 모두 맡아서 축제의 흥을

돋웠습니다. 축제 시작 전 괜히 망신당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던 분들이 축제가

끝날 때쯤에는 한껏 자부심이 가득한 모습이셨어요. 그리고 어느새 다음에 모일 날

을 또 정하고 계셨지요.

문화발전소의 활동목적은 봉현리와 봉현리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이야기를 발굴하고

담아내어 마을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또, 농촌문화와 관련한 마을사

업을 기획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주민들의 문화역량을 키우는 것에도 주요 목적이 있

Page 1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2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23

었습니다. 문화발전소는 크게 어린이 사진영상교실과 봉현리 다큐 제작, 마을 소식지

제작, 달밤영화관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사진영상교실에서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숨어 있는 마을의 또 다른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지역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독특한 모습들을 찾아

내며 지역문화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고 기록해 나갔지요. 그리고 내

와 골짜기에 따라 작은 골이 여기저기 형성되어 마을을 이룬 봉현리는 아이들이 찍

은 사진으로 각 마을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전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지역문화를 이해하고 기록하며 문화 매개자와 행위자로 동시에 커 나가고 있었지요.

봉현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달밤영화관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달밤영화관은 어린아

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한 곳에 모여 공동의 추억을 쌓아가는 자리입니다. 달밤영화관

이 열리는 날이면 연구소에서는 함께 드실 저녁을 준비합니다. 몇몇 할머니들께서는

일찌감치 오셔서 식사 준비를 도와주기도 하시고 아직 오지 않으신 친구들에게 전화

를 해 빨리 오라고 독려를 하기도 하십니다. 또 달밤영화관에서는 영화뿐 아니라 마

을 주민들의 공동체 활동 사진과 동영상, 마을 느티나무 공부방 학생들의 발표회 및

공연 사진, 동영상 등을 같이 보기도 합니다. 월드컵 그리스전이 열리던 날에는 함께

목청껏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응원을 하기도 했고 어버이날에는 아이들의 밴드공연

과 춤공연을 통해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또 마을 최고령자이

신 박관봉 할아버지 내외의 결혼이야기를 극으로 만들고 영화로 담아내 상영하기도

하였지요. 특히나 이날 마을 어르신들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달밤영화관은 문화를 통한 지역 주민들의 소통과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노력들

3차년도에는 노령화로 인한 마을문화 보존 및 전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많은 노력

을 기울였습니다. 농촌형 생활문화공동체 모델을 창출하였고 생활문화공동체 활동

성과를 지역사회에 환원하고자 하였습니다. 문화 리더로서 주민 자체의 역량을 강화

하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생활문화공동체 마을 이끔이를 양성하기

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년간 활동을 통해 성장한 풍물동아리 구성원들도 단순 동

아리 활동을 벗어나 마을 행사 때 길놀이와 공연을 지원하고 봉현리만의 가락찾기

를 접목하면서 특색 있는 문화패로 성장하기에 이릅니다. 또 마을 청소년을 중심으

로 생활문화기자단을 조직하여 마을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전파하는 차세대 문화

일꾼을 양성하였지요. 문화나눔공방을 통해서는 할머니 공방을 운영하여 할머님들

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였고, 도농 교류의 장을 활성화하여 5도 2촌사업과 연계

하기도 하였습니다.

Page 13: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2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25

봉현리는 보존.재생 가치가 있는 유.무형 전통문화, 사업 추진 인적기반, 구체적인 프

로그램이 이루어질 공간 확보에 있어 다양한 인프라가 상당 부분 구축되어 있는 마

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민이 참여하는 봉현마을학교 및 농촌문화체험학습 운영 등

폐교가 마을 교육문화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해나가고 있어 향후에도 이를 중심으로

한 농촌지역재생 및 마을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

지만 현재 농촌 지역은 급속한 노령화와 결손가정 증가 등으로 지역 생활문화공동체

는 와해되고 있습니다. 특히 마을 문화의 중심이 노인들에게 있어 이들의 삶 속에 깃

들어 있는 지역문화가 하루 빨리 젊은 층에게 전수되어야 할 실정에 처해있지요. 봉

현리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된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은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함께 어우러져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 활동

을 통해 봉현리 생활문화공동체를 재생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시발점으로 작용

하였습니다.

함께하는 배움의 공동체

봉현리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 주민들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민들 스스로 ‘함께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 즐거움이

원동력이 되어 또 다른 욕구와 기대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기력한 만남에서 벗어

나 마을 풍물단 구성, 짚공예전수, 마을 아동연극단 구성, 마을문화의 활성화 등의 공

동의 목표를 세우고 함께 발전해나가는 속에 새로운 배움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지요.

서로 갈등관계에 있던 마을 사람들도 풍물동아리에서 소리를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짚공예동아리에서는 가물가물해져가던 옛 생활

모습과 전통을 여럿이 기억을 모아 되살려내면서 주민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보

람을 느끼며 생활에 활기를 더했습니다. 또 다양한 활동은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

그램 개발로도 이어졌습니다. 전통발을 만들며 이를 아이들 교육활동으로 재구성하

게 되었고, 충남교육연구소가 충남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와 공주교육청과 함께하는

2010년도 보육교실 문화예술프로그램 운영에 노인 강사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일부 반영되기도 하였지요. 이런 활동들은 앞으로도 마을의 농촌문화 프로그램 운영

의 전문성을 신장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이것은 마을사업의 활성화와 수익창

출과도 연계가 될 것입니다.

생문공 사업을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

생문공 사업을 운영하며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점은 바로 지역 사업은 지역의 요구를

반영해야만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한 이해와 애정

이 요구되지요.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장애가 있는지, 또 어떤 방식으

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한 답은 지역과 지역 주민에 대한 이해와 애

정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여건과 지역민들의 삶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가 필

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역에 대한 이해나 준비 없이 이게 좋은 것이니 따라

오라는 식의 방식은 성공하기가 힘듭니다. 지역민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토대로 그

들의 요구와 기대에 답하는 소통의 자세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업보

다는 신뢰와 나눔에 우선한 자세가 필요하지요. 그것만이 소박하고 더디지만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Page 1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2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27

졸업단체 3.

중촌(中村) 연극동아리사랑해요 우리 동네

대전 중구 중촌동극단아낌없이주는나무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대살미(대대로 살아가는 美아름다운동네) 생활문화공동체

무대. 밤의 곰탕 집(탁자위에 술병들이 보이고 세 사내가 술에 취해있다)

오갑 : 야야, 계식아... 정신 좀 차려 봐라!

주억 : 놔 둬 임마, 이자식이 제정신이겠냐?

계식 : 아으... 한잔 더 먹고 죽자 죽어!

주억 : 그래, 먹다가 콱 죽어 버리자.

오갑 : 서울바닥에서 돈이 웬수다 웬수.

주억 : 시버럴, 아무리 돈 없다고 갓난이 놔두고 집나가는 게 마누라냐?

오갑 : 이 자식은 아직도 세상을 모르네... 서울은 돈 없으면 죽는거여. 켁, 곧바로 아웃이라고...

