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 meet a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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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 오, 그리하여 그대 이 사막 위에 섰구나 순간 모래가 바람에 서걱이며 말했다 그대의 고독은 正義롭지 못하므로 결코 同情을 구할 수 없다 - 몰리에르(Moliere, 1622-1673) 1. 나무와 이야기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는가. 그 여자에 대 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한그루의 포플러 나무 로 기억되고 싶어 하던 그녀. 나 같이 치사하고 비열한 남자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남아있고자 했던 여자. 나에 게 짙은 갈색으로 남고 싶다고 말하던, 하지만 결국 내 안에 회색으로 남게 된 그녀. 이 글은 내 안 어딘가에서 잠시 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사라져버린 어떤 여자에 관한 글이다. 2. 이 글을 쓰지 일주일 전쯤, 난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난 조용한 여름날 오후, 어느 한옥집의 마루에 앉아 글을 쓰 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쬐는 햇살은 살이 익을 만 큼 강렬했지만 그늘에 속한 나에게는 오히려 그 햇살이 청량하게 느껴졌다. 난 청량함을 입으로 느끼며 낡은 원 고지 위에 만년필로 무언가, 무언가의 글을 끄적이고 있 었다. 사각사각, 펜촉이 거친 종이 위를 긁으며 돌아다니 는 소리만이 집 안에 가득 했다. 무얼 쓰고 있었을까. 기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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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오, 그리하여 그대 이 사막 위에 섰구나

순간 모래가 바람에 서걱이며 말했다

그대의 고독은 正義롭지 못하므로

결코 同情을 구할 수 없다

- 몰리에르(Moliere, 1622-1673)

1.

나무와 이야기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는가.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한그루의 포플러 나무로 기억되고 싶어 하던 그녀. 나 같이 치사하고 비열한 남자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남아있고자 했던 여자. 나에게 짙은 갈색으로 남고 싶다고 말하던, 하지만 결국 내 안에 회색으로 남게 된 그녀. 이 글은 내 안 어딘가에서 잠시 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사라져버린 어떤 여자에 관한 글이다.

2.

이 글을 쓰지 일주일 전쯤, 난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난 조용한 여름날 오후, 어느 한옥집의 마루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쬐는 햇살은 살이 익을 만큼 강렬했지만 그늘에 속한 나에게는 오히려 그 햇살이 청량하게 느껴졌다. 난 청량함을 입으로 느끼며 낡은 원고지 위에 만년필로 무언가, 무언가의 글을 끄적이고 있었다. 사각사각, 펜촉이 거친 종이 위를 긁으며 돌아다니는 소리만이 집 안에 가득 했다. 무얼 쓰고 있었을까.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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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별 다를 것 없는 잡글이었겠지. 얼마동안일까, 한참을 그렇게 쓰고 있는데 글자에 점점 붉은 빛이 도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검은 색에 묻혀 거의 눈에 띄지 않던 붉은 색은 차츰 차츰 진해져갔다. 두 문장이나 썼을까, 이제 글자는 거의 핏빛에 가까워졌다. 울컥울컥, 펜촉에서는 내가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빠른 리듬으로 검붉은 잉크가 쏟아져 나왔다. 난 만년필을 뽑아 열었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포동포동 살이 찐 수십 마리의 하얀 구더기였다. 번들거리는 표피가 금세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난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 벌레의 배를 눌러 보았다. 그러자 구데기는 온 몸을 뒤틀며 검붉은 잉크를 뿜어냈다. 배설?구데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검붉은 잉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책상 위는 그것들이 토해놓은 잉크로 흥건해 졌다. 난 책상끄트머리에 놓인 원고지 뭉치와 구데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자기 위장이 뒤집히면서 격한 구토를 느꼈다. 내장들이 모조리 뽑혀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난 곧장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머리를 처박았다. 내 입에서 비어져 나오는 비명소리가 욕실 안을 울려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거위처럼 꽥꽥, 거리며 위장을 쥐어짜낸 나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남은 고통의 여운을 삭여냈다. 입안으로 스며드는 눈물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

3.

난 모든 꿈에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꿈에도 교훈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의 글은 지저분한 배설일 뿐이다, 같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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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난 이상한 버릇을 하나 가지고 있다. 버릇이라기보다는 가벼운 강박관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상하다고 해도 그렇게 별스러운 것은 아니고 그저 머리 안에 단어를 박아놓고서 수도 없이 중얼거리는 버릇, 그 뿐이다. 길을걸으면서,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몰면서입 안에 단어를 담아두고는 한다. 언젠가 (아마 고등학교시절 어느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가 입 안에 물고 질겅이던 단어는 轉落이었다. 난 그 어색한 발음의 수백번이고 수천번이고 되뇌었다. 轉落, 轉落, 轉落, 난 그 단어를 마치 오징어 다리라도 되는 양, 단 한 방울의 단물이라도빨아먹을 듯이 중얼거렸다. 내 위장 안에 들어간 그 단어는 부드럽게 소화돼서 나의 일부분이 되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 이후였다, 내가 가진 하나하나가 서서히 轉落해 간 것은.

5.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지독히도 가난하던 때였다. 내가 가진 가난에 딱히 이유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들어오는 돈의 액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액수는 매일 피워대던 담배 한 갑의 값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가진 직함이 학생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언가 돈이라는 것이 내 소유로 들어온다는 사실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인간에 대한 효용성의 등가적 교환물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가난은 정당한 것이며 심지어 당위적인 것이다, 라고, 나 자신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난 나의 가난을 위로했다. 돈에 대한 끝없는 환상을 지닌 내 주변의 인간 군상들, 그들이보여주는 주체할 길 없는 소비과정이 나를 얼마간 불편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순수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난 내 호주머니만 고민하기에도 머리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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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내가 가진 속물적인 독서취향 또한 나의 가난에 한몫을 했다. 그즈음에 내가 샀던 책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제목들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은 내용 또한 어마어마해서 난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거의 한시간이 걸리는, 책이라기보다는 암호문 덩어리들을 난 미친 듯이 사 모았다. 잡고 있는 책이 반도 끝나지 않았지만 가방 안에는 나를 유혹하는 두 세권이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가진 수많은 허영 중에서 속물적인 지적 허영이 손끝까지 나를 누르고 있었다. 여러 모로 보아피곤한 삶이었다.

제목의 거창함, 그리고 내용의 허무맹랑함에 비례해서 그책들의 값은 너무나도 비쌌다. 하긴 출판사 사장들도 바보는 아니겠지. 자신들이 찍어내는 책을 어떤 인간들이 사는지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닐 것이다. 누가 시간 때우기로 화이트헤드의 책을 읽겠는가. 자신들의 책을 집어든인간의 뇌수 안이 온갖 종류의 허영심으로 가득하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허영심 앞에서 얼마나 쉽게 이성을 잃는지 정도는 이미 뻔히 알고 있는 것이다. 바보들의 허영심을 강하게 자극할수록 값은 천문학적으로 올라갔다. 내가 보기에 그 책들의 가격은 그렇게 매겨지는 것 같았다.내가 그 바보들의 대열에 섰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난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말했다시피, 몹시 피곤한 인생이었다.

내가 새벽시장에서 생선을 짊어지게 된 것은 오로지 그 가난덕분이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노동의 신성함이니, 땀의 의미니 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거야. 내가 가진 오만함의 두께로 보아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의 군상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난 너희들과 다르다. 난 너희들 같은 속물이 아니다. 봐라, 난 이렇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 따위 너절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선은 생선이었다. 그리고 얼린 생선은 생선이라기보다는 돌덩어리에 가까웠다.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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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견디는데 그다지 익숙하지 않던 나는 첫날 일을 마칠 무렵, 완전히 질려버렸다. 코가 썩어 내릴 것 같은 냄새와 추위는 그나마 참을만했다. 그런 것도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근육과 힘줄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누군가 조금만 건드리면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았다. 일당 삼만원을 손에 쥐자마자 난 택시를 잡아탔다. 집에 도착해보니 택시비로 만원이 나와 있었다. 미터기에 찍힌 ‘10000’이라는 숫자를 보자 택시기사를 목 졸라 죽여보리고 싶은 증오를 느꼈지만 나에게는 누군가를 목 졸라 죽이기는커녕 아파트 현관까지 걸어갈 힘도없었다. 집 안에 들어선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너무 피곤해서 깨있을 수도 없었고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침대 위에서 강아지마냥 낑낑, 거리는 나를본 할머니는 뭐라고 핀잔을 주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난 의식을 잃고 잠 속으로 침몰해 들어갔다.

다음 날 난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다시 새벽시장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죽인 채 생선궤짝들을 짊어졌다.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뺨에서는 알 수 없는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그 전날, 그저 희미한 미열 속에서 몽롱하게 아파오던 근육들은 이제 확실하게 구석구석 저려왔다. 몸으로 하는 거의 모든 것, 그것이 운동이든 노동이든 머리를 굴리지 않고 몸으로 하는 모든 행위에 저능아에 가까운 나에게 생선트럭의 짐칸은 지옥의 문처럼 보였다. 지옥의 수문장처럼 생긴 십장아저씨는 불안하고 안쓰러워서 못 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난, 모든 퓨즈를 끊어버렸다. 생각의 퓨즈를 끊고 감각의 퓨즈를 끊어버렸다. 힘들고 아프다는 생각 자체를 지워버렸다. 아니, 내 머리통 안에 있는 생각 전부를 다 지워버렸다. 그리고 난 걸었다.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비틀거리며 새벽시장 안을 서성이며 걸어갔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마지막 상자를 밀어 넣고 바닥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자 십장아저씨가 불을 붙여주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난 자신이 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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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저럭 잘 해냈음을 알게 되었다.

6.

지금 와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난 그 아르바이트, 라기보다는 중노동을 11개월 동안이나 했다. 11개월. 누군가는 임신을 하고 애를 낳을 만큼의 시간이다.