그리고 지역의 특성을 살린 사업이어야 한다는 부분 역시 중요한 점이었습니다. 농촌

의 문화예술교육활동은 대부분 ‘결핍’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문화

적 소외지역이라는 인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입니다. 공연시설 등 문화적 인

프라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농촌에는 농촌만이 가진 수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마음껏 접할 수 있는 자연환경과 지역민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농경문화 속 공동체성

이 바로 그것이지요. 어쩌면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거리가 가득한 농촌이야말로 문화예술 활성화의 보고가 아닐까란 생각도 해봅니다.

또, 농촌생활문화공동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참여자들의 주체 의식입니다. 얼마나

공동체 활동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는지 이것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느냐의 여부에

따라 공동체의 건강성과 지속성이 유지되지요.

마지막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믿음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활

동의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더 오래 기다려

야 하는 일이지요. 그렇게 이 생활문화공동체 활동에서는 기다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지원사업은 2011년을 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봉현리의 생

활문화공동체는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사회적 기업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별별솔루션’의 지원을 받

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자원을 스스로 발굴하고, 문화예술로 꽃피우며 오늘도 우리는 봉현리만의 농

촌생활문화공동체를 열심히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Page 15: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2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29

저녁 8시, 대전 원도심의 한 낡은 지하실에서 위와 같은 말들이 오고 갑니다. 무슨 일

일까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실제상황은 아닌 듯 합니다. 이곳은 대체 무엇을 하

는 곳일까요? 아, 이곳은 20대에서 60대까지 세대를 초월한 아마추어 주민배우들이

모인 대살미 동네극장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연말에 선보일 ‘2012 시민배우 연극열

전 문화가 꽃피는 우리동네’를 위해 한창 연습을 하고 계시는군요.

우리는 이렇게 몇 년을 함께 했습니다. 증촌동이라는 문화소외마을에서, 낯선 주민들

을 만나 ‘문화예술을 매개로 생활문화공동체’를 만든다는 생소한 이야기를 건네며 주

민센터 회의실에서 생활연극동아리의 둥지를 튼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지요.

되돌아보면, “대살미 생활문화공동체” 라는 주민문화동아리의 이름으로 참 많은 일

들이 있었고, 나름대로 열정과 노력의 땀을 아끼지 않은 지난한 과정이었음을 고백

합니다. ‘사는 게 연극보다 더 하다’ 며 삶의 무게를 토로하는 노년의 회원과 취업이

라는 문턱에 청춘을 저당 잡힌 20대의 인턴사원까지 구성원의 사연과 삶이 묻어나는

동아리방은 때로는 인생수련의 도장이 되고, 삶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는 작품소재

의 산실이기도 했었습니다.

사업초기, 나는 단단한 열정으로 무장한 연극선생으로, 때로는 삶의 무게에 짓눌린 회

원의 희미해진 의식을 자극하는 활동가로,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가 되

자며 연극대본의 한 구절을 곱씹는 돌아이 광대로, 그동안 동아리회원과 함께 한 한

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해를 더해 갈수록 공동체를 완성하려는 목표를 위해, 지속가능한 활동으로 자생력을

키우려는 고민 앞에서 육신은 야위어 갔습니다. 하지만 지혜를 보충하고 소통의 의미

를 깨닫는 보람과 희열의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또, 동아리 식구들은 불편한 몸으로 병원문턱을 왕래하는 선생의 신병을 걱정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4년의 시간을 보내왔 듯, 오늘도 우리는 연습

실에 함께 섭니다.

생활연극동아리, 그 첫 시작

2009년, 우리는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 시범사업’의 현수막을 증촌동이라는 서민마

을 담벼락에 내걸었습니다. 증촌동은 대전에서도 소형아파트가 특히 밀집된 지역으

로 주민의 74%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구 임대 아파트의 경

우에는 노인과 장애인 인구가 특히 밀집되어 있었고, 조손 가정이 많아 경제적인 빈

곤감이나 열등감, 박탈감 등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정서함양과

문화향유를 위한 각종 문화예술과 관련된 서비스가 시급하고 필요한 곳이었지요. 그

래서 우리는 지역의 역사 문화적 배경과 이웃 간의 미담 사례를 발굴해 활동하는 생

활 연극 동아리를 열었습니다.

첫해는 연극 및 인형극을 매개로 한 ‘주민이 함께 만들어 가는 생활연극’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1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한 ‘대살미(=대대로.살아가

는.美아름다운 동네)’ 연극 동아리와 어린이들이 집중적으로 참여한 ‘무·릉·이’ 인형

극 동아리가 운영되었죠. 동아리 활동으로 사람들은 서로 좋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더불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서도 애정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사무

소 희망근로에 참여하시던 67세의 한 어르신은 연극을 통해 삶에 활력을 가지게 되

었고, 청년일자리사업에 참여하던 20대의 청년들은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되었

지요. 또 함께 하는 연극동아리회원들을 통해 열정과 동네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기

도 했습니다.

Page 1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3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31

그다음 해에는 창작역량의 강화와 지속적 지원으로 자생력을 갖춘 생활문화 봉사단

체를 정착하는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동아리 회원들의 무대경험과 역량강화

를 위해 워크숍 공연이 진행되었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

다. 또, 동아리 회원들이 직접 노인정이나 장애인 시설, 어린이집, 저소득층이 밀집

된 아파트 단지 등을 찾아다니며 펼치는 공연도 진행되었습니다. 동네의 건전한 청

소년 교육문화 조성을 위해 ‘청소년 연극동아리’도 새롭게 운영되었지요. 이런 활동

들은 정기적인 평가회의나 운영위원회 등을 통해 서로 과정과 결과를 도모해 나가기

도 했습니다. 정례회의를 만들어 생활공동체동아리들 간 네트워크를 돈독히 하는 작

업도 빼놓을 수 없었죠.

연말에는 생활연극동아리 페스티벌을 통해 각 동아리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서로의

활동을 마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자리를 통해 문화를 공유해나갔습니다.

각각의 사연들로 무장되었던 생활연극동아리들이 이제는 2009년 1기를 시작으로

2013년에는 5기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대살미 생활문화공동체는 ‘지역의 문화지킴

이, 우리지역 시민배우’ 라는 타이틀로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연습중입니다.

지난 4년 동안 대살미 생활연극동아리의 열린 공간에는 많은 지역주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오고 갔습니다. 이곳은 오는 사람 말리지 않고 가는 사람 역시 잡지 않습니

다. 하지만 생활문화에 관심 있는 주민들이라면 누구든 올 수 있는 사랑방이 된지 이

미 오래입니다.

해가 바뀌고, 다양한 무대공연의 횟수가 늘어가고, 팜플렛의 등장 배우들의 얼굴이 바

뀌어도, 1기로 시작한 선배배우들은 늘 동아리의 든든한 중심이 되어줍니다. 가끔은

극장 자리 뒤쪽에서 자신들의 경험담을 툭툭 던져놓기도 하지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저도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퍼집니다. 첫 페스티벌무대에 올라와서

등퇴장 장면도 못 찾고, 청심환을 먹던 그때를 떠올리게 되면서 말이죠.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을 하는 동안 다양한 언론 매체들이 찾아와 우리의 활동을 소개

를 하고 방송에도 출연을 했습니다. 해를 더할수록 공연횟수들도 늘어갔습니다. 처음

에는 어색하고 삐걱거렸던 사이들도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소통을 하며 소통의 벽을

넘어갔지요. 애타게 그리던 전용연습공간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대

살미생활문화공동체마을기업’ 이라는 새로운 타이틀로 이제 어엿한 지역문화단체로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Page 17: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3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33

우리들의 일상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정서적 소통의 단계를 넘어서, 함께 여행하고,

밥 먹고, 목욕 가고, 경조사 쫓아가고,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까지 머리를 맞대고 함

께 궁리하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공동체를 위한 고민은 이제부터가 시

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주민회원들에게 워크숍공연과 주민역량강화워크숍, 찾아가는 골목축제와 대

살미페스티벌, 정기공연과 기획공연, 지역문화교류공연과 지역사회공헌봉사공연 등

의 활동은 너무나 익숙한 것들입니다. 처음에는 생소한 문화용어들로 벽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전문문화단체 뺨 칠 정도로 스스로 문화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런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활문화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게 됩니다.

일상 속으로 들어온 생활문화공동체

2011년을 기점으로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 사업에서 졸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살

미회원들의 일상은 전과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진행해 온 것처럼 주3~4회의 연

습실의 모임은 계속되고 회원들의 참여도 꾸준히 이어집니다. 사업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생활이기에 변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연극동아리에서도 더는 출연 배우를 모으기 위해 발로 뛰지 않아도 됩니다. 행여 출연

했던 배우가 개인사로 연습을 중단하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주민배우가 나타나서 공백

을 채워줍니다. 때로는 이웃을 데려오기도 하고, 부녀가 나란히 무대에 등장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쉬고 있는 선배 동아리 회원들을 수소문하여 무대로 올리기도

합니다. 공연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어떤 회원은 관객홍보에 걱정의 소리를 더하고 팜

플렛을 들고 직접 주민들을 만나러 나가기도 합니다. 이제는 누가 먼저 나서지 않아

도 서로들 그렇게 운영을 하고 계획을 하고 새로운 무대들을 준비하지요.

때로는 회원들 개개인의 일상과 문제로 혼란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모두들 묵

묵히 개인의 생활과 연극 연습이라는 두 가지 생활을 소화해내며 새로운 무대를 준비

합니다. 연극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요, 함께 하는 공통의 과업이기도 때문이죠. 그렇

기에 ‘2011년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사업’을 종료하고 보낸 2012년 한 해도 전과 다

름없이 연습과 공연, 행사 등의 일정들이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부쩍 들어 동아리 식구들의 대화들이 심각합니다.

‘나라경제도 어렵고, 장사도 잘 안되고, 사는 게 힘들어’, ‘아무래도 공동체 사업을 하

나 만들어서 먹고사는 문제와 일자리를 만들어야겠어’ 등 함께 사는 문제에 대해, 공

동체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대살미 생활문화공동체에도 뭔가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제는 회원들의 결속력을 중심으로 정말 먹고사는 문제에 당면하여, 주민의 일자리

와 소득창출, 동아리의 정체성이 포함된 새로운 생활문화공동체의 고민이 시작되는

해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대살미 생활문화공동체는 정부지원사업의 범위를 벗어나 스스로 활동의 목표를

세우고, 지역과 개인의 다양한 문제를 고민하는 문화적인 삶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의 다양한 논의도 시작되고, 힘을 모으면 새로운 재정사업도 가능하겠다는 자

신감도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힘으로 분명히 2013년은 주민공동체의 새로운 사

업모델이 탄생할 것 이라고 기대합니다.

동아리 회원들이 한편의 연극을 완성해 가는데 있어 연극은 하나의 매개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지혜를 모아가며 공동체를 이루어왔

Page 1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3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35

듯 대살미 생활문화공동체 속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지역주민과 예술

가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나눔이라는 공동체적인 삶을 설계하고 커뮤니티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미 새로운 여정에 들어선 대살미 생활문화

공동체의 발전을 기대해 봅니다.

졸업단체 4.

주민 악단을 통한문화마을 공동체 만들기

대구 남구 대명 2동 물베기 예술마을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

주민악단을 통한 문화마을 공동체 만들기

만약에, 먼 옛날 사람이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맹수를 피해 다니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매일매일을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았을 것이

고 결국 오늘날과 같은 지구의 주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혹은 또 다른 필요로 고도로 발전해 온 오늘날의 공동체는 올

바른 방향으로 향하는 중일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공동체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모르는 체 서로 고립되어 살아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조차 기피하며 개인주의적인 삶으로 흘

러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린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Page 19: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3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37

개인주의적인 삶은 결국 모두가 불행이라는 늪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

으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야 할 시점이 아

닐까요?

대구 현대음악오케스트라가 위치한 우리 동네도 그랬습니다. 이 동네는 30년 전, 예

술고등학교가 터를 잡고 난 이후부터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던 곳입니

다. 그리고 현재 대구 악기사의 95% 이상이, 대구 음악인구의 약 90% 이상이 연습실

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 계명대학교 음악대학과 각종 녹음실, 연주단

체, 사무실 등이 밀집해있어 대구 음악인들의 주요 생활 무대가 되는 지역이기도 하

지요. 이곳에서 악기 통을 메고 다니는 학생들과 독특한 스타일의 예술가를 만나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입니다. 어디서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자유로움이 묻어져 나오

는 예술 동네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예술가들의 입장에서만 본 것입니다.

이 동네에는 예술가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혹은 그 이후라도 예술과는 전혀 무관하

게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런 모습들은 익숙하지도 않으며 악기

연습 소리 또한 시끄러운 소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용했던 동네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빈집들이 연습실로 바뀌어 가며 마을에서는

다양한 불협화음들이 생겨났습니다. 아니 일반 주민들의 측면에서 본다면 엄청난 소

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주민과 예술가들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했지요. 이

런 충돌들로 몇 번씩 이사해야 하는 예술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소음으로 말미암

아 민원을 제기하는 주민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 가장 많은 소리를 밖

으로 쏟아 내었던 학교들은 교육청의 민원으로 급기야 건물의 구조를 변경하는 상황

까지 이르렀죠. 동네에 있던 음악인들도 그들의 공간에 방음시설을 강화하며 철저히

주민들의 삶의 공간과는 분리시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마을에는 서로 다른 성향

의 집단이 서로 반목하며 분리된 채 각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소통을 시도하다

이런 현실을 보며 더는 이렇게 계속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해야 한다

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동네 어르신들을 먼저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시끄럽기만 한 음악가들에 대한 불평밖에 없으셨어요. 동네가 시끄러워 많

은 사람들이 이사를 하고 있고, 비어 있는 공간은 원룸 주택으로 개조되면서 점점 동

네는 붕괴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또, 학교 시설 때문에 유흥업소 제한이 있어

지역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음악가들과 학교 때문에 동

네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어르신들의 이런 불평과 불만 속에는

우리가 사는 동네가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공통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정말 혼자서

만 잘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 함께 잘 살아가자는 공동체의 마음이 담겨

있으셨죠.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개별적으로 다가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