물론 그 시간동안 매일 나가서 일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새벽시장에서 그 짜증나는 일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달 중이십일 정도 일할 것. 나머지는 반드시 쉴 것. 그것이 그들의 모토였다. 그 이상 일을 하면 버는 돈보다 약값이 더 든다는 게 그네들의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었고 나 또한 그게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첫 한 달 동안 깨달았다. 삼주정도 일하고 한주정도 쉰다. 그게 그들의 라이프사이클이었고 평균적인 사람의 한계였다.

일을 하면서 난 차츰 요령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체득하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한두 마디씩 말도 하게 되었다. 별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저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꿈을 가진 사람들. 물론 그 안에는 탁월한 사고로 나를 감탄시키는 사람도 있었고지독스럽게 비열한 사람들도 섞여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어떤 집단이건 그런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고 난 그때 이미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내성을 가지고있었다. 인간에 대해서 그리 큰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학생이라는 것, 그것도 서울 안에 있는 국립대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몇몇의 인간들은 내가 혹시 운동권과 관련된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보내기도 했고 나 같은 학삐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 했다. 어떤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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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나에게 자기 팔뚝의 문신을 자랑스레 내보이며 자신의 전과기록을 나에게 소상히 읊어주었다. 아마 내가 놀라기를기대했던 것 같은데 미안하게도 난 그 인간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어쨌거나 난 열일곱이 아니었고 지저분한 낙서에 놀랄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7.

그 고단하고 재미없고 피곤한 아르바이트를 왜 11개월이나 했을까. 나처럼 참을성 없고 땀 흘리기를 싫어하는 인간이 말이다. 그래, 인간은 어떤 상황이든 적응한다. 나라고 예외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건 반드시 적응해야 할이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나에게 그런 이유가 있었을까? 가난했다. 그렇지만 돈이 그렇게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간다고 해서 날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며 보채는 아이가 있는 거도 아니고 히스테릭한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다. 그렇다고 새벽시장에서 생선을 짊어져야 할 만큼 불편한 건 아니다.

그 때 나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서생선을 짊어지고 있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일은 정말이지 끔찍할 만큼 재미없고 힘든 일이었다. 단 하나 좋은 점은 복잡하게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인데 머리 안 쓰는 일 따위는 길바닥에 널려있었다. 90년대 후반의 경제공황이 오기 전이었고 국민소득이 만 불이 넘었다는 둥, 한국이 서구 선진국과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는 둥, 누구나 주식만 사면 떼돈을 벌 거라는 둥, 갖가지 핑크빛 캐치프레이즈가 빛나던, 생각해보면 실소가 나오는 그런 시절이었다. 몸으로 때우는 일 정도는 아무데나 있었다. 그 시절 내가 했던 아르바이트는 몸으로 때우는 일중에서도 가장 더럽고 가장 힘들고 가장 지루하고 가장 보수가 적은 축에 속하는 일이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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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찾아 떠났고 힘이 되는 사람들은 공사판처럼 힘은 들더라도 돈이 후한 곳으로 떠나갔다. 남은 이들은 힘도 없고 요령도 없는, 그야말로 요령부득인 사람들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일당을 쥐어든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겠다. 내일은, 내일은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가야지, 라는 꿈들을 품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 중 태반이 다시 돌아왔다. 마치 걸어도 걸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미로 속의 사람들 같았다. 모두들 자신이 하는 일을 경멸했으며 다른 일을 찾아보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난 다른 일을 찾지 않았다. 11개월 동안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저 시간이 되면 새벽시장에 나가서 생선을 나르다가 만 원짜리 지폐 3장을 손에 들고 집에 돌아왔다. 가끔씩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이 만원짜리책을 사면서 여섯시간 짜리군, 하며 중얼거리기는 했지만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하고 있는 일에 별 불만이 없었던 것 같다.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그렇다고 불만족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런 만족과불만족의 위태로운 경계선 속으로 녹아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나 자신이 같이 일하던 그들만큼이나 구제불능의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구, 제, 불, 능.그런 식으로라도 시간을 때워야 할 만큼 구제불능인 상태.

구제불능 [명] 구하여 건질 것이 없는 지경, 혹은 상태를이름. 구하여 도울 수 없는 상태.

8.

“저기, 아까부터 저 나무가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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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

바람이 나무에 매달린 가녀린 잎들을 스치며 지나갔다. 여름날 오후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솨, 하는 소리가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30분 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입을 열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난 그녀가 알지 못하도록 자그마한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의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역시 이런 그녀에게 적응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끄고 난 말했다.

“저기 끄트머리에 있는 나무?”

“응. 나, 잠깐 갔다 와도 될까?”

“그렇게 해.”

“미안. 금방이면 될 거야.”

가을이 되면 그녀는 나무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가을이면 나무들이 더 자주 말을 걸어, 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긴 가을은 나무들에게 비록 잠시이기는 하지만 겨울 동안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사일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난 생각했다. 내가 나무의 마음을 이해할 수야 없겠지만 왠지 그녀의 말이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새 담배를 피워 물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달칵,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무수한 인공의 소리들이 귀 안, 나의 뇌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우리가 앉아있는 나무 의자에서 한기가 올라왔고 난 뒤통수 어딘가가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나무와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난 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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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타들어가는 담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나처럼 상상력의 공간이 협소한 인간에게 그런 기분이 이해될리가 없었다. 이 여자, 나에게 한번도 그 기분을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 하긴 설명해 준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이런저런 쓸모없는 공상들이 떠오르다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공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난 진공의 상태가 되어 가만히 앉아있었다. 갑자기 워크맨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났고 난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어느새 돌아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이번에는 좀 길었지?”