고 그들을 설득시켜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인식의 전환이 시급했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있어 동네에 피해가 되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는 이 21세기가 문화의 시대인 만큼 예술가들이 있어 동네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설득을 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말뿐만 아니라 직접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행동의 시작에는 우리 오케스트라의 활동이 있었지요. 오케스

트라 연습실 앞에 있는 중국집 마당에서 우선 연주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기 시작했

Page 2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3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39

습니다. 사람들이 좀 더 음악에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친근해질 수 있도록 익숙하고

대중적인 공간에서의 연주회를 진행한 것이죠. 정기 공연장도 아닌 공간에서, 그것도

양파 썩는 냄새가 나는 중국집의 한 마당에서 연주하는 것은 사실 오케스트라 단원들

에게도 쉬운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연주회를 진행하며, 중국집을 오가는 사람

들이 조금씩 연주회를 보기 시작했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게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우리의 진정성이 전달되면서 급기야는 동참하는 주민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성과로 동네의 지주들과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들이 모

여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를 오케스트라가 함께 열기도 하였습니다. 이 잔치에는

500인분의 짜장면을 대접한 중국집 사장님과 십시일반 금일봉을 보내온 다양한 사업

체의 주민들, 그리고 우리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곁들여지면서 그야말로 함께 하는 마

을잔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들이 구청에 전해지면서 방송 등을 통해 우리의 활동

들이 함께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들과 함께하다

그리고 이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에 대한 공고를 본 한 동네주민이 우리에게 이 사업

을 알려주었고 우리는 지금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하려고 하는 활동들이 바로 이것이라

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신청을 했고 선정이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주민

들과 좀 더 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주민들에게 제공해 주기로 했어요. 5명 이상의 주민이 원하신다면 음악과 관련된 모

든 것을 가르쳐 주기로 했죠. 노래를 한다는 70대 어르신들, 아코디언을 한다는 멋쟁

이 할머니들, 밴드를 하겠다고 나선 30대 아줌마들, 바이올린을 배우겠다며 늦는 나

이에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는 분 등 정말로 다양한 주민들과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주민들은 음악과 친해지고 우리는 주민들과 친해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3

개월의 짧은 연습기간을 통해 첫 번째 동네 주민음악회를 동네 마을금고에서 열었습

니다. 이 연주회에 주요 관객은 연주자의 식구들과 마을 주민들이었는데 뛰어난 솜

씨를 뽐내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음악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악기소리라면

먼저 신경이 곤두서고 불평이 쏟아졌던 분들이 이제는 직접 악기를 배우고, 무대 위

에서 직접 연주도 하며 주민들의 참여는 점점 자발적으로 변모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모습들에 힘을 얻었고 동네의 발전을 위해 좀 더 큰일들을 펼치기 시작

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동네잔치 아니 축제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함께 하고 싶은 동네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오기 시작했

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좀 거창한 우리만의 잔치를 펼쳐보고자 했죠, 동네 일대 거리

를 막고 무대를 만들고 곳곳에 길거리 음악회와 장터, 그리고 각종 이벤트를 하기로

계획했습니다. 또, 많은 주민의 동의는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모든 상가에서 후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금전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각 상가의 특수성을 고려

한 후원을 받기로 했어요. 가령 예를 들자면 국수집에서는 국수 10그릇, 커피숍에서

커피10잔, 미용실은 미용실 티켓, 분식 집에서는 떡볶이 5그릇,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샌드위치 5개, 그리고 부동산 사무실은 집을 후원해 줄 수는 없는 일이라 약간의 현금

후원, 그 외 나머지 상가들은 물품 등으로 후원을 받는 형태였습니다. 서로 부담이 가

지 않으면서 한집도 빠짐없이 동참하는 방법이었지요.

축제를 준비하면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이 남고 감

동스러웠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두의 적극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자신만만하게 행사를 준비해나갈 무렵, 큰 문제

가 발생했습니다. 거창한 행사를 기획했던 만큼, 동네 일대 거리를 막고 무대를 설치

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경철청과 구청과의 충돌이 발생했습

니다. 바로 도로점유 허가에 대한 부분 때문이었습니다. 원래는 경찰청과 구청에서

Page 21: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4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41

허가를 약속해주었으나, 축제 당일까지 허가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급기

야는 도로를 점유하는 것은 무조건 불법이라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경찰까지 출동한

상황이었죠. 모두 십시일반 힘을 모아 준비한 축제인데 불법이라니, 앞이 까마득했

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축제를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고 불법에도 불구하고 우리

는 축제를 강행하기로 맘을 먹었지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축제시간은 다가왔습니

다. 그리고 축제를 시작할 무렵 어느 새 축제장 주변이 정리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어

찌 된 일이었을까요? 돌아보니 어느 새 경찰들과 구청직원들이 직접 행사장 일대의

교통을 통제해 주고 있었습니다. 온 동네주민이 함께 하는 축제였기에 그들도 결국은

기꺼이 행사를 적극 지원해 주신거죠. 모두가 함께 하니 가능했던 일이라며 이 일은

주민들끼리 더욱 단합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날 축제는 물론 아무런 문

제없이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철저히 분리된 채 살

았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소통의 물꼬를 틀기 시작하며 주민들의 일상에 음악이 들

어가고, 교류가 시작되며 조금씩 그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음악 프로그램이나 축제에 함께 하지 않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이 주민분들 역

시 여러 활동들에 자극을 받아 문화거리 조성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다른 측면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게 이르렀습니다. 우리 동네의 힘은 그렇게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

던 것이죠.

그리고 2011년에는 우리 동네를 발전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우리 동네를 특화하자는 생각에 동의하여 국토해양부에서 개최한 도심재

생 사업에 응모를 하게 된 것이었죠. 우리는 동네에서 뜻을 같이 하는 주민과 구청공

무원 그리고 디자인 전문가들로 팀을 구성하여 도시대학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우리

동네를 발전시키자는 생각에 뜻을 같이하고 10주 동안 정말 많은 의견과 열정을 쏟

아 내었습니다. 그 결과 대구 경북지역에서 출전한 8개 팀과 경합하여 1등을 하였습

니다. 또 각 지역의 1등이 모여 경연하는 전국 대회에서는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지원

금 100억을 지원 받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지요. 실질적으로 동네를 물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재원이 확보가 되면서 새로운 희망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동네의 거리는 살

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텅 빈 가게들은 하나둘씩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밖에 없었던 커피숍

은 16개까지 늘어났어요.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거리

는 점점 활력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거리의 상권도 함께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남

구청에서는 이곳을 청소년 문화거리로 지정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예술단체와 상가

와의 1:1 결연사업도 시작되었습니다. 제 1호로 현대음악오케스트라와 1호 커피숍

Page 2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4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43

이 결연을 맺었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단체들이 상가와 협약하여 서로를 돕는 관계

로 발전해 나가겠지요.

함께 꿈꾸는 희망

이제 이곳에서 일어날 수많은 일에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 사업의

청사진을 그리고 물리적 공간을 충실하게 채울 프로그램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지역이 대구의 명소를 넘어 한국의 명소가 되기를 꿈꾸고 있기도 합니다.

2.28 민주학생운동이 일어났던, 위대한 정신에너지를 발산했던 유산을 가진 동네로

써 더 많고 좋은 생각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동네로 거듭나는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일 처음 이 생문공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다만 음악인과 원주민과의 갈등을 해소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으로 진행되었던 여러 활동들의

결과는 몇 백배의 규모로 커졌고 급기야는 동네의 지도를 바꾸는 일까지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야기했던 공동체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현대 사회는 각자의 삶에만 급급한 채 공동체가 붕괴되는 상황에 이르렀죠. 하지만 우

리 동네는 다시 공동체를 일구어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주민의 마

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진행된 일들을 보며 마

음이 모인다면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된다면 물리적 발전의 문제는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수

도 있을 꺼라고 생각이 듭니다.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다양한 기관들이 정말 많은 사

업을 하고 있지만 가장 우선 되는 것은 물리적 사업이 아니라 바로 주민의 마음을 하

나로 모으는 사업인 것이죠. 이해타산을 배제한 공동체의 형성이야 말로 더욱더 나

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가장 큰 핵심이자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이 사업을 통해 새

삼 깨닫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업을 통해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

고 깨달은 것 같습니다.

함께 동네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 다녔던 동네 주민과 나의 무모했던 계획에

묵묵히 따라준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리고 시범사업의 성공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

았던 많은 컨설턴트,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 이 사업이 필요함을 알고 정책을 입안한

문화체육관광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Page 23: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4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45

졸업단체 5.문화로 밥을 짓고, 한 숟갈씩 나눠먹는,흐뭇한 우리동네

쌍쌍유촌(雙雙柳村)문화일촌(文化一村)

광주 서구 쌍촌 임대아파트 2개 단지(사)시민문화회의

쌍촌동 이야기

한국의 민주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광주광역시, 그 중 서구에 있는 쌍촌동은 오래

된 버드나무 2그루가 있던 마을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금호, 쌍촌 임대아파트는 광주 최초로 조성된 저소득층 집단거주지이기도 합니다. 그

래서 마을에는 유난히 노인세대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이 많은 편입니다. 또,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사는 낙후된 구도심아파트 밀집지역이기도 하지요. 최근에는 다문

화가정들도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조금 어려운 생활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안을 수 있는 정이 있는 곳이 또, 우리 마을 쌍촌동이기도 합

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 마을에는 ‘따(뜻한)밥(상)’과 ‘사랑의 몰래 산타’라는 봉

사활동을 하는 서구청년회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따밥’은 어린이와 홀몸노인들

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마을청소년들과 이웃들이 모여 매주 음식을 만들어 직접

배달해주는 활동입니다. ‘사랑의 몰래 산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풍성한 마음을 선물

하는 아주 기특한 활동이고요. 이러한 따뜻한 삶의 나눔들은 쌍촌 마을 주민들과 여

러 시민단체가 함께 살아오며 만들어 낸 성과들입니다.

2005년, 건강한 문화의 생산과 호혜적 문화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모여 시

민의 문화권 신장에 기여하기 위해 (사)시민문화회의는 설립되었습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쌍학공원에서는 매년 다양한 행사와 축제들이 정기적으로 열립니

다. 아이들과 일반주민들 그리고 다문화가정이 하나가 될 수 공간으로 제공되고 있

지요. 하지만 모두가 손을 마주 잡고 축제를 즐기지는 않습니다. 고령의 한 어르신

은 시끄러워 죽겠는데 뭔 놈의 잔치라고 벌려 놓기만 하냐며 싫은 소리를 늘어놓기

도 하시구요. 이런 활동들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살아온 환경도,

가진 생각들도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이기에 이런 활동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을 겁니

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에서 조금씩 생각을 해 본다면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달라

질 수 있겠지요.

Page 2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4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47

쌍쌍유촌-문화일촌

그래서 우리와 우리 동네 문화반장들은 함께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가 밥 먹고

살아가기 바쁜 이 세상에 어떻게 하면 서로 유익한 삶을 함께 이룰 수 있을지, 또 돈

까지 함께 벌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고민들을 말이죠. 아, 여기서 우리동네 문화반장

은 정말 우리 동네에만 있는 반장님들입니다. 바로 우리 동네 문화를 스스로 기획하고

이끌어 나가는 주체들이시죠. 우리 동네의 문화 활성화에 관심이 많고 참여하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우리동네 문화반장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동네 문화반장은 정기

적인 모임과 교육, 연구들을 통해 주민들 스스로가 문화기획가가 될 수 있도록 지원

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입니다. 이곳의 문화반장님을 통해 우리동네의 크고 작은 축제

들이 기획되고 진행되었습니다.

그 중 ‘오월솟대’는 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공공미술프로그램입니다. 문화반장들이

‘해마다 그냥 지나가는 행사로 그치지 말고 기념으로 남겨질만한 뭔가가 없을까?’라

는 생각과 고민으로 탄생된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었죠. 오월솟대는 민주,인권,평화

의 가치와 공동체상의 염원을 담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솟대를 소재로 한 축제

는 마을의 행복을 기원하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Page 25: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4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49

쌀쌀한 가을비가 내리는 11월에는 광주민예총의 민족예술제의 ‘삶과 몸의 축제-몸·

짓 제(祭)’를 함께 했습니다. 음악·무용·연극·문학·미술 등의 여러 장르가 통합된 전문

예술단체들이 모여 삶의 애환과 시대의 꿈을 해학과 감동의 몸짓으로 펼쳐냈습니다.

삭막했던 우리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지요.

문화아지트 ‘팡팡팡 활력 충전소’는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제작한 아트 포장마차입

니다. 쌍촌주공 임대아파트 놀이터 옆에 설치된 이 포장마차는 생문공 사업의 장소로

활용되었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모여 프로젝트를 해 나가는 문화 커뮤니티 센터였습

니다. 또, 생활문화공동체시범사업의 거점공간인 리폼아트공방에서는 각자의 사연이

있는 오래되고 낡은 물건들을 주민 스스로 아트상품으로 만들어 가져가는 ‘날고 싶은

자작(自作)나무’ 리폼프로그램이 상설 운영되었습니다. 이 공방은 참여하는 주민들

끼리 스스로 공방사용 규약을 제정하고 운영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자생적인 운영구

조를 마련한 조직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주변아파트 단지 내 버려진 가구나 생활용품

등을 수거하거나 기증을 받은 물품으로 작업은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재탄생된

제품들은 판매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자체수익을 창출하면서 수익도 공동으로 나누고

공방운영에 사용되기도 하였지요.

처음엔 사용하던 물건을 왜 굳이 망가트리는 걸까, 헌 제품을 어디에 사용하지 라고

Page 2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5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51

생각했지만, 이런 작업들을 통해 환경도 살리고 예술도 배우고, 또 추억을 디자인해

서 돈까지 벌며 이웃과 함께 나누는 기쁨은 생각보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공방은 아

무래도 공구들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보통의 예술작업공간과는 달리 좀 시끄럽습니

다. 게다 우리 공방은 방음설비가 완전히 갖추어진 공간이 아니었기에 주변 주민들에

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초기에는 공방 옆 미장원을 운영하는

아주머니께서 시끄러운 기계소음에 불만을 제기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도 우

리는 서로 이웃인데 저희 입장을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 아주머니가 조금은 야속했었

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장원 아주머니께서 조심스레 저희 ‘리폼아트공방’ 문을 열

고 들어오셨어요. 몸이 불편하신 동네 할머님 집에 있는 밥상다리를 좀 높여줄 수 있

느냐고 물으셨지요. 우리는 흔쾌히 승낙했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미장원 아주머니

와 공방과의 관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공방의 뚝딱거리는 소리가 궁금하신

지 자주 구경도 오십니다.