“괜찮아. 너하고 할 얘기가 많았나 봐.”

“외로운 녀석이었거든, 너처럼.”

난 가만히 그녀의 손을 쥐어보았다. 그리고 손을 타고 그녀의 작은 떨림들이 전해졌다. 나무와 이야기를 하고나면그녀의 기운이 온통 빠져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무들은 참 이기적이야. 이 여자,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능력덕분에 언젠가는 모든 생명을 나무들에게 빼앗길 지도 몰라. 어째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된 걸까. 도대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이런 능력을. 아니, 이런 걸 과연‘능력’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그런 단어가 이 여자에게, 나무와 이야기하는 이 여자에게 과연 어울리는 단어일까.

내가 이런 순간에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손을 잡아주는 것 뿐이었다. 내가 가진 별로 쓸 곳도 없는 생명력, 난 그걸 한 방울이라도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 뿐이었다. 내가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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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선한 의도는 언제나 결과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그것이었다.

“넌 이런 내가 이상하지 않아?”

땅의 흙을 발로 쓸어 모으다가 그녀가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다들 이상해.”

“아니, 아니,”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나지막이 소리쳤다.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묻는 건,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냐 구,”

“글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한껏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를 쳐다보았다. 내 어설픈 미소는 그녀의 알 수 없는 표정덕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한,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닌 표정을 지으며 나의 눈 너머, 저 안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짓말. 넌 나를 이해 못 해.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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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않아. 왜냐하면,”

그녀는 울고 있었다.

“넌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왜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9.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차피 이 글 전체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본 것들의 넋두리이기는 하지만) 그 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어떤 일련의 시퀀스로서 존재했던 것 같다. 비록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순차적으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서로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런 느낌이다. 그냥 운이 나쁜 해였다고 봐도별 상관이 없겠지만.

난 그녀를 새벽시장에서 만났다. 그녀는 그 시장의 모퉁이에 있는 허름한 순대국집의 주인이었다. 일을 마치고 아침을 먹으러 간 순대국집에서 그녀는 고기를 썰고 있었다. 시장의 국밥집에서 고기를 썰고 식탁을 닦아내는 솜씨가 나이에 비해 몹시 능숙해 보였다. 순대를 썰고 국밥을 끓이고 그걸 식탁까지 나르는 모든 과정을 무용동작처럼 사뿐히 해치웠고 난 감탄해 버렸다.

그녀는 손님이 가게 안에 들어서도 인사 따위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나갈 때에도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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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3: Boy, meet a girl

소년, 소녀를 만나다.txt그 가게에 있던 어느 누구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20대 중반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여자가 시장 국밥집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오가는 남자들이 거친 농담이나 짓궂은 장난을 걸만도 한데 아무도 짓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있을 때는 그랬다. 성당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한다면 분명 과장이겠지만 어쨌거나 그거와 비슷한 분위기가 국밥집 안에 스며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는 대신 순대국을 먹는다는 게 다르지만 말이다.

“오늘은 젊은 총각도 데리고 왔으니까 고기 좀 수북히 쌓아서 주라구.”

나와 같이 있던 패거리 중 하나가 그녀에게 농을 걸었다.그녀는 옆으로 얼굴을 돌려 나를 무연히 바라보다가 이내주방으로 들어갔다.

“벙어리예요?”

“벙어리는 무슨. 원래 말이 좀 없어서 그래.”

담배 반 대 피울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각자의 몫으로 국밥이 식탁 위에 놓였다. 모두의 얼굴 위로 훈훈한 김이 피어올랐고 그 따뜻함에 난 긴장이 풀어졌다. 첫 숟가락을 뜨기 전 우리 일행은 소주 한 잔을 비웠다. 긴장이 풀린 뱃속으로 들어간 알코올은 위장에 허기를 전달했고 난기름기가 흐르는 국밥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입 천정이 허옇게 익을 만큼 뜨거운 국물은 나에게 아무런 미각도 전달하지 못했지만 배 안에 포만감만은 확실하게 쌓아올렸다. 난 코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모두 그릇에 코를 처박고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마치 그들 앞에 놓인 한 그릇의 국밥이 그들에게 놓여진 진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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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4: Boy, meet a girl

소년, 소녀를 만나다.txt것처럼. 단 하나의 진실. 난 백치처럼 멍한 머리를 하고서 국밥에 코를 쑤셔 박았다.

10.