공방은 어느새 마을에서 주워 온 낡은 물건들로 가득 쌓이면서 고물 창고가 되었습니

다. 하지만 그 고물들이 주민들의 솜씨로 보물로 재탄생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

노라면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동네 소식통 프로젝트로 ‘우리동네 신문 만들기’도 진행되었습니다. 기사감을 찾기 위

해 동네 주변을 조사하고 탐색하기도 하고 동네 주민들을 직접 만나며인터뷰도 진행

하였지요. 이런 활동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를 이해하고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계

기가 되었습니다. 또, 아파트 안에서만 갇혀 지냈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

를 맺어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동구에서 매월 하루씩 열린 ‘대인예술야시장 만물마차 장사꾼’에 참여하

여 시장방문객들의 발길을 붙들기도 했는데요. 양동시장 커텐 가게에서 자투리 천을

주워 예쁜 머리끈을 만들고, 버려진 병뚜껑으로 앙증맞은 메모판 자석을 만들어 판매

하였습니다. 또 리폼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야시장을 찾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족끼리 혹은 이웃끼리, 또는 연인이나 친구끼리 낡고 헌 물건

들을 새로운 물건으로 탄생되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나갔지요. 앞으로도 아트공방

은 주민들이 서로서로 모여들어 함께 나누며 유익한 삶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창조적

인 행복공간으로 리폼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의 처음 시작을 알리며 사업참여를 홍보하는 것으로 시작된 마

Page 27: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5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53

을잔치 ‘굿났네! 굿났어!’는 이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운영되는 마을축제로

거듭났습니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참여하는 이 축제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 체

험행사들이 펼쳐졌고, 생문공 프로그램의 결과물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 화합하고 교

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였지요.

하지만, 3년간의 지원사업이 끝나면서 우리들의 힘만으로 지속적인 운영을 해 나가

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공방 운영은 전문 인력난과 재정난에 시달리

게 되었고 간헐적으로 운영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가슴을 맞대

고 고민을 했던 지난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며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미래를 또 다시 함께 꿈꿉니다. 조금은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

가 만든 마을축제와 아트장터들을 매년 키워나갈 계획입니다. 이렇게 만든 우리의 프

로그램과 축제들이 앞으로도 매년 지속될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을 모아나갈 겁니다.

Page 2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5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55

극단 벅수골의 주요 작업은 섬 사람들의 이야기와 설화를 시나 노래, 춤, 연극, 그림

등의 교육을 통해 펼쳐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로 섬 마을을 가꾸어

나가는 일이었죠. 초기에는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평균 연령대 70~80대인 사량도의 어르신들, 글을 모르시는 어르신들도 꽤 되셨고,

노안으로 눈이 어두운 분들도 꽤 되셨습니다. 게다 밭일과 뱃일에 지친 어르신들에게

생문공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나라 이야기 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 강

사들은 어르신들의 생활 속으로 먼저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가끔은 술과 음료로 어르

신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르신들의 생활을 삶을 이해하

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이야기를 가지고 자연스레 글을 만들고 문장을

만들다 보니 어느 덧 한 편의 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졸업단체 6.

섬마을에 웃음꽃이활짝피네

경남 통영시 사량면 양지리 능양마을극단벅수골

섬마을에 웃음꽃이 활짝 피네

통영의 서쪽바다에는 다른 섬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섬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섬

마을 사람들의 삶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가 흐르는 사량도’입니다. 정확한 지역명

은 통영시 사량면 양지리 능양마을. 섬마을 사람들의 시가 시작되는 마을이지요. 아

름다운 작은 포구가 위치한 이 능양마을은 한때는 농사와 어업으로 주민소득이 상당

한 곳이었다고도 합니다. 또 시인 박재두, 차한수,차영환 선생들의 출생지로 이미 오

래전부터 시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마을이기도 하였지요.

극단 벅수골은 1981년에 창단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통영에서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유난히 섬이 많은 통영의 특징을 반영하여 2006년부터 섬마을 순회공연을 기획하여

운영 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2009년부터는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지원사업으로

좀 더 본격적인 섬마을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Page 29: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5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57

위 시는 할머니 한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다들 이렇게 이야

기 속에서 탄생된 시를 보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요. 서로 그때를 회상하며 웃음바

다가 되었고, 너도나도 이야기보따리를 막 풀어내기도 하셨습니다. 묘 자리를 쓰는데

하얀 백학이 날아간 차씨 문중의 전설, 일제강점기시절 처녀 공출을 당하지 않기 위

해 17살 때 섬으로 시집와서 팔순을 살고 있는 사연, 등잔불에 선을 보고 결혼으로 성

사된 마마자국의 곰보할머니 이야기, 수년간 숙원사업인 상도 하도 연도교가 아직도

놓아지지 않는 불만, 주색잡기로 몇 번이나 딴 살림 차리고 돌아간 영감이 밉지만 그

립다는 할머니, 척추판 고정으로 19년 병수발로 효부상 받은 이야기 등 너무나 많은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하지만 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

께 숙제도 내 드리고, 시 낭송 연습도 시켰습니다. 또 글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그

림이나 녹음자료 등을 통해 좀 더 글과 시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기도 했

습니다. 시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기도 했고, 모두가 공감되는 소재로 시극을 만들기

도 했죠. 거기에 풍물까지 곁들여져 흥겨운 놀이마당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어르신

들과 극단 벅수골, 그리고 시는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

느 정도 활동들이 무르익어 갈 무렵, 우리는 시화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시회전시를

위한 장소를 찾기 위해 마을을 돌아보다 우연히 마을 포구에 방치된 오래된 냉동고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흉물스러운 낡은 냉동고와 그 공간을 멋진 시화전시장으로 바꿔

보자는 의견들이 모아져, 우리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 작업으로 매일 밤과 낮을 바꿔가며 낡은 냉동고에는 새로운 색을 입히기 시작했

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어르신들의 시화 25편이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낡은 냉동고는 아름다운 시가 흐르는 섬을 나타내는 주요 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작업들은 많은 언론에서도 각광을 받았습니다. 주요일간지와 방송사에

서는 촬영을 와서 어르신들을 인터뷰하고 마을의 여러 모습을 담으며 우리 활동을 주

목했습니다. 어르신들의 시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기도 하였죠. 그리고 연말에 진행되

었던 종합발표회 땐 여러 매체들의 취재경쟁이 생겨날 정도 였습니다. 적지 않은 내빈

들이 참여를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또, 그동안의 시 작업들을 모아져 한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고, 시극 등의 여러 활동을 발표하기도 하였지요. 그간 마을 노인정에 모

여 함께 연습하셨던 것들을 함께 공유하며 즐기는 자리였습니다. 종합발표회 날, 사량

바람에 실려 온 풍선

김공순

올 한산대첩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텔레비전으로 봐도 그런대로 재미있고 자랑스러웠다.