그 지겹고 재미없는 새벽일을 하는 동안 난 이틀에 한 번꼴로 그 밥집을 찾아갔고 그 선이 긴 여자가 건네주는 한그릇의 포만감을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먹었다. 말하자면‘단골’이라고 부를 만한 관계가 된 것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고 주인 여자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알루미늄 샤시로 된 낡은 문을 삐걱이며 들어서는 나를 주인 여자는 언제나 힐끗, 쳐다볼 뿐 나에게는 의례적인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나 자신, 유령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나에게도 그런 것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차라리 그러한 무관심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고 아마 모르긴 해도 그 가게에 드나드는 대부분의 군상들이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기묘하면서 음산한 조화가 가게 안에 깔려 있었다. 국밥 한 그릇 이상의 다른 아무것도 기대할 여력이 없는 이들과 국밥 한 그릇 이상의 그 어떤 것도 내놓을 의사가없는 여자. 그들이 쌓아올린 위태로우면서도 쉽사리 깨어지지 않을 듯한 불안한 안정.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진득한 기름기의 순대국 한 그릇 뿐이었다.

그 여자를 처음 본 날도 느낀 것이었지만 그녀의 침묵은 정말로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냥 침묵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만큼, 혹은 그녀만의특별난 내력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의 침묵은 무겁고 완고했다. 가끔씩 호기심에 말을 걸어보고 싶을 때도 있었고 여자의 침묵에 대해서 주위의 패거리들에게 몇 마디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쓸데없는 농지거리에 말려들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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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말없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나같이 쉴새없이재잘대는, 그래서 덕분에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인간이보는 세상의 풍경과는 많이 다르겠지. 내가 지금까지 바라본 세상보다 조금 느린 템포로 움직이는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전혀. 느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

나중에 무심코 물어본 나에게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 말을 듣고 난 처음으로 그녀의 침묵이 부러웠다. 나의 눈에는 현기증 나게 돌아가는 세상을 일순간 정지시킬 수 있는 그녀의 침묵이 부러웠다. (무언가를 부러워한다는 건 아직 삶에 익숙할 만큼 늙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럼 늙는다는 게 생각만큼 나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그녀의 입에서 ‘말’이라고 부를만한 소리를 들은 것은 그렇게 가게를 드나든지 3개월쯤 되는 어느 공휴일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일요일은 아니었고 무슨 기념일이었다. 내 주변의 패거리들이 대부분 일을 쉬었다는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공휴일이라고 해서 시장이 장사를 쉬는 것도 아닐 텐데 어쨌거나 인부들은 공휴일에 꼭 일을 쉬었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종의 전통이었고 그래서 시장 안의 가게들은 공휴일 전날 이틀 치의 물건을 들여놓고는했다. 하루치기 잡부에게 공휴일이라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세상에는 그 외에도 의미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게 널려있었다. 내가 그들의 성스러운 휴일 전통을 깨고 일을 한 것 역시 의미가 없었으니까. 전날 일이 끝날 무렵 십장은 평소의 여유를 잃고서 다급한 목소리로 다음날 일할 사람을 구했고 난 무심코 손을 들었다. 이유?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쉬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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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이유가 없었다. 몸 상태도 괜찮았고 특별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참으로 심심하고 별 볼일 없는 청춘이었던 나에게 휴일이란 유치원생에게 주어진 콘돔마냥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시장은 조용하고 한산했다. 시간이 이완된 듯한 한산함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십장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움직였다. 그가 서서 나를 부르던 곳에는 몇 백개의상자를 자그마한 언덕을 이룬 채 나와 몇 명의 한심한 청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평소처럼 첫 상자를 어깨에 짊어졌고 그와 동시에 이완됐던 시간이 다시금 원래의 강도로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은 서서히 빠른 템포로 움직였고 얼음생선으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은 눈에 띄게 녹아내려 마침내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지막 상자를 모습을 감추었고 습관처럼 허기를 느낀 나는 습관처럼 국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텔레비전에서는 봄이 왔다고 아우성이었지만 땀이 흥건한나의 몸은 새벽한기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떠드는 소리와 상관없이 나에게는 훈기가 필요했다. 끝없는 모래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들이 오아시스로 바삐움직이듯이 난 그녀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고 가게 문 앞에 이르자 주저 없이 가게 문을 어깨로 밀며 들어섰다.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쉬는 날인가. 하지만 국솥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오겠지. 나는구석에 있는 탁자에 지친 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어 진공처럼 비어있는 가게 안을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힘겹게 가게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먼지들이 무중력 상태처럼 떠다녔다. 무덤 속처럼 조용한 그곳에서 유일한 운동체라고는 가느다란 실먼지 뿐이었다. 실먼지들은 유별나게 시끄럽고 유별나게 지저분한, 소위 지구라고 불리는 이 돌덩어리가 뿜어내는 중력도 뿌리치고서 그렇게 떠다녔다. 난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이 날 조롱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에 단 한순간도 땅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사는 불쌍한 인간. 그들은 너무나 가벼운 몸짓으로 나를 조롱하며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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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상 그 높이에서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은 채 느린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춤?

“나가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내 옆에 어느새 여자가 와서 서 있었다. 그녀는 놀란 나의 귀 속에 다시 한마디를 찔러 넣었다.

“나가요.”

여자의 목소리는 몹시 메말라있었다. 감정이 결여된, 윤기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어쩐지 신기한 느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아무도 없길래 그냥. 쉬는 날인 줄은 몰랐어요.”