섬(양지리)에 사니까 뭍(통영)의 행사와 축제는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사는 게 섬사람들의 삶이 아니던가,

자식이 통영공직에 있으니 구경하고 가라해도 안 갔다.

팔순의 나이지만 마늘밭도 가꾸어야하고 섬에 살아도 할 일도 많고

자식들 성가시게 하기 싫어 텔레비전을 봤다.

바람이 은근히 늙은이의 마음을 알았는지

한산대첩이 끝날 무렵 축제 때에 띄워 올린

풍선 여섯 개를 집 위 마늘밭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예쁜지

늙은이의 마음도 풍선 따라 부풀어 올랐다.

호박보다 더 크고 반짝이는 빛이 고와 풍선을

오래 오래 보고 싶어 쑤씨골에 걸어두었는데

며칠이 지나

바람이 빠져 쭈꿀 쭈굴 해져 버렸다.

조것이 나를 닮았네.

Page 3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5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59

도를 찾아준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마을에서는 떡국 잔치를 준비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첫 해의 축제가 끝나고

이렇게 큰 하나의 축제가 끝났습니다,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금방 꺼진 불씨에

마을의 어르신들은 부정적인 시선을 내보이셨습니다. 급기야는 결과적으로는 마을에

어떤 이득도 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죠. 하지만 우리의 작업은 이제부터

가 시작이었습니다. 2010년에는 그 전년도와는 달리 조금 더 작업들을 탄탄하게 다

지며 지속적인 형태로 이끌어나가야 했지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정기모임 장소가

마을 노인정에서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집으로 변경되는 일들이 발생되기도 했

지만, 오히려 이것은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섬 밖의 활동도

잦아졌습니다. 통영의 연극예술축제에 초청되어 가기도 했고, 기타 여러 지역의 행사

에 초청 받기도 했습니다. 또, 방송매체들의 관심도 꾸준히 이어지며 사량도의 이야

기는 계속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심이 이어지면서 사량도 어르신들이 하

나가 되는 ‘아시섬’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시섬,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시가 흐르는 섬

마을’ 이라는 모임이었습니다. 이제는 극단 벅수골이 주축이 아닌 사량도 어르신들이

주체적으로 운영하시는 모임을 가지게 된 겁니다.

약이 밥이 되고

박원선

조개를 판다

오금이 저린다

마늘을 심는다.

복숭씨가 애린다.

병원에 간다.

조개팔고 마늘 팔아도

병원비도 안 된다.

일하기 위해 병원 가는지

병원가기 위해 일하는지

그러다가

중풍을 맞았다.

많이 좋아졌다

약이 밥이 되고

밥이 반찬이 되었다.

오늘도 절름거리며

터 밭을 가꾼다.

Page 31: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6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61

2011년에는 아시섬을 통해 직접 어르신들이 모임이나 행사를 직접 운영할 수 있는 기

반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여전히 문학강사를 파견하여 어르신들께서 시를 쓰

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드렸고, 자체적으로 동아리 모임도 가지게 되었지요. 또 한

우리 밴드를 결성하여 매주 연습하며 지역행사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또 뭍에 올라

와 어르신들이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하는 자리도 종종 만들었습니다. 시낭송은 통영시

민들에게는 많은 웃음과 감동을 전해주는 자리였고 어르신들께서도 자신의 삶을 시

로 노래하는 것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문화장터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관광객과 시민참여프로

그램에 참여하는 공연팀들을 위해 시낭송을 해주었고, 특산품을 판매하는 한편 통영

연체험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생문공 사업에 함께하는 대전의 대살

미팀과 교류공연도 이루어졌지요.

졸업, 그 이후

이렇게 우리는 3년의 활동을 끝으로 생문공 사업에서 졸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우리의 만남과 활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작년 2월, 극단 벅수골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바

로 아시섬 대표님을 비롯하여 몇몇의 마을 어르신들이 통영 시내 결혼식에 오셨다가

벅수골을 방문하셨습니다. 극단의 연극 공연이 있다면 보시겠다면서요. 안타깝게도

그 날은 공연이 없었던 터라 공연을 보여드리진 못했지만 그 발걸음은 너무나 감동

적이었습니다. 3년 전이었다면 생각조차 했을 일이었을까요? 무슨 시고 문화예술이

냐며 시큰둥하셨던 마을 어르신들이 이제는 직접 시를 짓고 낭독하시는 것이 일상이

되고 이제는 직접 공연을 보러 극단으로 발걸음까지 해 주시다니 새삼 그 변화가 놀

랍고 감사했습니다.

생문공 사업을 졸업한 이후에도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사량도를 내려갑니다. 어르신들

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며 앞으로에 대한 이야기도 여전히 함께 나눕니다. 이렇게 끝

나버린 생문공 사업에 대한 한탄과 우려, 반토막 지원에 대한 불평, 불만들이 쏟아지

긴 하지만 이 모두가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인 것을 압니다.

이제 사량도는 삶이 시가 되고 수필이 되는 ‘아름다운 시가 흐르는 섬’ 인 문화적 명

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많은 방송을 타기도 했

지요. 하지만 아름다운 시가 흐르는 섬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

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극단 벅수골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사량도와의 작업

들을 펼쳐나갈 예정입니다.

몇 달 전, 오호권님은 손녀의 돌잔치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시로 나타내며 달래었다

고 하십니다. 이제는 이렇게 삶을 자연스레 시로 표현하는 것이 일상이 된 사량도, 오

늘도 사량도에서는 어르신들의 삶이 담긴 시가 들려옵니다.

Page 3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62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63

물 메기

오호권

옛날에는 거름도 안 된다고 천대 받았지만

지금은 겨울에 시원한 맛이 미식가들이 자랑한다.

메기 라고도하고 물 메기라고 하지만

멍청하게 개통발에 잡힌다고 멍텅구리라고도 한다.

이제는 맛이 좋아 애칭으로 맛텅구리라고 해야겠다.

손녀를 안고

오호권

말똥말똥 바라보는 눈동자

엄마 아빠와 다른 모습에

왠지 낯 설은 내 마음 오마 조마

이내 방긋 웃는 모습에 아가야 고맙다.

세월은 서러움이 아닌가보다.

Page 33: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6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65

졸업단체 7.

월평, 예술로물들다

제주 서귀포시 대천동 월평마을문화도시공동체 쿠키

월평, 예술로 물들다

제주도 서귀포 시내 외곽에 위치한 월평마을, 이 곳은 제주의 전형적인 마을형태와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백합과 한라봉을 재배하는 농촌마을로서 깊은 마

을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서귀포시와 인근 중문단지가 도시개발로 시끌벅적할 때에도 월평마을은 그 손길을

피해 옛 제주전통마을의 형태를 온전히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면 소박

한 돌담길과 구불구불 이어진 진짜 올레길이 펼쳐지는 곳이지요. 하지만 그만큼 주위

의 관심을 받지 못해 특히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많이 소외된 마을이기도 합니다. 또,

월평마을은 농촌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유아층과 청년층, 중장년층, 노년층이 고르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가

높고 마을 발전에 대한 의지 또한 큰 곳이기도 합니다.

문화도시공동체 쿠키는 오래 전부터 지역의 다양한 문화예술 페스티벌을 만들기 위

해 지속적으로 마을과의 접촉을 시도해왔습니다. 그리고 서귀포시 전역에 구축하고

자 하는 ‘빈집을 이용한 예술레지던트 프로그램’을 이 월평마을에서 진행해 오고 있

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화예술프로젝트를 통해 월평마을의 정체성을 찾고 사회경제

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생활문화공동체 지원사업을 함께 하기 시작했

습니다.

예술로 물들기 시작하다

우리는 기존의 이벤트적인 공공미술사업이 아닌 마을 주민들이 직접 창작자가 되어

이 사업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우선 월평마을의 정체성을 찾아 구술사 인터뷰를 진행하고, 답사를 진행하며 마을의

역사를 함께 탐구하며 기록하는 활동들이 펼쳐졌습니다. 작가들과 마을 주민들이 함

께 하는 미술 활동으로 월평을 아름답게 그리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월평특산품 디자인 교실과 월평주민들로 이루어진 월평음악단을 구성하여

악기를 배우고 연주하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어우러져 배우고

노는 마당이 펼쳐졌습니다. 월평사진 콘테스트가 열리고 야외영화감상과 수박파티

Page 34: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6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67

도 열렸어요. 그간의 작업들의 결과물을 함께 공유하는 월평예술발표회도 프로그램

의 일부였습니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1년이 지나가고 마을 주민들은 조금씩 문화예술에 대해 재미

를 느끼기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

졌습니다. 기존에는 크고 화려한 설치물을 선호했던 성향에서 이제는 마을의 자연환

경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고 다양한 의견과 재미있는 아이디

어를 내주셨죠. 또, 처음에는 작은 돌이나 나뭇가지, 혹은 씨앗 등으로 설치작업을 하

던 레지던시 작가님에게 ‘쓰레기를 주워다 어디에 쓰냐’며 타박을 하시다가 이제는

완성된 작품들을 보고 좋아하시며, 가끔은 오고 가며 길가의 돌이나 씨앗들을 직접

주워다 주기도 하십니다.

2차년도에는 ‘월평 이야기길 탐방’이 펼쳐졌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1차년도의 사업

의 하나였던 ‘월평이야기길 지도’를 사회경제적으로 연계한 프로그램이었는데요. 내

용은 월평마을에서 쭉 살아온 마을 분들의 해설을 들으며 월평이야기길 코스를 만들

어 탐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마

을 어르신들을 보며 생각해 낸 이야기 탐방코스였고, 마을 해설사 역시 그러했습니

다. 또, 프로그램의 지속성을 위해 마을 수익과 연계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하였습니

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마을특산품인 한라봉과 구아바차 시음, 그리고 백합하우스 구

경하기를 탐방코스에 넣는 일이었죠. 그리고 마침 멀리 밑으로 지나가던 올레코스가

마을입구에서 이어지면서 마을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흥이 난 마을 분들은 재미있는 아이디어도 많이 내주셨어요. 그 중 월평밴드 삼촌들

은 일년에 한번씩 이야기길 탐방과 함께 하는 월평페스티벌을 열어 공연을 하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마을의 어르신들은 탐방코스 중의 하나인 제주전통가옥의 도통에 진

짜 아기돼지들을 키워서 1년에 한번 페스티벌 때 손님들에게 대접하면 어떠냐는 의

견들도 나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들이 조금씩 모아지며 월평 이야기길 탐방은

더욱 풍성하게 이어졌습니다.

3차년도에는 서귀포시의 지원으로 마을홍보관이 건립되면서 좀 더 적극적인 활동들

이 펼쳐졌습니다. 또, 남에게 의존하여 지속되는 활동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생적인

움직임들도 일어났습니다.

Page 35: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68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69

특히 월평 이야기길 탐방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 알리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월평라디오방송 ‘돌벵듸로 올래?’프로그램입니다. 방송

은 마을 주민들로 이루어진 5명의 DJ가 돌아가며 진행했습니다. 마을 분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올레꾼들의 음악신청도 받으며 사람들에게 아주 가깝고 친밀한 방송이 되

었습니다.

또, 1,2차년도에 만들어진 월평밴드와 월평풍물의 활약도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마을

행사가 많은 농촌마을에서 월평밴드와 월평풍물은 인기팀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매번 마을 행사 때 마다 외부 음악팀을 섭외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도 벗어나 자립적

으로 행사를 진행하며 서로 유대를 다져가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월평밴드는 자신들

의 악기를 직접 구입하여 연습을 하실 정도로 강한 열정을 보여주셨는데, 그 열정을

하늘도 아셨는지 무료로 음악을 가르쳐주시겠다는 음악선생님이 나타나시기도 했습

니다. 그리고 이 음악선생님과 함께 계속 음악수업을 이어나갔습니다. 백합하우스 한

켠 연습실의 늦은 저녁, 월평마을 이야기를 노래로 만드는 월평밴드 송을 꿈꾸며 오

늘도 월평밴드는 열심히 연습이 진행 중입니다.

그동안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던 송이슈퍼 앞 자그마한 터에는 마을과 서귀포시가 주

도하여 작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부녀회실에 설치되었던 월평살롱을 그대로 옮겨

와 월평이야기길 탐방객을 모집하고 마을의 특산품을 시식, 판매할 수 있는 교류공간

으로 재탄생된 것이지요. 풍물이나 서예의 경우에는 마을에서 강습비를 대고, 선생님

의 자발적 참여로 강습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길트기때 입는 의상이나 모자란 악기

등은 마을에서 지원을 해주시기도 하셨어요.

사실 처음에는 주민분들과 소통하며 풍물이나 서예 같은 프로그램을 원하실 때는 고

민도 많았습니다. 또 우리의 수업들이 외부에 내세우기 위한 의미 없는 수업이 되지

않을까란 조바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와는 달리 생활문화공동체 활동

으로 마을생활 풍경 속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군데 군데 마

을어귀에 앉아 따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은 이제는 한 자리에 모여 함께 글을 쓰고

담소를 나눕니다. 여기에 어린이와 청년층이 더해지면서 세대 간의 격차도 줄어들었

습니다.

월평마을의 일상패턴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벽에 일

Page 36: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

  70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이후…

어나 농사일을 시작하시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올 채비를 하십니다. 하지만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술잔을 들었던 손에 드럼스틱이 쥐여지고, 텔레비전만 응시

하던 가족들이 서로의 눈을 보며 장단을 맞춰본다는 것이지요.

문화예술로 물든 월평마을은 더 이상 평범한 농촌마을이 아닙니다.

그 곳에는 조금 더 건강하고 활력 있는 사람들의 삶이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오늘도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들리시나요?

오늘도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맞춰나가는 장단의 흥이 울려 퍼집니다.

여기는 바로, 예술로 물든 월평마을입니다.

Page 37: 생활문화공동체 '3년,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