“알았으면 이제 나가주세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무언가의 말을 들으면서 느꼈던 놀람은 신기함은 차츰 가라앉았다. 그 대신 여자의 어이없는 냉담함이 나를 맥 빠지게 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거지. 내가 이 여자의 영역을 침범한 건가.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그녀의 영역을 내가 침범한 걸까. 하지만 내가한 짓이라고는 탁자에 기대서 먼지를 바라본 것 뿐인데.

“미안해요. 중력에 관해서 생각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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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그러니까 중력 때문에 발바닥이 아픈 것 같아서. 그런 기분, 알아요?”

난 갑자기 그녀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아주 강렬하게.

“난 가끔 그런 기분이 들어요. 결국 내 존재를 증명해주는 건 나의 무게, 내가

가진 질량뿐 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 몸이 무겁다. 그거이외에는 전부 거짓말일

지도 모르니까. 아니, 나머지는 전부 거짓말일거야. 틀림없어요. 감정이니, 생각

이니, 꿈이니 하는 것들. 그런 건 다 거짓말이야. 나의 슬픔이 나를 증명해주지는

못하니까. 나의 존재는 오로지 나의 무게뿐이에요. 그러니까 나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발바닥은 너무 아프고 힘들 거에요. 왜냐하면 나의 모든 존재를 받치고 있 는 거니까.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가끔씩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서 있지도 못 할 때가 있어요, 나는.”

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말 그대로 그저 중얼거림이었고 그녀가 내 말을 듣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중얼중얼. 중력어쩌구, 피곤어쩌구, 난 허언증에 걸린 백치처럼 중얼거렸고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말을 멈췄다. 그녀는 심연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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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끝났으면 나가주세요.”

난 발을 땅에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의 피가 발바닥에 모여 욱씬거렸다. 문을 열고 나서는 내 등에 그녀가한마디를 던졌다.

“여기에 다시는 오지 말아요.”

11.

그날, 그녀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가식적인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력? 정말 그녀가 그런말을 했던가. 어쩌면 그건 내 안에서 만들어낸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나쁜 자식이라고도 했던 것 같은데 그것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날 기억의 많은 부분들은 심하게 뒤틀리고 훼손되어서 어떤 것이 그녀가 말한 것인지, 어떤 것이 내 안에서 울린 소리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아마 혼란스러운 하루였기 때문이겠지.

그녀와 헤어지고 버스 안에 앉아있던 나는 문득 왜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 어째서? 아니, 난 정말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가로등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거리에 서 있었다. 창 밖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어색하고 낯설어만 보였다. 적막.거리는 달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난 갑자기 모든 게 낯설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십 년이 넘도록 이 도시 안에 살면서 그런 낯설음은 처음이었다. 옆 자리에 앉은 연인들은 무언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지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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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이고 있었다. 난 그들의 이야기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지만 들리는 그 말들이, 그 소리들이 무슨 뜻인지 단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알 수 없는 소음들이 분절되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분명 그 때부터야. 난 중얼거렸다. 이 모든 건 분명 그 때부터야. 난 중얼거렸다. 轉落, 轉落, 轉落.

집에 돌아와 난 할머니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었다. 부글,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바라보던 나는 강렬한 식욕을 느꼈고 찌게 뚝배기를 삼킬 듯한 기세로 저녁밥을 해치웠다. 할머니는 파리가 교미하는 장면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쳐다보았다. 난 수저를 놓고 숨쉬기도 힘들 만큼 가득 찬배를 진정시키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아주 꼼꼼하게, 오랜 시간을 두고, 마치 무언가 숨겨진 것을 찾아내려는 듯이 몸을 씻어 내렸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던 나는 거울을 보았다.

“넌 구원받지 못 할 거야, 영원히.”

누군가 거울 안에 우울한 표정을 한 사내가 날 보고 있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피로해질 것 같은 얼굴. 난 한숨을내쉬며 욕실을 나왔다. 만사가 지겨워진 나는 침대에 누워 검고 어두운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날 밤, 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난 꼬마아이가 되어 교실에 앉아있었다. 교단 위에는 국민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던 선생이 서있었다. 나를 한없이 불쌍하게 생각하던 남자, 언젠가 나에게 고아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다고 말해주던, 덕분에 그 때 처음 내가 고아라는 걸 알게 해준 남자. 난 그의 동정이 싫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경멸스러웠다. 그의 배려가 지긋지긋했다.

그 남자는 교단에 서서 칠판에 무언가를 또각또각, 쓰고 있었다. 진녹색의 칠판 위로 기어가는 하얀 벌레들.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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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기 뚝, 하며 분필이 부러졌다. 동시에 난 오줌을 싸고 말았다. 나의 가랑이 사이에서 노란 액체가 흘러나오고 옆에 있던 짝은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움켜잡았다. 더러운 새끼. 아, 모든 아이들이 나를 보며 그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더러운 새끼. 더러운 추잡한 고아 새끼. 부모도 없는 더러운 고아 새끼. 앞에 서있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돌렸다. 그리고 미소가 가드가 담긴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고아를 괴롭히면 안돼요, 여러분.”

눈을 떴을 때 할머니가 나의 곁에 앉아있었다. 새벽 두시. 어디 아픈 데라도 있냐고 할머니가 물었다. 아마 자면서 신음소리를 냈던 것 같다.

“할머니,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나한테는 너무 불공평해.”

“마저 자거라.”

할머니는 불을 끄고 방을 나갔다.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 난 모두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12.

그녀는 자기가 고아라고 말했다. 그녀가 중학생이 되던 해 부모가 ‘사라져버렸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죽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 후 그녀는 친척들의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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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2: Boy, meet a girl

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자라게 되었다. 보기 드물게 양심적이었던 그녀의 삼촌은그녀가 스무 살이 되자 그녀의 부모가 남기고 간 모든 재산을 넘겨주었다. 물론 그 동안 늘어난 이자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삼촌에게서 돈을 받자마자 미련 없이 학교를 자퇴하고 국밥집을 차렸다. 왜 하필이면 시장 한가운데 있는 국밥집이었을까. 그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잠깐 다녔던 대학시절의 친구들이 까페나 샌드위치 바처럼 좀 더 그럴싸한 가게를 권했지만 그녀는 그냥 국밥집을 열었다. 그리고 그 후 5년 동안 매일같이 고기를 썰고 국물을우려내고 다데기를 만들었다. 후회 따위는 전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대단히 만족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요컨대 자기의 인생에서 지금 이 길말고 다른 길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모든 길은이미 정해져 있을 뿐, 자신의 의지나 취향 따위는 전혀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나도 고아지? 그녀는 날 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면 최소한 그 비슷한 걸 거야. 난 웃으며 고아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거라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눈을 보면 알아.”

눈? 내 눈 어딘가에 고아의 낙인이 찍혀있단 말이야? 난 왠지 착잡한 기분이 되어 눈을 깜빡거렸다.

“난 사람들의 눈에서 많은 걸 읽어. 마음 속 깊이 있는 슬픔,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들. 모르겠어. 때로는 나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걸 읽어내기도 해. 그럴 때가 제일 괴로워. 내가 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껴야 되지?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사람들은 내 눈에서 그만큼을 읽어갈까? 난 내가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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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3: Boy, meet a girl

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차. 이건 너무 불공평해.”

그녀가 갑자기 파르르, 떠는 것이 보였다.

“세상이 너한테만 특별히 가혹한 건 아니야.”

난 할머니의 대사를 빌려왔다.

“너한테는 세상이 불공평하지 않아?”

나? 글쎄.

그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초능력이니 영매니 초자연이니 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고 남들보다 어떤 종류의 직관이 뛰어난 것이었다. 차분히 바라보면 너한테도 보일 거야. 그녀는 그렇게말했지만 난 지금까지 그런 것을 보지 못했고 그런 부분에 관해서는 체념을 하며 살고 있다. 일상적인 인간. 일상에 붙잡혀 지표면에서 단 1센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그게 나인 것이다. 혹은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이라고볼 수도 있겠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나도 내 안에 남과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면 하고 바라던 시기가 있었다. 내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무언가. 어린 시절 난 나에게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는 초능력을 달라고밤마다 하느님에게 기도를 했다. 레이저가 나가는 눈이라, 왠지 엄청나게 근사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한 능력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이의 눈을 보다가 레이저가 나가면 어쩔 것인가) 어쨌거나 난 그걸 가지고 싶었다.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요구사항의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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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4: Boy, meet a girl

소년, 소녀를 만나다.txt바뀌어갔지만 남에게 없는 무언가를 바라고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 시기에는 문학적 재능이기도 했고 어느 때에는 특출난 감성이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한 것이라고는 약간의 속물근성과비열함, 어느 정도의 선량함 뿐이었다. 거대한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던 다락방에서 보잘 것 없는 옷가지와 소소한 잡동사니들만이 나온 것이다. 당연히 난 실망했고자신의 평범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진정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늙어가며 늙어감이란 좋든 싫든자신에게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그게 일반론이다. 그리고 짜증스럽긴 하지만 일반론이란 대개의 경우 결국에는 진실인 것이다. 난 익숙해졌다. 그리고 편안해졌다. 난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의 사계로 함몰되어 갔고 오랜 시간그 세계에 길들여졌다.

그녀는 내가 가게에 처음 들어선 날 나를 ‘알았다’고 했다. (그녀가 ‘알았다’라는 건 나에 대한 거의 모든 걸 읽어냈다는 뜻이다) 내가 많이 뒤틀린 고아라는 것 (하긴 뒤틀리지 않은 고아가 있겠는가), 그로부터 자라나게 된 여러 감정들, 그런 것들을 읽어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게에 혼자 앉아 있던 그 날, 내가 자신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게 될 것이고 자신 안에 들어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가게 될 것을 느꼈다고 했다. 모, 든, 걸, 가, 져, 간, 다.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난 그 무서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내가 에이리언이 된 기분이다.”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다고 죽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차피 모든 것들이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견디기가 훨씬 쉬워져. 그것 중에는 쉬운 것도 있고서있지도 못할 만큼 힘든 것도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중간 과정일 뿐이야.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게 아닌,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머리가 가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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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5: Boy, meet a girl

소년, 소녀를 만나다.txt져.”

난 약간 감탄하며 그녀를 보았다.

“왜?”

“아니, 네가 그렇게 확신을 가지는 걸 처음 본 것 같아서,”

“그렇게 보였어? 모르겠다. 어쩌면 이건 확신이 아니라 고아들이 달고 다니는 지긋지긋한 고집 같은 걸 거야.”

“고아들의 고집이라,”

“아, 미안. 네가 그런 말 싫어하는 줄 알면서. 난 정말 네 말대로 한시도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나 봐.”

그녀는 입을 비죽거리며 커피 잔을 들었다. 진하고 뜨거운 커피 한 입, 담배 한모금, 그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우리가 고아인 건 사실인 걸.”

맞는 말이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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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

그녀와 내가 만났던 날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없다. 설명할 게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널려있는 수많은 연인들이 겪는 과정과 별 반 다를 것이 없었다. 때로는 지루할 만큼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또 어떤 부분은 생략해버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런 식으로 지내온 과정들, 그러나 결국 다른 연인들이 겪는 과정들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적당히 상처주고 적당히 상처를 받는 것. 그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가 나를 보며 울던 그날, 우리는 무언가를 확연히 깨달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이후의 시간은 그저 에필로그에 불과하다, 씁쓸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뭐 그런 종류의깨달음.

며칠 후 우리는 헤어졌다. 하늘이 민망할 정도로 맑게 개인 어느 날, 우리는 기억나지 않는 어느 벤치에 앉아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만나는 동안 난 말도 안되는 농담들을 읊어댔고 더 이상 농담을 읊을 기력이 바닥났을 때 입을 다물고 하늘만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내 표정도 그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순간이 그저 형식적인확인과정이라는 것을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 청량한 바람, 이별에 어울리지 않는 좋은 하늘, 서늘한 가을 공기, 그 속에 파묻혀 나란히 앉은 두고아. 별로 유쾌한 그림은 아니었을 것 같다.

결국 모든 것이 그녀의 예언으로 된 셈이었다. 난 그녀의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삶의 리듬을 깼으며 모든 것을 가지고는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고 (물론 추측이지만) 아마 어딘가에서 나에 대한 욕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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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14.

왜 모든 사랑은 처음과 끝만 흥미로운 걸까?

15.

어차피 이 글도 시시한 연애담일 뿐이겠지.

16.

그녀와 헤어지고 난 한번도 그 새벽시장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집과 그리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 굳이 찾아가지 않는 한 지나칠 수도 없었다. 그녀와 나의 공통의친구(라기보다는 공통의 아는 사람이 맞겠다)라도 해 봐야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던 사람들이었고 그 일을 관두고나서 난 그들 중의 한명도 볼 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내 안의 기억일 뿐, 그녀를 증거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가끔씩 내가 정말 그 시장에서 노가다를 했던가, 거기서 그녀를 만났던 것은 진짜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17.

사막, 난 이제 사막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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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8: Boy, meet a girl

소년, 소녀를 만나다.txt그녀와 나는 같이 있는 동안 사막을 꿈꾸었다. 말은 하지않았지만 서로의 머리 속에서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의 웅웅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발 등조차 보이지 않는짙은 농도의 바람들, 그 모래들, 어디에 있든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면 둥근 사구, 그 노란 등판 위에 올라 바람을 맞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와 내가 꿈꾸는 사막은 그 단순함으로 우리를 압도했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고독과 고요함, 창백하리만치 순수한 생존만이 있을 뿐이었다. 비스듬한 사면, 그 위를 기어오르는 도마뱀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살아갈수 있다. 사막은 그런 쓰라린 달콤함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했다. 이빨사이에 피비린내를 머금은 들개와 힘없는 천 조각으로 얼굴을 가린 가녀린 유목민 여인, 날이 선 언월도를 들고 적을 찾아 모래바람 사이를 헤메이는 유목민 전사와 그 아들을 말없이 눈으로만 좇고 있는 어미의 굽어가는 허리선. 이 모두를 묵묵히 응시하며 태고이래 한번도 변함없이 작열하고 있는 태양.

우리가 같이 자던 날, 그녀는 자신을 사막에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는 가쁜 신음소리에서 사막의 모래냄새가 났다. 난 뜨겁게 달궈진 모래를 가슴 가득 안은 것처럼 내 몸을 그녀의 안으로 파묻어 내려가다가 이윽고사라져버렸다. 내가 그날 안은 것은 분명 사막이었다. 등위에 켜진 형광등이 노란 태양처럼 이글거렸고 난 연신 뜨거워, 라고 속삭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 노인들의주름지고 윤기 없는 갈색 얼굴, 이윽고 떠오르는 파란 태양과 귀가 터질 듯한 적막.

그날 우리가 했던 것을 섹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난 언제인가 하얀 천을 온 몸에 감고 사구 위에 서있을 그녀를 꿈꾼다. 그 모습에 상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순수하게 단련된 것, 그것만이 그녀에게 속해있을 뿐이다. 두 발을 모래 위에 딛고 선 그 순간 이외에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그녀. 내 안에 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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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txt넣은 회색빛 문신, 난 이제 그녀를 사막이라고 부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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